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기스문트 탈베르크
1. 개요
지기스문트 탈베르크는 스위스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다. 그는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었으며, 쇼팽, 리스트 등과 더불어 피아노 연주기술의 발전에 엄청난 공헌을 했으며 피아노 분야에서 리스트와의 라이벌관계에 있었다. 특히 피아노에서 '''세 손 연주 효과(three-hand effect)'''를 구현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기법은 라이벌 리스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대에는 리스트 못지 않은 유명세를 지닌 피아니스트였지만, 사후 기교에 치우친 그의 작품들은 사실상 잊혀졌으며 20세기 이후에는 음악 전문가나 일부 클래식 매니아들만 겨우 알고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다행히 21세기 이후 잊혀진 음악 발굴 노력에 힘입어 현재는 그의 작품이 드물게나마 연주회 레퍼토리가 되고 있으며 음반도 나오고 있다.
2. 생애
1812년 스위스 제네바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탈베르크의 태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그의 공식적인 부친으로 알려진 요셉 탈베르크의 아들이 아니라 실제로는 귀족가문의 사생아라는 것. 탈베르크 본인은 이 소문을 부정했지만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데다 실제 친부로 의심받고 있는 모리츠 디트리히슈타인공(Prince Moritz Dietrichstein)과 꼭 닮았다는 소문 때문에 그의 생애 내내 이 루머가 따라다녔으며 현재에도 이 소문의 진위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탈베르크는 그의 경쟁자였던 리스트와 마찬가지로 10살때 음악의 본고장 빈으로 옮겨왔으며 14살에는 다시 런던으로 건너가서 베토벤의 제자였던 이그나츠 모셀레스( Ignaz Moscheles)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모셀레스에 따르면 탈베르크는 자신에게 지도를 받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피아니스트로 손색이 없는 연주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 말로 미루어볼 때 탈베르크는 상당히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던 것 같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처럼 탈베르크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그가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던 것만은 확실했고, 14살에 런던에서 연주자로 데뷔한 후 한동안 빈과 런던을 오가면서 연주자로 활동했다. 16살에는 자신의 공식 첫 작품인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이리안테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작곡했으며, 이후 탈베르크는 생애 내내 다른 작곡가의 유명작품을 바탕으로 한 환타지나 연습곡 등을 즐겨서 작곡했다. 한편 그의 전매특허인 '세 손 효과(Three-hand effect)' 작법은 1834년경 작곡된 모차르트의 돈 주앙 주제에 의한 환상곡(Grande Fantaisie et Variations sur 'Don Juan' de Mozart, op. 14)에서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듬해 작곡된 유명한 '모세 환상곡(Fantasia on Rossini's 'Moses', op. 33)에서 본격화된다.[1] 이 모세 환상곡은 19세기 동안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필수 연주곡목이 되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1830년대 이후 피아니스트 탈베르크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퍼졌고 리스트와 더불어 각지에서 초정을 받아 연주회를 가졌으며 돈도 상당히 많이 벌었다. 1836년 탈베르크는 프랑스 파리에서 생애 최초로 피아노 독주 콘서트를 개최했는데[2] 여기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24살의 탈베르크는 유럽 음악계의 명사가 돼서 당대의 유명한 음악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리스트와는 본격적으로 라이벌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탈베르크와 리스트는 1837년 파리에 있는 이탈리아에서 망명한 왕녀 크리스티나 데 벨조이오소의 살롱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연주대결을 펼쳤는데, 후술하는 것처럼 이 대결의 승패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이 연주 대결의 승패와 상관없이 탈베르크는 이후에도 피아니스트로 계속 승승장구하면서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다녔으며, 뛰어난 연주실력과 더불어 잘생긴 외모 덕분에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이처럼 여러가지 측면에서 자기 라이벌과 판박이일 정도로 비슷했는데, 다만 평생 독신이었던 리스트와 달리 탈베르크는 31살때인 1843년 4살 아래인 이탈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라블라체(Francesca Lablache)와 결혼했으며 자식도 있었다.[3]
1850년대부터 탈베르크는 아메리카 대륙에도 진출했는데, 1855년에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와 아르헨티아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개최된 연주회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듬해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역시 엄청난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이에 고무된 탈베르크는 3년가량 미국에 머무르면서 뉴욕을 중심으로 연주회를 개최했다.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탈베르크는 연주회를 통해 엄청난 돈을 벌었으며 말 그대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하지만 1858년 여름, 부인 프란체스카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탈베르크는 예정되어 있던 시카고 연주회를 무단으로 빼먹고 급하게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그가 갑자기 유럽으로 돌아간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베이스 가수였던 장인 루이지 라블라체(Luigi Lablache)가 사망하면서 그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다만 그런 이유만으로 탈베르크가 그 엄청난 돈벌이를 덥썩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데,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부인에게 들켰다거나 자신의 실제 부친인 모리츠 디트리히슈타인이 사망해서 그 유산을 분배받기 위해서 돌아갔다는 등의 다른 주장도 있다.[4]
이유야 어찌됐건 탈베르크는 장인이 사망한 후 장인이 살았던 나폴리의 집을 넘겨받았다. 이 때부터 탈베르크의 연주와 작곡활동은 크게 줄었고, 1862년 파리와 런던, 1863년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연주회를 개최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연주활동은 하지 않았으며 작곡도 중단했다.
음악계에서 은퇴한 이후 나폴리의 집에서 조용히 살던 탈베르크는 1871년 나폴리에서 59살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나폴리의 공동묘지(Nuovo Cemetary)에 안장되었다.
3. 작품 성향
탈베르크는 19세기 가장 성공한 최고의 비르투오소 중 한 명이었으며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그는 뛰어난 연주자일 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 피아노를 위한 여러 가지 독창적인 수법을 창안했는데, 이 수법은 1830년대 이후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고 당대의 많은 다른 작곡가들이 그의 스타일을 모방했다.
피아니스트답게 그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 독주곡이다. 대부분이 환상곡/연습곡/카프리치오 등의 자유로운 양식의 작품들이며 피아노 협주곡과 소나타는 한곡씩만 썼다. 피아노 작품 이외에는 독일어 가곡과 두 개의 오페라 등이 있는데, 두 오페라 모두 작품성이나 흥행이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5]
탈베르크의 음악 스타일은 세 손 연주효과(Three-hand effect)와 아르페지오 및 패러프레이즈(paraphrase)로 요약할 수 있다.[6] 특히 그에게 비르투오소적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바로 '''세 손 연주 효과'''인데, 연주자가 피아노 독주곡을 연주할 때 분명 두 손으로 연주하지만 청자 입장에서는 마치 세 손으로 연주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는 주로 양손을 번갈아가며 아르페지오로 피아노의 전 부분을 빠르게 횡단하면서 중간중간 주요 멜로디가 엄지손가락으로 연주되는 방식으로 이 효과를 추구했다. 이것은 기술적으로 크게 어려운 테크닉은 아니지만, 청중들이 듣기에 마치 매우 어려운 피아노 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연주 효과를 주었다. 특히 1830년대에 처음 소개된 이 방식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는데, 청중들은 탈베르크가 연주할 때 어떻게 연주하는지 궁금해서 음악을 감상하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라봤을 정도라고 한다.
다만 이 세 손 효과는 탈베르크의 창시물은 아니다. 원래 이는 엘리아스 패리시-알바스(Elias Parish Alvars, 1808-1849)라는 하프 연주자가 창시한 기법인데, 탈베르크는 그가 연주하는 하프에 굉장한 감명을 받고 피아노에 그를 적용시켜 적극적으로 사용한 인물이다. 세 손 효과에서 가장 널리 인용 되는 탈베르크의 모세 판타지도 사실 패리시-알바스가 만든 판타지를 반쯤 그대로 가져다 쓴 결과물이다.
이 세 손 효과를 쉽게 이해하려면 피아노 반주가 붙은 가곡의 성악 파트나 오르간곡의 페달파트를 그대로 피아노로 옮겨서 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이 세 손 효과는 가곡이나 오페라, 오르간곡 등의 편곡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으며 리스트나 부조니 등 편곡의 대가들이 매우 즐겨 활용했다.
탈베르크 역시 이러한 세 손 효과와 화려한 아르페지오를 조합해서 당대에 유명한 오페라나 민요, 유행가 등의 선율을 바탕으로 한 환상곡이나 변주곡, 카프리치오 등의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작곡 스타일은 탈베르크 작품의 '''강점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데, 분명 세 손 효과 + 아르페지오 조합은 당시 기준으로 매우 참신한 기법이었고 연주자의 기교를 과시하는데 효과적이었지만 문제는 그게 탈베르크 음악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위에 예시한 로시니의 모세에 의한 환상곡을 들어보면 주 선율이 큰 변화없이 반복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아르페지오가 이 선율을 반주하고 장식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그의 작품 상당수가 이런 단순한 전개방식을 뼈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탈베르크의 음악은 주제 자체를 효과적으로 변화시켰던 베토벤이나 다양한 표현수단을 조합해서 다채로움을 추구했던 쇼팽 리스트 등의 음악에 비해 천편일률적이고 단조롭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탈베르크의 작곡법은 몇가지 독창적인 기법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작법 자체는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었는데, 쇼팽이나 리스트가 변칙적인 전조, 극단적인 도약이나 하강, 불협화음 등의 대담한 수법을 다양하게 사용했던 것과 달리 탈베르크의 작법은 고전파에 가까운 복고풍의 음악문법을 고수하고 있다.
탈베르크와 리스트가 환상곡/변주곡 등의 소재로 삼은 작품의 작곡가들을 살펴보면 이런 차이가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탈베르크가 주로 베버/슈베르트/로시니/벨리니/도니제티/마이어베어 등 고전기와 낭만파 초기에 걸쳐 있는 작곡가들의 작품을 주로 인용했다면 리스트는 위에 언급한 작곡가 외에도 바그너/베르디/샤를 구노/멘델스존 등 한세대 이후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상당히 많이 인용했으며 심지어 한참 후배인 카미유 생상같은 작곡가의 곡을 이용해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7]
탈베르크가 나름의 음악적 공로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경쟁자였던 쇼팽이나 리스트에게 밀려서 사실상 잊혀진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음악성이 담보되지 않고 무미건조한 화려함으로 일관하는 음악은 일시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나마 탈베르크와 동시대의 피아니스트였으며 똑같이 기교위주의 음악가로 취급받으면서 잊혀졌던 샤를 발랑탱 알캉같은 경우에는 21세기 이후 재평가되면서 나름의 음악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탈베르크의 경우에는 위에 언급한 한계 때문에 재평가를 받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4. 프란츠 리스트와의 라이벌 관계
오늘날 탈베르크는 그의 음악이나 연주 스타일보다 프란츠 리스트의 라이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두 사람 모두 기교의 대가이자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청중을 열광시키는 당대의 아이돌 스타였다.
다만 두 사람의 성격은 차이가 많이 났는데, 리스트는 소싯적에 부친을 잃고 한동안 어렵게 살았던 경험 때문에[8] 성공한 후에도 부를 과시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했다. 반면 어렵게 살아본 경험이 없고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부와 명성을 획득한 탈베르크는 고상한(안좋게 말하면 위선적인) 귀족 성향의 취향을 갖고 있었으며 과시욕도 강했던 사람이었다. 탈베르크는 리스트를 만났을 때도 자신의 부를 적잖이 과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리스트는 탈베르크의 속물근성을 싫어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탈베르크의 연주나 음악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탈베르크의 연주에 대해 “탈베르크는 두 가지 방식을 혼용해서 새로운 피아노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하지만, 참신하게 피아노 패시지를 연주하긴 해도 주요 멜로디를 없애는 효과를 준다.”고 비판했다.
다만 리스트도 탈베르크의 아르페지오와 옥타브에 대해서는 상당히 칭찬을 했는데, 리스트 뿐만 아니라 모든 평론가들과 작곡가들이 이에 대해서는 호평을 했다.[9] 쇼팽도 “그의 옥타브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완벽하다”고 평했을 정도.
반면 탈베르크가 리스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다만 그가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서는 “매우 충격적으로 놀랐으며(stupefied), 한 번도 이런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애초에 우아한 스타일을 추구했던 탈베르크는 대놓고 누구를 비난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설령 리스트를 안좋게 생각했더라도 그걸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리스트와 탈베르크 둘 사이의 세기의 피아노 배틀은 전술한 바와 같이 1837년 3월 31일 프랑스 파리의 한 살롱에서 벌어졌다. 탈베르크는 리스트에게 고상하게 결투를 신청하는 서신을 보내는데, 우아한 말투로 은근히 자신의 우위를 주장하는 이 서신은 리스트를 제대로 자극했으며 결국 맞대결이 성사되었다.
배틀 당일, 탈베르크는 사람들이 모인 연주회장에서 모세 판타지를 매우 화려하게 연주했다. 이에 맞선 리스트도 자신의 작품인 니오베 판타(Grand Fantasy on Pacini’s Niobe)를 연주했다. 이 대결은 당시 파리에서드 큰 화제를 모았는데, 결과는 대체로 무승부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10]
리스트와 탈베르크의 대결을 지켜보던 한 음악 평론가는 자신의 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세기의 대결이 다행히(?) 무승부로 끝난 덕분인지 두 사람 모두 이후로도 계속 피아니스트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다만 탈베르크는 50대 초반에 은퇴할 때까지 작곡보다는 연주활동에 주력한 반면, 리스트는 30대 중반에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을 만난 후 순회연주자 생활을 중단하고 작곡가이자 음악교육자로 변신했다. 이처럼 작곡과 교육에 매진한 덕분에 리스트는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한명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리스트가 더 잘 통제되고 통찰력있고, 활기차고, 열정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탈베르크가 더 열정적이고 부드러움을 가지고 연주했던 적은 없었다. 그들 모두 신중하게 자신의 가락에 머물렀지만, 둘 다 자신만의 테크닉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정말 훌륭한 마치 마상 창시합 전투 같았다. 가장 심오한 고요함이 고급스런 아레나를 강타했다. 그리고 마침내 리스트와 탈베르크는 모두 자신이 이 모임에서 최고의 승리자라고 선언하였다. 즉 2명의 승리자만이 있었고, 상대방을 압도한 존재는 없었다.[11]
"'''
- Jules Janin[12]
특이한 것은 리스트는 탈베르크의 세 손 연주 효과를 비롯해 그의 연주 방식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을 했지만, 결국 리스트 자신도 탈베르크의 방식을 자신의 곡을 작곡할 때 썼다는 점이다. 리스트 작품 중 탈베르크의 수법을 적용한 곡들이 많이 있는데(대표적인 경우가 슈베르트의 가곡 편곡) 아르페지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탈베르크보다는 좀더 다양한 연주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1] 두 곡은 비슷한 시기에 작곡됐지만 출판년도가 달라서 작품번호 차이가 꽤 난다. 돈 주앙 환상곡는 1835년, 모세 환상곡은 1839년에 출판됐다.[2] 당시에는 피아노 단독으로 콘서트를 개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관현악이나 다른 연주에 동반되는 형태로 행해졌다.[3] 탈베르크의 아내 프란체스카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42세에(1858년) 임신에 성공해서 이듬해 나자레나 탈베르크를 낳았다.[4] 불륜건은 나름 정황이 있으나 디트리히슈타인건은 딱히 근거가 없다.[5] 그나마 두 오페라 중 플로린다(Florinda, op. 71)는 악보가 출판됐지만 크리스티나(Cristina)는 공연해서 망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고 악보는 현재 실전된 상태이다.[6] 패러프레이즈는 다른 작곡가의 유명작품이나 민요 등의 선율을 소재로 삼아서 곡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7] 탈베르크도 음악인생 최후반기에 베르디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그대로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끝내는 바람에 나름의 음악적 실험도 거기서 끝나버렸다.[8] 돈이 없다는 이유로 첫사랑에게 차이고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리스트 항목 참조.[9] 다만 리스트는 탈베르크의 아르페지오가 뛰어나기는 한데 너무 아르페지오에 의존하고 있다는 비판도 함께 했다.[10] 리스트가 우세했다는 평가와 탈베르크가 우세했다는 평가가 호각세를 이루었다. 그래서 자료마다 이 대결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11] Never was Liszt more controlled, more thoughtful, more energetic, more passionate; never has Thalberg played with greater verve and tenderness. Each of them prudently stayed within his harmonic domain, but each used every one of his resources. It was an admirable joust. The most profound silence fell over that noble arena. And finally Liszt and Thalberg were both proclaimed victors by this glittering and intelligent assembly… Thus two victors and no vanquished …’[12] the Journal des Débats의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