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중양

 

1. 실존인물
2. 김용무협소설에서 왕중양


1. 실존인물


王重陽
(1112 ~ 1170)
중국 도교의 한 분파인 전진교를 연 1대 조사. 실존 인물이다.
본래 이름은 중부(中孚)이고 는 윤경(允卿)이라 하였으나 도가에 입문한 뒤부터 이름을 철(嚞), 자를 지명(知明)이라 고쳤다. 도호는 '''중양자'''(重陽子)[1]라 하여, 흔히 부르는 왕중양이라는 호칭은 이 도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송나라에서 태어나 금나라에서 성장하던 문인으로 섬서 함양 사람이었다고 하며 20세 때 예부에서 하는 진사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여 이를 포기하고 무술을 익혀 이름을 세웅(世雄), 자를 덕위(德威)라 하여 무장으로 출세하려고 했지만 이를 실패하였다.
1130년은 송나라가 금나라의 공격을 받은 시기였다. 이때 자신의 아버지가 여러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었으나 멀리 살아서 구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를 약탈하기에 지방관이 이들을 잡아들이자 지방관에게 그들이 어렵기 때문에 약탈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석방시키게 했다.
1159년부터는 미친 사람 행세를 하다가 도가에 입문하여 유장촌에서 수도하다가 수중앙으로 이사하여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이 거주하던 곳을 불태우고 또다시 세상을 돌아다니며 마옥, 손불이, 담처단, 왕처일, 학대통, 구처기, 유처현 등을 제자로 맞아들였다.
도가의 일원이지만 유불선이 결국 하나로 합쳐진다는 이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유학과 불가 서적도 공부하게 했다고 한다. 실존인물이면서, 전진교를 창시한 조사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전설이 많이 붙어서, 입산수도하기 전에 하늘에서 신인이 나타나 경서를 전해주었네 하는 식의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왕중양은 여러 번 인생의 실패를 겪다가 도가사상에 매혹되어 스스로 공부하고 수련했고, 결국 한 문파의 개파조사가 되었다는 것이 실제 역사일 것이다.
왕중양에게 깨달음을 준 어느 선생을 여동빈의 화신으로 취급하여 전진교 일파에서는 여동빈을 여조(呂祖)라 부르며 특히 공경한다.
그가 죽고 한참 지나 1269년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중양전진개화진군(重陽全眞開化眞君)에 봉했고, 1310년 원 무종이 중양전진개화보극제군(重陽全眞開化輔極帝君)으로 봉했다.

2. 김용무협소설에서 왕중양



[image]
'''중신통中神通'''
'''당대의 천하 으뜸가는 고수'''
김용의 무협소설에서는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에서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면 본인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주변 인물의 언급으로만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는 왕중양이 천하오절 중 한 사람으로, 전진교의 창교조사인 무학의 대종사. 별호는 "중신통(中神通)". 천하오절 가운데 으뜸가는 실력을 인정받아 동서남북의 사절 외에 '''중앙에 위치하는 신통한 실력자'''라는 의미로 중신통의 별호를 정해 받았다. 전진칠자의 사부이며, 주백통의 사형이다.
소년 시절에는 학문을 수양하고 무공을 연마하여 강호를 누비는 영웅이 되었다. 그러다 금나라가 쳐들어오자 참다 못해 군사를 일으켜 금군에 대항하였지만, 많은 병사를 잃게 되자 한을 이기지 못하고 활사인묘(活死人墓)에 은거하게 되었다.
8년 동안 활사인묘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했으나, 일생의 라이벌이자 연인인 임조영의 계략에 걸려 밖으로 나오게 된다.[2] 이후 임조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호를 주유하지만, 임조영과 서로 사랑하면서도 송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한 자신의 입장 때문에 결혼은커녕 엉거주춤한 관계만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3] 결국 함께 강호를 주유하는 동안에도 임조영과 트러블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고, 최종적으로는 두 절세 고수가 종남산에서 무공을 겨루기로 하는 비정한(?) 결말이 나게 되었다. 이때 임조영은 자신이 지면 자결할 것이되, 자신이 이기면 자신을 활사인묘에서 살게 하고, 왕중양은 평생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만일 왕중양이 패배하고서도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왕중양 본인이 중이나 도사가 되어 출가하고 10년간 종남산에서 사당을 짓고 살아야 한다는 가혹한 추가 조건과 함께.
왕중양 입장에서는 '''중원이 이민족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했는데 감히 사사로운 정을 중시해 임조영과 연을 맺을 수가 없다.''' 그런데 임조영과 겨루는 조건을 잘 뜯어보면 '''임조영이 이기면 사실상 동거하면서 알콩달콩을 하든지 본인이 고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4] 그래서 왕중양은 이기지도 지지도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정작 내기가 시작되자 임조영은 바위에 맨손가락으로 거침없이 글자를 새기는 신공으로 왕중양의 승복을 받아낸다. 그러나 고지식한 왕중양은 임조영과 알콩달콩하는 대신 '''약속대로 출가해서 도사가 되고 종남산에 거점을 차린다.''' 그리하여 왕중양을 개파조사로 하는 도가 문파인 전진교가 출범하게 된다.
나중에야 왕중양은 황약사에게 물어보아 임조영이 돌을 녹여서 부드럽게 하는 화석단(化石丹)을 몰래 바위에 문질렀기 때문에 손가락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을 안다.
임조영이 죽은 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러 고묘에 왔다가 옥녀심경이 남긴 흔적을 읽고 옥녀심경이 전진교의 모든 무공을 깨뜨린 것을 보게 된다. 그 길로 3년간 움막집을 짓고 산중에서 옥녀심경을 깨뜨릴 무공을 연구했지만,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옥녀심경과 같이 내외공을 아우르며 유연하게 이어지는 완성된 한 벌의 무학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고, 결국 임조영의 재주와 기지에 탄복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여 더이상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내는 것을 포기했다.
사조영웅전의 주인공인 곽정이 태어나기 전에 열린 제 1차 화산논검에서 동사(황약사), 서독(구양봉), 남제(단지흥), 북개(홍칠공) 등 나머지 네 사람보다 한 수 위의 무공을 선보이며 무공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등극, 구음진경을 차지했다.
천하제일인인 그가 소지하고 있었기에 감히 누구도 구음진경을 노릴 수 없었고, 구음진경을 쟁탈하기 위해 일었던 피바람도 끝을 보게 되었다. 그 자신은 사심이 없어 구음진경을 연마하지 않았지만, 또한 비록 무림의 불화꺼리가 되는 구음진경이라 해도 무림 선배의 심혈이 담긴 역작인 만큼 없애버릴 수도 없어서 지키고만 있었다. 다만 자신이 사사로운 뜻으로 구음진경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신의 문하에서는 어느 누구도 구음진경의 무공을 수련해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워낙 엄한 명령을 내린지라 주백통 이하 전진파 사람들은 왕중양이 구음진경을 연마하지 않았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지만, 실은 그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내용을 훑어보고(...) 10일간 명상하여 그 이치를 깨달았다. 그리고 활사인묘로 다시 들어가 고묘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지하 석실에 구음진경의 요지와 옥녀심경을 깰 수 있는 방법을 적어두었다.
왕중양은 이전에 들렀을 때 고묘 지하석실의 비어 있는 관을 보고, 장차 고묘파 제자들이 이 석실에 들어올 때는 관에 누울 때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러니 이곳에라도 전진교의 시조가 평생 누구에게 쳐발린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남겨 둔 것이다. 임조영의 제자들이 옥녀심경을 파해하는 내용을 읽을 때쯤이면 벌써 죽으려 내려온 길이기 때문에 그냥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고묘파의 제자들이 '우리 옥녀심경이 전진교 무공을 쳐발라 버렸는데 왕중양이란 놈도 별거 아니구나'라고 무시하는 마음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만년의 왕중양은 도가 수행도 깊었고 인격도 원만했다고 하는데, 굳이 이런 치졸한 뒤끝을 보여준 것은 자신의 젊은 시절과 임조영과의 추억, 회한이 어우러진 고묘였기에 젊은 시절의 자존심이 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사조영웅전의 왕중양은 거의 천하제일의 고수이자 영웅으로 추앙 어린 묘사만 이루어지는 반면, 신조협려에서 묘사되는 왕중양은 이런 옹졸한(...) 인간미 때문에 오히려 매력과 생동감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다만 왕중양이 생각하기에 옥녀심경은 임조영이 스스로 창안한 것이고, 자신은 옛 고수가 만든 구음진경을 읽고 무공을 빌려 옥녀심경을 제압한 것이니, 굳이 비교하자면 자신이 임조영보다 한 수 뒤쳐진 셈이었다. 그 이후로 왕중양은 제자들에게 자제심과 겸손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한편 단용석을 떨어뜨려도 고묘에서 나갈수 있는 비밀통로와 그 위치를 알려주는 석관 아래의 방의 천장에 그려져 있는 비밀지도의 존재는 임조영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목숨을 구할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사실을 임조영이 알면 비웃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은 후에 구양봉이 위협 거리가 될 것을 알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남제 단지흥을 찾아가 자신의 선천공을 전수하고 일양지를 전수받았다.[5] 하지만 이때 대리국으로 가면서 사제 주백통을 데려간 탓에 영고주백통 간의 정분이 생기게 되어 나중에 단지흥이 출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수명이 다되어 가자 구양봉이 구음진경을 빼앗기 위해 올 것을 알고, 관 속에 들어가 죽은 척을 하고 있다가 전진교의 본산을 침공한 구양봉을 격퇴하고 그의 합마공을 파쇄한 후 자신도 힘이 다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죽으면서 사제 주백통에게 구음진경의 상하권을 나눠서 각각 다른 곳에 숨기라는 유언을 남겼다.
빼어난 무공, 높은 인격과 도력(도가의 일파인 전진교의 창교조사이니 당연한 일), 의병을 이끌고 금나라의 남침에 대항한 애국심 등에 의해 죽어서도 추앙을 받으며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된 인물이다. 사조영웅전의 등장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주인공인 곽정이 장성하기도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사실 작중에 실제로 출연한 적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성이 하도 높다 보니 본 작품은 물론이고 속편인 신조협려에서까지 이름만큼은 뻔질나게 많이 나오는 기염을 토한다.
이래저래 뛰어난 인물이긴 한데 연애에 대해서는 둔감해서 한 아가씨 인생을 망친 듯 하다. 뭐 그 쪽도 츤데레 계열이긴 했지만.
선천공이라는 무공으로 유명한데, 정작 그걸 배운 사람은 단지흥. 전진교의 제자들이 선천공을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전진교의 왕중양 제자들은 실력이 낮은 편은 아니지만 스승의 명성에 비하면 좀 신통찮은 편이다. [6].
사실 김용은 넉넉한 환경 덕분에 고료에 구애받지 않고 지난 작품을 만족할 때까지 여러번 개작했는데, 이와 관련된 유명한 버그(…)도 훗날 수정했다. 구판을 번역한 고려원 영웅문에선 왕중양의 무공이 일양지이고 대리 단씨의 무공은 선천공으로 나오는데, 《천룡팔부》의 설정과 모순을 일으켜, 강룡십팔장 VS. 항룡십팔장과 더불어 김용빠에게 훌륭한 떡밥이 되었다. 신판을 번역한 김영사 영웅문에선 이런 오류를 바로잡았다.
비록 스스로 임조영의 자질에 미치지 못함을 인정했다 하나, 왕중양을 명백히 능가하는 고수가 당대에 없었음은 물론이고 그 자질 또한 천재적이었음에는 이견이 없다.[7] 주백통이 곽정과 처음 만날 당시 '도를 닦으려면 담백해야 하는데 무공을 수련하려면 격한 기운이 필요해서 두 가지를 겸비하기 어렵다'라고 설명하다가, 왕중양의 이야기를 하면서는 '그 양반은 원래 나처럼 아득바득 무예를 익힌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깨달은 것이다' 라고 정색을 한 일화에서 왕중양의 자질이 잘 드러난다. 즉 왕중양은 젊어서는 의병을 이끌기도 했고 임조영과 더불어 천하를 주유하며 무공을 닦기도 했지만 만년에는 전진파를 세울 만큼 도학에도 정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식의 다채로움에서는 황약사보다 한 수 아래일지 모르나 탁월한 재능은 황약사에게 결코 뒤진다고 하기 어려운 위인. 도학에 정통하면서도 천하제일인의 칭호를 획득한 것이야말로 그 증거라 하겠다.



[1] deuteron이 아니다. 표기는 동일하지만.[2] 당시 활사인묘 안에 틀어박혀 있던 왕중양에게 임조영이 활사인묘 입구에서 갖은 욕설을 퍼부어 모욕을 주다가, 결국 분을 못 이긴 왕중양이 뛰쳐나오자 ''''무덤에서 나왔으니 도로 들어갈 필요는 없겠죠?'''' 라며 빙긋 웃음지었다는 일화가 강호에 전해진다.[3] 왕중양의 심정은 '나라가 개발살나기 일보 직전인데 어떻게 내가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놀고먹냐'라는 것이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이가 없지만, 대의가 사적인 감정을 앞선다는 점을 무수히 강조한 당대의 기준에서는 영웅으로 불릴 만한 고결함에 속한다고 한다(...). 실제 영웅문 세계관 내에서도 곽정도 황용이 갓 곽양을 출산하려 할 때 우왕좌왕하다가 황용이 '양양성이 급합니까, 우리 가족이 급합니까' 라고 일침을 놓자 '대의가 우선이지!'라고 대오각성한 일화가 있다.[4] 활사인묘는 왕중양의 거처이므로, 임조영이 승리하고 거기에 들어와 살면서 왕중양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다는 것은 '''내가 이기면 나랑 겨론하는 거다 새끼야'''라는 뜻이다(...). 그걸 못 받아들이면 도사나 중이 되어 종남산에서 10년은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내가 이기면 나랑 겨론해 알콩달콩 살든지 그게 정 싫으면 출가해서 평생 고자하고 내 근처에 살아라'''라는 뜻이다(...). 왕중양이 이기면 임조영이 자결하겠다 했으니, 사실상 널 못 가지면 내가 죽을 것이고, 내것이 되지 않을거면 아무 여자의 것도 되지 말란 얘기.[5] 자신의 무공이 구양봉과는 상극이므로, 자신이 죽고 나면 구양봉이 발호할 것을 예상하여 단지흥에게 뒷일을 부탁한 것. 훗날 일등대사 역시 자신의 목숨으로 영고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곽정과 황용에게 선천공을 전수함으로써 뒷일을 부탁한다. 구양봉이 얼마나 대단한 자였는지, 또 얼마나 악한 인간이었는지 알 수 있는 장면.[6] 전진교 관련해서 가장 강한 인물은 주백통인데, 이쪽은 구음진경이 왕중양 덕분에 봉인되어서 전수 불가. 덕분에 신조협려만 되어도 전진교는 양과 성장 과정의 배경이되고, 의천도룡기 시기가 되면 등장하지도 않는다. 사실 육대문파 중 화산파가 전진교에 속하기는 하는데 문파로서의 전진교는 없고, 그나마 화산파도 쩌리로 나온지라.....[7] 신조협려에서의 묘사를 보면 왕중양이 석굴에 틀어박혔을 때는 임조영이 그를 능가했으나, 후일 임조영이 크게 병을 앓으면서 왕중양이 그녀를 다시 앞질렀다고 전해진다. 홍칠공, 황약사, 구양봉의 무공 수위가 수련의 정도도 다르고 놀고먹는 수준도 달랐음에도 대동소이했음을 감안한다면, 상대보다 빡세게 수련했다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임조영과 왕중양의 자질이 그들보다 결코 아래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