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

 


성명
최규철(崔圭哲)
본관
전주 최씨
생몰
1913년 12월 20일 ~ 1992년 2월 28일
출생지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시면 영보촌
(현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1]
사망지
전라남도 영암군
추서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규철은 1913년 12월 20일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시면 영보촌(현 덕진면 영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1년 김판권(金判權) 등 동지들과 함께 야학을 개설하여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식민통치제도의 모순 타파를 추구했다. 이후 1932년 3월 영보리 야학회관에서 농촌사회의 피폐상과 현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처의 후회」라는 신파극을 공연하여 은연중 항일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들은 지주의 자의적인 소작권 이전 횡포와 고율의 소작료로 인해 소작 농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에 주목하고 일제 식민통치구조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지주, 소작관계를 타파하여 소작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최규철 등은 1932년 3월 전남 영암군 덕진면에서 동지들과 함께 덕진면 운암리 지방 지주들의 소작권 이전 횡포에 항거하여 동리 청년회관에서 청년회원 수십 명을 모아 소작권 이전의 방지 방법에 관한 협의를 하였다.
이어 6월에는 최규철을 비롯한 청년회원 수십 명이 모여 소작권 이전 방지를 협의한 후 덕진면 운암리와 백계리 방면에서 구(舊) 소작인의 집에 돌입하여 소작권 이전의 부당함을 꾸짖고 동인들을 구타 응징한 후 소작쟁의 만세를 고창하고 노동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이 일로 체포된 최규철은 미결기간 동안 1년 3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3년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후 영암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92년 2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최규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전주 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규원·최동림·최병수·최사진·최석호·최판열이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