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
[image][1]
'''본명'''
헝가리어: Liszt Ferenc (리스트 페렌츠)
독일어: Franz Liszt (프란츠 리스트)
'''출생'''
1811년 10월 22일
[image] 오스트리아 제국 라이딩[2]
'''사망'''
1886년 7월 31일 (향년 74세)
[image] 독일 제국 바이로이트
'''직업'''
작곡가, 피아니스트
1. 소개
2. 이름 표기
4. 음악가들과의 관계
4.1. 스승
4.2. 선배 음악가
4.3. 동료 음악가
4.4. 후배 음악가
4.5. 주요 제자들
5. 음악 성향
5.1. 작곡 성향
5.2. 연주 성향
6. 후대의 평가와 영향
7. 여담
8. 연주와 레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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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헝가리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문학 애호가, 뛰어난 교사, 재능 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프레데리크 쇼팽이 제시한 피아노 기교를 퍼뜨리고 발전시켰으며, 교향시 양식을 창시한 초기 낭만파의 창시자 중 한명이다. '''최고의 기교를 가지고 있는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3]로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명성이 자자하며, 쇼팽과 함께 피아노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이룩한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평가받는다. 특히 사기적인 피아노 테크닉 스킬로 인해 피아니스트들과 피아노 전공자들에게 살인적인 기교로 명성이 자자하다.
일명 '''피아니스트의 왕, 피아노의 귀신, 피아노의 마술사[4], 피아노의 파가니니[5]'''라 불리며, 상술했듯이 쇼팽과 함께 19세기 피아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고 바그너와 함께 19세기 서양음악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6] 그 외에도 교향시를 창시한 인물로 '''교향시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리스트는 작곡 뿐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나 비 피아노곡을 피아노 곡으로 편곡한 곡들도 상당히 많은데, 파가니니 대연습곡이나 베토벤 교향곡, 생상스 죽음의 무도 등이 대표적이다. 이 부문에 관한 그의 공로는 후배격인 '''라흐마니노프와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로베르트 슈만, 프레데리크 쇼팽, 펠릭스 멘델스존 등처럼 요절한 동년배 천재 음악가들과 달리, 별다른 잔병치레도 없이 대단히 건강하게 장수해서 동기들 중 몇 안되게 초, 중~후기 낭만파 일대를 전부 풍미할 수 있었던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가 서양 음악계, 나아가서 전 세계적으로 음악계에 남긴 영향력 역시 대단하다.
리스트는 낭만주의 음악 시대 진보 그룹인 신독일악파(New German School)의 대표 인물이었으며, 바그너도 이 그룹에 속하였다. 리스트와 바그너는 미래 음악을 추구했으며, 기존의 교향곡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탈피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리스트는 교향시, 바그너는 음악극이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를 창작해내어 후대 음악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리스트와 바그너의 광적인 팬덤을 일컫는 용어인 리스토마니아, 바그네리안이 현재까지도 그들을 매우 추종할 정도다. 이런 리스트가 주축이 된 신독일악파는 신고전주의 성향을 띠는 보수주의 그룹과 상당히 대립했으며, 보수주의의 대표 인물은 요하네스 브람스다.
리스트가 피아노 음악에 미친 영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쇼팽이 2집의 연습곡(etude)으로 자신의 테크닉에 대해 정리/완성하고 특유의 시적인 서정성으로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주었다면, 리스트는 그에게 바톤을 이어받아 피아노의 기교적 가능성과 표현력에 대한 극한을 추구하고 이에서 비롯되는 최고의 화려한 효과를 구현했다. 특히 피아노 한대만으로 오케스트라 곡을 표현하기 위한 최고의 효과를 피아노 기교 속에 다 담아냈으며, 이는 그의 회상곡과 같은 패러프레이징 편곡들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최초로 악기 하나만을 위한 독주회를 실행했으며 공연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한편 연주와 작곡 외에도 당대의 많은 후배 작곡가들의 스승이자 후원자 역할을 하였으며 각종 음악사업을 추진하는데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리스트 이후 에르뇌 도흐나니, 벨라 바르톡, 코다이 졸탄, 리게티 죄르지헝가리의 수많은 대작곡가를 배출한 헝가리 국립 음악학교(Hungarian National School of Music)는 바로 리스트의 주도로 설립된 것이다. 현재까지도 그의 모국인 헝가리에서는 리스트를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추앙하고 있다. 이에 따라 헝가리의 관문인 부다페스트의 국제공항 이름에도 리스트 이름이 들어갔을 정도다.[7]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가 죽은지 100년째 되는 1986년부터 프란츠 리스트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3년 간격으로 시행하고 있다.
초상화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뛰어난 외모를 자랑했다. 금발에 키가 크고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카리스마가 넘쳤다. 슈만은 <음악신보>에 "빈의 어느 유명 판화가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 리스트의 얼굴은 어떤 화가라도 그리스 신의 모델로 삼을 만 하다고 말했다."라고 쓰기도 했다. 슈만의 같은 글에는 "특히 창백한 얼굴, 마른 몸매, 인상적인 옆얼굴, 머리끝으로 갈수록 인물의 표정이 풍부해지는 것까지 그(리스트)는 젊은 장군 시절의 나폴레옹과 비슷하다."라는 언급도 있다.

2. 이름 표기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는 독일어식 이름이다. 성이 앞에 오는 헝가리어 이름은 '리스트 페렌츠(Liszt Ferenc)[8]'이다.
리스트의 출생지와 유년기 성장지는 헝가리의 라이딩(헝가리어로는 도보랸) 지역으로 독일어권에 속한 지역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아예 오스트리아[9]로 넘어간 지역이다. 한편 리스트의 부계는 헝가리인이고 모계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며, 리스트 본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헝가리인으로 두고 있었다. 리스트라는 성도 헝가리식 성이다.

3. 생애




4. 음악가들과의 관계



4.1. 스승


리스트의 첫번째이자 유일한 피아노 스승. 9살부터 체르니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체르니는 리스트와의 첫만남에 대해 "창백하고 건강도 좋지 않아보이는 소년", "(피아노를 연주할 때)술에 취한 사람처럼 움직였고 연주는 체계가 없이 손가락을 건반 위에서 되는 대로 움직였다"고 서술하면서도 "그럼에도 재능은 놀라웠으며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초견연주를 시키고 보니 하늘이 내린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고 회상했다. 원래는 상당히 비싼 수업료를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침이었던 체르니였으나 어린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재능을 인정하여 특별히 한시간에 1굴덴만 받고 피아노를 가르쳐주었으며, 리스트 가족의 경제사정이 갈 수록 어려워지자 아예 레슨비를 받지 않고 리스트를 가르쳤다. 처음 몇 달은 철저하게 기교 연습에만 매진하도록 했으며 리듬을 엄격하게 통제 시키고 고른 소리, 노래하는 듯한 소리를 강조했다. 리스트는 초절기교 연습곡을 체르니에게 헌정했다.
빈에서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시기에 살리에리 밑에서 가창, 관현악 총보를 읽는 방법, 화성, 대위, 관현악 편곡 지식 등을 배웠다. 체르니와 마찬가지로 살리에리 또한 수업료를 받지 않고 리스트를 가르쳤다. 당시에 리스트 일가족은 경제형편이 어려워 빈 외곽의 여관에 머무르면서 체르니와 살리에리의 수업을 받으러 빈 시내까지 오갔어야 했는데, 살리에리는 이런 환경 때문에 리스트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걱정했다. 그는 리스트 부자 몰래 아담 리스트가 근무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리스트의 재능을 칭찬하며 그의 가족이 빈 시내로 이사 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편지를 써서 리스트 가족의 이사를 도왔다. 살리에리에게 배웠던 시절로부터 60년이 지난 후에도 리스트는 살리에리에 대해 "지금까지도 마음 깊숙히 감사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 페르디난도 파에르
  • 안톤 라이하
파리음악원 입학이 외국인이란 이유로 무산 되자 12세의 리스트는 개인교습으로 파에르에게 작곡을, 라이하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파에르는 파리의 테아트르 이탈리엥 음악감독으로서 리스트의 오페라 <동상슈> 위촉을 추진했으며, 라이하는 파리음악원의 대위법 교수였다.
위처럼 리스트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명망 높은 음악가들의 자비와 친절로 음악을 배울 수 있었는데, 이런 경험의 영향인지 리스트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후에는 수업료를 한 푼도 받지 않고 많은 제자들을 키우게 됐다.

4.2. 선배 음악가


리스트의 빈 데뷔콘서트에 참석한 베토벤이 그의 연주에 감동하여 무대 위로 올라와 리스트의 이마에 키스를 해줬다는 일화가 유명하고 이후에 판화로까지 그려졌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어린 리스트가 체르니와 함께 연주회 전날에 베토벤의 집을 방문한 기록은 남겨져 있지만 베토벤이 리스트의 콘서트에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신문에 언급되지 않으며, 리스트가 베토벤에게 키스를 받았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해줬다는 제자의 회고록도 리스트가 죽은지 12년이 흐른 뒤에나 출판 된 것이다. 아무튼 리스트는 음악가 중에서 베토벤을 가장 존경했고, 베토벤의 고향인 이 베토벤의 동상을 세울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란 이야기를 듣고 발 벗고 나서 자금을 모으기 위한 자선 연주회를 열거나 베토벤의 9개 교향곡을 모두 피아노로 편곡하는 작업을 완성하기도 했다.
리스트는 밀라노에 방문할 때마다 이미 오페라계에서 은퇴해 있던 로시니의 살롱을 방문하며 로시니와 교류했다. 1830년대 당시만 해도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는 인기 있어도 피아니스트나 유명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로시니와 그 동네 악보 출판 관계자의 인맥 덕분인지 리스트는 스칼라 극장에서 연주회를 열 수 있었다.

4.3. 동료 음악가


1830년 12월에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초연이 이루어졌는데, 그 전날에 지인을 통해 환상교향곡의 악보를 미리 접한 리스트가 베를리오즈에게 찾아간 것을 계기로 알고 지내게 됐다. 이 작품에 대해 청중의 반응은 상당히 엇갈렸지만 리스트는 열렬히 칭찬하고 갈채를 보냈다고. 1834년에 리스트는 환상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해서 자비로 출판하고 자신의 연주회에서도 연주했는데, 환상교향곡의 원곡의 악보 출판이 1845년에서야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리스트가 환상교향곡을 알리는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베를리오즈의 표제음악에 영향을 받아 리스트가 탄생시킨 것이 바로 교향시이다. 리스트는 파우스트라는 작품에 큰 애정을 갖고 메피스토 왈츠, 파우스트 교향곡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에게 처음으로 파우스트를 추천한 것도 베를리오즈이다. 파우스트 교향곡은 베를리오즈에게 헌정 되었다.
1840년대 이후 파리에서 급속하게 지지를 잃은 베를리오즈였으나 리스트는 이후로도 베를리오즈에 대한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바이마르의 카펠마이스터로 취임한 후에는 연주하기가 까다로운 베를리오즈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베를리오즈는 리스트가 있는 바이마르를 여러번 방문했는데, 그 중 한번은 카롤린 공작부인과 친해질 기회를 얻었고, 1958년 카롤린의 격려로 오페라 <트로이인>을 작곡한 베를리오즈는 이 작품을 카롤린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1882년 리스트의 회고에 의하면 1860년에 파리에서 연주된 바그너의 작품에 대한 베를리오즈와 바그너 사이의 비평논쟁 때문에 리스트까지 베를리오즈와의 관계가 복잡해졌다고 한다.
쇼팽은 1810년생, 리스트는 1811년생으로 거의 동갑에 둘 다 어릴 적 부터 신동으로 활약한지라 둘이 만나기도 전부터 비교되곤 했는데,[10] 정작 1832년 쇼팽의 파리 데뷔연주회에서 알게 된 뒤로 둘은 평생 리스트-탈베르크 같은 경쟁관계가 된 적이 없다. 리스트는 쇼팽의 재능을 대번에 알아보고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살롱계에서 살 길을 마련하도록 애썼으며 쇼팽을 평생 존경했다. 쇼팽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리스트의 연주를 높이 평가해서 자신의 에튀드를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스트의 작곡실력을 높게 쳐주지 않았고 그의 작곡능력에 대해 0점이라거나 남의 말을 타고 높은 산을 정복한다고 평하기도 했다.[11] 그래도 리스트를 신뢰했던 모양으로 연주회를 꺼리는 쇼팽이었지만 리스트와 함께[12] 여러번 무대에 올랐다. 자신의 아파트 열쇠를 그에게 맡기기도 했는데 리스트가 그렇게 받은 열쇠를 쇼팽이 애용하는 피아노 브랜드인 플레옐의 사장 부인과 관계를 가질 때 사용하는 병크를 저질러버린다.[13] 이 사건으로 인해 리스트와 쇼팽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꽤 있으나 이걸 계기로 당장 절교하진 않았다.
사실 쇼팽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 조르주 상드를 쇼팽에게 소개한 것도 다름 아닌 리스트다. 리스트와 마리 다구의 친구였던 상드는 리스트-다구 커플과 함께 스위스를 여행 했는데, 그 때 리스트로부터 쇼팽의 천재성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상드가 쇼팽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마리 다구가 파리에서 돌아와서 연 살롱에서 리스트의 중개로 쇼팽과 상드가 처음 만나게 된 것. 정작 둘을 소개시켜준 리스트는 상드와 다구의 사이가 나빠지자 불똥이 튀어 늘 상드에게 초대 받아서 방문했던 노앙의 집에 초대도 못 받고 쇼팽-상드 커플과 점점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이후로도 리스트는 바르샤바에서 연주회를 열 때 쇼팽의 가족들을 만나는 등 쇼팽과의 우정을 회복하려고 노력해봤지만 잘 풀리지 않은 채 쇼팽이 39세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쇼팽 사후에도 리스트는 최초이자 쇼팽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쇼팽 전기[14][15]를 쓰거나 연주회를 가질 때 쇼팽의 곡을 연주하는 등 쇼팽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16]
멘델스존이 16살일 때 처음으로 14살인 리스트의 연주를 들었는데 "손가락은 많은데 머리가 모자라다"는 감상을 남겼다고 한다.(...) 정식으로 서로 알게 된 건 1830년대 초반에 멘델스존이 파리에 머물 때로, 리스트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초견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음악에 있어 리스트는 진보적인 성향이고, 멘델스존은 보수적인 성향이라 멘델스존이 리스트의 화려한 연주에 불평하는 일이 많았다.[17] 그래도 친구라고, 리스트가 라이프치히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 슈만이 쓴 기사에 의하면 리스트의 컨디션 난조로 둘째 날 공연이 취소됐을 때, 멘델스존과 힐러 주최로 리스트를 위한 음악축제를 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음악성의 차이로 점차 교류가 없어졌다고 한다.
리스트는 일찍이 슈만의 재능을 알아보고 있었다. 편지로 작곡에 대한 조언을 주고 받았고 슈만은 리스트가 연주회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편지로 교류해오다가 1840년에 처음으로 실제로 만났는데 슈만은 마치 20년 지기를 만난 거 같다고 했다.
하지만 슈만과 결혼한 클라라는 리스트를 싫어했고, 낭만주의 논쟁에 있어 슈만은 바그너, 리스트가 속한 진보 진영의 반대인 보수적 낭만주의 진영에 속해있었기에 음악적으로 대립했다. 슈만은 <음악시보>라는 언론사를 설립하고 10년동안 편집자로 활동하다 사임했는데, 그 다음으로 편집장을 맡은 리스트의 막강한 지지자인 프란츠 브렌델이 슈만과 그의 무리를 공격한 일로 슈만과 리스트의 사이가 더 멀어졌다.
관계에 금이 갔지만 바이마르 시절 리스트는 슈만의 <괴테의 파우스트에 의한 장면> 3, 교향곡 4번, 피아노 협주곡, 4대의 호른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협주곡 등 그의 음악을 지휘와 피아노를 통해 적극적으로 연주했다. 리스트는 슈만이 자신에게 환상곡 op.17을 헌정했던 것에 대한 답례로 소나타 B단조를 썼는데, 악보가 전달 됐을 땐 슈만이 이미 정신병원에 입원된 상태라 슈만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클라라 슈만은 예전에는 피아니스트로서 리스트를 존경했지만 점차 그의 음악과 연주를 싫어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 수록 거부감은 더욱 심해졌다. 1854년, 슈만의 정신불안이 심해져 입원한 후 자녀 8명을 키우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클라라는 리스트에게 바이마르에서 자신도 연주를 할 수 있지 물었다. 리스트는 연주에 동의했고 함께 그 공연을 주관했으며 얼마후 <신음악시보>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실리는 비평에서 클라라를 칭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클라라는 리스트에 대한 태도를 전혀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신인 피아니스트들이 리스트를 모방하는 것을 경계하여 리스트 사후에 "그(리스트)는 뛰어난 비르투오소였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위험한 교본이다. 최근에 데뷔하는 연주가들은 대부분 리스트를 모방하고 있으나 그들에게는 정신도, 재능도, 고귀함도 결여돼 있다" 와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바그너와 리스트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840년대 초 파리라고 알려져 있다. 리스트는 일찍부터 바그너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의 인간성이 좋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추진력과 천재성만큼은 의문을 품지 않았다.[18] 1849년 드레스덴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바그너는 혁명의 편에 섰다. 이 혁명은 실패했고 그는 총살과 체포를 가까스로 피해 탈출에 성공했으며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렸다. 리스트는 바이마르 정부와 본인에게 미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카를 알렉산더를 설득하여 피난길에 오른 바그너에게 중립국 스위스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바그너는 오페라를 상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리스트가 대신 로엔그린의 초연을 지휘했고 이 공연으로 지휘자로서의 리스트의 명성은 드높아졌다.
리스트는 바그너가 취리히에 있을 때 그를 여러번 만났는데, 특히 1853년에는 며칠동안 대화와 음악작업으로 영감을 주고 받았고 리스트는 이 때 한창 바그너가 구상 중이었던 니벨룽의 반지 연작 집필을 격려했다. 바그너의 자서전 <나의 삶>에 따르면 이 때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을 비롯해 여러 교향시 신작을 함께 검토했고 이 일로 창작의욕을 크게 자극 받았다고 한다. 1854년 리스트는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라는 저서를 통해서도 바그너의 예술성을 옹호했다. 사방에서 돈을 빌리고 다녔던 바그너 답게 리스트에게도 자신의 작품을 위해 돈을 빌려줄 것을 여러번 요구했고, 한번은 리스트가 자신의 형편도 좋지 않다며 출자를 거절하자 오히려 성질을 내 리스트를 어이없게 만들기도 했지만 리스트는 바그너의 예술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니벨룽의 반지 상연을 위해 바이마르의 알렉산더 대공을 설득해서 바이마르에 새 극장을 건설하고 바그너를 궁정의 특별요원으로 임명시키려는 시도도 해봤는데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그너 또한 리스트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했는데, 지금이야 낭만주의시대 최고의 소나타로 평가 받고 있지만 당시엔 한슬리크와 클라라 슈만에게 까이고 연주를 듣던 브람스는 졸기까지 했던 리스트 소나타를 리스트의 제자 칼 클린드워스의 연주로 듣고 "모든 통념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가졌으며 위대하고 사랑스러우며 심오하고 고상하다"며 격찬했다. 한스 폰 뷜로에게 쓴 편지에서는 리스트의 작품을 알게 된 후로 화성에 관해서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고 언급했다. 다만 리스트의 종교음악에 관해서는 무관심 혹은 비판적인 태도였고 화해 후 리스트로부터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악보를 받았을 때는 코지마와 함께 작품을 디스했다.
60년대 이후 종교관의 차이에 더해 생애 문단에서도 언급 됐듯이 바그너와 코지마의 불륜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둘의 사이는 한동안 틀어졌다. 1867년에 리스트가 바그너를 방문했을 때 말싸움을 한 이후로 5년동안 그들은 절연했고, 1872년에서야 가까스로 바그너가 화해요청과 바이로이트 극장 정초식에 초대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면서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19] 바그너가 사망하기 직전, 1882년 11월부터 1883년 1월 사이에 리스트는 바그너 부부의 초대를 수락하여 베네치아에서 부부와 함께 지냈는데, 이 때 리스트는 마치 바그너의 죽음을 예견하는 듯한 <슬픔의 곤돌라>(첫번째 판본)를 작곡했다.

4.4. 후배 음악가


브람스는 슈만을 만나기 전에 레메니와 함께 리스트를 찾아갔는데, 이 때 리스트는 브람스의 <스케르초 E플랫 단조> 자필악보를 초견으로 완벽하게 연주해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소나타 B단조를 연주했는데 모두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브람스가 앉아서 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무 말도 없이 응접실에서 나갔다고 한다. 이렇게 싸한 첫만남에도 불구하고 리스트는 몇주동안 브람스와 레메니를 손님으로 초대했다.
리스트는 진보적 낭만주의, 브람스는 보수적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음악가였다. 리스트의 지지자가 브람스를 비난하거나, 반대로 브람스의 지지자가 리스트를 비난하는 일, 브람스가 요아힘과 함께 리스트의 신독일악파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게재한 일 등이 있었으나 둘은 인간적으로 대립했다기 보단 음악에 대한 사상으로 대립한 것에 가깝다.
그리그는 리스트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곤 했는데,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의 자필악보를 보여주자 초견으로 연주했다'''" , '''"바이올린 소나타를 처음 보자마자 바이올린 파트와 피아노 파트를 혼자서 치는 모습을 보고 어린아이 처럼 웃고 말았다'''"와 같은 리스트의 연주실력에 대한 귀중한 증언들을 남겼다. 리스트는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스칸디나비아 혼이다"라고 극찬하며 소질이 있으니 앞으로도 쭉 이렇게 하라고 격려했는데, 이것이 그리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파리 생마리교회에서 생상스의 연주를 들은 리스트가 그에 대해 "이 시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1861년에 처음 만난 후로 사적으로 함께 연탄 치는 것을 즐기거나 왕복서간을 보내며 교류했다. 리스트가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를 초연하기 위해 힘 쓰기도 했는데 정작 초연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리스트가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를 피아노로 편곡한 것 처럼 생상스도 리스트의 몇몇 작품의 편곡을 남겼다. 생상스의 가장 유명한 교향곡인 오르간 심포니는 리스트가 사망하기 2개월 전인 1886년 5월에 초연 됐는데, 얼마 후 리스트가 세상을 떠나자 이 작품은 리스트에게 헌정 됐다.
드뷔시가 로마대상에 수상하여 로마에서 유학하고 있었던 1886년 1월에 리스트와 만났다. 이후에 부조니가 들은 얘기에 의하면 드뷔시는 리스트의 인상주의적인 작품 <에스테장의 분수>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드뷔시의 <물의 반영>이 이 <에스테장의 분수>에서 영향을 받아 작곡된 곡이다. 드뷔시와 같은 인상주의 작곡가인 모리스 라벨의 <물의 유희>도 <에스테장의 분수>의 영향을 받았다.
리스트는 러시아 5인조의 작품의 화성에 관심을 가져 차이코프스키보다 5인조 쪽을 높이 평가했다. 무소륵스키의 가곡집 <아이들의 방>을 선호했으나 무소륵스키의 교류는 없었고, 5인조 중에서는 특히 보로딘과 친분이 있었다. 리스트는 독일의 음악제 관계자들에게 러시아 작곡가들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리스트가 존명 중일 때는 전 독일음악협회의 음악제에서 거의 매년 차이코프스키, 러시아 5인조, 루빈시테인 등 러시아 작곡가들의 음악이 연주됐으나 리스트 사망 후엔 차이코프스키 이외의 작곡가들의 연주빈도가 현저히 떨어진 것을 보면 독일에 러시아악파의 음악을 소개하기 위해 리스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다. 보로딘은 "나의 <교향곡 1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안타르> 같은 작품이 바덴바덴이나 마그데부르크의 음악제에서 연주될 뿐만 아니라 거기서 대성공하여 독일의 언론에 지극히 호의적으로 보도된 일은, 리스트의 신러시아악파에 대한 큰 관심과 공감, 그리고 독일의 음악계에서 가진 영향력 덕분이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밀리 발라키레프: 면식은 없었지만 서로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리스트는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발라키레프는 리스트의 교향시 <전주곡>을 러시아에서 초연했고, 무료음악학교에서도 <단테 교향곡>과 같은 리스트의 여러 작품을 연주해 러시아에 리스트의 음악을 알리는데 공헌했다. 그의 교향시 타마라는 리스트에게 헌정됐다.
-세자르 큐이: 편지를 통해 교류하고 있었으며 큐이의 피아노 조곡이 리스트에게 헌정됐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리스트에게 헌정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로부터 자신의 편곡이 포함된 러시아 민요집을 선물 받은 리스트는 이것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고 자신도 직접 러시아 민요 <이별>을 편곡했는데, 이 곡은 러시아 출신 제자인 실로티에게 헌정됐다.
-알렉산드르 보로딘: 보로딘이 바이마르에 있는 리스트를 찾아갔을 때 자신의 교향곡 1번에 대해 경험부족이라며 자조하자 이대로 괜찮으니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격려했다. 보로딘 교향곡 1번은 1880년 5월에 개최된 전독일음악협회의 음악제에서 연주돼 보로딘이 국제적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된다. 보로딘의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는 리스트에게 헌정됐다.

4.5. 주요 제자들


└하인리히 바르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빌헬름 켐프
├에릭 하이드셰크
├이딜 비렛
마리아 조앙 피레스


└조제 비아나 다 모타
└세케이라 코스타

  • 테오도르 리테르
└이시도르 필립
├기오마르 노바에스
└니키타 마갈로프

  • 카를 타우지히
├하인리히 바르트
└Josef Dachs
└블라디미르 드 파흐만

  • 소피 멘터
└바실리 사페르니코프
  • 마르틴 크라우제
├에드빈 피셔
클라우디오 아라우
  • 아르투르 프리드하임
  • 에밀 폰 자우어
├엘리 나이
└스테판 아쉬케나지
  • 토만 이슈트반
벨라 바르톡
└어빈 니레지하치
  • 베른하르트 슈타펜하겐
└에두아르 리슬러
  • 모리츠 로젠탈
└호르헤 볼레
  • 알렉산드르 실로티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빌헬름 박하우스
└니키타 마가로프
  •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요제프 크립스
├쿠르트 뵈스
게오르크 틴트너
  • 오이겐 달베르
├에두아르 리슬러
요제프 호프만
└빌헬름 박하우스
  • 조제 비아나 다 모타

5. 음악 성향



5.1. 작곡 성향


리스트는 평생에 걸쳐 1개의 오페라[20], 수십개의 합창곡과 교향시, 수십곡의 성악곡[21]과 몇곡의 실내악곡, 1천 곡에 다다르는 피아노곡등 수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 중 리스트가 가장 중점적으로 작곡한 것은 역시 피아노곡이다. 리스트는 스스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매우 기교적이고 화려한 곡을 즐겨 작곡했다.
또한 그의 수많은 피아노 곡중 상당수는 다른 작곡가의 곡을 편곡한 것인데, 그 당시 비싼 연주회장에 자주 가기 어려운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관현악곡을 피아노로 편곡하여 일반인들도 즐길수 있도록[22] 하였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의 곡을 편곡하거나 연주해서 알리기도 했다.[23] 베토벤 교향곡 9곡을 모두 피아노로 편곡해 남긴 것은 특히 유명한데, 매우 높은 난이도를 자랑한다.
한 마디로 작곡/편곡 측면에서 관현악에 맞먹는 화려하고 다이나믹한 피아니즘을 추구한 작곡가로 볼 수 있으며, 이를 위해 급격한 도약, 급속한 패시지, 긴 아르페지오와 장식음, 분산화음에 의한 선율처리, 평행 트릴 등 이후의 피아노곡에 널리 쓰이게 된 각종 기법의 운지법을 연구하여 연주와 작곡에 도입하였다.
피아노 분야의 경이적인 활약에 가려져서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리스트는 교향시(symphonic poem)라는 관현악 장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 교향시는 시, 소설, 영웅의 일대기, 회화 등 다른 예술분야에서 얻은 인상이나 작곡자가 스스로 착상한 시적 영감을 음악으로 구현하는 관현악 장르로, 엄격한 형식을 갖고 순음악적인 경향이 강한 교향곡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표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24] 이 교향시는 이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생상스, 시벨리우스 등 많은 관현악 대가들의 중요한 음악장르로 자리잡았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기교적인 요소가 줄어든 대신 실험적인 화성, 반음계적 진행과 모호한 조성을 활용하여 낭만주의 이후의 음악을 예견하고 있으며[25] 순례의 연보 3편에 있는 에스테장의 분수(Les jeux d'eaux à la Villa d'Este)처럼 인상주의를 예견하는 작품도 남겼다.[26]
한편 리스트는 헝가리 태생이긴 하지만 그의 음악에 헝가리적인 특성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태어난 라이딩 지역은 헝가리 영역이긴 했어도 당시에는 독일어권에 속해 있었고, 그의 부모는 독일어를 사용했기에 그 역시 독일어가 모국어였다. 하지만 어릴때 프랑스로 넘어간 이후로 리스트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일상 생활에는 프랑스어를 사용하였다. 본격적인 출세를 프랑스에서 하였고 순회연주자 생활을 접은 후에도 바이마르나 로마 등에서 여생을 보냈다.[27]
그렇긴 해도 그는 나름 헝가리 집시음악의 선율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여럿 남겼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19곡의 '''헝가리 광시곡'''이다. 다만 헝가리 음악을 표방한 그의 작품들은 어디까지나 선율만 차용한 것이고 작곡 기법 자체는 전형적인 독일의 후기낭만파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리듬, 화성, 선법 등 헝가리 민속음악의 본질적인 요소를 분석하여 본격 도입한 후배 작곡가 벨러 버르토크나 졸탄 코다이 등과는 대조를 이룬다.

한국계 클래식 작곡가이자 유튜버인 Nahre Sol의 소개 영상. 영상 후반부(6:50)에서는 프란츠 리스트 스타일로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편곡해서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5.2. 연주 성향


[image]
리스트의 악마적인 기교를 묘사한 풍자화
당연한 얘기겠지만 지금에 와서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28][29][30]따라서 그의 연주 성향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의 평과 제자들의 연주를 통해 추측하는 것이다.
꽤 자료가 많아서 대체적인 그의 연주인상은 쉽게 조합할 수 있는데, 리스트의 명성과 그가 사람들에게 남긴 전례없는 아우라 덕분이다. 당시의 평에 의하면 대체로 기교가 넘쳐흐르며, 역동적이고 감정에 충실한 연주를 했다고 한다. 또한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대피아니스트 답게 웬만한 곡은 모두 초견으로 연주할 정도였다는데, 당대 음악가들 사이에 반 농담삼아 화자되고 했던 얘기가 리스트의 연주는 초견이 가장 명연이었다고 한다. 이유는 처음 악보를 볼 때만 그나마 악보에 쓰여있는 대로 충실하게 연주하고 연주를 거듭할 때마다 과도한 장식음이나 기교를 과시하는 패시지를 자꾸 삽입했기 때문에(...)
그의 연주는 그의 별칭인 '베토벤의 아들이자 루빈스타인의 아버지'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본질적으로 베토벤이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 시절에 보여준 피아노 효과와 연결된다. 즉,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으나 청각장애가 생기는 바람에 연주 생활을 끝내야 했던 베토벤을 리스트가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리스트는 과거의 피아노 주법, 즉 얌전하고 정확하며 우아하고 간결한 화음을 짚는 종래의 기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관현악 소리에 맞먹는 우렁차고 화려한 연주 효과를 추구했다. 그 결과, 그의 연주는 화려하고, 감정적이며, 전례 없는 빠른 속도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리스트는 낭만주의 안의 고전주의를 지향한 브람스나 클라라 슈만과는 노선을 같이하지 않았다.
리스트의 연주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놀라움을 넘어 전설적이라고 불리기에도 충분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당시 그에 비견되던 기교가인 드레이쇼크가 토마섹의 발언[31]에 영향을 받아 6개월 동안 하루 12시간씩 연습해서 쇼팽의 혁명연습곡의 왼손을[32] 원템포 그대로 모두 옥타브로 연주하여 인기를 얻자 리스트는 그의 활동지였던 비엔나에 방문하여 쇼팽 연습곡 중 25-2를 옥타브로 연주했다고 한다.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하임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을 연주할 때 리스트가 검지와 중지로 불이 붙은 담배를 잡은 채로 반주했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리스트 생전에 그의 전기를 작성한 리나 라만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리나가 리스트에게 루트비히 뵈너가 두 손가락에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르간으로 바흐의 푸가를 연주했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그는 피아노에 앉아 양손을 각각 세 손가락만 사용한 채로, 바흐의 어려운 푸가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리나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한편 쇼팽은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작곡가였던 페르디난트 힐러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지금 내 펜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네.

리스트가 지금 나의 연습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그가 나의 머릿속의 생각을 날려버리고 있네.

그의 연주를 빼앗아오고 싶을 정도라네.

또한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악보를 보자마자 그리그 앞에서 바로 초견에 완벽히 연주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렇듯 그 당시 음악가들에게도 리스트의 연주 실력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6. 후대의 평가와 영향


'''단순히 인기있던 비르투오소를 넘어서, 후대에 까지 영향력을 끼친 음악가'''이기에 그가 역사에 남았다. 요약하자면, 1. 피아노에 대한 혁신적인 연구 2. '''교향시의 창립''' 3. 현대 아이돌 문화의 창립 4. '''민속 음악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의 시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리스트가 활약하던 시기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개발이 계속 진행되었던 시기이며 악기 자체의 발전과 더불어 쟁쟁한 피아니스트들이 대거 등장했던 시기였다. 리스트 이외에도 프레데리크 쇼팽, 지기스문트 탈베르크(Sigismund Thalberg), 카를 타우지히(Carl Tausig),[33] 샤를 발랑탱 알캉 등이 모두 리스트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거장 피아니스트들이었다.[34]또한 이들은 리스트처럼 작곡가로도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피아노 음악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명성 측면에서는 리스트가 단연 압도적인데, 화려한 쇼맨쉽과 이를 받쳐 주는 미남형 외모,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이지적이면서도 나쁜 남자스타일, 거기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업계 최상위의 실력까지, 인기에 필요한 모든 요소와 실력을 다 갖춘 먼치킨은 당대에 리스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을 찾아온 후배 음악인을 배척하지 않고 대부분 받아주는 대인배기질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음악팬들 뿐만 아니라 전업 음악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명성은 압도적이었다.[35]
그러나 무엇보다도 리스트의 이름이 후대까지 남게 된 것은, 역시 악보로 남아 있는 그의 음악 덕분이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술의 전수에 매우 인색했던 파가니니와 달리 리스트는 자신이 창안하고 터득한 기교, 운지법, 작곡법 등을 거리낌없이 공개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는 많은 창작곡과 편곡에서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남김없이 구현하였으며, 각지에서 몰려든 후배들에게 자신이 터득한 각종 음악적 기법들을 숨김없이 전수해 주었다. 무엇보다 파가니니 연주법은 리스트 편곡을 토대로 연주법이 복원되기도 했다.
특히 바이마르 시절부터 남긴 그의 작품들은 음악적으로도 상당히 원숙하고 깊은 경지에 도달해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연주자나 음반사들이 지속적으로 그의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하고 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일지라도 음악성이 없는 피아노 기술자에 불과했다면, 그의 이름과 작품들은 그대로 잊혀졌거나 체르니 교본처럼 연습용 교재 정도로만 활용되었을 것이다.[36] 결국 이와 같은 음악성과 연주 가치 덕분에 그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거장들 가운데에 리스트와 쇼팽의 이름만 오늘날까지 남게 된 것이다.
그가 직접 길러낸 기라성 같은 피아니스트들[37] 외에도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후배 피아니스트들이 엄청나게 많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극단적인 화려함을 추구하는 그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당시부터도 비판이 있었으며 리스트 사후에는 이런 비판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그의 음악이 깊이가 없고 피상적이라고 저평가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또한 리스트류의 지나친 기교주의에 반발하는 음악사조도 등장했는데, 예를 들면 후배인 벨라 바르톡을 비롯한 다수의 현대 음악가들은 피아노 음악에서 과장된 기교를 배제하고 좀더 직선적이면서도 타악기 소리와 같은 원초적인 음향을 구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과 안티 리스트적인 경향이 존재했다고 해서 그가 음악사에서 많은 성취와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분명 리스트의 음악에는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이 공존하지만 현재의 음악인들은 리스트를 여러 측면에서 서양음악계에 많은 발자취를 남기고 간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한편 리스트는 음악 역사상 최초로 팬덤현상을 일으킨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의 음악공연은 전무후무한 열광적인 분위기와 팬덤현상을 양산했는데, 이런 팬덤현상은 현재의 아이돌주의(idolism)와도 맥이 닿아 있다. 즉, 그가 만들어낸 공연문화는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고 그를 우상화하는 현재의 대중문화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38]. 리스트가 전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자 당시의 연주자들 상당수가 그의 스타일을 모방했는데,[39] 무분별한 악보 편집, 무질서한 템포 변화,[40] 맹목적인 기교의 추구, 그리고 음악보다 퍼포먼스의 역할을 중시하는 경향 등만 무분별하게 답습하는 바람에 피아노연주 분야가 굉장히 혼란해진 때도 있었다.[41]
연주뿐만 아니라 작곡 분야에서도 리스트는 당대와 후대의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술한 대인배기질 덕분에 음악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거나 출세하는데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작곡가가 한둘이 아니다. 오늘날까지 유명한 사람만 꼽아보아도 쇼팽, 바그너를 비롯해서 베를리오즈, 생상스, 에드바르트 그리그, 샤를 발랑탱 알캉, 알렉산드르 보로딘 등 셀 수 없이 많다.
당대의 작곡가들 뿐만 아니라 후대 작곡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쳐서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라흐마니노프를 비롯 드뷔시, 라벨과 같은 인상주의 작곡가나 부조니 및 다수의 20세기 이후 작곡가들이 리스트가 사용했던 작곡/연주기법들을 많이 활용하였다. 또한 그가 창시한 교향시와 헝가리 집시 음악에서 발굴한 광시곡은 후기 낭만주의 및 국민악파 작곡가들의 중요한 음악장르로 자리잡았다.
전술했다시피 그의 후기음악은 바그너의 후기오페라처럼 조성이 모호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몇몇 곡은 낭만주의 이후 현대 음악 사조들의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에스테장의 분수나 무조의 바가텔, 회색 구름(Nuages Gris) 같은 곡에서 이런 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7. 여담


  • 그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로는 한 여성 피아니스트가 병든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먹여살리기 어려운 형편이라 자신이 리스트의 제자가 아님에도 리스트에게 배운 수제자라고 거짓 광고를 했는데, 그 마을에 리스트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 것을 염려하여 리스트를 찾아와 잘못을 빌었다. 그러자 리스트는 그녀에게 음악회 때 연주할 곡을 쳐보라고 한 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주었고, "이제 나에게 배웠으니 틀림없는 리스트의 제자이다. 그러니 연주회를 포기하지 말고 떳떳하게 연주하라." 고 격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대단히 큰 손, 약 12도(도~솔,라)에 달하는 손을 지녔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리스트의 손은 의외로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증언된다. 특히 그의 제자였던 라흐문드는 리스트가 직접 그에게 '청중들은 내가 대단히 큰 손을 가진 줄 알지만, 네가 보다시피 나는 그저 10도(도~미)를 겨우 벌려서 조용히 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라 증언했다고 한다. 허나 대단히 넓은 폭의 아르페지오, 비상식적일 정도의 도약, 복잡한 코드들은 화려한 악절을 위한 제물인지(...) 그의 음악들은 유독 손이 작을 수록 고통받는다.[42]
  • 드라이쇽이 쇼팽 연습곡 10-12 <혁명>의 왼손을 옥타브로 친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은 쇼팽의 연습곡 25-2의 오른손을 옥타브로 쳤다는 일화가 있다.
  • 오늘날 피아노 전공자들의 애증의 대상이자 우스갯소리로 피아노 학살자로도 불린다. 특히 연습곡을 치다보면 쌍욕이 나온다. 이런 탓에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은 난이도 면에서 끝판왕급으로 여겨진다. 거의 연주불가 수준의 20대에 작곡된 곡들을 보면 난이도는 확실히 끝판왕급으로 인정된다. 게다가 이 곡들은 대부분 기교과시가 목적인 곡들이라 난이도에 비해 음악성이나 완성도는 많이 부족하다. 이런 탓에 이 시기에 작곡된 곡들은 현재의 유명 피아니스트들도 연주하기 꺼리는 경우가 많으며, 연주 기회가 적다 보니 당연히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이 외에도 잘 발굴되지 않은 리스트의 곡들 중 매우 어려워서 거의 연주되지 않고 아예 연주를 시도하려고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없을 정도의 곡들도 많다. 덕분에 인지도가 매우 낮아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대표적으로 회상 시리즈중 청교도의 회상,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회상 등은 노르마나 돈주앙보다 어려운 평가를 받으면서 잘 연주되지도 않는다.
  • 상술했듯이 리스트는 당시 피아노를 귀신같이 너무나 잘 친다는 이유로 피아노의 귀신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고, 피아노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넘사벽급 인물로 여겨져 피아니스트의 왕이라 불리기도 한다.
  • 키가 185cm로, 당시 시대를 고려하면 상당한 장신이었다[43].
  • 이름이 비슷한 유명인으로 법학자 프란츠 폰 리스트가 있는데, 두 사람은 실제로 친척이었다.
  • 원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하지만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보고 바로 바이올린을 때려치고 자신이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8. 연주와 레코딩


대표적인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로 레슬리 하워드, 호르헤 볼레, 조르주 치프라, 라자르 베르만 등이 있다.[44] 다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음악 중에 피아노음악의 비율이 독보적으로 높은 관계로 리스트의 곡만 연주하는 연주자는 많지 않다.
리스트의 피아노 전곡을 수록한 전집은 하이퍼리언 레코딩스(Hyperion Recordings)의 레슬리 하워드(Leslie Howard) 전집이다. 하워드의 전집은 CD 장수만 99장에 재생시간만 5일[45]을 넘긴다![46] 이 공로로 하워드는 영국 리스트 협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국제 리스트 콩쿨(네덜란드)에서 심사위원직을 맡고 있다. 그리고 올해 리스트 전집 100번째 CD가 나온다고 한다. 흠좀무
한편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시프리앙 카차리스(Cyprien Katsaris)가 연주한 리스트 편곡 -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은 전설적인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9. 작품 목록




[1] 리스트의 초상화, 버러바시 미클로시 작(1841년)[2] 헝가리어로는 도보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령이 되었다. 따라서 현재 리스트의 생가는 헝가리에 없고 오스트리아에 있다.[3]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레데리크 쇼팽,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등과 함께 피아노계에선 본좌 취급을 받고, 기교면에선 쇼팽과 그 어렵다는 라흐마니노프도 양반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따라갈 자가 없다.[4] 지금은 모르겠지만 1980년대에는 음악 교과서에도 등장했던 표현이다[5] 실제로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6] 당시 대중들에게 비춰진 모습만으로 판단했을 때 리스트가 천재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지닌 아이돌 이미지에 가까웠다면 바그너는 바그네리안이라는 수식어가 있을 정도로 음악가나 음악 오덕들에게 더 많이 주목받는 조용필형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리스트도 음악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바그너는 근본적으로 오페라 작곡가였기 때문에 리스트보다 훨씬 더 많은 음악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으며 바그너 음악에 대한 호불호는 단순히 듣기 좋다 나쁘다의 측면을 넘어 좀더 전문적인 음악적 차원의 판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7] 2011년 리스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정식 명칭이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Budapest Liszt Ferenc Nemzetközi Repülőtér)으로 바뀌었다. 폴란드 바르샤바 공항의 정식 명칭이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Lotnisko Chopina w Warszawie)인 것처럼. 재미있는 건 폴란드헝가리가 우방국이라는 것.[8] 당시 정서법으로는 Liszt Ferencz[9]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헝가리와 이중제국을 구성했다.[10] 리스트가 12살에 빈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가져 유명해지자 바르샤바의 한 신문은 "우리에겐 리스트를 능가하는 천재소년 쇼팽이 있으니 빈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11] 다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쇼팽이 생전에 접했을 리스트의 작품은 리스트 창작력의 최절정인 바이마르 시기 이전이다.[12] 가끔은 페르디난트 힐러까지 세명이서[13] 이 플레옐 부인이 바로 베를리오즈가 로마로 유학 간 사이에 약혼을 깨고 플레옐과 결혼해버리는 바람에 메이드복을 입고 변장한 베를리오즈에게 복수를 당할 뻔 한 그 마리 모크 플레옐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베를리오즈 항목 참조 [14] 한국에서는 포노 출판사에서 '내 친구 쇼팽'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출간되었으며 2019년 현재 온오프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15] 다만 "쇼팽을 리스트로 만들어버렸다"는 쇼팽의 친구 율리안 폰타나의 말 처럼 낭만주의로 평가되는 것을 거부했던 쇼팽을 낭만주의의 화신처럼 표현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6] 리스트의 생애 마지막 리사이틀에도 자신이 편곡한 쇼팽의 곡이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었다.[17] 리스트도 멘델스존의 음악에 대해 불평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하필 멘델스존이 죽은지 1년 뒤에, 그것도 멘델스존의 절친이었던 슈만 앞이라 슈만을 빡치게 했다(...).[18] 카롤린 공작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그너에 대해 "그는 병들었고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그를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돌봐야만 합니다"라고 얘기했다고(...) 카롤린은 코지마 뿐만 아니라 리스트도 바그너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19] 리스트는 이 편지에 정중한 답장을 보내긴 했지만 정초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20] 미완성의 오페라도 몇곡 있다.[21] 성악곡 중에는 종교음악의 비중이 높다.[22] [23] 한편으로 무명작곡가의 악보 제목에 작곡가가 리스트의 제자이거나 악보를 리스트가 감수했다는 내용을 붙여 출판하여 그 작곡가가 주목받기 쉽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24] 교향시는 대체로 단악장이지만 주제에 따라 여러 악장을 갖기도 한다. 대표적인 다악장 교향시가 바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25] 대표적인 작품이 무조의 바가텔(Bagatelle without tonality).[26] 후에 모리스 라벨이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물의 유희(Jeux d'eau)를 작곡하게 된다.[27] 다만 헝가리에 자신도 설립 후원자로 참여했던 부다페스트 국립 음악원이 설립된 이후 리스트는 주기적으로 이곳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다.[28] 리스트가 1886년까지 살았는데, 축음기가 실용화된 것이 1887년이다(하지만 몇 해 더 살았다고 해도 병 때문에 제대로 연주할 수 있었을지 의문). 따라서 간발의 차이로 리스트는 녹음을 남길수 없었다. 다행히 카미유 생상스나 페르치오 부조니 같은 작곡가들은 축음기가 발명될 때까지 살아남아(...) 녹음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상용 초기단계라 여러가지 여건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자동 피아노 혹은 초기 녹음정치인 구식 실린더를 더 많이 사용해서 이 당시 녹음본 중 양질이라 할 수준의 녹음은 그다지...[29] 그러나 녹음본이 있다는 카더라도 나오고 있다. 리스트를 연구하던 한 음악박사의 말에 따르면, 시험삼아 했던 녹음본이 있는데 그게 소실되었다고. 그로 인해 리스트가 남긴 실린더가 아직 남아 있다는 소문도 나오고 있다.[30] 허나 만에 하나 시험삼아 했던 녹음본이 발견될지라도 그 녹음본의 음질은 굉장히 듣기 불편할 것이다. 1943년도에 사망한 라흐마니노프가 생전 본인이 직접 연주한 녹음을 들어보면 당시 기술의 한계로 음질이 폭풍우(...)속에서 연주가 작게 들리고, 실제로도 기술적 한계로 본인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원래 곡의 템포보다 더 빠르게 연주하고 녹음분량을 맞추기 위해 곡을 수정까지 하는 안습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31] 쇼팽의 혁명연습곡으로 칼럼을 기고했는데 최근 곡들을 놀라운 속도로 진보시킨 기교적 업적 등을 가리키며 '조만간 이 곡의 왼손 파트를 모두 옥타브로 연주하는 사람이 나와도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32] 빠른 아르페지오와 스케일로 구성되어 있다[33] 이 쪽은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34]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요하네스 브람스도 젊은 시절에는 처음 만났던 슈만이 극찬할 정도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다만 작곡활동을 더 열심히 해서 연습을 많이 안한 탓인지 연주회를 열었다 하면 많이 까였다고 한다.[35] 그러나 문헌을 살펴보면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안톤 루빈슈타인을 거절한 일화라든가, 자신의 문하 작곡생에게 하루 10시간이 넘는 근무를 시킨 흑역사도 있다. 추정하는 바로는 자신의 음악 성향과 안 맞는 사람은 받지 않거나 재능이 모자라다고 판단한 사람에은 하대하거나 공밀레 열정페이로 부려먹은 듯 하다.[36] 그에 대해 작성된 기록들을 보면, 리스트는 피아노 테크닉 외에도 청음이나 독보 등 기본 재능 면에서도 먼치킨을 하염없이 초월해 버렸으며, 바그너가 '내가 작곡하면서 느낀 걸 리스트는 지휘하면서 느낀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지휘에도 재능 있었다. 바이마르에 바이올리니스트도 왔던 것으로 봐서는 바이올린에 대한 재능도 다소나마 있었던 것 같다. 평론가 헤럴드 쇤베르그는 그의 저서 '위대한 피아니스트'에서 '리스트의 재능은 무서울 정도였기 때문에 중세였다면 마술을 부린다고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37] 위 각주에서 상술했듯 대표적인 인물이 한스 폰 뷜로나 카를 타우지히, 그리고 '여자 리스트'로 각광받은 소피 멘터(Sophie Menter, 1846-1918) 등이 있다. 이외에도 그를 사사한 적이 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페루치오 부조니, 이사크 알베니스 등이 있다.[38] 정확힌 이 아이돌주의도 '''파가니니가 먼저'''일으킨 것이었고, 그 파가니니에 영향을 받은 것이 리스트이다.[39] 폴란드의 총리까지 지냈던 파데레프스키(Paderewski)가 이런 부류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테크닉이나 리듬 준수 면에서 사후까지 좋지 못한 평가를 지속적으로 받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톤이 굉장히 대중적이었으며 남다른 쇼맨십 등의 요인으로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40] 루바토나 아첼레란도, 리타르단도 등의 과도한 사용[41] 물론 이런 것들은 적절히 사용하면 나쁜 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뭐든지 과도하게 남발하는 것이 문제이지 이런 방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42] 사실 9~10도 정도의 손으로도 리스트의 곡에 나오는 웬만한 화음들은 무리없이 꽉꽉 누를 수 있으며, 넓은 아르페지오는 손의 유연성을 기르고 손가락으로만 하려고 하지 말고 손목, 팔꿈치 등도 활용하면 할 수 있다.[43] 거기에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얼굴도 미남이었으니 여성팬들이 많지 않을 리가 없었다.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전형적인 아이돌 스타일이었던셈.[44] 치프라와 볼레 두 연주자는 각각 반대방향으로 끝판왕 스타일의 연주를 보여주기 때문에 청자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치프라는 리스트의 철학에 딱 어울리는 극한의 기교를 추구하는 연주를 하며 그래서 깊이가 없다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어디까지나 오해이다). 볼레는 정 반대로 기교가 최대한 느껴지지 않는(?), 쉽게 들리는 연주를 추구한다. [45] 7,320분 26초에 달한다![46] 정확히는 CD 98장에 보너스 디스크 1장. 보너스 디스크에는 리스트가 작곡에 도움을 주었으리라 보이는 리스트 제자의 피아노 협주곡이 수록되어 있다. 하워드의 연주에 대해서는 대체로 학구적이고 훌륭한 연주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곡에 따라 연주력의 기복이 좀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