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뤽 고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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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Luc Godard'''
장뤽 고다르
(1930. 12. 3 - )
'''" 진정한 천재는 단 한 편의 걸작만으로도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
1. 개요
프랑스의 영화 감독, 영화 평론가.
누벨바그의 핵심 인물이며, 여러 혁신적인 업적과 시도로 '''영화 혁명가'''라 불린다.
누벨바그의 카예 뒤 시네마 출신 감독 5명 중에서 마지막 생존자이자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누벨바그 멤버이기도 하다.
2. 소개
일생에 걸쳐 영화의 최전방에 서서 영화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자신이 만드는 영화 그 자체를 통해서 열변하고 있는 가장 열정적인 '''영화 혁명가'''. 또한 현대 영화의 시작점으로 평가받기도 한다.[1]영화는 영화라는 이름을 가진 고유의 예술장르이고, 그것은 문학적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깔끔하고 명료하게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표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2] 그래서 카메라와 음향을 통해 다른 예술 장르로 할 수 없는 표현들을 만들기 위해 무한한 실험을 했다. 고다르가 수행한 영화의 문학으로부터의 독립, 혹은 혁명을 짧은 글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이유로 고다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다. 정규교육을 받아온 사람이라면 문학적 관습을 벗어나야만 느낄 수 있는 그의 영화를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 뤽 고다르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자와 총이 전부다."라고 말했다. 사실 고다르의 초중기 영화에는 치정문제가 줄거리에 나오거나, 총이 소품으로 등장하는게 많다. 그러나 후기에 오면서는 항상 최전위에 서있는 사람답게 영화의 형식뿐만 아니라 소재면에서도 매우 다양화하여 영화사를 영화로 만든다거나,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등의 시도도 하고 있다.
3. 일생
그는 부유한 파리지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에게 독일의 낭만 시나 이해하기 어려운 프랑스 소설들을 읽게했다. 2차 대전동안은 스위스의 가족 저택에서 지냈다. 전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중심으로 한 영화클럽에 가입했다. 프랑소와 트뤼포나 클로드 샤브롤, 앙드레 바쟁, 에릭 로메르 등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들은 3년간 약 2천 여편이 넘는 영화를 보며, 열띤 토론을 볼였다. 오후내내 영화를 다섯편이나 보면서, 각 장르마다 스타일과 형식을 이해하려 노력'''했'''다.[3] 그리고 자기가 분석한걸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했다.
원래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영화 잡지의 평론가였다. 집세를 내기 위해 친척들이나 동료직원들의 '''돈을 훔쳤다.''' 고다르의 아버지는 보석금으로 아들을 꺼내서 잠시 정신요양원에 보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부유한 집안과 결별했다. 그뒤로 스위스의 댐 공장에서 일했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댐공장에서 일할 때 찍었던 영화가 그의 첫 영화 '콘크리트 작전(Operation Beton, 1954년작)'이다. 그는 평론가를 하면서도 영화를 만들 마음이 있었다. 그랬기에 이후 자신이 영화를 찍을 때를 대비해 사실상 견습용으로 만들게 된 것인데, 그런 의미로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라 대단한 내용은 없고 댐 공장에서 어떤 식으로 건설일을 하는지 담은 정도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이후 나온 수많은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고다르 특유의 나레이션과 편집방식의 기미가 조금 느껴지기는 한다. 20세기 폭스의 파리 지사에서 언론 홍보로 일하기도 했다.
1960년에서 68년까지 14편이나 만들었지만, 금전적 수익을 가져온건 하나도 없었다.[4] 그럼에도 그가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는건 프랑스 정부의 재정지원이 있기 때문. 프랑스는 예술을 중요시해서 그를 비롯한 영화감독들에게 재정지원을 해준다. 결코 충분한 재정지원을 받은 건 아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제작비가 부족해 전문 음향기사를 구하지 못한 적도 있어서 영화에 쓸, 일상 생활 소음과 효과음을 녹음하기 위해 종종 아파트 아랫집에 몰래 녹음 장치를 갖다 대고 청소나 설거지하는 소리, 그러면서 그 집 아줌마가 중얼거리는 소리 등을 훔쳐 녹음하기도 했다. 실제 프랑스 정부가 영화인들에게 하는 재정 지원 기준은 '시나리오'였는데 영상과 음향 충돌 및 조화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고다르의 영화 스타일상 내러티브와 스케일 정도만 알 수 있는 시나리오만으로는 영화를 대부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영화인이고 당시 프랑스가 먼 과거부터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좋은 나라였다 해도, 시나리오를 중점적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영화에 대한 근본적 보수성은 어쩔 수 없었기에 그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지는 않았다.
1960년 '네 멋대로 해라'로 쿠엔틴 타란티노 수준의 충격적인 데뷔를 한 뒤, 수많은 영화를 발표했다. 대본없이[5] 찍었으며, 점프컷을 자주 사용한걸로 유명하다. 초창기에는 1930년대 헐리우드 영화에 영향을 받은 듯한 스토리와 파격적인 연출의 영화였다면, 이후 영화는 마르크스주의와 68운동에 경도되었으면서도 팝 아트적인 스타일리시를 공유하는 영화를 보여준다. 이후 지하세계로[6] 파고 들어가 특이한 영화들을 줄창 만들어 냈다.[7] 그러나 혁명과 투쟁 정신이 더 이상 세상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 고다르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인생)'으로 지하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상업영화계[8] 로 돌아왔고, 그 이후에는 정치색을 약화시키고 좀 더 예술성에 경도된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보는 재미는 거의 없다. 그래서 영화학도들에게는 가히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존재다. 위대하기도 하지만 짜증감도 안겨주기 때문. 그러나 정성일은 고교 시절 고다르의 영화 '기관총 부대'를 프랑스 문화원에서 처음보고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고, 고다르 영화를 한편이라도 더 보려고 계속 프랑스 문화원 상영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심지어 순수 영어자막 뿐이라 정확히 뭔 내용인지도 몰랐음에도 그 카메라의 움직임들을 따로 느낀 순간 그것만으로 기쁘고 재미있었다 한다.
그래도 현대 영화를 이야기 할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영화란 "현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문학과는 다른, 또한 다른 예술장르와는 구별되어야 할 고유의 장르"라는 개념에 충실하였다. 영화사에 가장 강한 혁명을 보여준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촬영을 계획하며 렌즈를 선택할 때도 그 영화만의 속성이 부각되는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미국 한 대학에서 강연할때, 한 학생이 그를 가리켜 "우리에게 그는 밥 딜런과 마찬가지로 절대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안타까운 부분은 그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는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럴 사람이 있었는데, 단순 육체노동자 출신으로 고다르의 연출부 생활을 시작하여 조연출까지 하다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장 으스타슈'(Jean Eustache)라는 감독이었다. 그는 '포스트 누벨바그'라 불리며 그의 혁명 후계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상태였다. 고다르와 누벨바그의 동료들도 인정했던 훌륭한 작품[9] 도 어느 정도는 남겼는데, 자금 사정 때문에 대부분 단편영화였고 장편은 단 두편 뿐이다. 안타깝게도 더 예술 세계를 뻗어가야 할 시점에 장기간 생활고에 시달려[10] 4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11] 을 선택했고, 결국 그로 인해 제대로 된 후계자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영화인생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12] 고다르도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물론 그가 남긴 몇몇 작품만으로도 훌륭하다는 평가는 받고 있으나, 7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어낸 고다르처럼 그가 긴 영화인생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포스트 누벨바그의 움직임을 단편적으로 만든 중요한 요인이고 안타까운 점이다.
영화감독을 "작가"로 칭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가 인정한 최초의 작가 감독은 할리우드 스릴러의 대가인 알프레드 히치콕이었다. 정작 당시 히치콕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영화 감독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영화 찍는데 필요한 기술자들을(촬영, 조명, 음향, 미술 등) 감독하는 관리자' 정도의 인식이었다.[13]
가장 좋아했던 영화감독은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라고 한다.[14] 어떤 기자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 3명이 누구냐고 묻자 '미조구치, 미조구치, 미조구치'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그리고 미조구치 겐지가 살았거나 영화촬영했던 지역을 보기 위해 일본여행을 갔고, 이는 일본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고다르가 방문했던 지역 중에는 그가 와서 찍었던 사진들을 전시해놓은 경우도 있다. 그만큼 그의 영화를 좋아했던 걸로 보인다. "미조구치는 '크레인 숏'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로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에서 크레인 숏 방식으로 찍은 롱테이크 장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 고다르 영화에는 미조구치 겐지의 카메라 워킹을 오마주하여 촬영한 장면들이 꽤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은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의 마지막 엔딩 장면[15] 이다.
미국 감독으로는 니콜라스 레이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평론글에 '영화는 니콜라스 레이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고..
이탈리아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 알제리 전투가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자 다른 프랑스 영화인들과 같이 반발하여 즉각 퇴장한 바 있다.[16]
2000년 초반, 한국 인터넷에서 그가 잠을 자다 급사했다고 헛소문이 나와 많은 사람들이 낚인 바 있다. 몇몇 예술 영화동호회 모임에선 그의 죽음을 기리며 명복을 비는 건배를 했다. 이 낚시가 통한 게 1999년 잠을 자다 갑자기 급사한 스탠리 큐브릭이 죽은 지 얼마 안되어서였다.[17]
4. 성격
주로 도서관과 박물관에서 지식을 습득했고 스스로를 박물관의 아이라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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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트뤼포와는 서로 끔찍이 아끼던 절친이었는데, 1970년대부터 갑자기 견원지간이 되어버렸다.(...) 고다르가 마르크스주의로 변한 탓이라고 혹자들은 보고 있다. 결정적인 계기가 아메리카의 밤 시사회였다고 하는데, 고다르는 영화를 역겹다고 까대자 트뤼포가 반발하면서 틀어졌고 이 이후론 완전히 절교해 죽을때까지 서로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18] 이에 대해선 두가지 소문이 있는데 원래 영화에 대해 계획된 내용을 고다르와도 상의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계획과 이후 실제 찍기 시작한 후의 영화 내용이 너무 많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된 고다르가 실망하고 분노해서 출연하기로 한 것도 안 하고 비난했다는 설과, 고다르가 특별출연하기로 한 걸 트뤼포가 취소시켜서 그냥 이에 분노했다는 설, 이 두가지다.[19]
서로 원수가 된 후엔, 언제 친구였냐는 듯 서로를 헐뜯었다. 트뤼포가 고다르의 자서전 제목으로 "'''한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를 추천해줬다고. 고다르는 나중에 트뤼포가 뇌종양으로 죽어가자, '''"그렇게 나쁜 책을 많이 읽어서 그래."'''라고 깠다.[20]
로만 폴란스키가 고다르를 누르고 각색권을 차지한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흘러 찰스 맨슨 사건이 일어나자 '''"세상에…거봐…나한테서 각색권을 빼앗아가더니만…"'''이라 말했다.
5. 대표작
- 샤를로트와 베로니크, 혹은 모든 남자의 이름은 패트릭이다(Charlotte et Veronique, ou Tous les garçons s'appellent Patrick, 1959)
-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 1959)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주인공이 총맞아 죽어가며 하는 대사 "역겨워…"가 유명하다.[30] 심지어 주인공은 이 말을 하면서 죽을 때 자기가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감게 하면서 죽는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이런 남자주인공을 보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노려 보며 "역겹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다른 행인에게 물어보더니 떠나버린다.
- 미치광이 피에로 (Pierrot le fou, 1965)
- 여자는 여자다 (Une Femme Est Une Femme, 1961)
-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1962)
- 경멸 (Le Mepris, 1963)[31][32]
- 기관총 부대 (Le Carabiniers, 1963)
- 작은 병정 (Le Petit Soldat, 1963)[33]
- 국외자들 (혹은 외부자들, Bande A Part, 1964)
- 알파빌 (Alphaville, 1965)
- 중국 여인 (La Chinoise, 1967)[34]
- 주말 (Le Week-end, 1967)
- 넘버 투 (Numero Deux, 1975)[35]
-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Sauve Qui Peut(La Vie), 1980)
- 영화사(들) (Histoire(s) Du Cinéma, 1998)
- 아워 뮤직 (Notre Musique, 2004)
- 필름 소셜리즘 (Film Socialisme, 2010)
-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3D, 2014)
- 이미지 북 (2018)
6. 여담
- 페루의 대통령인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의 사촌이다. 쿠친스키의 모친이 고다르 가문 출신이라고.
- 그의 사생활은 무척 금욕적이었다. 마약을 한 번도 한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담배에만은 예외적이라 골초다.
- 스티븐 스필버그를 싫어한다. 고다르왈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모른다. 또, 그의 영화가 그리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현재까지도 사람들 눈에 잘 안 띄고 은둔해 사는 걸로 유명하다. 스위스에 있는 자택의 모든 문과 창문은 단단히 잠겨있고, 초인종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한때 친분이 있던 누벨바그 감독 아녜스 바르다가 직접 자택까지 찾아갔지만, 역시 문을 걸어잠근 채 문 앞에 적어둔 암호를 통해 만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 한때 부인이였던 배우 안나 카리나가 "같이 있으면 무척 짜증나지만, 떨어져 있으면 흥미롭고 재미있는 사람"이라 칭했다
- 2017년 그의 생을 다룬 영화인 <네 멋대로 해라: 장 뤽 고다르>가 개봉했다. 감독은 <아티스트>로 유명한 미셸 아자나비시우스.[39]
- 잉마르 베리만은 고다르를 건질만한 게 전혀없고 지적인 척이나 하고 무의미한 하며 재미도 없고 지루하며 따분한 감독, 비평가들이나 보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 말했다. #
7. 필모그래피
8. 외부 링크
MBC FM4U - 정성일, 이주연의 영화음악
[1] 대표적으로 '영화사는 고다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가 진정한 서사영화의 시작점이라면, 고다르는 그 영화사의 흐름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첨가한 현대영화의 시작이라는 평가다.[2] 실제로 그런 문학적 영화사조에 반하는 생각을 자신의 영화를 통해 표현한 적이 많은데, 1963년작 '경멸'(Le Mepris)에서는 오프닝 크레딧에 '장 뤽 고다르 연출'이라 쓰지 않고 "장 뤽 고다르가 '''작곡'''한 영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3] 고다르는 이러한 특성들을 이해하지 못 해 장르적이지 않은 영화를 찍은 것이 아니라, 그런 기존 영화들이 단순화하여 답습하고 있던 스타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자신의 영화관을 구축한 것으로 봐야한다. 이런 태도는 고다르 영화 전체의 태도나 다름 없음을 기억해야할 필요는 있다. 애당초 기존 장르 영화들을 분석했다고 해서 그것들과 똑같이 찍을 필요는 '''당연히 없다.'''[4] 큰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이지, 흥행을 아예 못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몇몇 영화는 예술적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68혁명의 전조를 보이던 당시 프랑스의 흐름을 타고 예술영화치고 굉장히 흥행했다. 그러나 그 번 돈으로 다음 영화를 제작할 만큼의 수준이 안 된 건 사실이다.[5] 정확히는 스토리보드가 없다는 게 맞다. 단지 그의 시나리오가 전통적 영화제작의 관점에서 디테일이 많이 부족한 정도라서 무시당할 뿐, 분명히 기본적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는 있었다. 물론 대본에 없는 장면이나, 대본과 다르게 찍은 장면도 꽤 있다 하지만. 일단 스토리보드는 없었고 시나리오는 있었다.[6] 단적으로 필름을 버리고 비디오로 촬영했다.[7] 이 시기는 진짜 하드코어한 영화 매니아들만 볼 수 있는 영화들로 이뤄져 있다.[8] 잘 팔리는 영화라는 얘기가 아니라 구경거리로서의 영화, 즉 자본에 의해 돌아가는 영화를 만한다[9] '엄마와 창녀'라는 유명한 작품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0] 당시 68혁명이 끝난지 꽤 시간이 흘러 누벨바그의 흐름 역시 힘을 잃고 그 성향의 영화들이 점점 흥행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역시 흥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11] 프랑스 영화계에서는 이는 단순한 생활고 탓이 아니라 부인의 자살로 충격 받아 우울증에 걸린 영향이 더 크다는 소문이 있었다. 생활고는 있었으나, 으스타슈는 영화인 되기 전 젊었을 때 막노동이나 청소부도 하면서 더 힘든 경제적 상황도 많이 겪었던 편으로 알려져 있어 단순 생활고 탓이라 보기 힘들다. 실제로 으스타슈가 자살하기 몇년 전에 그의 부인이 자살했는데, 소문으로는 남편인 으스타슈가 만든 영화 '엄마와 창녀'를 보고 자신과 남편 관계의 심연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아 우울증에 걸려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자세한 진상조사를 할 수 없는 부분이라 명확하게 증명된 사실을 알 수는 없겠지만, '엄마와 창녀'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유추는 가능하다. 제목을 보면 진짜 엄마와 창녀가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고 한 남자주인공과 그와 육체적, 정신적 내연관계에 있는 두 여자주인공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이고, 남자주인공이 각각의 여성의 집에 찾아가 침대에 둘이서 함께 누워 대화하는 장면이 대부분인데, 여기서 적나라한 남녀관계의 속마음 같은 것이 대사로 나온다. 말하자면 한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의 '엄마'(정신적 남녀관계)의 비유되는 역할, 다른 한명은 '창녀'(육체적 남녀관계)에 비유되는 역할이라는 뜻이다.(그러나 실제로 창녀처럼 다룬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다.) 이 영화의 가치가 인정받는 것도 그 대사내용들이 프랑스어 특유의 뉘앙스와 어우러져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인데, 어쨌거나 내용이 적나라한 부분이 있고 그것이 자기 남편이 만든 영화이고 자기와의 관계와 닮은 부분을 찾았을 수 있으니 어떤 성격의 여성이든 혹은 사람이든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흥행이 안 돼 생긴 생활고'와 '아내의 자살로 생긴 우울증' 두가지가 다 작용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12] 그는 누벨바그 감독 중 유일하게 지식인이 아닌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누벨바그의 흐름에 가장 걸맞는 사람이었고, 가장 그 계급의 내면을 잘 담아낸 부분도 인정받고 있는 작가이다.[13] 히치콕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14] 당연히 그도 고다르가 작가감독으로 인정한 사람 중 하나이다.[15] 주인공이 절벽에서 자기 얼굴에 폭약을 대량으로 두르고 스스로 불을 붙여 자폭하는데, 자폭하는 순간을 보여줄 때 익스트림 롱 숏으로 굉장히 멀리서 찍는다.[16] 당시 프랑스 영화인은 한 사람 프랑소와 트뤼포만 남아 손뼉을 치면서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트뤼포는 프랑스 언론에게 엄청나게 비난당했지만 트위포 본인은 신경도 안 썼다.[17] 거기다가 큐브릭과 고다르는 나이대가 비슷하다. 큐브릭이 두 살 형이다.[18] 실제로 영화 세계도 누벨바그 이후론 상당히 극과 극으로 변했다. 고다르는 장 피에르 고랭과의 협연 등으로 정치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급진적이고 난해한 영화를 만들었다면 반대로 트뤼포는 대중적이고 고전 위주의 영화를 만들었다.[19] 실제로 이 영화는 누벨바그 추종자들 사이에서 누벨바그 고유의 정신을 버린 영화로 평가받아 비난받기도 했다.[20] 그래도 한편으로는 "우리(누벨 바그 감독들)는 이제 우리의 가장 믿음직스러웠던 보호막을 잃어버렸다."는 말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했다. [21] 이 영화가 가장 잘 알려진 단편영화라서, 고다르의 최초 영화라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전에 이미 '콘크리트 작전'과 '요염한 여인'을 연출했다.[22] 먼저 온 샤를로트가 공원에서 기다리다가 패트릭에게 헌팅을 당해서 다른 곳으로 이끌려 가는데, 나중에 온 베로니크가 샤를로트가 없으니 조금 기다리다가 3시가 다 되다 보니 '안 오나 보다'하고 가려 한다. 이때가 패트릭이 샤를로트와 내일 만나기로 약속까지 하고 헤어지게 되는 시점인데 겉옷을 갈아입고 그 공원으로 돌아가다 공원 정문 앞에서 베로니크를 마주쳐서 또 헌팅한다.[23] 중간에 두 여주인공이 함께 외치는 대사가 영화 제목과 같다. "모든 남자들의 이름이 패트릭이네!!"[24] 여주인공들은 극중에서 서로 자신은 품위있는 남자들만 만났다고 하며 농담인 듯하면서도 진지하게 자랑한다.[25] 심지어 같은 동네에서 작업을 하기 위한 대책인지 한명 꼬시고 나서 바로 옷을 갈아입는다. 거기다가 처음 본 여자한테 작업하는 거면서 '1달동안 지켜봤어요.' '1년동안 지켜보다 힘들게 말 거는 거에요.'라 허풍도 친다.[26] 패트릭은 처음에 모른척 무시하는 여자에게 집요하게 빠른 속도로 말을 거는 것도 모자라서, (지리학 책을 들고 다니는 걸로 보아) 지리학 전공 대학생으로 보이지만 법대생이라고 했다가 공대생이라고 하면서 쉬지 않고 뻥을 치다가 장난처럼 입맞춤까지 한다[27] 미조구치 겐지에 대한 애정이 보이는 장면이 있다. 극 중 여주인공 중 한명인 샤를로트가 혼자 책을 읽는데 작업을 걸러 온 남자 패트릭이 계속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자 '외국인이냐?'라며 영국? 스웨덴인? 노르웨이? 핀란드? 독일인? 다 묻는데도 반응이 없자 누가 봐도 금발 유럽사람인 그녀에게 '아하 역시 일본인이시구나?'라고 물으며 '미조구치…구로사와…'라는 대사를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당시 유럽에서도 외국인치고는 꽤 평가받는 일본 영화인이었지만, 미조구치 겐지는 그정도는 아니었음에도 고의로 미조구치를 앞에 넣은 고다르의 의도가 보인다.[28] 이는 프랑스 관객들에게 "너희들도 우리한테 데이트신청해볼래? 너희들도 이러고 살지?"라는 위트섞인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혹은 고다르 자신을 대신하여 여배우가 "관객 당신들이 계속 내 상대(관객)가 되어주겠다면 영화를 계속 만들어서 보여주지"라는 입장을 보여주는 뜻일 수도 있다. 당연히 그 외의 여러 메시지로 해석 가능하다.[29] 물론 고다르가 모든 영화를 찍었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은 단순한 사회적 메시지가 아니라 '존재'나 '이미지'를 언어와 접합시킬 수 있는가, 영화 구성요소의 우열관계를 가릴 수는 없지 않는가 등 영화적이면서 기호학적인 개념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확인하려는 무한한 실험에 가깝다.[30] 안노 히데아키의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마지막 장면에서 아스카가 한 대사가 이 대사 오마쥬라는 이야기가 있다.[31] 놀랍게도 대감독인 프리츠 랑도 여기에서 배역을 맡았다. 무려 본인 역으로.[32] 참고로 여주인공 역 배우는 브리지트 바르도(...)다. (이 당시엔 탑급 미인 이미지의 여배우였다.)[33] 알제리 전쟁을 간접적으로 다뤘는데, 그 때문인지 프랑스 당국의 검열에 걸려서 원래는 1960년에 만든 영화가 3년 동안 상영금지를 당해서 1963년에서야 개봉되었다.[34] 마오이즘에 경도된 젊은이들을 다룬 영화. 당시 장 뤽 고다르도 마오이즘에 푹 빠져있었고, 마오이즘의 반관료주의는 68혁명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 보면 다소 아스트랄할수 있는 작품(...).[35] 장 뤽 고다르가 나와서 평범한 부부의 일상을 비디오로 분석하는 영화지만, 네 멋대로 해라의 리메이크 작이라고 말했다. 검열삭제에 대한 언급이나 행위등이 나오니 성인용이다.[36] 촬영에 사용된 카메라는 캐논 5D 마크-II 2대와 3D 촬영이 가능한 휴대폰 소니 MHS-FS3. 두 대의 DSLR을 사용했기에 3D로 관람할 시 양쪽 눈의 초점이 달라 눈이 피로한 장면들이 있다. 의도한 것인지는 불명.[37] 역대 최고령 심사위원상 수상자이다. 공동수상한 자비에 돌란은 역대 최연소 수상자다.[38] 공교롭게도 2018년 칸 영화제 포스터 역시 미치광이 삐에로였다.[39] 고다르는 이 영화에 대해 '참 멍청한 아이디어다'라고 코멘트했다...[40] 고다르와 함께 계획했던 <오전 한 시>는 미국 영화를 뜻하는 One American Movie의 약자로, 도중에 고다르가 떠나고 작품의 제목은 <오후 한 시>로 바뀌게 되었다. 새 제목은 평행영화를 뜻하는 One Parallel Movie의 약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