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수

 


1. 아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수
2. 영암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수


1. 아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수


성명
최병수(崔炳秀)
생몰
1876년 7월 17일 ~ 1919년 4월 4일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군 선장면 대정리
사망지
충청남도 아산군 선장면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최병수는 1876년 7월 17일 충청남도 아산군 선장면 대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도고면, 신창면에 있는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독립만세시위의 취지를 설명하고 4월 4일에 선장 장날에 시위를 전개하자고 주장해 찬동을 얻어냈다. 이후 정수길·김천봉(金千鳳)·서몽조·임천근(林千根)·오상근 등과 함께 4월 4일 선장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4일, 그는 동지들과 함께 선장면, 신창면, 도고면 등 3개 면민 200여 명을 모아 오후 3시경 군덕리 장터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김천봉은 군중의 앞장에 서서 시위운동을 이끌었고, 정수길·서몽조·임천근·오상근은 곤봉을 휘두르며 군중을 지휘하여 선장면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창문에 투석하는 등 치열하게 시위가 전개되었다. 육군 헌병 조장(曹長) 쇼지 마고사부로(庄司孫三郞)는 시위대를 향하여 총격을 가하였고, 최병수는 이때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나아가다 일본 헌병의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숨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병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영암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수


성명
최병수(崔秉壽)
이명
최병희(崔秉熙)
본관
전주 최씨
생몰
1906년 11월 5일 ~ 1965년 2월 2일
출생지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시면 영보촌
(현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1]
사망지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추서
건국포장
최병수는 1906년 11월 5일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시면 영보촌(현 덕진면 영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1년 음력 8월 하순 ‘공산주의 연구회’를 조직하고, 청년부원들과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의 야학생들에게 신사회 건설과 독립에 대한 의식을 고취하였다. 1932년 3월 7일 최석호·최동환·최동림과 함께 야학회관에서 「아내의 후회」라는 제목의 신파극(新派劇)을 공연하여 다수의 민중이 관람하도록 했다.
1932년 5월 1일, 최병수는 메이데이를 기하여 최판옥, 김판권 등과 함께 소작권 이동 반대 시위를 기획하고 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5월 1일 당일은 일본 경찰의 경계가 심하므로 실제 시위운동은 음력 5월 1일인 양력 6월 4일에 진행하기로 계획되었다. 이들은 영보정 뒷산에서 덕진면 내 청년회원 약 70명과 함께 운암리·백계리 방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작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소작권 이동 방지를 위해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의기투합하였다. 그리고 선두에 적기(赤旗)를 세우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노동가(勞動歌)를 부르며 운암리 방면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중에 경작권을 약탈한 새로운 소작인의 집으로 몰려가 그 행위를 질타하기도 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32년 7월 22일 검찰로 송치되어 1933년 6월 22일 예심이 종결되었다.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를 제기하여, 1934년 3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고 다음날 출옥하였다. 이후 영암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6년 2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최병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1] 전주 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규원·최규철·최동림·최사진·최석호·최판열이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