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Carl Philipp Emanuel Bach'''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이후
3. 주요 작품들
4. 작품 성향
5. 후대에 끼친 영향
6. 가족 관계
7.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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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루트 협주곡 Wq.166 1악장.

▲ 플루트 소나타 "함부르크", Wq.133. 연주는 Eckhart Duo.

1. 개요


독일의 작곡가, 건반 악기 연주가, 음악교육가(1714년 3월 8일~1788년 12월 14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첫 아내였던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와의 사이에서 낳은 차남으로, 주요 활동지에 착안해 '베를린의 바흐' 또는 '함부르크의 바흐'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2. 생애



2.1. 초기


바이마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바흐의 임지가 쾨텐과 라이프치히로 차례로 옮겨감에 따라 같이 이주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1723년부터 아버지가 칸토어(교회음악 악장)로 봉직하고 있던 장크트 토마스 교회의 부속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했고, 졸업 후인 1731년부터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와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의 피아드리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카를이 법학을 전공한것은 아버지 바흐가 아들들에게 "음악가로서 왕족과 귀족에게 하인 취급을 받지않으려면 학식을 갖추어야한다"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1]
1738년에 일단 졸업을 했지만, 이미 173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쳄발로건반 악기의 연주와 작곡 활동에서 더 적성을 찾았는지 법학을 포기하고 음악가로 진로를 바꾸었다. 첫 직장은 진로 결정 후 몇 달 뒤에 잡았던 프로이센의 궁정 악단 객원 단원직이었고, 2년 뒤인 1740년에는 당시 왕세자였던 프리드리히가 프리드리히 2세로 왕위를 계승하면서 정단원으로 승진했다.
이 시기 동안 플루트를 수준급으로 연주하고 직접 작곡도 하는 왕을 위해 여러 편의 플루트 소나타협주곡을 써서 진상하기도 했고, 자신의 장기였던 건반 악기를 위한 소나타와 독주곡들도 여럿 작곡해 발표했다. 이 공로로 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해 1746년에는 실내악 단원으로 추가 승급되었고, 칸타타 등 종교음악 영역에서도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1744년 부유한 포도주상의 딸이었던 요한나 마리아(Johanna Maria, 1724~1795)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특히 1748년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2세라고 지었다. 당시 진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도 참석하면 좋았겠지만 사정상으로 참석하지는 못한다.

2.2. 이후


작곡과 연주 활동 외에는 특히 자신의 장기였던 건반 악기 연주 실력을 살려 1752년에 '올바른 클라비어 연주법에 대한 시론(Versuch über die wahre Art das Clavier zu spielen)'이라는 교본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교본은 바흐 생전에만 해도 3판까지 발행될 정도로 굉장한 수요를 자랑했고, 심지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베토벤도 건반 악기 연주와 작곡법을 이 교본에서 많이 참고했으며 에마누엘 바흐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바흐와 프리드리히 2세 사이의 관계는 늘 원만하고 친근하지만은 않았다. 바흐가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하고 자신의 개성을 작곡에서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취향 문제로 종종 논쟁이 빚어졌다. 왕은 후기 바로크와 초기 고전의 연장선상에서 비교적 고상하고 우아한 음악을 추구했지만, 바흐는 보다 작곡자 자신의 감성에 충실한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럭셔리한 왕 취미 맞춰주기가 지긋지긋했는지는 모르지만, 1768년에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의 후임으로 함부르크의 칸토르가 되었다. 이 시기를 대개 후기 활동기로 보며, 아버지가 라이프치히 시절 그랬듯이 여러 편의 수난곡이나 종교 칸타타, 모테트, 리타나이(연도) 등 종교음악의 창작에 주력했다.
물론 기악곡 쪽에서도 당시 떠오르던 후배 하이든의 활동상에 자극받아 여러 편의 신포니아(교향곡)를 비롯한 작품들을 내놓기도 했다. 1788년에 함부르크에서 타계했으며, 유해는 장크트 미하엘 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들


현존작, 소실작, 의심작까지 합쳐 800여 곡에 이르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의 작품 분류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1905년에 가장 먼저 체계적인 분류 작업을 완료한 벨기에의 음악학자 알프레드 보트퀴엔느(Alfred Wotquenne)의 성을 약어로 한 Wq 번호와 1989년에 두 번째로 재분류한 유진 헬름(Eugene Helm)의 성을 약어로 한 H 번호 두 가지가 혼용되고 있다.
종래에는 보트퀴엔느 번호가 많이 쓰였지만, 1990년대 들어 헬름 번호와 혼용하거나 헬름 번호만으로 분류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 관현악곡
    • 관현악을 위한 4곡의 신포니아 (통칭 '베를린 신포니아'. Wq 174, 175, 179, 181, H 649, 650, 654, 656)
    • 현악 합주를 위한 6곡의 신포니아 (통칭 '함부르크 신포니아'. Wq 182, H 657~662)
    • 관현악을 위한 4곡의 신포니아 (Wq 183, H 663~666)
  • 협주곡
    • 쳄발로 협주곡 C장조 (Wq 20, H 423)
    • 쳄발로 협주곡 D단조 (Wq 22, H 425)
    • 쳄발로 협주곡 G장조 (Wq 44, H 477)
    • 쳄발로 협주곡 D장조 (Wq 45, H 478)
    • 첼로 협주곡 A단조 (Wq 170, H 432)
    • 첼로 협주곡 A장조 (Wq 172, H 439)
    • 플루트 협주곡 A장조 (Wq 168, H 438)
    • 플루트 협주곡 G장조 (Wq 169, H 445)
    • 오보에 협주곡 B플랫장조 (Wq 164, H 466)
    • 오보에 협주곡 E플랫장조 (Wq 165, H 468)
  • 실내악
    •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위한 2중주 E단조 (Wq 140, H 598)
    • 플루트,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위한 3중주 B단조 (Wq 143, H 567)
    • 플루트,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위한 3중주 C장조 (Wq 147, H 571)
  • 소나타
    • 6곡의 쳄발로 소나타 (Wq 63, H 70~75)
    • 두 대의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위한 트리오 소나타 B플랫장조 (Wq 158, H 584)
    • 두 대의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위한 트리오 소나타 C단조 (Wq 161-1, H 579)
    • 비올라 다 감바 소나타 D장조 (Wq 137, H 559)
    • 5곡의 플루트 소나타 (Wq 83~87, H 505, 506, 508, 509, 515)
    • 플루트 소나타 G장조 (통칭 '함부르크 소나타'. Wq 133, H 564)
  • 성악곡
    • 칸타타 '필리스와 티르시스' (Wq 232)
    • 마태수난곡 (Wq 234)
    • 오라토리오 '황야의 이스라엘' (Wq 238)
    • 오라토리오 '예수의 부활과 승천' (Wq 240)

4. 작품 성향


흔히 '감정적인 양식(Empfindsamer Stil)'이라는 용어로 분류되는 것이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의 작품 성향인데,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고 아버지나 텔레만 등을 비롯한 동시대 선배들의 강한 영향권 밑에 있다가 을 먹어가면서 점차 본능에 충실한 작곡 양상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프로이센 왕과 마찰이 심해진 베를린 시대의 후반기와 함부르크 시대에 이런 경향이 전면적으로 나타나는데, 몇몇 보수적인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저 양반이 뭘 잘못 드셨나?"라고 수군댔을 정도로 당돌한 면모까지 나타난다.
가령 '함부르크 신포니아'는 초기 교향곡의 빠름-느림-빠름 3악장제를 채택하고는 있지만, 모든 곡이 전부 개별 악장으로 딱딱 끊기는 것이 아니라 중단없이 이어지기도 하고 흐름이 갑자기 끊기고 다음 악장으로 바로 넘어가는 등, 당대 작품 치고는 꽤 드라마틱하고 변덕이 죽끓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평생을 연주하고 작곡하며 탐구했던 건반 악기 영역에서도 이러한 양식 변화가 상당히 잘 나타나 있는데, 아버지 바흐와는 달리 전문가 뿐 아니라 일반 애호가들에게도 비교적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좀 더 선율적이고 간결한 양식을 추구하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바로크에서 고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상징하는 작곡가이자, 그보다 훨씬 뒤인 낭만 시대를 향한 암시까지 주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인물은 아니다.

5. 후대에 끼친 영향


아버지였던 바흐를 매우 존경하여서 그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악보는 대부분 남아있고, 무엇보다 포르켈과의 편지로 최초의 바흐 전기가 나올 수 있게 도와준 것도 에마누엘 바흐의 공헌이다.
건반 악기 교본은 19세기 중반까지도 피아니스트 혹은 여타 건반 악기 연주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될 정도였는데, 모차르트는 "그는 아버지이며, 우리는 (그의) 아이들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모차르트의 초기 피아노 독주곡이나 소나타, 협주곡에서는 바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몇몇 곡은 아예 바흐 작품을 편작한 것도 있다.
모차르트보다 24년 가량 선배였던 하이든도 건반 악기 독주곡이나 협주곡을 쓸 때 바흐의 작품을 많이 참고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하이든의 제자였던 베토벤도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해 경애해야 한다고 단언할 정도로 바흐를 존경했다. 하지만 바흐가 어느 정도 단초를 제공해 주었던 낭만 시대에 가서는 그냥 고리타분한 올드비 정도로 폄하되기도 했는데, 슈만은 "창조적인 음악가로서는 아버지의 한참 뒤에나 위치해 있다"고 깠다.[2] 반면 슈만의 후배였던 브람스는 베토벤만큼은 아니어도 바흐의 개성과 작품성을 인정했으며, 몇몇 곡은 자신이 직접 편집을 맡아 새로운 악보로 간행하기도 했다. 이후 20세기 초반 들어 보트퀴엔느를 비롯한 음악학자들이 바흐의 자필보나 필사보 등 자료에 의거해 작품들을 연대별/장르별로 재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전집 출판 계획도 세워졌다.
하지만 양차 세계대전 때문에 이 작업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고, 특히 후기 종교음악 작품들의 귀중한 고악보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던 함부르크가 2차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개발살나면서 수많은 작품들이 연구나 재간행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소실되고 말았다.
그나마 2005년에 영국의 저명한 고음악 연구가이자 건반 악기 연주자, 지휘자인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감수를 맡아 전집 악보 출판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2014년에 완간할 목표로 계속 편집과 출판이 진행되고 있다.
동독 시절에는 아버지 바흐와 함께 국보급 예술인으로 평가되어 대대적인 연구와 연주, 보급이 이루어진 작곡가이기도 했는데, 이는 통일 후에도 큰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 동베를린이었던 미테 지구에 1956년 설립된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음악 김나지움'은 지금까지 음악학도들을 배출하고 있고, 바흐가 법학 공부를 했던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에는 장크트 프란체스카 수도원 교회를 1966~75년에 걸쳐 600여 석 규모의 중형 콘서트홀로 개축한 '콘체르트할레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있다.

6. 가족 관계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1744년에 요한나 마리아 다네만과 결혼했는데, 아버지처럼 아이를 많이 남기기는 했지만 대부분 일찍 죽어버린 탓에 장남 요한 아담 바흐, 장녀 안나 카롤리나 필리피나, 차남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2세 셋 만이 그나마 성인 때까지 살아남았다. 하지만 대대로 음악가를 배출한 바흐 집안의 명맥은 이 때부터 끊기기 시작했고, 자식들 중 바흐 2세는 화가를 지망해 이탈리아에서 유학 도중 병에 걸려 겨우 서른 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7. 그 외


  • 지금이야 평가가 역전되었지만, 생전에는 아버지 바흐의 명성을 버로우시키고 남을 정도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비교하는 여론이 나올 때마다 오히려 '아버지가 지도해 주지 않으셨다면 이 위치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라면서 자발적인 콩라인 선언을 하곤 했다.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왼손잡이였는데, 그 때문에 왼손으로 지판을 짚고 오른손으로 활을 켜는 찰현악기 연주에는 영 젬병이었다고 한다. 그 대신 양손을 고르게 쓸 수 있는 건반 악기 연주에 몰두했다고 하는데, 당대 작곡가로서는 최신 악기였던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나 논문을 남기는 등 건반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본좌 위치를 확고히 했다.

[1] 아버지 바흐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라이프치히 칸토르 시험 때 상당한 차별을 받기도 했다. 또 친구였던 게오르크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비싼 물가와 적은 급여에서 라이프치히를 떠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자식들 대학'을 들고 있다.[2] 물론 이런 평가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슈만 본인이 아버지 바흐의 재발견자인 동시에 어마어마한 바흐빠(...)였던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