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뢰

 

1. 韓賴
1.1. 창작물에서
2. 寒雷


1. 韓賴


?~1170. 고려 중기의 문신. '''그리고 김부식, 김돈중과 함께 무신정변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장본인.'''
의종과 함께 놀던 것과, 무신들을 모욕하다가 나중에 처참히 살해당한 주범으로 알려져 있다.
1170년 2월에 의종이 연복정에 행차하자 풍악을 울리면서 뱃놀이를 했다. 3월에 뱃놀이를 하면서 연회를 했으며, 5월에 의종이 잔치를 베푼 후에는 따로 의종이 작은 연회를 베풀어 붉은 가죽띠, 물소뿔로 만든 혁대를 이복기와 함께 받았다. 7월에 보현원 남쪽 시내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술판을 벌이고 시를 주고받았으며, 8월에는 의종이 보현원에 행차 도중에 무신들의 수박 대회를 열자, 나이 문제로 골골대던 대장군 이소응뺨을 후려쳐 안 그래도 불만에 가득찬 무신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고,[1][2] 그 결과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3]을 세운다. 물론 한뢰 자신은 이고에게 끔살당했다. 문신들이 학살당하는 와중에 용케 살아남아서 왕에게 가서 무신들이 난을 일으켰다고 보고하고 용상 밑에 숨었는데, 정중부가 들어와서 왜 난을 일으켰는지 설명하면서 "하나가 남았는데요?" 하자 왕이 모르쇠로 일관하니까 "용상 밑에 한뢰가 있잖아요?" 했는데, 왕이 미적거리는 사이 이고가 들어와서 용상 밑에 숨은 한뢰를 끌어내 무참히 목숨을 빼앗았다.

1.1. 창작물에서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아무래도 작품이 다루는 시대 상 무신정변으로 시작하다 보니, 그 도화선이 된 한뢰는 1화만에 퇴장당하는 엑스트라가 됐다.
의종이 흥왕사로 행차할 때 한뢰와 김돈중 등 몇몇 신료들은 의종에게 되지도않는 아첨을 하며[4] 기분이 좋은 의종과 함께 술을 마신다. 이 때 바퀴가 수렁에 빠지자 한뢰는 병사 하나의 머리를 때리며 페하의 거동을 지체시켜놓고서 너희놈들이 살아남기를 바라느냐고 호통을치고 여기에 빡친 대장군 이소응이 황상 페하의 어가에 앉아있다고 위아래도 모르냐고 따지며 둘이서 말싸움을 벌인다. 그러다가 진준의 제지로 그만두지만 여기에 앙심을 품고서 의종에게 무인들에게 벌을내리라고 주장하지만 의종이 거부하자 이소응을 엿먹일 궁리를 하게된다.
다음날 보현원으로 행차하던 중 의종이 오병수박희를 벌일 것을 요구했고, 이 때 한뢰는 의종에게 이소응이 무예솜씨가 뛰어나다고 거짓 아첨을 한다. 결국 이소응이 젊은 군관 석린과 대련[5]하다가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뒷걸음질을 치자 이소응을 뺨을 때리고 모욕할 뿐만 아니라 발로 차기까지 하고, 심지어는 개처럼 기라면서 왈왈 하면서 흉내까지 내라고 하는 등 이소응에게 제대로 굴욕을 주었다. 그리고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없이 다같이 웃고 떠들뿐 이였으며 의종역시 이걸 보고 (한뢰를) 말리기는커녕 같이 흉내를 내면서 즐기기까지 하고 앉았다. [6][7]
그러다가 정중부에게 일갈을 들은후 보현원으로 가는중에 왕광취와 대화하면서 환궁하는 즉시 정중부의 벼슬을 때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번기회에 누가 주인인지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있지만 곧바로 정변이 터져서 그럴일은 없었다. 아무튼 이후에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킨 후에 밖을 나갔다가 이고에게 발견되어 건물 안으로 도망쳤는데, 의종에게 자신을 살려달라면서 정중부가 모반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린다. 무신들이 들이닥치려고 하자 침대 밑에 숨어있다가 이고에게 발견돼서 끌려나온 후 의종에게 처절하게 빌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지만 무인들이 워낙 분노한 지라 의종도 뭘 어떻게 할수가 없어서 굉장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한뢰를 외면하였고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다못한 이의방에게 철퇴를 맞고 끔살된다. 그 뒤 무인들이 떠나고난후 의종은 충성스런 신하를 지키지 못한 못난황제를 용서하라며 울먹이는데 무신정변이 일어난 원인중 하나가 한뢰이고 본인이 한뢰를 엄히 처벌하지 않아서 무신정변을 돌이킬수 없을 지경까지 몰고간걸 생각하면 그 황제에 그 신하라는 생각밖에 안든다...
배우는 정진각.[8]

2. 寒雷


Cold Thunderstorm
겨울철 한랭전선의 통과로 일어나는 뇌전현상 및 상층의 한랭저기압이 상공을 통과할 때 일어나는 뇌전현상.
대한민국에서는 남부지방보다 중북부지방에서 이런일이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1] 젊은 무신하고 수박희를 했는데 무참히 패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무신이 천대받던 시절이라지만 이소응은 한뢰보다 나이도 더 많았고 '''품계도 더 높았다'''. 한 마디로 일어나선 안될 일이 일어난거다. 이때 당연히 무신들은 상당히 분기탱천한 상황이었는데, 오죽 열이 뻗쳤으면 특히 정중부는 왕 앞에서 한뢰의 멱살을 잡고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지만 너보다 나이도 많고 품계도 높은데 그럴 수 있냐?"라고 일갈했다. 그나마 왕이 말려서 한뢰를 죽이는 사태까지는 발생하지 않았다.[2] 사실 현재나 과거나 나이 어린 무개념 상관이 나이 많은 하급자를 막대하는 일이야 종종 있었는데, 그래도 '''나이 많은 상급자'''에게 막 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는 그 상급자에게 실권이 없더라도, 그 일을 저지른 하급자가 파면될 수 있는 일이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서기관급(4급)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이 나이 지긋한 대장을 팬 거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대장은 장관급 예우다.[3] 그렇지만 어차피 한뢰가 안 설쳤어도 정변은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무신정변 자체는 의종이 보현원에 간 그날 밤에서야 일어났는데다가, 사전에 그렇게 하기로 모의했기 때문. 그만큼 무신 천대가 심각했는데다가, 정중부 또한 김부식이나 김돈중 등등 문신들에게 당한 게 많았다. 백성들도 문신들의 문벌과 신분 우대로 탄생한 문벌귀족들의 수탈 때문에 초반에는 무신정변을 지지했다. 여기서 의종이 한뢰를 엄히 처벌했으면 그나마 정변의 명분을 줄일 가능성이 있었는데 결국 한뢰의 행패와 어설픈 사후 처리가 무신정변을 돌이킬 수 없게 하는데 영향을 끼친 셈이다.[4] 의종이 고려의 요순이라느니 태평성대라느니 하는 말을 하는데 보는사람입장에서는 이뭐병스러울 따름.[5] 사실 석린이 이소응을 봐주지 않은 것은 정중부를 거사에 끌어들일려는 이의방의 계략이었는데 원래는 석린도 적당히 봐줄려고했고 다른장군들도 그럴거라 생각했다.[6] 이건 작가가 고려시대의 '내시'와 '환관'의 개념을 헷갈렸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내시와 환관이 같아진 것은 조선 시대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원래 내시부는 그냥 벼슬아치가 소속되는 한 관청 중 하나로, 그곳에 소속된 관원이 내시였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아는 거세 신하는 환관이다. 그런데 나중에 조선의 건국군주 태조 이성계가 내시부의 관원을 모두 환관으로 채웠고, 환관=내시가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작가가 기본적인 역사 상식이 참으로 부재한 모양. 그런데 수염은 있는 것을 보면 또 고증은 어부지리로 지켰다. 만약 환관이라면 수염이 없어야 한다.[7] 수염은 고증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극에서 나이 많은 남자에게는 일률적으로 수염을 붙이는 행위로 얻어 걸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무인시대의 작가는 1년 전에 여인천하의 각본을 맡아 대박이 난 사람이다.[8] 훗날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휘하장수인 낙안군수 신호를 맡아 열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