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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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9대 갈리스토 3세

'''제210대 비오 2세'''

제211대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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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명'''
비오 2세 (Pius II)
'''본명'''
에네아 실비로 피콜로미니 (Enea Silvio Piccolomini)
'''출생지'''
시에나 공화국 시에나
'''사망지'''
교황령 안코나
'''생몰년도'''
1405년 10월 18일 ~ 1464년 8월 14일 (58세)
'''재위기간'''
1458년 8월 19일 ∼ 1464년 8월 14일 (3년 120일)
210대 교황.
시에나 인근 코르시냐노[1]의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를 짓다가, 시에나와 피렌체에서 8년 동안 수학하며 인문주의에 빠져 지냈다.
1432년부터 1435년까지는 도메니코 키프리니치 추기경의 비서로, 그 후에는 다른 고위 성직자들의 비서로 바젤 공의회에 참석했고, 1435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의 궁전을 방문했으며, 니콜로 알베르키티 추기경과 동행하다가 단독으로 외교 임무를 띠고 여러 곳을 여행했다. 1436년에는 바젤 공의회에서 일하면서 연설가로서 탁월함을 발휘했다.
당시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의 반대자였던 그는 1439년 11월 5일에 선출된 대립교황 펠릭스 3세의 비서로 임명되었고, 바젤 공의회의 권위를 옹호하는 문답서를 집필했다. 1442년 펠릭스가 그를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보냈을 때,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 목한 독일 왕 프리드리히 3세는 그를 계관시인으로 추대했고, 자신을 위해 일할 것을 권했다. 이를 수락한 에네아는 프리드리히의 상서인 카스파르 슐리크와 친하게 지냈다.[2]
1445년에 그는 펠릭스 5세와의 관계를 단절했고, 에우제니오 4세와 공식적으로 화해했다. 같은 해에 중병에 걸리자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1446년 3월 4일에 빈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몇년 동안 그는 프리드리히 3세와 독일 선제후들에게 중립을 포기하고 에우제니오 4세를 유일한 합법 교황으로 인정하라고 설득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프리드리히는 1455년까지 그에게 군주와 제국의 상서 칭호를 내리면서 지속적으로 그의 외교력을 활용했다.
그러는 동안 교황 니콜라오 5세도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447년에 트리에스테의 주교로 임명했다. 이곳에서 그는 공의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을 포기한 [철회의 편지]를 집필했다. 1450년에는 시에나의 주교로 착좌했다. 아라곤과 나폴리의 왕인 알폰소 5세와의 성공적인 협상에 대한 보상으로 교황 갈리스토 3세는 1456년 12월 18일에 그를 산타 사비나 성당의 추기경으로 승품시켰다.[3]
갈리스토 3세의 사망에 따른 콘클라베는 막후교섭이 판을 쳤다. 막후교섭 덕분에 이미 쇠약해진 53세의 에네아가 선출되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신심 깊은 에네아스]를 되새기며 '비오'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문인이자 실천가의 선출은 인문주의자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비오는 자서전을 포함해 많은 저서를 집필한 작가였지만, 인문주의자들의 후원자이기보다는 비평가였다. 그는 오스만 제국유럽 진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그의 선출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이제 십자군 원정을 취우선 목표로 삼았다. 1458년 10월 그는 감동적인 문체의 십자군 칙서를 발표했고, 1459년 6월 1일에 만토바에서 그리스도인 군주들의 회합을 소집했다.
한편 나폴리의 왕좌를 두고 앙주 공 르네 1세와 아라곤의 알폰소 5세의 아들인 페란테 혹은 페르난도 1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그는, 이탈리아 내 세력 균형을 위해 페란테에게 유리한 결정을 했다. 가까스로 이루어진 회합에서 병력과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그의 제안들은 반대에 부딪혔다.
르네 공작을 거부한 것에 화가 난 프랑스는 어떤 지원도 하려 하지 않았다. 독일은 파병을 약속했으나, 기간을 3년으로 한정하는 바람에 회합은 실패로 끝났다. 공의회의 과장된 권위 때문에 교황의 영향력이 쇠퇴했다고 확신한 비오는, 1460년 1월 18일에 교황이 아닌 공의회에 항소하는 것을 비판하는 칙서 [엑세크라빌리스]를 발표했다.
만토바에서 서둘러 돌아온 비오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프랑스스페인 사이의 전쟁과 캄파냐 남작이 일으킨 봉기에 직면했다. 그는 이 문제들을 어려움 없이 처리했으나, [부르주의 국본 조칙] 철회를 모색하고 있던 터라 프랑스와의 관계가 점점 소원해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1461년에 왕좌에 오른 루이 11세는 [부르주의 국본 조칙]을 폐지했다고 비오에게 통보했다. 그러나 이는 나폴리에 대한 교황의 마음을 바꾸려는 술책이었다. 비오가 페란테를 계속 지지하자, 루이는 프랑스의 여론에 굴복하여 프랑스 교회의 전통적인 자유들을 재도입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반로마적 성향이 강했던 독일에서는 쿠에스의 니콜라오가 브레사노네에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티롤 공작 지기스문트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비오는 지기스문트를 파문했고, 공작은 보편 공의회 소집을 요청했다. 동시에 비오는 마인츠 대주교인 디터 본 이젠부르크에게 휘말렸는데, 디터는 보헤미아 왕 포데프라드의 지르지 편에서 프리드리히 3세를 로마왕으로 교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또한 디터는 세계 공의회 소집을 요청했고 비오는 그를 면직한다고 공표했다. 비오는 포데프라드의 지르지와 불화를 빚기도 했다. 가톨릭과 후스파가 합의한 바젤 협약(1437)을 교황이 거부하자, 지르지가 화가 난 것이다. 지르지는 비오의 십자군 조직과 그리스도교의 결정권자라는 교황의 전통적인 위상에 공공연히 도전하기도 했다. 십자군 조직뿐 아니라 이 모든 난관이 비오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유럽 도처에 만연한 교황청에 대한 반발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교황이 된 이래로 추구해 온 전반적인 교회 개혁과 교황청 개혁은 뜻대로 잘 추진되지 않았다.
비오의 머릿속에는 늘 십자군이 있었다. 유럽 군주들이 십자군을 버리자 1460년에서 1461년 사이에 그는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했다. 여기서 그는 코란에 대해 상세히 논박하고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며, 메흐메트에게 이슬람교를 버리고 세례를 받아 동방의 기독교 황제가 되라고 설득했다. 이 편지는 메흐메트에게 전달되지 않았으나 유럽 전역에 회람되며 교황의 이상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이 영향으로 1463년 10월에 베네치아와 헝가리가 원조하기로 했고, 비오 자신은 치비타베키아 인근 톨파에서 발견된 명반 광산에 고무되어, 이듬해 여름까지 안코나로 십자군 집결을 명했다. 그는 그리스도인 통치자들의 수치심을 자극하여 행동을 이끌어 내려고 직접 나서서 십자군을 진두지휘했다. 민중의 지지와는 달리, 군주들은 한발 물러나 관망하는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고수했고, 1464년 6월 중병 중에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십자가를 앞세우고, 집결지인 안코나로 떠나 7월 19일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극소수의 십자군만 있었다. 마침내 베네치아의 갤리선들이 나타났지만 교황은 사망했고 대규모 사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심장은 안코나에 안장되었고, 시신은 일단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가 1614년에 산 안드레아 델라 발레 성당으로 옮겨졌다.

[1] 훗날 비오 2세는 이곳을 피엔차로 개명했다.[2] 이 시기에 그가 쓴 소설, 슐리크의 연애 모험담을 기리는 <에우리알로와 루크레티아>와 에로틱 코미디 <크리시스>는 유명하다.[3] 그의 중요한 저서 <프리드리히 황제의 역사>가 이때 집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