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북두진
天罡北斗陣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에 등장하는 진법.
왕중양이 북두칠성의 원리를 응용하여 개발한 진법이다. 전진칠자가 처음으로 사용했고 나중에 전진교의 제자들도 익혀서 사용하게 된다.
일곱명이 북두칠성의 형상으로 포진하여 적과 맞서는 일종의 진법. 각각 '천구 · 천선 · 천기 · 천권 · 옥형 · 개양 · 요광'을 맡아 긴밀하게 협력하며 합심하는 단체전술이 특징으로, <사조영웅전>에서 매초풍, 황약사가 처음 천강북두진의 상대가 되었다.[1] 구성원들이 합심 조화를 이룰 경우 오묘한 시너지가 생겨 전체적인 위력이 증가한다. 전진칠자 정도 실력의 소유자들이라면 천강북두진으로 천하오절 급 고수와 그야말로 팽팽하게 겨루는 것이 가능해진다. 7대 1로 붙어서 비기는 게 고작이라는 시점에서 뭔가 잘못된 것 같지만(…) 천하오절 급 고수들과 전진칠자 개개인의 실력 차이를 생각하면 나름대로 집단전에 유용한 진법.[2]
물론 왕중양이 전진 제자들의 실력 저하를 예견한 것까진 아닐 것이고(...), 근본적인 목적은 다대 다 싸움에서 우위를 가져가기 위한 것에 있다. 즉 '''극소규모 전술행동.''' 왕년에 의병을 모아 금나라에 맞섰던 왕중양의 개인적인 경험이 천강북두진의 완성에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사조영웅전> 시점에서는 전진칠자가 펼친 천강북두진이 매초풍을 가볍게 압도하고 황약사와 하룻밤 내내 팽팽하게 겨루는 위엄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흥 연우루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는 황약사가 거꾸로 천강북두진을 와해시켜 버린다. 전진칠자 중 담처단이 구양봉에게 살해당해 윤지평과 가진악이 한 자리를 메웠기에 진의 위력이 저하한 탓도 있었지만, 황약사 본인이 진의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역이용해 버린 것이 결정적인 패배의 원인이었다.[3] 여담이지만 천강북두진과 두어 차례 싸우면서 진법의 효용성을 높이 평가한 황약사가 만들어낸 단체전 진법이 바로 이십팔숙진.
황약사가 파악해낸 천강북두진의 핵심적인 약점은 '''적이 북극성 자리를 차지하면 진 전체를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천강북두진은 북두칠성 포메이션이라 중앙의 북극성에 위치한 사람을 중심으로 진의 변화와 이동, 합동공격 등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쉽게 말해 북극성 위치에 들어와 있는 사람에게는 효과적으로 공격을 퍼부을 수도 없고 오히려 다른 구성원들이 불리한 위치에 있게 된다는 소리다. 천강북두진은 어디까지나 북두칠성이 '외부의 적에 대해' 공격을 퍼붓는 진형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신조협려 시대에 이르러 전진교에서는 이 천강북두진을 더욱 깊이 연구하여 좀 더 스케일을 키운 집단전술로 승화시켰다. 일곱 명이 모여 천강북두진을 만들고, 다시 그런 천강북두진 일곱 개를 모아 거대한 천강북두진의 형세로 배열하는 이른바 '''대북두진.''' 그러나 정작 이것으로 종남산을 침범하는 강적들을 물리친 일은 없다. 오히려 전진파를 찾은 곽정과 양과를 무뢰한들로 오해하여 가로막았다가 진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돌파당하는 망신을 당하기도.[4] 훗날 황약사의 이십팔숙진에 전진교가 협력할 당시, 전진교 제자들로 이루어진 부대들은 '''7인 1조로 천강북두진을 펼치며''' 몽골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곽정은 이 천강북두진을 황약사처럼 이론적으로 파해해 버린 것은 아니지만, 구음진경의 구결에 비추어 진법의 이치를 가슴 깊이 새긴 끝에 일대 다수와의 육박전에 능하게 되었다. 이거야말로 무슨 소린지 모를 일이지만, '''천강북두진의 원리를 깊이 이해했기 때문에 일대 다수로 싸워도 잘 버텨내는''' 기기묘묘한 전개가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 내내 이어진다! 백미는 신조협려에서 양과와 함께 몽골진영을 찾아가 쿠빌라이를 만나고 빠져나올 때로, 꾀병부리는 양과를 업은 상태에서도(!) 곽정에 필적하는 무공을 지닌 금륜법왕에 더해서 니마성, 소상자, 윤극서까지 합세해 공격을 퍼붓는데도 한참 동안 버텨낼 정도이다. 이쯤 되면 천강북두진의 최대 활약은 곽정에 대한 버프가 아닐까 싶을 정도. 물론 곽정의 이러한 위엄은 어디까지나 천강북두진과 더불어 구음진경을 숙지했기 때문이다. 구음진경은 도가 무공의 절정이고, 왕중양의 천강북두진 역시 도가 무공이라 둘 다 알게 된 곽정의 진법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진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신조협려> 시대에는 전진칠자가 새로운 무공인 칠성취회를 창안해내는데, 기본적인 발상은 천강북두진과 같지만 보다 적은 사람들이 모여도 문제없이 힘을 합칠 수 있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의천도룡기의 무당파 무공인 진무칠절진은 이름이 비슷하지만 천강북두진과는 아무 관계도 없고 장삼봉이 스스로 창안해 낸 것이다.
1. 개요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에 등장하는 진법.
왕중양이 북두칠성의 원리를 응용하여 개발한 진법이다. 전진칠자가 처음으로 사용했고 나중에 전진교의 제자들도 익혀서 사용하게 된다.
2. 특징
일곱명이 북두칠성의 형상으로 포진하여 적과 맞서는 일종의 진법. 각각 '천구 · 천선 · 천기 · 천권 · 옥형 · 개양 · 요광'을 맡아 긴밀하게 협력하며 합심하는 단체전술이 특징으로, <사조영웅전>에서 매초풍, 황약사가 처음 천강북두진의 상대가 되었다.[1] 구성원들이 합심 조화를 이룰 경우 오묘한 시너지가 생겨 전체적인 위력이 증가한다. 전진칠자 정도 실력의 소유자들이라면 천강북두진으로 천하오절 급 고수와 그야말로 팽팽하게 겨루는 것이 가능해진다. 7대 1로 붙어서 비기는 게 고작이라는 시점에서 뭔가 잘못된 것 같지만(…) 천하오절 급 고수들과 전진칠자 개개인의 실력 차이를 생각하면 나름대로 집단전에 유용한 진법.[2]
물론 왕중양이 전진 제자들의 실력 저하를 예견한 것까진 아닐 것이고(...), 근본적인 목적은 다대 다 싸움에서 우위를 가져가기 위한 것에 있다. 즉 '''극소규모 전술행동.''' 왕년에 의병을 모아 금나라에 맞섰던 왕중양의 개인적인 경험이 천강북두진의 완성에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사조영웅전> 시점에서는 전진칠자가 펼친 천강북두진이 매초풍을 가볍게 압도하고 황약사와 하룻밤 내내 팽팽하게 겨루는 위엄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흥 연우루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는 황약사가 거꾸로 천강북두진을 와해시켜 버린다. 전진칠자 중 담처단이 구양봉에게 살해당해 윤지평과 가진악이 한 자리를 메웠기에 진의 위력이 저하한 탓도 있었지만, 황약사 본인이 진의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역이용해 버린 것이 결정적인 패배의 원인이었다.[3] 여담이지만 천강북두진과 두어 차례 싸우면서 진법의 효용성을 높이 평가한 황약사가 만들어낸 단체전 진법이 바로 이십팔숙진.
황약사가 파악해낸 천강북두진의 핵심적인 약점은 '''적이 북극성 자리를 차지하면 진 전체를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천강북두진은 북두칠성 포메이션이라 중앙의 북극성에 위치한 사람을 중심으로 진의 변화와 이동, 합동공격 등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쉽게 말해 북극성 위치에 들어와 있는 사람에게는 효과적으로 공격을 퍼부을 수도 없고 오히려 다른 구성원들이 불리한 위치에 있게 된다는 소리다. 천강북두진은 어디까지나 북두칠성이 '외부의 적에 대해' 공격을 퍼붓는 진형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신조협려 시대에 이르러 전진교에서는 이 천강북두진을 더욱 깊이 연구하여 좀 더 스케일을 키운 집단전술로 승화시켰다. 일곱 명이 모여 천강북두진을 만들고, 다시 그런 천강북두진 일곱 개를 모아 거대한 천강북두진의 형세로 배열하는 이른바 '''대북두진.''' 그러나 정작 이것으로 종남산을 침범하는 강적들을 물리친 일은 없다. 오히려 전진파를 찾은 곽정과 양과를 무뢰한들로 오해하여 가로막았다가 진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돌파당하는 망신을 당하기도.[4] 훗날 황약사의 이십팔숙진에 전진교가 협력할 당시, 전진교 제자들로 이루어진 부대들은 '''7인 1조로 천강북두진을 펼치며''' 몽골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곽정은 이 천강북두진을 황약사처럼 이론적으로 파해해 버린 것은 아니지만, 구음진경의 구결에 비추어 진법의 이치를 가슴 깊이 새긴 끝에 일대 다수와의 육박전에 능하게 되었다. 이거야말로 무슨 소린지 모를 일이지만, '''천강북두진의 원리를 깊이 이해했기 때문에 일대 다수로 싸워도 잘 버텨내는''' 기기묘묘한 전개가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 내내 이어진다! 백미는 신조협려에서 양과와 함께 몽골진영을 찾아가 쿠빌라이를 만나고 빠져나올 때로, 꾀병부리는 양과를 업은 상태에서도(!) 곽정에 필적하는 무공을 지닌 금륜법왕에 더해서 니마성, 소상자, 윤극서까지 합세해 공격을 퍼붓는데도 한참 동안 버텨낼 정도이다. 이쯤 되면 천강북두진의 최대 활약은 곽정에 대한 버프가 아닐까 싶을 정도. 물론 곽정의 이러한 위엄은 어디까지나 천강북두진과 더불어 구음진경을 숙지했기 때문이다. 구음진경은 도가 무공의 절정이고, 왕중양의 천강북두진 역시 도가 무공이라 둘 다 알게 된 곽정의 진법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진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신조협려> 시대에는 전진칠자가 새로운 무공인 칠성취회를 창안해내는데, 기본적인 발상은 천강북두진과 같지만 보다 적은 사람들이 모여도 문제없이 힘을 합칠 수 있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의천도룡기의 무당파 무공인 진무칠절진은 이름이 비슷하지만 천강북두진과는 아무 관계도 없고 장삼봉이 스스로 창안해 낸 것이다.
[1] 만화판에서 천구는 마옥, 천선은 담처단, 천기는 유처현, 천권은 구처기, 옥형은 왕처일, 개양은 학대통, 요광은 손불이가 맡았다.[2] 처음 사용했을 때 매초풍은 그 위력에 놀라서 '남제와 북개께서도 여기 계십니까?' 라고 물을 정도였고, 황약사도 전진칠자를 보고 '왕중양은 밥통 제자들 밖에 두지 못해 무공의 정수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구나!' 라고 디스하면서도 청강북두진을 보고는 깊게 감탄했다. 처음 대결할 당시에는 진법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다고는 하나 천하의 황약사가 유효한 대처 수단을 찾지 못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3] 윤지평이 천권 자리를 맡았고, 황약사가 천권 자리를 노리며 공격했다.[4] 물론 곽정이 아무리 비범한 솜씨가 있어도 98명의 도사가 펼치는 대북두진 2개를 힘으로 어쩌지는 못했다. 북극성 위치를 차지하려고 해도 '''북극성 위치가 14개'''이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고....그런데 사실 1대 98이면 진법이고 나발이고 그냥 이기는 것이 맞다(...). 하지만 진법의 요체에 통달한 곽정에 의해 오히려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진이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