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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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카타리나 도로테아 바흐 (1708-1774)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1710-1784)
'''딸''' 마리아 소피아 바흐 (1713)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713)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1714-1788)
'''아들''' 요한 고트프리드 베른하르트 바흐 (1715-1739)
'''아들''' 레오폴드 아우구스투스 바흐 (1718-1719)
'''딸''' 크리스티아나 소피아 바흐 (1723-1726)
'''아들''' 고트프리드 하인리히 바흐 (1724-1763)
'''아들''' 크리스찬 고틀립 바흐 (1725-1728)
'''딸''' 엘리자벳 줄리아나 프리데리카 바흐 (1726-1781)
'''아들''' 어니스터스 안드레 바흐 (1727)
'''딸''' 레지나 요한 바흐 (1728-1733)
'''딸''' 크리스티아나 베네딕타 루이스 바흐 (1729-1730)
'''딸''' 크리스티아나 도로시아 바흐 (1731-1732)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1732-1795)
'''아들''' 요한 어거스트 아브라함 바흐 (1733)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1735-1782)
'''딸''' 요한나 카롤리나 바흐 (1737-1781)
'''딸''' 레지나 수잔나 바흐 (1742-1809)
'''11남 9녀''' }}} ||}}}}}}}}} ||







'''역대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칸토르'''
요한 쿠나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고트롭 하러

}}}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Johann Sebastian Bach'''
''' 본명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1]
''' 출생 '''
1685년 3월 21일
[image]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아이제나흐 공국 아이제나흐
''' 사망 '''
1750년 7월 28일 (향년 65년 129일)
[image]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라이프치히
''' 직업 '''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쳄발리스트
''' 직위 '''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칸토르
1723년 5월 ~ 1750년 7월 28일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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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카타리나 도로테아 바흐 (1708-1774)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1710-1784)
'''딸''' 마리아 소피아 바흐 (1713)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713)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1714-1788)
'''아들''' 요한 고트프리드 베른하르트 바흐 (1715-1739)
'''아들''' 레오폴드 아우구스투스 바흐 (1718-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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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고트프리드 하인리히 바흐 (1724-1763)
'''아들''' 크리스찬 고틀립 바흐 (1725-1728)
'''딸''' 엘리자벳 줄리아나 프리데리카 바흐 (1726-1781)
'''아들''' 어니스터스 안드레 바흐 (1727)
'''딸''' 레지나 요한 바흐 (1728-1733)
'''딸''' 크리스티아나 베네딕타 루이스 바흐 (1729-1730)
'''딸''' 크리스티아나 도로시아 바흐 (1731-1732)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1732-1795)
'''아들''' 요한 어거스트 아브라함 바흐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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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인 '''
[image][2]
''' 묘소 '''
독일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 장례일 '''
1750년 7월 31일
''' 사조 '''
바로크 음악
''' 루터교
성인달력 '''

7월 28일
''' 활동 기간 '''
1703년 – 1750년
''' 혈통 '''
독일인
''' 종교 '''
개신교(루터교회)
''' 신체 '''
180cm
''' 학력 '''
성 미카엘 스쿨 (졸업)
''' 부모 '''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 (1645-1695)
'''어머니''' 마리아 엘리자베스 렘버히르트 (1644-1694)
''' 배우자 '''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1707년 결혼 -1720년; 사별)
안나 막달레나 바흐 (1721년 결혼)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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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후대의 재발견
4. 가족 관계
4.1. 자녀들
4.2. 두 아내
4.2.1. 전처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4.2.2. 후처 안나 막달레나 바흐
5. 특징
5.1. 오르간
5.2.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어
5.5. 그 외
6. 주요 작품
6.2. 성악곡/교회음악(BWV 1-524)
6.3. 건반음악(BWV 525-994)
6.4. 독주악기 음악(BWV 995-1013)
6.5. 실내악/관현악(BWV 1014-1071)
6.6. 대위법 실험 작품(BWV 1072-1080)
7. 평가
7.1. 오르가니스트로서의 평가
7.2. 후대의 평가
8. 이름에 대해
9. 여담
10. 관련 문서
11.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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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태생의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다.
그는 모차르트, 베토벤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음악적 업적을 이룩한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3] 그는 서양 음악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베토벤은 바흐를 가리켜 "그는 Bach(실개천)가 아니라 Meer(바다)라고 불려야 한다(Nicht Bach, sondern Meer sollte er heißen)."라는 표현을 남기기도 하였다.[4]

2. 생애



''' BBC의 바흐 다큐멘터리 '''


3. 후대의 재발견


지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칭송받는 바흐이지만 막상 죽은 직후에는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고 그의 음악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며 사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음악인들에 한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흐 사후 그의 아들들(특히 C. P. E. 바흐)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바흐 음악을 출판하고 보급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이 노력들은 바흐 사후에 그의 음악이 알려지고 전수되는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바흐는 바로 다음세대인 고전파의 작곡가들에게도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에 나타나는 대위법과 합창법 등의 작곡기법들은 상당부분 바흐(와 헨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모차르트는 일찍이 10대 시절부터 잘츠부르크에서 종교음악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요한 에른스트 에벌린, 미하엘 하이든, 요한 아돌프 하세,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대위법과 합창법의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5], 20대 중반에 빈으로 이주하고 반 슈비텐 남작을 통해 바흐와 헨델의 작품을 접한 이후 아버지 레오폴드에게 에벌린의 대위법 수준을 바흐, 헨델과 비교하며 까는 내용의 편지를 쓴 일화가 있다.[6]
바흐의 음악이 잊혀졌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18세기 동안 대중적으로 바흐의 음악이 그다지 많이 안알려지고 연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녹음기술로 음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시대도 아니고, 또 음악학자들이라면 모를까 당대에는 굳이 옛날에 작곡된 누군가의 곡을 찾아서 연주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베토벤도 자기 교향곡을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몇번 듣지 못하는 시대이다). 오늘날처럼 몇십년 혹은 몇백년 전의 곡이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다루어지는 현상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야 시작된 것이다. 그 전에는, 특히 기악에서는 마을 악단 수준이 아닌 바에야 대중을 위한 기악 연주회 자체도 찾기 어려웠고, 기악 악단은 왕실 행사나 귀족들의 여흥을 위해 왕실이나 귀족이 직접 거느린 악단이 대부분으로 이런 악단은 보통 전속 작곡가(요제프 하이든이 대표적)가 있어 필요할 때 곡을 작곡해서 한 두번 연주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낭만주의 시대에 오기 전까지는 다시 연주되는 일이 적었다. 왕후와 귀족들은 다른 이에게 부탁해 전대의 명곡을 빌려오기보다 필요할 때 자기만의 음악을 주문했고 그것으로 그 시대의 작곡가도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유행이라는 것도 있다. 지금 뮤지션들은 60~80년대의 명곡을 연주하며 먹고 살기보다 자기만의 음악을 내놓는다. 21세기 시점에서 서양고전음악은 그 자체가 통째로 박제되어 100년 숙성된 위스키처럼 대접받고 있지만, 서양에서도 반 세기 전 팝을 지금 라디오에서 리메이크, 리바이벌로 듣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바흐의 음악은 작곡가나 악보 수집가, 출판업자 등 주로 음악 종사자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또한 1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고전주의 양식이 대세가 되면서 바로크 음악은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바흐뿐만 아니라 모든 바로크 작곡가들이 한동안 비슷하게 홀대를 받았으며, 헨델의 메시아를 비롯한 극소수의 바로크 음악만이 시대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바흐는 동시대에 살았던 비발디, 텔레만, 라모,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등의 작곡가에 비하면 일찍 복권이 된 편이다. 20세기가 될 때까지 바흐와 헨델을 제외한 대부분의 바로크 작곡가들은 대중들에게 거의 잊혀지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7]
바흐가 다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Johann Nikolaus Forkel)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 1802)』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이 책 덕분에 그의 사후 50여년 만에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이 몰아닥쳤으며 대중들의 바흐에 대한 재인식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1827년 베토벤 사망 시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작성한 추도문을 보면 베토벤 이전의 위대한 음악가로 헨델,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가 언급된다.[8] 당시 이미 바흐가 음악 사상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여기저기 흩어졌던 바흐의 악보가 다시 수집되고 앞다퉈 출판되었으며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 열렬한 바흐 팬이자 바흐 음악의 복원자였던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을 복원하면서 다시 한번 바흐 열풍을 일으켰다.
[image]
성 토마스 교회에서는 바흐의 스테인드글라스 옆쪽에 멘델스존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여 그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바흐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는 평가를 듣는 위치에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바흐가 작곡한 많은 음악들이 분실되었거나 불완전하게 복원되어 있으며 종종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바흐의 악보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1889년 첼로의 거장인 파블로 카잘스가 발굴한 것이며[9] BWV 1090-1120 번호가 붙은 31곡의 뉴마이스터 오르간 코랄(Neumeister Chorales)은 1985년 예일대학교 고서적 장서관에서 악보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작곡가들의 음악 발굴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또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바흐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며 알베르트 슈바이처, 아드레 피로 등이 20세기 초엽의 바흐연구에 크나큰 영향을 남겼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바흐 연구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1954년경에는 '신 바흐 전집'의 간행이 시작되었고, 그와 아울러 기본적인 자료의 재검토가 시행된 결과 현재까지도 바흐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4. 가족 관계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바흐 집안은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루터교회 정통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또 자기의 일에 강한 장인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또한 바흐 자신도 이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는지 1735년에 직접 <바흐 가문의 계보>라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원본이 남아있지는 않고, 차남 엠마누엘의 딸이 가지고 있던 사본이 남아있다. 바흐가 직접 남긴 몇 안되는 글 중 하나일 뿐더러 바흐 가문의 사람들을 자세히 알 수 있기에 귀중한 자료이다.
바흐 집안이 음악가 집안이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외에도 음악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큰할아버지인 하인리히 바흐, 삼촌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와 요한 미하엘 바흐의 작품도 J. S. 바흐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연주되고 있는 편.
J. S. 바흐의 아들 중에서는 아버지의 명성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없지만 삼남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그나마 유명한 편이다. 장남 빌헬름 프리드만 바흐와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런던의 바흐라고 불린 막내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도 고전파 초기에 이름을 떨친 음악가들이다. 다만 앞시대에는 아버지 J. S. 바흐와 헨델이 버티고 있고, 뒤에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대기하고 있어서 묻혀버린 감이 있다.[10]

4.1. 자녀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아내 마리아 바바라(m. 1707–1720), 안나 막달레나(m. 1721–1750)와 함께 평생 동안 20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의 첫 번째 아이는 바흐가 23세였던 1708년에 태어났으며, 작곡가가 57세였던 1742년에 마지막으로 딸이 세상에 나왔다. 10명만이 성인되어서도 살아남았다. 바흐 가문은 항상 악기로 가득 찬 집을 가진 음악가 집안이었고 요한 제바스티안은 항상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 곡을 작곡하는 데 열심이었다. 바흐는 아들바보, 딸바보였으며 교육열도 대단해서, 친구에게 “아무래도 쾨텐 궁정악장 자리를 그만두고 라이프치히로 가야겠어. 라이프치히 대학을 목표로 아들 녀석 공부를 시켜야겠으니” 하고 말할 정도였다.[11] 실제로 바흐의 첫째와 둘째 아들은 당시 명문 대학인 라이프치히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바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음악가로써 귀족, 왕족들에게 하인 취급받지 않으려면 학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바흐는 자식들의 음악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정기적으로 가정음악회를 열어 음악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그의 장남이 10살이 되던 1720년에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소품집’을 작곡하여 그의 아들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교육을 위해 작곡된 것이었다. 그의 가문이 200년간 약 60여 명의 작곡자를 배출한 뛰어난 음악가문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자식들 중에는 걸출한 인물이 3명이나 있다.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F.Friedemann Bach·1710∼1784)’와 특히 둘째 ‘칼 필립 에마뉴엘 바흐(C.P.E Bach·1714∼1788)’는 전고전주의 양식을 이끈 감정과 다양식의 대가였으며 가장 유명했던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Christian Bach·1735∼1782)’는 런던 바흐라고도 불리며 그의 부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재조명되기 전에는 당시 ‘바흐’라고 하면 차남 엠마누엘과 동시에 이 인물이 지칭될 만큼 아버지 보다 더 유명한 작곡가였으며 모차르트와의 우정이 매우 깊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8살 모차르트는 크리스티안에게서 작곡법을 배웠으며, 건반 앞에서 크리스티안의 무릎 위에 앉아 그와 함께 연탄곡을 연주한 적도 있다. 크리스티안은 모차르트처럼 돈은 그럭저럭 벌었지만 관리엔 능하지 못했는 듯 하다. 비서가 돈을 몽땅 횡령하고 튀는 바람에 말년에 가난과 빚더미에 시달리다가 47살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음악계의 커다란 손실"이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12]

  • 장녀 카타리나 도로테아 바흐 (1708-1774)
바흐의 첫 아이. 작곡은 그 당시 여성들에게는 선택사항이 아니었지만, 카타리나는 가수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종종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곡가 되었다. 문서 참조.
  • 차녀 마리아 소피아 바흐 (1713), 차남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713)
바흐의 셋째와 넷째 자녀인 쌍둥이는 바흐가 28세였던 1713년 2월 23일에 태어났다. 요한 크리스토프는 태어난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죽었고, 마리아는 몇 주 후인 1713년 3월 13일경에 죽었다.
바흐의 자식중 가장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작곡가였다. 모차르트는 C.P.E. 바흐에 대해 "그는 아버지고 우리는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문서 참고.
  • 4남 요한 고트프리드 베른하르트 바흐 (1715-1739)
1715년 5월 11일에 태어났으며, 형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문 음악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대학에 갈 기회가 없었고,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비밀리에 음악 활동을 포기했다. 그는 24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 5남 레오폴드 아우구스투스 바흐 (1718-1719)
11월 15일에 태어난 바흐의 7번째 아이는 짧은 10개월 동안 살았고, 1719년 9월 29일에 묻혔다. 그의 대부인 왕자가 레오폴드라고 이름지었고, 1717년에서 1723년 사이에 바흐를 카펠마이스터로 고용했다.
  • 3녀 크리스티아나 소피아 바흐 (1723-1726)
바흐의 아내 마리아 바바라가 죽은 후, 그는 안나 막달레나 윌케와 결혼했다. 그들의 첫째 딸은 1723년에 태어났고, 같은 해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토마스칸토르가 되기 위한 계약을 맺었다. 크리스티아나는 3년 후에 죽었다.
  • 6남 고트프리드 하인리히 바흐 (1724-1763)
고트프리트는 어떤 면에서는 약간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 징후는 어릴 때부터 포착됐다. 다행히 그에게는 많은 형제자매가 있었고 그를 보살펴줬다. 그의 형 C.P.E. 바흐는 그의 동생이 '발달하지 못한 위대한 천재'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 7남 크리스찬 고틀립 바흐 (1725-1728)
비극적으로 단명했던 크리스천 고틀립은 겨우 3년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1728년 9월 21일에 죽었다.
  • 4녀 엘리자벳 줄리아나 프리데리카 바흐 (1726-1781)
1726년은 바흐 가문의 기쁨과 비극의 해로,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지 2달 만에 언니 크리스티아나가 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고, 아버지의 제자 중 한 명인 독일의 오르가니스트 요한 크리스토프 알트니콜과 결혼했다.
  • 8남 어니스터스 안드레 바흐 (1727)
  • 5녀 레지나 요한 바흐 (1728-1733)
  • 6녀 크리스티아나 베네딕타 루이스 바흐 (1729-1730)
  • 7녀 크리스티아나 도로테아 바흐 (1731-1732)
어린 시절에 죽은 이 4명의 자녀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 9남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1732-1795)
그는 6월 21일 태어났다. 바흐의 삼촌과 바흐의 큰형도 모두 요한 크리스토프라고 불렀다. 덜 혼란스러운 것은, 그가 전문적으로 하프시코드를 연주했던 로어 작센의 한 마을의 이름을 따서 '뷔케부르크 바흐'라고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이전의 많은 바흐 형제들처럼, 그는 이탈리아 음악의 유행에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을 쓴 고전 작곡가였다. 그는 런던을 방문하여 몇 편의 작품을 출판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의 음악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장남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바흐(1759년–1845년)는 J.S. 바흐의 외손자로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윌리엄 2세의 음악 감독이었다.

  • 10남 요한 아우구스트 아브라함 바흐 (1733)
어린 요한 아우구스트는 11월 5일 세례 후 하루 후에 사망했다.
'영국 바흐'로 알려진 J.C. 바흐는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샬롯 여왕의 봉사로 런던에 정착하여 별명이 '런던 바흐'이다. 그는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가 되었고, 모차르트의 협주곡에 영향을 주었다. 문서 참고.
  • 8녀 요한나 카롤리나 바흐 (1737-1781)
  • 9녀 레지나 수잔나 바흐 (1742-1809)
바흐의 19번째와 20번째 아이들, 두 딸 모두 결혼하지는 않았다. 요한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레지나는 베토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심지어 베토벤에게 기부할 교향곡 3번의 시사회 수익금까지 요구했다. 그녀의 유명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수집품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난하게 죽었다.

4.2. 두 아내



4.2.1. 전처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Maria Barbara Bach, 1684-1720)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6촌 관계이며 바흐보다 1살 위이다. 게렌(Gehren)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조실부모하고 아른스타트의 친척 집에서 성장하였다.
마리아가 바흐를 만난 것은 19살때인 1703년으로 당시 바흐는 이 해 8월에 막 아른스타트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와졌으며, 마리아는 바흐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앞서 생애편에서 아른스타트 교회에 취직한 바흐가 금녀의 구역이었던 성가대석에 여성을 데려가서 욕을 먹은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 문제의 여성이 바로 이 마리아 바르바라이다.
아른스타트에서 사사건건 교회측과 싸우면서 직업에 적응을 못했던 바흐는 4년 뒤인 1707년에 근무 조건이 훨씬 좋은 뮐하우젠으로 이직하면서 마리아를 같이 데려갔으며 뮐하우젠에 정착한 직후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상당히 행복했으며 쌍둥이를 포함 7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4명만 유년기를 넘겨 생존하였다.
마리아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성으로, 결혼생활 내내 그 다혈질의 바흐와도 별로 부딪치지 않았을 정도로 유순하고 생활을 잘 꾸려나갔던 진정한 내조의 여왕이었다. 바이마르를 거쳐 1718년 쾨텐으로 옮긴 바흐 부부는 이제 행복을 즐길 일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행복한 결혼생활은 쾨텐에 온지 2년만인 1720년에 갑작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1720년 5월 바흐는 자신의 고용주인 레오폴트공이 칼스바드(Karlsbad)에 있는 온천에 휴가차 여행을 갈 때 동행했으며 2달 후에 쾨텐으로 복귀하였는데, 바흐는 집에 도착할 때쯤 아내 마리아가 급사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황급하게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장례식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그녀가 36살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마리아는 평소에 지병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남편이 업무차 여행을 떠날 때까지도 특별히 이상한 징후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문부호가 붙어 있다. 대체로 바흐 연구자들은 마리아가 전염병이나 식중독과 같은 급성 질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간 아내와 행복하게 지냈으며 아내 덕분에 집안의 대소사를 잊고 음악 업무에만 신경썼던 바흐로서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사후 엉망이 되어 버린 집안일을 정리하고 아직 한참 어렸던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바흐는 17개월 후에 새로운 아내를 얻는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되는 내용 참조.
한편으로 몇몇 바흐 연구가는 그 유명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d단조의 5악장 샤콘느가 바로 이 마리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작곡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아직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4.2.2. 후처 안나 막달레나 바흐


안나 막달레나 바흐(Anna Magdalena Bach, 1701– 1760)의 본명은 안나 막달레나 빌케(Anna Magdalena Wilcke)로 아버지는 금관악기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오르가니스트의 딸이었다. 어렸을 때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언젠가부터 성악교육을 받고 가수가 되었으며, 1721년 초에 쾨텐 궁정에 취직하면서 바흐와 인연을 맺었다.[13] 당시 아내를 잃고 상심하고 있던 바흐는 막달레나와 금세 가까와졌으며 16살차이의 두 사람은 1721년 12월 3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막달레나 바흐는 바흐의 첫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못지 않게 내조에 충실하였으며 결혼 후에도 어느 시기까지는 가수로 계속 활동하였다. 외적으로는 이런저런 풍파에 시달렸던 바흐지만 가정생활만큼은 행복했던 덕분에 바흐와 막달레나 바흐는 왕성한 생산력을 자랑하여 무려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다만 이 중 6명(3남 3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으며 6명의 자녀 중에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와 요한 크리스찬 바흐가 중요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생활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안나 막달레나 바흐는 남편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그녀는 남편의 창작력의 원천이자 충실한 필사가였다. 바흐는 그녀를 위해 여러 작품, 특히 성악작품을 많이 썼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음악노트'''(Notenbüchlein für Anna Magdalena Bach) 1, 2권이다.[14] 또한 막달레나 바흐가 남편의 악보를 부지런히 필사해둔 덕분에 그의 많은 음악들이 현재까지도 실전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행복했던 그녀의 삶은 1750년 남편이 죽은 후부터 급전직하했다. 그녀의 의붓자식들과 친자식들 사이에서는 유산상속을 비롯한 이런저런 이유로 분쟁이 일어나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장성한 의붓자식들은 그녀를 일절 도우려 하지 않았으며 친자식들은 아직 어려서 홀로서기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생계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홀로 어린 두 딸 캐롤리나(Johanna Carolina)와 수잔나(Regina Susanna)를 맡아 키워야 했기 때문에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으며, 죽기 얼마전에는 라이프치히 시 당국의 자선행정에 의존해서 생활해야 했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가 환갑도 넘기지 못하고 죽은 데에는 이런 생활고가 큰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마틴 야비스(Martin Jarvis)라는 음악학자가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를 비롯한 몇몇 작품[15]의 실제 작곡가가 바흐가 아니라 안나 막달레나 바흐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주장은 해당 작품들이 바흐의 자필악보나 작곡기록이 없이 그녀가 필사한 사본만 남아 있는 점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야비스의 주장에 동의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16]
참고로 장 마리 스트로브·다니엘 위예 공동 연출의 영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내레이션[17]을 기반으로 바흐의 음악적 세계와 철학을 탐구하고 있는 실험적인 영화이다. 스트로브와 위에는 그 난해한 영화작법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영화는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편이라 클래식 팬들 사이에서 꽤 자주 언급된다.[18] 참고로 당시 40대였던 쳄발리스트 구스타프 레온하르트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로 출연한다.

5. 특징



''' 바흐 음악의 특징을 정리한 영상 '''

'''갈등, 우정, 절망, 기쁨, 그의 음악은 내가 "모든 것의 전부"라고밖에 표현할 수 밖에 없을정도로 포괄적이다. 셰익스피어도 비교가 안 된다.'''

'''존 엘리엇 가디너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바흐의 음악 속에 있는 것은 연주자나 청취자로서 우리가 들어가는 또 다른 세계라는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가면을 쓰고 무수한 색깔의 환상의 세계로 내려간다."라고 말했다. 가디너도 바흐의 음악과 신앙에 대해 설득력 있는 지적을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들으면 어떻게 그것이 단순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가디너는 불가지론자지만, 바흐를 연주할 때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설득력 면에서 거부할 수 없다"고 그는 인정한다. "내 논리적인 마음이 '아니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내 영혼은 '이것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하느님의 감각과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가진 사람으로부터만 올 수 있었다; [이것들은] 우리 삶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열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바흐의 음악은 신앙을 통해 만들어졌지만 신앙을 초월한다.'''

BBCCan any composer equal Bach?


'''모든 인간의 감정에 대해 동감을 잘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객관적으로 감정들을 그려낸다.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만 간섭하지는 않는 작곡가다. 인간의 조건과 환경에 대해 과학적이라 할 정도로 연구를 많이 했고 상상력을 동원해 표현했다. 때로는 심각하면서도 톡톡 튀고 즐거운 것이 바흐의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바흐의 음악이 단지 클래식 음악 또는 바로크 시대 작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19]

요요마출처


바흐의 음악들의 특징을 정리한 문서.
그는 오페라를 제외한 당대의 거의 모든 음악의 영역에 손을 댔고, 거기에 작품 생활 초기부터 만년에 이르는 동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엄청난 음악적 성과를 거둔 위대한 음악가다. 그야말로 희대의 천재.
바로크 음악을 총 집대성한 그의 음악은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음악에 대해서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굳이 그의 음악에 대해서 음악사적인 해설을 해야 한다면 우선 바로크 음악의 종합이라는 측면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당대의 여러 음악 양식들을 ‘융합’한 인물로 헨델처럼 여러 양식을 ‘조화’시킨 것과는 현저하게 다른 특징을 보인다. 동시대 독일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바흐 역시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 가운데에서 성장했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미 당시 독일 궁정문화에 침투하고 있었던 프랑스이탈리아의 새로운 음악 양식을 끊임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를 다만 한 시대 음악 양식의 종합이라는 면으로서만 조명하는 것은 단편적인 견해이다. 그의 음악적 용해와 융합의 과정에서 새로운 요소들이 싹터온 것을 후대의 음악사가들은 발견할수 있었다.
그는 엄청난 작품들을 남겼다. 성악곡에는 교회 칸타타, 세속 칸타타, 수난곡, 오라토리오, 미사, 마니피캇, 모테트, 가곡 등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칸타타이다. 초기의 칸타타는 북독일의 영향을 받은 모테트풍 스타일을 계승하고 있으나 나중에는 오페라풍의 아리아나 레치타티보가 등장하고, 라이프치히 시절 초기에는 코랄 칸타타가 많이 제작됐다. 대표적인 대규모 성악곡으로는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미사 b단조,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등이 있다. 한편 기악곡에는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건반악기곡 등이 있는데 어느 분야에서든 바흐는 바로크 음악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걸작들을 많이 남겼다. 관현악 모음곡 제2번,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 오르간 소곡집 599~644, 클라비어(쳄발로)를 위한 프랑스모음곡,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등이 각 분야에서 유명한 곡의 예로 꼽힌다. 그리고 말년의 ‘음악적 헌정’이나 안질로 장님이 된 탓에 완성시키지는 못한 ‘푸가의 기법’은 바흐의 대위법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대작으로 대부분 악기를 지정하지 않은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일반적으로는 특수작품으로서 별개로 분류된다.
바흐 본인은 음악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인간에게는 기쁜 마음을 갖게 한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마음을 신선하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은 모든 음악의 목적이다.” 그에게 음악은 하느님 영광의 찬미였다. 그래서 그에게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은 서로 대립하지 않았고, 하나의 목적을 위한 같은 바탕 위에 놓여 있었다. 200곡에 달하는 칸타타와 그의 수난곡들은 합창곡 작법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2권의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은 각각 24개의 장조와 단조로 된 전주곡과 푸가로 구성되어 피아노곡의 구약 성서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현재에는 24개의 장단조가 모두 자유롭게 작곡되어지나 바로크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일부의 조성들만 완벽하게 인식되어 사용되어 졌는데 바흐는 두 번에 걸친 24개의 클라이비어 곡집으로 모든 조성들을 완벽하게 실험하여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여러 작곡가가 평균율을 적용해 작품을 썼지만 바흐처럼 평균율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은 없다. 바흐는 1721년, 1741년 각각 2권의 평균율 곡집을 발표했는데, 이후 음악가들은 이 곡에 엄청난 찬사를 보낸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접한 후 작곡의 기초를 다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특히 쇼팽은 모든 곡을 외워서 칠 정도로 연습해 자신의 24개 ‘전주곡’을 바흐처럼 24개의 모든 조성으로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흐의 작품들은 기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바로크 대위법의 정점에 선 작품들이며, 대위법 작법의 끝판왕 격인 푸가를 포함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장르 측면에서 보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업적과 영향력을 남겼지만 특히 종교음악과 오르간 분야에서는 양으로 보나 수준으로 보나 따라올 사람이 없다.[20] 바로크 말기에 대 유행했던 오페라 세리아는 남기지 않았지만, 대신 오늘날 '세속 칸타타'로 불리는 대규모의 음악 드라마(Dramma per musica)를 여러 편 남기고 있다.[21] 바흐의 대위법은 자기 아들들을 비롯하여 이후의 모든 작곡가들에게 끊임없는 연구, 모방 또는 도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심지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모차르트베토벤의 후기작품에 나타나는 대위법적인 경향도 바로 바흐와 헨델의 대위법을 연구하여 터득한 것이다. 하지만 바흐는 단순히 대위법이나 음악 수법의 정교함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작곡가가 '''절대 아니다'''. 기법적으로 훌륭하거나 기존에 없었던 독창적인 음악 어법을 창시한 작곡가는 바흐 말고도 상당히 많다. 다른 작곡가들이 필적할 수 없는 바흐 음악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깊이'''에 있다. 바흐 이전에도 이후에도 서양 음악 분야에서 수많은 음악가가 활약했지만 단순히 듣기 좋거나 화려한 수준을 넘어 바흐처럼 진정한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음악을 창조한 작곡가는 정말 정말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바흐는 시대를 초월한 올타임(all-time) 마에스트로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바흐의 음악은 연주자나 감상자에게 상당한 노력과 연구를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바흐가 활동했던 바로크 시대는 작곡가의 개성보다 정형화된 음악 문법을 바탕으로 창작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바흐의 음악에 대해 수많은 해석과 연주법과 감상법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는 바흐의 음악에 내재된 깊이와 음악성을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지에 대한 각자의 고민과 연구의 산물이다.[22] 오늘날 클래식 음악 종사자들에게 바흐의 음악은 매우 중요하고 매우 어려운 도전 과제이며 이런 분위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는 주로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 작곡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거기에 따라서 분류할 수 가 있다. 그러므로 오르간 연주를 위해 고용되었던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바이마르에서 쓴 작품들의 대부분은 오르간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교회음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쾨텐에서 쓴 곡들의 대부분은 클라비어나 기악합주음악으로 교육용과 가정오락 또는 궁정오락을 위해 만들어졌다. 물론 오르간 곡이나 다른 건반악기를 위한 가장 중요한 완숙기의 작품들이 더러 라이프치히 시기에 작곡되긴 했지만, 칸타타와 그 밖의 교회음악이 제일 많이 쓰여진 시기는 라이프치히 초기였다. 바흐는 일차적으로 다른 작곡가의 음악을 필사하거나 개작하는 방식을 통해 작품을 배워 나갔고 이러한 습관은 평생에 걸쳐 계속 유지되었다. 그의 곡 가운데는 토렐리, 비발디, 텔레만과 수많은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을 각색한 것이 많다. 이런 방식으로 바흐는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 가장 탁월한 작곡가들의 사용 방법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의 아들 칼 필립 엠마뉴엘에 따르면 바흐는 건반악기가 없는 상태에서 작곡하고 난 다음 건반악기를 직접 연주해서 그 결과를 시험해보는 전형적인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작곡 단계는 주요 테마나 주제를 고안하는 것이었다. 바흐는 생각해 낸 주제를 이미 확립된 관습적인 장르, 형식, 화성구조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만들어 냈다.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와 같이 텍스트가 있는 곡을 작곡할 경우에는 먼저 성악 선율을 쓰고 선율에 맞추어 가사의 강세와 의미를 적용시켰다. 바흐의 문헌을 살펴보면 끊임없이 자신의 음악을 개선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악보를 사보하거나 성부를 연주하면서 조금씩 고친다든지, 아니면 곡을 다시 연주할 때 새롭게 교정하는 식이었다. 또한 흔히 기존의 자신의 작품에 새로운 사용법을 적용하고 새 가사를 붙이거나 신선한 내용으로 작업하기도 했다. 그의 칸타타 악장 중에는 이전의 칸타타와 기악 작품을 비롯하여 다른 음악을 개작한 것이 많다.

5.1. 오르간



바흐는 바이올린 주자 및 오르간 주자로서 교육을 받았으며, 오르간 음악이 먼저 작곡가로서의 그의 관심을 끌었다. 젊었을 때부터 바흐는 광대하고 다양한 오르간 음악에 익숙해 있었다. 북독일로는 북스테후데와 뵘, 중부와 남독일로는 파헬벨과 프로베르거가 있었고, 이탈리아의 프레스코발디와 프랑스 오르가니스트들의 오르간 음악도 꼽을 수 있다. 바흐는 어렸을 때 그 곳에 있는 오르간 주자들의 연주를 듣기 위해 함부르크를 방문하였으며, 아른슈타트에 있는 동안에는 약 225마일 정도 떨어진 뤼베크까지 도보여행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는 음악을 혼합하고 뛰어넘어서 바흐는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양식을 개발하였다. 그의 양식은 매우 풍부한 상상력, 정통한 대위법 지식, 자신감 넘치는 대가적 기교화 광범위한 페달을 사용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바흐는 즉흥 연주가로써 명성이 자자했고 오르간을 새로 달거나 개축할 경우 시험하기 위해 자주 불려 다녔다.
교회 오르간 주자에 걸맞게 바흐는 루터교 예배에 사용되는 장르에 초점을 맞춰 오르간 음악을 작곡하였다. 우선 각각의 코랄에 앞서 연주되거나 때때로 회중이 노래할 때 반주로 사용된 코랄 세팅이 있다. 토카타, 판타지아, 프렐루드와 푸가는 예배의 어떤 지점에서 전주곡이나 간주곡으로서 특징적 역할을 담당하며 리사이틀에 적합하게 활용되기도 했다.
바흐의 초기 오르간 곡들로는 코랄 전주곡, 코랄에 기초를 둔 몇 곡의 변주곡(파르티타), 그리고 그 길이와 산만함 그리고 넘쳐흐르는 듯한 악상 등으로 북스테후데의 토카타를 연상시키는 몇 곡의 토카타와 판타지아가 있다. 그 후 바이마르 궁정에 있을 때 바흐는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쓴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평상시의 부지런함대로 그들의 총보를 옮겨 쓰고 또 그들의 작품을 편곡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비발디의 오르간 혹은 하프시코드 콘체르토 몇 곡을 편곡하였는데, 이 떄 장식음악을 써넣기도 하고 때로는 대위법을 강화시키거나 내성부를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코렐리나 레그렌치 주제에의한 푸가를 쓰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바흐 자신의 양식에 주요한 변화가 생겨났다.

바이마르에 있는 동안 바흐는 비발디, 알레산드로 마르첼로, 아르칸젤로 코렐리, 주세페 토렐리 등 이탈리아 음악에 매료되어 몇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독주를 위해 편곡하였다. 장식음을 적어 넣거나 이따금씩 대위법을 더욱 강화하기도 하고 내성을 덧붙이기도 했는데, 그 결과 바흐 고유의 양식에 변화가 도래하기 시작했다. 비발디로부터 그는 한층 더 간결한 주제를 쓰는 법, 화성의 구조를 명확하고 견고하게 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듬의 지속적인 흐름에 의해서 주제를 전개하여, 투명하고 폭넓게 균형 잡힌 형식구조, 특히 콘체르토-리토르넬로의 구조와 대조를 기초해서 주제를 웅대하고 균형잡힌 형식 구조로 발전시키는 법을 배웠다.
비발디가 미친 영향은 바이마르에서 작곡된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 a단조> BWV543 같은 곡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예19.1a)의 프렐류드에서 협주곡 독주 음형과 닮은 바이올린 음형이 토카타 섹션과 교대로 등장한다. 짜임새와는 대조적으로 동형진행과 5도권 진행, 명료한 조성 구조와 새로운 조성에 기초하여 도입부의 재료가 되돌아오는데, 이 모든 내용은 비발디가 사용한 전형적인 진행과정을 상기시킨다. (예19.1b)에서 푸가 주제는 다시 한 번 교대로 등장하는 현의 음직임으로 완성되는 바이올린 같은 음형으로 움직이며, 반복음과 움직이는 선율 사이에서 매우 빠르게 왔가갔다 하는 특징을 보인다. 전형적으로 바흐의 푸가 형식은 협주곡의 빠른 악장과 매우 비슷하다. 푸가 주제는 관계조나 으뜸조로 되돌아오는 리토르넬로와 유사하게 기능한다. 위와 같은 음악적 진술사이에는 에피소드가 위치하는데, 에피소드는 독주 부분과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종종 더 가벼운 짜임새와 동형진행을 갖고 있거나 조가 변화되는 형태를 지닌다.


북스테후데는 독립적인 푸가뿐 아니라 자유로운 판타지아 부분과 푸가가 교대로 등장하는 프렐류드를 작곡하였다. 1700년 무렵 일부 작곡가들은 프렐류드 (또는 토카나, 판타지아)가 분이되어 있는 푸가를 시도하였고 이러한 관습은 바흐 음악의 표준이 되었다.
토카타 d단조(1708년 이전? BWV564)는 이러한 발전 과정의 중간 단계에 속한다. 아 곡은 단 하나의 푸가를 갖고 있는데 시작과 끝에 토카타 부분이 있고 푸가 안에 토카타 같은 음형이 새로 작곡되어 들어가 있다,  반면, 파사칼리아 c단조(1708년이전? , BWV582)는 이중 푸가(double fugue)의 확장된 전주곡 역할을 하는데, 이 때 푸가 주제들 중 하나가 파사칼리아 주제의 전반부와 동일하다. 2~3악장으로 된 규모의 전주곡들도 몇 곡 있다. 대 판타지아와 푸가 g단조(푸가: 바이마르, 판타지아:쾨텐, BWV542)의 전주곡은 대위법적인 간주곡이 포함된 풍부한 색채의 정열적으로 표현적인 판타지아 또는 토카타이다.
바흐의 푸가 주제의 다양한 유형들과 정교한 선율적 그리고 리듬적 윤곽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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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말년에 쓴 거대한 전주곡 Eb장조와, 같은 조성으로 된 푸가(성 안나의 푸가, BWV552)가 1739년에 출판되었다. 이 2곡은 각기 <클라비어 연습곡집> (Clavier-Ubung: 직역하면 ‘건반연습’으로 바흐는 이것을 4개의 서로 다른 건반 악기 곡집의 표제로 사용하였다.) 제3부의 개시부와 종결부에 놓여있다. < 클라비어 즉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us라 부르는 것)의 찬미가에 바탕을 둔 일련의 코랄 전주곡이다. 바흐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상징하도록 마지막에 내림표(b) 3개를 가지는 조성으로 3중 푸가를 썼다. 이 푸가의 세 부분은 각기 독자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점차로 활기를 더해가는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주제는 다른 2개의 주제와 대위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많은 부분으로 구성되는 푸가(multisectional fugue)는 북스테후데와 그 밖의 바흐 이전의 대가들이 사용한 수법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바흐는 그의 초기 작품인 토카타 E장조(BWV566)에서 이것을 사용하였다.

Praeludium et Fuga, BWV543
이탈리아 콘체르토의 여러 요소들이 도입되었음은 수많은 토카타와 푸가들, 특히 이 전주곡과 푸가 a단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전주곡에서는 바이올린풍의 음형이 일부는 콘체르토의 총주를 연상시키는 토카타풍의 여러 부분들과 번갈아 나온다. 푸가의 구조는 콘체르토 알레그로의 구조와 유사하다. 바이올린풍의 주제에 바탕을 둔 제시부 들은 총주처럼 으뜸조와 관계조들로 나타나고 여러 개의 에피소드는 독주부로서의 기능을 맡는다. 끝에 가서는 정교한 카텐차가 따른다.

  • 트리오 소나타

전주곡이나 푸가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6곡의 트리오 소나타가 있다(BWV 525-530). 바흐의 전기작가 포르켈(J.N.Forkel)에 따르면 이 곡들은 바흐가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을 위해서 라이프치히에서 쓴 것들이다. 이 작품들은 바흐가 어떻게 이탈리아의 합주용 트리오 소나타를 독주용 작품으로 고쳐놓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곡들은 3개의 독립된 성부들간의 대위법적 짜임으로 쓰여졌는데, 각 성부는 건반과 양손과 페달에 주어져있다. 악장의 순서(대개 빠름-느림-빠름)와 주제의 일반적인 성격은 그것들의 모델이 된 이탈리아 작품들의 영향을 보여준다.

  • 코랄 전주곡

오르간 주자이며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던 바흐는 당연히 코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흐는 알려져 있는 모든 유형을 아우르며 끊임없이 다양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200여개가 넘는 오르간 코랄 세팅을 생산하였다.
바흐가 바이마르와 쾨텐에 있던 처음 몇 년간 편집한 <오르간 소곡집-Orgelbuchein>은 짧은 코랄 전주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곡집의 편성체계와 의도는 바흐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몇몇 사항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원래 교회력의 전례에 필요한 코랄 선율 164곡을 편곡하려고 하였다. 실제로는 45곡밖에 완성시키지 못했으나 그 계획은 주어진 일의 가능성을 철저히 완수하려고 하는 바흐의 욕망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바흐가 원숙기에 들어서 쓴 악곡 중에는 하나의 커다란 통일 기획에 따라서 작곡된 것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의 완벽하게 순화되고 있는 조성, <클라비어 연습곡집>에 실려있는 한 주기의 교리문답 코랄, <골트베르크 변주곡집>의 체계적인 악곡배열, <음악의 헌정>에서의 단일주제의 철저한 전개, 또는 <푸가의 기법>에서 모든 유형의 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오르간 소곡집>을 교육용으로 계획 했다는 것 역시 바흐의 특징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표지에는 “초보 오르간 주자에게 하나의 코랄을 발전시키는 모든 종류의 방법과 또한 이들 코랄 들에서는 페달이 완전히 오블리가토(obbligato: 선택이 아닌 필수)로 취급되므로 페달 기법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안내해주는 오르간 소곡집 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만을 찬양하고 동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라고 번역될 수 있는 2행시가 첨부되어 있다. 평생을 통해서 겸허하고 근면한 학생이었던 바흐가 현명하고 친절한 교사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빌헬름 프리데만과 자신의 후처 안나 막달레나를 위해서 그는 기법과 음악성을 동시에 가르치는 클라비어 소곡집들을 쓰기도 하고 여러 곡을 모으기도 했다. 2성 인벤션과 3성 신포니아는 <평균을 클라비어 곡집> 1권과 마찬가지로 교육용 음악작품들이다.
당대의 습관대로, 바흐가 코랄 전주곡집-교회음악-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쳤다든가 칸타타와 수난곡들의 악보 초두에 J.J(Jesu Juva-예수여, 도와주소서)라고 쓰고 끝머리에 SDG(Soli Deo Gloria-오직 하느님에게 영광 있으라)등의 글자를 써넣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빌헬름 프리데만을 위해 작곡한 건반악기 연습곡집이 I.N.J(in nominee Jesu-예수님 이름으로)라고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거나, 바흐가 통주저음의 목적을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허락된 영혼의 기쁨을 위하여 잘 어울리는 화성을 만들어 내는 것’ 이라고 정의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른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는 종교적 예술과 세속적 예술 사이의 원칙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2가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었다. 그는 때때로 종교적 가사나 세속적 가사에 또는 순수한 기악작품에 같은 음악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b단조 미사>에 나오는 오산나(Ossana)의 음악은 작센 지방의 선제후이며 폴란드의 왕인 아우구스투스 2세가 라이프치히를 공식 방문했을 때 그를 예우하는 세레나데에서 이미 사용된 것이었다.
<오르간 소곡집>에 실려있는 작품은 모두 코랄 전주곡으로서, 선율은 대개 소프라노에서 완전하고 계속 이어지는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형식으로 전체적으로 한번 들려진다. 선율을 캐논으로 다루는 것도 몇 곡 있으며, 그 중 세곡은 매우 정교한 장식음이 붙은 선율로 되어있다. 코랄 선율의 동기에서 나오지 않고 각각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독립된 동기로 만들어진 반주성부들도 매우 자주 사용된다. 몇몇 예들에 있어서는 회화적 혹은 상징적 동기들로 코랄 가사의 시각적 영상이나 기본이념을 인지시키려는 기법이 보이는데 이러한 전통은 바로크 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쉿츠를 거쳐 이탈리아 마드리갈 리스트에까지 거슬로 올라간다.

Chorale Prelude: Durch Adms Fall, BWV 637
바흐의 가장 묘사적인 작품 중 하나는 코랄 <아담의 타락으로 모두가 더럽혀진 –Durch Adms Fall ist ganz verdrbt>을 편곡한 이 곡이다. 타락(Fall)이라는 개념이 협화음에서 시작하여 불협화화음으로 떨어지면서 (순진무구함에서 죄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페달에서 톱날처럼 하강하는 동기로 묘사되고 있다. 최상 성부에는 코랄 선율이 흐르고 있으나 베이스의 들쑥날쑥하게 하행하는 도약 진행은 마치 은총의 상태에서 추락하는 아담을 묘사하는 것 같다. 한편  알토성부에서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반음계적 선율은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을 극적으로 표현하며, 아래로 비끄러지듯 흐르는 테너 역시 유혹에 이끌려 죄에 빠진 슬픔을 결합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회화적 혹은 상징적 암시는 성악 작품에서는 물론 오르간 코랄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표면적 장식을 위해 이러한 회화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으며, 그는 언제나 악구의 내적인 음악적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서만 이것을 이용하고 있다. 외면적 암시를 시적인 표현으로 바꾼 가장 뛰어난 예들 중의 하나는 <오르간 소곡집>에 나오는 코랄 전주곡인 <오 사람이여, 그대의 큰 죄를 슬퍼하라-O Mensch, bewein dein sünde gross>의 마지막 종지 부분으로, 여기에서는 길게늘여진 adagissimo가 코랄 가시의 끝 구절에 나오는 lange(긴)’라는 가사를 반영하고 있다.

3권의 오르간 코랄 곡집이 바흐의 라이프치히 시대에 편찬되었다. 6곡의<쉬블러코랄> (BWB 645-650)은 칸타타의 악장들을 편곡해 놓은 것이다. 바흐가 1747~1749년에 걸쳐서 수집, 개정한 18곡의 코랄들(BWV 651-668)은 그 이전에 작곡된 것들이다. 그 안에는 변주곡, 푸가, 판타지아, 트리오, 그리고 여러 종류의 확장된 코랄전주곡 등 다양한 오르간 코랄 편곡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클라비어 연습곡집-Clavier-Ubung>(BWV 669-689) 제 3부의 교리문답 코랄은 짝을 이루게 되어 있는데. 긴 곡은 오르간 페달을 사용하고 짧은 곡(보통 푸카풍)은 두 손으로만 연주하게끔 되어 있다. 이러한 식으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은 긴 교리문답과 짧은 교리문답을 상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보다 더 정확한 목적은 장래의 악보 구입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악기 여하에 따라서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바흐가 후기에 쓴 오르간 코랄은 모두 <오르간 소곡집>에 실려있는 곡들보다 웅대한 규모로 되어 있으며 성격에 있어 덜 직접적이고 덜 주관적으로, 그 이전 작품들이 세부들을 생생하게 표현적으로 처리했던 것과는 달리 보다 형식적인 상징주의 또는 악상의 순수한 음악적 전개를 중요시하고 있다.

Chorale Prelude: Wenn wir in höchsten Noten sein
바흐의 초기와 후기오르간 코랄 간의 차이점은 <우리가 매우 곤경에 놓여 있을 때-Wenn wir in höchsten Noten sein>를 편곡한 두 작품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오르간 소곡집>에 실려있는 곡(BWV 641)을 살펴보면 코랄선율의 첫 4개 음에서 따온 것을 주요동기로 하는 반주 위로 선율이 다채로운 장식을 갖고 나타난다. 그러나 같은 곡을 후에 편곡(BWV 668과 668a)한 것에서 보면, 같은 선율이 <나 이제 당신의 왕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vor deinen Thron tret’ich hiermit>라는 제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바흐는 그 이전의 파헬벨의 코랄 전주곡풍으로 돌아간다. 선율에는 거의 장식이 없고 각 악구는 그 주요동기로 된 짧은 푸가토로 이루어진 아래 3성부에 의해 도입된다.

5.2.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어



바흐의 이 두 건반악기를 위한 음악은 오르간용 음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인기 있던 모든 장르에 있어서의 걸작들을 포함하고 있다. 전주곡, 판타지아, 토카타뿐만 아니라 푸가와 푸가 양식으로 된 그 밖의 작품들, 그리고 무용 모음곡들과 변주곡 등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초기 소나타와 카프리치오, 여러 가지 다양한 소품들 (많은 교육용 작품들을 포함한),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수반한 콘체르토들도 있다. 물론 라이프치히 시대에 쓰여진 것들로 중요한 작품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이런 음악들의 대부분은 쾨텐에서 작곡되었다. 일반적으로 오르간 작품들처럼 독일의 지방적인 전통이나 전례에 묶여 있지 않았던 클라비어곡들은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특징들이 혼합되어 있는 코스모폴리탄, 즉 국제적인 특성들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 클라비어 모음곡

클라비어 모음곡들은 독일의 모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영향 역시 받고있음을 보여준다. 모음곡집으로는 3권이 있는데, 각각6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랑스 모음곡집>(처음에는 클라비어 소곡집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쾨텐 (1722-25)과 바아마르에서 1715년경 작곡된 <영국모음곡집> 그리고 1726년과 1731년 사이에 따로따로 출판되었다가 1731년 <클라비어 연습곡집-Clavier-Ubung>의 제 1권으로 편집된 6곡의<파르티타>가 그것이다. 이 모음곡집의 제2권(1735)에는 또한, ‘두 단 건반 하프시코드를 위한 프랑스풍의 서곡’ 이라는 제목이 붙은 대규모 b단조 파르티타가 포함되어 있다.
모음곡에 ‘프랑스’ 그리고 ‘영국’ 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바흐가 아니며 또한 어떠한 묘사적 의미도 갖지 않는다. 두 작품 집에는 고도로 개인적 양식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양식의 특성이 혼합되어 있다. 독일 전통선상에서 각각의 모음곡에는 표준적인 4개의 춤곡 악장들(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반드, 지그), 사라반드와 지그 사이에 위치한 부가적인 짧은 악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모음곡들은 각각 전주곡으로 시작되며, 이러한 전주곡들 중에는 바흐가 이탈리아의 합주형식을 얼마나 훌륭하게 건반 악기 용으로 옮겨놓았는가를 보여주는 것도 더러 있다. 예를 들면, 제 3번 모음곡의 전주곡은 총주와 독주가 교대하는 콘체르토풍의 알레그로 악장이다. (콘체르토 형식을 한층 더 뚜렷하게 적용시킨 악곡은 <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2권에도 있는 < 이탈리아 양식에 의한 콘체르토- concerto in the Italian Style>라는 하프시코드 곡으로 총주와 독주의 대조를 강조하기 위하여 2개의 건반을 이용하고 있다.
<영국모음곡>의 무곡들은 프랑스 것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두블(double), 즉 한 악장의 장식적 반복의 예를 몇 개 포함하고 있다. <프랑스 모음곡>의 경우 제 2악장은 프랑스풍의 쿠랑트라기 보다는 이탈리아풍의 코렌테(corrente)인 경우가 더 많다. <영국모음곡>의 무곡들은 프랑스 것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두블(double), 즉 한 악장의 장식적 반복의 예를 몇 개 포함하고 있다. <프랑스 모음곡>의 경우 제 2악장은 프랑스풍의 쿠랑트라기 보다는 이탈리아풍의 코렌테(corrente)인 경우가 더 많다. 무곡의 대부분, 특히 파르티타의 무곡들은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어, 이와 같은 바로크 형식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파르티타의 전주곡들은 프렐류디움(praeludium), 프레암불룸(praeambulum), 신포니아(3악장으로 되어있음), 판타지아, 서곡, 그리고 토카타 등의 표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바로크 후기 건반음악의 다양한 형식과 양식 전체에 걸쳐 있다.


바흐의 현이 있는 건반악기 작품으로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Das wohltemperierte Clavier>라는 제목이 붙은 유명한 전주곡과 푸가 곡집이다. 제 1권은 1722년경 쾨텐에서 완성되었고 제 2권은 1740년경 무렵에 라이프치히에서 수집, 정리되었다. 제1권과 제2권 모두 각기 24곡의 전주곡과 푸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기 12개의 장 단조로 전주곡과 푸가가 한 곡씩 포함 되어 있으며 C에서 B에 이르는 상행하는 반음계적 체계로 배열되어 있다. 두 권 모두 당시 건반악기로는 여전히 새로운 조율체계인 평균율에 가깝게 조율된 악기로 어떤 조든지 연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기 위해 고안된 작품이다. 바흐는 기존에 있었던 작품에서 뽑아 일부 곡을 각색하기도 했고 종종 잘 사용하지 않는 조를 알맞게 배하기 위해 곡의 위치를 바꾸기도 했다.
 제2권이 바흐의 일생을 통하여 여러 시기에 걸쳐 작곡된 많은 악곡들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 제1권은 제2권에 비해 양식과 의도 면에서 보다 많은 통일성을 가진다. 그 당시로서는 아직 새로운 평균율 내지는 평균율에 가까운 조율로, 모든 조성을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과 더불어 바흐는 제1권을 특별한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 썼다. 대부분의 전주곡에는 어떤 하나의 특정한 기술적 과제가 연주자에게 주어져 있다. 따라서 이 곡들은 후세대의 용어로 ‘연습곡(etude)’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2성 인벤션과 3성 신포니아뿐만 아니라 바흐의 소규모전주곡들(BWV933-943)의 교육적 목적은 단순히 기술적인 것에만 그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서로 다른 유형으로 된 건반악기 작품들을 전주곡들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1권의 2,7,21번 작품들은 토카타이며, 8번은 트리오 소나타의 그라베(trio-sonata Grave, 소나타의 느린 악장), 17번은 콘체르토 알레그로, 24번은 트리오 소나타로 이루어져 있다.
주제, 짜임새, 형식 그리고 처리방법 등에서 놀랄 만큼 다양한 푸가는 단일 주제에 의한 집중적인 푸가 작법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총론을 이루고 있다. 전위, 카논 그리고 확장기법의 사용(제8번, d#단조), 다 카포 종지를 갖는 리체르카레(제1권, 제4번 c#단조)로 나타나있다. 제 2권에서 D장조 푸가(제5번)를 가장 단순한 소재들로 집중적으로 추상화된 음악구조를 이루는 최고의 예라고 한다면 f#단조의 전주곡과 푸가는 주제의 아름다움과 그 균형에 있어서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오르간 푸가에서처럼 바흐의 클라비어 푸가의 각 주제들은 명확하게 규정된 음악적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푸가 전체는 그러한 주제의 논리적 전개이며 동시에 그것의 투영이다.

  • 토카타

가장 뛰어난 토카타 중에 f# 단조와 c단조(1717년경, BWV910,911)로 된 곡들이 있다. 이 두 곡은 모두 즉흥 양식으로 된 자유롭고 빠른 경과구로 시작된 곡들이 있다. 이 두 곡은 모두 즉흥 양식으로 된 자유롭고 빠른 경과구로 시작된다. 토카타 f#단조는 푸가로 끝맺는데, 그 주제는 제2악장 주제를 리듬 면에서 변형시켜 놓은 것으로서 옛 변주곡 리체르카레를 상기시킨다. 토카타 c단조는 3화음을 바탕으로 하는 콘체르토풍의 주제를 바탕으로 한 바흐 특유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푸가 중 하나로 이어진다. d단조로 된 반음계적 판타지아와 푸가(쾨텐, 1720년경, 라이프치히에서 개작, 1730년경, BWV 903)는 이 형식에 있어 바흐의 가장 뛰어난 현이 있는 건반악기(stringed-keyboard)작품으로 g단조 오르간 판타지아와 푸가에 비견된다.


바흐는 건반악기음악의 또 다른 독특한 형식, ‘주제와 변주곡’의 대표작을 남겨 놓았다. 1741년 혹은 1742년에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4권으로 뉘른베르크 에서 출판된, 일반적인 <골트베르크 변주곡>으로 알려진 <서로 다른(30개의)변주곡들을 갖는 아리아>는 많은 바흐의 후기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철저하게 구성된 기법으로 조직되어 있다.
주제는 균형을 이루고 있는 2개의 부분으로 된 사라반드로서, 주제의 기본 베이스와 화성 구조는 30개의 모든 변주곡들 안에 들어가 있다. 변주곡은 3곡씩 묶여져 있으며, 각 묶음의 마지막 곡은 카논으로서 첫 번째는 동음, 2번째는 2도, 이런 식으로 마지막은 9도차이를 갖고 있다. 마지막 30번째의 변주곡은 쿠오드리베트(quodlibet)로 주제의 베이스 위에서 2개의 대중적인 노래선율이 대위법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것 뒤에는 원래의 주제가 다 카포로 반복된다. 카논으로 되어있지 않은 변주는 인벤션, 푸게타, 프랑스 서곡, 장식적인 느린 아리아를 포함하는 많은 다양한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2개의 건반을 위한 현란한 기교적인(bravura)곡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온다. 이러한 변주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분위기와 양식들은, 되풀이되는 베이스와 화성들 그리고 또한 악장들이 대칭적인 질서에 따라 배열됨으로써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 전체는 장대한 규모의 구조로 되어 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통해 바흐가 보여준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접근 방법은 바흐의 다른 많은 작품속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종종 <오르간 소곡집>의 코랄 프렐류드와 같이 짧은 시간에 똑같은 유형으로 된 몇개의 곡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평균율 클라비어>의 프렐류드와 푸가 경우에서 보듯이 장르와 기법, 아이디어가 갖는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체계적인 작곡 경향은 말년에 바흐의 범상치 않은 두 작품에서도 명백히 표현된다.

5.3. 음악의 헌정푸가의 기법




바흐의 후기작품들 중 두 곡<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 BWV1079>과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1080>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부류를 이루고 있는 작품들이다. 바흐는 1747년에 포츠담을 방문했을 때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준 주제(예19.3)를 바탕으로 즉흥연주를 했는데, 앞의 곡은 바로 이 때의 주제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바흐는 라이프치히로 돌아와서는 즉흥곡을 정서하고 또 손질을 가해 완성된 작품을 왕에게 헌정하였다. 여기에는 건반악기를 위한 리체르카레 3성부 곡과 6성부 곡, 플루트(프리드리히 왕의악기), 바이올린 그리고 통주저음을 위한 4악장으로 된 트리오소나타 1곡이 10곡의 캐논과 함께 들어 있다.
1749~50년에 작곡되었고 바흐가 세상을 떠남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아있게 된 <푸가의 기법>은 한 양식으로 된 18곡의 카논과 푸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작품들은 모두 동일한 주제(예19.4) 혹은 그 주제를 변형시킨 것 중의 하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대체로 점점 더 복잡해지는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심원한 대위법의 기법들이 대가다운 솜씨로 쉽게 처리되고 있다. 바흐의 죽으으로 말미암아 미완성으로 남은 마지막 푸가에는 4개의 주제가 있는데, 이 중에는 바흐의 이름 철자법을 따라 지은 주제도 있다. Bb-A-C-B 는 독일어 계명법에 의하면 B-A-C-H가 되면 Bb과 B 은 각각 독일어의 B와 H에 해당된다.

5.4. 성악


1723년에 라이프치히는 인구 3만 명의 번창하는 상업도시로서 인쇄와 출판의 중심지이며 유서 깊은 대학교의 소재지로 주목을 끌고 있었다. 이 도시에는 좋은 극장과 오페라 하우스가 있었다. 1720년에 문을 닫은 오페라 하우스는 성 토마스 교회에서 바흐의 선임자로 있던 쿠나우 에게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는데, 그는 오페라 하우스가 그의 뛰어난 가수들을 빼어가는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라이프치히에는 대학교 부속 예배당 이외에도 5개의 교회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는 바흐가 음악을 맡고 있던 성 토마스 교회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는 바흐가 음악을 맡고 있던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스 교회였다.
성 토마스 교회에서 운영하던 학교는 역사가 깊은 학교로서 통학생과 기숙생 양쪽 모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학교는 55명의 소년과 청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는데, 이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은 그 보답으로 라이프치히의 4개 교회에서 예배 때 노래를 부르거나 연주를 하고 그 밖의 음악에 관한 책임을 완수해야만 했다. 자연히 장학생은 일반 학업 성적뿐만 아니라 음악 성적을 고려하여 선발되었다. 칸토르로서 바흐는 학교의 서열상 3번째였다.
임명권은 시의회에 있었는데 교회와 학교 등을 관리하는 단체인 교회회의(con-sistory)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바흐는 시의회가 첫 번째로 선택한 사람은 아니었다. 교회회의는 보다 ‘현대적인(modern)’음악가를 원하고 있었다. 함부르크의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과 다름슈타트의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Christoph Graupner)가 임명제의를 받았었는데 텔레만은 함부르크에서 급료를 인상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 제의를 이용했으며 그라우프너는 고용주로부터 사임허가를 얻어내지 못했다. 바흐는 관례대로 시험을 치르고 건전한 신학적 태도로 시의회를 만족시킴으로써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으며 1723년 5월에 그 자리에 취임하였다. 바흐의 직함은 ‘성토마스 교회의 칸토르 겸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이었다. 그의 임무는 하루 4시간의 수업[23]과 함께 교회의 각종 예배를 위한 음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모범적인 기독교적인 삶을 살 의무가 있었고 시장의 허가 없이는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학교건물의 한쪽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그의 서재는2학년 학생들의 교실과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공개적인 예배를 드릴 기회가 부족해 불편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모든 교회에서 매일 예배가 있었으며 축일에는 특별한 축하행사가 있었다. 성 니콜라스교회와 성토마스 교회에서는 일요일에는 상례적으로, 아침 7시에 시작되어 정오까지 계속되는 주예배 이외에 짧은 예배가 3번 있었다. 주 예배에서는 성가대가 모테트, 루터파의 미사곡(키리에와 글로리아만 있는), 찬미가, 그리고 칸타타를 불렀다.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는 격주의 일요일마다 칸타타가 연주되었다. 칸토르는 칸타타를 연주할 차례가 된 교회에서 제1성가대를 지휘했고, 칸토르의 대리자는 다른 교회에서 보다 단순한 음악을 가지고 제2성가대를 지휘하였다. 동시에 가장실력이 낮은 가수들로 구성된 제2, 제4성가대는 또 다른 2곳의 교회에서 보다 평범한 수준의 음악을 담당하였다. 1730년 바흐가 시의회에 제출한 탄원서를을 보면 제1, 제2, 제3 성가대에서 최소로 필요로 하는 인원은 각각 12명의 가수(각 성부에 3명씩)등이었고 제 4성가대에서는 8명의 가수를 필요로 했다고 적고 있다.

  • 교회 칸타타
1700년에 루터교 신학자이자 시인인 에르트만 오이마이스터 (Erdmann Neumeister, 1671~1756)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음악을 선보이며 이탈리어 용어로 칸타타(cantata)라 명명했다. 17세기 내내 루터교 작곡가들은 성경, 예배, 코랄 텍스트에 음악을 붙였다. 여기에 노이마이스터는 시적 가사를 첨가하여 레치타티보, 아리아, 아리오소와 같은 음악을 만들고자 했으며 이것은 그 시대에 복음서 읽기와 같은 의미를 성취하게 되었다. 새 교회 칸타타는 루터교 신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칸타타에 사용된 시는 그들의 신념이 표방하는 정통성과 경건한 경향을 맺어 주었고, 이는 곧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것 뿐아니라 형식과 감정적인 요소를 혼합하는 모습을 띠었다. 음악적 틀 안에는 과거의 모든 위대한 전통인 코랄, 독창, 합창 매체가 통합되어 있으며, 여기에 극적으로 강력한 요소인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첨가되었다. 비록 바흐는 노이마이스터의 텍스트 중 단지 5개에만 음악을 붙였으나 그의 많은 칸타타 역시 유사한 구성을 따르고 있다.
교회 칸타타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루터교 예배에서 뚜렷이 그 진가를 드러냈다. 2개의 주 교회인 성 니콜라스와 성 토마스 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번갈아 가면서 1개의 모테트와 키리에, 코랄 그리고 한개의 칸타타가 포함된 일요일 데예배가 열렸다. 바흐는 최고 수준의 가수가 포함된 첫 번째 합창단을 감독했으며, 이는 곧 그 교회에서 칸타타를 들을 수 있는 순서가 됐음을 의미하였다. 반면 부지휘자는 중요한 또 다른 교회에서 2번째 합창단을 지휘하였다. 3번째, 4번째 합창단은 경험이 부족한 가수로 구성되어 나머지 다른 두 교회에 필요한 음악을 적절히 제공해 주었다. 바흐가 시위원회에 보낸 1730년 메모에는 이상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을 지정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처음 세 합창단 각각에 딸린 12명이 다성음악을 노래하고 4번째 합창단 소속의 8명은 단지 단성성가만 노래하라고 적혀 있다. 칸타타에는 독창자와 2~3명의 작은 합창단(ripienist)[24]을 각 성부 (소프라노, 알토,테너,베이스)에 배치하라고 명하였다. 독창자들은 독창 진행을 노래하고 합창 진행 부분에서는 작은 합창단과 깉이 불렀다.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는 부분들을 보면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바흐는 다 합쳐 최소한 4명이나 8명의 가수만 갖고도 칸타타를 지도했음을 보여 준다. 칸타타를 반주했던 오케스트라에는 콘티누오 현악기, 2~3개의 오보에, 1~2개의 바순이 포함되어 있었고, 때때로 플루트로 편성이 확대되기도 하고 축제 같은 때에는 트럼펫과 팀파니가 추가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라이프치히의 교회는 매년 58곡의 칸타타를 필요로 하였고, 거기에 예수 수난 성금요일[25]에는 수난곡, 연3회의 축일의 저녁예배(Vespers)를 위한 마니피카트(Magnificat), 시의회의 취임식을 위한 매년 한 곡의 칸타타, 그리고 칸토르가 별도의 사례를 받는 장례식 모테트나 결혼식 칸타타 같은 행사음악 등이 추가되었다. 1723년과 1729년 사이에 바흐는 60개의 칸타타 각각에 대하여 1년에 최소한 3개에서 가능한 4개에 이르는 완전한 칸타타 연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1730년대와 1740년대 초기에 쓰여진 칸타타는 다섯번쨰 연곡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과 네 번쨰 연곡의 많은 부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략 그의 교회 칸타타 중 200개 정도가 보존되어 있다. 대부분은 라이프치히를 위해 새로 작곡되었지만 다른 것은 뮐하우젠과 바이마르에서 지내면서 만든 초기 작품들이다. 나아가 쾨텐과 라이프치히에서 바흐가 후원자 생일을 축하하거나 기타 축제 행사를 위해 작곡한 20개의 세속 칸타타가 남아있다. 이러한 세속 칸타타들은 전형적으로 단 한 번의 행사를 위해 연주되었기 때문에 (그림19.7)에서 보듯이 바흐는 종종 교회 칸타타로 세속 칸타타를 재사용하기도 하였다.
교회칸타타 혹은 하우프트무지크(주요 음악 Hauptmusilk)는 라이프치히에서의 루터파 전례의 중요한 요소였다. 가끔 주제는 예배순서에 있어 칸타타가 뒤따르게 되어 있는 복음서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었다. 바흐는 1714년 라이프치히를 방문했을 때 예배의 식순, 특히 음악이 나오는 순서를 칸타타 제61번의 표제 뒷장에 적어놓았다.(인용문 참조)

라이프치히에서의 예배순서-바흐의 요약, 1714

1)전주곡 연주

2)모테트(motetta)

3)키리에로된 전주곡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합주음악(concert-ed music)으로 연주된다

4)제단 앞에서의 인토네이션(영창)

5)사도 서간문 낭독

6)탄원(the Litany)기도 노래

7)코랄에 의한 전주곡(과 코랄연주)

8)복음서 낭독

9)본작품(칸타타)의 전주곡(과 칸타타 연주)

10) 사도신경 노래(루터의 신경 찬송가)

11) 강론

12) 강론 후 평상시대로 찬미가 몇 절 노래

13) (성찬식)제정말씀

14)작품의 전주곡(과 그 연주)-(칸타타의 2번째 부분인 듯 싶음) 그 다음에는 전주와 코랄을 노래해는 것이 영성체가 끝날 때까지 교대로 계속된다.


바이마르에서 작곡된 칸타타들 중에서 특히 1714년의 제61번 <오라, 이방인의 구세주여>는 면밀하게 연구해 볼 만하다. 에르트만 노이마이스터(Erdmann Neumeister)가 작사한 가사는 코랄 시구들과, 새로 만들어진 운문시와 성경에서 발췌한 산문들이 결합되어 있다. 개시악장은 코랄<Num,Komm, det Heiden Hei-land>의 가사와 선율에 기초하고 있는데, Bach는 이것을 이용하여 프랑스 서곡의 양식과 형식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변주곡을 작곡하였다. 이런 장르를 선택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바흐는 이 당시 외국적인 여러 양식을 자신의 작품 안으로 동화시키는 데 몰두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이 곡이 교회력의 시작, 즉 ouverture인 대림절 제1일요일을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속적 형식과 루터파 찬미가를 장식한 것의 병치는 젊은이다운 독창성으로 가득 차있어 예술작품으로서 가치를 완벽하게 인정받을 만하다. 구세주의 도래를 알리는, 행의 길이가 고르지 못한 하나의 절(stanza)인 첫 번째 레시터티브는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카바타(cavata)란 기법을 빌어온다. 이 기법은 어느 한 레시터티브의 마지막 시행 혹은 시행들에서 짧은 아리아 악절을 위한 가사를 끌어오는(cavare)것이다. 보다 형식을 갖춘 약강격(iambic)의 절로 된 첫 번째의 진정한 아리아는 시칠리아노(sicilano)로-민속무용에 바탕을 둔 또 하나의 오페라 장르- 이는 달 세뇨 반복, 즉 첫 번째 리토르넬로를 생략한 다 카포를 사용한다. 교회로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대목을 바흐는 목가적인 연가로 바꾸었다.
요한 계시록3장 20절에서 발췌한 산문가사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에 작곡한 그 다음의 레시터티브는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서 앞뒤에 피치카토로 연주하는 5성부 현악 합주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뒤따르는 아리아에서 노이마이스터는 그리스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그분께 마음을 여는 경배자의 감정을 토로하는 강약격(trochaic)의 시를 한편 썼다. 이것은 다 카포를 갖는 통주저음 아리아라는 친숙한 매개체로 되어 있다. 마지막 악장은 코랄<Wie Schon leuchtet der Morgensten>의 후렴<Abgesang>중의 마지막 절의 마지막 몇 행 “오소서, 그대 아름다운 면류관이시여” 부분을 모테트풍으로 정교하게 다듬어놓았으며, 여기서 면류관은 성악성부들 위에 자리한 바이올린 군의 음형의 화환으로 암시되어진다.
그의 칸타타들 중에서 약 200곡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는 라이프치히를 위해 새로 작곡된 것들도 있고, 그 이전의 작품들을 다시 고쳐놓은 것들도 있다. 초기의 칸타타에서는 가사에 나타나는 감정과 이미지 변화에 대한 작곡가의 시적인 반응이 강렬한 극적 표현과 예측할 수 없으리만큼 다양한 형식의 음악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 있으며, 후기의 라이프치히 칸타타들은 감정 면에서 비교적 덜 주관적이고 구조적인 면에서는 규칙적이다. 그러나 바흐의 칸타타가 지니는 무한한 다양성과 풍부한 창의성, 기술적 완성도, 종교적 헌신 등은 일반적인 어떤 표현으로도 묘사가 힘들다. 이와 같은 광대한 음악적 보고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칸타타 제4번과 제80번》
바흐는 그의 칸타타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코랄 선율을 사용하였다. 칸타타 제4번인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 누우셨네-Christ lag in Todesbanden>는 그 이전의 곡을 개작해서 1724년에 라이프치히에서 불려지긴 했지만 옛 코랄 변주곡의 형식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곡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치히 시대에 쓰여진 칸타타의 가장 일반적인 골격은 1715년에 작곡되고 그 이후(1723) 개작된 제80번 < 내 주는 강한 성- Eim’ feste Burg ist unser Gott>에서 사용된 것이다. D장조의 첫 합창은 코랄 첫 절의 가사와 선율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웅대한 판타지아 이다. 코랄의 선율선을 자유롭게 변형한 성악 선율선이 각 악구를 차례로 푸가풍으로 도입하면, 트럼펫의 이 악구의 장식없는 연주가 클라이맥스로서 클라리노(clarion)음역에서 이어지며[26], 이 때 베이스 악기가 엄격한 카논으로 여기에 응답한다. 이런 식으로 선율은 각 악구 악구를 늘임으로써 223마디나 되는 거대한 음의 건축물이 된다. 다음 곡 역시 D장조로서 소프라노와 베이스를 위한 2중창이다. 소프라노가 장식된 선율로 제2절 코랄 가사를 부를 때 베이스는 한층 더 장식적이긴 하지만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선율로 소프라노 가사에 적당한 주석이 되고 있는 별개의 가사를 부른다. 여기에 반주는 동음(unisono)으로 연주하는 현악기군의 끊임없는 결렬한 16분 음표 음형과 8분음표로 움직이는 통주저음성부가 맡고 있다. 짜임새는 4개의 독립된 대위법적 성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에서가장 높은 음역의 독주소프라노는 오보에에 의해 중복되고 더욱 장식된다. 이어서 베이스를 위한 레시터티브와 아리오소, 그리고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B단조)가 나오는데 둘 다 삽입된 시의 가사로 되어 있다. 코랄의 제 3절은 코랄 전주곡의 형식으로 작곡되고 그 선율은 유니즌 합창으로 나타나는데, 이 때 각 악구는 활기찬 박자의 리듬으로 오케스트라 전체에 의해 도입되며 반주된다. 그 뒤로 테너를 위한 레시터티브-아리오소와테너, 알토를 위한 조용히 진행되는 2중창(G장조)이 계속되고, 성악 성부를 중복하여 연주하는 악기들과 함께, 전체합창(회중들 또한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을 위한 꾸밈없는 4성부 합창으로 코랄의 마지막 절이 제4절이 불려지면서 칸타타는 끝을 맺는다.
이 곡처럼 확장된 코랄 판타지아로 시작하여 같은 코랄의 간단한 4성부 화성편곡으로 끝맺으며, 중간 곡들에서 코랄 선율 혹은 가사를 이용하거나 다르게 편곡한 칸타타들이 바흐의 라이프치히 시기에 많이 작곡되었다. 정신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그것들은 모두 교회 전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모든 칸타타를 하나로 묶는 통일적인 구도는 없다. 2개 이상의 코랄을 사용하며 칸타타가 많긴 하지만. 끝날 때에만 코랄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또 코랄 가사 또는 그것의 패러프레이즈를 사용하면서도 몇몇 절에는 새로운 음악을 붙인 것도 있으며 코랄을 사용하지 않은 것도 몇 곡 있다. 이시기에는 또한 독창 칸타타도 몇 곡 있는데 그 중에서도 소프라노를 위한 제 51번과 베이스를 위한 제82번이 특히 주목할 만 하다.

《Nun komm, der Heiden Heiland (자 오라 이교도의 구세주여), BWV62》
1724년 예수 강림절 첫 일요일을 위해 작곡된 Nun komm, der Heiden Heiland (자 오라 이교도의 구세주여), BWV62는 바흐의 칸타타가 진닌 일부 전형적인 진행을 잘 보여주고 있다. 라이프치히를 위해 작곡한 2번째 연곡에 속해 있는 이 곡은 음악과 가사가 코랄에 기초하고 있는 코랄 칸타타이다. 이 칸타타 텍스트를 쓴 무명시인은 시작과 결말 부분의 합창을 위해 코랄의 처음과 마지막 연 (stanza)을 사용하였고, 시의 중간 연을 레치타비보와 아리아에 적합하게 패러프레이즈하였다. 그 뒤에 바흐는 도입부 합창을 코랄 선율에 기초해서 만들었으며 종결 부분의 연을 위해서는 코랄을 단순한 4성부로 화성화하여 작품을 마무리했다. 중간 부분은 독창을 위해 오페라 양식으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음악을 붙였고 몇 부분만 코랄 선율 자체를 언급하고 있다. 이 칸타타를 위해서 바흐와 대본 작가는 루터의 예수 강림절 코랄인 <자 오라 이교도의 구세주여>를 활용하였다.
우리가 바흐 코랄 작품을 보면 자주 알 수 있듯이, 합창 도입부에는 온갖 정교하고 독창적인 여러 장르가 섞여 있으며, 이 곡에는 협주곡과 코랄 모테트가 등장한다. 오케스트라는 비발디 협주곡이 그러했듯이 활기찬 리토르넬로로 시작하는 반면, 코랄은 (예19.5)와 같이 베이스에서 고정 선율로 기능하는 특징을 보인다. 반복하며 상행하는 음형은 구세주가 오심을 알리는 코랄 가사 문맥에 맞춰 환영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협주곡에서도 이 리토르넬로는 악장을 이루는 하나의 틀로 작용하여 마지막에 으뜸조로 완전히 반복되기 전 축소되거나 이조된 형태로 세 번이나 재등장한다. 한편 에피소드 대신 바흐는 합창 부분에 있는 4개의 코랄 악구를 소개하여 고정 선율 양식으로 음악을 붙였다. 호른으로 중복되고 있는 소프라노는 각각의 악구를 긴 음가로 부르고 다른 세 성부는 모방 대위법으로 움직인다. 그러는 동안 오케스트라는 리토르넬로에서 나온 동기를 계속해서 발전시킨다. 코랄에 기초하여 체계적 모방기법으로 움직이는 저음 성부에 이어 첫번째와 세번째 악구가 제시된다. (예19.6)은 첫번째 코랄 악구를 위해 그에 앞선 모방과 그 뒤를 이어 소프라노가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모델을 혼합하고 구양식인 대위법과 고정 선율이 현대적인 이탈리아 양식과 섞여있는 것이 바로 바흐 음악의 특징적인 모습이며 이러한 특성으로 바흐는 익숙한 많은 음악 유형을 참조하여 깊이 있는 음악적 의미를 창조하였다.
4개의 독창 진행은 오페라 표현 방식으로 종교적인 가사에 음악을 붙였다. 테너가 부르는 다카포 아리아는 육화(incarnation)(된 신비를 명상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라고 하듯 바흐는 뚜렷이 구분되는 4마디 악구로 섬세한 양식의 미뉴에트 스타일의 아리아를 만들었고, 춤을 통해 육체의 느낌을 깨우는 느낌이 떠오르게 된다. 그 다음 베이스가 부르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는 구세주를 악을 누른 영웅으로 칭송한다. 레치타티보는 단어 '달린다' (laufen) 부분에서 가사 그리기(word-painting)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아리아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내내 옥타브로 연주하고 빠른 진행과 넓은 음역의 움직임, 도약하는 아르페지오를 강조하는 음형으로 영웅적이고 용감한 아리아를 만드는 오페라 관습을 따르고 있다. 소프라노와 알토는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로 결합되어 탄생 장면을 보고 경외심을 갖는 모습을 표현하듯이 병행3도와 6도로 부드럽게 진행한다. 종결부의 코랄 운문은 성부,성자, 성령을 찬미하는 영광송의 형태로 마친다.
  • 세속 칸타타
바흐의 세속 칸타타는 대개 음악극(drama per musica)이라는 표제를 가지며 다양한 경우를 위해 작곡되었다. 같은 음악의 일부를 세속 칸타타와 교회 칸타타 양쪽에 사용한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예컨대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중 11곡은 세속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잇으며, 이 곡들 중 6곡은 <갈림길의 헤라클레스- Hercules auf dem Scheidewege>(BWV 213)에 수록되어 있다. ‘음악극’ 으로 가장 뛰어난 것들 중에 <푀부스와 판> (BWV 201)과 1733년 아우구스투스 3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쓰여진 <다가오라, 물결치는 파도여-Schleicht spielendeWellen>(BWV206)등이 있으며, 또한<커피칸타타> (1734-35년경,BWV 211)와 익살스러운 <농민 칸타타>(1742 BWV212)는 바흐의 보다 가벼운 음악으로서의 유쾌한 실례가 되어주고 있다. 1730년대의 칸타타들 중 몇 곡에서 바흐는 새로운 갈랑(gallant) 양식을 시도하였다. 그는 성악 선율을 강조하는 한편 반주부를 정교하게 만들려는 자신의 성향을 누그러뜨렸으며, 새로운 오페라 양식의 또 다른 매너리즘에 몰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선행, 후행 악구들이 대칭적으로 분할되는 선율들을 만들어냈다.

  • 모테트
바흐 시대에 라이프치히에서 모테트라는 말은 성서나 코랄 가사에 오블리가토의 기악성부를 가지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대위법 양식으로 쓰여진 합창곡을 의미하였다. 라이프치히의 교회들에서 부르던 모테트는 비교적 짧은 길이에 예배를 시작하는 음악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보통 그것들은 옛 작품들의 전통적인 목록에서 선택되었으며 칸토르가 새로운 모테트를 공급할 필요는 없었다. 남아있는 바흐의 6곡의 모테트들(BWV225-230)은 추도예배, 장례식, 혹은 생일과 같은 이중 합창용이다. 성악 성부들은 항상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지만, 바흐 시대에는 이러한 곡들이- 예를 들어 모테트 양식으로 되어 있는 칸타타 제38번의 첫 합창처럼 –악기로 중복되었을 것이라는데 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테트 중에는 코랄 선율이 들어가는 것이 많이 있다. 5성부로 된 <나의 기쁨 예수-Jesu meine Freude>에서는 11개의 악장 중 6개가 코랄을 사용하고 있다.
5성부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대규모의 <마니피카트>(1723, 1728~31년경 개작, BWV 243)는 바흐의 작품 중 가장 선율적인 작품 중의 하나로, 양식 면에서 그의 대부분의 교회음악과 비교해 보다 더 이탈리아적이다. 1734-35년 라이프치히에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오라토리오>(BWV 248)는 크리스마스주현절(삼왕예배의 축일)에 부를 수 있는 6곡의 칸타타를 모은 것이다. 성서이야기(누가복음 2장 1~21, 마태복음 제 2장 1~12)는 레시터티브로 불려지며, 적절한 아리아와 합창들이 다양한 에피소드에 대한 주석이나 반영으로 덧붙여진다. ‘오라토리오’라는 명칭은 보통의 칸타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체의 요소가 있음으로 해서 정당화되고 있다.

  • 수난곡
교회음악가로서 바흐가 그 장점에 이른 작품성은 성 요한과 성 마태 복음서에 의한 수난곡이다. 구조 면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이 두 작품들은 오라토리오 양식으로 복음서의 수난 이야기를 작곡하는 북부 독일의 전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바흐는 <요한수난곡>(1724, 후에 개정,BWV 245)은 요한복음서 18-19장, <마태수난곡> (1727, 1736년 개정)은 마태 복음서 26~27장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다. 14곡의 코랄 이외에, 자신의 시구를 비롯하여 그 당시 널리 애창되던 브로케(B.H.Brockes)의 수난시대를 추가된 서정적인 곡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사용하였다. 1724년 라이프치히에서 성금요일날 초연되었던 이 곡은 후에 여러 번 수정되어 연주되었다.
1727년 성금요일에 초기 형태로 초연되었던 2중 합창(double chorus), 독창, 2중 관현악 그리고 2개의 오르간을 위한 <마태수난곡>(BWV 244)은 서사적인 장대함을 지닌 극(drama)으로, 모든 음악 분야에 있어서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들 중 가장 고귀한 영감에 넘쳐있는 작품이다. 가사는 마태복음서의 제26장과 제27장에서 가져왔으며, 이것은 테너 독창의 레시터티브와 합창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곳곳에 아리오소 레시터티브가 앞에 붙어있는 수많은 아리아, 코랄, 2중창들이 삽입된다. <수난코랄>은 서로 다른 조성과 4종류의 각기 다른 4성부 화성으로 다섯 번 나타난다. 이 수난곡에 덧붙여진 레시터티브와 아리아의 가사를 쓴 작가는 헨리치(C.F.Henrici 1700-64, 필명, 피칸더(Picander))라는 라이프치히의 시인으로 이 밖에도 바흐의 수많은 칸타타에 기사를 썼다. <요한 수난곡>에서와 같이 합창은 때때로 사건에 참여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리스 연극의 합창과 같이 사건에 반응하거나 사건을 소개하는 발언하는 관객이기도 하다. 제1부의 처음과 마지막 합창은 방대한 코랄 판타지아로서, 첫 곡에서 코랄 선율은 소프라노 성부들로 이루어진 특별한 리피에노 성가대에게 주어진다.
<마태수난곡>은 루터파교회 음악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이 안에 있는 코랄, 콘체르타토 기법, 레시터티브, 아리오소, 그리고 다 카포 아리아들은 하나의 종교적 주제를 통괄하는 장엄함을 중심으로 결합되어 있다. 코랄을 제외한 이 모든 요소들은 이 시대 오페라의 특성이기도 하다.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이 모두 극적이고 연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바흐는 비록 한 교회의 오페라도 쓰지 않았지만 오페라의 어법, 형식, 그리고 그 정신은 수난곡들 안에 충분히 나타나 있다.
두 수난곡 모두 테너가 레치타티보로 성경 이야기를 언급하면 독창자들은 예수와 다른 인물 역을 연기하고 합창은 제자들과 군중을 비롯한 다른 집단의 가사를 노래한다. 또 다른 경우에는 그리스극에 나오는 합창의 역할처럼 합창이 사건을 진술하기도 한다. 그 사이에 끼어든 레치타티보, 아리오소, 아리아는 유사한 목적으로 작용하며 이야기를 반영하여 개별적인 숭배자와 의미를 관련시킨다. 이제는 비록 거대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연주되지만 연주부분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바흐의 수난곡이 단지 4명의 독창과 4병의 작은 합창단을 위한 것으로 의도됬음을 제시하고 있다.이들 가수는 자기들끼리 역할을 나누기도 하고 합창 진행 시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b단조 미사는 통일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747년과 1749년 사이에 바흐가 전에 작곡해 놓은 음악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었다. 키리에와 글로리아는 1733년에 폴란드가톨릭 왕이며 작센 지방의 선제후였던 프레데릭 아우구스트 2세에게, 그 교회의 명예직에 임명해달라는 청원서- 이 청원은 3년 후에야 겨우 받아들여졌다-와 함께 헌정된 것이다. 상투스는 1724년 크리스마스 때 초연되었다. 다른 악장들 중 일부는 칸타타의 합창부분들을 빌려오기도 했는데, 이 때 독일어 가사는 미사의 라틴말로 대체되었고 음악은 때때로 다시 작곡되었다. 이들 중 글로리아의 두 부분(section), <감사드립니다-Gratias agimus>(이 음악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Dona nobis pacem>에도 반복사용)와 <키 톨리스-Qui tollis>는 각각 칸타타 제29번(1731)과 칸타타 제46번(1723)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바흐가 크레도에 다른 이름을 붙인 ‘심볼룸 니케름(Symbolum nicenum)’ 중 이미 작곡된 음악에서 가져온 부분들을 살펴보면 칸타타, 제 12번(1714년)에서 <십자가에 못박혀-Crucifixus>, 칸타타 제 120번에서 (1728-29,NAWM91c)에서 “Etexpecto”, 칸타타 제 171번(1729?)에서 “Patrem omnipotentem”, 1734년 세속 칸타타 제 215번에 재사용된 1732년의 분실된 칸타타에서 “Osanna”, 그리고 칸타타 제 11번(1735)에서 가져온 “Agnus Dei” 등이 있다. “Et resurrexit”는 어느 분실된 콘체르토 악장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새롭게 작곡된 부분들은 크레도의 첫 부분인 Et in unum Dominum”, “Et in spirtru”, 그리고 베네딕투스이다. 새로 작곡된 부분들 중에 크레도와 ‘confiteor’는 옛날양식(stile antico)’으로 쓰여졌으며, 반면 “Et in unum Dominum”, “Et in spirtru” 그리고 베네딕투스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 모두와 첨예하게 대조를 이루는 ‘근대적 양식(modern style)’으로 되어 있다. 라틴미사의 축소된 형식이 전례에 여전히 사용되고 있던 라이프치히에서 몇 개의 부분이 연주되었지만, 바흐는 이 작품 전곡이 연주되는 것을 듣지는 못했다.

Mass in BMinor,BWV 232
2대의 오보에 다모레(oboe d’more)와 베이스 독창을 위한 <Et spirtum sanc-tum>(NAWV91a)은 수많은 바흐의 후기 작품들처럼 반복되는 악구들. 병행 3도, 그리고 느린 화성적 리듬과 같은 갈랑(gallant) 양식의 흔적을 보여준다. 더욱, 현대적인 특징은, 성악성부가 노래할 때 오블리가토 악기들에 대해서는 piano를, 노래하지 않을 때는 forte를 명시함으로써 기악 부분을 성악 성부에 종속시키는 데 많은 신경을 쓴 점이다. 이 아리아는 기악 리토르넬로와 정교한 성악 성부가 함께 같은 주제를 공유하는, 이례적으로 하나의 주제를 갖는 곡이다. 구조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은 A장조, E장조, 그리고 다시 A장조로 돌아가는 12마디의 리토르넬로로 된 세 부분의 생략되지 않은 악구이다. 때때로 어색한 가사 붙임은 그 음악이 원래는 다른 가사에 붙여졌던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반면 Confiteor(NAWM 91b)는 분명히 처음부터 이 가사에 붙여졌던 음악임에 틀림이 없다. 크레도의 시작 부분에서처럼 바흐는 여기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크레도 Ⅱ(Liber uduslid)로부터 적절한 대목을 전선율로(73마디에서 시작하는 테너에서 찾을 수 있음) 취하고 있다. 합창 성부들은 알라 브레베(allabreve)박자표 (C)와 푸가적 진행으로 특징지워지는 ‘옛 양식(stle antico)’ 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통주저음 반주는 준 오스티나토 베이스로 근대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Et expecto”라는 가사에서 바흐는 정선율을 쓰지 않고 극도의 반음계와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과도적인 아다지오를 썼는데. 이것은(빠른 템포로의 변화로 나타내어지는)부활로 인해 부정될 죽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립니다-Etexpecto resurectionem>(NAWM91C)라는 가사를 반복하며 뒤따르는 화려한 비바체와 알레그로는 합창<외쳐라, 그대 즐거운 음성이여-Jauchzet, ihr erfreutenStimmen>의 개작으로, 여기에서 칸타타 합창의 순수기악음악의 일부가 코랄풍의 푸가를 반주하도록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다.
새로운 상황을 위해 전에 작곡한 음악을 개작하는 바흐의 습관은 과중한 업무에의 독특한 적응 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많은 생각과 창조적 에너지를 쏟아 부었었던 것을 다소 다른 모습의 음악으로 새롭게 들을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의 목표는 당면한 연주가 아니라 전통적인 가톨릭 미사(Mass)라는 매개체 안에서 보편적인 종교적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방식으로 바흐는 정선된 단명할 뻔했던 악장들에게 그것들이 충분히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영속성을 부여하였다 만약 그가 이것을 후대까지 이르는 미사곡으로 생각했다면 그는 그가 가질 수 있었던 불멸성에 대한 어떠한 환성도 넘어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아마도 팔레스트리나를 제외하고는 그의 전에 있던 어떤 작곡가도 바흐가 후세에 누렸던 것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5.5. 그 외



바흐는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6곡(쾨텐, 1720, BWV 1001-1006)과 <무반주첼로를 위한 모음곡> 6곡(쾨텐, 1720년경, BWV 1007-1012), 그리고 <무반주 플루트를 위한 파르티타>1곡(BWV1013)을 작곡했다. 이들 작품에서 그는 독립된 성부들의 상호작용을 대체적으로 윤곽지우거나 암시하는 중음주법 또는 단독의 선율선을 통해서 화성적, 대위법적 구조를 실제 들리는 것처럼 만드는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러한 기법은 르네상스의 류트작곡가 들로부터 비롯되었으며, 프랑스의 류트 작곡가들과 클라브생 작곡가들의 양식과도 관련이 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d단조>의 샤콘은 이러한 형식으로 된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합주 형식을 된 실내악으로서 중요한 바흐의 작품들로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쾨텐, 1717-23, BWV1014-1019), <바이올린 다 감바와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쾨텐 1720년경 BWV1027-1029), <플루트와 하프시코드를 의한 소나타>(주로 쾨텐, 1717-23, BWV 1030-1035)가 있다. 이 작품들 대부분은 교회 소나타와 마찬가지로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 의 순서로 된 4개의 악장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하프시코드의 왼손성부가 통주저음을 연주할 때 오른손 성부는 다른 악기의 선율과 대위법적으로 2중주를 이루는 돌입된 하나의 선율선을 연주하도록 쓰여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상 이러한 곡들 대부분은 트리오 소나타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양식과 독일 양식의 배합은 쾨텐에서 작곡되어 1721년 브란테부르크 후작에게 헌정된 바흐의 6곡의 콘체르토(BWV 1046-1051)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첫 번째 곡을 제외한 모든 곡에서 바흐는 이탈리아 콘체르토에 흔히는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 구조를 사용하였으며, 3화음으로 된 주제, 쉼 없이 몰고 가는 리듬, 그리고 알레그로 악장의 리토르넬로 형식도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독주와 총주의 주제적 통합으로 심화하고<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 제5번의 긴 카덴차와 같은 기법들로 형식을 확장하며, 같은 콘체르토의 다 카포 형식으로 된 것처럼 정교하게 발전된 푸가를 도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수많은 독특한 특성을 그것들에 각인시켜 놓았다. <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의 제 3번과 제6번은 특정한 독주악기들이 없는 리피에노 콘체르토(ripieno concerto)이고, 그 밖의 곡들은 현악과 통주저음으로 된 악기군에 대해 다양한 조합의 독주악기들이 사용되고 있는 콘체르토 그로소이다.
바흐는 또한 독주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그리고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한곡의 콘체르토)2곡을 썼으며, 하프시코드를 위한 콘체르토를 쓴(혹은 편곡한)최초의 작곡가 중 한 사람 이었다. 그는 독주 하프시코드와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를 7곡. 2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을 3곡, 3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을 2곡, 그리고 4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을 1곡 작곡했는데 이 마지막 곡은 비발디의 <4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콘체르토>를 편곡한 것이다. 사실, 모두는 아니더라도 하프시코드 콘체르토의 대부분은 바흐 자신이나 다른 작곡가들에 의한 바이올린 곡을 편곡한 것이다. 게다가 바흐는 그의 실내음악과 관현악 작품들 중 몇 개 의 악장들을 라이프치히 시대에 칸타타용으로 편곡하였다.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E장조>(BWV1006)의 전주곡은 칸타타 제 29번의 신포니아로서 대교모의 관현악 편곡이 되어 있다.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 제3번의 1악장은 관현악에 2개의 호른과 3개의 오보에가 덧붙여져서 칸타타 제174번의 신포니아가 되었다. 또한 독주 클라비어 콘체르토의 악장은 적어도 5개 이상 칸타타에서 발견된다. 칸타타 제 110번의 첫 번째 합창은 <관현악 모음곡 D장조>(BWV1069)의 제1악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대부분의 다른 관현악 음악은 바흐가 라이프치히 콜레기움 무지쿰 (Collegium musicum)을 감독했을 당시인 1730년대 작곡되었다.  이 음악 닽체는 거의 다 대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8세기 초엽 이러한 기관들은 종종 공공 음악회를 개최했는데, 이름 아래 그림에서 보는 야외음악회와 유사한 형태였다. 라이프치히의 콜레기움은 1704년 텔레만이 설립한 이후 위와 같이 연주해왔다. 바흐는 분명 2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d단조 협주곡을 위의 음악회에서 연주할 목적으로 작곡하였다. 또한 바흐는 처음으로 1개 혹은 그 이상의 하프시코드와 관현악을 위한 협조곡을 작곡하거나 편곡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건반악기에 앉아 연주하면서 협주곡을 지도하였다. 4대의 하프시코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은 4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비발디 협주곡을 편곡한 것이다. 4개의 서곡(Overtures), 다시 말해 관현악 모음곡(쾨텐과 라이프치히, BWV 1066-1069)에는 바흐의 가장 원기왕성하고 매력적인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편성에 트럼펫과 팀파니가 덧붙여진 모음곡 제3번과 제4번이(라이프치히, 1729-31)옥외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데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G선상의 아리아>라고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은 제3번 모음곡의 느린 악장을 편곡해 놓은 것이다.

6. 주요 작품



바흐 입문자용 추천 음악

6.1. 작품목록



  • 바흐의 작품 목록은 장르별 구분에 따라 BWV[27]로 정리되어 있다.
  • 아래 주요 작품목록은 BWV 번호 순서대로 정리하여 작성하였다.
  • 중요한 작품, 인지도가 있는 작품은 굵은 글씨로 표시하였다.
  • 아래는 부분적인 내용만 서술하고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원한다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작품목록 문서로.

6.2. 성악곡/교회음악(BWV 1-524)



바흐, 마태 수난곡 중 Erbarme dich, mein Gott
  • 1-224: 칸타타(Cantatas) - BWV 200번까지는 교회칸타타, 201~224는 세속 칸타타이다.
    • Wie schön leuchtet der Morgenstern(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 샛별인가), BWV 1
    • Ach Gott, vom Himmel sieh darein(아 하나님이시여, 하늘에서 굽어보소서), BWV 2
    • Ach Gott, wie manches Herzeleid(아 하나님이시여, 마음에 고통이 많사오니), BWV 3
    • Christ lag in Todes Banden(예수께서 죽음의 속박에 놓여 계신다), BWV 4[28]
    • Wo soll ich fliehen hin(나 어디로 피할 것인가), BWV 5
    • Bleib bei uns, denn es will Abend werden(저녁이 되리니 나와 함께 있으라), BWV 6
    • Christ unser Herr zum Jordan kam(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요단강가에 오셨다), BWV 7
    • Liebster Gott, wenn werd ich sterben(사랑하는 하나님이시여, 저는 언제 죽게 되나이까), BWV 8
    • Es ist das Heil uns kommen her(구원이 우리에게 이르렀도다), BWV 9
    • Meine Seele erhebet den Herren(나의 마음은 주님을 찬양하도다), BWV 10
    • Lobet Gott in seinen Reichen(Ascension Oratorio)(승천 오라토리오), BWV 11
    • Weinen, Klagen, Sorgen, Zagen(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도다), BWV 12
    • Meine Seufzer, meine Tränen(나의 한숨, 나의 눈물), BWV 13
    • Wär Gott nicht mit uns diese Zeit(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다면), BWV 14
    • Herr Gott,dich loben wir(우리의 주 하나님이시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BWV 16
    • Wer Dank opfert,der preiset mich(감사하는 자, 나를 찬양하도다), BWV 17
    • Gleichwie der Regen und Schnee vom Himmel fällt(하늘에서 눈과 비가 내리듯이), BWV 18
    • Es erhub sich ein Streit(저 맹렬한 싸움을 보라), BWV 19
    • O Ewigkeit,du Donnerwort(오 영원이여, 우레 같은 목소리여), BWV 20
    • Ich hatte viel Bekümmernis(내 마음에 근심이 많도다), BWV 21
    • Jesus nahm zu sich die Zwölfe(예수께서 12제자를 모으셨도다), BWV 22
    • Du wahrer Gott und Davids Sohn(그대 진실한 하느님과 다윗의 아들이여), BWV 23
    • Ein ungefärbt Gemüte(꾸밈없는 마음), BWV 24
    • Es ist nichts Gesundes an meinem Leibe(내 몸 편치 못하도다), BWV 25
    • Ach wie flüchtig,ach wie nichtig(아아 얼마나 덧없는가! 아아 얼마나 허무한가), BWV 26
    • Wer weiß,wie nahe mir mein Ende!(내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누가 알랴!), BWV 27
    • Gottlob! nun geht das Jahr zu End(주를 찬양하라! 이제 한 해가 끝났도다), BWV 28
    • Wir danken dir, Gott, wir danken dir(주여, 감사드리나이다), BWV 29
    • Freue dich,erlöste Schar(기뻐하라! 구원받은 무리여), BWV 30
    • Angenehmes Wiederau, BWV 30a
    • Der Himmel lacht, die Erde jubilieret(하늘은 웃고, 땅은 환호하도다), BWV 31
    • Liebster Jesu, mein Verlangen(사랑하는 예수, 나의 소망), BWV 32
    • Allein zu dir,Herr Jesu Christ(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여), BWV 33
    • O ewiges Feur, O Ursprung der Liebe(오오 영원한 불길, 오오 사랑의 샘이여), BWV 34
    • Geist und Seele wird verwirret(마음도 영혼도 어찌할 바를 모르도다), BWV 35
    • Schwingt freudig euch empor(기쁘게 높이 날아오르라), BWV 36
    • Die Freude reget sich(이제 기쁨이 올라오네), BWV 36b
    • Schwingt freudig euch empor(기쁘게 높이 날아오르라), BWV 36c(BWV 36의 개작)
    • Wer da gläubet und getauft wird(믿고 세례받은 자는), BWV 37
    • Aus tiefer Not schrei ich zu dir(고통의 심연에서 나는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BWV 38
    • Brich dem Hungrigen dein Brot(굶주린 자에게 너의 빵을 나누어주거라), BWV 39
    • Darzu ist erschienen der Sohn Gottes(저곳에 주의 아드님이 나타나셨다), BWV 40
    • Jesu, nun sei gepreiset(주여, 이제 찬양하나이다), BWV 41
    • Am Abend aber desselbigen Sabbats(그러나, 같은 안식일의 저녁에), BWV 42
    • Gott fähret auf mit Jauchzen(주께서 환희의 외침 속에 승천하시다), BWV 43
    • Sie werden euch in den Bann tun(그들이 너희를 추방하리라), BWV 44
    • Es ist dir gesagt, Mensch, was gut ist(사람들이여, 너희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노라), BWV 45
    • Schaut doch und sehet,ob irgend ein Schmerz sei(보라, 고통이 어디에 있는지를), BWV 46
    • Wer sich selbst erhöhet,der soll erniedriget werden(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추어야 하느니), BWV 47
    • Ich elender Mensch,wer wird mich erlösen(나는 불행한 자, 누가 나를 구원하리), BWV 48
    • Ich geh und suche mit Verlangen(나는 가서 열렬히 구하리라), BWV 49
    • Nun ist das Heil und die Kraft(이제 구원과 힘이 오도다), BWV 50
    • Jauchzet Gott in allen Landen(만인이여, 환호하며 주를 맞이하라), BWV 51
    • Falsche Welt,dir trau ich nicht(거짓된 세상이여, 내 너를 의지하지 않느니), BWV 52
    • Schlage doch, gewünschte Stunde(), BWV 53
    • Widerstehe doch der Sünde(죄악에 맞서 네 자신을 굳게 지킬지어다), BWV 54
    • Ich armer Mensch, ich Sündenknecht(나는 가난한 자, 나는 죄악의 종), BWV 55
    • Ich will den Kreuzstab gerne tragen(나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노라), BWV 56
    • Selig ist der Mann(시련을 견디는 자는 행복하도다), BWV 57
    • Ach Gott, wie manches Herzeleid(아 하나님, 얼마나 마음의 고통이 심하시나이까), BWV 58
    • Wer mich liebet,der wird mein Wort halten(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킬지니), BWV 59
    • O Ewigkeit, du Donnerwort(오 영원이여, 우뢰 같은 목소리여), BWV 60
    • Nun Komm, der Heiden Heiland(자, 오라 이교도의 구세주여), BWV 61
    • Nun komm, der Heiden Heiland(어서 오소서, 이교도의 구세주여), BWV 62
    • Christen,ätzet diesen Tag(그리스도 신자여, 이 날을 명심하라), BWV 63
    • Sehet,welch eine Liebe hat uns der Vater erzeiget(보라,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BWV 64
    • Sie werden aus Saba alle kommen(그들은 모두 사바에서 오도다), BWV 65
    • Erfreut euch,ihr Herzen(네 마음을 기쁘게 하라), BWV 66
    • Halt im Gedächtnis Jesum Christ(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BWV 67
    • Also hat Gott die Welt geliebt(이토록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도다), BWV 68
    • Lobe den Herrn,meine Seele(내 영혼이여, 주를 찬양하라), BWV 69
    • Wachet! betet! betet! wachet!(깨어 기도하라, 마음을 가다듬으라!), BWV 70
    • Gott ist mein König(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 BWV 71
    • Alles nur nach Gottes Willen(모든 것은 오직 하느님의 뜻대로), BWV 72
    • Herr, wie du willst, so schicks mit mir(주여, 당신 뜻이라면 내게서 그것을 옮기지 마옵소서), BWV 73
    • Wer mich liebet,der wird mein Wort halten(나를 사랑하는 자,그가 나를 지키시리로다), BWV 74
    • Die Elenden sollen essen(가난한 자는 배불리 먹으리라), BWV 75
    • Die Himmel erzählen die Ehre Gottes(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도다), BWV 76
    • Du sollt Gott,deinen Herren,lieben(너희의 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 BWV 77
    • Jesu, der du meine Seele(예수, 내 영혼을 가져간 주님이여), BWV 78
    • Gott, der Herr, ist Sonn und Schild(주 하나님은 태양이시며 방패이시니라), BWV 79
    •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내 주는 강한 성이요), BWV 80
    • Jesus schläft,was soll ich hoffen?(예수 잠드시면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랴), BWV 81
    • Ich habe genug(나는 만족하나이다), BWV 82
    • Erfreute Zeit im neun Bunde(새로운 관계 속에서의 기쁨의 한 때), BWV 83
    • Ich bin vergnügt mit meinem Glücke(나의 행복에 만족합니다), BWV 84
    •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깨어나라고 우리를 부르는 소리), BWV 140 (솔 도레미 미레 파미 솔파 미도레 파미 시도)
    • Herz und Mund und Tat und Leben (마음과 입과 행동과 삶으로) BWV 147[29][30][31]


바흐, 칸타타 BWV147
바흐, 칸타타 BWV147 중 '예수, 인류 희망의 기쁨이여' 피아노 독주 버전


오보에오르간의 협연.
바흐, 칸타타 BWV147 중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 독어,영어,한국어 번역,가사
  • 결혼 칸타타 BWV202
  • 커피 칸타타 BWV211(가장 유명한 세속 칸타타)
  • 농민 칸타타 BWV212
  • 225-231: 모테트(Motet) - 225-230 6곡의 모테트는 합창음악 분야의 걸작이다.
  • Jesu, meine Freude(예수는 나의 기쁨) BWV 227[32]
  • 232-243: 미사곡 및 가톨릭 전례음악[33]
  • 미사 B단조 BWV 232[34]
  • Missa Brevis in F major(F 장조 미사 브레비스), BWV 233
  • Missa Brevis in A major(A 장조 미사 브레비스), BWV 234
  • Missa Brevis in g minor(g 단조 미사 브레비스), BWV 235
  • Misss Brevis in G major(G 장조 미사 브레비스), BWV 236
  • Sanctus in C major(C 장조 상투스), BWV 237
  • Sanctus in D major(D 장조 상투스), BWV 238
  • Sanctus in d minor(d 단조 상투스), BWV 239
  • Sanctus in G major(G 장조 상투스), BWV 240
  • Sanctus in D major(D 장조 상투스), BWV 241
  • Christie Eleison in g minor(크리스테 일레이손, g 단조), BWV 242
  • Magnificat in D major(마니피캇), BWV 243
  • 244-247: 수난곡[35]
  • 마태수난곡 BWV 244
  • 요한수난곡 BWV 245
  • 마가 수난곡 BWV 247[36]
  • 248-249: 오라토리오
  •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BWV 248[37]
  • 부활절 오라토리오 BWV 249
  • 250-438: 코랄(합창곡)
  • 3 Wedding Chorales(3개의 혼례용 코랄), BWV 250-252
  • 439-524: 독창곡(가곡, 찬송가, 아리아 등)
  • Komm, süßer Tod(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BWV 478

6.3. 건반음악(BWV 525-994)





바흐, 푸가 G단조 BWV 578
바흐, 코랄 전주곡 BWV 645
바흐, BWV 668




바흐, BWV 582
바흐, BWV 731
바흐, BWV 767
칼 리히터의 1969년 도쿄 실황녹음
  • 525–771: 오르간 음악
    • 토카타 D단조(Toccata in D minor) BWV 538
    • 환상곡과 푸가 G단조(Fantasie and Fugue in G minor) BWV 542 - 대푸가(Fugue the Great)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장대한 규모와 복잡한 구조를 지닌 작품. 프란츠 리스트에 의해 피아노로 편곡되었다.(S.463)
    • 전주곡과 푸가 A단조(Prelude and Fugue in A minor) BWV 543
    • 전주곡과 푸가 E플랫 장조 "성 안느"(Prelude and Fugue in E-flat Major, "St. Anne") BWV 552
    • 토카타와 푸가 D단조(Toccata and Fugue in D minor) BWV 565 - 바흐의 오르간곡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오르간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오르간곡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곡의 맨 앞소절인 띠로리~ 띠리리리리리리~ 하는 부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인기를 떠나서 작품성 측면에서만 보면 바흐의 오르간 작품 가운데 이 565에 못지 않거나 오히려 능가하는 작품들이 많다.
    • 작은 푸가 G단조(Fugue in G minor) BWV 578 - 같은 조성인 BWV 542가 대푸가라고 불리우는 것에 비견해서 작은 G단조 푸가라고 불리우는 곡. 그렇다고 fuguette보다는 규모가 꽤 있는 작품. 대신에 전주곡 같은 건 없고 푸가 하나만 있다.
    • 파사칼리아와 푸가 C단조(Passacaglia and Fugue in C minor)BWV 582: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와 마찬가지로 바흐도 오르간을 위한 파사칼리아는 딱 1곡만 작곡했다. 인기 측면에서는 토카타와 푸가 D단조(BWV 565)에 밀리지만 음악적으로는 바흐의 작품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오르간곡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걸작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피아노나 관현악 편곡 등으로도 많이 연주된다.[38] 작곡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1706~1713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 역사적인 명작을 20대 초중반에 썼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 코랄 전주곡 1집: 소 오르간곡집(Little Organ Book) BWV 599-644
    • 코랄 전주곡 2집: 쉬블러 코랄(Schübler Chorales) BWV 645-650
    • 코랄 전주곡 3집: 라이프치히 코랄 전주곡 (Leipzig Chorale Preludes) BWV 651-668
    • 코랄 전주곡 4집: 독일 오르간 미사(German Organ Mass, part of Clavier-Übung III) BWV 669–689[39]
    • 코랄 전주곡 5집: 키른베르거 코랄 전주곡(Kirnberger chorale preludes) BWV 690–713
    • 캐논 변주곡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가 왔도다"(Canonic Variations on "Vom Himmel hoch da komm' ich her") BWV 769[40]
    • BWV 1090-1120 뉴마이스터 코랄(Neumeister Chorale)[41]



영국 모음곡 BWV 808
파르티타 BWV 829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BWV 903
  • 772–994: 하프시코드 음악
    • 인벤션과 신포니아[42] (Inventions and Sinfonias) BWV 772–801
    • 영국 모음곡(English Suites) BWV 806–811
    • 프랑스 모음곡(French Suites) BWV 812–817
    •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Partitas for keyboard) BWV 825–830
    • 프랑스 서곡(French Overture) BWV 831
    •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The Well-Tempered Clavier I) BWV 846–869
    •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2(The Well-Tempered Clavier II) BWV 870–893
    •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d 단조 BWV 903
    • 토카타(Toccatas) BWV 910-916
    • 이탈리아 협주곡 F장조 BWV 971 [43]
    • 협주곡 d단조 Adagio BWV 974 [44]


협주곡 d단조 Adagio BWV 974
협주곡 d단조 Adagio BWV 974(피아노버전, 2악장)
  • 골드베르크 변주곡 G장조 BWV 988
  • 친애하는 형의 이별에 붙이는 카프리치오(Capriccio sopra la lontananza del suo fratello dilettissimo) BWV 992[45]

6.4. 독주악기 음악(BWV 995-1013)



  • 995–1013: 류트,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독주를 위한 음악[48]
    • 류트를 위한 모음곡 BWV 995-1000[46]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BWV 1001-1006 [47]
    • 무반주 첼로 모음곡 BWV 1007-1012
    • 무반주 플루트를 위한 파르티타 A단조 BWV 1013

6.5. 실내악/관현악(BWV 1014-1071)


  • 1014-1040: 실내악(건반악기 반주가 있는 소나타, 트리오 소나타)
    •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 1~6번 BWV 1014-1019
  • 1027-1029: 비올라 다 감바와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 비올라 다 감바와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1번 G장조 BWV 1027
    • 비올라 다 감바와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2번 D장조 BWV 1028
    • 비올라 다 감바와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3번 G장조 BWV 1029[49]
  • 1041–1071: 관현악곡(협주곡, 모음곡)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A단조 BWV 1041
    • 바이올린 협주곡 2번 E장조 BWV 1042[50]

바이올린 협주곡 2번 E장조 BWV 1042, 1악장 Allegro
  •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BWV 1043 [51]
  • 플루트, 바이올린, 하프시코드를 위한 3중 협주곡 A단조 BWV1044
  •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BWV 1046-1051 [52]
  •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 BWV 1052-1065[53]
  • 하프시코드 협주곡 1번 D단조 BWV1052 [54]
  • 하프시코드 협주곡 2번 E장조 BWV1053
  • 하프시코드 협주곡 3번 D장조 BWV1054 [55]

하프시코드 협주곡 3번 D장조 BWV1054
  • 하프시코드 협주곡 4번 A장조 BWV1055
  • 하프시코드 협주곡 5번 F단조 BWV1056 [56]

바이올린 협주곡 5번 G단조 BWV1056R(바이올린 협주곡버전) 2악장 Andante
  • 하프시코드 협주곡 6번 D단조 BWV1057 [57]
  • 하프시코드 협주곡 7번 G단조 BWV1058 [58]
  • 하프시코드 협주곡 D단조 BWV1059 [59]
  • 2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1번 C단조 BWV1060
  • 2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2번 C장조 BWV1061
  • 2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3번 C단조 BWV1062
  • 3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1번 D단조 BWV1063
  • 3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2번 C장조 BWV1064
  • 4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A단조 BWV1065 [60]

4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A단조 BWV1065
  • 관현악 모음곡 1~4번 BWV1066~9
    • 관현악 모음곡 1번 C장조 BWV1066: 오보에2, 바순, 바이올린 2부, 비올라, 통주저음
    • 관현악 모음곡 2번 B단조 BWV1067: 플루트, 바이올린 2부, 비올라, 통주 저음
      • 플루트의 활약이 큰 편으로 이 중 '폴로네즈'는 그룹 로스 차코스가 안데스의 악기로 연주하게 편곡하였는데, 분위기가 어둡다.들어보기
      • 마지막 곡인 '바디네리'(Badinerie) 역시, 클래식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을 유명한 곡이다.#
    • 관현악 모음곡 3번 D장조 BWV1068: 오보에2, 바순, 트럼펫3, 팀파니, 바이올린 2부, 비올라, 통주저음
      • G선상의 아리아가 이 곡의 아리아에서 나왔다.[61]
    • 관현악 모음곡 4번 D장조 BWV1069: 오보에3, 바순, 트럼펫3, 팀파니, 바이올린 2부, 비올라, 통주저음
      • 4개의 곡 중 규모가 가장 크다.

6.6. 대위법 실험 작품(BWV 1072-1080)



7. 평가



7.1. 오르가니스트로서의 평가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그의 발은 페달 위를 날아다녔고, 힘찬 소리가 천둥처럼 교회안에 쩌렁쩌렁 울려펴졌다.'''

- 콘스탄틴 벨러만(Constantin Bellermann), 바흐의 1732년 카셀에서의 연주를 듣고

'''라이프치히의 바흐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오르간 연주로 헨델을 쉽게 능가할 수 없다.'''

요한 마테존, 『완전한 악장''Der Vollkommene Capellmeister(1739)''』 中

'''그러나 특히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유래된 오르간 연주의 예술은 당시 프로베르거, 파헬벨, 라인켄,북스테후데, 브룬스 등에 의해 상당히 진보된 단계에 있었다. 마침내 칭송받아 마땅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이것을 근래 가장 완벽한 단계에 이르게 하였다. 그가 사망한 지금에 와서는 이것이 다시 퇴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요한 요아힘 크반츠, 『가로플루트 연주법''Versuch einer Anweisung die Flöte traversiere zu spiele(1752)''』 中

'''그는 오르간 연주의 예술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오르간의 구조 역시 샅샅이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오르간의 배열을 그리거나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 1754년 카를 필립 엠마누엘과 요한 프리드리히 아그리콜라가 쓴 추도문 中

'''바흐는 정확성을 철저히 유지하면서 빠른 악구를 페달로 연주하였다. 레지스트레이션의 변화를 너무도 부드럽게 이어갔기 때문에 청중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에 현혹되었다.'''

- 다니엘 프리드리히 슈바르트

'''오르간의 레지스트레이션[62]

에 관해 그분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르가니스트들은 아버지가 오르간 앞에 앉아서 연주하기전에 나름대로 스톱들을 빼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리곤 했습니다. 그들 생각에서 아버지가 구상하는 것처럼 효과가 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간담이 서늘해지는 효과가 서서히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체계적인 지식은 아버지와 함께 영영 사라졌습니다.'''

-카를 필리프 엠마누엘 바흐,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에게 1774년 보낸 편지 中


7.2. 후대의 평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들은 바로크 시대의 최고를 상징한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출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음악에서 가장 숭고한 창조적 천재였다.'''

― Classic fm출처


'''그리고 물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성대위법의 대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음악의 호메로스'였다.'''[63]

― T. C. W. 블래닝 (역사학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학 교수)출처


'''"바흐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며 이다."'''

막스 레거출처


'''"바흐는 우리의 경애하는 음악의 주님이다. 모든 작곡가들은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클로드 드뷔시출처


'''"화성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철저한 지식에서 그(바흐)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르푸르 (음악 비평가)출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이름은 지난 세기(18세기) 전반기의 모든 독일 작곡가들의 이름보다 최고로 숭고하게 빛난다. 그는 뉴턴의 정신으로 지금까지 조화에 대해 생각해 왔고 그 사례로 제시되어 온 모든 것을 포용했고, 그 깊이를 너무나 완전하고 충실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유효한 진실한 화성의 입법자로 정당하게 여겨져야만 했다."'''

―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다니엘 슈바르트 (시인)출처


'''"화성의 창시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모든 시대와 모든 국가의 가장 위대한 화성학자."'''

― 요한 프리드리히 레이차트 (작곡가)출처


'''"그의 음악은 영혼언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출처


'''"만약 누군가가 '음,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정말 그들이 말해야 하는 것은 '바흐 외에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는 누구인가?' 입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바흐는 당신이 음악을 좋아한다면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과 약간 비슷합니다. 거기엔 에베레스트 산이 있고, 그리고 다른 모든 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흐는 음악의 만유인력입니다."'''

막스 리히터출처


'''"바흐는 음악의 예수다.'''"

예후디 메뉴인출처


'''“바흐의 음악은 우주의 탄생이 완전한 실패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주장이다.”'''

에밀 시오랑출처


"'''노년의 바흐 속에서 옛날의 샘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바흐의 전 예술이 도달한 정점이여 완성의 최고봉으로 간주되고 있다. 대체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후계자들이 바흐의, 라이프치히에서의 최초의 10년간의 작품 속에서 혹은, 쾨텐시대의 기악 작품이나 또는 아마도 그보다 더 초기의 노작들에서 바흐의 창조 활동의 정점을 인정하기를 더 좋아할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년의 바흐 속에서 옛날의 샘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250년 전만 해도 이 샘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알리는 구조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으로서 시내를 이루고 있었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출처


'''"바흐를 집중해서 계속 들은 뒤에 베토벤의 음악을 듣게 된다면, 베토벤의 음악은 일종의 경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출처


'''"나는 바흐보다 더 위대한 천재가 지구 위를 걸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명의 위대한 작곡가 중 모차르트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말하고, 베토벤은 베토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한다. 그리고 바흐는 우리에게 우주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64]

더글러스 애덤스출처


'''"한 가지 점에서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바흐는 아마 가장 위대했을 것이다.'''"

― 그라모폰Is Bach Best?


'''''바흐는 '음악의 최고 권위자이자 법치자'로 불렸다. 그는 미술레오나르도 다 빈치, 문학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같은 역사상 최고의 창조적 천재 중 한 명이다.'''''[65]

출처

― 그라모폰


"'''아무도 그가 한 일을 할 수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현대 음악과 심포닉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푸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작곡하고, 발전시키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만든 모든 작품은 거의 완벽하다... 많은 작곡가들이 한두 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비율은 어마어마하다; 80 퍼센트 이상. 이 위대함은 화음의 질, 아름다움, 두 가지를 합친 것이다. 네가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가 이 행성에서 최고라고 말할 것이다."'''

― 자크 루시에 (피아니스트)출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우리에게 남긴 작품들은 다른 민족이 결코 누릴 수 없는 귀중한 국가 유산이다.”'''

―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 (음악학자)출처


'''"바흐의 음악에 있는 것은 다른 감각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연주자나 청취자로서 우리가 들어가는 또 다른 세상이다."'''

존 엘리엇 가디너출처


'''“바흐에게 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창작의 바로 그 자체였다.”'''

레너드 번스타인출처


'''“만약 내가 여생을 무인도에서 보내야 한다면,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어떤 작곡가의 음악을 듣거나 연주해야 한다면, 그 작곡가는 거의 틀림없이 바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다른 어떤 음악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나를 매우 깊고 일관성 있게 감동시키고, 다소 부정확한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의 모든 기술과 탁월함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것, 즉 그것은 인간애적이다.”'''

글렌 굴드출처


'''"만일 베토벤이 인간 중의 거인이라면, 바흐는 바로 하느님기적이다."'''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출처


'''"그의 소리는 사라진것이 아니라 언어로는 표현할수없는 신의 명성에 오른것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출처


'''"그는 작은 시냇물'''(''Bach'')'''이 아니라, 크고 광활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66]

루트비히 판 베토벤출처


'''"화성의 시조"'''[67]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바흐는 불멸의 화성의 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출처


'''"바흐 안에서 음악의 필수적 세포들이 하나가 된다. 신 안에서 세계가 그렇듯. 그 어떤 다성음악(polyphony)도 이보다 위대하지 않았다."'''

구스타프 말러출처


"'''바흐는 음악의 최고 천재다 … 그는 모든 숭고한 사상의 핵심에 도달했고,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그것을 해냈다."'''

파블로 카잘스출처


"'''지난 80년간 나는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시작했다. 그것은 기계적인 일이 아니라 내 일상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다. 나는 피아노에 가서 바흐의 두 서곡과 악곡을 연주한다. 그것은 일종의 축복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유일한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한 부분이 되는 기쁨을 누리는 세상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한 믿을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음악은 나에게 결코 같지 않다. 매일 그것은 새롭고, 환상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바흐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기적이다."'''

파블로 카잘스출처


'''"그게 습관이라는 건 인정해. 그(바흐)는 나에게 그런 기쁨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기쁨의 어떤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져다 주려고 한다. 그리고 한 번만 읽을 수 없는 책도 있다. 저 책들은 내 프로그램의 일부분이다. 나는 음악가가 성질이 좋은 클라비에의 2권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하며, 가능하다면 많은 칸타타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들을 내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려고 노력한다. 누군가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다면 좀 이상해 보일 것이다."'''

― 나디아 불랑제[68]

(작곡가)출처


"'''바흐의 음악은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위대한 구조의 생각을 표현한다."'''

― 톰 필립스 (예술가)출처


(바흐의 음악을 듣고) "'''나는 마치 영원한 화합이 스스로 소통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을 나 자신에게 표현했다. 마치 세상이 창조되기 바로 직전에 하느님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처럼."'''

요한 볼프강 폰 괴테출처


'''"바흐는 마치 로도스 섬의 거인과 같다. 모든 음악가들이 그의 아래를 지나야 한다. 모차르트는 가장 아름답고 로시니는 가장 천재적이다. 하지만 바흐는 가장 포괄적이다. 그는 말해야 할 모든 것을 말했다. 만약 바흐 이래로 쓰여진 모든 음악이 사라진다고 해도 바흐의 음악을 토대로 다시 재건할 수 있다."'''

― 샤를 구노 (작곡가)출처


'''"바흐는 모든 음악가들이 지나가고 계속 지나갈 거인이다. 모차르트가 가장 아름답고 로시니가 가장 뛰어나지만 바흐가 가장 종합적이다. 그는 할 말을 다 했다.'"'''

― 샤를 구노 (작곡가)출처


'''"이제 아무도 을 믿지 않지만 모두가 바흐를 믿는다."'''

― 마우리치오 카겔 (작곡가)출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그의 시대에는 작곡가보다 오르간 연주자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의 신성한 음악, 오르간과 합창곡, 그리고 다른 악기 음악은 엄청난 엄격함을 감추는 열정과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바흐의 대위법에 대한 사용은 훌륭하고 혁신적이었으며, 종종 그의 작곡 스타일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종교적, 숫자적인 상징들을 포함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놀라운 음악가들로 구성된 특별한 코드들의 심오한 퍼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생각한다."'''

AllMusic출처


'''"음악의 최고중재자이자 입법자이며, 위상의 위대함에서 철학아리스토텔레스, 미술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견줄 수 있는 거장. (the supreme arbiter and lawgiver of music, a master comparable in greatness of stature with Aristotle in philosophy and Leonardo da Vinci in art)."'''

― 시어도어 베이커 (음악학자), ''《베이커 음악 인명사전》의 '바흐' 항목 도입부 中''출처


'''"18세기 전반의 독일 음악 역사는 이를테면 극단적인 역설 속에 있다. 이 시대의 독일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라는 전음악사상 최대의 천재 한 사람을 낳았다. 그를 뛰어넘을 자는 없으며 그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의 재능도 아주 드물게 밖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 D. G. 휴즈, ''《유럽 음악의 역사》 中''


'''"종교는 내면적인 영적인 세계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함께 있습니다. 제 말은, 왜 안되죠?"'''

― 잭 케보키언 (병리학자)출처


'''"바흐는 땅 위의 모든 인종을 연결하는 끈"'''

― 에이토르 빌라로부스 (작곡가)출처


'''"음악은 그 최대한의 완전함을 바흐안에서 획득하였는데, 베토벤도 하이든도 그리고 가장완전함에 접근한 모차르트 조차도 끝내 바흐와 같은 완전함에는 도달할수없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출처


'''"바흐는 내가 기독교인이 되도록 거의 설득한다.'''"

― 로저 프라이 (화가)출처


'''"신이 신이듯 바흐는 바흐다.'''"

엑토르 베를리오즈출처


'''"신이 하나 있다 - 그의 이름은 바흐. 그리고 멘델스존은 그의 예언자다.'''"

엑토르 베를리오즈출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독교 음악... 만약 삶이 나에게서 희망과 믿음을 가져갔다면, 이 합창곡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다."'''

펠릭스 멘델스존출처


'''"나는 음악의 역사적 진화에 대해 전혀 몰랐고 모든 현대 음악이 바흐의 덕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출처


'''"어떤 음악가든, 심지어 가장 재능 있는 음악가라도, 맨 처음은 바흐이며 그 음악가는 2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파울 힌데미트출처


'''"많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그렇듯, 음악의 구성과 건축의 구성에서 유사함을 본다. 특히 바흐의 수학적 공식은 나에게 흥미가 있다; 포인트와 대위점, 주제에 관한 변주곡과 이 모든 수학적 게임과 탐험이 진행되고 있다; 웅장한 테마가 마지막에 반복되는 구조, 조각들의 순환적 특성이다. 건축가로서 우리는 조화로운 전체 안에서 포인트와 대위점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마이클 윌포드 (건축가)출처


'''"만약 한 음악가가 인간의 결점 없는 작곡에 가장 가까운 음악가의 이름을 지으라는 요청을 받았다면, 나는 제바스티안 바흐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런 코플런드출처


'''"종교가 그 창시자에게 은혜를 입었듯 음악은 바흐에게 은혜를 입었다.'''"

로베르트 슈만출처


'''"어떻게 비브라토 없이 바흐가 그렇게 많은 아들을 낳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파울 힌데미트출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프란츠 슈베르트출처


'''"바흐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속한다.'''"

조지 버나드 쇼출처


'''"바흐는 암호의 도움으로 가장 멋진 들을 찾는 천문학자 같다.'''"

프레데리크 쇼팽출처


'''"제바스티안 바흐와 모차르트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위대한 표현주의 작곡가가 결코 표현에 형식을 희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급행열차가 치솟을 수 있는 한, 그들의 음악적 형식은 최고로 훌륭하고 만능으로 남아 있다.'''"

카미유 생상출처


'''"바흐를 공부하라. 거기서 모든 것을 찾을 것이다.'''"[69]

요하네스 브람스출처


'''"음악에 대한 사랑이 반드시 모든 시대의 작곡가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바흐에 대한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드미트리 카발렙스키 (소련의 대표적인 작곡가)출처


'''"바흐는 종착역이다. 그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오직 그에게 이른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출처


[image]

'''"작곡가들의 태양'''"

― 아우구스투스 프레데릭 크리스토퍼 콜만 [70]


'''"모든시대의 가장 놀랄만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며 음악사상 가장 놀랄만한 기적."'''

리하르트 바그너출처


'''"음악의 호메로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Lass mich horen, lass mich fuhlen

Was der Klang zum Herzen spricht;

In des Lebens nun so kuhlen

Tagen spende Warme, Licht."

"듣게 해주고 느끼게 해주오.

소리가 마음에 속삭이는 것을

생활의 차디찬 나날 속에서

따스함과 빛을 내리시기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평균율곡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 바흐에 대한 그의 경외심을 읽을 수 있다.


'''"바흐는 우주를 바라본다. 그를 경험한 후에, 사람들은 결국 삶에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 헬무트 발햐 (오르가니스트)출처


모든 인간의 감정에 대해 동감을 잘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객관적으로 감정들을 그려낸다.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만 간섭하지는 않는 작곡가다. 인간의 조건과 환경에 대해 과학적이라 할 정도로 연구를 많이 했고 상상력을 동원해 표현했다. 때로는 심각하면서도 톡톡 튀고 즐거운 것이 바흐의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바흐의 음악이 단지 클래식 음악 또는 바로크 시대 작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71]

요요마출처


'''"지구에서 딱 하나 내놓을 수 있는 음악가가 누구냐 하면 바흐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정경화


'''"바흐는 그가 죽은 지 거의 300년이 지난 지금도 클래식 음악의 최고 표준이다..'''"

BBC출처


'''"바흐는 매우 안심할 수 있다. 당신이 흥분하고 있을 때, 베토벤이 아닌 바흐로 당신을 편안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 그는 세상일이 다 잘되고 다 잘될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는 침착함을 가지고 있다. 바흐의 핵심은 영적 차원이다. 그는 우리들 대부분보다 더 경건한 노선을 걷고 있었다. 나에게 바흐는 선견자, 현인, 길을 따라가는 봉화다."'''

― 낸시 아르겐타 (소프라노)출처


'''"내게 바흐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작곡가,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대위점을 창조한 천재다."'''

스티브 라이히출처


'''"바흐의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의 음악이 얼마나 철저하게 수학적인 정밀도 면에서 구조화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 내면의 건축의 아름다움은 일종의 우주적 질서, 즉 신의 손길을 드러낸다. 대척점과 조화의 믿을 수 없는 시너지와 수평과 수직이 일관성 있는 전체로 연결되는 방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한편, 이러한 기술적 측면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도 없이, 그의 음악의 순수한 우주적 결과는 가장 신비로운 방법으로 청취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 에르키스벤 튀르 (에스토니아 작곡가)출처


'''"바흐의 음악은 위대한 감정과 불같은 기질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적인 예술로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작곡의 정상이다. 과거 음악과 자기 시대의 창작물을 종합한 것은 물론 미래에 대한 대담한 비전이기도 하다."'''

진은숙출처


"'''바흐에는 찰나에의 집중이 넘치고 있다. 저 위대한 헨델의 빛나는 작품보다도 바흐의 조용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부동의 작곡적 사색과 그 격조 높은 세계에 견주어볼 때는 이상하리만큼 자의적인 작품으로 느껴지기 일쑤이다. 바흐에는 찰나의 집중이 넘치고 있다. 원근의 감각이 동시에 생생하게 눈뜨고 시간과 공상이 우리에게 밀착되어 분방하는 바흐의 음악은 생리적인 확실성과 자연적인 힘을 고루 갖춘 실례이기도 하다. 바흐의 음악은 감성적인 자극을 삼가고, 우리들에게 표면적으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일조차 별로 없다. 그곳에는 강력함과 부드러움, 긴박함과 완화, 벅차게 분출하는 생명력과 심원한 정적인 그 아무것도 모방할 수 없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출처


'''"매일 샤콘느를 연습하십시오. 하지만 50세가 될 때까지 연주하지 마십시오."'''

안드레스 세고비아출처


"'''그토록 마르지 않는 영감이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경탄하게 된다. 바흐의 작품들 가운데 '행사용 작품들'이나 '주문에 의한 작품들'과 그 자신이 마음이 끌려 쓴 작품들을 구분해 내기란 쉽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칸타타들은 '마태 수난곡' 같은 가장 유명한 작품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성악곡의 범주에 넣을 만 하다. 바흐는 타성에 젖어 작곡을 하기도 했고, 같은 제재를 반복해서 다루기도 했지만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또한 우리와 함께 그의 칸타타 작품들을 차례로 연주했거나 녹음해보았던 사람들은 거의 100여 곡이 넘는 칸타타를 들으며 그토록 마르지 않는 독창성과 영감이 한 인간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출처


'''... 바흐 이전의 서양음악이 빗물이라면, 그 빗물이 모여서 거대한 강물을 이루는 시초가 바흐라는 작고 깊은 샘물이다. ... 그렇기에 서양음악을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제일 먼저 바흐를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 샘의 깊이를 단번에 알 수는 없다. 모차르트를 듣다 돌아와 다시 듣고, 쇼팽을 듣다 돌아와 다시 듣고, 평생 바흐를 들으며 그 속의 수많은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 맛을 음미해야 한다. 바흐는 음악사에 길이 남을 거장들에게조차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야 할 집이면서, 끝마치지 못한 숙제처럼 늘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존재이다.'''

― 이철재,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 - 클래식 음악, 천천히 깊이 듣는 즐거움》의 챕터 1 도입부 中''#


'''"30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영감을 주고, 묘기를 부리며, 우리를 4차원의 존재로 몰아넣는 직업 윤리를 가진, 술 마시고, 격투하는 록스타가 있다."'''

― 제임스 로데스 (피아니스트)출처


'''"내 꼬치꼬치 캐묻는 코로 나는 모든 작곡가에 손을 댔는데, 그들이 세운 집들은 바흐가 토대에서 사용한 정확한 비율로 안정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 제임스 휴네커 (음악 비평가)출처


'''"바흐의 음악은 생각나게 하는 음악이다. 그것은 너를 혼란스럽게 한다. 귀 기울일수록 귀담아듣고 귀 기울일수록 귀담아듣고 귀담아 들을수록 그 속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음악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연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다른 차원의 바흐를 높이 평가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친밀한 음악이 공연장에서 매우 잘 작동하고 모든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미묘한 음악들이 그러한 대중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존 엘리엇 가디너출처


'''바흐가 당신을 감동시키고 싶다면, 당신을 울리기 위해, 그는 음악적으로(극적으로가 아니라) 이 일을 한다. 그는 말러처럼 자신이 얼마나 슬픈 존재인지 말하기 보다는 표현성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장치를 사용한다.바흐의 음악은 음악에 관한 것이다 – 그는 그의 자료에 대해 질문을 한다. 종종 색색의 베이스라인을 보면, 다른 바로크 작곡가에 비해 훨씬 덜 관습적이어서, 그리고...기념비적인 구조물들, C단조 Passacaglia 같은 것의 화산 리듬. 아삭아삭한 불협화음은 음악을 거대한 음파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마태 수난곡은? 서양 고전 음악 전체에서 더 강력하고, 더 고통스럽게 움직이는 한 작품이 있을까? 마이클 티펫이 나에게 한 번 말한 것처럼, 우리는 바흐 같은 사람에 비하면 모두 피그미족같은 사람이다.'''

― 스티브 마티랜드(영국 작곡가)출처


'''"창의성은 단지 다르다는 것 이상입니다. 누구나 이상한 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쉽습니다. 어려운 것은 바흐처럼 간단해지는 것입니다. 간단하고,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창의력입니다."'''

찰스 밍거스출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바흐는 최고의 작곡가예요. 너무나 완벽해요. 모차르트보다도 완벽하죠. 음악 자체가 매우 단순해 보이는데, 깊이 들어가면 아주 복잡해요. 그가 쓴 대위법(둘 이상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작곡 기법)은 완벽하죠. 그런 완벽함 속에서도 연주자의 자유 또한 완벽하게 보장된다는 점이 놀라워요."'''

지용출처


'''"인생에서 느끼는 모든 것을 믿을 수는 없지만 음악에는 신(神)이 있습니다. 바흐의 음악은 특히 그렇죠. 자신보다 위대한 존재가 있다는 느낌을 주거든요."'''

― 머리 페라이어 (피아니스트)출처


'''"음악은 우리의 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우리 자신에게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하는 노력입니다. 우리는 바흐의 말을 경청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경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루이스 토마스 (의사)출처


'''"저는 바흐에게 투표할 것입니다. 그의 음악은 우주에서도 흐를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자랑할 것입니다."'''

― 루이스 토마스 (의사), 외계 문명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야 할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출처


'''"제가 바흐의 음악이 이해가 되었을때, 저는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습니다. 바흐는 제게 제 삶을 음악에 바치도록 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를 그의 세상에 소개한 사람은 바로 그 선생님입니다."'''

니나 시몬출처


'''"J.S. 바흐는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 혁신가다. 그는 시대에 비해 매우 진보했다. 그의 음악에는 영적인 깊이가 있다. 여러분은 그것을 들을 수 있고 그것은 명상과 같다."'''

브라이언 윌슨출처



8. 이름에 대해


'''언어별 명칭'''
'''한국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일본어'''
ヨハン・セバスチャン・バッハ
'''중국어'''
约翰·塞巴斯蒂安·巴赫
'''프랑스어'''
Jean-Sébastien Bach
'''러시아어'''
Иоганн Себастьян Бах
'''아랍어'''
یوهان سباستیان باخ
'''힌디어'''
जोहान सेबेस्टियन बाच
'''세르비아어'''
Јоханн Себастиан Бацх
'''조지아어'''
იოჰან სებასტიან ბახი
'''페르시아어'''
یوهان سباستین باخ
'''아르메니아어'''
Յոհան Սեբաստյան Բախ
'''히브리어'''
יוהאן סבסטיאן באך
독일어의 'ch'는 'a, o, u' 뒤에서는 무성 연구개 마찰음 [x]로[72], 'e, i' 뒤에서는 무성 경구개 마찰음 [ç]로[73] 난다. 'Bach'의 경우 전자에 해당하므로 '바흐'가 옳다.
80년대까지만 해도 'ch' 앞에 'a'가 오는 경우엔 'ch' 뒤에까지 해당 모음을 적용한 '하'로 쓰는 관행이 존재하고 있어서 '바하'로 표기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같은 원리로 'o'가 오는 경우엔 '호', 'u'가 오는 경우엔 '후'로 표기했다. 그래서 'Bach'는 '바하', 'Huch'(예컨대 독일 여류 시인인 Ricarda Huch)는 '후후'로 썼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Bach를 バッハ로 표기하는데, 하(ハ)표기는 물론 촉음(ッ)까지 함께 적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베'''토벤'''(ベートーベン, Beethoven), 튀빙'''겐'''(ゲッティンゲン, Tübingen), '''함'''머클라비어(ハンマークラヴィーア, Hammerklavier)처럼 일본의 독일어 표기가 이식되며 저런 관행이 정착했던 것이다.

네덜란드 인명인 빈센트 반 고흐의 'Gogh'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과거에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인해 일본어 표기 'ゴッホ'에 대응하는
'고호'라는 표기를 쓰다가 '고흐'로 변경되었다. 단 고흐의 실제 네덜란드 발음은 'Gogh[ɣɔx\]'이고 이를 표기법대로 옮기면 '호흐'지만 '고흐'가 관용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미들네임인 '''Sebastian'''은 한국에서 세바스찬, 세바스티안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독일식으로 읽으면 제바스티안이다.

9. 여담


  • 2020년 12월 존 엘리엇 가디너가 쓴 바흐의 전기 바흐 : 천상의 음악이 국내에 번역됐다. 가디너는 이 책에서 작곡 행위가 바흐에게 실제로 무슨 의미였는지, 그의 특별한 작품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가사와 음악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로 엮였는지, 그리고 그 작품들이 바흐에 대해 무엇을 얘기하는지에 주목한다. 바흐의 복잡다단한 인간성, 청중과 자신의 세계관을 교류하고 공유하고 싶어 했던 열정, 무한한 창의력과 지성, 재치와 인간성을 작곡 과정에 쏟아 넣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능력을 생생하게 반영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 바흐는 상당히 건장한 체격을 지녔다고 전해지며, 그의 유골을 분석해본 결과 키는 180cm[74]로 굉장히 후덕하시다. 또한 바흐는 춤과 노래에도 꽤나 솜씨가 좋아 종종 자신이 즉흥적으로 작곡한 곡을 연주하면서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흐 자신과 여러 동시대 음악가들의 작품을 기록해 둔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공책(Notenbüchlein für Anna Magdalena Bachin) 같은 작품집은 이런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 과학자들이 그의 유골을 분석해 실제 얼굴을 복원했다. #

  • 바흐 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만남을 담은 드라마. 1985년 "Johann Sebastian Bach"(동독/헝가리 공동작) 4부작으로 편성된 TV 시리즈다.[75]
  • 국내에 알려져 있는 별명은 '음악의 아버지'. 이는 표제 붙이기 좋아하는 일본의 출판사에서 만든 말이다. 정확히는 한국과 일본 외에는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일본발 표현을 한국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 쓰고 있는 것일 뿐.
  • 경건한 신앙심과 작곡기법에서의 장인기질,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 등등 여러가지 때문에 바흐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바흐는 쾌활하며, 왕성한 대식가라 미식을 즐기며, 다혈질적인 면도 있었다. 한 번은 악단 소속의 바순주자의 바순을 욕해서 바순주자가 말하길 "나의 악기를 욕하는 것은 곧 나를 욕하는 것이다" 라는 논리로 바흐에게 성질을 냈다고 한다. 이 일로 바순주자는 바흐와 싸움이 붙었고, 바흐는 도중에 칼(!)을 바순주자에게 정당방위로 이용하게 된다. 이 일로 바흐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지는 일이 발생한다.
>오케스트라에서 모든 악기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이끄는 데 아버지를 따라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연주자 하나하나가 최상의 음향효과를 낼 수 있도록 단원들을 완벽히 배치시킬 줄 아셨습니다...
>
>무엇보다 아버지는 한눈에 연주회장의 특성을 간파하시고는 했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아버지가 베를린으로 저를 보려 오셨을 때 저는 새로운 오페라 공연을 보여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즉시 청중의 입장에서 오페라의 단점과 장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그 후 저는 아버지를 대식당으로 모시고 가면서 식당을 둘러싼 긴 회랑으로 올라섰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천장을 바라보시더니 자세한 걸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건축가가 걸작을 구상했지만 그 자신은 물론 다른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내친김에 실험을 해봤습니다. 장방형으로 구조를 이룬 방 한 구석에서 벽에 대고 아주 나지막하게 말을 하니, 대각선 반대편에서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말을 완벽히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까! ...... 아치형 천장은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인데, 아버지는 대번에 그것을 알아보셨던 것입니다. 하긴 아버지는 아무리 복잡한 악보라 해도 음표 하나 틀린 것까지 정확히 집어 내시던 분이었으니 말입니다.
>
>아버지는 화성에 자신이 있으셨기 때문에 여러 차례 3중주를 반주하셨는데, 기분이 좋고 또 작곡가가 괜찮다면, 즉흥적으로 4중주를 연주하여 작곡가를 놀라게 하셨습니다. 대편성의 악기들을 위해 작곡된 푸가를 듣다가 주제가 반복되는 즉시 아버지는 이 주제에 어울릴 대위법적 주제들은 어떤 것이며 작곡가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곧바로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예견하신대로 연주가 이루어지면 무척 즐거워하시며 저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곤 하셨는데, 그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
>-카를 필리프 엠마누엘 바흐,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에게 1774년 보낸 편지 中
또한 이런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데, 음악학자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다니엘 슈바르트가 1772년에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한테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그의 위대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아버지가 작곡한 것을 연주할 능력이 없다고 자인했다. 그는 클라비어로 무심히 즉흥 연주를 하다가 4. 6화음으로 마친적이 있었는데, 그때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일어나 그의 따귀를 때리고 나서 그 화음을 해결해주었다는 말을.......''
  • 사생활에서의 스캔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만큼 평생을 음악에 매진했다.
  • 동시대 작곡가인 헨델과 '서로 만난 적이 있었을까?'라는 떡밥이 있다. 헨델은 영국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719년 고향 할레를 방문했다. 바흐는 그곳에서 불과 35킬로미터 떨어진 쾨텐(Köthen)에서 일하던 중이었다. 바흐는 짬을 내어 헨델을 찾아갔지만, 그는 직전에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1730년에 헨델이 두 번째로 할레를 찾았다. 당시에도 바흐는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열병이 심해 대신 아들을 보내 헨델을 자신이 있던 라이프치히로 초대했다. 그러나 헨델은 초청에 응할 수 없어 유감이라는 답만을 보냈을 뿐이다.
  • 헨델과 달리 바흐와 친했던 작곡가는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다. 바흐나 헨델보다 네 살 많았던 텔레만도 현 독일 중부의 마크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두 후배보다 훨씬 오래 살았지만, 텔레만의 명성이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텔레만은 바로 바흐가 태어난 아이제나흐로 오게 된다. 1708년에 텔레만은 아이제나흐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아말리에 에벌린(Amalie Louise Juliane Eberlin)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둘 사이는 행복했지만 그만 아말리에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낙심한 텔레만은 1712년 프랑크푸르트로 임지를 옮겼다. 2년 뒤에 그는 둘째 아내 마리아 카타리나 텍스토어(Maria Catharina Textor)와 재혼했다. 이 무렵 텔레만은 아이제나흐에서 알게 된 후배 바흐로부터 반가운 부탁을 받는다. 바로 1714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의 대부(代父)가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대부에게서 가운데 이름을 물려받아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Carl Philipp Emanuel)이라 불렸다. 바흐와 육촌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 Bach) 사이의 둘째 아들이 먼 뒷날 대부의 자리를 물려받을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바흐와 텔레만의 인생이 겹친 두 번째 사건은 1723년에 일어났다. 앞서 텔레만을 고깝게 보았던 라이프치히의 쿠나우가 세상을 떠났고, 시 당국은 후임 인선 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라이프치히에서 대학을 나왔고, 젊은 시절에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이라는 단체를 창단해 의욕적인 활동을 했던 텔레만이 후임으로 와주길 원했다. 그러나 텔레만은 이미 1721년부터 함부르크의 음악감독이 되어 있었다. 한자동맹의 중심 도시인 함부르크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고, 그만큼 문화적인 수준도 독일에서 가장 높았다. 함부르크를 따라갈 모델로 삼은 라이프치히는 텔레만을 더욱 데려오고 싶어 했다. 텔레만은 라이프치히에 가서 조건을 들어보고는 함부르크에 남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쾨텐의 친구 바흐에게 들러 라이프치히의 자리에 도전해 보라고 조언했다. 마침 아내를 잃고 쾨텐 군주마저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시들해가던 차에 바흐는 텔레만의 말에 솔깃했다. 바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유학 보내는 것보다는 대도시에서 통학시키는 것이 훨씬 돈이 적게 들었다. 물론 라이프치히의 급여도 쾨텐보다는 훨씬 더 많았다. 문제는 급여가 많은 만큼 대도시의 물가도 비싸다는 것을 바흐가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두 개의 교회와 학교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엄청나게 많았다. 만일 안나 막달레나가 없었더라면 바흐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을지 모른다. 텔레만이 라이프치히에 창단하고 간 콜레기움 무지쿰 또한 바흐가 자작곡을 연주하는 수단이었다.
  • 지명도가 높은 작곡가인 탓에 그의 음악은 창작물 곳곳에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바흐의 선율을 삽입한 헐리우드와 유럽의 각종 TV, 영화가 무려 1,560편에 달한다.(IMDB 통계).바흐의 음악이 들어간 영상물들.
  •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신앙심이 뛰어났으며 바흐는 신 앞에서 항상 겸손했다. 자신이 작곡하던 작품을 끝내고 난 뒤에는 오선지에 SDG란 약자를 적었는데 풀어쓰자면 ‘Soli Deo Gloria’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에게서 잠시 빌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구조적인 완벽함 속에 인간적인 따스함과 신 앞에 선 겸손함이 존재한다. 
  • 어마어마한 다작을 했는데 생전에 무려 1천곡 이상의 작품을 작곡했다. 더 놀라운건 그 음악 대부분이 훌륭하다는 점이다. 음악잡지 Slate는 바흐는 안좋은 음악을 작곡한적이 한번도 없다고 설명했다.# 한 클래식 애호가는 '평생 바흐의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항상 새로운 바흐의 음악을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바흐의 음악 세계는 무궁무진하며 거대하고 그의 음악이 좋아지게 된 이상 질리지가 않는다.
  • 여러가지 사업을 하기도 했는데, 조그마한 서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동료인 마테존이나 하이니헨등의 이론 서적이나 제자들의 논문, 혹은 자신의 작품이나 친구들이나 아들들의 작품도 팔았다. 또한 쳄발로나 피아노[76]를 대여해주거나 장인들과 연계해 귀족들에게 팔기도 했다.
  • 초기 피아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건반이 너무 무겁고, 고음 소리가 약하다는 점을 들어서 지적했다. 하지만 이건 초기 피아노 얘기고, 오르간 제작자로 유명한 질버만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좋게 개선해 가져오자 그제서야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 엘리아스 하우스만이 1746년 그린 61세의 바흐의 그림. 이 그림에 있는 악보를 자세히 보면, 6성부 3중으로 된 카논이다. 재미있는 점은 거울상으로 이 악보를 보면 또 다른 3성부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 악보에 대한 정체가 비교적 최근에 밝혀졌는데, 이 동영상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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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초상화를 활용한 인터넷 밈들도 있다.
  • 문명 6에서는 위대한 음악가로 등장한다.
  • 2019년 구글이 바흐의 탄생일을 맞아 메인화면에 인공지능(AI) 작곡 로고 ‘구글 두들’을 선보였다. 21일 하루 동안 구글은 바흐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하루 동안 구글 검색창의 메인 화면에 사용자가 바흐의 음악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구글 두들’을 선보인다. 구글 두들이란 구글이 특별한 날을 기리기 위해 구글이 일시적으로 바꿔 놓는 메인 페이지 로고다. 로고를 클릭한 이용자가 단 두 단락의 짧은 멜로디를 입력하면 음악의 키와 템포를 AI가 자동으로 바흐의 음악 데이터를 바탕으로 작곡, 이용자에게 들려준다. 이용자는 또한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다운로드하거나, 바흐의 음악을 학습 중인 AI의 데이터세트에 추가할 수 있다. 2019년 단락의 짧은 멜로디를 입력하면 음악의 키와 템포를 AI가 자동으로 바흐의 음악 데이터를 바탕으로 작곡, 이용자에게 들려준다. 이용자는 또한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다운로드하거나, 바흐의 음악을 학습 중인 AI의 데이터세트에 추가할 수 있다. 이번에 구글이 선보인 구글 두들은 AI를 처음으로 접목한 것으로, 지난 2016년부터 창작 활동을 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한 구글의 마젠타(Magenta)가 개발한 머신러닝 모델 코코넷(Coconet)을 기반으로 구성됐다. 코코넷은 300가지가 넘는 바흐의 작품을 분석해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코코넷은 바흐의 음악들을 잘게 쪼갠 뒤 파편화해 무작위로 삭제한 후, 이를 다시 복원하는 연습을 통해 바흐의 스타일에 맞는 음을 추출하는 것을 훈련했다. 이를 통해 어느 위치에 어떤 음을 넣든 바흐의 음악 스타일로 변형해 낸다. 바흐의 음학은 여타 바로크 시대의 음악과 같이 일관된 규칙이 있으며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AI 학습에 적합하다. 안나 후앙 구글 마젠타 AI 연구원은 “코코넷은 불완전한 악보에서 누락된 자료를 채워 나간다”며 “우리는 이를 훈련시키기 위해 바흐의 합창곡 데이터세트에서 무작위로 음표를 지우고, 이를 재구성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작곡 AI가 완벽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후앙 연구원은 “코코넷이 바흐의 음악과 같이 단순함과 표현력 사이의 균형을 갖추면서 긴 앙상블을 복제해 내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 바흐가 활약한 도시인 라이프치히에서 매년 약 10일간 바흐를 기리는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라이프치히 바흐 축제는 1723년부터 1750년까지 라이프치히 주요 교회 4개 합창단의 합창장(Thomaskantor)을 역임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를 기념해 개최되는 클래식 음악 페스티벌이다. 페스티벌 시작일은 부활절이 끝나고 7번째 맞이하는 일요일로, 보통 6월에 개최되지만 4월 말에서 5월에도 열리는 등 시작일은 조금씩 변동이 있다. 라이프치히 바흐 축제에선 바흐가 작곡한 음악을 중심으로 매년 다른 주제로 클래식 작곡가들의 작품을 선정해 연주한다. 예를 들면 2016년 축제의 표어는 '화음의 비밀'(Geheimnisse der Harmonie)이었다. 이 축제는 1904년에 처음 개최되어 지금까지 매년 이어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랜 역사를 가진 바흐 음악 축제로 알려져 있다. 바흐가 합창장으로 활동한 교회들과 바흐의 기념비가 있는 광장을 중심으로 라이프치히 전역에서 축제 기간 동안 약 100여 회의 음악회와 행사가 벌어진다. 축제의 첫 날인 개막식 때에는 바흐가 합창장을 맡았던 성 토마스 교회(St. Thomas kirche) 소년 합창단의 공연으로 시작된다. 토마스 합창단은 800년의 역사를 가진 합창단으로, 성스러운 음악과 바흐 음악을 온전히 연주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이 공연은 공연장에 참석하지 못한 관객이나 시민들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도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스크린으로 실시간 중계된다. 개막 공연을 시작으로 바흐의 음악을 현대음악이나 재즈로 변주하는 연주회, 바흐가 직접 사용했던 오르간을 직접 구경하고 연주하는 테마 연주회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 음악회 외에도 바흐에 대한 세미나, 강연회, 바흐 박물관 투어, 오르간 투어, 래퍼, 그래피티 아티스트, 시인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바흐 경연대회(BachGames)의 최종 결승전도 펼쳐진다. 라이프치히 바흐 페스티벌의 폐막식은 항상 토마스교회에서 하게 되는데, 바흐의  연주로 마무리된다.
  • 나치 독일 시기 바흐는 "독일 사람 중 가장 독일인"으로 불리며 민족주의 열성을 자극하는 집회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작곡가다.[77] 바흐의 곡들은 히틀러 유겐트 멤버들에 의해 공연되었고 거의 매일 라디오에서 연주되며 정치적으로 이용됐다. 당시 바흐의 인기는 1935년 독일 전역의 여러 도시에서 괴벨스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참석한 라이프치히의 "레이히 바흐 축제"에서 정점을 찍었다. 바흐의 25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축제가 조직되었다.출처[78]
  • 단일 작곡가로는 최대 규모의 전집 음반이 도이치 그라모폰(DG)과 데카(Decca)를 통해 2018년 11월 9일 발매됐다. 총 222CD 규모의 이 전집 음반은 2년간의 연구와 선곡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결과물로 바흐 연구회(Leipzig Bach Archive)와 32개의 레이블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원전 음악의 지휘자로 잘 알려진 존 엘리엇 가드너(John Eliot Gardiner)의 서문이 수록되었고, 작품별 해설에는 니콜라스 케니언(Nicholas Kenyon, 의 저자)이 감수에 참여하였다. 이 앨범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탄생 333주년을 기념하여 발매되었다. 333이라는 기록적인 숫자는 앨범의 방대한 규모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바흐의 종교적인 신념을 담고 있기도 하다. 앨범의 3이라는 숫자는 바흐의 루터교에 대한 신앙심이 반영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상징한다. 총 5,533 트랙으로 이루어진 이 앨범은 재생 시간만 16,926분에 달한다. 바흐333은 바흐 작품의 모든 곡들을 담아내어 그의 음악 세계를 소개하고, 음악, 시각자료, 온라인 매체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그가 음악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 보여준다. 단일 작곡가로는 최대 규모로 2년 전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기획 앨범 ‘모차르트 225’를 뛰어넘는 압도적인 크기를 보여준다. 바흐의 작품 전집에는 750명의 엄선된 연주자와 앙상블의 연주가 수록되었고, 수록된 녹음 레이블은 소니(Sony), 워너(Warner), 데논(Denon), 아르모니아 문디(Harmonia Mundi) 등 32개의 레이블을 아우른다. 앨범에는 2권에 하드커버 책자가 수록되었다. ‘생애(LIFE)’이라는 제목의 1권에는 풍성한 삽화와 함께 저명한 바흐 연구가인 도로시 슈뢰더(Dorothea Schroder)가 쓴 전기가 수록되었고 바흐 연구회의 최신 연구가 담긴 13편이 에세이가 담겨있다. ‘음악(MUSIC)’이라는 제목의 2권에는 바흐 연구회의 회장인 크리스토프 울프(Christoph Wolff)의 에세이를 시작으로 니콜라스 케니언의 작품별 해설이 실려있다. 또한 전체 가사집과 영문 번역, 주요 작품의 악보 사본과 바흐 연구회의 혁신적인 디지털 자료를 포함한 온라인 가이드가 수록되었다. 특히, 이 전집에는 바흐 연구회의 가장 최근 연구와 함께 2019~2020년에 출판될 예정인 BWV3 카탈로그가 반영되었다. 바흐의 생애는 존 엘리엇 가디너의 90분 분량의 BBC 영상 DVD <바흐: 열정적인 삶 (Bach: A Passionate Life)>을 통해서 생생히 담아냈다. 앨범의 색상별 구분은 성악, 건반악, 교향악, 기악의 4가지 장르 구분과 함께 연대기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하고 풍성한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구성이다. 또 전집에서는 그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6개의 합창곡 찬송가와 베토벤의 유일한 바흐 편곡 작품이 수록되어 눈길을 끈다. 또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인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the Sonatas & Partitas for solo violin)가 바로크 바이올린의 스타, 줄리아노 카르미뇰라(Giuliano Carmignola)의 연주로 수록되어 팬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바흐 인터렉티브(Bach Interactive)>와 <바흐 애프터 바흐(Bach after Bach)>라는 제목의 16개의 CD는 바흐 음악의 경험을 풍성하게 하는 중요 자료들과, 모차르트와 베토벤에서부터 오늘날 아르보 패르트(Arvo Part)와 죄르지 쿠르탁(Gyorgy Kurtag)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곡가와 그들의 작품에 끼친 바흐의 특별한 영향을 담았다. 또한 스테판 그라펠리(Stephane Grappelli), 스탄 게츠(Stan Getz), 자크 루시에(Jacques Loussier), 빌 에반스(Bill Evans) 등 재즈, 월드 뮤직의 연주가 담긴 [Bach a la Jazz]과 현대의 작곡가와 연주자들의 바흐 작품의 재해석이 담긴 [New Colours of Bach] 앨범이 함께 실려 흥미를 더한다.
  • 네덜란드바흐협회[79](Netherlands Bach Society)에서는 현재 ‘올 오브 바흐 (All of Bach)’라는 바흐 탄생 333주년[80]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오는 2021년까지 바흐의 전곡을 연주하고, 그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하는 대장정이다.유튜브 링크 또 바로 완성을 목표로 한 2021년이 창단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은 단순하고도 원대했다. 바흐가 남긴 최고의 걸작인 ‘마태수난곡’을 연주하기 위한 것이었다. 창단 이듬해 4월 그리스도 수난일에 이들의 첫 ‘마태수난곡’이 봉헌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역사상 첫 ‘마태 수난곡’ 녹음이 네덜란드 거장 빌럼 멩엘베르흐의 지휘로 이뤄졌다.[81]

10. 관련 문서



11. 바깥 고리



[1] 줄여서 J. S. Bach라고 부르기도 한다.[2] 라이프치히 시대에 걸쳐 사용되었다.[3] 2011년 뉴욕 타임스의 권위있는 수석 음악 비평가 안소니 토마시니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1위를 바흐라고 말했고출처, 2019년 BBC가 174명의 전세계 유명 작곡가들을 상대로 조사한 '가장 위대한 작곡가 투표'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출처 1, 출처 2[4] 바흐가 직접 자신의 제자였던 요한 루트비스 크렙스에게 '실개천(Bach)에 사는 가재(Krebs)'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5] 대표적으로 저녁기도 곡들 Vesperae de dominica KV 321 , Vesperae solennes de confessore KV 339의 시편 113장 Laudate pueri dominum 구양식(stile antico) 악장들이나 호칭기도 곡들 Litaniae de venerabili altaris sacramento KV 125 , KV 243의 Pignus futurae gloria 악장들, 혹은 성 삼위일체 미사 Missa in honorem sanctissimae trinitatis KV 167, 롱가 미사 Missa longa KV 262 의 악장 종결 푸가들, 혹은 장엄미사 Missa solemnis KV 337의 베네딕투스 악장 참조 [6] "아버지께서 아직 에벌린의 기악곡들을 받아적어놓지 않으셨다면, 그냥 안하시는게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지금 그 악보들을 보니 바흐와 헨델에 비교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수준이거든요. 그의 4성부 작곡법을 아무리 좋게본다해도, 건반 푸가들은 그저 길게 질질끌기만 하는 곡들이에요." (1782년 4월 20일) #출처[7] 헨델도 그간 메시아를 비롯한 일부 오라토리오와 몇몇 기악곡만 알려져 있었고 오페라를 비롯한 다수의 건반음악 등은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제대로 발굴되기 시작했다.[8] "작고한 베토벤의 묘지 곁에 서서, 우리는 전 독일과 독일 민족을 대표하여, 이제는 사라져 버린 우리 민족 예술의 광휘며, 우리 조국의 완전한 영적 만개로서 높이 추앙받던 그의 죽음을 애도하노라. 독일 운문의 영웅은 아직도 살아있고, 그의 삶은 영원하리라, 그러나 아름다운 노래의 최후의 거장이며, 영혼이 담긴 협화음의 오르간이며, 헨델과 바흐, 그리고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불멸의 명성의 계승자이며 증폭자인 그는 이제 가고 없으니, 우리는 이제 여기 침묵하는 운명의 끊어진 현을 애도하노라..."[9] 파블로 카잘스가 9살 때 고악보점에 들렀을 때 바흐의 작품 번호에 포함되지 않은 첼로 모음곡을 발견하고 이를 연주해서 알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에 대해 진위 논란이 있다.[10] 최근에 이 아들들의 업적이 재평가되고 있기는 하다.[11] 바흐 생애 항목에 있는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 참조.[12] 아버지에게 보낸 1782년 4월 10일자 편지.[13] 안나 막달레나 빌케는 쾨텐에 오기 전에 이미 바이젠펠스(Weißenfels)라는 곳에서 바흐와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14] 전 26곡중 바흐 자신이 작곡한 곡은 4곡 정도이고 나머지 곡들은 안나 막달레나가 좋아한 다른 작곡가의 곡들을 바흐가 자주 연주해주며 정리한 모음곡집이다. 이 곡들중 가장 유명한 미뉴에트 G장조(영화 접속의 OST인 Sarah Vaughan의 A lover's concerto로 친숙한 곡)도 동시대 독일작곡가 크리스티안 페촐트(Christian Petzold)의 작품이다.[15] 예를 들면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주제에 해당되는 아리아. 막달레나 바흐의 음악수첩에도 이 아리아가 포함되어 있다.[16] 막달레나 바흐는 전문적인 작곡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작곡과 관련해서는 남편의 작곡을 곁눈질로 지켜본 것이 전부이다. 이런 사람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같은 난해한 대위법과 복잡한 기교를 요구하는 작품을 썼다면 그녀가 천재인 것을 넘어서 아예 기적이 일어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재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바흐가 막달레나 바흐와 결혼하기 전부터 씌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17] 물론 실제 발언이 아니라 픽션이다[18] 스트로브와 위에는 클래식 애호가이기도 해서 아르놀트 쇤베르크 오페라를 영화화하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일반적인 영화와는 많이 다르다.[19]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집을 다시 녹음해 발표하면서 한 말이다.[20] 바흐 이후 한정으로 종교분야는 아예 독보적이고 오르간 분야에서는 그나마 양적인 측면에서 프랑스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세자르 프랑크나 샤를-마리 위도르(Charles-Marie Widor), 알렉상드르 길망 등을 위시한 프랑스 오르간 악파들이 다수의 오르간곡을 남겼다.[21] 다른 독일 주들과 마찬가지로 라이프치히 시에서도 오페라 극장을 건립하긴 하였으나 흥행에는 크게 실패해, 바흐가 라이프치히가 오기 전인 1720년 문을 닫았다.[22] 굳이 비유를 들자면 희곡 분야의 셰익스피어에 비견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역시 당대의 유행에 충실한 문법으로 연극 대본을 창작했지만 그 작품들의 깊이와 시사성이 시대적 한계를 완전히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이 널리 읽히고 널리 상연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연극으로 상연될 때마다 연출자와 배우의 성향에 따라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해석들이 표출되는데, 바흐의 음악도 이와 마찬가지로 정말 제각각의 해석으로 연주된다.[23] 음악은 물론 라틴어도 가르쳐야 했다.[24] 이탈리어의 '리피에노'에서 유래한 용어로, 가득 찼다는 뜻[25] 부활절 이틀 전의 금요일[26] 현재 이 칸타타의 트럼펫 성부들은 바흐 사후에 그의 아들 프리테만이 붙인 것으로 믿어진다.[27] BWV(=Bach Werke Verzeichnis / Bach Works Catalogue)는 독일어 Bach(바흐) Werke(작품) Verzeichnis(총목록)의 약자다. BWV는 존재하는 바흐 작품에 대한 작품 목록으로 1950년에 Wolfgang Schmieder에 의해 출판되었다. 각 작품에는 예를들어 "Orchestral Suite No. 3 in D Major, BWV 1068"과 같이 BWV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과거에는 종종 슈미더를 위하여 "S" 번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BWV 번호를 "슈미더 작품 목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BWV 번호는 모짜르트의 작품번호인 쾨헬 번호와는 달리 연대순(더 오래된 작품일수록 낮은 번호를 부여하는)은 아니다. 대규모 곡에는 한 번호만을 부여하며 각 악장들에는 번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과 같은 경우는 여러 "악장"이라는 보다는 "모음"이므로 각 곡에 번호를 부여하고 있다. "BWV 106/1" 혹은 "BWV 232.12"과 같은 경우는 대규모 작품의 해당 악장을 의미한다. 즉 BWV 106의 1악장 혹은 BWV 232의 12번째 악장을 의미한다. 작품 200번까지는 교회 칸타타를 위한 번호이며, BWV 이전에 부여하였으며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칸타타 번호"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예를들어 BWV78의 경우 "Cantata, Jesu, der du meine Seele, BWV 78" 혹은 "Cantata #78 by J. S. Bach, Jesu, der du meine Seele" 와 같이 호칭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되어 부여된 최종 BWV 번호는 BWV 1126 "Lobet Gott, unsern Herrn" 이다.[28] 상당히 많이 연주되고 생동감이 넘치는 칸타타이다.[29] 1716년 바이마르에서 작곡되었는데 1723년 라이프치히 취임을 위한 방문 기념으로 큰 규모로 개작하였다. 1716년에 작곡된 원곡은 BWV 147a로 따로 표기하는데, 현재는 147a는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30] 이 칸타타에 나오는 합창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Jesus bleibet meine Freude, Jesus, Joy of Man's Desiring)가 유명하다. BEMANI 시리즈의 수록곡 子供の落書き帳의 원곡. 일반에는 조지 윈스턴이 피아노로 편곡한 〈Joy〉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Willem van Twillert의 오르간 연주) (Alon Goldstein의 피아노 연주) (킹스 컬리지 합창단) (George Winston 편곡 "Joy") 사실 이 곡은 순수한 바흐의 작품은 아니고, 바흐가 다른 음악가의 선율을 빌려 온 것이다.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는 실사장면에서 쓰였다.[31] 일본에서도 키하 40계 동차, 485계 전동차, 583계 전동차 차내 차임음으로 사용했다.[32] 바흐가 라이프치히 칸토르로 부임한 직후 라이프히치 명문가 중 하나인 크리스토퍼 빙클러의 부인 수잔나 소피아 빙클러의 장례식을 위해 작곡된 일종의 진혼 모테트이다. 일설에는 1723년 7월 라이프치히 우체국장의 부인인 요한나 마리아 키에스 (Johanna Maria Kees)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다는 설도 있다. 6곡의 모테트 중에서도 가장 길고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바흐의 팬이라면 반드시 들어봐야 할 명작이다.[33] 바흐 당시 라이프치히의 루터파 교회에서는 라틴어로 진행되는 가톨릭 전례의식도 종종 수행되었다. 다만 미사용 전례음악은 전체 미사(Missa Longa)가 아니라 키리에와 글로리아로만 구성된 소위 짧은 미사(Missa Brevis)가 사용되었다.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작곡한 미사곡도 대부분 미사 브레비스 또는 상투스(Sanctus, 거룩하시도다)이다. 다만 232의 B단조 미사는 미사 브레비스가 아니라 미사 롱가로서 기존에 작곡되었던 곡들을 다수 포함시켰다. 바흐는 이 미사곡 뿐만 아니라 규모가 큰 종교음악(수난곡/오라토리오)을 작곡할 때에는 거의 예외없이 기존에 작곡된 칸타타나 코랄 등을 많이 차용하여 전체 곡을 구성하였다.[34] 만년에 작곡된 대 미사로, 평생동안 바흐가 작곡한 곡들의 토막들이 곳곳에서 다시 사용되고, 변용되고, 융합되어 하나의 장대한 서사시를 완성한다.[35] 이 목록에는 누가수난곡 BWV 246도 있으나 이 곡은 바흐의 작품이 아니다.[36] 이 마가 수난곡이 1731년 3월 23일에 초연되고 1744년에 재연됐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악보는 분실되고 피칸더(Picander, 본명은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헨리치Christian Friedrich Henrici)가 쓴 대본만 남아있다. 기록을 볼 때 이 곡은 다른 수난곡과 달리 기존의 곡을 조합해서 만든 일종의 패러디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칸타타 54번의 아리아와 칸타타 198번 전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의 합창, 바흐가 자기 작품에 인용했던 카이저(Reinhard Keiser)의 곡 등 기존의 곡을 인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에는 대본에 기초하여 여러 곡으로 이 마가 수난곡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학자와 연주자에 따라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37] 형식상으로는 6부로 구성된 오라토리오이긴 한데 실제로는 6개의 칸타타를 모아놓은 칸타타 모음곡에 가깝다. 물론 각 칸타타는 음악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따로 노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규모가 큰 바흐의 종교음악이 항상 그렇듯이 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도 기존의 곡들을 많이 차용하였는데 특히 BWV 213-215의 세속칸타타 3곡을 많이 인용했으며 6부의 경우 현재는 악보가 분실된 칸타타 BWV 248a에서 많은 곡이 차용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차용한 선율들이 많은데, 예를 들면 마태 수난곡의 O Haupt voll Blut und Wunden(오, 피와 상처가 가득한 머리여)나 Wo ist der neugeborne König(새로 태어나신 왕은 어디 계신가)의 주 선율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38] 주제 부분이 꽤 인상적인데, 이는 바흐가 만든 주제는 아니고 앙드레 레종(André Raison)(1640경-1719)의 것을 차용한 것이다.[39] 이 독일 오르간 미사는 바흐의 오르간곡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음악적으로 심오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형식은 전형적인 프랑스식의 오르간미사를 따르고 있으며 전례적으로는 이 독일 오르간 미사에 앞부분에 BWV 552의 전주곡파트를 서곡으로 연주하고 연주가 끝난 후에는 BWV 802-805의 4곡의 듀엣과 같은 곡의 BWV 552 푸가파트를 종곡으로 연주한다.[40] 이 - 변주곡의 다른 버전인 BWV 769a도 있으며 769 못지 않게 자주 연주된다.[41] 1080번까지 BWV번호가 정리된 후 1985년에 예일대학 장서관에서 악보가 발견되어 1090번 이후의 번호가 붙어 있다.[42] 인벤션과 신포니아는 자기 아이들과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작곡된 일종의 연습곡으로 당연히 3성부 신포니아가 난이도가 높다.[43] 건반악기 독주를 위한 음악이지만 특이하게 '협주곡'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데, 이 제목에는 이탈리아의 협주곡 양식을 독주악기로 구현해보고자 했던 바흐의 실험정신이 담겨 있다. 즉 통상적인 이탈리아 협주곡 양식처럼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리토르넬로 형식(협주와 독주가 되풀이되는 형식)을 건반악기로 구현하기 위해 독주부처럼 단선율(및 통주저음) 위주로 전개되는 부분과 협주부분처럼 여러 성부가 같이 연주되는 부분이 반복적으로 구현된다.[44] 알레산드로 마르첼로의 대표곡, 오보에 협주곡 d단조의 건반악기 편곡버전.[45] 특이하게 이탈리아어로 제목이 붙어 있는 이 곡은 바흐의 초기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곡이다. 바흐가 19살 경에 그의 작은 형 요한 야콥 바흐가 스웨덴 궁정에 취직하여 스웨덴으로 떠날 때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해 씌어졌다고 하는데, 이 작곡 배경은 아직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또한 현재 보존되어 있는 바흐의 초기작품 대부분이 후에 수정이나 개작을 거쳤다는 것도 감안하자.[46] 파르티타 2번 다단조(BWV 997)의 전주곡은 팝픈뮤직의 악곡 Übertreffen의 원곡이다.[47] 파르티타 2번 d단조(BWV 1004)의 마지막 악장이 그 유명한 샤콘느이다.[48] 해당 곡들은 다른 악기로 자주 편곡된다.[49] BWV 1027~1029중에 가장 잘 알려진 곡이다.[50] 하프시코드 협주곡 3번 D장조 BWV1054의 바이올린 버전이다.[51] 스즈키 바이올린 교본 4권에 2nd violin, 5권에는 1st violin 파트가 수록되어 있다.[52] 쾨텐시절 초기에 작곡된 일종의 콘체르토 그로소(합주협주곡)이다. 기본적으로 바이마르에서 익힌 이탈리아 협주곡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통주저음 위에서 단순하게 전개되는 이탈리아식 협주곡과 달리 곡마다 악기 편성이 달라지고 각 악기들이 대위법적인 성부의 개념으로 호흡을 맞추기 때문에 이탈리아식 협주곡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하다.[53] 피아노로 연주될 때는 피아노 협주곡으로, 하프시코드로 연주될 때는 하프시코드 협주곡으로 쓴다. 곡마다 하프시코드의 개수가 1~4대로 다르다. 예를 들어 1065는 하프시코드가 4대 쓰인다.[54] 바이올린 협주곡 버전인 BWV1052R(바이올린 협주곡 3번) 및 이보다 먼저 오르간을 위해 작곡된 것으로 추정되는 BWV1052A 버전 등이 존재하는데, 정확한 순서와 경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55] 1악장 Allegro가 상당히 유명하며 BWV1042(바이올린 협주곡 2번)에서도 동일한 선율이 쓰였다.[56] 역시 바이올린 협주곡 버전 BWV1056R(바이올린 협주곡 4번)이 존재하며, 특히 2악장 Andante는 바흐를 모르는 사람도 어딘가의 배경음악등으로 들어본 적은 있을 정도로 널리 연주되는 곡이다. 이 선율은 칸타타(BWV 156)로도 쓰인 바 있으며, 친분이 깊었던 텔레만의 오보에 협주곡(TWV.51:G2)의 영향을 받은 곡으로 추정하고 있다.[57] BWV1049(브란덴부르그 협주곡 4번)에서도 동일한 선율이 사용되었다[58] BWV1041(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서도 동일한 선율이 사용되었다[59] 미완성[60] 원곡은 비발디의 '4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단조 RV580'이다. 바흐는 비발디를 매우 존경하여 그의 작품을 많이 연구하였으며 직접 다른 악기로 편곡도 하였다.[61] 칸타타 BWV156의 신포니아와 분위기면에서도 그렇고 멜로디면에서도 상당히 흡사하다. 당시 교회음악에 흥미를 잃은 바흐가 G aria에서 대충 가져와서 쓴 걸로 추정된다.[62] 오르간의 스톱을 조합해 음색을 만드는 것.[63] The Triumph of Music: The Rise of Composers, Musicians and Their Art. p. 272. ISBN 9780674031043. And of course the greatest master of harmony and counterpoint of all time was Johann Sebastian Bach[64] I don't think a greater genius has walked the earth. Of the 3 great composers Mozart tells us what it's like to be human, Beethoven tells us what it's like to be Beethoven and Bach tells us what it's like to be the universe.[65] Bach has been called 'the supreme arbiter and law-giver of music'. He is to music what Leonardo da Vinci is to art and Shakespeare is to literature, one of the supreme creative geniuses of history.[66] "Nicht Bach, sondern Meer sollte er heißen." ("Not a brook, he should called as a sea")[67] "Urvater der Harmonie" ("Original father of harmony")[68] 클리포드 커즌, 존 엘리엇 가디너, 이고르 마르케비치, 필립 글래스, 아스토르 피아졸라, 에런 코플런드 등의 스승인 당대 최고의 음악 교수기도 했다.[69] "Studiert Bach! Dort findet ihr alles." ("Study Bach! There you’ll find everything.")[70] 독일의 음악학자. 해당 그림은 1799년에 독일의 음악신문에 게재된 그림으로 바흐가 태양의 가장 중심에 있으며 그 주위에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 요제프 하이든, 조지 프레드릭 헨델 등이 위치하고 있다. 하이든에게 해당 그림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전혀 기분나쁘지 않으며 바흐가 태양의 중심이며 그로부터 음악의 참된 지혜가 발현되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71]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집을 다시 녹음해 발표하면서 한 말이다.[72] 혀뿌리와 뒤쪽 입천장을 닿을락 말락 하게 한 후 공기를 내쉬면 된다. 우리말에서는 '흙' 등을 발음할 때 이 소리가 난다.[73] 혀 중간 부분과 앞쪽 입천장을 닿을락 말락 하게 한 후 공기를 내쉬면 된다. 우리말에서는 '히읗' 등을 발음할 때 이 소리가 난다.[74] 당시 유럽인의 평균 신장은 160cm 정도 였다.[75] 여기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바흐가 알아듣도록 독일어로 말하면서도 중간중간 자신의 모어나 다름없던 프랑스어를 섞어 말하고 있다.[76] 당시의 피아노는 쳄발로보다 조금 더 비쌌다.[77] 참고로 그를 재발굴한 멘델스존의 음악은 그가 유대인 혈통이라며 나치 집권기에는 연주가 금지됐다.[78] 모순적이게도 정작 바흐는 살아있을적에 전쟁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79] 현재 일본 바이올리니스트 사토 슌스케(佐藤 俊介)가 이끌고 있는 협회다.[80] 일단 ‘333’이라는 숫자는 세계적인 음반사 유니버설 뮤직의 마케팅에서 나온 것이었다. [81] 그러나 이때는 무려 450명의 합창단이 동원되어, 바흐 당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