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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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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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같으며[8]
관위는 간솔, 나이는 스물아홉이다.'''"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廿九矣
를 벌이기 전 표를 세워 나눈 말. 일본서기 기록.
백제의 제27대 임금이자 건길지.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의 왕자[10] 이자 다음 왕이다. 신라의 문무왕은 그를 무덕왕(武德王)이라고 불렀으며 성은 부여, 휘가 창(昌)으로 당대의 백제 금석문에는 창왕(昌王)이라고 표기되어 있다.[11] 《일본서기》에서는 여창이라는 축약 표기로 나오는데 아버지 성왕과 함께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 태자 시절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성왕과의 관계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자기 고집으로 인해 아버지가 전장 한복판에서 전사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고 그로 인해 평생 아버지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비운의 군주이다.
비교적 자세한 기록 덕분에 백제 왕 중 탄생년이 밝혀진 얼마 안 되는 왕인데 553년 백합야 전투에서 29세였으므로 무령왕의 연령[12] 을 토대로 연 나이로 계산해보면 524년생. 생몰년도는 524년~598년으로 75세이니 백제의 역대 군주 중에서 그나마 장수한 경우이다.[13] 재위 기간도 554년~598년 총 45년으로 긴 편이다. 50년씩 재위한 왕이 많아 기년 조작을 의심받는 고이왕 이전까지의 대다수 초기 왕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길다. 동시대 인물이자 위덕왕의 철천지 원수인 신라 진흥왕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다. 아무래도 진흥왕은 아버지 성왕과 자주 엮이는데다 진흥왕은 단명했고 위덕왕은 장수했기 때문에 그런지 대중매체에서 세대를 잘못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고도 위덕왕은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 치세와 20여 년이나 재위 기간이 겹칠 정도로 장수했다.
당시 중국에서 '동청주지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동청주는 중국 산둥 지방이다. 당시에는 남의 영토를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이 평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 생애
2.1. 태자 시절
아버지 성왕을 도와 국정에 참여했고 수도 사비성에 머무는 성왕을 대신해 한강 유역 탈환의 임무를 부여받은 북벌군을 진두 지휘했다. 그가 역사서에 첫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553년의 백합야 전투다. 태자였던 창은 고구려 장수와 일기토를 벌여 승리를 거뒀고 이에 사기가 오른 백제군이 고구려군을 밀어붙여 승리를 거뒀다. 기세가 오른 백제는 554년 신라 정벌론을 펼치기에 이르는데 태자인 창이 강경하게 나가자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으나 결국 성왕이 신라 공격을 전격 승인해준다. 그리하여 벌어진 전투가 바로 오늘날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일어난 관산성 전투.
이때까지는 뛰어난 무용과 자신감 넘치는 패기있는 차세대 유망주로 전성기의 근구수왕처럼 백제판 흑태자로 용명을 떨칠 수도 있었겠지만... 태자 창이 직접 선봉에 서서 관산성(管山城)[14] 공략에 나서고 우덕, 탐지가 이끄는 신라군에 승리를 거두며 초반 기세를 잡자, 아버지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있던 태자를 독려하기 위해 병사 50명만 대동하고 밤길을 달려가다가, 북쪽 한강 유역에서 내려온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급습을 당해 전장 한복판에서 전사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15] , 그리고 참수된 채 전달된 왕의 시신을 받은 태자의 백제군 본대도 사기를 잃고 전투에서 패배, 태자 창의 부대 역시 포위되어 '''성왕을 포함 4인의 좌평과 29,600명의 군사가 전사하는 큰 참화를 입었다.'''[16] 포위당한 태자는 일본 지원군의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축자국조, 筑紫國造)[17] 가 뛰어난 궁술로 분전해 신라군의 포위를 겨우 뚫었고 태자는 샛길로 도망쳐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18](전략)
여창(餘昌)이 신라를 치고자 꾀하였다. 기로(耆老)들이 간하기를,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여창이 말하기를, "'''늙었도다. 어찌 겁이 많은가?'''" 나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 요새를 세웠다.
그 아버지 명왕(明王)은 여창이 오랫동안 진영에서 고생하고 또 오래도록 잠과 음식을 폐하고 있을 것을 우려하였고, 아버지의 자애는 성글기 쉽고, 자식의 효성은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하략)
백제 사서를 인용한 일본서기 기록. 일본의 기록이기에 프로파간다를 엿볼 수 있다.
2.2. 즉위
성왕이 전장 한복판에서 갑작스레 최후를 맞았으니 태자 창이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했으나 창은 자신의 고집으로 아버지와 함께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이에 왕위를 포기하고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만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왕위를 승계하였다. 태자가 나이든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아 대패를 당했으니 이번에는 제발 나이든 신하들의 말을 들으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켰다.(555년) 8월 백제 여창(餘昌)이 여러 신하들에게 “소자(少子)는 이제 돌아가신 부왕(父王)을 받들기 위하여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修道) 한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지금 임금께서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슬프도다. 이전에 가졌던 생각이 바르지 못하여 후에 큰 근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국은 고구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고 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장차 어느 나라에게 넘겨주려하십니까. 무릇 도리는 왕명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만약 능히 늙은 노인(耆老)[19]
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바라건대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서 속세를 떠나는 수고로움은 하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것을 굳이 하고 싶으시다면 나라 백성들을 출가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여창이 “좋다”고 대답하고는 곧 나아가 신하들에게 꾀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상의하여 100명을 출가시키고 깃발과 우산 모양의 장식물(幡蓋)를 많이 만들어 여러가지 공덕을 행하였다고 운운하였다.
왕권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은 위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는데, 취임하자마자 귀족들에게 "진작에 말을 안듣다가 이제는 왜 또 그러시는데요?"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대놓고 무시) 선왕이 주도해 일으킨 전쟁에서 왕을 비롯한 재상을 비롯한 대신들과 군인 수만명을 잃고 후계자인 자기는 간신히 살아 돌아온 꼴이다 보니, 즉위해서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
선대의 동성왕 - 무령왕 - 성왕의 치세에 단단히 쌓아왔던 왕권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인해 《수서(隨書)》에는 사비 천도 이후 형성된 대성팔족(大姓八族)이 실세가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
한때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554년 ~ 557년 까지 부여창이 태자로 있던 이른바 공위시대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인정받기도 했으나, 95년 부여 능산리 유적에서 발굴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 의해 없었던 것으로 판명났다. 애초 《일본서기》의 그 출가 기사가 권력 대립 보단 성왕의 전사에 따른 비감한 분위기가 물씬나는 부분이고, 위덕왕 스스로가 출가하려 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공위설'은 한계가 있다.
2.3. 재위
국정을 맡고 몇개월 후인 554년 9월,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변경 진성(珎城)이라는 곳을 공격해 상당수의 백성과 말을 탈취했지만, 중요한 영토 확장은 실패한 소극적 성과였다.[20] 혹은 이 진성 공격 기록은 삼국유사에만 있는데 이 진성이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나오는 관산성의 다른 이름이거나, 554년 7월에 있었던 관산성 전투가 7월 한 달만에 종결된 짧은 전쟁이 아니었다면 이 진성 전투도 관산성 전쟁의 일부가 아니냐고 보는 설도 있다. 아무튼 관산성 전투의 일부라면 이는 위덕왕의 즉위 이전에 벌어진 사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어 바로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성왕이 전사한지 불과 3개월 만에 쳐들어 온 것이다.'''[21][22] 고구려가 금강 유역 일대인 웅천성(혹은 안성천 일대로 비정됨.)까지 단숨에 밀고 들어오자 위덕왕은 이를 방어해냈다.
이후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하여 재침할 것을 우려하여, 왜국에는 계속 선진문물을 지렛대로 해서 병장기와 군마 등 군수물품을 제공받는 동시에 가야 반파국[23] 에 밀사를 파견, 즉 왜군과 가야를 이용해 신라의 후미를 치고 562년 금관가야 지역을 다시 되찾아주면서 신라를 견제하게 하려 했지만 오히려 백제군이 신라군의 반격에 당하면서 1,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 말 그대로 '''역관광''' 당했고, 가야를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신라에게 있어 오히려 좋은 명분이 되었다. 이에 562년 음력 7월, 신라는 장군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의 활약으로 대가야를 패망시켜 '''가야 전 지역을 집어삼켰다.''' 게다가 원군으로 온 왜군도 대장이 신라군에 사로잡혀 아내를 신라 장수에게 능욕당하여 성노예로 바치고 겨우 풀려날 정도로 대패했다.
그러나 근성가이 위덕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위덕왕 24년과 진지왕 2년의 기사를 보면 백제가 신라 서쪽 주, 군을 쳤는데, 이찬 김세종[24] 이 3,700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는 것을 봤을 때 백제의 대패로 보인다. 위덕왕은 진흥왕에게 반격당해 패한 후 장장 16년을 준비했을 텐데, 이렇게 패배했으니 원통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신라 진지왕 3년에 알야 산성을 백제에게 주었다는 기사가 있긴 한데...다만 이는 백제 위덕왕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다.[25]
국제적인 고립을 피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남북조시대였던 중국과 외교 관계를 펼쳤다.[26]
이후 중국의 남북조가 수나라로 통일되고, 어느 정도 내부가 안정되자 위덕왕은 잠재적인 위협 요소인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수를 이용하기로 방침을 정한다. 상황을 주시하던 위덕왕은 598년에 수문제와 고구려가 요동을 놓고 제1차 고구려-수 전쟁을 벌이자,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는 예의 없고 오만한 나라라며 까고, 수나라가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길 안내, 군량 보급 등을 협력하겠다고 제의했다. 허나 수 문제는 그럴 여력이 없다 판단하여 위덕왕의 제의를 무시했다. 그리고 백제가 수나라 뒤를 봐주려고 접촉했다는 사실을 안 고구려는, 바로 백제로 진격하여 보복을 감행하고 돌아갔다. 결국 위덕왕은 얻는 것도 없이 손해만 본 셈인데... 백제가 돕겠다고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 한 이유로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훗날 수나라 다음 황제 수양제가 진짜로 백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가긴 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져서 나가떨어지길 바랬던 백제의 생각과는 달리 '''수나라가 오히려 털렸다'''.[27]
재위 기간 내에 관산성 전투의 복수를 하기 위해 빈번히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단지 오래 산 게...[28][29] 그러나 위덕왕이 신라를 침공해서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을지언정 그것이 신라를 충분히 피로하게 했을 가능성은 크다. 신라의 진평왕 재위 기간이 위덕왕 후반부터 무왕 재위 중반기까지인데, 위덕왕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왕이 즉위해 신라에 파상 공세를 펼치자 신라는 백제에게 얄짤없이 털리기 시작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국의 츠쿠시국(현 후쿠오카현)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일라의 팀킬로 실패했다.
2.4. 최후와 의혹
598년 74세의 보령[30] 을 일기로 승하했고, 그 묘는 능산리 고분군에 있다고 추정되며, 그의 승하 후 아들인 아좌태자[31] 가 왕위를 승계하지 않고 동생인 혜왕이 71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다만 이상한 점은 장성한 나이의 아좌 태자가 일본에 머물고 있음에도 귀국하여 위덕왕의 뒤를 잇지 않고 동생인 혜왕이 왕위를 이었다는 것. 태자가 버젓이 있음에도 늙은 동생이 보위를 이은 것으로 보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학자들 중 일부는 위덕왕이 귀족 세력 혹은 혜왕에게 시해당한 것이 아니냐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노년의 나이라 하더라도 자연사 하지 않고 횡사 했다면.. 그 전대의 여러 국왕들이 귀족 세력에게 시해당한 경우가 여러 번 있으므로, 위덕왕과 혜왕의 승계 과정을 둘러싼 석연치 않은 정황은 위덕왕의 비정상적인 최후를 암시하는게 아니냐는 것. 그러나 기록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보긴 힘든 실정.
한편 <북사>에는 제 30대 왕인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위덕왕은 아들이 여럿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 남북조 시대 북조의 사서인 《북사》에 근거한 것인데, 정작 《북사》에는 혜왕, 법왕의 존재에 대한 기록 없이 바로 위덕왕에서 무왕으로 왕위가 이어진 걸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서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인 것처럼 기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혜왕, 법왕이 워낙 재위 기간이 짧기에 북사 편찬자들이 이들의 존재를 모른 채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겠거니 여기고 그들을 기록에서 누락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유일하게 백제 공주의 기록이 전한다.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사리감에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567)에... 누이인 양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百濟昌王十三... 丁亥妹亮公主供養舍利)"라는 기록이 있어, 생전에 백제 왕은 이름으로 불렸고, 형공주라는 누이가 있었음을 알 수있다. 양공주가 아니라 형공주로 볼 경우 대략 누나 또는 공주 중에서 첫째 공주 등으로 해석되는데, 妹의 의미가 여동생을 의미하므로 큰여동생일 가능성이 크다.
사망 기사도 묘한 여운을 주는데, 보통 삼국사기에서 왕이 죽으면 그냥 "왕이 죽었다. 시호를 뭐라 하고, 어디다가 장사지냈다"는 기록으로 끝맺는 게 대부분이지만, 위덕왕은 "'''여러 신하들이 논의한 끝에(群臣議)''' 시호를 위덕이라고 정했다"고 적혀 있다. 물론 왕이 죽은 후 시호를 논의하는 것은 당연히 후임 왕이나 신하들이지만, 굳이 이런 표현이 붙어 있는 삼국 시대 왕은 위덕왕이 유일하다. 뭔가 시호를 두고 백제 조정에서 큰 갑론을박이 있었거나, 위덕왕 말년의 불안정했던 백제 정국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3. 유물
이름이 '부여창(扶餘昌)'인데, 당시 백제는 아직 피휘를 하는 관습이 없어 왕명 표기법이 '이름 + 왕' 이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백제 왕흥사 사리함에 창왕이라고 표기했다.[32]
백제 시대 왕 중 드물게 한반도에 유물이 다수 존재한다.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 爲亡[33]
王子 立刹 本舍利二枚 葬時神化 爲三정유년(丁酉年: 577) 2월 15일 '''백제왕 창(百濟王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 옆 절터에서 '''창왕명석조사리함'''[34] 이 발견되었는데 '창왕 13년'(56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접 장소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 역시 위덕왕 때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10월 10일에는 충남 부여 규암면 신리 왕흥사지에서 사리장엄구('''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가 발견 되었다. 이전부터 왕흥사에 대한 기록과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드디어 구체적인 유물이 발견 된 것이다. 청동 사리함에는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子, 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昌)이 죽은 왕자(위덕왕의 아들)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구체적인 창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전까지 왕흥사는 《삼국사기》 기사에 따라 무왕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져왔으나, 왕흥사지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어 선왕(先王)인 창왕 재위 기간에 창건 되었음이 밝혀졌다. 발굴한 학자 왈, 자기가 이걸 직접 파낸 게 아니었다면, 《삼국사기》와 내용이 달라 위조품이라고 코웃음쳤을 것이란다(...).
어쨌든 이걸로 정확하다고 정평이 난 《삼국사기》의 위상에 흠집이 났다(...). 이같은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 관련 유적, 유물이 워낙 적은 상황에서 이 사리함은 기존의 기록과 다른 내용을 밝힌 중요유물이다. 문화재청은 발굴된지 불과 5년 밖에 안 된 2012년에 이 사리함들을 보물 제1767호로 등록시켰다.
4. 창작물
- 이병훈 감독의 사극 서동요에서는 정욱 씨가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무왕이 위덕왕의 숨겨진 아들로 설정되어 등장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맞는지는 논란이 있는 편이다. 서동요에서는 결국 위덕왕이 아좌태자에게 양위를 하려고 하나, 양위식 직전 혜왕 부여계의 아들로 훗날 법왕이 되는 부여선이 암살단을 보내 태자를 암살하자, 위덕왕이 비밀리에 자신의 숨겨진 아들인 서동을 태자로 책봉하고 부여선을 제거하려다 되려 역관광당해 시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위덕왕과 혜왕의 석연치 않은 승계 과정을 생각하면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는 스토리이긴 하지만, 역사 기록상의 근거가 없는 이상 픽션이라고 봐야할 듯.
- 화랑(드라마)에서는 성왕 재위기 태자 부여창으로 등장. 김민준 씨가 연기했으며, 크게 비중은 없고 에피소드 하나에 엮인 조연 정도이며, 주인공이 신라 측이라 그런지 비열한 성격으로 묘사되었다. 마지막회에서 관산성으로 쳐들어왔다고 한번 더 언급된다. 여담이지만. 악역으로 나왔음에도 김민준씨의 매력적인 남성미와 연기력이 겹쳐 비열한 악역임에도 섹시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 싸울아비에서는 위덕왕 사망이 초반에만 언급된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위덕왕 본기'''
一年秋七月 위덕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고구려가 웅천성을 공격하다
六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八年秋七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十四年秋九月 진나라에 조공을 보내다
十七年 제가 왕을 거기 대장군으로 책봉하다
十八年 제가 왕을 다시 책봉하다
十九年 사신을 제에 보내 조공하다
十九年秋九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四年秋七月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四年冬十月 신라의 서부 변경을 공격하다
二十四年冬十一月 사신을 우문주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五年 사신을 우문씨의 북주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六年冬十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六年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八年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八年 수에서 왕을 책봉하다
二十九年春一月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一年冬十一月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三年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六年 수가 진을 평정하다
三十六年 수의 배가 탐모라국으로 표류하다
三十九年秋七月 일식이 일어나다
四十一年冬十一月 혜성이 나타나다
四十五年秋九月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四十五年 수의 군도가 되기를 요청하다
四十五年冬十二月 위덕왕이 죽다
'''외교에 관한 기사가 상당히 많다.'''
6. 일본서기[35]
- 553년 겨울 10월 경인(庚寅) 초하루 기유(己酉) : 백합야에서 고려군을 물리치다
- 555년 겨울 12월 : 함산성에서 패배하다.
- 556년 봄 2월 : 일본에 왕자 혜를 보내 성왕의 죽음을 아뢰다.
- 558년 : 왕위에 오르다.
- 575년 2월 을축 : 일본에 조공하다.
- 575년 4월 을유 초하루 경인 :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 577년 여름 5월 계유 초하루 : 일본에서 파견온 大別王과 小黑吉士을 재상으로 삼다.
- 577년 겨울 11월 경오 초하루 : 일본에 불상 등을 조공하다.
- 583년 아리사등의 아들 일라를 일본에 보내주다.
- 584년 가을 9월 : 사신을 보내 불상을 보내다.
- 586년 일본에 승려들을 파견하고 조공을 바치다.
- 587년 여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98년 여름 4월 정축 초하루 : 백제왕이 왕자 아좌(阿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