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 협주곡

 

1. 개요
2. 대표 작품


1. 개요


cello concerto, 첼로 協奏曲.
첼로 협주곡은 독주의 첼로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이다.
첼로 협주곡은 역사 자체는 오래되어서, 바로크 시절부터 작곡되어 왔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유아독존 했던 바이올린과는 다르게 첼로는 '비올'이라는 당시 유행했던 악기와 경쟁을 해야 했다. 또한 엔드핀이 개량되기 전에는 연주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편했고, 그 때문에 악기의 테크닉적인 면도 발달이 더뎠다. (*바로크 첼로의 연주법[* 사진의 주인공은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본 "미누에토"의 작곡가 루이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 1743 - 1805)이다.] 요요마가 바로크 첼로를 이용해서 연주한 녹음이 있는데 그 때 요요마는 마치 말등에 올라탄 것 같았다고 회상했었다.)그 결과, 19세기 이전에는 비발디, 하이든, 바흐[1], 보케리니 등이 작곡한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중요 작품이 거의 없었다.
독주 악기로서 첼로가 제대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엔드핀이 첼로에 장착되면서 연주자들의 기량이 매우 빠르게 발전한 낭만파 시대부터다. 이후 슈만, 생상스, 드보르작등 많은 작곡가들이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게 되고, 현대 작곡가에게는 첼로가 표준적인 협주곡 악기가 되었다.
작곡가들이 첼로 협주곡을 쓸 때 신경쓰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첼로 소리가 관현악 연주에 묻혀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높은 음역으로 인해 관현악에 묻히지 않고 잘 들리는 바이올린과는 달리, 첼로는 음역이 낮아서 거의 독주 상태가 아니면 묻히기 쉽다. 때문에 첼로가 낮은 음역에서 연주 중일 때는 관현악의 연주를 축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특징을 잘 살린 첼로 협주곡이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다.

2. 대표 작품


가장 유명한 첼로 협주곡으로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B단조를 들 수 있다. 1894년 말~1895년 초에 드보르작이 미국이 머물던 동안에 작곡된 것이며, 드보르작의 마지막 협주곡이다. 그의 교향곡 '신세계로부터'와 마찬가지로 미국 민속 음악에 슬라브 정서가 가미된 첼로 협주곡의 명곡이다. 브람스는 이 곡을 듣고는 "내가 저런 첼로 협주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내가 진작에 작곡했을 텐데!"라고 한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제2번 D장조와 슈만의 첼로 협주곡 A단조 역시 유명하다.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제 2번의 경우 하이든의 자필악보가 발견되기 전까지 위작 논란이 끊이질 않았는데 그 이유가 당시의 첼로 협주곡들에 비해서 너무 어려운 테크닉들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슈만 첼로 협주곡 역시 당시 연주자들에게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해서 생전에 연주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곡이 슈만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작곡 초기에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 곡이었다고 하는데 엘가가 평소에 작곡했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르게 곡 전체가 우울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많은 첼리스트들의 명연이 쏟아져 나오면서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19살의 신예 첼리스트였던 자클린느 뒤 프레의 연주가 EMI에서 발매되면서 이 곡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자클린느 뒤 프레의 녹음은 그 명성만큼이나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은 편이다. 첫번째로는 1,2악장의 녹음 세션을 마치고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는데 끝나고 보나 사람들이 꽤 모여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연주가 너무 훌륭했고 이것이 쉬는시간 동안 순식간에 소문으로 퍼져서 사람들이 모였던 것. 이후 3,4악장은 마치 실황 녹음처럼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두번째는 녹음이 모두 끝나고 뒤 프레가 자신이 연주한 녹음을 들었는데 자기가 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는 것에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세번째로는 이 음반을 들은 러시아의 거장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는 자신은 이 소녀보다 이 곡을 더 잘 연주할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 이 곡을 레퍼토리에서 삭제했다고 한다.[2] 마지막으로는 이 곡의 쓸쓸한 분위기만큼이나 그녀도 갑작스럽게 신경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서 사망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1] 우리가 아는 그 바흐의 둘째 아들이다.[2] 1965년에 이 말을 했는데, 그 이전에 로제스트벤스키/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나탄 라킨/모스크바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의 실황연주들이 있으며, 이례적으로 1968년 로제스트벤스키/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의 카네기홀 마라톤에서 이 곡의 연주기록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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