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변

 


무신정변
武臣政變

시기
1170년 8월
장소
고려 보현원 장풍군 남단의 사찰
원인
문신-무신 차별의 누적
교전 세력
고려(의종 친위대)
고려 무신(반란군)
주요 인물
의종
한뢰
지유(指諭)
김석재(金錫材)
<^|1>이고
이의방

정중부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일부 문신 제거
정변 성공
영향
의종(고려 왕실)의 괴뢰화와 무신정권의 성립
1. 개요
2. 원인
2.1. 무신과 문신의 지위
2.2. 문신과 무신의 갈등
3. 정변
3.1. 살육의 시대
3.2. 후일담: 무신 정권과 권력자의 교체
4. 후세 평가
5. 관련인물
5.1. 무신
5.2. 문신
5.3. 왕가
5.4. 기타
6. 창작물
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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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신정변(武臣政變). 고려 의종 24년에 해당하는 1170년 8월에 고려의 무신들이 보현원[1]에서 들고 일어난 정변이다.
1170년이 경인년이기 때문에 경인의 난(庚寅亂)으로도 부른다. 경인년의 보현원 정변과 1173년 계사년에 일어난 김보당의 난(계사의 난(癸巳亂))을 합쳐 '경계의 난(庚癸─亂)'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이전의 고려왕조는 사실상 멸망 상태나 다름없을 정도로 무너졌으며 국가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각종 군사세력에 의해서 걸핏하면 괴뢰정부 신세로 추락하길 반복했고, 정권을 장악한 군인 마피아에 의하여 지방 정규군도 해체당하여 자기보호 권리도 자주 잃는 등 국가망조의 첫 단추가 끼워지게 되었다. 실제로 의종 이후 고려 왕실은 무신들과 몽골에 의해 허수아비 혹은 반쯤 허수아비 신세가 되어, 간섭없이 자주적인 왕권을 가졌던 왕은 공민왕까지 가야한다.
결국 고려는 이 막장사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고려왕조의 엘리트층은 살아남으려면 무신정권과 피를 섞거나 지방으로 도주해야 했고, 저항하면 그대로 숙청당해 엘리트층이 왕조멸망 급에 비견될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무신정권은 의도적으로 지방의 정규군을 해체하고 국력 증강을 방해하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백성들과 지방군들이 정부를 대신하여 고려를 지켜냈고, 후대에는 지방귀족들마저도 무신정권보다 강력한 자들이 많았다. 고려 정부는 이 사건 이후로는 강력한 행정기반을 되찾지 못하고 무신정권, 몽골제국, 권문세족, 신진사대부에 의해 휘둘리는 초라한 모습을 반복하다가 멸망한다. 그리고 이시기 이후의 왕들은 명군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암군이 주로 나오기 시작했다. 당장 이 사태의 원인인 의종도 암군으로 평가받는 중이기에.
당시 상장군 정중부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일으켰기 때문에 정중부의 난 또는 무신의 난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성공했기 때문에 난(亂)이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다. 당연히 무신정권 당대에는 난이라고 보지 않았다. 사극 무인시대에서는 경인년 거병이라고 통칭하여 불렀다.
좀 더 엄밀히 따지자면 그냥 무신정변이라고 부르지 않고 2차 무신정변이라고 한다. 이미 이전에 문신들이 무신들에게 지급되었건 밥줄인 영업전을 강탈해가자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기 때문.

2. 원인


일반적으로는 문신의 무신 차별이 원인으로 거론된다. 한뢰이소응의 뺨을 때린 것이나, 김돈중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버리는 모욕을 주고도 자기방위를 위해 정중부가 김돈중을 때렸다는 이유로 정중부를 매질하려 했던 것, 의종과 문신들의 사치 행각에 끼지 못하고 일일이 시중드는 무신들의 불만 등이 문신의 무신 차별의 사례로 거론된다.
그러나 그 속사정은 복잡하다.

2.1. 무신과 문신의 지위


고려 왕조에서 무신과 문신의 대접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문신과 무신이 권력서열을 다투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고려 왕들은 몇 세대에 걸쳐서 이궁의 변처럼 서로 카운터 펀치를 날리도록 문신과 무신에 잘못된 훈수를 두면서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고려시대는 문신들이 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는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문신 정2품의 평장사를 상원수로 임명하여 총사령관직을 맡겼고, 무신의 최고위인 상장군은 부원수에 임명되어 상원수의 지휘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 때문에 한국사에서 유명한 서희강감찬도 군공으로 인해 장군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무신이 아닌 과거를 통해 관직에 입문한 문신이었다. 강감찬이 군 임무를 수행한 것은 거란족과의 전쟁 시기인 약 3개월 정도로 얼마 되지 않는다. 여진 정벌에서 활약한 윤관 역시 무관이 아닌 문신 출신이었다. 대중들에게는 흔히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고려사에는 학문적인 면에서 좋은 평을 내리고 있다. 윤관 본인 역시 전쟁 도중에도 유교 경전을 탐독했을 정도로 철저한 유학자였다.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도 당연히 문신 출신이었다. 고려의 역사는 문신이 능력있는 장군을 겸직하며 병법을 바탕으로 전략과 전술을 보여주었던 시대였다. 고려 전기는 문신들이 고급 사령관으로서 일반 군인들보다 탁월한 전략적 지식을 겸비했고, 반대로 무신들은 전술적으론 쓸모있지만 속된 말로 '글도 읽을줄 모르는' 단순무식한 병대장 출신들이 대다수였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초기 무신들은 국가운영을 하는 역할이 아니었으므로 큰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고려시대까지 '무신'이란 체계적인 병법이나 거시적인 전략을 세울줄 아는 군인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잘하는 싸움꾼을 사령관으로 특별채용 해주는 '병대장을 장군으로 올려주는 개념'에 불과했다. 이런 방식이 가능했던 건 고려 시대 내내 전쟁이나 반란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시대는 정점인 정3품 상장군까지 올라간 무관일지라도, 자기 이름 석 자나 한자로 쓸 수 있으면 다행일 정도로 지식과 교양이 부족했다. 오랜 경험과 노련함에서 전술적 소양은 갖췄겠지만, 전장에서 그림을 넓게 보고 장병을 지휘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국내정치나 외교관계에 대한 판단을 기반으로 한 전략의 수립까지 요구되는 군대의 최고위 직책까지 맡을만한 군인을 육성하는 체제 단위의 정식교육이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문과에서도 유교 경전[2] 이외에 군사전법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시험을 요구하였기에, 고려시대의 대첩을 일군 명장인 강감찬이나 윤관 같은 사람들은 문신이었다.[3]
고려 왕조는 강력해진 문신(문벌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신들을 키웠다. 그리하여 전왕대에서 무신이 권력이 강력해졌다가, 현 왕에서는 문신들의 권력이 강력해지는 식으로 양쪽의 대접이 나빠졌다 좋아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문무 사이의 확고한 권력서열이 문란해졌다. 권력서열이 혼란스러워졌고, 어느 순간 양쪽의 감정 교류가 붕괴되어버린 사태에서 벌어진 쿠데타였다.
하지만 문신의 전시 최고 지휘관 직위는 전시에나 편성되었고[4] 평시에 실질적으로 군사를 양성하고 지휘하는 일은 무신들이 도맡아서 해왔다. 또한 그 휘하 병력은 적어도 수백~수천 규모의 병력이 편성되어있었다.[5] 또한 무신들 중에서 못 배운 사람들이 많았다지만 난을 이끈 사람들은 적어도 군사 지휘를 평균 이상은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무식하지만 완력으로 중앙에 진출한 무신들'의 이미지는 주로 국왕을 보위하는 견룡군에 씌워진 것이다. 견룡군이라는 부대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친위 중에 친위부대인지라 전략적, 전술적 능력보다는 일신의 무용이 중요한 부대이기도 하고. 헌데 견룡군은 중앙군인 2군 중 하나인 용호군에 휘하에 있는 일개 부대에 불과하기에 이 사례만으로 일반화를 하기가 좀 힘들다. 일단 중앙군 중 2군이 금군의 성격을 띄고있다는 견해가 있긴하지만 반론 또한 만만치않게 들어오고있다.

2.2. 문신과 무신의 갈등


무신정변은 문신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아온 무신들이 말 그대로 민란처럼 감정적으로 폭발해서 문신들을 대거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이 무신정변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 있으니, 바로 무신과 문신 간의 정치적 갈등이었다.
초기에는 의종 역시 문벌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무신을 되려 중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무신 정변의 주요 인물인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순검군, 견룡군(경룡군)이란 이름을 가진 일종의 국왕 호위 부대 출신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정변을 독자적으로 계획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인 것.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주의 호위 부대는 군주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로 채워진다. 따라서 비록 문신과의 차별이 있다곤 해도 이러한 특성상 차별 대우로 인한 감정적 행동으로 무작정 정변을 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고려의 무신들 상황은 결코 단순히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정도로 설명하기는 힘들 정도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고려의 여진 정벌에서 얻은 전공을 기반으로 무신들의 입지가 탄탄해지기는 했지만 이자겸의 난 직후 척준경 일파를 숙청, 그리고 묘청의 난으로 인해 무신들의 입지는 꽤나 위태로워졌다. 이때를 틈타 기존의 문벌귀족인 문신들은 무신들의 권력을 도로 빼앗으려 하였다. 이로 인해 무신과 문신 간의 알력이 극심해졌고 정계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신정변 직전까지 고려 무신들의 권위는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개선된 편이었다. 고려의 여진 정벌,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통해서 무신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공을 세운 무신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무신들의 세력이 점점 더 비대해졌다. 그러나 문신들이 무신들을 하대했던 것은 변함이 없었고[6] 갈등은 더 깊어져갈 수밖에 없었다. 무인들은 오히려 신분 상승의 기대를 품고 출세 욕구에 눈이 멀어 문신들에 대한 반감을 빌미로 이용해서 정변을 일으켰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는 신분 상승 가능성이 신라시대보다 더 높았고, 이것 때문에 들고 일어난 노비들과 평민들의 반란도 꽤 많았다.
예를 들자면 훗날 최충헌이 정권을 잡았을 때 노비들 중에서 유용한 노비들에게 신분 상승을 시켜주었고 무신으로 고용하기까지 하였다. 이때 이러한 사회상을 알았던 만적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만적은 "이의민도 천민 출신이었는데 왕의 자리를 노릴 정도로 강해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다른 노비들도 장군이 될 수 있는 판에 우리라고 못 할 게 뭐 있냐?"라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 세력 결집을 시도했다. 물론 그렇다고 무신정권이 다 천민들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을 시작한 이의방은 전주 호족이며 60% 기간을 지배한 최씨정권의 최충헌도 귀족 출신이다. 실제로 무신들 사이에서도 천민 출신은 무시당하기도 했다. 출세한 천민 출신도 사무라이들과 비슷한 편인데 귀족 출신의 종으로 들어가 그들의 무력을 배워서 성공했다. 물론 귀족의 시종이었지만 평민들보다 신분은 높았던 사무라이들과는 확실히 다르기는 하다.
게다가 의종은 무신을 우대해서 불만을 해소한다거나, 아니면 거꾸로 아예 문신들에 힘을 완전히 실어주기 보다는 두 문무 신료들 간의 알력을 적당히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것에만 급급했을 뿐이었다. 딱 붕당들을 대하는 조선시대 임금들의 모습이었다. 더욱이 의종 말엽에는 거꾸로 무신들보다는 불만 많은 문벌귀족들과 환관을 우대하며 이들에게 정치에 간여할 수 있는 발언권을 줌으로써 의종은 즉위 초반에 자신이 직접 힘을 실어준 무신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결국 무신들은 자신들과 반목하던 문신뿐만 아니라 왕인 의종에 대한 정치적 반감과 적개심까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신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의종은 수박희를 통해 무신들을 울화를 누르고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으나 이를 가만히 묵과할 문신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뢰의 모욕 행위를 역이용함으로써 아예 수박희를 했던 즉석에서 거사를 치르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을 단순히 무신들의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일단 한뢰의 행위는 무신들에 대한 문신들의 우월감과 차별 의식이 바탕이 되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그보다 이 사건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과 그 과정에서 생긴 문존무비 차별 대우 및 문신들의 오만,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국왕 등이 불러낸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뢰이소응 따귀질 사건은 경인정변의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다. 결국 반감을 해소하지 못한 무신들이 왕실과 조정을 향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의종이 질펀하게 놀았다는 기록처럼 의종의 지나친 사치와 향락으로 인해 일반 백성들의 왕에 대한 원성 또한 매우 컸으며 이는 일반 병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무신 정변 당시 일반 병사들이 무신들의 행위에 대거 동조하였고, 무신들은 이를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세력을 얻는 한편, 정변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문신들과 달리 정작 권력을 뒷받침해 줄 기반이 없어서 정권 안정화에 실패하였다. 게다가 문신들을 몰아내고 빈 권좌를 두고 무신들 내부에서 새로운 알력 다툼이 야기되었다. 자신의 힘을 믿고 걸핏하면 무신끼리 시비를 걸거나 군사를 일으켜 전투를 하고, 백성들을 문신들 이상으로 심각하게 수탈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서 민심 이반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정변 이후에는 정변 소식에 크게 고무된 지방 각지의 유력자 및 백성들이 잇따라 봉기하면서 무신 정권은 정변 초기부터 큰 난항을 겪게 되었다.
사실 이는 의종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의종이 정변 초기 국면만 어느 정도로 잘 수습했더라면 비록 우발적인 정변이었다고 해도, 과거 고려 현종 때처럼 최소한 왕위는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스스로 이를 주도하여 문벌 귀족들을 몰아내는 친위 쿠데타로 이 사건을 이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의종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다가 결국 스스로 화를 부른 격이 되었다.

3. 정변


정변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인종 재위기의 권신 이자겸이 왕위를 탐내면서 온갖 뻘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왕은 문신을 버리고 군인 출신의 무신들에게 온갖 버프를 넣어주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자겸의 난을 토벌한 무신 척준경이 그동안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정2품 품계를 수여받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후 척준경이 숙청 당하면서 척준경에 동조했던 무신들이 함께 대거 축출됐다. 척준경이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다 보니, 이자겸의 난 당시 척준경에 동조한 무신들이 상당히 많았다. 축출 다음에는 또 묘청의 난으로 인해 서경에 기반을 두고 있던 무신들이 대거 숙청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무신들의 세력이 약해지자, 다시금 정치 세력도를 되찾아야 하는 김부식, 김돈중, 한뢰 등의 문신들은 대놓고 무신들을 호구 취급하면서 서로 싸움을 시작했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무신들의 분노 게이지가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의종 때에 이르러서는 양쪽의 대립과 괴롭힘이 막장이나 다름 없었는데 의종은 문신들과 마실 나가면서 허구한 날 호위군인 금군을 대동하였고, 그 때마다 동원된 무신들은 굶어가면서 왕과 문신들이 술먹고 궁녀들하고 띵가띵가하는 꼴을 지켜야만 했다. 그것도 가끔 그러는 것도 아니고 하루가 멀다하고 이 난리를 쳐댔으니 무신들은 그야말로 환장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특히 의종은 무신들에게 관심도 없고 잘해주지도 않아 무신들은 의종에 대한 불만도 커지고 있었다.
1144년에 고려사에는 섣달 그믐[7]에는 역귀를 쫓는 의식을 했는데, 각 신하들이 각자 일종의 장기자랑[8]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로 날뛰고 즐기는 중에 내시(內侍)[9]였던 김부식의 젊은아들 김돈중이 당시 견룡대정[10]이었던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먹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중부는 외모도 훤칠하고 명장 관우처럼 멋진 수염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외모가 왕과 여러 대신에게 주목을 받자 평소 무신을 만만하게 여기던 김돈중이 이를 시기하여 벌인 짓이라고 한다. 당연히 빡친 정중부는 김돈중을 뺨때리고 쌍욕을 했는데... 문제는 김부식이 그런 막돼먹은 아들에게 면박을 주지는 못할망정 아들이 두들겨 맞으니까 자기 가문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노발대발하며 격분해서 인종에게 정중부를 똑같이 고문해서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왕은 그걸 허락한 것이다. 아무리 문신이 무신보다 위인 사회였고 김돈중이 쳐맞으면서 모욕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김부식과 김돈중이 해도해도 너무했던 것. 다만 인종은 정중부를 아끼는 사람이었고, 은밀하게 도망다니도록 도와줘서 실제로 처벌하지는 않았다.[11]
아무튼 이 사건으로 정중부는 수십년 동안 김부식 일가에게 깊은 앙심을 품게 되었고, 결국 이 앙심은 무신들의 반란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김돈중은 보현원 사건 3년전인 1167년 연등회날 밤에 자기 실수로 근위병과 부딪쳤는데 하필 근위병의 화살이 의종의 수레에 떨어졌고 밤에 임금 앞에 화살이 떨어지자 암살시도로 착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김돈중은 자기 실수를 밝히지 않았고[12] 오히려 당시 근위병 무관에게 누명을 씌워 그들을 유배보냈다. 이때 유배간 사람들이 견룡군과 순검군의 무관들로 이들이 훗날 보현원에서 문신 학살에 가담했던 군대들이었다. 괜히 정중부 말고도 다른 무신들이 적극적으로 보현원 사건에 가담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1170년 8월, 의종은 보현원에 왔다가 개경 흥왕사에 머물렀는데, 참고 있던 정중부가 폭발하여 이의방과 이고에게 "다음에 왕이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거든 그만 참기로 하고 만약 또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겨가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의종은 다음날 보현원으로 출발하려고 하다가 무신들의 불만을 어렴풋하게 느낀 건지 뭔지 갑자기 출발 전에 오문(五門)에서 멈추더니, 오늘은 훈련하기 좋은 날씨라며 일종의 씨름인 오병 수박희 대회를 열자고 했다. 이를 통해 무신들끼리 즐기게 하고 상을 나눠주려는 의도였다. '수박'은 당시에 현대의 태권도격의 국가적 무술로, 이 행사는 일종의 무술 대련 및 시합 행사로 볼 수 있다. 사실 군주제 체제에서 이런 무예 행사는 무신(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아 줄 뿐만 아니라, 군인이 군주의 눈에 띄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행사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군주들도 이러한 행사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서 군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나이 든 종3품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 경기에 참여했다가 지쳐서 경기를 피했는데, 갑자기 신참 문신인 기거주 한뢰가 튀어나와 이소응의 뺨을 때린 것이다. 이소응은 아예 섬돌에 나가떨어져 뒹굴었고, 이 때 왕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면서 크게 비웃었고, 좌승선 임종식(林宗植)과 이복기(李福基)는 이소응을 욕했다.
당시 폭행당한 이소응은 종3품 대장군으로 고려 시대의 종3품은 무신이 오를 수 있는 2번째로 높은 품계인데다가[13], 당시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59세의 이소응은 당장 예편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이 많은 노장이었다. 즉 당시 무신들에게 존경을 받는 최고령 원로였던 것이다. 반면 한뢰는 종 5품 기거주에 이전 정계활동이 거의 없는걸 감안하면 많이 잡아도 20대 후반 정도의 나이였다. 현대로 치면 대통령이 직접 참관한 사단 체육대회에서 20대 후반 정도 되는 새파란 대통령 비서관이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는 중장(쓰리스타)의 뺨을 때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보면 이소응이 60대를 앞두고 있었으니 당연히 수박희에서 이길 가능성은 별로 없다. 특히 상대는 젊은 무신이니 더더욱 없다. 그런데 그런 것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뺨을 때렸다는 것은 그저 무신을 모욕하기 위함밖에 더 안 된다. 만일 이소응이 이겼다고 하면 그때는 이소응에게 진 무신의 뺨을 때렸을 가능성도 있다.
당연히 무신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정중부는 그렇지 않아도 젊은 시절에 있었던 김부식 부자로 인해 수염이 탄 개인적인 굴욕 때문에 이런 일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견룡군, 순검군 군인들도 김돈중이 3년전 저지른 누명사건으로 문신들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중부의 분노는 폭발하여 한뢰에게 "네가 비록 문관이라고는 하나 이소응은 종3품 대장군의 벼슬을 지내고 있는데 너 따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문제는 의종이 한뢰를 질책하지 않고 그저 정중부를 보고 "그런 일로 뭐하러 화내냐 진정해라"는 식으로 한뢰를 두둔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바람에 정중부와 무신들이 제대로 머리 끝까지 폭발하고야 만다. 일단 무신정변 자체는 의종이 보현원에 가기로 하면 일으키기로 모의했고, 실제로도 그 날 밤에서야 일어났으니 굳이 이런 사단이 없었더라도 정변은 일어났을 것이다. 물론 안 그래도 쌓일 대로 쌓였던 무관들의 불만을 의종이 제대로 폭발시켰으니 뭐라 할 말이 없는 짓이었지만 말이다. 말 그대로 가뜩이나 짜증나서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고가 칼을 뽑아 정중부에게 눈치를 줬지만 정중부는 그 자리보다는 왕이 보현원에 도착하거든 난을 일으킬 작정으로 만류하였다. 기록에서는 정중부는 “왕이 이대로 보현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대궐로 돌아간다면 그냥 우리가 참자”라고 했다는데 그게 진심이었는지는 또 모를 일이다.

3.1. 살육의 시대



경인정변
의종이 보현원에 도착하기 직전 이고와 이의방은 먼저 들어가 왕명이라고 속이고 순검군의 병사들을 일제히 소집하였다. 왕과 문신들이 보현원의 문 안에 들어가자 이고, 이의방이 이끄는 순검군의 병사들이 난입했고 수박 대회에서 웃었던 임종식과 이복기가 그 자리에서 참살당했으니, 이것이 정변의 시작이다. 호위하던 병사들도 사전에 정중부의 휘하에 있었던터라 바로 순검군과 합세했다.
낮에 무신들에게 어그로를 잔뜩 끌어놓은 한뢰는 황급히 의종에게로 다가가 왕이 앉는 어상 밑에 숨었고, 왕 앞에서 자제하던 무신들과 의종을 보좌하는 내시부 관원(환자)이 한뢰에게 나오라고 말했지만 한뢰는 왕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왕은 내시부의 관원을 시켜 무신을 저지하려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이고가 칼을 빼들어 내시부 관원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지유(指諭) 김석재(金錫材)는 "감히 왕의 앞에서 칼을 뽑았는가!"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이의방이 인상쓰며 주둥아리 닥치라며 협박하자 입 닥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왕 앞에서 한뢰를 죽여버린 무신들은 평소 원한이 있던 문신들을 찾아다니면서 남김없이 죽였다. 정중부 일파는 피아식별을 위해 우측 어깨를 내어 놓고 머리에 복두를 벗었는데 이 과정에서 같은 복장을 하지 않은 다른 무신까지도 죽었다.
한편 무신들은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이 은근슬쩍 도망갔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됐고, 만약 김돈중이 개경에서 태자를 옹립할 경우 더 골치 아픈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사실 이 때 김돈중이 개경으로 가서 태자에게 알리고, 관군을 편성했으면 고작 수백명에 불과했던 무신정변은 여기서 끝이었다. 이의방이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남녘으로 바다에 뛰어들던지 북방으로 거란 놈들에게 투신해 피하겠다."고 했을 정도. 그리고 발걸음이 빠른 자를 보내 김돈중의 집에 가서 김돈중이 어디 있냐고 물었는데, 안 돌아왔다는 대답을 듣자 무신들은 성공했다고 안도하며 병력을 이끌고 수도 개경으로 곧바로 직행했다. 이후 김악산으로 도망갔던 김돈중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자의 밀고로 인해[14] 추격해온 정중부의 부하들에게 동생 김돈시와 함께 붙잡혀서 처참하게 얻어맞고 처형되었으며, 후에 목과 사지가 절단된 채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정중부의 젊은 시절에 원한이 있던 아버지 김부식 또한 죽은 지 오래였지만 부관참시당한다. 본인이 전세를 뒤집을만한 카드를 갖고 있었음에도 살리지 못해 그대로 끝난 조상과 비슷한 신세.
개성에 입성한 무신들은 궁궐로 가서 각 궁궐들을 장악하고 핵심 관료들을 모조리 붙잡아 살해했으며 사병들을 풀어 문관의 관(冠)을 쓴 놈은 말단 관리일지라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하였고 이 과정에서 문극겸[15] 등등 소수 운 좋은 이들[16]을 빼고 문관 50여 명이 잡혀 죽었다. 의종은 이 상황이 무서워서 정중부에게 그만하라고 했지만 정중부는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고, 왕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이고와 이의방을 응양용호군중랑장(鷹揚龍虎軍中郞將)으로 임명하고 다른 상장군은 수사공 복야(守司空僕射)로, 대장군은 상장군으로 진급시켰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특히 무신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계속해서 맘에 안 드는 인물들을 잡아 죽이고 다녔다.
이후 무신들은 의종을 궁궐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이때 왕이 총애하던 내시부의 관원인 왕광취(王光就)가 반격을 하려 했지만 일이 누설되어 20여 명이 또 죽었다.[17] 이때까지는 의종과 그 가족에게 손을 대지 않던 정중부는 의종을 협박해서 군기감(軍器監)이 되었고, 이후 정중부는 계속해서 직위를 높이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나 앞의 일로 인해 무신들은 의종을 신뢰하지 않아 의종과 태자를 폐위시켜 추방하고 태자의 어린 아들은 죽여버렸다. 의종이 총애하던 궁녀가 도망가있자 죽이려 했으나 공예태후가 간청해서 살려주었고, 그 궁녀는 의종을 따라갔다.
병부시랑 조동희는 지방으로 가 있던 차에 개경에서의 소식을 듣고는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오려고 했지만, 호랑이가 길을 가로막아 못 가던 중(...) 눈치챈 무신들의 기병이 와서 체포된다. 조동희는 앞서 탐라 봉기를 수습했던[18] 공이 있어 귀양만 보냈으나 중간에 데려가던 자가 조동희를 죽이고 시체를 물에 처넣었다.
그 다음엔 정중부와 무신들은 자기들이 죽인 문관의 집들까지 부수고 다녔다. 그래서 보다못한 대장군 진준(陳俊)이 "원수로 여기던 문관은 이복기, 한뢰 등 수 명이었는데 이번에 너무 죄없는 사람을 죽였다. 집을 부숴버리면 그 가족은 어떻게 사냐?"란 식으로 말렸으나 이의방 등은 듣지 않았고 수많은 문관들이 집이 파괴된다. 이때부터 무신들이 사적으로 원한이 있던 문신들의 집을 부수는게 버릇이 되었다.
무신들은 이후 의종의 동생이던 익양공 왕호를 새 왕(명종, 재위 : 1170년 - 1197년)으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명종은 역시나 허수아비일 뿐, 실권 대부분은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의종의 별장들을 정중부, 이고, 이의방이 나눠가지기도 하고, 명종이 즉위한 이후 무신들이 모여 살아남은 문신들을 모두 모았을 때 이고가 문신들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하기도 했지만 정중부가 이를 만류한 적도 있다.
1172년에는 동북면 병마사였던 김보당[19]이 다시 의종을 왕위에 옹립하고 무신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고, 거제도에 있던 의종을 데려올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들은 무신들은 장군 이의민 등에게 병력을 주어 보냈고, 안북 도호부에서 김보당은 잡혀서 고문을 받고 처형된다. 이때 김보당이 "문관 중에 누가 공모하지 않았겠나"라고 이야기 하고, 또다시 남은 문신들은 무신들에게 여럿 학살당한다.
김보당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준의(李俊義)[20], 진준, 김부(金富) 등이 정중부와 이의방에게 "하늘의 뜻은 알 수 없고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데, 힘만 믿고 정의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문신들을 모두 죽여도 김보당이 또 나오리란 법이 없겠냐"고 설득하였고, 무신과 문신의 자녀를 결혼시키는 정책[21]으로 문신들을 안심시키자고 하여 살육의 행위는 진정 국면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의민 등이 동경(지금의 경주)에서 의종의 척추를 꺾는 잔인한 방법으로 시해하고는 그의 시신을 버려버린다. 고려사에 따르면 큰 솥 안에 그의 시신을 담고는 곤원사 연못에 버려버렸다고 한다. 이에 누구도 의종의 시신을 꺼내려하지 않았지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부호장 필인이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시신을 꺼낸 뒤 수습해 관을 짜서 물가 근처에 묻어주었고, 이후 의종 시해를 사주한 이의방이 사망하고 나서 명종에 의해 희릉으로 옮겨졌다.

3.2. 후일담: 무신 정권과 권력자의 교체


  • 자세한 내용은 무신정권과 각 권력자들 개개인의 문서를 참고할 것.
1170년에 시작된 무신 정변 이후 주동자들인 정중부와 이고, 이의방에 의해 무신정권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1171년에 이의방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던 이고와 동료 채원 등을 싸그리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나갔다.[22] 무신들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정중부는 고속 승진하여 1173년에 정승의 반열인 문하시중까지 오르면서[23] 계속 무신들의 리더 및 집권자 역할을 하였으나, 세력이 강해진 이의방을 경계하기도 하는 등 무신 내에서는 권력 다툼과 분열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며 무신들도 자신들의 원수였던 문벌귀족만큼이나 타락하여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겨 국가적으로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고려 왕가와의 혼인을 획책하기도 할 정도로 야심이 커졌던 이의방은 1174년 조위총의 난에서 패배하고 복귀하던 중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보낸 승려 종참 등에 의해 암살당했다.(갑오정변) 이후 정중부가 독주하는 세상이 오자 그의 아들인 정균 역시 방자한 생활을 하며 전횡을 부렸고 공주를 자기의 아내로 눈독을 들일 정도로 막장 행각을 이어갔다. 결국 1179년에 새로운 인물인 경대승기해정변을 일으켜 정중부와 사위 송유인, 그리고 정균을 몽땅 죽이고 권력을 틀어쥐면서 고려의 무신 정권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4년 만인 1183년에 경대승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에 경대승의 위협으로부터 몸을 피해 경주로 낙향했었던 이의민이 돌아와 권력을 잡으며 무려 13년 동안 국정을 어지럽히고 사사로이 왕실의 재물을 탐하는가 하면 권력욕에 취해 문하시중의 지위에까지 올라 전횡을 일삼는 등 전횡을 부리다가 1196년에 최충헌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병진정변). 이후로는 오랫동안 최충헌과 그 후손들이 집권하며 무신 정권의 절정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내부 부패에 이은 1231년에 시작된 몽고(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는 혼란으로 빠져들게된다. 무오정변으로 몰락한 최씨 일가 이후로도 1258년에 등장한 김준과 1268년 무진정변으로 집권한 임연, 임유무 등이 있었지만, 원종이 무신들을 시켜 임유무를 처단함으로써(경오정변) 1270년에 무신 정권은 끝이 난다.

4. 후세 평가


이때부터 1270년 5월까지 약 100년간 무신정권이 시작되고 고려의 역사에는 피비린내가 더욱 진동하게 된다. 이후 고려는 문신적인 기풍은 크게 쇠퇴하여, 이제현충렬왕과 문답할 때는 "글을 배울 곳이 없어 유학책 읽어야 할 사람들이 승려한테 글을 배운다."고 말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물론 최우 정권기에는 서방도 깔리고 이규보 같은 문인도 올라오고 상정고금예문 재판본 등 금속 출판물이 등장하는 등 비문명 사회로 전락한 것은 아니지만, 문(文)적 기풍이 크게 쇠퇴하고 남은 것 또한 정권에 종속되다시피 했다.
무신 정변은 한국사에서 몇 안 되게 집권 계층을 싸그리 물갈이한 사례로는 의미가 부정적으로라도 있는 사건이다. 특히 최근 들어 권문세족 - 사대부의 연결성과 훈구파 - 사림파의 연결성이 주목받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한국사에서는 더욱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다. 묘청의 난 등 전조가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지방의 뛰어난 인물이 중앙에 합류, 중앙 귀족과의 교류로 성장'하는 식이 아니라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면서 중앙에 진출하여 명예를 재확인'하는 식의 성장, 그리고 여기에 힘입어 중앙이 지방 세력과 타협할 수 있을 정도의 연결고리를 갖게 된 것도 무신 정변으로 인한 집권 세력의 격변이 미친 영향으로 평가받는다.
고려 당대의 무신정변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알 수 없다. 고려도 조선처럼 나름대로 실록을 편찬해왔지만 명종 이후 무신정권에 의해 실록 편수관이 잠식되고 말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무신 최세보(崔世輔)가 동수국사에 임명되어 실록 편찬을 감시했고 이후 무신정권이 끝날 때까지 무신 세력이 실록을 일일이 감찰했다고 한다. 또한 고종 대에 제작을 시작한 명종실록부터는 사관(史官)만이 실록을 편찬해야 한다는 규칙이 깨져버리고 이규보(李奎報), 권경중(權敬中) 같이 사관이 아닌 사람들이 실록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막장이었던 무신정권 시기와 원 간섭기 시기의 실록들, 더 이전으로는 예종, 인종 대 이후의 고려실록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도 비판을 많이 받았고, 객관적인 실록 편찬에 있어서의 반면교사로 삼았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 당대의 공식 기록에서는 무신정변이 미화되었을 것이라 보는 견해가 많다. 반대로 조선시대에는 반란 그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과거 한국의 군사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한 자신들을 정당화할 명분으로 무신정변을 차별받는 군인들의 정당한 궐기로 포장하였다. 1980년대 중순 국민학교 사회 교과서에선 삽화로 문신들은 의종과 마셔라 부어라하고 무신들은 더운 여름에 중무장 상태로 경비나 서고 있는 그림으로 불만을 가질 만한 묘사를 한 적도 있다. 1990년대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다시 무신정변의 '진취성, 정당성'(?)보다는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한 객관적이고 입체적인 분석이 늘어나고 있다.

5. 관련인물



5.1. 무신



5.2. 문신



5.3. 왕가



5.4. 기타



6. 창작물


  • 사극 무인시대의 시작부는 무신 정변에서 명종의 등극까지의 전개를 다루고 있다. 2화 마지막에 이의방이 왕광취의 목을 내던지면서 의종에게 '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워낙 박력이 대단하다 보니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무인시대의 무신 정변 파트는 초반 치고는 상당히 복잡한 전개를 보이는데, 무신들이 문신들을 쳐죽이고 왕을 폐위시켰다는 뼈대에, '소장파와 노장파 무신간의 대립', '차기 왕을 누구로 세울 것에 대한 논란', '이고와 이의방의 대립', '무비와 정중부와 이의방 간의 밀거래' 등, 온갖 갈등 요소들이 얽히고설킨다. 덕분에 극 초반 치고는 숨막히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전개를 보인다. 무인시대에서의 보현원 사건은 한겨울에 벌어진 것으로 묘사되며, 드라마 도입부엔 아예 눈보라가 몰아친다. 하지만 실제 사건은 가을인 음력 8월에 벌어졌다. 촬영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날씨 묘사는 사건 전개에 별다른 관계가 없으니 심각한 고증오류 정도는 아니며, 오히려 1화 최초반 장면에서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오들오들 떨며 왕의 마차를 인솔하는 무신들, 마차 안에서 편히 앉아서 따뜻한 술과 청산유수하며 시가(詩歌)로 희희낙락하는 왕과 문신의 방탕함, 아첨으로 응수하는 환관의 간사함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배경 설명에 힘을 실어주어 역사 지식이 전무한 사람으로서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이 눈 속에서의 행차 장면은 무인시대 드라마의 시작과 끝을 모두 장식한 장면이다.
  • 2018년 후반부터 아재개그의 소재가 되면서 소소하게 유명해진 사건이기도 하다. '무신', '문신', '무인'이 들어가는 제목을 적은 뒤, 이 사건을 다룬 역사화를 올리는 전형적 제목 낚시 드립.[24] ## 기출변형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

7. 같이보기


[1] 오늘날의 북한 장풍군 남단에 있었던 사찰.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의 청평사라고 알려져 있어서,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도 그렇게 자막이 달려 나왔으나 사실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12권 '장단도호부' 편에 보현원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고, 의종이 자주 찾아 연회를 베풀었으며, 정중부가 문신들을 모두 죽였던 절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다만 이 춘천 청평사도 고려 시대에 건립된 절이고 이 절 역시 '보현원'이라고 불리기도 했기 때문에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2] 고려시대의 유학은 조선시대의 주자학과도 거리가 멀었고, 동아시아의 유교 경전은 현대 공무원 시험 과목으로 치면 정치학, 행정학 등의 행정 과목이었다.[3] 조선시대에도 무과시험은 하도 많은 인원을 뽑아서 '만과(萬科)'라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선발 과정 자체는 체력 및 무술검정과 병법서와 유교 경전에 대한 교양지식을 두루 테스트하여, 무관도 엘리트 관료로서의 소양을 갖추도록 했다.[4]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자주 나타나는 군 최고 사령관직의 비상설화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기록상으로는 무려 전한시절부터 숱하게 반복되어 온 일이다.[5] 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는, 편제만 따지면 4~5만 정도 되는 병력이 존재한다. 물론 모든 부대가 완편되어있는지는 다른 이야기이다.[6] 문신에게 줄 토지 조세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신들의 영업전을 강탈한 사건도 있었다.[7] 제석(除夕).[8] 잡기(雜技)라고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귀신쫓는 춤 같은 것을 췄을 것이라고 추측한다.[9] 고려시대의 내시는 조선시대의 내시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엄연한 관직으로, 왕의 최측근 역할을 맡은 정식 관료들이었으며, 다른 관직을 지닌 자가 겸임하였다. 고려 중기까지는 유력 귀족 자제들이 주로 맡았으며 이를 환관이 맡게 되는 것은 원간섭기를 거쳐 가며 원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다. 그래서 고려 초중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선 내시에게 수염이 있다. 간단히 이야기해 이 당시의 내시는 환관과 다르며, 성기능도 정상적으로, 고환이 있었다.[10] 견룡군은 고려 왕실을 지키는 근위대이다.[11] 굳이 말하자면, 정중부가 김돈중을 두들겨 패면서 욕설을 날린 잘못은 있었다. 현실에서도 먼저 때린 게 더 크게 잘못이라는 불합리성도 있으니. 하지만 문제는 결국엔 피장파장에 불과했었는데, 김부식이 아들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정중부가 아들놈 때린 것만을 나무란 것이다. 특히 인종이 김돈중의 잘못이 있기에 고문을 반대하는데도 해달라고 한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걸 지켜보던 무신들은 그야말로 어이없고 기가 찼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 때문에 정중부는 김부식 일가에게 크나큰 원한을 품게 된다.[12] 이것 때문에 애꿎은 대령군의 종 나언 등등이 암살범으로 몰려서 참수당한다. 김돈중은 죽기 직전 이 일을 이야기하며 자기 때문에 죄 없는 자들에게 화가 미쳤으니 자기가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유언처럼 말했었다.[13] 가장 높은 품계는 정3품 상장군.[14] 김돈중에게 걸린 현상금이 탐나서 배신했다.[15] 운이 좋게도(?) 그는 이 해 의종에게 바른 말을 한 이유로 좌천되었는데 이것이 원인이라는 얘기 혹은 평소에 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면했다는 얘기가 있다. 실제로도 문극겸은 간언 이외에도, 무신을 차별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문신과 동등하게 대우해줬다.[16] 이들도 문극겸의 덕을 꽤 봤다.[17] 왕광취를 포함한 20명은 모두 살해되어 목이 효수된다.[18] 의종 22년(1168년)에 있었던 양수 등이 주도한 도민 봉기로 고려 육지부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이 우선적인 원인이었기에 봉기를 일으킨 측에서 ‘과거 제주에서 선정을 펼친 최척경을 재부임시켜주면 알아서 봉기 접고 물러나겠다’고 요구했고 조동희는 제주선위사로써 이러한 도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해 고려 조정에서 도민들의 요구대로 최척경을 재부임시키는 대신 양수 등 봉기를 주도한 일곱 명을 처형하는 선에서 수습을 마쳤다.[19] 문신이었지만 의종의 실정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무신 정변 때에는 타겟이 되지 않아 무사했다.[20] 이의방의 형.[21] 이 정책은 200년 후 역대급 나비효과를 낳게된다.[22] 일설에는 이고가 십팔자위왕을 믿고 왕위를 노렸는데 그로 인해 죽었다고도 한다.[23] 이 때문에 이의방의 집권기를 정중부의 집권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24] 제목 낚시의 시초는 "자궁에 문신~"이나 "문신충이 없는 이유"등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