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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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明觀
1924년 ~
1924년,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에서 출생했다. 김일성종합대학에 제1회로 입학했다. 1947년 월남한 뒤 한국전쟁에 통역장교로 참전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종교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수와 사상계의 주간으로 활동하며 반독재민주화운동을 펼치다 197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4년~1993년 일본 도쿄여자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73~1988년 'TK生' 이라는 필명으로 일본의 대표적 지성지 세카이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하며 엄혹한 군사통치와 민주화투쟁을 전세계로 알리는 한편, 일본을 거점으로 국제적인 연대운동에도 힘썼다.
20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1993년 귀국해 한림대학교 석좌교수와 일본학연구소 소장,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등을 역임했다. 2003년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의 익명 필자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밝혀 한일 양국에서 큰 화제를 낳았다.
池明觀
1924년 ~
1924년,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에서 출생했다. 김일성종합대학에 제1회로 입학했다. 1947년 월남한 뒤 한국전쟁에 통역장교로 참전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종교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수와 사상계의 주간으로 활동하며 반독재민주화운동을 펼치다 197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4년~1993년 일본 도쿄여자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73~1988년 'TK生' 이라는 필명으로 일본의 대표적 지성지 세카이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하며 엄혹한 군사통치와 민주화투쟁을 전세계로 알리는 한편, 일본을 거점으로 국제적인 연대운동에도 힘썼다.
20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1993년 귀국해 한림대학교 석좌교수와 일본학연구소 소장,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등을 역임했다. 2003년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의 익명 필자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밝혀 한일 양국에서 큰 화제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