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제19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시기'''
서기 1422년 6월 10일 ~ 9월
'''장소'''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인'''
오스만 베이국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시도
'''교전국'''
[image] 동로마 제국
[image] 오스만 베이국
'''지휘관'''
[image] 마누일 2세
[image] 요안니스 8세
[image] 무라트 2세
'''결과'''
동로마 제국의 승리.
1. 배경
2. 전개
3. 결과
4.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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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1421년, 오스만 베이국의 술탄이 된 무라트 2세는 그의 계승 과정에 동로마 제국이 농간을 부렸다고 판단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동로마 제국을 파괴하려 했다. 메흐메트 2세가 살아있던 시절에 반란을 일으켰던 바예지트 1세의 아들 무스타파는 반란이 실패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는데 오스만의 무스타파 반환 요구에 꾸물대던[1] 사이 무라트 2세가 술탄위를 계승하고는 다시 무스타파와 내전을 벌여 승리한 상황이었다. 이에 무라트 2세는 동로마 제국이 무스타파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었고 그동안 오스만의 내분 틈에서 관대한 처우를 받아 간신히 연명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에 이를 드러냈다.
이 포위전은 오스만군이 정면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한 첫 번째 전투이고, 대형 구포를 동원해 공성전을 진행한 전투이기도 하다.

2. 전개


공성이 유지된 시간은 비교적 짧았다. 무라트 2세의 동생인 쿠취크 무스타파가 아나톨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먼저 이것부터 진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이 반란의 배후에는 동로마 제국의 자금지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동로마 제국은 그동안 이런 방식으로 주변 국가들이 제국의 남아있는 마지막 보루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어책인 상태였다.

3. 결과


로마 제국은 일단 명목상 또다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미 이 시점에서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하면 몇몇 도시들만 남아있는 상태로 도시국가나 다름없는 처지에 있었다. 제국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어 더 이상의 병력 충원도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교황 비오 2세는 멸망 직전에 있는 동로마 제국을 돕기 위해 서유럽 각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서유럽 국가들은 소수의 대포를 지원했다. 이는 30여 년 뒤에 벌어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유용하게 쓰이지만 제국을 구원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4. 영향


로마 제국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테오도시우스 성벽 덕분이었고, 만약 오스만이 내란의 위기에서 안전해 질 수 있다면 기술적으로 동등한 이상 함락은 시간문제라는 것은 이미 명확해졌다. 그리고 역으로 아나톨리아에서의 반란을 막으려면 마지막 남은 동로마 제국의 보루를 제거해야 하는 것도 분명해졌다.

[1] 그리고 이를 메흐메드 1세가 묵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