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준
1. 삼국지연의의 가공인물
陳俊
진나라의 장수로 제갈탄이 문흠과 함께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오군과 연합하자 사마소가 이 소식을 듣고 배수와 종회 등을 불러 상의하면서 종회가 오군을 이익으로 유인하면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에 각 장수들에게 각자의 행동을 지시할 때 진준은 병졸들에게 상으로 줄 물건들을 수레와 소, 말, 나귀, 노새에 실어 진에 모아두었다가 적이 오면 버리게 하라는 지시를 받아 성쉬가 사마소의 지시에 따라 위군을 일부러 정연하지 못하게 해서 제갈탄이 공격하자 성쉬가 물러난 후에 진준이 소, 말, 나귀, 노새들을 풀어 들판에 가득 널려 있게 해서 제갈탄이 이끌던 남쪽의 병졸들이 이를 다투어 빼앗느라고 싸울 마음이 없었고 이 틈에 사마소가 숨겨두던 복병들이 공격해 제갈탄의 군사를 이겼다.
1.1. 미디어 믹스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9에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67/무력 65/지력 69/정치력 52로 별 거 없으며 분전, 혼란, 덫을 가지고 있다.
2. 고려의 무신
陳俊
(? - 1179)
청주 여양현(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사람으로 용맹, 담력을 갖췄고 군졸 출신으로 공을 세워 위장군이 되어 북계를 수비했으며, 변방을 수비하는 장군은 쓸 수 없는 정각복두(조회때 입고 참례하는 정복의 관모, 당시에는 송나라의 것을 들여와서 썼다)를 유일하게 썼다. 양승용이 이를 금지했지만 거부해서 탄핵되어 파면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대장군이 되었는데, 무신정변 당시에 의종이 폐위되는 와중에 무신들이 문신들을 모두 죽이려 하자 "우리가 원한을 가진 자는 이복기, 한뢰 등 4, 5인에 불과한데, 이 많은 무고한 사람을 이같이 살해하고 가산을 몰수함은 부당한 일이므로 중지하라"라고 했다.
이로 인해 진준 덕분에 적지 않은 문신과 그들의 가족이 화를 피했는데, 이에 사람들이 "음덕(陰德)이 있으니 후손들이 반드시 창성한다."라 했다고 고려사에 전하며, 그 말처럼 진준의 다섯 아들과 다섯 손자가 모두 요직에 올라 여양 진씨 가문의 토대를 다졌다. 고려 당대의 문헌에서는 간혹 진준의 본관을 청주라고 기록하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것이 진준 자신이 여양 진씨의 시조 진총후 장군의 아들로 아직 여양 진씨라는 본관이 생겨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여양 진씨 가문이 성립된 것은 진준의 다섯 손자가 각자 분파하고 난 뒤의 일로 진준 사후 20년 정도 후의 일이다. 때문에 여양 진씨 시조 진총후의 선대에 대한 기록을 찾으려는 노력도 있어왔지만, 청주 진씨라는 가문의 계보가 실전된 상태라 번번히 실패했다.
1172년 정월에는 병마사, 지추밀원사 등을 차례로 지내다가 1174년에 조위총의 난이 일어날 때 겨울 11월에 좌군병마사가 되어 윤인첨 휘하에서 조위총을 공격했으며, 겨울 12월에는 참지정사가 되었고 1175년 정월에는 병부상서가 되었다. 1176년 가을 7월에는 조위총을 평정하면서 조위총을 평정한 장수들을 금교역에서 영접했으며, 1179년 6월에 사망했다.
꾸밈이 없고 정직해 많은 칭송을 받으면서 명종이 그의 인품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