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림

 


성명
최동림(崔東林)
본관
전주 최씨
생몰
1910년 3월 7일 ~ 1950년 10월 20일
출생지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시면 영보촌
(현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1]
사망지
전라남도 영암군
추서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동림은 1910년 3월 7일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시면 영보촌(현 덕진면 영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0년대 초 최동환, 최판옥(崔判玉), 김판권(金判權), 류용희(柳龍羲), 최병수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영암군 내 사회운동을 지도했다. 또한 1931년 9월부터 1932년 5월 사이에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서 야학을 개설하여 청년들을 비롯한 야학생에게 신사회 건설과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32년 3월 7일 최석호·최동환·최병수와 함께 야학회관에서 「아내의 후회」라는 제목의 신파극(新派劇)을 공연하여 다수의 민중이 관람하도록 했다.
1932년 5월 1일, 최동림은 메이데이를 기하여 최판옥, 김판권 등과 함께 소작권 이동 반대 시위를 기획했다. 하지만 당일에 일제 경찰의 경계가 심하자, 그들은 계획을 바꿔 음력 5월 1일인 6월 4엘이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6월 4일 당일, 그들은 영보정(永保亭) 뒷산에서 덕진면 내 청년회원 약 70명과 함께 운암리, 백계리 방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작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소작권 이동 방지를 위해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의기투합하였다. 그리고 선두에 적기(赤旗)를 세우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노동가(勞動歌)를 부르며 운암리 방면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중에 경작권을 약탈한 새로운 소작인의 집으로 몰려가 그 행위를 질타하기도 했다.
이 일로 10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영암경찰서에 체포된 그는 1932년 7월 22일 검찰로 송치되어 1933년 6월 22일 예심을 받았고,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해 1934년 3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고 다음날 출소했다. 이후 영암군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50년 10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최동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 전주 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규원·최규철·최병수·최사진·최석호·최판열이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