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니스 8세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제11대 황제.
2. 생애
2.1. 재위 초기의 행적
부황 마누일 2세가 1425년에 사망하자 황위를 물려받았으며, 그가 즉위할 무렵 동로마 제국은 요안니스 5세 시절에 세력을 키운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 반도로 진출해 영토를 크게 넓히는 바람에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 주변과 신하국인 모레아가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만 남고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나마 마누일 2세 시절까지만 해도 유지되던 테살로니키는 요안니스가 즉위하기 직전에 오스만의 침공을 받자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양도되었고 1430년에 함락된다. 같은 무렵, 요안니스의 동생들(콘스탄티노스, 토마스, 디미트리오스)이 파견된 모레아에서는 공왕(Despot) 콘스탄티노스가 베네치아에게 예전에 양도된 항구 몇 곳을 제외한 펠로폰네소 반도의 나머지 지역를 수복했다.
2.2. 피렌체-페라라 공의회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요안니스 8세는 교황령과 협상을 시도하여 동방 정교회가 서방 가톨릭의 우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통합하고 서유럽의 지원군을 불러와 오스만 제국을 몰아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1437년에 요안니스와 동방 주교들은 교황 에우제니오 8세에 의해 열린 피렌체-페라라 공의회에 참석했고, 동방 교회에 대한 우위를 확인한 교황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소집했다. 하지만 이 조건을 알게 된 동방 교회는 매우 거세게 반발했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밖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과 안에서는 동서교회 통합 찬성파와 통합 반대파의 다툼이라는 내우를 겪게 된다.[2]
2.3. 바르나 십자군의 실패와 죽음
교황의 십자군 요청을 수락한 폴란드와 헝가리의 주도로 결성된 십자군은 둘로 나뉘어 육군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한 유럽 영토로 향했고, 해군은 아나톨리아 방면에서 진군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막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이 때 알바니아 등에 퍼진 반(反) 오스만 세력과 싸우던 술탄 무라트 2세[3] 는 십자군에게 10년 기한의 휴전을 제안했지만 십자군을 따라간 교황 특사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이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갈 거냐?"며 휴전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자 십자군은 진군을 계속하여 불가리아 동부의 바르나에서 오스만 제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은 오스만 제국군에게 패배했고 폴란드와 헝가리의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 교황 특사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을 포함한 십자군의 병력이 다수가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도 십자군에 호응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가 모레아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이끌고 북상했지만 십자군을 물리치고 반격해 온 오스만 제국군에게 쫓겨났고, 뒤쫓아온 오스만 제국군은 코린트 지협을 넘어 모레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돌아갔다. 요안니스 8세는 4년이 지난 1448년에 사망했고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인 콘스탄티노스가 콘스탄티노스 11세로 즉위,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이름을 남긴다.
3. 참고 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1] 주화에 적힌 그리스어 문장은 Ἰωάννης Βασιλεύς καί Αὑτοκρἀτωρ Ῥωμαἰων ό Παλαιολόγός로 해석하면 '로마인의 왕이자 황제인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다.출처[2] 물론 동로마가 멸망한 뒤 이 조건으로 성립된 동서 교회 통합은 흐지부지된다.[3] 이 때 무라트는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양위한 후 은퇴했으나 십자군과 반란군에 시달리던 아들에게 복위를 요청받고 술탄으로 복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