경빈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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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헌종의 후궁. 궁호는 순화궁(順和宮)이다. 궁호가 있다는 데서 짐작이 가겠지만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수빈 박씨의 뒤를 이어서 역사상 마지막으로 무품 빈이다.[1]
광산 김씨이며, 아버지는 주부 김재청(金在淸), 어머니는 평산 신씨, 외할아버지는 신명하(申命河)이다.
2. 생애
헌종의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16세에 죽자, 새로운 왕비를 뽑기 위한 간택을 시작했다. 이때 김씨도 참여했는데, 헌종은 김씨를 좋아했으나 왕실 어른들은 홍씨가 더 마음에 들었다. 당시 국혼은 당사자보다 왕실 어른들의 뜻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었기에, 결국 홍씨가 계비(효정왕후)로 정해졌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일화는 야사가 확실한 것이, 당시의 승정원일기를 보면 초간택에 김재청의 딸은 보이지 않는다. 간택을 위한 처녀 단자에 이름이 없었으니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로맨스 소설 급.
실제로는 효정왕후가 새 왕비가 된 지 3년 후인 1847년(헌종 13)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의 명으로, 후궁 간택을 하게 된다. 이 때 김씨가 헌종의 후궁으로 최종 낙점, 경빈으로 책봉되었다.[2]대왕대비전이 조석형에게 전교하기를, 전 정랑 홍재룡(洪在龍)의 딸, 동몽교관(童蒙敎官) 윤규석(尹奎錫)의 딸, 부사과 신태운(申泰運)의 딸, 유학 서기순(徐麒淳)의 딸, 행 부호군 김공현(金公鉉)의 딸, 선공감 봉사 정기승(鄭基承)의 딸, 생원 박흥수(朴興壽)의 딸을 모두 재간택(再揀擇)을 들이고, 그 나머지는 허혼(許婚) 하라.
《승정원일기》 헌종 10년 4월 22일
헌종은 경빈 김씨를 총애했고, 그녀를 위해 창덕궁에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정조와 수빈 박씨의 처소를 서로 곁에 두어 순조를 둔 것을 따라한 것으로, 경빈 김씨가 후사를 낳기를 바란 뜻이다. 아마도 이 시기의 김씨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김씨는 궁궐을 떠나야 했다. 약 2년 간의 짧은 신혼을 누린 셈. 김씨는 궁궐을 떠나서 순화궁에서 살게 되었으나 왕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예우를 받는다.
경빈 김씨는 시할머니 순원왕후와 시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를 잘 모시고, 헌종의 왕비인 효정왕후에게도 예를 갖추며 조용히 살다가 1907년(광무 11)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고종황제는 그녀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조문(弔文)을 직접 지었다.
본인은 조용히 살았지만 사실 그녀의 노년기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심지어 대한제국 선포와 을사조약까지 근대 조선의 굵직굵직한 사건과 망국의 서막이 함께 열리고 있었다. 사망 한 달 후에는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경빈 김씨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