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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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사지는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백제의 절터 유적으로, 왕궁리 유적에서 1k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다. 1998년 5월 12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제석사라는 명칭을 봤을 때 금당에는 불교와 불제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모신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된 시기는 인근의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무왕 재위기로 추정되었으나 출토된 유물들 중에 무왕 재위기보다 앞선 위덕왕 재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인장기와가 출토되면서 창건 시기가 앞당겨질 가능성이 생겼다.[1] 제석사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관세음응험기』가 있는데, 이 문헌에는 무광왕이 익산 지역으로 천도한 뒤 제석정사를 지어 경영했다고 쓰여 있다. 초기에는 이 문헌의 제석정사가 제석사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후에 해당 문헌이 왕궁리 유적에 절터가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로도 사용되었고 내용 중에 왕궁리 유적 출토 유물과 어느정도 일치하는 것이 있어 현재로서는 문헌 속의 제석정사가 정확히 어떤 절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제석사지는 1993년에 이뤄진 시굴조사로 1탑 1금당식의 배치가 확인되었고, 조사 중에 ‘제석사’명 명문 기와가 나와 무슨 절이 있었는지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7세기 경의 백제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후 2003년부터는 예전까지는 가마터로 알려져 있던 곳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뤄졌고, 조사 결과 7세기 경의 연화문 수막새와 소조상의 파편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곳이 가마터가 아닌 폐기장이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본격적인 조사는 총 3차례에 거쳐서 이뤄졌다. 2007년부터 시작된 첫번째 조사서는 절의 중심부인 목탑, 금당, 강당의 터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으며, 2008년부터 시작된 두번째 조사서는 중문, 회랑, 양쪽의 부속건물의 터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2011년부터 이뤄진 마지막 조사서는 승방의 터로 추정되는 곳 등 그간 조사하지 않았던 곳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조사 과정에서는 발굴이 완료된 곳들을 잘 정비하면서 가능한만큼 그 영역을 점점 넓혀 갔고, 특히 목탑지의 경우 두 동강난 채로 한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던 심초석을 도로 합쳐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조사 결과 목탑, 금당, 강당을 제외하고도 중문, 동서 회랑, 동서 부속건물, 승방 등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전체 사역의 면적은 같은 양식의 동시대 백제 사찰들 중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절의 중심 건물인 목탑, 금당 등의 터를 조성하는 방식이 서로 비슷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일단 건물을 지을 땅을 상태에 따라 달리 파내어 기단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다음, 거듭하여 판축 기단을 높게 축조하는 방식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외에도 목탑지와 금당지 사이의 서쪽 공터에서는 크기와 조성 방식이 목탑지와 비슷한 방형 건물터가 새로 확인되면서 제석사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새로운 단서로 쓰일 것으로 보이는데, 이 건물터와 목탑지의 네 모서리서는 기단의 기초를 조성하기 위한 작업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지하통로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한편 위의 폐기장 외에도 다양한 곳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주로 금당지와 목탑지의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출토된 유물들 중에서는 기와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인동당초문 암막새와 연화문 수막새, 통일신라시대의 명문와, 인장와 등 종류가 꽤나 다양했다. 이외에도 치미 등이 출토되면서 이를 통해 제석사의 조성 및 운영 시기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익산시서는 이 유적이 인근의 미륵사지나 왕궁리 유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제석사지에 대한 정비사업을 추진 중이며, 발굴조사는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당시 제석사지는 민가 등이 세워져 있어 바로 시작할 수는 없었고, 토지를 매입하고 방해되는 것들을 치우고 나서야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다만 아직도 남은 민가가 많아 터를 완전히 발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아예 절 자체를 복원하려는 계획도 있었던 듯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알 수 없으며, 대신 국립익산박물관 익산백제실에서 복원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1. 개요
제석사지는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백제의 절터 유적으로, 왕궁리 유적에서 1k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다. 1998년 5월 12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2. 명칭의 의미
제석사라는 명칭을 봤을 때 금당에는 불교와 불제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모신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된 시기는 인근의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무왕 재위기로 추정되었으나 출토된 유물들 중에 무왕 재위기보다 앞선 위덕왕 재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인장기와가 출토되면서 창건 시기가 앞당겨질 가능성이 생겼다.[1] 제석사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관세음응험기』가 있는데, 이 문헌에는 무광왕이 익산 지역으로 천도한 뒤 제석정사를 지어 경영했다고 쓰여 있다. 초기에는 이 문헌의 제석정사가 제석사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후에 해당 문헌이 왕궁리 유적에 절터가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로도 사용되었고 내용 중에 왕궁리 유적 출토 유물과 어느정도 일치하는 것이 있어 현재로서는 문헌 속의 제석정사가 정확히 어떤 절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3. 발굴조사
제석사지는 1993년에 이뤄진 시굴조사로 1탑 1금당식의 배치가 확인되었고, 조사 중에 ‘제석사’명 명문 기와가 나와 무슨 절이 있었는지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7세기 경의 백제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후 2003년부터는 예전까지는 가마터로 알려져 있던 곳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뤄졌고, 조사 결과 7세기 경의 연화문 수막새와 소조상의 파편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곳이 가마터가 아닌 폐기장이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본격적인 조사는 총 3차례에 거쳐서 이뤄졌다. 2007년부터 시작된 첫번째 조사서는 절의 중심부인 목탑, 금당, 강당의 터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으며, 2008년부터 시작된 두번째 조사서는 중문, 회랑, 양쪽의 부속건물의 터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2011년부터 이뤄진 마지막 조사서는 승방의 터로 추정되는 곳 등 그간 조사하지 않았던 곳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조사 과정에서는 발굴이 완료된 곳들을 잘 정비하면서 가능한만큼 그 영역을 점점 넓혀 갔고, 특히 목탑지의 경우 두 동강난 채로 한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던 심초석을 도로 합쳐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조사 결과 목탑, 금당, 강당을 제외하고도 중문, 동서 회랑, 동서 부속건물, 승방 등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전체 사역의 면적은 같은 양식의 동시대 백제 사찰들 중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절의 중심 건물인 목탑, 금당 등의 터를 조성하는 방식이 서로 비슷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일단 건물을 지을 땅을 상태에 따라 달리 파내어 기단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다음, 거듭하여 판축 기단을 높게 축조하는 방식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외에도 목탑지와 금당지 사이의 서쪽 공터에서는 크기와 조성 방식이 목탑지와 비슷한 방형 건물터가 새로 확인되면서 제석사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새로운 단서로 쓰일 것으로 보이는데, 이 건물터와 목탑지의 네 모서리서는 기단의 기초를 조성하기 위한 작업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지하통로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한편 위의 폐기장 외에도 다양한 곳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주로 금당지와 목탑지의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출토된 유물들 중에서는 기와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인동당초문 암막새와 연화문 수막새, 통일신라시대의 명문와, 인장와 등 종류가 꽤나 다양했다. 이외에도 치미 등이 출토되면서 이를 통해 제석사의 조성 및 운영 시기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익산시서는 이 유적이 인근의 미륵사지나 왕궁리 유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제석사지에 대한 정비사업을 추진 중이며, 발굴조사는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당시 제석사지는 민가 등이 세워져 있어 바로 시작할 수는 없었고, 토지를 매입하고 방해되는 것들을 치우고 나서야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다만 아직도 남은 민가가 많아 터를 완전히 발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아예 절 자체를 복원하려는 계획도 있었던 듯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알 수 없으며, 대신 국립익산박물관 익산백제실에서 복원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5. 바깥고리
6. 사적 제405호
백제 무왕이 수도를 왕궁평으로 옮기려고 지은 궁궐 근처에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중심 불상으로 모신 절이 있던 자리이다.
기록에 의하면 무왕 40년(639)에 벼락으로 절이 모조리 불에 탔을 때 탑 아래 넣어 두었던 동판에 새긴 금강반야경과 불사리만은 보존되어 다시 절을 지은 후 보관하였다고 한다. 탑터로 생각되는 지역에서 제석사라고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주목되는 점은 1965년 백제 무왕의 궁터라고 전하는 왕궁평 성안의 석탑에서 발견한 유물과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몇 안되는 백제 절터로서 문헌기록에서 절을 지은 시기와 폐허가 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 무왕대의 왕궁평 유적과의 관련성, 백제 유적으로는 처음으로 암막새가 나왔다는 사실로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1] 다만 기와는 원래 있던 건물에서 빼서 새 건물에 사용하는 재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위덕왕 시기 기와가 나왔다고 해서 반드시 유적 자체가 위덕왕 시기까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럴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