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 바에즈

 

[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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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안 바에즈
JOAN BAEZ
'''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17년'''
'''후보자격 연도'''
'''1986년'''
'''}}}#ffd700 후보선정 연도}}}'''
'''}}}#ffd700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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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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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음악계 데뷔
3. 흑인인권운동
4. 밥 딜런과의 관계
5.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
6. 그 외의 활동과 수상경력


1. 개요


조안 챈도스 바에즈[2](Joan Chandos Baez, 1941년 1월 9일 ~ )는 미국싱어송라이터, 인권운동가이다.
그녀는 '''60년대를 풍미한 포크의 여왕''', '''노래하는 인권운동가'''로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유년기


1941년 1월 9일 뉴욕의 스태튼아일랜드에서 멕시코 출신의 앨버트 비니시오(Albert Vinicio Baez)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조앤 브리지(Joan Bridge Baez) 부부의 세 딸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핵무기 제조에 반대하는 물리학자였으며 어머니는 희곡작가였다. 나중에 바에즈가 인종차별을 반대하고 반전평화운동가로서 활동하게 된 데에는 반핵물리학자였던 멕시코계 아버지를 둔 가정적 환경이 컸다.
바에즈는 남캘리포니아 레드랜즈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백인들은 피부가 검은 멕시코계라는 이유로 따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치적 발언을 자주 하여, 학부모들이 그녀를 경멸했다.
조안 바에즈는 그때 느낀 ‘고립’과 ‘다름’이 음악을 하기 위한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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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즈가 여성들

2.2. 음악계 데뷔


그녀는 연습을 통해 그녀만의 톤과 비브라토를 가지게 되었다. 조안 바에즈는 교내 장기자랑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얻었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고등학교(Palo Alto High School)를 다닌 바에즈는 음악에 심취하여 졸업 무렵에는 자신의 노래를 녹음하여 음반회사에 보냈다. 1958년 아버지의 새로운 직장 때문에 매사추세츠로 이주한 그녀는 보스턴 대학교 (Boston University)에 진학하지만 직업적인 가수활동을 하기 위하여 곧 중퇴했다.
1959년 캠브리지(Cambridge)의 포크음악클럽인 클럽 47(Club 47)에서 정식으로 노래하기 시작한 바에즈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을 통하여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1960년 포크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Vanguard Recording Society)와 장기계약을 맺고 음반들을 발매했다.
청아한 목소리는 대중을 사로잡았으며, 당대 최고의 아이돌이자,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를 잇는 포크계의 샛별이 되었다.

3. 흑인인권운동


개신교 신저였던 조안 바에즈는 퀘이커교 모임을 통해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듣고, 그의 사상을 배웠다. 어릴 적부터 본인이 인종차별을 경험했고, 흑인 출입을 제한한 공연까지 경험한 그녀는 누구보다 인종차별의 심각성을 크게 느꼈는데, 마틴 루터 킹의 연설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와 비폭력주의 운동에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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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 스승’ 마틴 루터킹과 함께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로 유명한 1963년 워싱턴 대행진 때, 조안 바에즈는 20대 초반에 불과했지만 35만 명의 군중을 이끌며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열창했다. 그 외에도 흑인 아이들이 백인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입학하는 현장에 있었으며, 이때부터 대중들에게 단순히 가수가 아닌 인권운동가로 알려진다.
마틴 루터 킹은 조안 바에즈의 사상을 다지는 데 다른 누구보다 훨씬 많은 도움을 주고,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4. 밥 딜런과의 관계


무명이었던 밥 딜런(Bob Dylan)은 조안 바에즈를 동경하고 만나고 싶어했다.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소개로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고, 동갑내기이면서 서로의 재능에 매력을 느낀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한다.
이미 스타였던 조안 바에즈는 그를 자신의 무대 게스트로 세우면서 도움을 주었으며, 밥 딜런은 순식간에 포크의 거물이 된다.
바에즈가 딜런의 히트곡 A Hard Rain's A-Gonna Fall를 부르는 도중 딜런의 특유의 창법을 완벽하게 흉내내는 부분도 있을 정도. 4분 8초부터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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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메이트’ 밥 딜런과 함께
민중들에게 두 사람은 혼동기였던 60년대에 한 줄기의 빛이었다. 두 사람의 영향으로 포크는 저항의 음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그들을 롤모델 삼아 노래 부르고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밥 딜런은 지독한 개인주의자였고, 자신의 포크 음악을 집단적 대의의 수단으로 쓰는 것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조안 바에즈와 여타 포크 뮤지션들의 정치적 움직임 동참 요구를 거절했다.[3] 결국 두 사람은 결별한다. 또한 밥 딜런의 심한 여성편력도 한몫했을 것(...)

5.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


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이 거세지자 미국에서 전국적으로 반전운동이 일어난다. 조안 바에즈도 당시 오클라호마에서 징집 거부 운동 대열에 합류하는데, 그때 징병 거부 운동의 지도자인 데이빗 해리스(David Harris)를 만나, 비폭력 시위에 대한 열정을 공유한다. 그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연인에서 결혼까지 골인하게 된다. 하지만 데이빗 해리스가 징병거부로 수감되면서 둘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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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었던 데이빗 해리스와 함께
1972년, 조안 바에즈는 베트남 북부에 직접 찾아간다. 하지만 그때 ‘크리스마스 폭격’이 시작되고 그녀는 11일 동안 방공호 아래에서 절망적인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녀의 곡은 금지곡이 되었지만 군인들은 몰래 들었으며,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거나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오, 방공호의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내게 어떤 선물을 주었던가

내게 미소를 지어 주고 조용히 고통을 나누었지

(중략)

나는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들아, 넌 지금 어디 있니?

- 조안 바에즈 - ‘Where Are You Now, My Son?’ 가사 중

하노이 외에도 태국의 라오스 피난민 수용소, 말레이시아 표류난민들의 임시거류지에서 노래를 부르며 최전선에서 활동하게 된다.

6. 그 외의 활동과 수상경력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사회적, 정치적 시각은 확고했다. 항상 비폭력 저항의 원칙에 충실하며, 세계 방방곡곡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했다.
프랑코 정권이 끝난 스페인에서, 생방송 중 저항 세력의 성가로 유명한 ‘노 노스 모베란’을 열창해서 화제가 되었다. 보스니아 내전에서는 ‘사라예보 첼리스트’로 유명한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와 함께 공연하며 시민들을 위로했다.
그 외에도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일했으며, 후마니타스라는 인권보호기구의 회장으로 지내면서 군비 철폐에 관한 갖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러한 활동이 인정받아, 200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고, 인권 평화운동의 공로로 2개 대학교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미국의 아틀란타에서는 8월 2일, 산타나 크루즈에서는 8월 27일을 ‘조안 바에즈의 날(Joan Baez Day)’로 지정받는 명예를 얻었다.

당신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당장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 조안 바에즈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2] 국립국어원의 표기용례에 따른 표기는 '존 바에즈', 발음에 따른 표기는 '존 바이즈[dʒoʊn baɪz\]'이다. 참고로 Joan이라는 인명은 국립국어원의 기존 표기 용례에 따라 '조앤'으로 표기하는게 일반적이다. 원발음에 가깝게 하려고 '존'이라고 표기하게 되면 남성 인명 John과 구별하기 어려운 이유가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녀를 잘 모르는 요즘 사람들은 '존 바에즈'라는 표기만 보고 남성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욱이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교수로 재직중인 수학자 존 바에즈(John Carlos Baez, 1961년생)가 있어 그와 혼동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3] 밥 딜런의 대표적인 반전, 인권 노래로는 Blowin' In The Wind, The Time They Are A Changin'가 우선적으로 꼽히는 데, 전자의 경우 본인이 첫 공연 전부터 '''이건 반전, 저항가요가 아님'''이라고 말한 바 있고(후대에는 '''가사가 너무 일차원적'''이라고 셀프디스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노래를 불렀을 뿐'''이라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