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연해주의 사업가
최봉준은 1862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8살 때 부모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하여 러시아 비노그라드노예에 정착했다. 9살 때인 1870년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어머니와 함께 행랑살이를 하며 초근목피로 목숨을 보전했고, 이후 삯품팔이와 황무지 개간을 통해 집을 마련했다. 15살 때인 1876년 비노그라도노예를 떠나 추풍으로 이주했으나, 마적들이 횡행하자 1880년 다시 연추 남쪽으로 옮겨 향산동에 정착했다.
1882년 21세의 나이로 김씨와 혼인했으며, 이주민들로부터 거류지 민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민장으로서 악습 금지, 교량과 도로 수축, 하천 정비, 학교 설립 등을 통해 촌락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 최봉준은 독립신문에 ‘문명한 나라의 학문에 힘쓸 것과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당시 주민들은 그를 최노야(崔老爺)라고 불렀는데, 이는 촌장을 의미한다.
최봉준은 향산동에 거주하는 동안 유창한 러시아말과 소년 시절부터 닦아온 기량과 두뇌를 발휘해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사업을 개시했다. 그가 먼저 손댄 사업은 러시아 농가에서 사들인 달걀을 함경도에 가져와 파는 일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른바 개량종 양계법에 따라 달걀을 대량생산하고 있었다. 그 달걀은 많은 노동자 유민들의 비상식량이기도 했으며, 또 달걀을 함경도까지 그대로 가지고 나가면 그 이익이 두 배가 넘었다. 달걀 판매로 차츰 기반을 닦은 최봉준은 1890년대 후반 명성황후가 친러파 정객들과 어울려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을 즈음에 이르러서는 대사업가로 자리잡았다.
그는 성진을 중심으로 원산·경흥·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산·홍콩·상하이·일본까지 활동무대로 삼았다. 러시아·일본·중국에서 각종 수입품, 특별히 비단이며 광목·석유를 들여와 함경도 일대는 물론 부산에서 동해안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지배하는 거상이 되어 갔다. 또한 연해주에서 역시 크게 성공한 사업가인 최재형과 의형제를 맺었다. 1900년 모친상을 치른 최봉준은 노야직을 내려놓고 경성을 여행하였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와 북관 지방(성진, 경흥, 원산)간의 무역이 활발했는데, 특히 러시아 군대에 생우를 수출하는 것이 가장 큰 무역이었다.
최봉준은 유람에서 돌아온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러시아 군대에 물품공급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 러시아군이 의화단의 난 진압을 위해 베이징으로 파견되면서 군수품의 수요가 증가한 덕분에, 그의 군수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러자 최봉준은 1903년 일본 기선을 임대해 매월 3회 이상 원산-성진-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생우 무역을 전개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군대에 군수품 공급업이 활황을 띠자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였다. 또한 1907년 일본의 기선 복견환(伏見丸, 후시미마루)을 영매(永買)하여 한국과 러시아, 일본, 중국 등의 항로에 취항시키면서 연해주를 대표하는 사업가로 거듭났다. 그는 한달에 1000여마리의 소를 복견환에 실어서 러시아에 수출했다. 그리고 광목과 중국에서 생산된 비단을 취급해 엄청난 이익을 올렸다. 해마다 함경도 지방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흘러나가는 계절노동자가 몇만 명에 이르렀다.
2.2. 민족운동
최봉준은 자신의 부를 민족 부흥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시베리아에 한국민회(韓國民會)를 조직, 재정적 후원을 맡았다. 또한 1908년 2월 26일 해조신문을 창간하여 5월 26일까지 75호를 발행하였는데, 해조신문은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최초로 간행된 신문이었다. 최봉준은 해조신문을 발행하기 위해 고국에서 장지연을 주필로 초빙하기까지 하였다. 해조신문은 간행사에서 국민의 지식 발달과 국권 회복을 통한 완전한 독립의 성취에 있음을 천명하였다.
최봉준은 1909년 한인거류민회 민장이 되어 계동학교 증축비 600루블을 기부하였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 후 의연금을 쾌척하였으며, 대동공보가 창간되자 해조신문의 인쇄기를 양도하였고, 권업신문이 창간되자 기부금을 보냈다. 1911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민학교 권업회가 설립되자 특별임원으로서 이범윤, 김학만, 최재형 등과 함께 총재로 선출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되자 유인석이 주도한 블라디보스토크 성명서에 서명해 한일병합에 반대함을 분명해 밝혔고, 1917년 청구신보의 창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최봉준은 1906년블라디보스토크의 계동(啓東)학교 설립에 쾌척했다. 그전에도 연해주 한인촌에 학교를 여럿 세우고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국내 의병 등의 항일무장투쟁에는 반대했다. 1908년 의병들이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자 자신의 무역업에 지장을 받게될 것을 염려해서인지, 그들을 비난하였다. 1909년 7월 8일 일본측 첩보 보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09년 최재형과 이범윤이 의병을 일으켜 국내 진공작전을 단행했을 때 최봉준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의형제 사이었던 최재형과 최봉준은 갈라섰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도 1909년 11월 29일 여순감옥에서 행한 진술에서 “최봉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자이다. 의병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겁이 많은 사람으로 자신의 생명과 돈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안중에 없는 인물이다.”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정작 최봉준은 안중근이 순국한 뒤 그의 유족을 위해 의연금을 기부했다.“최봉준은 6월 13일 경흥 관내 항상동 맞은 편에 있는 러시아령에서 다수를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나(최봉준)는 일본에게 그 은덕을 감사하고 있소. 왜냐하면 일본은 독립국 답게 하기 위해 일청전쟁과 일러전쟁에서 거금의 전비와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후 우리나라의 개선과 발전을 위해 극력 원조하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오. (중략) 의병들은 스스로 의병이라고 칭하지만, 사실은 의병으로 빙자한 폭도들에 불과하오. 작년 이후 각 촌에 그 비용으로 거액의 금품을 모집하여 인민들의 고혈을 짜낼 뿐만 아니라 하나도 국가의 행복을 증진시킨 것이 없소.”
1909년 7월 8일자 일본측이 작성한 ‘최봉준의 행동’이란 보고서에는 “(그가) 일본에 귀화하여 동경으로 이주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배일당이기 때문에 일본인에게 친일당인 것처럼 생각하게 위한 책략일 것으로 추측된다”고 기록되었다. 이로 볼 때, 그가 의병을 강하게 거부했지만 친일 행위를 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2.3. 최후
1912년 이후 사업이 점차 실패를 거듭하여 1912~1913년에 이르러서는 채무만 남기고 빈털터리가 되었다가 1912(51세)년 준창호를 일본인에게 매각하였다. 권업신문 1912년 12월 15일자에 “최봉준 씨는 수만원의 왜채를 청산치 못하여 그 소유 상점 준창호를 일인이 집행하였다더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최봉준의 몰락은 1912년 준창호가 항해 중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좌초된 이후 수출에 타격을 입었고, 관북지방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의 생우 수출이 급감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1908년 이래 일제측이 최봉준의 동향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한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917년 이후 최봉준은 더 이상 대외활동을 중단하고, 추풍으로 이거한 뒤 이질에 걸려 고생하다 1917년 9월 25일 56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추풍 허커우 정교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1917년 9월 30일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된 한인신보는 최봉준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주에서 간행된 신한민보도 1917년 11월 1일자에 다음과 같은 논평을 게재했다.“최봉준 씨는 첫째 우리 신문계에 해조신문을 자비경영으로 창립한 시조임. 실업으로는 백만원 이상의 거래를 하며 화물선 준창호를 부리어, 내외국 항구에 상업지점이 즐비하였으며, 그밖에 사회의 공공사업에 힘쓴 일이 많았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최봉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백만동포의 슬픔, 원동의 큰 사람 최봉준씨가 장서-풍속도, 실업도, 신문도, 교육도 모두 그 손으로 창설, 우수리강 연안에 만리장성이 무너졌다.”
3. 여담
최봉준의 삶을 다룬 월화드라마 <무역왕 최봉준>이 1983년 1월 3일부터 1983년 3월 22일까지 문화방송에서 방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