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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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Martin Luther King Jr.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국적'''
[image] 미국
'''출생'''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사망'''
1968년 4월 4일 (향년 39년 80일)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시 로레인모텔
'''학력'''
부커 T. 워싱 고등학교 (졸업) (-1944년)
모어하우스 대학교 (사회학 / B.A.) (1944-1948년)
크로저 신학대학교 (신학 / B.Div.) (1948-1951년)
보스턴 대학교 (신학 / Ph.D.) (1954-1955년)
'''직업'''
목사, 신학자, 시민사회운동가, 인권운동가
'''가족'''
父: 마틴 루터킹 시니어(1898년-1984년)
母: 앨버타 윌리엄스 킹(1904년-1974년)
배우자: 코리타 스캇 킹
슬하: 2남 2녀
'''신체'''
169cm, 70kg
'''종교'''
개신교 (침례회)
'''서명'''
[image]
1. 개요
2. 전반적인 생애
2.2. 나는 산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2.3. 무덤과 추모 조형물
3. 논란
4. 평가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


[1]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자식들이 이 나라에 살면서 피부색으로 평가되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받게 되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Darkness cannot drive out darkness; only light can do that. Hate cannot drive out hate; only love can do that.)

미국의 비폭력주의 흑인 민권 운동가이자 개신교 침례회 목사로 통칭 킹 목사로 불린다. 미국에서는 이니셜인 MLK라고 쓰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Martin Luther King, Jr. Day 라는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2. 전반적인 생애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났지만, 나름대로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인물이다.[2]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Martin Luther King Sr.)가 목사였고 가족들 역시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킹 역시 개신교를 믿게 되었다. 이후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하여 아버지와 의견 충돌을 빚었지만, 결국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모어하우스 칼리지와 크로저 신학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마치고, 보스턴 대학교(BU)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교파는 침례회이다. 이때 대학에서 평생의 동반자이자 인권운동을 함께 한 코레타 스콧(Coretta Scott)과 결혼하게 된다.
대학을 다니면서 받은 차별[3][4] 등으로 인해 목사가 된 이후 흑인들을 위한 인권운동을 시작했으며, 앨라배마에서 버스 안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백인 남성을 위해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자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전개, 5만 명이 넘는 알라바마의 흑인들이 버스를 타지 않고 두 다리를 이용해 움직이며, 차가 있는 흑인들은 카풀을 시작하게 했다. 1년간에 걸친 운동 끝에 결국 로자 파크스는 풀려나고, 흑인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비키지 않으면 체포되는 것은 위헌이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얻어낸다.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인권운동을 전개했으며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기 위한 운동을 펼쳐왔다. 그 결과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일부 과격파 흑인들을 어르고 달래서 비폭력 운동을 펼쳐왔다. 1965년 이후엔 과격 운동가인 말콤 X를 만나며 과격파 운동가들과의 연대를 꾀했으나, 1968년 4월 4일에 과격파 백인단체 소속의 제임스 얼 레이가 쏜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5] 그의 죽음에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했고 음모론이 발생했으며 미국 전역에서 킹 목사의 죽음에 분노한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나 도시 중심부에서 방화와 건물, 차량 파괴, 약탈 등 폭력시위가 벌어졌다. 흑인 폭동은 흑인 지도자들의 자제 요청과, 수천 명의 군인, 경찰이 출동하면서 시위대는 저절로 해산되었다.

2.1.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흑인들의 목사로 남아있으며, 그가 한 수많은 연설 가운데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행진 때 링컨 기념관 앞에서 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로 시작되는 연설은 지금까지도 인류에 회자되는 역사적인 명연설로 남았다. 그리고 그 명대사는 지금도 간간이 교과서에 실린다.
본래 이날을 위해 따로 준비한 원고가 있었지만, 수많은 인파를 보자 마음이 바뀌어 평소 그가 즐겨 하던 연설을 했다고 한다. 내용은 문서 참조.
그가 암살당한 후 미국 정부는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지정, 국경일로 만들었다. 월요일 수업이 많은 대학생들에게는 마른 하늘의 단비 같은 휴일.[6] 뭐 지금 살아있었어도 8-90대이니 충분히 왕성히 활동을 했을 인물이다.
여담인데, 이 연설에서는 니그로(negro)가 흑인종을 나타내는 언어로써 쓰인다. 최소 1960년대에는 니그로가 아직 멸시적 의미보다는 오히려 학술적이고 공식적인 표현이었다는 근거가 된다.[7]

2.2. 나는 산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그가 암살 당한 장소인 테네시주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Lorraine Motel)은 현재 민권 박물관(Civil Rights Museum)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 암살 당하기 전날 저녁인 1968년 4월 3일에 그는 이곳 발코니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짤막한 연설을 한 게 마지막 연설이 되었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는지 그는 이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어려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만 합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좀 더 단단한 각오로 굳세게 일어서도록 합시다.
좀더 확고한 신념을 갖고 힘차게 전진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조국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찬 행진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우리에게는 조국을 좀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앞에는 무섭고 어려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저는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 '약속의 땅'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모든 사람의 염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염원이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높은 산 꼭대기로 데려가셨습니다.
거기서 저는 굽어보았습니다.
'약속의 땅'이 제 눈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8]
하지만 여러분은 오늘 저녁 분명히 알아두셔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는 것을.
오늘 저녁 저는 대단히 행복합니다.
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없습니다.
저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의 눈은 오로지 다시 이 땅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따름입니다.[9]

2.3. 무덤과 추모 조형물


[image]
킹 목사의 무덤은 2006년 1월 30일에 타계한 부인 코레타 스콧 킹 여사와 함께 안장된 합장 석관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왼쪽 부분에 있는 그의 석관에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마지막 문장 "드디어 자유가, 드디어 자유가! 전능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의 끝을 조금 바꾼 "마침내 제가 자유로워졌나이다!" 가, 오른쪽에 있는 부인의 석관에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가 묘비명으로 새겨졌다.
[image]
2011년 8월 22일 킹 목사 추모 조형물이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에서 일반에 공개되었고, 개장식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제시 잭슨 목사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흑인 명사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조형물의 시안이 공개되었을 때는 조각상의 자세가 너무 위압적이라는 지적이 나왔으며, 조각에 착수했을 때는 흑인을 하얀 돌로 조각하는 게 타당한지를 놓고 일부가 갑론을박을 벌인 적이 있다.

3. 논란


[image]
1990년에 시어도어 파파스가 저술한 책 <Plagiarism and The Culture War : The Writings of Martin Luther King, Jr, and Other Prominent Americans(표절과 문화전쟁 : 마틴 루터 킹의 집필과 다른 저명한 미국인들)>의 모습. 이 책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사건이 세상에 드러났다.
또한 하버드 대학의 교육심리학과 교수이자 보스턴 의과대학 신경학과 교수인 하워드 가드너는 (마틴 루터) 킹은 소박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부심이 강했고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과거의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곤 했다. 또한 종교 지도자로서 온당치 않은 위험하고 부질없는 개인적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의 대학원 논문은 상당 부분이 표절된 것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문서나 관련 증빙자료들을 통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주로 FBI 관련 인사들의 폭로에 의해 드러났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마틴 루터 킹의 여성 편력과 관련해서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완벽하게 폭로가 되면 그 파장이 엄청날 것이라는 예상과 더불어 FBI의 불법사찰에 대한 당시 관계자들의 책임을 물을 것을 우려, 그의 사생활을 기록한 방대한 도청기록은 현재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고 있으며, 이 1급 비밀문서들은 2027년까지 공개가 금지가 되어 그 이후에 공개될 예정이다.
아무튼 하버드 대학의 교육심리학과 교수이자 보스턴 의과대학 신경학과 교수로 다중지능이론(Multiple Intelligence)의 창시자인 하워드 가드너는 마틴 루터 킹의 이러한 베일에 싸여져 있었던 신화가 낱낱이 파헤쳐지자 그의 저서에서 '논문 표절과 복잡한 여성 편력의 증거가 드러났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비밀해제 FBI 20쪽 짜리 보고서에 따르면 킹 목사가 1968년 4월 4일 암살되기 3주 전에 작성된 것으로, 비밀 해제된 646건의 FBI 문서 속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FBI가 공화당원인 킹 목사를 공산주의자로 몰기 위해 갖가지 술수를 부리고 킹 목사에게 협박편지까지 보낸 전력이 있기에 해당 문건이 킹 목사를 몰락시키기 위한 날조라는 설도 있지만, 실상은 FBI가 킹 목사를 공산주의자로 몰고 싶어 증거를 찾기 위해 사찰하다 상술한 치부들을 찾아낸 것이다. #

4. 평가


20세기 후반부에 일어난 미국의 흑인 인종차별 철폐 운동의 아이콘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인지도와 평가도 높고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미국 내 흑인들의 인권 향상의 역사는 이 사람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
백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받는 세대에서 태어났음에도 그 백인들과 흑인들의 공존과 통합, 모든 인종의 평등을 주장하는 인종을 초월한 인류애적 가치의 실현을 부르짖은 점과 그 수단으로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비폭력 인권 운동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 점이 킹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물론 이상론만 설파하고 다니지는 않았고, 여러 가지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인권 운동을 이끎으로서 연방 대법원의 흑인/백인 버스 좌석 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낸 사건에도 으뜸가는 활약을 펼치고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는 등 현실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하였다. 또한 인종차별 폐지 관련 운동 외에도 미국의 젊은이들을 희생시키지 말라면서 베트남 반전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인종차별 외 다른 인권문제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진 행적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킹은 기독교 침례회 목사였으므로 자연히 그의 행적은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둔다. 특히 킹이 비폭력 운동과 흑백 통합 공존의 가치를 설파하고 다닌 것에는 성경에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킹의 인권운동에서 가장 큰 특징은 '''비폭력'''인데 사실 처음부터 비폭력을 밀고 나간 것은 아니다. 물론 폭력을 용인한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킹을 노리는 세력과 협박도 많고 해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구비해 두었고, 폭력에 대단히 부정적이긴 했지만 자기 방어를 위한 폭력적 수단의 동원은 어느 정도 긍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개신교 커뮤니티 내에서 백인 반전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비폭력 운동에 대한 확신이 생겨나게 되었고 자기방어와 개인 무기 소지를 등진 채 비폭력 인권운동의 틀을 다지게 되었고, 그의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비폭력 운동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다.
말콤 엑스와 가장 큰 대비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 비폭력 운동이라는 수단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권 운동가라는 이름으로 킹을 가장 빛나게 만들어주는 반면 엑스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킹의 핵심 주장이자 그의 사상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부분은 '흑인과 백인, 둘은 어느 하나 우월한 인종이 아니라 평등하며 따라서 평등하게 대우받고 함께 공존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였지만 급진적 성향의 엑스는 킹이 백인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며 그의 인권운동을 지나치게 타협적이라고 생각했다. 엑스 외의 과격파 흑인들 역시 킹의 온건적 인권운동을 못마땅하게 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여론과 별개로 당시 흑인들 사이에서 킹의 사상이 더 큰 지지를 받았고 많은 흑인들이 킹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기며 그에게 동조했던 것은 명백하다.
비폭력 운동과 인종 평등의 가치 주장 및 흑인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힘쓴 공로로 1964년 10월 14일,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다. 이 수상 소식을 듣고 당시 FBI 국장이었던 존 에드거 후버가 분노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만 킹 목사도 인간인지라 약점은 있었다. FBI에서 킹 목사의 약찰을 캐내다가[10] 성적 간음에 관한 혐의를 발견했다. 이에 관해 킹 목사의 친구였던 랠프 애버내시(Ralph Abernathy)는 그의 자서전에서 킹 목사가 여자에 약하다고 했지만 후에 이것이 외설적인 것보다는 감정적인 것에서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킹 목사의 인생을 저술했던 데이비드 개로(David Garrow)는 킹이 매일 만나는 여자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간음에 대한 사실을 말한 적이 있었다.
FBI는 이것을 이용해 킹에게 민권운동을 멈추라는 익명의 협박 편지까지 보냈다. 그 때문에 킹은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결국 굴복하지 않았다. FBI는 신문기자들에게 킹의 여자관계에 대해 폭로하는 기사를 내라고 했지만 모든 신문기자들이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후버야말로 치졸하게 남의 약점이나 캔다는 비난도 받았다고 한다. 킹의 위상이 워낙에 어마어마했고 무엇보다 FBI는 이 사생활 이야기를 킹의 인권운동을 꺾을 목적으로 캐낸 거였던 데다, 협박과 도청 등의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킹을 겁박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킹 목사의 사생활 건과 관련하여서는 FBI를 비난하는 미국 내 여론이 많다. 결국 극비에 부치고 National Archives에 2027년까지 보관해 두기로 했다.[11]
1990년 시어도어 파파스라는 연구자가 킹이 자신이 가르친 학생의 논문을 표절하여 박사논문 3분의 1 이상을 베꼈다는 사실[12]을 발견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라는 연설의 감동적인 결말 부분 역시 아치볼드 케어리라는 흑인 목사가 1950년대에 한 연설과 상당부분 비슷하다. 다만, 케어리 목사의 연설 역시 기존에 있었던 노래 가사에서 따온 것. 즉 그의 유명한 인권 연설과 논문 다수는 상당 부분을 표절한 셈인데, 다만 표절이라고 결론이 난 상태는 아니고 논란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독창적인 논문이나 저술도 아니고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한 연설이라면 최대한 감명깊은 표현을 어디서라도 끌어와서 쓰는 것이 당연하다. 연설인 만큼 주석을 달아서 출처를 밝힐 수도 없고 이것을 표절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이는 킹 목사가 위대한 연설가는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지만, 위대한 운동가였다는 평가에 흠이 있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킹 목사도 잘못된 행동을 했지만 그의 공적 모두를 깎아내린다면 사회적으로 비난 받을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 등도 현재 여러 행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기에 당연히 잘못된 행동들이 지적될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간디와 테레사의 인류애적 헌신과 자기희생적 봉사의 업적 및 공적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킹 목사는 흑인들의 인권과 인종차별 철폐라는 인류애적 가치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으며 모든 흑인들의 영웅'''이었다. 인도인에게 간디가 지금의 인도를 있게 한 인물인 것처럼 킹 목사 역시 흑인들에게 차별없는 사회를 위해 헌신하다 간 흑인 인권 운동의 아이콘이다. 그의 잘못된 행동은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그가 남긴 업적과 인종차별 철폐 및 인종간 평등에 대한 교훈은 결코 폄하될 수 없는 숭고한 것이며 그는 미개한 취급을 받던 흑인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노력하다 삶을 마감한 위인이었다. 그의 잘못된 행적 몇 가지로 그의 모든 철학과 공로를 깎아내리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며 모든 인종의 평등에 관한 그의 교훈은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배워야 할 중요한 가치다.
현재 킹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Martin Luther King, Jr. Day)"로써 모든 미국인들에게 기려지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데이는 미국의 연방 공휴일로, 킹의 생일 즈음으로 설정해서 1월 셋째 월요일이다. 이름 그대로 마틴 루터 킹을 기리기 위한 날로 처음 공휴일 지정된 1986년에는 기념일 며칠전 레이건 대통령이 킹 목사의 미망인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기념행사가 있었다. 개인의 탄생일이 국가 공휴일이 된 것은 조지 워싱턴에 이어 두 번째이며 일반인의 생일이 공휴일이 된 것으로는 최초라고 한다.

5. 여담


  • 마르틴 루터와는 다르다. 마틴 루터 킹이 마르틴 루터의 이름을 딴 것이다. ‘루터’는 독일어 발음이므로, 킹 목사의 모국인 미국 영어 발음대로 읽으면 ‘마틴 루서 킹 주니어’라고 읽어야 하고 외래어표기법에 의하더라도 그와 같이 적어야 한다.[13] 하지만 마르틴 루터의 영향인지 이미 ‘마틴 루터 킹’이라는 발음과 표기가 한국 내에서 널리 통용되어 이 항목 표제는 ‘마틴 루터 킹’으로 하였다. 물론 ‘마틴 루서 킹’으로도 본 항목에 들어올 수 있다.
  • 넬슨 만델라와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 마이클 조던은 토크쇼 진행자 제이 레노와의 인터뷰 도중 '한번 만나보고 싶은 과거의 인물'로 킹 목사를 꼽았다.
  • 공화당원이었다. 킹이 사회운동을 하면서 좌파 운동가와 친하게 지내거나 스스로 좌파 운동가를 표방했다는 점을 보면 좀 의아하겠지만 경제대공황 이전까지만 해도 링컨 대통령이 공화당원이었다는 점때문에 미국 내 흑인들은 공화당 지지성향이 강했고, 경제대공황 이후로 그래도 흑인들의 대다수가 일자리 제공 및 복지정책 시행등의 이유로 민주당을 지지하게 되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종차별을 주도했던 미국 남부 백인들도 이때까지는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흑인들도 아직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1960년대 민권운동 시기 당시에 공화당이 미온적으로 대처하면서 한 편으로는 이를 내세우면서 미국 남부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했고, 반면 존 F. 케네디린든 B. 존슨같은 민주당 진보계 정치가들은 민권법을 밀어붙이고 스트롬 서먼드같은 민주당 딕시크랫 정치가들은 이런 움직임에 반발해 남부 공략에 힘을 쏟던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등의 정치적 변동이 있음에 따라 공화당 성향의 흑인들도 대다수가 민주당 지지로 돌아서고 반대로 남부 백인들이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면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러한 공화당과 민주당의 상황 변화를 대변하는 사례가 바로 마틴 루터 킹이 재직했던 에벤에셀 침례교회의 담임목사 출신인 라파엘 워녹이 조지아 주에서 민주당 당적으로 미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것.
    • 정치적으로는 미국 정부와 충돌이 심했는데, 일단 FBI에서 킹과 미국 공산당 내의 연계활동에 대해 특히 경계했다. 이유는 저명한 뉴욕 변호사이자 킹 목사의 조언자였던 스탠리 리바이슨(Stanley Levison)이 미국 공산당과 연계 되어있다는 것과 킹 목사의 다른 동지였던 헌터 피츠 오델(Hunter Pitts O'Dell) 이 미국 공산당의 반미활동협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s)에 충성을 맹세한 것에 대해 연관이 되어 있다는 혐의가 있었다. 하지만 1979년, FBI는 증거불충분으로 킹 목사와 반미활동협회간의 연계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킹 목사도 공산당과의 협의를 부인했지만 당시 FBI 의장이었던 후버는 루터 킹 목사의 부인을 믿지 않았고 킹 목사도 이에 반발해 후버를 비난했다고 한다. 킹 목사의 사생활까지 테이프와 녹음으로 감시하기까지 했다고. 거기다 베트남 전쟁 때 반전운동을 벌여 당시 대통령 린든 B. 존슨에게도 위선적인 설교사라고 비난을 들어야 했다.
  • 위에 묘사된 FBI와 초대 국장 후버와의 악연 덕에 당연히 킹 목사의 암살에 FBI가 개입된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도 있고 미드에서 이전부터 정부의 일에 개입한 비밀요원을 소개할 때 대부분 킹 목사 암살의 진범임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X 파일의 담배 피우는 남자.
  • 트레키들과도 연이 있다. 한창 인종차별성차별 논란이 극에 달한 60년대와 70년대에 흑인 여성 캐릭터인 니오타 우후라의 등장이 잦은 걸 두고 NBC의 높으신 분들이 진 로덴베리에게 우후라 캐릭터를 없애라고 압력을 넣고 실제로 우후라의 비중은 거의 없어지기까지 했었다. 이에 우후라 역의 배우 니셸 니컬스는 낙담하고 사표까지 썼었는데[14], 어디서 소문이 흘렀는지 한 팬이 만나자고 요청을 했었다. 그 팬이 마틴 루터 킹이었다. 스타 트렉이 사람들에게 인종 차별을 극복할 힘을 주고 당신이 분한 캐릭터야 말로 자신이 주장하는 바이니 절대로 역할을 그만두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우후라 비중이 늘어나는 건 물론, 스타 트렉은 여러 사회 문제를 은유를 통해 비평하는 단순한 SF쇼 이상의 매체로 자라났다.[15]
  • 창작물 쪽에서는 조지 워싱턴의 항복으로 미국 독립전쟁이 잘 끝나고 탄생한 영국령 북미연방을 그린 해리 터틀도브의 두명의 조지에서 1987년 현재 북미연방의 지도자로 나온다.[16] 1. "정직한" 사업가 리처드 닉슨을 암살하고 2. 조지 워싱턴의 항복을 그린 두 명의 조지라는 그림을 훔친 백인우월 분리주의자 모임인 자유의 아들들은 최종적으로 그를 암살하려는 듯하다.
  • X-Men의 캐릭터 프로페서 엑스는 마틴 루터 킹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온건파적인 느낌 때문으로 보이며, 라이벌 매그니토말콤 엑스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과격한 급진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모티브를 따온 모양이다.
  • 2015년에 그의 흑인 인권 운동을 다룬 영화 셀마가 개봉했으며 호평을 받았다. 흑인배우 데이빗 오예로워가 '마틴 루터 킹'을 맡았다. 셀마는 그가 1965년 흑인 인권 운동을 활발히 벌였던 앨라배마 주의 도시 이름이다.[17] 예로부터 앨라배마를 비롯한 미국 남부 지방은 인종차별이 극도로 심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 어디까지나 농담이다. 그의 열망은 역할 바꾸기가 아니라 동등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훌륭한 왜곡형 고인드립 되시겠다.다만 약간 진지하게 따져 보면, 흑인과 백인이 함께 웃으며 노예제를 풍자하는 역할극을 찍고 노는 것 또한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흑인이 백인과 동등해지는 꿈에 매우 근접한 현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냥 농담이나 마틴 루터 킹의 이상을 왜곡하는 드립이 아니라 그의 꿈의 실현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더 적절한 사람을 쓴다.
  • 미국에는 이 사람 이름을 딴 거리가 많다. 주로 흑인들이 많은 마을들에 이 거리 이름이 붙어 있다.

6. 관련 문서



[1] 이 연설은 후에 표절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으나 자세히는 모른다. 같은 노래의 몇몇 소절을 인용한 것이 1951년 아치발드 캐리 주니어의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쓰인 스피치와 같다는 점에서 표절 의혹이 생겼으나, 이러한 노래의 몇몇 소절을 인용하는 것은 아프리칸-아메리칸 교회에서는 흔한 일이기에 의혹은 의혹일 뿐 표절이라고 하기엔 증거가 없다.[2] 어렸을 적의 일화로, 킹이 옆집의 백인 쌍둥이 형제와 놀려고 했는데 그 형제의 어머니가 "넌 '''검둥이니까 검둥이들하고 놀아!'''"라고 했다. 킹이 울며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 앨버타 윌리엄스 킹(Alberta Williams King)이 어린 킹을 달래면서 왜 흑인이 차별받는지, '''인종차별이 정당한 것인지'''를 되물으며 부당한 현실을 알려줬다고 한다.[3] 당시 미국 어디에나 그랬겠지만, 킹 목사의 고향은 텍사스, 앨라배마, 미시시피와 함께 지금까지도 인종 차별에선 1, 2위를 다투는(?) 조지아 주다.[4] 킹이 대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했었다. 그런데 백인 식당 주인이 "흑인 새끼들한텐 음식 안 파니 당장 꺼져!"라며 '''총을 쏘고(!)''' 난동을 피워 도망가야 했다. 나중에 신고를 받은 경찰이 도착했지만 백인 손님들은 전부 침묵했다. 이에 백인 대학생들이 증언하기로 했지만, KKK 등 백인 우익/과격단체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증언을 취소했다. 그래서 식당 주인은 무죄로 풀려난다.[5] 제임스 얼 레이는 이전에도 교도소를 3번이나 복역한 범죄자였다. 킹 목사를 살해한 뒤 영국으로 도주했으나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미국으로 넘겨져 99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하다 1998년 교도소에서 70세로 사망한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살해 1년 전 이미 교도소에서 수감 중 탈옥한 죄수였다![6] 많은 수업이 주로 월요일 수업을 기준으로 한 주의 커리큘럼이 돌아가기 때문에 월요일을 쉬면 그 주의 모든 수업이 영향을 받는다.[7] 영화 셀마(2014)에서도 이 점을 고증에 반영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연설에서 항상 흑인을 negro로 지칭하며, 영화상에 잠시 단역으로 등장하는 말콤 X는 당시 오히려 비하적이라고 여겨졌던 black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인권 운동에 있어 온건파가 정치적 올바름을 반영한 용어를 쓰고 과격파가 비하적 용어를 취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인도에서도 불가촉천민 문제를 두고 이에 소극적이었던 마하트마 간디는 하리잔(신의 아이들)이라는 완곡한 단어를 썼는데 진짜 불가촉천민 출신 정치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는 이 용어에 반대하며 달리트(불가촉천민이라는 뜻을 그대로 가진 단어)를 쓰는 것을 고집했다. 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단어가 오히려 문제의 심각성을 은폐/축소한다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8] 출애굽기모세도 '약속의 땅' 가나안 에 들어가지 못했다. 매우 상징적인 발언. 그리고 마치 유대 신화의 40년의 방황을 예고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루터 킹 사후 40년 뒤인 2008년,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 당시 루터와 함께 했던 상당수 인사들도 살아서 이 사건을 보게 된 경우가 적지 않다.[9] Mine eyes have seen the glory of the coming of the Lord. 미국의 군가이자 찬송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의 첫 구절이기도 하다.[10] 관련 흑역사를 다룬 작품에는 항상 나오는 이야기, SBS에서 더빙 방연한 후버 관련 전기 영화에서는 후버와 부하들의 대사로 킹 목사의 신음소리 언급이 나온다. KBS에서 방영한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외화에서 느글느글한 원로 FBI 요원이 자기가 회의를 느꼈을 때가 킹 목사 침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했을 때라고 할 정도였다.[11] 마틴 루터 킹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케네디를 비롯한 높으신 분들에 대한 치부들은 대부분 2027년을 한도로 해서 아카이브에 넣었다.[12] 심지어 그 학생이 실수한 부분까지도 그대로 베꼈다.[13] 언론 등에서는 ‘마틴 루서 킹’이라고 적는 경우가 많다.[14] 그냥 차별 문제로 나가려던게 아니라 브로드웨이쇼를 의뢰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 배우의 전공도 그쪽.[15]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사회 비판을 둘러 말하려고 SF장르로 간 것이었다. 등장인물을 문제삼자면 우후라 말고도 그 사람들이 거품 물만한 게 수두룩하다. 주조종사인 히카루 술루는 동양인임에도 선장-부선장-기관장 다음의 지휘서열이 4위라서 선장과 부선장이 행성으로 내려가고 기관장이 동력문제로 자리를 비우면 자주 지휘권을 넘겨받는다. 이소룡이 그린호넷에서 조연인 카이토로 출연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는 걸 생각하자.[16] 영국이 미국보다 흑인 해방이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이쪽 세계에서는 영국이 의외로 흑인에게 관대하다.[17] 정확히는 흑인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