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오딘지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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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의 정치인이며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대한민국에서는 Ngo로 쓰인 성씨를 잘못 읽은 '''고딘디엠'''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식민지 관료로써 사회활동을 시작했지만 프랑스 제국에 항의하여 독립운동에 나섰고, 호치민도 응오딘지엠을 포섭하려고 했을 정도로 한때는 독립운동가로써 명성이 자자하여 존경받는 인물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가 종식되고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로도 80만명에 달하는 반공 탈북민을 정착시키고 부패한 군벌을 일소했으며 경제성장을 이끄는 등 나름대로 뛰어난 업적을 세웠지만, 오래지 않아 족벌정치와 불교탄압을 일삼는 등 무능하고 타락한 독재자가 되면서 민심을 잃었고 결국 세계적으로 어그로를 끌면서 군부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지도자들이 응오딘지엠만도 못한 역량과 지도력을 지닐 정도로 무능하여 안정화에 실패했고, 남베트남은 미국에 의존하는 식물국가로 전락하다가 결국 1975년에 멸망했기에 역대 남베트남의 지도자 가운데서는 그나마 능력은 있던 인물이라는 재평가를 어느정도 받게 되었다.
보통 응오딘지엠의 직위인 president를 쯔꾸옥응으로는 똥통(tổng thóng)이라고 표기하는데, 한자로 쓰면 '總統(총통)'이며, 중국어에서 대통령(president)을 일컫는 표현과 일치한다. 이 때문에 한국어로도 원어를 살려 '총통'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통상 '대통령'이라고 번역하여 표기한다.[2] 대만의 總統(president)은 통상 '총통'이라고 표기해 주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는 베트남에서 한자를 안 쓰기도 했고,[3] 당대 한국에서 미국을 통하여 베트남을 인식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2. 생애
2.1. 식민지 관료에서 독립운동가로
응오딘지엠은 1901년, 베트남 꽝빈 성 후에에서 고위 관리 응오딘카(Ngô Đình Khả / 吳廷可)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응오딘카는 프랑스에 협력하던 인물이었지만 응오딘카의 궁극적인 목적은 베트남의 개혁에 있었지 프랑스를 추종하여 부귀영화만을 얻는 것이 아니어서 1907년에 프랑스에 항의하여 사임했고 이 때문에 응오딘카는 애국자라 불리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아들인 응오딘지엠 역시 그런 아버지의 성향을 물려받아 행정학교 졸업 이후 식민지 관료의 경력을 밟았다. 7년 동안 식민지 마을을 관리하는 고위 관료를 지냈으며, 1930년대 초반에는 공산주의와 연대한 반프랑스 성향의 농민 봉기를 프랑스와 함께 진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3년, 내무대신 임명 이후 두달이 되지 않아 프랑스가 베트남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항의하며 사직하였고 다시는 식민지 관료의 길을 걷지 않았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인도차이나 진주가 시작되자 응오딘지엠은 일본과 협력하여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을 독립시키고자 했다. 1943년, 응오딘지엠은 베트남의 민족주의 정당을 규합하여 프랑스에 맞서려고 했는데 이것이 적발되어 식민당국에 체포될 뻔 했으나 일본의 도움으로 사이공으로 도피했다. 이후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과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일본이 1945년 3월 9일, 비시 프랑스를 내쫓고 베트남 제국을 선포하며 인도차이나 병탄의 의지를 보이자 응오딘지엠은 바오다이의 정부를 구성해달라는 제안을 뿌리쳤다. 이에 대한 전통주의적인 해석으로는, 일본의 힘을 빌려서 베트남을 독립시키려 한 것을 부귀영화를 위해 친일했다는 식으로 폄하 및 매도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북베트남의 주장에 경도된 잘못된 해석으로 간주된다.
비슷한 시기에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민 세력이 강대해지자 응오딘지엠을 비롯한 반공 민족주의자들은 프랑스의 편을 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호찌민의 편을 들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고민하다가 반식민,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제3세력을 추구했다. 이때 베트민은 1945년 8월 사이공에서 후에로 이동하던 응오딘지엠을 억류하고 그의 맏형인 응오딘코이를 처형했다. 이 때문에 베트민과 응오딘지엠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고 응오딘지엠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 사서 베트남 연립정부에 참여해달라는 호찌민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호찌민은 독립운동가로 나름 명성이 높았던 그를 억류하는 것이 자신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반공 성향의 민족주의 세력을 포섭하려면 그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하여 그를 석방했다. 흔히 미국 지지 받아 하루아침에 떠오른 듣보잡 정도로 여겨지지만, 이 시기까지의 응오딘지엠은 베트남에서 두루 존경받으며 호찌민도 무시할 수 없는 중량감 있는 독립운동가였다. 오히려 유명해지기는 호찌민보다 응오딘지엠이 훨씬 더 빨리 유명해졌다.
2.2. 8월 혁명에서 집권까지
1945년 8월, 혁명으로 바오다이의 베트남 제국은 붕괴되었으나 1949년, 엘리제 협약을 통해 바오다이는 다시 베트남의 지도자로 복귀했다. 응오딘지엠은 이런 상황에 반발하여, 1949년 6월 16일 성명을 통해 베트민은 물론 바오다이와도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친프랑스파는 물론 베트민 역시 응오딘지엠을 위협적인 라이벌로 여겨, 1950년 2월엔 응오딘지엠 암살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응오딘지엠은 가톨릭 주교인 둘째 형 응오딘툭[4] 과 함께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이때 응오딘지엠은 일본, 미국을 들러 정치학자 웨슬리 휘셸, 미국 국무부 관리 등을 만나며 정치적 입지 확보를 꾀했고 바티칸을 들러 교황 비오 12세를, 프랑스에서 바오다이와 만나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을 꾀했으나 결과가 신통치 않아 정세가 자신에게 유리해질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때 미국 방문 등이 성과를 거두었는데 존 F. 케네디, 마이크 맨스필드, 윌리엄 더글라스를 비롯한 미국의 정치 거물들과 1953년에 접촉하여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어 미국이 자신을 지지하게 만든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뉴는 베트남에 남아 형을 위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결국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자 궁지에 몰린 바오다이는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임명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압력이라는 해석이 많았으나 결정적인 증거는 발굴되지 않고 있으며 바오다이는 이것이 베트남인들 스스로의 논리적 선택이었다고 회고했다. 1954년 6월 16일, 응오딘지엠은 전권을 약속받은 총리직을 수락했다.
그가 프랑스의 꼭두각시로서 세워졌다고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시기에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군사적인 패배로 일소되고 있었다. 이후 제네바에서 베트남 문제 해결을 위한 9개국 회담이 개최되면서 1956년, 전국선거 이전까지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에서 분할한다는 것이 합의되었고 프랑스 군대는 총선거 실시 때까지 주둔하기로 하였다. 이 제네바 협정에서 미국은 협정 준수는 선언했지만, 북베트남의 공산화를 불만스럽게 여겨 서명은 하지 않았다. 바오다이 정부 역시 서명하지 않았다.
2.3. 친프랑스 세력의 제거와 바오다이의 축출
자신의 입지와 명망에 힘입어 총리에 오른 응오딘지엠이었지만, 오랜 세월을 베트남에서 떠나 있어 기반이 없던 응오딘지엠의 입지는 아주 불안했다. 일단, 친불 성향이 아주 강했던 베트남국의 기득권은 응오딘지엠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베트남국 정규군의 대부분은 프랑스군에게 훈련받은 군대였고, 특히 참모총장 응우옌반힌은 대놓고 응오딘지엠을 제거하겠다고 천명하고 있었다.내가 앞장서면, 나를 따르라. 내가 달아난다면 나를 죽여라. 내가 적들에게 죽는다면, 나의 복수를 해다오!
1954년의 발언.
그렇다고 친불 세력만 문제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손에 넣은 이래로 가장 오랫동안 프랑스를 상대로 항쟁한 것은 바로 불교 같은 종교 세력이었고, 20세기가 되자 이들은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같은 현대적이고 절충적인 형태의 종교들로 승화하면서 스스로의 입지를 강하게 다졌으며, 곧이어 스스로 사병조직을 만들어 프랑스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스스로의 군대의 충성심도 보장하지 못하는 와중에, 지방, 특히 안보상 중요한 캄보디아 국경 근처 지방들을 이들이 장악하고 있던 것도 불안 요소였다. 이들은 2차대전 종전 전까지 항불 군사투쟁을 계속했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는데다[5] 종교까지 곁들여져서 지역 주민들의 막강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도 사이공은 안전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던게, 사이공에서 외항도시 붕타우로 통하는 수로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범죄조직 기반 군벌 빙쑤옌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심지어 사이공 시의 경찰력까지 가지고 있었다![6] 응오딘지엠 정권은 2년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여기에 미국도 아직까진 응오딘지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응오딘지엠을 지지했으나, 미국 대사 도널드 히스와 로턴 콜린스 모두 응오딘지엠은 가망이 없으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렇듯 응오딘지엠 정권은 군권, 경찰권, 경제권이 모두 친프랑스파에게 장악당하고 중앙권력마저 취약하며,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기도 힘든 매우 위태로운 상태에서 출발했다. 이 때문에 아이젠하워 정권은 콜린스의 제안에 따라 응오딘지엠에 대한 지지 철회까지 고려했다.
1954년 6월 25일, 떤썬녓 공항을 통해 귀국하여 7월 7일 정부를 구성한 응오딘지엠의 첫 과제는 90만에 달하는 탈북민의 정착이었다. 당시 북베트남에서는 가톨릭을 제국주의의 주구로 본 호치민 정권의 탄압으로 수많은 가톨릭 교도들이 탈북의 길에 올랐고 토지개혁의 실패로 정권이 흔들릴 정도의 혼란이 오면서 가톨릭 교도들이 아닌 농민들도 탈북하고 있었다. 대략 가톨릭 교도가 60~70만, 불교도가 20만 명 정도 탈북했다. 여기에 미국이 '자유의 길 작전'이라는 해군 작전을 실시하여 이들의 월남을 조직적으로 도왔고 CIA도 "성모 마리아께서 남으로 가셨다"는 소문을 북베트남에 퍼뜨려 가톨릭 교도들의 탈북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들의 월남을 유도한 결정적 원인은 미국의 막후 공작보다는 '베트민의 보복과 남베트남에서의 경제적 기회'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북베트남 가톨릭 교도들이 북위 17도 이남의 가톨릭 성지를 자주 순례한 '이주 문화'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응오딘지엠은 이들 90만의 탈북민을 매우 성공적으로 정착시켰고, 이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의 골수 지지층이 되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은 불안정한 정권 공고화에 나섰다. 가장 먼저, 첫 내각을 자신의 친지들로 채운 것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종교파 일원들과 기타 지식인들이 반 응오딘지엠 조직인 '연합전선'을 형성했으나, 한편으로는 북쪽에 공산주의자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저렇게 큰 반정부조직이 있는 걸 불안하게 생각한 일부 종교파 인원들이 응오딘지엠 체제에 합류해서 또 다른 종교파 연합조직인 '혁명위'를 창설하게 되었다. 특히나, 베트민에게 까오다이교가 배신을 당하고 프랑스와 손을 잡은 와중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부족한 돈과 인력으로도 양쪽과 동시에 싸웠던 것으로 매우 명성이 높았던 찐민테가 이 혁명위의 중진이 된 것이 응오딘지엠에게 큰 성과였다. 혁명위 자체가 종교주의자들 뿐 아니라 수많은 성향을 가지고 있던 집합체였기에, 이들과 협치를 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아냈다면 응오딘지엠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베트남에 정착시킨 영웅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7]
1955년 9월 27일에서 29일에 걸친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의 인도차이나 지원이 1956년 1월부로 프랑스를 거치지 않을 것임이 결정되자 응오딘지엠은 즉각 프랑스 연방에서 탈퇴했고, 1956년 1월 19일, 프랑스 주둔군 연장협상에서 "아무리 그들이 친할지라도 외국군의 존재는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양립할 수 없다."라고 비판하며 프랑스군 철수를 요구했다. 결국 프랑스는 1956년 4월 26일, 제네바 협정의 합의를 파기하고 공동 의장국인 영국과 소련에게 일방적인 철수를 통보했다. 1956년 3월 4일, 단독국회가 구성되었으며 7월 헌법이 국회를 통과, 10월 26일 베트남 공화국이 정식으로 탄생했다.
2.4. 독재의 길과 미국에 대한 의존
1956년, 응오딘지엠은 베트남 공화국 헌법을 발표했다. 헌법 자체는 구구절절 명문이었는데, 문제는 응오딘지엠 자신이 그다지 민주적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불편해했고 정권 비판에 민감하여 반정부 세력에 대해 신속한 탄압으로 대응했고 북부 출신 반공주의자들만 가까이하며 편협해졌다. 특히, 혁명위는 종교주의자부터 민주사회주의당이라는 이름이 붙은 정당 소속 사람들까지 매우 다양한 성향을 가진 인사들이 오직 타도 베트남 공산당, 타도 호치민의 기치 아래에 모인 것이었기에 그 목소리가 매우 다원적이었고, 민주주의보다는 권력을 독점하고 싶던 응오딘지엠은 이 조직의 존재가 매우 불편했다.
때문에, 베트남 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자마자 즉시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그리고 기타 응오딘지엠의 세력을 제외한 정치권에 대한 격렬한 탄압이 시작됐다.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군벌 군사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정부에 호의적이던 찐민테나 Nguyễn Thành Phương의 부하들조차도 당초 응오딘지엠이 약속했던 것과 달리 베트남 정규군에 전혀 편입되지 못했다. 호아하오교 지역 주민들에게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던 레꽝빈이 정부에게 항복했음에도 항복을 거부당하고 단두대로 처형당했다. 이렇게 민중들의 지지를 받던 인사를 체포한 사람들이 하필이면 구 베트남국의 친불 기득권 세력이라는 점도 문제였고, 사실상 응오딘지엠은 이 때부터 민중들을 상대로 한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9]
종교파만 탄압당한 것이 아니다. 응오딘지엠은 반공선언운동을 벌이는 한편 반공 재교육 캠프를 만들어 1만 5천~2만명을 수감시켰고 1957년에만 7~8만의 정치범을 투옥시켰다. 1956년 1월 '질서와 안보가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국가 방위와 공공질서에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누구라도 가택 연금하거나 수감할 수 있다'는 법령 6호를 발표했고 1959년 10/59법을 발표, '국가안보를 파괴 혹은 침해하려는 목적을 지닌 범죄를 저지르거나 혹은 그에 대한 기도는 사형에 처해진다'고 발표했다. 이 법은 피고인 변론도 주지 않는 악법이었다. 이 법은 1962년 11/62법, 즉 최전선군사법으로 강화되었고 가족 친목회까지 탄압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치하보다도 덜 자유스럽다는 평가까지 나왔고 북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이 16만명을 죽이거나 부상입히고 24만명을 투옥시켰다고 주장했다.
한편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이전부터 명백했다. 미국은 루스벨트 정권 시절에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를 제거하려 했지만 트루먼 정권이 들어선 이후 반식민주의보다는 반공에 집중하여 유럽의 반공질서 구축을 위해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개입을 묵인했다. 트루먼 정권이 일찍이 1950년 2월 1일 바오 다이 정부를 승인함으로 인도차이나에 본격적으로 개입했고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이 각각 국부천대와 시원치 않은 휴전으로 마무리됨에 따라 인도차이나의 정치적 중요성이 높아졌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우려했고 적극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미국이 퍼부은 돈만 30억 달러에 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제네바 회의의 미국대표단에게 "예상치 못한 정전 혹은 현존하는 합법정부를 타도하는 기능을 가진 어떤 해법을 인정하거나 동의하지 말라."라고 지시하는 등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1954년 이래 미국의 대월정책은 1. 남베트남의 안보 확보, 2. 남베트남의 경제발전, 3. 남베트남의 민주주의 증진이었다. 그리고 남베트남 지원의 명분을 약화시키는 제국주의를 연상케하는 바오 다이 정권 퇴출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성립을 지원한 것이었다. 1954년 9월 8일 동남아시아조약기구가 정식으로 출범했고, 아이젠하워는 10월 23일 "강하며 성장발전하고 전복시도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때부터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해 이념 기초, 헌법 구상, 군사, 경찰, 정보, 행정, 문화, 교육, 경제 전반에 대한 인적, 물적 지원이 시작되었고 1954~1955년에만 3억 2천만 달러에 달하는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앞서 적은 것처럼, 1955년까지 응오딘지엠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그렇게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응오딘지엠에 대한 회의를 막고 지원한 것은 CIA와 미국의 응오딘지엠 지지자들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랜스데일과 맨스필드 등이었다. 렌스데일은 응우옌반힌 제거를 원조했고 맨스필드는 바오다이 퇴출을 도왔다. 1955~1956년까지의 미국의 원조는 남베트남 반공정권의 유지와 재생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응오딘지엠의 반민주성과 이것이 결부되면서 민주주의 증진은 등한시되고 미국의 베트남 지원은 남베트남의 현대적 경찰국가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61년 말, 미국인 고문수는 700명에서 1962년 중반 3400명으로 증가했고 미국의 지원이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응오딘지엠 정권이 '미국의 돈과 비전에' 종속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서방 언론에서 남베트남은 독립성을 의문시하는 비판적 보도들이 나오게 되었다. 확실히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해 지나치게 고압적인 정책을 유지하여 정권 내부의 반발도 샀다. 응오딘뉴는 "미국 대사는 편견을 가지고 우리에게 언제나 반대한다."라고 했으며 웅오딘지엠도 미국 고문들이 베트남을 식민지로 여기는 듯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응오딘지엠 정권 역시 미국의 괴뢰국이라는 주장을 북베트남과 반미 측에서 오랫동안 정설인양 유포했지만 응오딘지엠 - 미국 관계는 어디까지나 주권국가간 관계로 평가되며 응오딘지엠 정권은 괴뢰국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사실상 괴뢰국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당장 응오딘지엠 정권의 출범이나 종말도 모두 미국이 관여했다. 응오딘지엠의 몰락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체 자신의 힘으로 미국의 간섭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고 응오딘지엠 정권붕괴후의 남베트남 정권은 응오딘지엠의 사례를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미국에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고 결국 미국이 남베트남이 버리자 패망할 수 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나친 입김을 경계하여 이를 제거하기 위해 한가지 수단을 도입했는데 그것이 바로 '''가족 정치'''였다. 응오딘뉴는 내무부장관 겸 남베트남의 여당인 민귀근로당 지도자였고 그의 아내인 '마담 누' 쩐레수언은 국회의원 겸 베트남여성운동 수장을, 응오딘뉴의 처가에 외교부 장관, 교육부 장관을 비롯한 장관직 3개에 주요국 대사, 대법원장 등의 요직이 돌아갔으며, 응오딘까인이 공식 직위도 없이 중부 지방을 통치하는 등[10] 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의 개인 왕국처럼 변해갔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의 정권은 남부에 있으면서 정작 남부사람들을 배척하고, 중부인과 북부인을 중심으로 정권을 꾸렸는데 베트남에 중부인이 500만, 남부인이 900만에 달한 반면 상위 행정관료 186명 중 남부인은 67명에 불과했다. 소외된 남부인들은 정권에 대해 반감을 품었다. 게다가 전국의 7%에 불과한 가톨릭 교도들이 국회의 22~27%를 장악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로 인해 응오딘지엠 정권이 민사 정책을 펼쳐도 민중들은 다른 발음을 구사하고 상이한 종교를 믿는 이방인이었던 피난민들로 구성된 정부의 억압적인 통치에 분개했다.
2.5. 공산화의 위협과 사회 혼란의 가중
1955년부터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평화 공세에 돌입했다. 그 해 2월, 북베트남이 총선거를 위한 사전협의의 발판을 위해 남북간의 정상관계 회복을 제안했는데 이는 우편, 도로, 철도, 해공상 교통 재개를 의미했다. 이는 북베트남이 자신들이 선거를 통한 권력장악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11] 이후 북베트남은 6월, 7월 그리고 1956년 5월과 6월에 걸쳐 총선거와 통일문제를 논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천명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북베트남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1955년 1월 남베트남은 총선거를 치를 법적, 도덕적 의무가 없어 총선거를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며 북베트남의 평화공세를 거부, 무시했다. 남베트남은 제네바 협정의 당사자도 아니고, 서명도 한 적 없으니 얽매이지 않고 북베트남에는 자유가 없는데 어떻게 자유 총선거를 할 수 있냐는 것이 응오딘지엠의 논리였다. 실제로 북베트남은 독재 정권이 맞았고 선거를 감독할 프랑스 군대의 일방적 철수로 인해 선거의 안정성 역시 담보할 수 없었으므로 응오딘지엠의 논리가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그해 5월에 응오딘지엠의 견해를 지지했다. 응오딘지엠은 1955년 7월과 8월에 총선거를 위해 협의하지 않을 것임을 재통보했다. 그리고 북베트남의 전체주의 성격과 제네바 협정 위반 사례, 보장국 부재를 상기하며 북베트남을 비판했고 북베트남에 억지로 묶여 있는 사람들의 출국을 촉구하기도 했다. 통일 정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개 북진통일의 피상적 언급에서 그쳤고, 응오딘지엠의 당면과제는 남베트남 국가의 건설로 인식되었다. 미국은 1956년 6월과 7월에 응오딘지엠의 입장을 다시금 지지했다. 1958년 4월 26일 응오딘지엠은 북베트남이 남부와 비슷한 민주적 자유를 세운 후에만 선거가 가능하단 입장을 밝혔다.
한편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위원회에서 흐루쇼프가 서방과 공존을 추구하겠다고 결정한 이후, 북베트남은 한동안 남베트남과의 평화통일을 주장했지만 헝가리와 폴란드의 소요 및 중소분쟁이 이어지면서, 북베트남은 1956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11차 전체회의에서 남베트남에서 혁명조직을 점진적으로 형성하고 반동분자를 처벌한다는 비밀정책을 승인했다. 이는 남부 혁명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테러를 승인한 것이었다.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정부 관리, 교사등에 대한 테러가 이어져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북베트남은 1957년 남북베트남의 UN 동시 가입을 제안하는 소련의 제안마저 거부하고 남베트남 민족해방을 외쳤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베트남 통일을 원하는 북베트남에게 UN 동시가입은 분단의 영구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북베트남이 사주한 테러가 이어지자 응오딘지엠은 농촌을 안정시키고 혁명을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2천명 이상이 처형되고 수천명이 동조자로 투옥되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 지역의 혁명역량이란 것 자체가 붕괴될 지경에 이르자 1959년 1월 북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15차 전체회의를 열고 혁명전쟁전략 채택을 결의하면서 그해 늦여름부터 남베트남의 무장 저항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1960년 9월 5일 하노이의 베트남 노동당 3차 전국대회가 결성, 미국의 개입 없이 응오딘지엠을 무너뜨리기 위한 방책으로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시켰다. 이로써 1959년까지 이어졌던 남베트남의 '6년 동안의 평화'는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 응오딘지엠의 독재에 분노한 남베트남 지식인 사회가 반발했다. 농민들은 공무원 부패와 실패한 토지개혁 때문에 불만스러워했고 불교도들은 정부가 가톨릭을 편애한다고 분개했다. 여기에 화교와 소수민족들은 중앙권력 강화과 지방 통제력 강화에 권리를 침해당했고 대도시에서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반 응오딘지엠 운동이 벌어졌다. 여기에 미국은 응오딘지엠이 공산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고 불만스러워했고 응오딘뉴의 성향과 미국이 충돌하면서 미국-응오딘지엠 정권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961년 1월엔 미국이 묵인한 가운데 쿠데타가 벌어졌고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북베트남은 이것으로 남부의 안정기가 끝났다고 판단, 평화적 해결이 필요없다고 결론짓고 1961년 2월 인민해방군을 결성하여 민족해방전선의 군대로 삼았다. 이로 인해 베트콩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2.6. 경제성장과 실패한 내부 개혁
응오딘지엠은 경제개발에도 전력을 기울여 집권한지 4년만에 쌀 생산량을 180만톤에서 300만톤으로 증산했고, 325개에 불가하던 고무농원을 4,775개로 크게 늘렸다. 외국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대단위의 섬유공장과 유리공장, 그리고 직물공장들을 건설했다. 그리고 외국으로 질 좋은 수산물을 수출하는 등 경이로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공무원들의 봉급은 뇌물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정도로 지급을 했다. 뇌물을 받는 공무원은 가차없이 처벌했다. 각종 범죄조직의 제거로 치안도 상당히 양호해진 편이라, 응오딘지엠 재임 기간 동안 적어도 사이공에서는 담이 낮아도 도둑 들 염려없이 살 수 있을 정도로 안전했다. 남베트남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되어 심각한 사회 문제였던 매춘 역시 금지되었다. [12]
1950년대 중반부터 응오딘지엠 정권은 농촌 관련해서 주요 프로젝트와 개혁을 진행했다. 농지개혁, 농지개발, 밀집촌 건설이었다.
2.6.1. 농지
이중 농지개혁에 관해 1955년 1월 법령 2호, 1955년 2월 법령 7호를 발표해 처음 손을 본 바가 있었다. 2호 법령은 소작인의 경작권 보호를 통한 안정화와 소작료를 15~25%로 제한한다는 것이었고 7호 법령은 유휴농지를 재경작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다지 효과를 보지도 못했고 제대로 실행되지도 못했다. 좀 더 근본적인 농지개혁은 1956년 10월 법령 57호가 발령되면서부터였다.
통계에 따르면, 농촌 인구의 0.025%에 불과한 2500명의 지주가 40%의 쌀 생산농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때문에 메콩강 삼각지대 일대의 토지 소유 불평등을 해결하고 지주의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려 했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끝난 일본, 중화민국, 대한민국의 토지개혁과 달리 법령 57호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100헥타르나 되는 농지의 1인 보유를 허락했고 응오딘지엠의 권력이 약한 상태라서 강하게 밀어붙힐 수도 없었다. 게다가 지주 출신인 지방 관리들도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2255명의 지주로부터 65만 헥타르를 유상몰수하여 소작농에게 분배했으나 앞서 언급한 관료들의 능력과 의지 부족으로 원래 계획의 반에 불과한 10%의 소작농가만 혜택을 입었다.
그리고 오히려 1945년 8월 혁명을 통한 베트민의 개혁으로 혜택을 입은 농민이나 전쟁을 피해 도시로 피난간 부재지주의 토지를 공짜로 경작하던 농민들에게는 오히려 피해가 가는 개혁이었다. 1960년도에는 여전히 2.5%의 대지주가 45%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11%의 중소지주가 42.5%를 소유했고 일반 자작농의 보유 면적은 12.5%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나마 혜택을 입은 자들도 군 장교, 월남민, 가톨릭 교도, 중부인들이 대부분이라 토지개혁은 오히려 남부 농민의 불만을 샀다. 여기에 토지개혁으로 오히려 응오딘지엠 일가의 배만 불렸단 소문이 퍼지면서 반정부 불만은 확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은 농지개발 프로젝트였다. 응오딘지엠은 농지가 아니라 사람을 재분배하는 정책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무주지에 농촌 거주자들을 대거 이주시켜 농지 없는 농민에게 농지를 준다는 것이었다. 당시 남베트남은 인구과잉에 90만의 월남민까지 몰려와서 지나친 농지부족에 시달렸는데 농지를 확장하여 인구압력을 해결하면 경제, 안보, 이념 목표가 모두 달성되고 궁극적으로 베트남 농촌의 중농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계획에만 따르면 농지의 확장을 통한 농업생산력 증가와 상품작물 재배로 경제적 자립도 이룩할 수 있었다. 거기에 라오스-캄보디아 지역의 공산주의 침투 저지와 과거 반정부 군벌들로 소란스러운 지역의 안정도 꾀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이러한 장밋빛 전망을 바탕으로 응오딘지엠은 1959년 중반까지 84개 정착지에 12만 5천명을 정착시켰다.
7만명이 중부인, 1만 7천명이 월남민이었다. 1962년 말 발표로는 173개 정착지에 23만명이 산다고 했다. 하지만 이 농지개발 정책은 지나치게 강압적인 수단이 동원되었고 농민의 희생을 지나치게 요구하여 월남민조차도 꺼렸다. 게다가 땅의 비옥도, 농업용수 접근 가능성, 교통 등의 여건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미국의 조언은 조속한 성과에 집착한 응오딘지엠에 의해 무시되었다. 이 때문에 월남한 사람들이 차라리 북으로 돌아가는게 낫다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희생은 컸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은 미국 고문들로부터 베트남 주권 손상을 우려하여 미국에게 정보 제공을 거부하고 미국의 자금이 관료적 절차에 막히는 것에 대해 불만스러워했다. 그래도 이 농지개발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둔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2.6.2. 밀집촌
마지막은 밀집촌 프로젝트인데, 이는 1959년 7월 7일 대통령 공포로 시행된 정책으로 농촌 경제발전, 사회발전, 내부안보 강화가 목적이었다. 응오딘지엠은 1963년 말까지 각 구역에 400가족이 들어가는 80개의 밀집촌과 그보다 작은 120가족 규모의 위성밀집촌 400개를 건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역시 행정력 부족, 주민들의 저항, 안보 집착으로 효과가 좋지 못했다.
안보와 관련해서 실패한 정책 중 하나가 전략촌 정책이었다. 이 전략촌은 남베트남 정부의 경제, 정치개혁의 거점을 마련하고 국내 안보를 증진시키며 농촌 주민들로부터 베트콩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실시된 농촌 평정+근대화 정책이었는데 이미 비슷한 정책이 프랑스나 이전 정권에서 시도된 바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이 계획의 입안자인 응오딘뉴는 매우 야심차게 1962년 8월경까지 5천개나 되는 전략촌을 건설했다.[13] 이러한 전략촌 건설은 원조를 무기로 정치개혁을 강요하는 미국에 대한 일종의 돌파구이기도 했는데 미국은 전략촌 정책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군사고문들은 남베트남 정규군이 전략촌 방어에 묶여 민사활동에만 종사하게 된다고 난색을 표했지만 정치 고문들은 정부의 공공 서비스 제공과 지역 자치정부 수립, 경제 강화등 긍정적 영향을 강조했다. 결국 미국은 응오딘지엠 정권 개혁과 베트남 농촌 평정을 동시에 이루기 위해 '제한적 협력'을 하기로 했는데 전략촌 정책 지원도 그 중 하나였다.
2.6.3. 프로젝트의 중단
응오딘지엠 형제는 이 전략촌 정책이 미국과 다른 남베트남 실력자들을 제쳐두고 자신들의 독보적인 권위를 확보해줄 정책이라 믿어 1963년까지 7천개의 마을을 전략촌화하기로 하고 이를 강압적으로 밀어붙히며 미국의 정치개혁 요구를 모두 거부했다. 하지만 중앙의 권위 부족과 행정력의 부재, 응오딘지엠에게 아첨하기 위한 남베트남 관리들의 거짓보고로 인해 많은 무리수가 발생했다. 게다가 전략톤 건설에 따르는 각종 부담[14] 이 주민들에게 전가되면서 오히려 민심을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 거기에 공산주의자들은 전략촌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자신들에게 직격타가 될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전략촌을 수용소라고 중상했으며 나중에는 전략촌을 군사적으로 공격했다. 결국 무리한 전략촌 건설로 원래 목표인 방어에 실패했으며[15] 농민들의 민심 이반을 초래하여 정권에 타격을 주었다. 전략촌 프로젝트는 응오딘지엠 형제 암살 이후 중단되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 하에 50만에 달하는 정규군, 민병대, 경찰력을 양성했으나 이들에 대해 지나치게 갠섭했고, 이들의 전투력은 영 좋지 않아서 사이공 근처까지 출몰한 베트콩을 상대로도 변변찮은 성과를 거뒀다. 예를 들어 1963년-65년 사이 일련의 전투 중 빈 지아(Binh Gia) 전투와 동 쏘아이(Dong Xoai) 전투에서 베트콩은 베트남 전쟁에서 흔히 현상되는 게릴라전이 아니라 정직하게 회전에 들어가서 전술적인 교환비에서조차 남베트남 정규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겼다. 그리고 빈 지아와 동 쏘아이는 '''사이공에서 3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들이었다[16] .
2.7. 쿠데타와 피살
응오딘지엠 정권은 내부 개혁 실패로 인한 민심 이반, 공산당의 공격으로 인한 안보 불안, 미국과의 관계 악화가 겹치면서 크게 흔들렸다. 여기엔 여러가지 대내외적 요인이 겹쳤다. 우선 이웃국가인 라오스를 두고 미국과 프랑스가 중립화 정책을 지지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에 응오딘지엠이 남베트남 공산화의 첫걸음이라고 라오스 중립화를 비난하면서 가뜩이나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미국에게 크게 반감을 샀다.
반대로 미국 정부는 남베트남과 상의도 없이 미국 고문들의 숫자를 늘이는 등 응오딘지엠과 미국의 갈등은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을 믿지 못하고 북베트남과 접촉하여 자체적 중립화를 논하는 등 미국에 대놓고 거스르는 행동을 보였다. 거기에 미국 언론들은 베트콩의 활약과 남베트남군의 무능을 강조하며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퍼뜨렸고 응오딘지엠 정권의 존속이 미국의 노력을 무소용한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게다가 응오딘지엠 정권의 대부 소리까지 들었던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맨스필드가 1962년 사이공 방문 이후 비판자로 돌아서는 등, 미국 내부의 친 응오딘지엠 인물들이 반 응오딘지엠으로 돌아서기 시작하면서 미국에서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다. 맨스필드는 아예 1963년 2월 맨스필드 보고서를 내놓아 응오딘지엠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었다.
거기에 베트남 내부 안보도 연일 악화되었다. 출처가 선정적이긴 하지만, 8월엔 게릴라들이 남부 델타 전 지역을 모두 장악하여 대낮에도 돌아다닐 수 없을 지경이고 9월엔 게릴라의 공격이 8월에 비해 3배로 증가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미 국방부는 전투병 파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등 2만 2천에서 4만의 병력을 파병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장비의 제공은 동의했으나 전투병 파병은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멕스웰 테일러, 월트 로스토우, 에드워드 렌스데일 대표단은 미국 전투병 파병이 답이라는 대안을 내놓았다. 거기에 1963년 5월, 응오딘지엠의 친형 응오딘툭이 대주교로 재직하던 후에 지역에서 불교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자 불교도들의 항의 시위가 빗발쳤다. 6월 11일에는 이에 항거하여 그 유명한 승려 틱꽝득(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의 소신공양이 나왔다. 이때 엄청난 병크가 터져버렸다.
위 사진의 인물은 '마담 뉴(Madame Nhu)'로 더 잘 알려진 쩐레쑤언(Trần Lệ Xuân / 陳麗春, 1924년 4월 15일 ~ 2011년 4월 24일)으로 응오딘지엠의 제수(동생 응오딘뉴의 아내)였다.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독신주의자라 영부인이 없었고 때문에, 제수인 쩐레쑤언이 퍼스트레이디 역을 했는데, 쩐레쑤언이 아주 극도로 오만하고 오만 비리와 폭정에 관여하는 통에 베트콩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17] 이 인간의 행보는 서방권에서도 비난받아 쩐레수언은 마담 뉴라는 비아냥적인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드래곤 레이디'''[18] 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쩐레쑤언이 틱꽝득의 소신공양을 두고 '바베큐' 운운하며 상식을 넘은 발언을 늘어놓았다.
그것도 보다시피 미국 방송 인터뷰에서 당당하게 말해,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그 자리에 있었던 미국인들도 어이없어했다. 나중에 그는 지엠이 처형된 뒤 이렇게 말했다.What have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whom they have intoxicated, whom they have abused the confidence[19]
. Even that barbecuing was done not even with self-sufficient means because they used imported gasoline."그에 비하면 불교계 지도자 놈들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기껏해야 한 거라곤, 중놈 하나 바베큐로 만든 것 뿐인데 말입니다.''' 마취를 시켜놓고 믿음을 이용해먹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서구화에 항의한다면서) 수입 가솔린을 썼으니 자주적인 방법으로 바베큐를 한 것도 아니었잖습니까."
미국 보수파들도 스스로 베트남 반공세력을 좀먹게 한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더불어 미국 정부는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베트남에 사절을 보내 문제의 절로 가서 위로할 정도였다."'''저 빌어먹을 악녀같으니'''. 그 사람 좋은 양반이 죽은 건 다 그 자 탓이야. 죽게 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 자가 괜히 끼어들어서 일을 그렇게 키운 거야."[20]
여기에 응오딘지엠은 정신 못차리고 불교도들의 저항을 강경하게 찍어눌렀고, 8월 초 응오딘뉴가 사이공의 싸 러이 사원에 군경을 보내 짓밟아 민심 이반을 초래했다. 전 국민의 90%가 넘는 불교도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응오딘지엠은 이게 다 빨갱이들의 준동일 뿐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런 막장대응에 식겁한 백악관은 결국 응오딘지엠 정권을 종교를 탄압하는 악질 부패 독재 정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미국은 1961년의 쿠데타를 묵인했으며, 1963년 10월에는 백악관 주도로 응오딘지엠 교체가 논의되었고, 케네디 대통령은 응오딘지엠 제거에 동의했다. 이러한 미국의 모습에 남베트남의 군사 지도자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결국 1963년 11월, 베트남 공화국 육군의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 楊文明, 1916년 2월 16일 ~ 2001년 8월 5일)[21] 소장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너졌다. 한편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사이공의 한 성당으로 달아난 뒤 미국 대사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미국의 입장을 요청했지만 주 베트남 미국 대사 롯지[22] 는 아무런 입장이 없다면서 사실상 도움을 거절했고, 자신은 누가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모른다면서 신변상의 이유로 하야를 권하였으며, 쿠데타 세력이 만약 당신이 항복한다면 안전한 출국을 보장한다더라고(쿠데타 세력이 누군지도 모른다면서 쿠데타 세력의 입장은 어떻게 알았겠는가) 사실상 쿠데타 세력에 편중된 모습을 보였다. 실망한 응오딘지엠은 질서 회복에 노력할 것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대세가 완전히 기울어져서 아우 응오딘뉴(Ngô Đình Nhu / 吳廷瑈, 1910년 10월 7일 ~ 1963년 11월 1일)와 함께 11월 2일 오전 6시에 쿠데타군에게 항복했으나 군부는 그들을 처형했다. 쿠데타군이 두 형제의 안전한 출국을 보장하겠다며 호송용 육군 장갑차를 보냈고, 거기에 탑승하자마자 양 손을 결박한 뒤 장갑차 안에서 총살해 버렸다. 물론 군부는 그들이 탈출 중에 사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후일 공개된 처형 직후의 사진에는 양 손이 묶여 있고, 머리에 총알구멍이 난, 전형적인 총살당한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한편 당시 방미 중이던 쩐레수언은 프랑스, 미국, 영국 같은 나라를 떠돌다가 20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라하게 87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조국에서 죽고 싶다고 베트남 정부에 애원했지만 "당신은 죽어서도 시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며 거부당했기에 이탈리아 공동 묘지에 묻혔다.
응오딘지엠이 죽으면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맞설 수 있는 국민국가로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지엠 타도는 극히 인기 없는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는 또한 남베트남의 능력 있는 거의 유일한 민족주의 지도자를 죽인 셈이었다. 그는 꼭두각시가 되지 않고 미국에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지엠의 타도 후에 생긴 정치 혼란으로 인해 미국의 정치적 노력은 소용없게 되었으며 군사적인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엠이 있는 한 미국은 비공산주의 정권을 돕고 있다는 이념을 견지할 수 있었다. 즉 지엠의 타도 이후 이미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직접 개입의 필연성은 증가한 반면 개입의 명분성은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분단 전기(1954~1963년) 베트남 통일문제, 노영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7페이지.'''
3. 평가
응오딘지엠을 보는 평가는 여러 가지로 갈린다.
3.1. 미국 괴뢰론
가장 오래된 레퍼토리로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주장했다.
북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을 My-Diem이라 부르며 미국의 꼭두각시라 비판했고 이 떡밥을 물어버린 서방 기자들도 남베트남은 독립국가라고 할 수 없다거나, 응오딘지엠이 미국 훈령을 거부한 적은 있느냐며 마구 비난하여 미국 내부의 남베트남 여론 악화에 기여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마냥 미국의 꼭두각시처럼 굴지 않고 오히려 미국의 요구를 거부한 적이 더 많다. 결국 미국-남베트남 관계는 응오딘지엠 집권 이후에는 여러 요인으로 악화로 치달았고, 응오딘지엠의 집권 자체도 미국의 압력보다는 베트남 내부 상황과 응오딘뉴의 지원에 힘입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여 로버트 시글리아노 교수는 응오딘지엠을 "미국의 꼭두각시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줄을 당기고, 미국의 줄도 당기는 꼭두각시였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문제는 응오딘지엠은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해 미국과 불필요한 충돌을 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응오딘지엠 정권을 좋게 평가해도 근본적으로 미국의 지원 없이는 정권유지가 힘들었다. 이미 남베트남 내부에서도 반대파의 목소리가 커져갔고 군부는 기회만 있으면 쿠데타를 할 생각이었다. 결국 미국의 묵인하에 응오딘지엠 정권은 붕괴되었다.
3.2. 낡은 전통주의자
응오딘지엠이 가톨릭과 유교에 집착하여 자본가와 지주의 이익만 옹호하다가 결국 현대성에 휩쓸려간 것이라는 것인데, 여기서는 응오딘지엠이 미국의 꼭두각시는 아니라고 보지만 케케묵은 낡은 인물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전통주의자 해석에 있어서도 응오딘지엠의 정권이 미국의 배신으로 붕괴되지 않고 존속되었으면 응오딘지엠의 '자애로운 권위주의'가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란 긍정적인 견해도 있다. 응오딘지엠이 제수가 사고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만일 응오딘지엠이 제수가 인터뷰 하는 것을 막았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고. 정권에 위협되는 반정부세력이라고 어쩔 수 없이 말했다면 미국의 심리가 달라졌을 것이다.
3.3. 전면적 재평가
집권 과정에서 응오딘지엠 일가의 노력을 강조하며, 베트남 근대화 시도와 국가건설 전망을 조명하고 응오딘지엠이 베트남식 발전전망을 가진 민족주의 지도자였다고 재평가한다. 이 관점에서 응오딘지엠의 최고 실수는 초반의 성공에 도취되어 자신이 이미 승리했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맥나마라도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다섯가지 가정 중 하나로, 응오딘지엠 정권의 존속을 두번째 가능성으로 지목한 바가 있다. 독재와 부정부패와는 별개로 자체적인 정치적 수완도 상당했고, 미국 내에 미시건 대학 고문 그룹을 중심으로 커넥션도 있어 나름 독자적인 정책을 펼치며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닌 자신만의 정치를 할 역량이 있었던 남베트남 정치인은 응오딘지엠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제거된 이후 남베트남 정국은 오히려 더 악화된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에 더욱 더 고무된 베트콩은 1964년, 65년 쯤에 들어서는 아예 사이공 바로 앞의 동호이 전투에서 남베트남군 레인저[23] 대대 3개와 정규군 보병 연대 3개를 박살내며 월남 적화 통일을 1960년대 중반에 거의 이룩할 뻔 한다. 이대로 두면 월맹이 직접적으로 나설 것도 없이 베트콩만으로도 남베트남이 몰락할 것 같은 기세여서 이 시점 이후로 미국은 직접적이고 대대적인 전면전에 개입하게 된다.
3.4. Nu-Anh Tran 교수의 평가: 스스로 만든 나라를 망하게 한 독재자
UC 버클리 대학의 베트남계 미국인 교수 Nu-Anh Tran 교수는 2013년에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는데, 이 해석은 기존에 20세기 초중반 베트남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베트남 공화국 멸망 이후 서방권의 일반인들이나 정치가들에게는 주목받지 못한 '종교파'(sect)들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단, Nu-Anh Tran 교수의 평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의 '친프랑스 세력의 제거와 바오다이의 축출' 문단에서 잠시 소개된 종교파 세력에 대해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20세기 초반에 형성돼서 56년까지, 그들의 종교인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를 기반으로 민중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1945년까지 프랑스를 상대로 항불 무력 투쟁을 전개했고, 사실상 떠이닌성과 메콩강 삼각주 같은 남베트남 남서부 지역의 지배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베트민의 일방적인 배신 때문에 반공 성향이 아주 강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베트민의 배신 때문에 1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잠시동안 프랑스와 협력하기도 하는 흑역사도 있으나, 애당초 먼저 배신때린 세력이 누군지 뻔했기 때문에 이들의 명분이 희석되는 일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응오딘지엠에게 크게 토벌당하던 그 순간까지도 자기 지역에서 주민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았다.
종교파 자체가 하나의 세력이 아닌 두 개의 주요 종교를 포함한 여러 이념과 목소리가 뭉친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들만으로 이루어진 정부 체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1947년에 이들이 만든 Việt Nam Quốc Gia Liên Hiệp(베트남 국민 회의)가 실패한 것에서 그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이 실패한 남베트남만의 단일 정부를 구성하는 일과, 베트남국의 친불 기득권 세력의 우두머리들을 숙청한 성과는 분명 응오딘지엠이었기에 해낼 수 있던 업적이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베트남국의 정치체계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서 세력을 확보하자마자 스스로 만들어가던 나라를 말아먹기 시작한다. 종교파 세력이 만든 두 연립조직 중 반정부 세력인 연합전선 쪽은 분명히 문제가 많기는 했다. 연합전선의 통보에 참여를 했던 찐민테조차 결국 북베트남의 위협 앞에서 대놓고 반정부 조직을 키우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고 친 응오딘지엠 세력인 혁명위에 참가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응오딘지엠이 스스로 모든 권력을 움켜쥐려고 혁명위 쪽 종교파 세력들까지 숙청해버리면서 모든 것이 엇나가버리기 시작한다. 혁명위가 응오딘지엠의 해산 요구에 응해 해산한 뒤로도 지엠은 이들을 자기 세력으로 흡수할 생각은 안하고 탄압하기 바빴다. 종교파 군벌 병사 대부분은 약속과 달리 베트남 공화국군에 편입되지 못했으며, 소수의 편입된 병사들도 계급을 강등당하고 낮은 위치의 비전투병과에만 배치되는 등 온갖 차별을 겪어야만 했다. 극히 일부는 궁지에 몰려 베트콩에 들어가길 강요당하기까지 했다.
종교파들에 대한 숙청이 지나치게 가혹했던 것도 문제였다. 정치와 아무 상관도 없던 호아하오교의 최고 지도자가 의문스러운 납치를 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호아하오교의 명망 있던 영웅 레꽝빈이 항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단두대로 잔혹하게 처형당한 것은 호아하오교 교도들 전체의 민심이 크게 악화되는 데 기여했다. 까오다이교 역시 수많은 성직자가 체포당하고 본부가 베트남군에게 침입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이렇게 가정해보자. 만약 혁명위가 해산된 뒤에, 이들을 체포하는 대신에 자신의 세력을 응오딘지엠에게 편입시키고 은퇴하는 대신 편안한 생활을 보장해주는 식으로 온건한 숙청을 했다면 어땠을까? 찐민테의 까오다이교 군대를 정규군에 편입시킨다는 약속을 지키고, 이들을 떠이닌성으로 재배치시켜서 훗날 지엠 자신이 창설할 민병대의 훈련 및 지원용 부대로 써먹었다면 어땠을까? 레꽝빈의 항복을 받아주고, 충성맹세를 시키고, 그의 가족을 자기 병력으로 경호해줘서, 호아하오교의 영웅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메콩강 삼각주 지역의 지지를 얻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이후 20년간의 실제 역사처럼, 베트콩이 지역민들의 민심을 전혀 얻지 못하면서도 꾸역꾸역 이들 지역에 침투해서 자리를 잡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결국, 베트남 공화국이라는 나라의 근본을 무너트린 것은 그 나라를 세웠던 응오딘지엠의 권력욕과 독선, 잔혹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출처1 출처2
3.5. 결론
결국 남베트남을 군사적으로 지키는 것은 미군이 한다 해도 실제로 남베트남 정부를 구성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를 하며 현지 인민들을 남베트남이란 국가 안으로 끌어올 만한 남베트남의 정치인은 응오딘지엠이 실질적으로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응오딘지엠이 축출당한 후 남베트남은 수많은 쿠데타의 수렁을 겪다가 미국이 직접 개입한 이후 아예 주권 국가로서의 존재감과 독자적 역량이 사라져버리고, 진짜 정직한 미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렸다. 파리 평화 회담 같은 자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전시 회담에서도 아예 철저히 배제되면서 괴뢰국 수준으로 떨어진 남베트남은 결국 응오딘지엠 이후 상실한 독자적 정치적 역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식물인간처럼 미군의 보호에 연명하다 결국 1975년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최후의 공세에 의해 그 기구한 역사를 끝마치게 되었다.
하지만 혼동해서는 안되는 것이, 응오딘지엠에 대한 긍정 평가는 어디까지나 응오딘지엠 이후의 남베트남 지도자들이 더 무능하고 형편없었기 때문에[24] 차라리 응오딘지엠이 존속하는게 더 가능성이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의미일 뿐이다. 위의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대안들이라고 나온 인간들이 더 무능한 인간들밖에 남지 않도록 한 사람이 바로 응오딘지엠 자신이다. 수많은 베트남 농민들의 마지막 희망이자 성공했다면 베트콩의 계급투쟁 전략을 가장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던 토지개혁을 소극적인 태도로 말아먹고, 전략촌 같은 허황한 곳에 물자/시간/노력을 헛되어 날려버렸으며[25] , 편협하고 차별적인 종교 정책으로 국민 대다수인 불교도, 특히 그 중에서도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했던 호아하오교 분파를 배척하고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26] , 생각없는 충동적인 행동으로 국민의 공분을 샀던 쩐레쑤언의 행동을 통제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억압적이고 불통 그 자체인 국정운영은 민심의 이반을 유발했고, 특히 젊은 지식인들과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가장 격렬히 반발했다. 이 모든 실책 중에서 결과적으로 보면 디엠 본인과 남베트남에게 가장 해가 되었던 것은 미국과의 관계 악화다. 전쟁으로 강제 분단된 상태라 경제적 자립도 어려운 상황에서 중공과 북베트남이라는 거대한 위협에 노출된 국가로서 살아남으려면 후원자인 미국과 서방세계와 우호적인 관계가 필수적인데,이유야 어쨌든 디엠은 각종 독재와 실책으로 서방세계를 실망시켰다. 해외 망명객 시절 구축한 인맥 역시 디엠의 비타협성과 고집 때문에 정권 말기가 되면 붕괴되다시피했고, 서방과의 계속된 갈등은 끝내 가장 큰 후원자 미국이 인내심을 잃고 응오딘지엠 제거를 승인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결론은, 지엠의 몰락과 남베트남의 멸망에 가장 큰 책임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응오딘지엠 본인이라는 것이다.
4. 참고 문헌
- 지엠 정권과 미국의 동맹, 정일준, 고려대학교.
- 베트남 공화국 응오 딘 지엠 정권 지배이데올로기의 특성과 한계, 윤충로, 동국대학교.
- 분단 전기(1954~1963년) 베트남 통일문제, 노영순, 고려대학교.
- 케네디의 베트남 정책 - 냉전 승리를 위한 색다른 방식, 장준갑, 전북대학교.
- 나라를 빼앗긴 군대의 비망록-월남군,그들의 이야기, 김만식, 중앙미디어 출판.
5. 여담
영상 초반의 곡은 베트남 공화국의 국가인 공민에게 고함이다.
- 1953년 9월에는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중장(현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27]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인식은 좋은 편이었고, 반공 정부 지도자로서 언론에서 높이 평가했지만 죽은 뒤에 응오딘지엠의 치세가 비난을 받고 국내 교과서에서도 그냥 이름만 언급되며 상세하게 거론되지 않았었다.
- 전술되었듯이 1960년대 초반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의 영향력을 교두보 삼아 북베트남에 접촉해 협상과 자체적인 중립화 논의를 시도한 적 있다. 성공했다면 베트콩과의 내전을 마무리하고 불안하게나마 평화가 지속될 수도 있었겠지만, 쿠데타군에 의해 피살되면서 접촉은 중단되었다. [28]
- 인도를 방문하는 등 제3세계와의 관계도 꽤 중시한 편이었고,미국과의 관계 역시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자주적이어야지 장제스 치하의 대만이나 이승만 치하의 남한처럼 지나치게 의존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인식했다고 추정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제3세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잇따라 독립하는 당대의 사정을 볼때는 괜찮은 길이었지만 본인이 알아서 말아먹는 바람에 그 노력이 쓸모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