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루이스

 


'''이름'''
제리 루이스 (Jerry Lewis)
'''본명'''
조셉 레비치 (Joseph Levitch)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26년 3월 16일 / 미국 뉴저지
'''사망'''
2017년 8월 20일 / 미국 라스 베가스
'''신장'''
183cm
'''직업'''
코미디언, 배우
'''활동'''
1931년 - 2017년

제리 루이스는 할리우드에서 무언가 다른 영화를 만드는 유일한 감독이며, 특정한 범주, 규범이나 원칙에 빠져들지 않는 유일한 감독이다. 루이스만이 오늘날 용감한 영화를 만든다. 그의 개인적 천재성은 이를 가능하게 했다.[1]

장 뤽 고다르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작품 목록
5. 외부 링크


1. 개요


제리 루이스는 미국의 배우, 영화감독, 코미디언, 각본가, 자선 사업가이다. 이처럼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기 때문에 찰리 채플린과 비교되기도 하며, 딘 마틴과 함께 40~50년대의 코미디 쇼와 코미디 영화계를 휘어잡았고, 훗날 솔로 활동으로도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2. 생애


1926년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태어났으며 영화 업계에 입성하기 이전에는 보드빌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함께 활동했던 사람이 가수이자 배우였던 딘 마틴인데, 이 둘은 텔레비전이나 영화 출연을 통해 전국적 스타로 떠올랐다. 딘 마틴은 잘생긴 남자 역할을, 제리 루이스는 주로 바보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둘은 한때는 최고 흥행 배우 반열에 들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구가했다.
그렇지만 모종의 사유[2]로 딘 마틴과 루이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 뒤, 루이스와 마틴은 콤보를 해체한 후, 각자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루이스는 마틴-루이스 콤비와 함께 <화가와 모델>이나 <할리우드 오어 버스트>와 같은 영화를 찍은 바 있던 영화감독 프랭크 태슐린과 함께 일련의 코미디 영화를 찍게 되고, 이들 대다수가 히트하며 인기 배우 자리를 수성한다.
그러던 1960년, 그는 <벨보이>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고, 이로써 루이스의 두 번째 전성기가 시작된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레이디스 맨>이나 <너티 프로페서>가 이 시기에 감독되었다.
그는 1972년, 홀로코스트에 관한 첫 번째 영화인 <광대가 운 날 (The Day the Clown Cried)>를 감독하기로 했는데, 이 촬영 과정 중 여러 사건을 겪게 된다. 이 영화는 루이스가 처음으로 만든 정극 영화였는데, 시사실에서 지인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각본가와의 갈등은 물론이고, 자금 조달에까지 어려움을 겪게 되자 결국 프로젝트는 좌초되고 만다. 이후 루이스의 평판은 극도로 나빠졌고, 그 다음 작품들도 하나둘 실패하게 되자 영화계에서 그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그러던 중 루이스의 팬이던 마틴 스콜세지가 <코미디의 왕>에서 제리 랭포드 역으로 루이스를 캐스팅한 후 그는 재조명받기 시작한다.
루이스는 <크래킹 업>을 감독한 이후로 영화 감독으로서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는 배우로 활동하거나 근위축증 환자들을 위한 자선 사업이나 토크쇼 진행 등을 하며 살았다. 그는 2017년 세상을 떠났다.

3. 기타


생전에 미국 평단에서는 '멍청한 영화나 만드는 코미디언' 취급을 받았지만 프랑스에선 작가주의 영화감독으로 대접받았다.[3] 특히나 장 뤽 고다르[4]를 필두로 한 카예 뒤 시네마 필진의 사랑을 받았다. 무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슈발리에와 코망되르를 수여받았을 정도. 이러한 프랑스의 루이스 사랑은 조너선 로젠봄이나 크리스 후지와라 같은 평론가들에 의한 미국 내에서의 루이스 재평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주로 미국 사회의 마초성이나 신체적 허약함, 신체의 변형 등을 코미디 소재로 다뤘으며, 이는 대다수의 루이스 영화에서 주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루이스는 또한 일인 다역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보석 같은 가족>에서는 무려 1인 7역을 소화했을 정도.
그의 작품 중 <광대가 운 날>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와 같이 홀로코스트를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가 나오기 한참 전인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위에서도 언급된 사유로 결국 영화는 좌초되었다. 루이스는 한 인터뷰에서 다시는 이 영화를 보고 싶지 않고 결코 공개되지도 않을 거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렇지만, 루이스는 죽기 얼마 전 필름을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하였다. 단, 2024년 6월까지 상영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현재는 나쁜 상태의 클립 몇 개 정도만이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정도다.[5]
딘 마틴과 제리 루이스는 모종의 불화로 절교하게 되었다. 1956년부터 일절의 교류도 없었다. 확실한 건 둘의 다툼이 잦았다는것. 이 둘은 20년만에 프랭크 시나트라의 도움으로 제리 루이스의 펀드 쇼 라이브[6]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당시 1976년도. 쇼의 게스트인 시나트라가 비밀리에 기획한것이다. 딘 마틴은 당시 탈의실에 숨어있었다. 잠시 후 딘 마틴과 재회한 제리 루이스는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시나트라에게 Son of a Bitch라고 조용히 욕을 했다. 장난이였기에 뒷탈은 없었지만. 둘의 불화에 관해선 여기서 유저들의 꽤 그럴싸한 추측들을 볼 수 있다.[7] 이게 20년만의 공식적인 Reunion이라고 하지만 이 영상의 댓글만 읽어보면 불화이후에도 전화 통화나 에디 피셔 쇼에 함께 출현한적이 있다는둥 불화의 이유만큼이나 불확실하다.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뉴스에서는 이게 처음이라고 한다.


4. 작품 목록


감독 작품만 기술한다.
<벨보이> (1960)
<레이디스 맨> / <심부름 소년> (1961)
<너티 프로페서> (1963)
<팻시> (1964)
<보석 같은 가족> (1965)
<쓰리 온 어 코치> (1966)
<빅 마우스> (1967)
<원 모어 타임> / <위치 웨이 투 더 프론트> (1970)
<광대가 운 날> (1972)[8]
<하들리 워킹> (1980)
<크래킹 업> (1983)

5. 외부 링크


제리 루이스 입문 가이드
제리 루이스의 작품세계

[1] 출처[2] 모두 추측일 뿐이지만 http://www.todayifoundout.com/index.php/2012/11/why-dean-martin-and-jerry-lewis-split-up/ 여기에 가장 그럴싸한 추측들이 있다. [3] 미국에서 이는 종종 조크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4] 고다르는 루이스를 몹시 존경했으며, <만사형통>에서 세트를 통해 <레이디스 맨>에 오마주를 바치기도 했다.[5] 이 영화를 본 몇 안되는 사람인 프랑스 영화 평론가 장 미셸 프로동에 따르면 걸작이라고 하니 루이스 팬이라면 기다려보자...[6] 정식 이름은 Telethon. 모금을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7] http://www.todayifoundout.com/index.php/2012/11/why-dean-martin-and-jerry-lewis-split-up/[8] 미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