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트 2세
1. 개요
오스만 베이국의 6대 베이이자 4대 술탄. 앙카라 전투에서 당시 오스만의 술탄이었던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 제국에게 포로로 잡힌 뒤 벌어진 내전을 거의 거의 수습해낸 메흐메트 1세의 아들이다.
황태자인 메흐메트 2세에 비해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라트가 없었다면 그 아들 메흐메트의 업적도 빛을 보기 어려웠을 것으로 평가 받는다. 이런 점은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2. 즉위 초기
왕자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지방 총독으로 내려보내 자질을 알아보는 동시에 제왕 교육을 하는 당시의 관습[4] 에 따라 아버지 메흐메트 1세가 즉위한 1413년에 아마시아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1421년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즉위했다.
하지만 메흐메트 1세가 내전을 '수습' 이 아니라 '거의 수습' 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스타파 첼레비(Mustafa Çelebi)라는 인물 때문. 그는 앙카라 전투 당시 티무르군에게 포로로 잡혀 티무르 사후에야 풀려난 인물로 메흐메트 1세 때에도 느닷없이 나타나 '내전을 수습한 건 잘 했으니 왕국을 둘로 나눠먹자' 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메흐메트는 그를 제압하고 동로마 제국에 인질로 붙잡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이 무라트가 아직 어리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득을 얻기 위해 무스타파를 풀어면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던 것.
하지만 이 반란은 손쉽게 진압되었는데, 먼저 미할로을루(Mihaloğlu) 가문이 무라트의 편에 섰다. 이 가문은 본래 로마인이지만 오스만 1세에게 항복하여 조언자 겸 외교관 역할을 했던 쾨세 미할(Köse Mihal)이라는 인물의 자손인데, 비록 재상을 비롯해 중앙 관료들이 다수 나오지는 못했지만 루멜리아(Rumelia)[5] 지방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중간급 관료들과 지휘관들을 여럿 배출하며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무라트의 군사적 재능이 아직 십대 청소년인 것 치고는 대단히 뛰어나서 무스타파는 포로로 잡혔고, 무라트는 그의 목을 베어 효수했다.[6]
3. 영토 확장
무라트 2세의 검은 가장 먼저 동로마 제국을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메흐메트 1세가 잘 붙잡아두고 있으라고 당부했던 무스타파를 풀어주는 등 오스만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인데, 이미 도시국가가 된 지 오래라 오스만과 맞서 싸울 힘이 없었던 동로마 제국은 방어에만 급급했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무라트의 동생 무스타파[7] 가 형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무라트가 동의한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푼다는 것 뿐이었고, 같은 해인 1422년에 포위한 테살로니키는 계속 공격했다. 결국 로마 제국은 해가 바뀐 1423년에 테살로니카를 베네치아 공화국에 넘기지만 오스만에 통보를 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스만 측으로서는 도시의 주인이 바뀐 것을 알 수가 없었고, 전투가 계속된 끝에 9년째인 1430년에 오스만에 함락되기에 이른다.[8] 한편 이와 같은 시기 오스만과 같은 시기에 아나톨리아 반도에 세워졌던 다른 튀르크계 소국들도 하나하나 정복되어, 카라만 공국[9] 정도가 마지막 라이벌로 남게 된다.
4. 퇴위와 복위
이후로도 1439년에 세르비아 공국을 정복하는 등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주었지만, 1441년에 신성 로마 제국, 폴란드 왕국, 알바니아, 헝가리 왕국, 세르비아, 카라만 공국까지 손에 손을 잡고 덤비게 되자 상황은 오스만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카라만 공국의 침입은 격퇴해냈지만 헝가리 국왕 겸 폴란드 국왕인 울라슬로 1세(브와디스와프 3세)[10] 가 명목상 총사령관이 되고 후녀디 야노시가 사실상의 총사령관 노릇을 한 헝가리-폴란드 연합군에게 연전연패한 끝에 1444년 6월에 세르비아 공국을 재건하고 영토를 대거 할양하며 발칸 반도에서 향후 10년 간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등의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이는 오스만 베이국 성립 이후 이 무렵까지 가장 치욕적인 조약이어서, 무라트는 전쟁에서 패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의미로 아들 메흐메트에게 재상인 할릴 파샤를 비롯해 유능한 관료들을 보좌역으로 붙여주고 양위한 뒤 아나톨리아 남부로 은둔하여 한적한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보좌를 받는다고 해도 13살짜리 소년이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폴란드와 헝가리 등은 이 소식을 흘려듣지 않았다. 게다가 교황인 에우제니오 4세도 이교도와 맺은 약속은 깨뜨려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오스만을 공격할 것을 부추겼고, 결국 연합군은 오스만 국경을 넘게 된다. 이에 오스만의 관료들과 군부는 무라트가 복위하여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메흐메트는 그러한 목소리를 받아들여 아버지께서 군대를 지휘해서 적을 물리쳐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메흐메트는 무라트에게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는데, 물론 보내는 사람 이름만 메흐메트로 되어 있고, 편지는 할릴 파샤 등이 썼다는 설도 유력하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국 돌아온 무라트는 군대를 이끌고 1444년 바르나 전투에 출전하는데, 헝가리-폴란드군의 우익이 무너지자 실질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던 후녀디 야노시는 중앙군 일부를 거느리고 우익을 도우러 나갔다. 그리고는 울라슬로 1세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리를 지키라고 당부했는데, 철썩같이 믿고 있던 장군까지 자리를 비울 정도로 전황이 불리하다는 데 불안감을 느꼈는지 울라슬로는 기병들을 이끌고 무라트가 있는 오스만군 중앙으로 돌파를 시도하다 전사하고 만다. 결국 국왕이 전사하면서 기세가 꺾인 폴란드-헝가리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당신이 술탄이시거든, 돌아와 당신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그러나 만약 내가 술탄이라면 지금 당신에게 명하노니,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끄시오.
승리자로서 개선한 무라트는 다시 은둔생활을 시작하려 했지만 경험이 부족한 어린 술탄보다는 여러 차례에 걸쳐 군사적인 재능을 입증한 술탄이 필요하다[11] 는 목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수도 에디르네에 남아 아들의 통치를 돕겠노라고 약속할 수 밖에 없었고, 2년 뒤인 1446년에 메흐메트를 폐위시키고 복위했다.
5. 사망
1448년, 무라트는 필생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후녀디 야노시가 지휘하는 헝가리, 왈라키아 연합군을 2차 코소보 전투에서 다시 한번 물리쳤다. 이로써 1444년의 바르나 전투와 1448년 코소보 전투에서 연패한 헝가리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한동안 공격을 삼가고 수비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헝가리가 다시 공세에 나서는 것은 마차시 1세가 즉위한 이후인 1464년의 일이며, 년도를 잘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사이 무라트의 아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큰 사고를 하나 치게 된다. 헝가리의 입장에서는 군사력만 충분했다면 지원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에, 무라트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아들이 '사고' 를 치는 것을 크게 도운 셈.
1450년에는 스컨데르베우가 이끄는 알바니아군을 물리치기 위해 출진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고, 원정에서 돌아온 1451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아들인 메흐메트가 복위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것으로 유명한 메흐메트 2세가 된다.
6. 기타 업적
영토를 확장한 것 외에도, 무라트 2세는 크게 두 가지 업적을 남겼다.
먼저 소소한 군사 개혁이 이루어졌다. 예니체리의 제식 무기로 총이 채택되었고,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무라드 치세에 오스만군이 소형이나마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전쟁이 벌어졌을 때마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튀르크인들을 대상으로 모집하는 비정규군[12] 인 아자프(Azap)가 창설되었다.
한편 정치 개혁도 단행되었는데, 무라트 1세가 도입한 데브시르메(Devşirme) 제도로 예니체리 뿐 아니라 관료들도 선발하게 되었다. 데브시르메 제도 자체가 오스만 베이국의 창건에 기여한 튀르크계 귀족 세력을 누르고 술탄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었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고 판단되자 관료들도 선발토록 한 것. 하지만 무라트 자신도 튀르크계 귀족들의 대표자격인 할릴 파샤를 총애하는 등 아직까지 데브시르메 출신 관료들은 야당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들이 여당이 되는 것은 메흐메트 2세 때의 일이다.
[1] 잔다르 왕조 8대 군주 이스펜디야르 베이(İsfendiyar Bey)의 딸.[2] 세르비아 공작 주라지 브란코비치(Đurađ Branković)의 딸.[3] 둘카디르 왕조의 3번째 군주 샤반 쉴리 베이(Şaban Süli Bey)의 딸.[4] 후에 메흐메트 2세가 법제화한다.[5] 무라트 2세 시대 기준으로는 오스만령 유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6] 이 무스타파라는 인물이 정말 왕족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일단 오스만의 공식 입장은 '이 놈이 어디서 약을 팔아?!' 라는 것. 실제로 오스만은 본래 유목민족인 튀르크인이 세운 나라인데, 몽골인이 그랬듯 튀르크인도 피를 불길한 것으로 여겨서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예를 갖추는 처형법이었다. 그런데 효수를 해버렸다는 것은 아무리 왕족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하더라도 드문 사례.[7] 당연하지만 무스타파 첼레비와는 동명이인인데, 첼레비는 '가짜 무스타파' 라는 뜻의 '뒤즈메제 무스타파(Düzmece Mustafa)'라고도 불리며 이쪽은 '소(小) 무스타파' 라는 뜻의 '퀴취크 무스타파(Küçük Mustafa)'라고 불린다.'[8] 여담으로 이것이 훗날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전쟁과 강화를 되풀이하게 되는 오스만과 베네치아가 벌인 첫 번째 무력 충돌이다.[9] 이 나라는 오스만보다 반 세기 가량 앞서서 룸 술탄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오스만이 대두하기 전까지는 룸 술탄국에서 갈라져나온 튀르크계 공국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국가이기도 했다. 오스만이 강성해진 이후에는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과 협력하며 맞섰으나 매번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메흐메트 2세에게 정복당한다.[10] 폴란드 왕으로서는 브와디스와프 3세가 되나, 본 문서에서는 편의상 울라슬로로 표기를 통일한다.[11] 앞서 헝가리-폴란드 연합군에게 연전연패한 적이 있기는 한데 그것도 무라드가 친히 지휘하지 않은데다, 그 이전까지 20여년 동안의 원정에서는 으레 승리를 거두었다.[12]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먼저 출정하는 병사들로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16세기 말부터는 오스만 영토 내 무슬림이라면 누구든 자원할 수 있었고, 무슬림이라는 조건조차 안 지켜질 때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