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공화국군

 


'''베트남 공화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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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육군
베트남 공화국 해군
베트남 공화국 공군
'''베트남 공화국군
Quân lực Việt Nam Cộng hò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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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립
1955년 12월 30일
해체
1975년 4월 30일
본부
사이공
명령체계
합동참모본부
정규(正規)병력
586,838명
부서(部署)병력
1,000,000명
병영형태
징병제
참전
'''베트남 전쟁'''
라오스 내전
캄보디아 내전
파라셀 제도 해전
편제
베트남 공화국 육군
베트남 공화국 해군
베트남 공화국 공군
1. 개요
2. 베트남 공화국 국방부
3. 타국에 대한 군사 개입 작전
4. 문제점
4.1. 심각한 부정부패
4.2. 자구책의 부재
4.3. 병사들의 사기 저하
4.4. 아군에게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
4.5. 전술, 전략적 실책
5. 최후
6. 편제
6.1. 베트남 공화국 육군
6.1.1. 남베트남 육군의 정예 부대들
6.1.2. 베트남 공화국 민병대
6.1.2.1. 베트남 공화국 지방군
6.1.2.2. 베트남 공화국 시민군
6.1.3. 베트남 공화국군 육군 보병장비
6.3. 베트남 공화국 공군
7. 수뇌부
8. 계급
8.1. 1964년 이후


1. 개요



1973년, 남베트남군 열병식 12분 55초 경부터 군제대 분열이 시작된다. '''남베트남군의 마지막 열병식이다.'''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군대이다. 월남군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북베트남베트콩괴뢰군이나 사이공군으로 불렀다. 베트남어 약칭은 QLVNCH (Quân lực Việt Nam Cộng hòa)이고 영어 약칭은 RVNMF(Republic of Vietnam Military Forces)이다. 여담으로, 밀덕들은 보통 ARVN(Army of the Republic of Vietnam)이라고 부른다. ARVN은 사실 베트남 공화국 육군에 한정한 약칭이지만. 굴리는 장비의 질이나 양만 보면 동시대 동아시아 전체에서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강군이었지만 실체는 60년대 초반의 주적인 월맹 정규군도 아니고 베트콩 상대로 게릴라전도 아닌 회전에서도 여러차레 털리는 등 졸전을 거듭하였다. 개개인 지휘관이나 부대 단위로 보면 미군에게도 칭송 받은 명장, 정예 부대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고질적인 수뇌부 자체의 부정부패, 미약한 동기부여, 미군에게 공여받은 고가치 장비를 제대로 굴리지도 못하는 미약한 국가 인프라 같은 핵심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미군 철수 이후 베트콩과 월맹군에게 패망했다. 현대사에선 하드웨어가 아무리 좋아도 동기부여와 정치적인 의지 없인 오합지졸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교과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전신은 베트남국의 군대 베트남 국군이었다. 베트남 국군의 작전통제권은 프랑스가 갖고 있어서 사실상 프랑스군 내의 베트남인 부대로 봐도 무방했으나, 1954년 베트남국에 작전통제권을 주면서 본격적으로 창설이 된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거하여 남에는 베트남국[2]이, 북에는 호치민을 주축으로 하는 공산 정부가 수립이 되면서,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던 베트남인들을 주축으로 152개 보병대대, 2개 공수대대, 2개 황실친위대, 2개 산악보병대대, 2개 기갑대대, 6개 방공포대대 그리고 5개 기술지원대대 등, 총 173개 대대로 편제되어 창설되었다. 1955년 베트남국이 베트남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자연히 군대 이름도 베트남 공화국군이 되었다.
1955년 베트남 공화국 육군은 8,100명을 정원으로 하는 4개 보병사단과 5,800명을 정원으로 하는 6개 경보병사단으로 재편성된다.
1959년 베트남 공화국 육군은 각종 군사 교육을 당담할 교육 기관을 설립한다. 달랏트에는 사관학교를, 나트랑에는 부사관학교와 특수부대를 육성할 특수전학교 등을 세웠고, 사이공에는 지휘참모군의대학과 군사정보언어학교, 그리고 각 병과별 병과학교[3]들을 세웠다. 투톡에는 병기학교를, 쾅 트롱에는 수송병과학교를, 그리고 붕타우에는 기술학교를 세웠고, 다낭에는 헌병학교 등을 설립하여 베트남 공화국군 장병들의 교육을 당담시켰다.
베트남 공화국 육군은 베트남전역을 4개 전술책임구역으로 나누어 4개[4] 군단으로 하여금 관할 구역 내 작전 임무를 책임지게 하는 전술 형태를 채택했다.
베트남 공화국 육군은 7개 사단으로 시작해 4개 전술책임구역을 관장하는 4개 군단 예하 11개 사단으로 증편된 뒤 북쪽 고원지대에서 남쪽 해안지대에 이르는 남베트남 전역에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5]
사이공이 함락되고 베트남 공화국이 패망하자 해체된다. 부패한 베트남 공화국답게 장교들도 부패해 우수하고 성능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결국 월맹군에 패배했다.[6]

2. 베트남 공화국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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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깃발.
베트남 공화국 국방부는 베트남 공화국 정부 기관이였다. 본부는 사이공에 존재했다. 이들은 베트남 공화국의 군사 업무를 관할했다. 베트남 공화국 정부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쓰고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던 정부 기관이었다. 국방장관응오딘지엠 실각 이후 거의 모두 현직 군인이 맡았다. 문민통제가 잘 안 된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만 20세부터 45세까지의 성인 남성을 징병대상자로 지정하여 복무시켰다.18세, 19세 청년들은 징집대상에서 제외되던 시절도 있었으나[7] 주월미군 병사들이 대부분 18세에서 19세였는지라 주월미군과 베트남 공화국군 사이의 미묘한 입장 차이도 있었고,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병력 자원이 부족해지면서 징집 연령은 18세로 낮춰진다. 국민들의 강한 반발을 감수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역대 국방부 장관
응오딘지엠
1955년 10월 ~ 1963년 11월
쩐티엔키엠
1963년 11월
쩐반돈
1963년 11월 ~ 1964년 2월
쩐티엔키엠
1964년 2월 ~ 1964년 9월
응우옌카인
1964년 9월 ~ 1964년 11월
쩐반흐엉
1964년 11월 ~ 1965년 1월
쩐반민
1965년 1월
응우옌반티에우
1965년 1월 ~ 1965년 6월
응우옌후코
1965년 6월 ~ 1967년 11월
까오반비엔
1967년 11월
응우옌반비
1967년 11월 ~ 1972년 8월
쩐티엔키엠
1972년 8월 ~ 1975년 4월
쩐반돈
1975년 4월

3. 타국에 대한 군사 개입 작전


남베트남군은 단순히 자국 본토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호치민 루트가 위치한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해서도 군사작전을 실시한 바 있다.
  • 캄보디아 캠페인(1970년 4월 29일~ 7월 22일):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미군의 철수를 위한 본격적인 “베트남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남베트남군이 자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캄보디아에는 북베트남군과 배트콩 4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위협하고 있었다. 남베트남군은 미군의 지원 아래에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북베트남군 세력을 공격했다. 북베트남군 지휘 세력을 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동부 캄보디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데 성공하는 큰 성과를 얻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많은 병력들과 물자를 손실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목적을 달성한 남베트남군은 다시 철수한다.
  • 람 손 719 작전(1971년 2월 8일~3월 25일): 이번에도 “베트남화” 정책 추진의 연장선상으로 미국은 라오스의 호치민 루트를 남베트남군 주도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8] 남베트남군은 무려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라오스의 국경을 넘었고 미국은 포병과 공습으로 남베트남군을 지원했다. 그렇지만 미국 정보 당국의 예상과 달리 라오스에 주둔한 북베트남군은 훨씬 많았고 이들은 남베트남군에 대해 격렬한 반격을 가했다. 북베트남군은 야포로 남베트남군을 타격했고 대공포들을 집중적으로 배치해 헬리곱터를 이용한 보급을 막고 있었다.[9][10] 남베트남군은 라오스의 세뽄을 점령하고 북베트남군의 물자기지 일부를 파괴하는데 성공했지만 퇴각하는 과정에서 북베트남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고 결국 남베트남군은 1만 명이 넘는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남베트남군은 미군들이 수행하던 전투방식을 그대로 모방했으나, 결국 북베트남군에 허를 찔려 실패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작전 이후에도 해당 지역의 호치민 루트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고 실효성도 없는 작전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비록 북베트남군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상당수가 미군의 항공폭격과 포병포격 덕분이었다. 특히 다름이 아니라 남베트남군 최정예 부대인 해병 사단과 공수 사단, 레인저 부대들의 피해가 매우 컸기에 남베트남군의 총체적 문제가 다시금 드러난 전투였다. 남베트남의 수 많은 전사자 유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이 울분을 토했으며 리처드 닉슨은 기자회견에서 급하게 “라오스에서의 군사작전”은 성공적이었다고 마무리해야했다.
당시 미군은 다수의 항공기 소티로 4개월 동안 자그마치 52,000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했다. 그럼에도 작전이 실패해 남베트남군의 무능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베트남화 정책은 사실상 실패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4. 문제점


헨리 키신저: 작전을 주시했는데 남베트남군은 우리 생각만큼 뛰어나지 않습니다.

리처드 닉슨: 그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 헨리, 나는 그 '''망할 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네. 그들은 진짜 충돌을 할 준비가 안된 거 같아.

헨리 키신저: 그게 걱정입니다.

리처드 닉슨: 준비가 안 됐어. 1972년 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네. 그래서 그들을 데리고 나왔으면 좋겠어, 현실을 직시하자고. 만일 내 재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면 이 사실을 기억하게. 난 이 일을 처리해야 해.

- 1971년, 라오스의 호치민 루트 차단을 위한 남베트남군의 '람 손 719' 작전에서 남베트남군이 패퇴하자 기록된 백악관 녹취록 -

(출처: 베트남 전쟁 10부작. 감독 켄 번즈) #


4.1. 심각한 부정부패


먼저 남베트남군은 내부가 굉장히 부패했으며 이는 태생적으로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었기 때문에 지니고 있는 문제였다. 남베트남의 지도자들도 군부 쿠데타에 의해 여러번 바뀌었으며 '''심지어 남베트남 붕괴 직전에도 군부는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을 정도였다.''' 남베트남군은 실력보다 매관매직으로 주요 보직을 결정했으며 군사교육훈련에는 소홀히 했을 정도였다. 부유층 자녀들은 뇌물로 거의 복무 기간 전체 동안 장기 휴가를 가는 것은 기본옵션이었고 '''10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부유층 기업이나 장성들의 저택의 경비원이나 심부름꾼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미군이 공여해준 물자와 무기를 베트콩에게 그대로 팔아넘기는 사례도 있었다.''' 당연히 남베트남군에게 그대로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고 미국으로부터 받는 신뢰도 떨어지게 된다.#[11]
풀 메탈 재킷(영화)에서도 남베트남군인이 매춘부를 데리고 미군을 상대로 흥정하는 묘사가 있다. # (하나 고증이 틀린게 있다면 영화에서 남베트남 군인은 레인저 마크를 달고있는데 남베트남 레인저는 막장인 남베트남군에서 미군에게 칭송받을 정도로 최정예이며 1975년 사이공 함락때까지 결사 저항한 부대였다)

4.2. 자구책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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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지원과 미국으로부터 받은 우수한 군사장비와 물자들을 조합한 막강한 화력으로 북베트남군을 밀어내는 데 익숙했다. 그렇지만 1973년, 파리 평화 협상 타결로 미군이 철군하기로 결정하면서 남베트남군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미국이 단순히 군대 철수만 한 것이 아니라 남베트남에게 지원하는 군사 원조도 크게 삭감해버린 것이다. 남베트남군의 탄약 및 유류 소모율은 미군의 지원이 있었던 시절에도 심각하게 높았는데 미국이 지원을 크게 줄여버리자 남베트남군의 군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강한 화력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붓는 "부자들의 전투방식"에 익숙해진 남베트남군은 기존 전투방식을 바꿀 수가 없었고 결국 1974년에 남베트남군은 송두리째 붕괴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중부 고원 남베트남군 포병 포대들은 미군 주둔 시에는 하루 평균 100발의 포탄을 소모했지만 1974년에는 하루 평균 '''4발로 줄어들었다.''' 보병들도 '''한 달에''' 불과 85발의 소총탄을 지급받는 상황에 처했으며 수류탄과 기타 탄약 그리고 무전기의 배터리도 고갈되어 제대로된 작전이 불가능해졌다. 남베트남군 트럭의 50%는 연료 부족으로 보관 상태에 있었으며 다른 차량과 장비도 절반밖에 운용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가동 가능한 차량들도 연료를 최대한 아껴야 하기에 필요한 상황에서만 장비를 가동해야 하므로 당연히 작전 범위도 제한되었다. 남베트남 해군도 메콩강에 주둔한 부대 절반을 해체했으며 남베트남 공군은 헬리콥터와 수송기 가동률이 '''최대 70%까지 감소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들은 철수하면서 자기들이 운용하던 무수히 많은 항공기들을 남베트남에게 공여하는 형태로 처분하고 갔는데 이 덕분에 남베트남 공군은 수치상으로는 '''세계 4위의 공군'''이 되었지만 정작 남베트남 공군 입장에선 이들을 유지할 여력이 전혀 없었던 상황이었다. 1974년, 남베트남군의 소티는 '''30~60소티 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히 이러다보니까 신규 장비 도입들도 전부 취소되었다. 남베트남 민병대는 PRC-10 구형 무전기를 대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했어야 했으며 이미 구매 발주한 F-5 전투기 36대 사업도 취소되었다.[12] 남베트남군 전체적으로도 1975년 7월이면 '''휘발유는 7일 치, 경유는 4일 치만 남게 된다는''' 절망적인 예상 데이터도 있었다. 물론 그러기도전에 남베트남은 패망해버렸다.
당시 남베트남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해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1973년에 북베트남이 공작원들을 보내 사이공 인근 남베트남의 원유저장고를 폭파하는데 성공하면서 그 남은 비축유마저 송두리째 날라가버리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파라셀 군도에서 석유 발견으로 잠시 들뜨긴 했지만 1974년에 중국 해군이 남베트남 해군을 격파하고 파라셀 군도를 점령해버리면서 남베트남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간다. 남베트남은 미국 해군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 해군은 당연히 들어주지 않았다. 남베트남은 외교 채널을 모두 동원해서 미국에게 필사적으로 군사 원조를 요청했지만 미국 의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이렇다할 자구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남베트남은 그렇게 패망하게 되었다. 남베트남은 일말의 희망으로 북베트남군의 전면 재남침 시 미군이 다시 지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헛된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13] 당시 제럴드 R. 포드 대통령은 닉슨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과제들을 해결하는데 급급했고 미국 의회는 베트남 재개입을 결사반대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렇게 남베트남을 직접적으로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사우디아라비아파이살#s-2 왕에게 대리 원조를 부탁했고 곧 파이살 왕은 남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원조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1975년 3월 25일에 그가 조카에게 암살당하고 말면서 이 마저도 수포로 돌아간다.[14] 사이공 함락 직전 대규모 미 해군 함대들이 남중국해에 집결했지만 이는 북베트남군을 폭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베트남에 체류중인 자국 국민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4.3. 병사들의 사기 저하


남베트남군은 매우 부패한 군사조직이었고 실력이 아니라 뇌물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구조였다. 사회적으로는 종교단체들이 연일 남베트남 정권 타도를 외쳤으며 국민들도 역시 정통성 없는 정권과 계속해서 벌어지는 부정부패에 나라에 실망하게 되었고 애국심은 당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군부와 사회와 정치계에 깊숙히 침투한 간첩들은 선전을 통해 남베트남 정권의 부당성을 알리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징집된 병사들은 당연히 사기가 저하되어서 무엇을 위해 싸우겠다는 동기부여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얻는 것이라곤 쥐꼬리만한 월급이 전부였고 남베트남군 병사들은 제대로 복무하겠다는 마음을 지닐 수가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많은 병사들이 뇌물이나 편법을 쓰고 탈영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탈영했던 병사가 재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투 상황에서도 패배에 몰리게 되면 많은 병사들은 탈영했으며 '''그 과정에서 탈영병들을 제지하는 선임 장교들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는 남베트남 붕괴 직전에도 있었던 일이며 많은 탈영병들이 민간인 복장으로 환복한 뒤 북베트남군의 시선을 피해 민가로 숨기도 했다.
물론 남베트남군 전체가 당나라 군대는 아니었고 이 와중에도 잘 싸우는 정예 부대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기울여진 전세를 뒤집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남베트남군이라는 집단 자체를 뜯어고쳐야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남베트남은 군대를 개혁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부정부패로 국가 상황이 어수선했다.

4.4. 아군에게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


베트남군이 이렇게 막장을 달리는 동안,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상대로 열악한 사정에 비해 큰 전과를 올리던 집단도 있었다. 바로 자기 가족들, 이웃들, 고향을 지키기 위해 자원해서 무기를 든 남베트남의 민병대들이었다.
이 민병대원들을 '러프 퍼프'라고 부르던 미국인들이 이들에 대해 쓴 글에서 나타나는 평가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남베트남 정규군에 비해 장비나 인력의 우선도, 훈련 정도 등 모든 면에서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베트콩과 자주 교전했고, 전과 역시 크다는 것이다. 비록 베트콩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민병대들을 우선적으로 노렸기에 교전 자체가 자주 벌어지기는 했으나, 그 교전들에서도 부족한 장비로도 치열하게 맞서 싸웠기에 베트콩들도 민병대를 상대로 큰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15]
하지만 정작 남베트남 정규군은 이들보다 몇 배나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도 전투력은 뒤떨어졌다. 위 링크에 따르면, 남베트남 정규군에게는 각 마을을 방어하는 시민군들이 지원을 요청할 때를 대비해서 신속대응부대가 별도로 편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 신속대응부대는 말만 신속이지 제 때 지원을 오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1966년 10월에서 1967년 3월까지의 통계로는, 시민군이 베트콩과 교전한 케이스의 오직 45%만 제때 지원을 왔고, 민병대의 공격 작전에서는 더 심각해서 겨우 11% 정도로 아예 없는 거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또한 1969년에는 민병대 부대 중 30%만 정규군의 포병 화력지원을 받았는데 그 절반은 제대로 표적획득도 안 하고 쏘는 견제포격, 한 마디로 제대로 된 화력지원은 고작 15% 정도였다.
남베트남군은 민병대에게 제대로 된 도움 하나 안 주는 주제에 민병대원들을 열등하다고 무시했다고 한다.

4.5. 전술, 전략적 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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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대규모 공세를 시작한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의 군수공장과 군수물자가 밀집한 전략거점 반 메투 오를 기습적으로 함락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반 메투 오를 수비하는 병력은 민병대들과 23사단 예하 1개 보병연대가 전부였고 이는 남베트남군이 북베트남군의 공세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렇게 남베트남군은 완벽히 기습을 당하게 된다. 남베트남군 수뇌부는 적의 투입 규모를 고려하지 않고 추가적인 23사단 예하 병력들과 레인저단을 투입했다가 그 의도를 쉽게 간파한 북베트남군에 의해 23사단이 송두리째 붕괴되는 결과만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자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중부 고원지대의 2군단 주력 병력을 비밀리에 철수시켜 현존 전력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방어가능한 지역을 보존하기로 결심한다.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철수하면서 병력을 보존하는데 성공한 프랑스군의 전술을 모방한 전술이었다. 그렇지만 남베트남은 무려 '''군단급 병력을''' 짧은 기간안에 전부 철수시키려는 무리수를 두었고 당연히 사전 정찰 및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남베트남 군인들은 비밀 유지는 고사하고 자신들의 가족에게 알려서 가족들을 대피시키고자 했고 결국 이 사실이 입소문 처럼 퍼져서 '''수 만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자신들도 피난시켜달라며 2군단 철수 대열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북베트남군은 초기에 남베트남군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했으나 이내 남베트남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남베트남군 철수 대로에다가 포격을 가하면서 주요 철수로를 가로막아 공격을 가했다. 결과는 '''2군단 병력의 총체적 붕괴''', 그저 살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잡힌 남베트남 병사들은 전선에서 이탈해 탈영하기 시작했으며 수 많은 남베트남군 장비와 물자들은 피난민들에게 가로막혀서 여기저기 유기되었다. 교통로마다 북베트남군의 포탄이 떨어져 피난민들과 남베트남군 병사들이 같이 떼죽음 당하기도 했다. 남은 2군단 잔여병력들도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다가 북베트남군의 기습 공격에 수 많은 병력들을 손실했다.
북베트남군은 1군단 주력 병력의 재배치 계획까지 파악해 1군단 관할 지역에 총공세를 가했다. 당시 1군단 관할 지역의 1번 도로가 '''유일한 전술 도로'''였고 북베트남군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전쟁을 피해 도망가는 피난민들을 전혀 가로막지 않았다.[16]
1번 도로는 공포감에 빠진 수 많은 피난민들로 넘쳐났고 주요 도시들도 북베트남 특공대가 석방시켜준 죄수들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수 만명의 남베트남군 1군단 병력들은 이미 자기 살기 바쁜 상황에 '''이리저리 도망다니거나 도시에서 약탈과 살인, 강간을 하기 시작했고''' 이미 전투병력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북베트남군 수뇌부는 남베트남군의 격렬한 저항을 예상했지만 다낭을 포함한 남베트남 주요 거점들을 신속하게 점령하게 되자 놀랐을 정도였다. 그렇게해서 남베트남군의 4개 군단 중 2개의 군단이 송두리째 붕괴되었으며 어마어마한 양의 군수물자들이 고스란히 북베트남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17]
이렇게 섣부른 대규모 병력 재배치를 결정하는 큰 실수를 한 티에우는 자국군 병력의 절반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으며 결국 그는 사임하고 부정부패로 축적한 수 많은 자산들과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대만으로 망명해버린다.''' 남베트남군은 남은 병력들을 재배치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해보았지만 이미 한 번의 오판으로 인해 전세는 급속도로 기울어버렸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군은 더 이상 유의미한 반격을 할 수 없을거라는 판단하에 가용 가능한 병력들을 모두 동원해 사이공에 총공세했고 결국 남베트남 국가체제가 붕괴되버린다.

5.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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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하던 북베트남군은 4월 26일, 본격적으로 사이공을 함락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북베트남군 304사단을 막기 위해 롱탄의 남베트남군 보병학교에 육사 생도들과 기갑학교 철수 병력들이 합세했다. 이들 병력은 열악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3일 동안이나 버티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해 돌파당하고 만다.
북베트남군 4군단은 비엔 호아 공군기지를 공격했고 이 공군기지를 방어하는 병력들은 남베트남군 최정예 부대인 3기갑여단과 18사단이었다. 남베트남군은 대전차호를 구축하면서 북베트남군 기계화부대를 저지했고 서로 교량을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북베트남군 1군단, 3군단, 232군의 공세 방면에서도 남베트남군은 치열하게 저항해 북베트남군에게 피해를 입혔다. 남베트남군은 몇 일 동안이나 파도같이 몰려오는 북베트남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남베트남군에게는 더 이상 예비 병력과 탄약이 없었다. 4월 28일, 남베트남 장병들이 전선에서 죽어나가는 그 와중에 남베트남 육군 참모총장 카오 반 비엔은 '''미 대사관으로 가서 헬기를 타고 미해군 함정으로 탈출해버렸다.''' 일선 교전 부대 지휘관과 참모들도 자기 목숨이나 부지하려고 탈출하는데 급급했다. 4월 29일, 해군 참모총장 디에프 쾅 퉁도 미해군 선박으로 탈출했다.[18] 남베트남군 주요 수뇌부의 탈출 러시는 계속 이어졌고 남베트남군 1군단장과 3군단장, 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 심지어 '''후임 육군 참모총장 빈록 중장도 미해군 함정으로 탈출한다.''' 물론 일부 고위 장교들은 끝까지 남아서 싸우거나 자결하기도 했다.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공격이 재게되고 남베트남군은 밀려나면서 전투를 지속했다. 남베트남군이 사수하던 주요 거점과 공항들도 점령되었으며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협상을 하던 것도 더 이상의 진전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즈엉반민 대통령은 결국 항복 및 모든 남베트남군의 교전 중지를 발표하면서 '''베트남 공화국과 베트남 공화국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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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군 잔존 병력의 저항을 물리친 북베트남군은 전차를 몰고 대통령 관저의 철문을 밀치고 들어가면서 베트남 전쟁은 공식적으로 미국과 남베트남의 패전으로 마무리되었다.[19] 남베트남군 4군단은 아직 전력이 온전히 보존되었지만 더 이상 북베트남군과 적대행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전부 해산되고 만다. 남베트남 해군 일부 군함들은 필리핀으로 망명해 필리핀 해군에서 한동안 운용하게 되었다.
수 많은 남베트남군 병사들은 민간인 복장으로 바꿔 입은 뒤 민가로 숨거나 북베트남군에게 포로로 잡혀 재교육 수용소에서 교육을 이수한 뒤 풀려났다. 남베트남군 참모본부에는 모든 비밀 문서와 컴퓨터 데이터가 '''파기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버린 바람에''' 북베트남군은 100만 명이 넘는 모든 남베트남군 명단을 손에 쥐게 되었다.
'''통일 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이 운용하던 군사장비와 물자들을 흡수해 인도차이나 지역의 막강한 군사강국이 되었고 1978년, 크메르 루주 전복을 위해 캄보디아를 침공하거나 중월전쟁 때 요긴하게 사용했다.

6. 편제


'''베트남 공화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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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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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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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공군

6.1. 베트남 공화국 육군


Lục quân Việt Nam Cộng hòa
Army of the Republic of Vietnam (ARVN)
베트남 공화국의 육군이다. 병력수는 약 410,000명이였다.[20] 1949년 창설된 베트남국 육군이 전신이다.
베트남 공화국 육군 특수부대(LLDB, Lực Lượng Đặc Biệt Quân Lực Việt Nam Cộng Hòa)라는 특수부대도 설치되었는데, 베트남 공화국 육군 내에서도 정예 부대였고, 2,800여명 정도 있었다. 미군 특수부대와 함께 북베트남 영토를 가끔씩 때리기도 했다.
베트남 공화국군 중에서는 정예부대이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개막장 베트남 공화국 육군 기준으로 나았다는 거지 미군이 전폭적으로 훈련을 지원하기 시작한 1965년 전에는 이들도 아주 신통치는 않았다, 베트남 일반 보병사단만 졸전을 펼쳤던 1963년 압박 전투와는 달리, 1964년 빈 지아 전투에서는 이들 레인저와 또 다른 정예부대들이었던 해병대, 공수사단까지 투입됐지만 결국 일부 대대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졸전을 면치 못했다. 그것도 현지 민간인들이 공화국군에게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유리한 상황에서도 말이다.[21] 1965년 동 쏘아이 전투에서는 적군 수백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리긴 했으나 정작 이쪽도 같은 자리수의 사상자가 나온 건 마찬가지인데다 결과적으로 전술적 목표를 달성해 승리한 건 베트콩이었다.
그나마 1968년 구정 공세 당시 남베트남군 레인저와 해병대가 후에시에 난입한 베트콩을 압도적인 교환비로 물리쳤지만 이건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후이고 구정공세때의 전과도 역시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애초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한 것도 압박 전투등 기타 전투에서 보여준 남베트남군의 형편 없는 전투력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군 자체의 역량으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상대할 수 있었다면 뭐하러 미국이 막대한 전비와 50만이나 되는 병력에다 한국군등 동맹군 병력까지 참전시켰겠는가... 그나마 1970년대 미군이 철수하면서 고급 장비들을 놓고 가 전투력이 강화되었다.
  • 1군단 - 예하사단: 1 보병사단[22], 2 보병사단[23]
- 예하연대: 1, 2, 3 연대(1사단),4, 5, 6 연대(2사단),51 독립연대
-직할부대:1 유격단(Ranger Group), 1 기갑여단, 147 해병여단
-군단소재지:다낭
  • 2군단 - 예하사단: 22 보병사단[24],23 보병사단[25]
- 예하연대: 40, 41, 47 연대(22사단),44, 45 연대(23 사단) 42 독립연대
-직할부대:2 유격단(Ranger Group),2 기갑여단,258 해병여단
-군단소재지:플레이쿠
  • 3군단 - 예하사단 : 5 보병사단[26], 25 보병사단[27]
-예하연대: 7,8,9 연대(5사단), 46, 49, 50 연대(25사단) 43,48 독립연대
-직할부대:81 유격단(Ranger Group),3 기갑여단,369 해병여단
-군단 소재지:비엔호아
  • 4군단 - 예하사단: 7 보병사단[28],9 보병사단[29], 21 보병사단[30]
-예하연대: 10, 11, 12연대(7사단), 14,15,16연대(9사단), 31,32,33독립연대(21사단)
-직할부대:44 전술공군사령부,4 유격단(Ranger Group),4 기갑여단,468 해병여단
-군단 소재지:칸토
제 18 보병사단[31]
제 3 보병사단[32]
공수사단:예하부대-1,2,3,4 공수여단,7 유격단(Ranger Group)[33]
해병사단:예하부대-147,258,468 해병여단[34]
레인저 사령부:예하부대-1,2,3,4,5,6,7,8,9 유격단(Ranger Group)[35]
1959년 무렵 1개 보병사단은 3개 보병연대,105mm 포대,4.2인치 박격포대대와 수색대대로 구성된 일만 사백 오십명으로 구성되었다.이 편제는 23사단이 2개 보병연대로 편성되는 1964년 말까지 변함이 없었다.1965년 여름부터 1개 보병연대는 4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10 사단은 1965년 5월 16일 쑤안록에서 기존 43,48보병연대와 신설된 52보병연대를 근간으로 3군단 예하로 창설이 되며,1967년 1월 말 사단 명창이 10사단에서 18사단으로 변경된다.
1965년 11월에는 새로운 독립연대가 창설되었고, 여기에 추가해서 모든 보병 사단은 박격포 대대와 105mm 곡사포 2개 대대를 보유하게 된다.
23사단은 1967년에서 1968년 사이 세 번째 연대인 53보병연대를 인가받아 재편성되며,1968년 초에는 모든 사단들이 3개 대대 규모의 105mm 포대와 1개 대대의 155mm 포대를 보유하게 된다.

1968년 기준으로 베트남 공화국 육군 전력은 10개 보병사단을 포함하여 3개 독립연대, 공수사단, 레인저 사령부(20개 대대), 그리고 11개 기갑대대,105mm 24개 대대와 155mm 6개 포대를 보유하고 있었다.[36]
1971년경 보병연대 편제는 기존 4개 대대에서 3개 대대로 축소되지만, 각 대대는 3개 중대에서 4개 중대로 재편성된다. 베트남 공화국 육군의 대대,중대별 병력 편성과 장비 보유 현황은 다음과 같다.보병대대는 대대본부, 화력지원중대[37] 그리고 3개 보병중대로 구성이 되었다.1개 보병중대는 총 110명에서 200명 사이로 구성되며,중대본부,2문의 기관총과 60mm 박격포로 무장한 중화기소대,3개 보병소대로 편성되었다.
1971년 10월 1일 3사단이 1군단 예하로 창설되며, 사단본부는 쾅트리 근교 아이투에 설치가 되지만 1972년 쾅트리가 월맹군에게 점령당하면서 3사단은 다낭으로 이전하여 재편성을 하게 된다.
1972년 이후로 모든 독립연대는 사단으로 흡수된다.[38] 이와 더불어 1972년 월맹군과 베트콩의 부활절 공세 이후 베트남 공화국 육군은 2개 대대 규모의 방공포 대대와 175mm 포병대대를 각각 창설하고,1973년 6월에는 주월미군의 철수로 발생한 화력 공백을 메꾸기 위해 4~5개 175mm 포병대대와 4개 방공포대대를 창설하여 운영하개 되지만,1975년 4월 30일 베트남 공화국이 월맹에게 패망하며 베트남 공화국 육군도 그 운명을 다한다.
베트남 공화국 육군 기갑전력은 4개 기갑연대로 편성됐다. 1군단 지역에는 4기갑연대,2군단 지역에 3기갑연대,3군단 지역에 1기갑연대,4군단 지역에 2기갑연대가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1963년 12월에는 제5,제6 기갑연대가 창설되었다.베트남 공화국 육군은 1개 보병사단당 1개 기갑연대를 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전력 증강을 꾀했다.1965년 기준으로 6개 기갑연대에 29개 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39]
1966년 3월에는 10기갑연대가 창설되는 것을 시작으로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총 12개의 기갑연대가 창설되었다.이로써 베트남 공화국 육군은 1,2,3,4,5,6,7,8,10,11,12,14,15,16,17,18,19,20기갑연대 등 총 18개의 기갑연대를 보유했다.
기갑 전력의 증강으로 베트남 공화국 육군은 최초 의도대로 11개 보병사단에 11개 기갑연대를 배치할 수 있었고, 별도로 7개 독립기갑연대를 운영할 수 있었다. 1970년에는 각 군단에 편성되어 있던 기갑연대 대신 1군단 지역에 1기갑여단,2군단 지역에 2기갑여단,3군단 지역에 3기갑여단,4군단 지역에 4기갑여단 등 총 4개의 기갑여단을 창설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1972년 이후에는 20기갑연대와 21기갑연대가 창설되었고, 1974년 M48 패튼 전차와 M41 워커 불독,M113 APC로 구성된 혼성기갑대대가 사이공 근교 투톡에 위치된 기갑학교에서 창설되어 패망 직전까지 활약한다.

6.1.1. 남베트남 육군의 정예 부대들


  • 제18사단 : 3군단 예하 사단으로 창설되었으며, 사단 규모가 작아 남베트남군 내에서 약체 부대, 반쪽 짜리 사단 등으로 비웃음을 들었지만, 정작 이 사단이 남베트남 육군 중에서 가장 빛나는 전과를 지닌 부대 중 하나가 되었다. 부활절 공세 당시부터 안 록을 사수하는데 있어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후 교체된 18사단장 레 민 다오 준장부터가 인맥이 아닌 오로지 자기 실력으로 진급하는데 성공한 유능한 장성이었기에 부대 장병들도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1973년, 캄보디아 국경지대의 북베트남군 주둔지를 격멸하는데 특무대대를 투입해 전과를 올렸으며 같은 해 철의 삼각 지대 전투에서 북베트남군 2개 사단을 틀어막는데 성공했다.
1975년, 메콩 델타 지역의 후안 록 전투에서 제대로 존재감을 발휘하는데, 북베트남군 예하 3개 사단을 2주 동안 틀어막는데 성공해 북베트남군은 5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채 패퇴해야 했다. 이는 동료들의 미국 망명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절하고 자리를 사수한 레 준장을 보고 그를 굳게 믿은 장병들이 탈영하지 않고 끝까지 전선을 사수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숫적 열세로 인해 후안 록 지역을 내주고 철수하긴 했으나 지리멸렬하게 거의 전 부대가 송두리째 붕괴한 1, 2군단 철수 작전에 비해 대단히 성공적인 철수 작전이었다.
18사단의 분전을 통해 남베트남 국민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나 결국 전세는 북베트남 쪽으로 기울었고 남베트남의 패망도 막지 못했다. 남베트남 패망 이후 레 민 다오 준장은 재교육 캠프에 수감되었고 끝까지 사상 전향을 거부하다가 17년 뒤 미국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한다. #
  • 제20기갑연대 : 1971년, 미국의 지원으로 창설된 신생 기갑부대였으나 미국이 공여해준 M48A3 전차들의 우수한 성능과 남베트남군 전차병들의 숙련도가 결합해 대활약을 하게 되었다. 부활절 공세 당시 전선을 끝까지 사수하면서 북베트남군의 T-54 전차들과 T-34 전차들을 일방적으로 격파해 2주 동안 쾅찌 성을 방어,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돈좌시켰다. 이 과정에서 북베트남군 대전차보병의 B-40 로켓과 9K11 말륫카 대전차 미사일에 의한 피해가 매우 커 연대 내 가용가능한 전차가 불과 6대에 불과한 상황까지 몰렸지만, 그래도 대책없이 후퇴하던 다른 남베트남군 부대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잘 싸웠던 부대였다. #
  • 제3기갑기병연대 : 1954년, 미군 베트남 지원 사령부의 지원으로 2군단 예하 부대로 창설되었으며, 구정 공세 당시 쁠래이꾸 방어작전에서 성공적으로 베트콩들을 격멸했던 적이 있다.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술을 통해 베트콩에게 큰 피해를 입혔던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 미군 군사고문단과 함께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여받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미군 외 타국군에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이 수여된 사례는 당시로써는 흔치 않은 케이스였다.
  • 남베트남 공수사단 : 어느 나라의 공수부대가 다 그렇듯이 남베트남군의 공수부대도 정예 부대였으며, 정부 수립 이전인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부터 주요 전투에는 전부 다 투입되어 전군에서 가장 실전경험이 풍부했다. 초급장교 시절 월남군 공수사단에서 군사고문관을 지낸 배리 맥카프리 미 육군 대장은 후일 "그들의 용기와 전술적 공격성에 경외심을 느꼈고, 월남 공수부대 장교와 부사관들은 극단적으로 유능하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다"고 술회했다. 역시 초급장교 시절 월남군 공수사단에서 군사고문관을 지낸 노먼 슈워츠코프 미 육군 대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월남 공수부대 장교들은 내가 아는한 가장 뛰어난 전술 지휘관들"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최후의 사이공 전투에서까지 치열하게 저항을 했던 부대 중 하나였다. 1948년부터 창설되어 1975년까지 존속되었으니 그야말로 남베트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부대라 봐도 무방하다. 당시 주월미군사령관,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미 육군 대장은 북베트남군에는 월남군의 공수부대와 해병대에 필적할 부대가 없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 남베트남 레인저 : 베트남 공화국 정부 수립 이전에 프랑스에 의해 특수부대로 창설되어 인도차이나 전쟁 등 주요 전투에 모두 참전한 특수부대로 베트남 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미국의 특수부대와 레인저에서 훈련을 받았다. 남베트남군에서 손꼽히는 수준의 특수부대였으며, 정규 작전과 대반란 작전에 있어서 뛰어난 전과를 보였던 부대이다. 당시 영국의 대반란작전전문가인 로버트 그레인저 커 톰슨 경은 대반란 작전에 있어서 이스라엘 방위군 다음으로 뛰어난 부대라고 찬사를 했을 정도였다.남베트남 레인저도 남베트남 공수사단과 마찬가지로 주요 전투에 투입되어 뛰어난 전과를 올렸으며, 그 공로로 총 11개의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여받았다. 남베트남 공수사단과 마찬가지로 사이공에서 최후의 저항을 했다.
  • 남베트남 해병사단 : 베트남화 정책을 진행하던 주월미군사령관,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미 육군 대장은 북베트남군에는 월남군의 공수부대와 해병대에 필적할 부대가 없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프랑스 해군 특수부대에서 영향을 받아 창설된 부대인 만큼 남베트남군 내에서 레인저, 공수부대와 더불어 3대 엘리트 부대로 손꼽혔다. 총 9개의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여받았다. 1975년, 사이공 방어작전에서 남베트남 측이 가용할 수 있던 몇 안되는 부대였다.

6.1.2. 베트남 공화국 민병대


베트남 전쟁 내내 벌어진 대 베트콩 전역에서 실질적인 주력군의 역할을 담당했던 군대.
베트남 공화국의 국민들을 베트콩북베트남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955년 응오딘지엠 대통령의 명령으로 창설되었으나, 대통령의 명령은 계기가 되었을 뿐 실제로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입대하면서 조직되었고 남베트남 정부는 50년대 내내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그나마 베트남 공화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나 실제 일처리가 형편없었기에 효과는 거의 없었고 병력 규모나 장비도 엄청 열악했다. 처음엔 매우 열악하고 그저 주민들이 조직한 민병대였지만, 1965년 이래 미국이 이들을 육성하기로 마음먹고 부족한 인적자원이나마[40] 투자를 해 주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숫자와 전투력이 급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으며, 전과도 나름 상당했다. 남베트남군의 작전 능력 부족 문제로 인해 나중에는 최전방에서 싸우기도 했다.
이들에게 제대로 된 훈련을 시켜주고 함께 싸운 미군은 이들을 "러프 퍼프"(Ruff puff)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6.1.2.1. 베트남 공화국 지방군

이들은 중대 단위로 조직됐으며, 창설 이래 각 성 단위로 주민들을 베트콩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각 성장 휘하의 중대 단위 병력 이외에도 중앙 직속으로 8개의 기동대대가 있었다. 중대 단위였던 탓인지 이들은 자체적으로 포병 병과를 보유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6.1.2.2. 베트남 공화국 시민군

이들은 소대 단위로 조직됐으며, 자기 고향 마을에서 농사일 같은 다른 직업에 종사하다가 베트콩이 쳐들어오면 맞서 싸우는 식으로 복무했다. 월급이 매우 형편없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가족들과 이웃들, 고향을 자기 손으로 지킬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나름 매력적인 복무 형태기도 했다. 그 특성 덕분에 실질적으로 베트콩한테 매우 큰 문제가 되었던 조직.

6.1.3. 베트남 공화국군 육군 보병장비




6.2. 베트남 공화국 해군


베트남 공화국의 해군이다. 당대에는 수군(Thủy Quân)이라는 표현으로 불렀다. 병력수는 약 42,000명이였다. 당시 베트남 공화국 해군은 수치 상으로 세계 9위였다. 1974년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파라셀 제도에서 교전하다가 패배한 바 있다.[41] 일부 해군들은 패망 당시 필리핀으로 도망가기도 했으며 군함들은 필리핀으로 넘겨졌다. 해병대(정식 명칭 베트남 공화국 수군 육전사단, Sư Đoàn Thủy Quân Lục Chiến)도 존재했는데 규모는 약 20,000명 정도였다.
1952년 3월 프랑스가 지휘하는 베트남국 해군으로 창설되었으며, 1954년 프랑스 해군으로부터 3척의 기뢰부설정을 지원받는 것을 시작으로 1956년 2,160명의 병력에서 1956년 3,371명의 병력으로 성장한다.
1957년에는 베트남해군학교를 창설할 목적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해군 장병들이 귀국,베트남해군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해군력 향상에 박차를 가한 결과,1959년에는 3,600명의 병력으로 늘어난다.
1960년 기준으로 베트남 공화국 해군은 5척의 대잠함과 5척의 기뢰정,4척의 LSM,2척의 상륙지원함[42], 5척의 보병수송정[43]과 7척의 LCU, 67척의 LCM,111척의 LCVP 그리고 1척의 급유선과 함께 다양한 각종 소형 함정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1968년 가을 18,000명이던 병력이 1970년 말 32,000명으로 2년만에 폭발적인 인원 증강이 있었다.1973년에는 42,000명의 병력과 1,500여척의 각종 대소함정을 보유하게 된다.[44]
메콩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하천과 지류로 형성된 베트남의 지역적 특성상 연안전력이 매우 중요했다.베트남 공화국 해군 연안경비대는 해군의 기동전단과 함께 창설되어,연안기동전대로 개편되게 된다.제21연안기동대에서 26연안기동전대까지 편성된 연안기동전대는 1척의 지휘함과 정보수집선 그리고 5척의 무장상륙정[45]과 6척의 무장 수송선[46], 6척의 경비정 등 총 19척의 각종 함정으로 편성되었다.
제27연안기동전대는 1척의 기함과 정보수집선의 역할을 수행한 6척의 무장상륙정[47], 그리고 10척의 경비정으로 구성되었으며,각 전대는 150명으로 편성되었다.기동전대의 지휘함과 지휘정,무장수송선은 2정의 20mm 포,2정의 30 캘리버,50 캘리버 기관총,81mm 박격포로 무장했다.
정보수집선과 수송성은 1정의 40mm 포와 2정의 20mm 포,그리고 50 캘리버 기관총과 81mm 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으며,40mm 포는 선수에 포탑 형태로 설치됐다.
무장상륙정[48]의 기본 무장은 7명의 승조원들이 3정의 20mm 포,2정의 30 캘리버 기관총 등을 운영하였고 120명의 완전무장한 병력 또는 32톤의 화물을 수송할 수 있었다.
LCVP는 1정의 20mm 포와 3정의 30 캘리버 기관총을 장비하고 있었으며 36명의 완전무장한 병력 또는 3.5톤의 화물 수송 능력을 보유했다.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면서 넘겨받은 프랑스제 경비정은 8명의 승조원 , 1정의 50 캘리버 기관총, 3정의 30 캘리버 기관총을 갖추고 있었다.
제27연안기동전대에서 사용된 연안순찰함은 2정의 50 캘리버 기관총,1정의 30 캘리버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속력은 14노트 정도 됐다.
연안경비대는 연안수송보호전단과 연안수송단을 포함하고 있었으며,연안수송보호전단은 4척의 정보수집선,6척의 경비정,20척의 수송선을 보유했다.연안수송단은 2정의 20mm 포로 무장한 7척의 수송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1968년 초 새로운 함정이 증강되어,6개 연안기동전대[49]가 새로이 창설되었다.각각 11척에서 19척 사이의 함정을 보유하게 되었으나,27연안기동전대는 22척의 함정을 보유했다.
연안순찰함대는 1968년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8척의 연안경비정을 롱타우와 동나이강에 배치시켜 주로 순찰과 베트콩 보급선 차단에 활용한다.미국제 연안경비정은 선체가 강화섬유에 시속 25노트의 속력,선수에 50 캘리버 기관총과 30 캘리버 기관총을 달아놓은 신형이었다.
주월미군이 철수하자 발생된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해군은 연안경비정 53척,고속정 108척,연안순찰정 293척,순찰지원정 84척,정보수집선 64척,무장수송선 100척,지휘통제정 8척 등을 베트남 공화국 해군에 제공한다.
베트남 공화국 해군의 연안기동전대들
  • 21연안기동전대 [50]
  • 22연안기동전대[51]
  • 23연안기동전대[52]
  • 24연안기동전대[53]
  • 25연안기동전대[54]
  • 26연안기동전대[55]
  • 27연안기동전대[56]
  • 28연안기동전대[57]
  • 29연안기동전대[58]
  • 30연안기동전대[59]
  • 31연안기동전대[60]
  • 32연안기동전대[61]
  • 33연안기동전대[62]


6.3. 베트남 공화국 공군


월남 공군 라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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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1955
1956 ~ 1975
Không lực Việt Nam Cộng hòa
La force aérienne vietnamienne (FAVN)
Republic of Vietnam Air Force (RVNAF)
베트남 공화국의 공군이다. 당시 정식 명칭에는 '공력'이라는 이름을 썼다. 병력수는 약 63,000명이였다. 1955년 설립되었으며, 창설 당시 프랑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시 세계 4위라고는 하지만[63] 미국이 대준 최신 전투기로 인해 이런 수치가 나온것이고, 실제로 저런 대규모의 공군을 운용할 자본이 없어 수송기로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정도로만 쓰였다. 미국 공군과 함께 북베트남을 폭격하기도 했다. 쓰인 전투기로는 A-1, A-37, F-5 등이 있다.

7. 수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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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즈엉반민
합동참모의장 응우옌흐우한 '''준장'''
[64]
국방장관 쩐반돈
1975년 4월 30일 패망 당시 기준이다.

8. 계급


계급장의 출처는 이곳이다.


8.1. 1964년 이후


전쟁이 한창이던 1964년에 채택되어 패망시까지 유지되었다. 전반적으로 미군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특히 해군의 경우 64년 이후로는 영국 해군, 대한민국 해군, 중화민국 해군해상자위대가 사용하는 국제 표준 계급장을 사용하게 되었다. 육군의 경우엔 좌관급 장교 계급장에 밑줄이 생겼는데, 좌관급과 위관급 둘 다 매화를 표장으로 사용했던지라 전투복에 부착하는 검은색 계급장으로는 좌관인지 위관인지 구분이 안되었던것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구분
계급명
육군
해군
공군
해군육전대





총장(육군)
thống tướng
統將
수사도독(해군)
Thủy sư Đô đốc
水師都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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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대장
Đại tướng
大將
도독(해군)
Đô đốc
都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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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
Trung tướng
中將
부도독(해군)
Phó Đô đốc
副都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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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Thiếu tướng
少將
제독(해군)
Đề đốc
提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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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장
Chuẩn tướng
准將
부제독(해군)
Phó Đề đốc
副提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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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좌
Đại tá
大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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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좌
Trung tá
中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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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ếu tá
少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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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
Đại úy
大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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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
Trung úy
中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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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Thiếu úy
少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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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사관
준위
Chuẩn úy
准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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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후보생
Sinh viên Sĩ quan
生員士官
사관후보생
Sinh viên Sĩ quan
生員士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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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ạ sĩ quan
下士官
일등상사
Thượng Sĩ Nhất
上士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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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
Thượng Sĩ
上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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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중사
Trung Sĩ Nhất
中士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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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
Trung Sĩ
中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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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nh sĩ
兵士
일등하사
Hạ Sĩ Nhất
下士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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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
Hạ Sĩ
下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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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병
Binh Nhất
兵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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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병
Binh Nhì
兵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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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1] 위쪽이 평시 깃발, 아래쪽이 전시 깃발이다.[2] 이후 베트남 공화국이 됨.[3] 보병, 방공포, 기갑, 통신, 행정[4] 1, 2, 3, 4군단[5] 각 군단 예하에는 포병대, 해병부대와 레인저부대가 배속되어 있어 군단 작전을 지원했다.[6] 당시 미군은 최신 무기는 지원해 주었지만 부패한 베트남 공화국 정부 때문에 그 무기를 운용할 돈과 물자를 전혀 지원해 주지 않았다. 또 병력수가 100만명을 넘는다지만 정규군 병력 수는 58만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자원한 민병대인 지방군이나 시민군이였다. 자원해서 민병대에 입대한 사람들이 해가 갈수록 늘었기 때문에 정확한 병력 수는 각 해마다 다르다. 물론 받은 지원과 실제 전과 비율로 보면 오히려 이들이 정규군보다 잘 싸웠기 때문에(...) 이 숫자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차라리 정규군이 수치상의 전력규모에 비해 의미가 없다고 하면 모를까...[7] 베트남 전통은 만 20세 이상이 되어야 성년으로 간주했다.[8] 미군은 남베트남군의 작전 구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미군은 출입 금지’라는 표지판을 세워뒀다. 이제 더 이상 직접적 지상전은 수행하지 않겠다는 의미.[9] 남베트남군은 지형적 특성 때문에 육로 수송보단 헬리곱터와 항공기 그리고 함선을 통한 보급을 선호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의 이러한 조치는 남베트남군에 대한 사형선고 수준이었던 것. 출처 [10] 미군 역시 헬리곱터를 통해 지원하다보니 북베트남군의 대공포에 적지 않은 수의 헬리곱터들을 손실하는 피해를 입었고 헬리곱터 운용 교리를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된다.[11] 사족으로 이런 막장 사실을 알고 있는 군 복무자들의 경우 월남의 패망의 원인을 오직 간첩만을 강조하는 국군의 정훈 교육에 대해 조소/조롱하는 경우가 흔하다.[12] 오일쇼크 때문에 남베트남 물가도 폭등하던 상황이라 무기 체계는 커녕 군사물자 도입도 꿈도 못꾸고 있었다.[13] 한국군의 현대화가 1970년대 중반부터 가속이 붙은 이유 중 하나가 경제적 여유도 있지만 남베트남 패망을 보고 한국의 가치는 미국이 정하는 것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45년 후 충분한 국방력을 갖추지도 못한 상황임에도 그저 러시아와 서방만 바라보면서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등에 자신들의 이해관계만을 강요하며 도발외교를 일삼던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했다가 멸망은 면했으나 또 다시 영혼까지 털리면서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14] 만약 파이살 왕이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이미 북베트남군의 공세로 남베트남군 전선 붕괴가 한참 진행되던 시점이라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15] 민병대가 베트콩한테 골칫거리인 이유는, 베트콩과 남베트남 민간인들을 잘 구분해낼 수 있는 것이 이들 민병대었기 때문이다. 베트콩이 남베트남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저항조직이라는 건 당연히 북베트남측이 주장하는 거짓이고, 오히려 베트콩은 남베트남 시골 지역에 침투해서 각 마을을 약탈했다. 따라서 남베트남 국민 당사자들이 만든 군대인 민병대,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고향 마을에서 살면서 파트타임 군인으로써 복무하는 시민군들은 마을로 침투하는 베트콩을 색출해내는 데 적임자였다. 게다가 이들은 자기 가족, 친척, 이웃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기도 남베트남군보다 훨씬 높았다.[16] 심지어 야간에는 '''북베트남군 전차가 피난민들을 위해 서치 라이트를 비추어 주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다.'''[17] 북베트남군은 어마어마한 양의 남베트남군 물자와 차량들을 손에 넣고 그대로 전선에 투입하면서 스스로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장비들의 숫자에 놀랐을 정도였다. 북베트남군은 물자와 장비들이 남베트남군에 비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18] 탈출하기 직전 자신의 오랜 친구인 즈엉반민에게 탈출하자고 종용했지만 즈엉반민은 거절했다. 대신 자신의 손자와 딸과 사위, 조카들의 탈출을 부탁했다.[19] 현재 이 대통령 관저는 통일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20] 베트남 공화국군 병력이 115만명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론 정규군 58만명 정도였고 다른 57만명은 밑에서 서술할 민병대와 지방군이였다.[21] http://www.k16vbqgvn.org/tranbinhgia.htm [22] 고도인 후에 시에 주둔[23] 다낭 지역 주둔,1965년 5월 쾅 나이로,1972년 추라이로 이전[24] 1965년 5월까지 콘툼에 주둔했다가 이후 바기로 이전[25] 반메투옷 주둔[26] 1964년 7월까지 푸로이에 주둔했다가 1970년 2월 라이케로 이전[27] 1964년 12월부터 투아호아에 주둔하다가 1970년 미 25사단 주둔지 구치로 이전[28] 미토에 최초 주둔하였으나,1969년 11월 미 9사단 주둔지인 동탐으로 이전[29] 1972년 4월까지 사덱에 주둔하였다가 빈 롱으로 이전[30] 박리우에 주둔[31] 1965년 5월 16일 수안록에서 10사단이라는 이름으로 3군단 예하로 창설. 67년 1월말 18사단으로 명칭 변경[32] 1971년 10월 1일 1군단 예하로 창설되어 쾅트리에 주둔하다가 1972년 쾅트리가 월맹군에게 함락되면서 다낭으로 이전, 재편성[33] 사령부 소재지 사이공[34] 사령부 소재지 사이공[35] 사령부 소재지 비엔 호아[36] 포병 전력은 1970년 말 105mm 대대 43개,155mm 대대 15개(1969년 12개)로 증강된다.[37] 4~8문의 106mm 무반동총,4문의 4.2인치 혹은 81mm 박격포 보유,연대 전체로는 2~3문의 토우 미사일 지프 보유[38] 베트남 공화국 육군은 1972년 11개 사단과 35개 독립연대를 운영중이었다.[39] 5개 탱크대대,3개 기갑대대, M113 APC 21개 대대[40] 너무 인적자원이 부족한 나머지 위관급 장교 3명과 부사관 3명으로 구성된 고문단이 각 중대에 순환배치되어 훈련시켜주는 식이었다.[41] 이때 중공군이 점령한 파라셀 제도는 아직까지 분쟁을 일으키고있다.[42] LSSL[43] LSIL[44] 규모만 놓고 보면 당시 세계 3위라는 말도 돌 정도의 규모다.질적인 측면에서는 연안 해군 정도 수준이었다.[45] LCM[46] LCVP[47] LCM[48] LCM[49] 제28~제33[50] 주둔지 미토[51] 주둔지 사이공[52] 주둔지 빈롱[53] 주둔지 탄안[54] 주둔지 칸토[55] 주둔지 롱슈안[56] 주둔지 사이공[57] 주둔지 사이공[58] 주둔지 칸토[59] 주둔지 사이공[60] 주둔지 빈롱[61] 주둔지 롱슈안[62] 주둔지 미토[63] 상식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공군력이 세계 4위이면 영국, 프랑스 정도라는 것인데 아무리 남베트남이 미국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유럽 강대국들 만큼 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64] 당시 남베트남군 수뇌부 대부분이 탈출해버려서 참모본부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한 준장이 최후의 합참의장으로 자동 인수인계가 된 것이다. 남베트남군 전 부대에게 투항하라고 명령한 것도 이 사람이다. 그런데...한 준장이 도주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으니 '''북베트남 간첩'''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