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조선 제38대 왕비
명성황후 | 明成皇后
'''
'''대한제국 초대 책봉 황후'''
'''명성태황후 | 明成太皇后'''

존호 · 휘호 · 시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1px;"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
(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
<colbgcolor=#e3ba62> '''존호'''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
(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
'''휘호'''
제휘열목(齊徽烈穆)
'''시호'''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colbgcolor=#bf1400> '''출생'''
1851년 11월 17일 (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
(現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
'''사망'''
1895년 10월 8일 (43년 10개월 21일 / 16,032일)
한성부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능묘'''
홍릉(洪陵)
'''재위'''
1866년 3월 21일 ~ 1895년 10월 8일
(29년 6개월 17일 / 10,79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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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여흥(驪興)
'''아명'''
아영[75]혹은 자영(玆暎)
'''전호'''
경효전(景孝殿)
'''신장'''
163cm[76]
'''부모'''
부친 여성부원군 민치록
모친 한창부부인 이씨
'''부군'''
고종
'''자녀'''
4남 2녀
차남 순종효황제 이외 조졸

1. 개요
2. 왕비가 되기까지
3.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4. 민씨 일파
4.1. 명성황후와 온건개화파
4.2.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의 온건개화파
5. 을미사변에 대해
5.1. 조선인 협력자들
5.2. 무시당한 을미사변?
5.3. 2009년 TV 아사히의 보도
5.4. 명성황후는 죽지 않았다?
6. 추존 황후인가? 아니면 정식 황후인가?
6.1. 추존황후가 맞는가?
6.1.1. 추존 황후의 지위로 나타나는 황실 내부 위계상의 오류들
6.1.2. 명성황후 "추존"에 관련한 의궤나 실록의 기록이 있나?
6.2. 정식황후라는 증거는?
6.2.1. 고종실록과 대례의궤
6.2.2. 명성황후책봉 금책과 금보
6.2.3. 문화재청의 세계기록유산 기념메달 제작 및 판매
7. 평가
7.1. 질투
7.2. 미화
7.3. 다른 시각
7.3.1. 옹호론
7.3.1.1. 언더우드가 받은 100만냥은 어마어마한 금액?
7.3.2. 비판론
8. 호칭 문제
8.1.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다
8.2.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 아니다
8.3. 고종과의 형평성?
9. 사진과 초상화 논란
9.1. 사진
9.1.2. 이승만의 책 "독립정신"에 실려있던 사진
9.1.3. 흥선대원군과 함께 찍은 사진
9.1.4. 기타
9.2. 초상화
9.2.1. 명성황후 영정
9.2.2. 민씨부인(閔氏夫人) 초상화
9.2.3. Le petit Parisien의 삽화
9.2.4. Novoe Vremy의 삽화
10. 창작물에서 나오는 묘사
11. 명성황후를 연기한 배우
1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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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대한제국 고종의 정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모친.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 김씨와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하자.[1] 을미사변으로 사망한 후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추존되어 명성황후라 불리게 되었고 생전에는 중전 민씨, 왕후 민씨로 칭했다.
1895년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사실로 유명하며 현대의 한국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가장 높은 조선 왕비[2]. 그녀는 여흥 민씨들의 부정부패를 뒷받침했고 임오군란갑신정변 때는 청나라를 우리나라로 끌어들였다. 청일전쟁으로 일본경복궁을 점령하고 일본이 내세운 친일 내각이 갑오개혁을 실시하자 러시아를 끌어들여 축출시켰다. 이로 인해 앙심을 품은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역사학계에서 명성황후 평가는 대체로 상당히 부정적이며, 또한 공무원 한국사나 수능 한국사 등 역사교육계에서도 상당수 강사들이 명성황후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주사파 민족사관에서는 그녀를 위인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드라마 등 매체에서 역사왜곡을 저지르며 그녀를 위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일 감정 때문인지 명성황후를 옹호하려는 경향은 대중적이다. 특히 여흥 민씨[3]들은 21세기인 현재에도 민비를 위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명성황후를 옹호하는 이들은 민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일제의 식민사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당시 교과과정의 역사교육은 물론 일본 내에서는 명성황후를 악녀로 묘사하고 비난하는 소설 등이 출간되고 국내로도 반입된다. 반대로 일본이 지원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은 호평하고 이를 주도했던 급진 개화파 인물들은 그녀를 과도하게 띄웠다. 이때 형성된 사관과 민중 의식은 오랫동안 지속되다 당시 상황과 인물들의 평가를 기록한 각국 공사관 문서가 공개되고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 인물들의 부정적인 면모도 알려지면서 중화된 편이다.
명성황후를 옹호하는 주장에 따르면 을미사변을 주도한 미우라 고로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후 일본의 20년 화근을 제거했다고 기뻐한 것을 들며 명성황후가 조선이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다 의로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평하고 있다. 또 프랑스 르땅지의 극동 특파원 빌따르 드 라게리는 오직 명성황후만이 조선을 이끌 수 있었던 정치가였다고 기술하면서 명성황후가 죽음을 당하자 조선은 맥없이 무너졌다는 평가를 한 것, 미국 외교관 출신인 윌리엄 플랭클린 샌즈가 명성황후를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라고 평가한 것도 인용하고 있다.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는 흥선대원군 세력과 급진 개화파에게 매우 비난의 대상이었고 당대의 민중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매천야록에 이러한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다. 이는 흥선대원군 하야 이후 개화를 받아들여 수입품이 쏟아져 국산품을 밀어내고 당백전당오전의 발행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닥쳐 생활고를 겪었던 상황을 민중들이 왕비가 국고를 탕진했다고 믿었던 탓이다. 다만 민겸호, 민영휘 같은 부패한 민씨 척족들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조선말기에 조선를 구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녀가 등용한 민씨일족들 상당수가 조선을 망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민겸호는 군납비리를 저질러서 조선의 중앙군들을 결과적으로 공중분해시켰고 민영휘는 청군파병을 주장해서 조선을 청일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이런 일이 쌓여서 결국 터진게 임오군란으로 이로 인해 외국 군대가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4] 동학농민운동 당시 정신을 못 차리고 일본군이 파병하도록 만들어 결국 자기 목숨까지 잃게 만든 것을 생각해보면 호평하는 부분도 높게 평가할 이유가 부족하다.

2. 왕비가 되기까지


훗날 왕비가 되는 민자영은 1851년 11월 17일(음력 9월 25일) 자시[5]에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6]에서 아버지 민치록(閔致祿)과 어머니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원래 민자영을 포함 남매가 1남 3녀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외동딸로 컸다. 이름은 '아영' 또는 '자영'이라고도 한다.[7]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는 유복한 생활을 했다. 왕비 간택 당시 고아였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모친 '감고당 이씨'는 명성황후가 간택된지 한참 뒤인 1874년 민승호 암살 사건에 휘말려서 같이 죽었다.
민자영의 가계는 인현왕후의 큰오빠 민진후의 직계로 할아버지 민기현(閔耆顯)은 예조참판, 아버지 민치록은 음보로 군수를 지냈고 사도시 종4품 첨정까지 올랐다. 대과를 안 본 사람으로서는 꽤 높은 관직이다.
[image]
1866년 민자영이 14세이던 해에 고종의 양어머니[8] 대비 조씨는 고종의 왕비를 정할 간택령을 내린다. 대비 조씨는 간택령에 따라 금혼령을 내리고 처녀 단자[9] 2월 25일 창덕궁 중희당에서 초간택을 하는데 민자영이 5명의 후보에 든다. 재간택을 거쳐 3월 8일 삼간택 때 마침내 고종의 왕비로 최종 선정된다. 이후 3월 21일 13세의 고종과 혼례를 올린다.
당시 풍양 조씨 세력을 대표하는 대비 조씨와 실세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깊은 뿌리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민자영의 여흥 민씨는 남연군 - 흥선대원군 2대에 걸친 혼맥으로서 충분히 강력한 아군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아내 부대부인 민씨의 먼 친척이기도 했고 집안 격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부친은 물론 친형제가 없어 외척 걱정도 덜었다. 나중에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는 민승호도 대원군의 처남이었다.[10]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어머니, 부인, 며느리, 손자며느리가 모두 일가 친척, 남연군-흥선대원군-고종-순종 직계 4대가 모두 여흥 민씨 일가 친척들과 결혼한 것이다.

3.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image]
앞서 말했지만 고종의 법적 아버지는 죽은 효명세자이지 흥선대원군이 아니다. 따라서 중전 민씨의 시아버지가 법적으로 흥선대원군인 것은 아니다. 그럼 무시를 하면 될텐데 문제는 흥선대원군이 정권의 실세였다는 점이었다.
중전 민씨와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성인이 된 시점부터 사이가 점점 틀어졌다. 그 원인을 두고 여러 설이 있지만, 첫아이와 관련된 설이 유명하다. 1871년 11월 4일 중전 민씨가 출산했지만 아기가 항문 없이 태어나 4일 뒤 죽는다.[11] 곧바로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궁인 이씨(영보당 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완화군(완친왕)을 원자로 책봉하려 했고 이때부터 사이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야사에는 흥선대원군이 아기에게 산삼을 달여 먹였는데 죽고, 중전 민씨는 이를 완화군을 책봉하기 위한 고의라고 의심해 흥선대원군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게 됐다고도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근거가 부족하다.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입장에선 고종의 첫 아이인 완화군을 유난히 귀여워한 건 사실인데, 이는 당시 조선 왕실은 수십년간 서자 출신 왕자조차 태어나지 않을 정도로 자손이 귀했기 때문이다.[12] 더불어 왕권 강화를 하려던 대원군의 입장에서 후대 왕의 권위에 문제를 줄 수 있는 서자를 성급하게 왕세자로 만들어야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당시 고종이 아직 20도 안된 나이인 것을 생각해보면, 장차 왕세자가 될 고종의 첫 적자가 태어났는데 이 적자를 제치고 서자를 급히 원자로 만든다는 것은 명분은 물론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다.
실제로는 남편이 친정에 나서자, 남편을 돕기 위해 민씨는 여흥 민씨 친척들을 모아 정치 세력화했다. 믿는 구석이 생긴 두 부부는 흥선대원군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일리가 있었다. 원래 왕실에서 왕이 될 아이를 입양할 때는 아버지가 없는 먼 친척 아이를 데려오지만 고종은 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에겐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사에는 흔히 베갯송사, 즉 중전 민씨의 배후 조종설을 주장한다. 반대로 일본인들의 인식으로는 사사건건 개입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해 부담을 느낀 고종이 스스로 민씨 파벌을 키웠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1873년 대원군 실각 이후의 대립은 부자 갈등의 양상이 커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1882년 임오군란 때 궁으로 컴백한 흥선대원군은 중전부터 죽이려 했고, 탈출 사실을 알고도 죽었다고 거짓 반포할 정도로 구부갈등(舅婦)은 골이 깊었다.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끌려갔을 때(1882년) 명성황후에게 보낸 한글편지가 2012년 6월 공개되었다. #. 편지의 어투가 매우 정중하고도 은근해서 둘 사이 갈등이 거짓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흥선군은 '을'이고 청나라를 등에 업은 왕비는 '갑'이다. 왕실의 안녕과 본인의 귀국에 대해 대원군이 패배자로서 보낸 메시지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왕실 사람들이다. 아무리 정적 관계라해도, 적어도 겉으로는 부드럽고 차분하며 공손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무엇보다 대원군은 왕비보다 격이 낮기 때문에 당연히 며느리가 아니라 국모로서 대해야 한다.

4. 민씨 일파


원래 19세기 중반까지 조선은 장동 김씨[13]가 세도 정치를 하면서 중앙 요직은 물론 지방직도 싹쓸이를 하는 시점이었다. 몇 대에 걸쳐 왕가와 혼맥을 맺고 왕권을 약화시키고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흥 민씨는 경주 이씨, 반남 박씨나 양주 조씨, 풍양 조씨, 안동 권씨, 달성 서씨 등과 함께 조정 내에 일정한 세력을 이루었다.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의 풍양 조씨, 그리고 근본주의적 유학자들인 척화파들을 데리고 안동 김씨를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딱 10년 동안 화폐도 주조하고 경복궁을 중건하고, 두 차례 양요를 막아내는 동시에 서원을 철폐하는 개혁을 이뤘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을 일으키려는 노력일 뿐으로, 근대화의 문제를 계속 외면했다.
흔히들 하는 오해는 여흥 민씨들을 명성황후가 끌어들였다고 하는데 개화기에 활약한 민씨들의 대부분은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에 등용한 인물들이다.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민씨였으며 명성황후가 입궐 이전부터 상당수의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 민씨였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 고종은 이들을 중용해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지속시키는 한편, 흥선대원군이 반대했던 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여흥 민씨들은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온 혈연 학연을 동원해 각 요직과 지방직을 휩쓴다. 안동 김씨의 세도를 그대로 가져가려 했다. 매관매직을 통해 파벌의 덩치를 순식간에 불렸다. 다만 수십년에 걸쳐 형성된 안동김씨의 패권을 몇년만에 집어먹는 건 통치경험이 미비한 이들로서는 상당히 버거웠다.
그러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의 국서 문제로 개항을 하느냐 마느냐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박규수 등 개화파들이 개항을 주장한 데 반해 여흥 민씨들은 아직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축출된 대원군이 '척화'라는 기치를 들고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고종 부부는 개화파의 손을 들었다. 곧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개항된다.
삼정의 문란은 민씨들이 집권해도 변한 것이 없었는데 외국 문물까지 밀려들면서 글읽는 선비나 백성들의 불만은 고조되기 시작했다. 고종은 왕권의 강화와 국방을 위해 서구식 군대를 창설할 필요를 느꼈다. 원래 있던 오군영에서 80명을 차출해 별기군을 새로 창설하고 기관포를 수입해 배치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국방비를 증액한 게 아니기 때문에 오군영 운영비를 충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882년 견디다 못한 오군영이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역적이 되지 않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추대했고, 그는 장남 이재면과 부인을 대동해 입궁했다. 이들은 제일 먼저 별기군을 창설한 민겸호와 김보현을 주살하고 왕비를 죽이려 했다. 왕비는 궁녀로 변장해 무예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충주(장호원)까지 도망간다.
중전이 충주로 피난을 간 당시, 임오군란을 일으킨 병사들은 중전과 책임자들을 도륙하기 전엔 해산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흥선대원군은 빨리 국정을 안정시키려면 일단 이들을 해산시켜야 했다. 중전이 난리 중에 죽었다고 선언하고 국모로서 국장을 선포하고 병사들을 해산시킨다.[14]
한편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중전과 측근들은 밀사 윤태준을 고종에게 보내 자신들의 생존을 알린다.[15] 이들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당장에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대는 왕십리 근처에 모여있던 오군영 병사들을 순식간에 도륙하고 서울을 장악했다. 민씨들은 조정으로 바로 복귀하고 대원군은 만주로 끌려간다. 위기는 곧 기회. 민씨들은 완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개화파들에게도 약간 자리를 허락한다. 이들은 청나라 식의 근대화인 양무운동 모델을 따라 국정을 개조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근대화를 책임지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된 것이다.

4.1. 명성황후와 온건개화파


흥선대원군 실각으로 척화파가 힘을 잃고 개화파는 중앙에 본격적으로 등용된다. 청나라 모델을 따르는 온건 개화파와 일본 모델을 따르는 급진 개화파로 갈렸다. 일본 모델을 주장한 급진 개화파는 대해 청나라 모델을 주장한 온건 개화파를 비하할 목적으로 수구당이라고 불렀다. 온건 개화파를 흥선대원군의 척화파와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온건개화파 역시 개항과 동도서기라는 패러다임으로써 서구화를 주장했다. 물론 박정양 등 온건개화파라고 따로 이름하는 부류도 있긴 하다. 민영익박규수의 제자이자 김옥균의 동문으로 개화당이었으나, 결국 온건 개화파로 전향해 친척들 틈에 끼었다.
개화를 추진하면서 정부는 자금이 필요했고 청과 일본이 국내 재정문제에 영향을 주었다,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파견했다. 이 때 내한한 재정고문 묄렌도르프가 새로운 화폐 주조 안건을 고종에게 올렸다. 일본 화폐를 도입해 영향력을 높이려던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차관을 얻고 금본위제를 하자고 주장했다. 둘다 장단점이 있었고 고종은 둘다 실시해서 당오전을 발행하게 하는 한편 김옥균을 일본으로 보내 차관을 받아오게 한다. 이미 흥선대원군 때 당백전으로 물가가 급등하는 등 부작용을 이미 경험했음은 물론, 돈 가치가 떨어지면 큰일난다는 거였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지만 세금을 더 걷지 못하는 조정으로서는 새 화폐 주조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는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난다. 김옥균 또한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은 못 받아왔다.
온건개화파의 정책이 주로 채택되자 급진개화파는 입지가 좁아졌고 이를 타개할 방법을 모색했다. 이들은 청나라 식이 아니라 아예 일본식으로 한 번에 서구화를 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16] 이미 일본의 근대화는 30년이 지나고 있었다.
서재필 등은 일본 군사학교에 보내 군제 개혁의 밑그림을 그렸다. 개화당이자 고종의 매제인 박영효는 사비를 탈탈 털어 군자금을 댈 정도였다.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의 제도를 연구하고 조선에 도입하기 위해 고종을 닦달했다. 그 때마다 온건 개화파와 충돌을 했다. 심지어 화폐 개혁이 실패하고 난리가 난 것을 급진 개화파 탓으로 돌렸다. 한 번은 일본에서 무상 차관을 준다고 그래서 김옥균이 일본에 갔는데 온건개화파는 뒤에서 고종을 협박하고, 일본 영사관에 사람을 보내 '차관 줘봤자 김옥균이 비자금을 만들 뿐이다'라면서 재를 뿌렸다. 결국 김옥균은 빈손으로 돌아왔고 관직을 모두 사퇴하는 척하면서 갑신정변을 준비한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김옥균과 급진개화파들은 고종과 중전을 납치하고 온건개화파를 눈에 보이는 대로 주살하기 시작했다. 청군을 막기 위해 일본군의 힘을 빌리기로 일본 영사관과 얘기가 끝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은 더이상 군사력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청과 합의했고 결국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급진 개화파는 대부분 인천에 정박했던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 호에 올라 도망가고 조선에 남은 잔당과 가족들은 몰살된다. 갑신정변의 참상 때문에 일본식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역적으로 몰리는 상황이 됐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온건개화파 치하의 조선은 기존 체제를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서구 문물을 본격적으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재외 공사관도 설치했다. 주미 공사관, 주일 공사관을 시작으로 주요 10개 국에 외교 사절을 보냈다. 민씨 등을 비롯한 온건개화파는 전신 설치, 발전기 도입, 경인선 부설 및 지하 자원 조사 등에 나섰고 나름 성과도 있었다. 교육도 개혁했다. 성균관 개설 과목에 초보적인 경제학, 영어, 과학 등의 과목을 개설하고 젊은 관료들을 서구식으로 재교육하는 육영공원도 만들어 가르쳤다. 남녀 가리지 않고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중전에겐 여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17], 고종 부부에게 커피를 처음 소개한 마리 손탁[18] 등 외국인 친구들까지 생겼다.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 등은 덕수궁인천 제물포 등에 서구식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서울 정동에 손탁 호텔이 문을 연 것도 이 때다.
그러나 신분제, 양반 면세 제도 등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조선의 서구 근대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아울러 갑신정변 껀도 있어 과감한 정책 제안이나 시도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동안 '영약삼단' 등 청나라의 간섭은 날로 심해졌고, 일본도 앞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었지만 뒤에서는 딴 짓을 했다. 일본이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숨겨주고 있는 것도 끊임없이 외교 마찰을 일으켰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개화정책으로 재정이 빈약해지며 관리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주지못했고 이들은 착복으로 이어진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행이 원인이었다. 진압하러 간 관군이 전투에서 연일 패배하며 동학군이 서울로 북상하자 청군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 이에 응한 청나라 군은 아산만으로 상륙하고 요청하지 않았던 일본군은 텐진 조약을 빌미로 충이 일본에게 통보하지 않았다며 인천으로 상륙한다. 일본군까지 상륙하는걸 보고 놀란 정부는 급히 동학군과 화약을 맺어서 해산을 유도해 주둔 명분을 없애고 양군에게 철수하라 권고하지만 일본군은 오히려 경복궁을 장악하고는 청군을 공격해 청일 전쟁이 발발한다. 단 며칠사이 청나라 군은 일본군에 쫓겨 한반도에서 축출되고, 심지어 일본보다 더 큰 배와 함대를 갖고도 황해 재해권을 뺏겼다.(황해 해전) 한반도가 전화에 휩싸이는 데도 중전과 민씨 정권은 아무 대응도 못하고 납작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1895년 일본이 이겼다.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타이완 섬을 일본에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중국 북양함대의 제독 정원은 음독자살했다. 일본은 보호 중이던 개화파들을 조선에 복귀시킨다. 중전과 온건개화파는 말한마디 못하고 '역적'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미국에 있다가 귀국한 서재필은 아예 고종 앞에 뻣뻣하게 서서 자기를 미국 시민 제이손이라 소개하곤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고. 이들은 일본을 등에 업고 개혁 조항등을 준비해 돌아왔다. 그리고 조선의 복식과 문화를 서구식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개혁, 갑오개혁을 시작한다. 고려 시대부터 존속돼 온 과거제도도 이 때 사라진다. 중전과 온건개화파가 축출된 것은 아니었다. 주요 요직에도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삼국간섭이 일어난다. 러시아프랑스, 독일과 합세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도로 토해내도록 압력을 넣었고 통했다. 고종 부부는 러시아를 매우 주목하게 됐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수시로 접촉을 가졌다. 온건개화파 주요 인사들을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서울 정동으로 하도 보내다 보니 아예 정동파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였다. 러시아 역시 온건개화파 인물들은 물론 중전에게도 갖가지 선물을 보내며 환심을 샀다. 명성황후의 사치에 대해 말이 많은데, 이때 받은 선물들도 상당히 있어 사치벽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4.2.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의 온건개화파


중전 민씨가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하자 일본은 큰 위기를 느꼈다. 안그래도 러시아를 두고 엄청난 적개심과 공포감을 가고 있었는데 일례로 청일전쟁 몇 년 전인 1891년에는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황태자[19]일본을 방문했을 때 교토에서 일본 순사인 츠다 산조(津田三蔵,1855~1891)의 암살 시도로 중상을 입는 일이 있었고[20][21] 이것을 사과하기 위해 전국 휴교와 할복쇼을 벌일 정도로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에 적개심과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이에 당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고종과 중전 민씨가 일본과 거리를 두려하자, 자신의 후임 공사로 온 전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하면서 음모를 꾸민다.
그 해 음력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 조선의 국모 민씨는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갑오개혁에 실패하고 밀려나있던 개화파들을 앞세워 다시금 정국을 장악하려 한다. 이에 고종과 온건개화파는 춘생문 사건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제국에 몸을 의탁한다. 러시아는 즉각적이고 매우 강경하게 일본을 겁박했다. 위세에 눌린 일본은 물러서고 결국 잠깐 들어섰던 친일 내각은 일소된다. 고종의 매제인 박영효 역시 다시 역적 처지로 일본으로 간다.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직전까지 한반도는 힘의 진공 상태가 된다. 온건개화파는 긴급히 프랑스 공사관, 러시아 제국 공사관의 협조를 구해 독립을 선포하고 대한제국을 만든다. 온건개화파는 명성황후를 잃었지만 어떻게든 황실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독립협회를 창건해 백성들에게 독립의 당위성과 황제가 된 고종에게 충성하라고 계몽했다. 조선의 계몽 군주를 꿈꾸던 고종은 중추원을 설치해 서구의 귀족원 내지 상원 의회를 만들 준비를 한다. 그리고 온건개화파는 대한국 국제라고 해서 헌법을 만든다. 서구 헌법을 만든다는 것은 독립을 선언하고 해외 열강들에게 독립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일본조차 메이지 유신 이후 40년이 다 돼가는 1890년에야 제국 헌법을 반포하고 다른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등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국 국제는 황제에 대한 절대성과 전통적 충성만을 강조한 내용으로 서구의 인권 사상이나 나라의 조직 내지 국민의 의무, 기본권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곧 그나마도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한반도 이권을 싹쓸이하고 내정 간섭을 시작하자 대한제국의 앞날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외채는 갚을 수 없는 수준으로 늘어만 갔다.
1905년 러일전쟁으로 승전국 일본이 대한제국을 완전히 장악한다. 영국미국은 오히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한다.[22]
재밌는 게 그 전까지만 해도 반일이던 온건개화파는 친일로 돌아선다. 벼슬을 버린 양심 인사들을 제외하고, 벼슬길에 남아있던 모든 인간들과 그 후손들은 이제 친일파가 된다.[23] 원래 친일이었던 개화파들보다 더 심한 추태와 아부를 보인다. 헤이그 밀사를 보낸 고종에게 양위하라며 윽박을 지르고, 을사조약, 정미조약 등등 차례차례 국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앞다퉈 충성을 바친다. 단, 민씨 전부가 친일파가 된 건 아니다. 대한제국 육군 부장(중장)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13촌 조카뻘로 을사조약과 동시에 목을 찔러 자결했고 민영익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국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5. 을미사변에 대해


고종과 명성황후가 노골적으로 러시아의 개입을 허락하고 고종이 일본 교관들이 양성한 훈련대의 해산방침[24]을 통보하자 일본은 그 결정의 배후로 지목된 명성황후를 암살하기 위해 1895년 10월 8일, 일본 군대와 경찰 및 조선군 훈련대 등을 동원해 경복궁을 공격한다. 일본군과 경찰이 시위대를 몰아내고[25] 같이 온 일본 낭인들이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시체를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을미사변', '을미의 변'이란 이름으로 기록된다.
이틀 뒤인 1895년 음력 8월 22일,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민씨를 폐서인했다. 이 시기의 고종은 김홍집 내각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로, 이 당시 고종이 한 일은 사실 김홍집 내각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8월 23일 왕태자(순종)가 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상소를 올리자, 그날 고종은 민씨에게 당시 조선의 후궁의 직첩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빈(嬪)의 칭호를 주었다. 10월 10일엔 왕후로 복위시켰다.[26]
원래 시호는 금방 결정되는 게 아니긴 하지만, 그녀는 현 조선의 군주의 아내였음에도 장례 일정이 2번이나 중단되는 바람에 죽은지 2년 뒤에야 시호를 받았다. 1895년 10월 22일 김홍집 내각은 그녀의 시호 후보로 순경(純敬)을 올렸는데, 이후 아관파천이 발생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고종은 장례 일정을 중단했다. 1897년 1월, 조정에서 김홍집 내각이 올린 건 시호로 쓸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자 고종은 시호 후보를 새로 올리라고 했고, 시호 후보 3개 중 하나인 문성(文成)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3월 2일에 문성이 정조의 정식 시호에 쓰였다는 이유로 취소하고, 시호 후보 중 하나였던 명성(明成)을 쓰기로 한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명성왕후'로 시호가 정해졌을 것이나, 문제는 그녀의 장례를 준비하는 도중에 장지(葬地) 근처에서 유해가 발견되는 등의 일 때문에 장례 일정이 또 중단되었다는 것이다.[27] 그 해 10월 12일,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면서 그녀를 황후로 추숭했다고 많이 알려져 있으나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고종이 황제즉위식에서 중전 민씨를 황후로 추승하면 추승금보를 만들어야하는 데, 현재 대한민국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의 어보와 국새"의 유물 목록에는 "황후 추승금보"라는 것이 없다. 대신 "명성황후책봉금보"만이 있을 뿐이다.
이 명성황후책봉금보는 2019년에 문화재청 의뢰로 조폐공사가 기념매달로 제작하여 국민들에게 판매하였다. 관련기사
이는 임오군란 때에 경복궁을 빠져나와 여주와 충주로 피신했다가 명성황후가 환궁한 경험을 고종은 겪었기에, 친일파 내각인 김홍집 내각을 통해 빨리 장례를 치룸으로서 혹여라도 중전 민씨가 살아서 경복궁으로 환궁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일본의 시도와 압력을 고종이 눈치채고 공식적으로 중전의 사망을 발표하지 않은 상태로 차일피일 미루고 아관파천을 해버렸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중전은 완전이 사망한 사람이 아닌 상태였기에, 고종은 황제즉위식 후에 명성왕후를 황후로 책봉하는 책봉례를 거행하고 책봉금보를 제작하였고 이를 추후 종묘에 안치하였다.
황후로 책봉되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고종실록 36권, 광무 1년 즉, 고종34년 양력 10월 12일자 실록에 분명이 "추승 또는 추존"이 아니라 "책봉"이라는 단어를 분명히 사용하고 있고, 고종실록 편찬감독관으로 일본인들이 참여했음에도 해당 단어인 "책봉"이라는 단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즉 고종은 중전 민씨를 법적으로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황후로 임명한 것이 역사적인 팩트이다.
황제즉위식과 황후책봉례가 끝나고 며칠 뒤에 장례 일정이 재개된다. 그리고 11월 6일에 시호로 '명성황후'를 쓰겠다고 했고 22일에 이 시호가 공표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명성황후 민씨'로 불리게 된다. 이후 존호 등이 추가되어, 그녀의 정식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가 되었다.
12년 전 임오군란 때 민비를 업고 서울 탈출을 도왔던 홍계훈은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장(연대장급)이었는데 이 때 광화문에서 전사했고[28] 시위대는 연대장 현흥택과 미국인 군사 고문 다이의 지휘 하에 일본측과 맞서 싸웠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일본을 비난하는 국제 여론이 비등하자 일본은 처음엔 조선인들의 내부 소행이라 개소리를 시전했지만, 러시아 기술자 사바틴, 미국 교관 다이를 비롯해 외국인 목격자도 많았다. 그들은 곧 미우라 공사와 낭인들을 체포해서 법정에 세웠다가 증거불충분+춘생문 사건을 빌미로 방면했다.[29] 물론 일본은 이 사건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발생 당시 세간의 관심도 그리 받지 못했다. 또한 2009년 전까진 일본의 모든 언론기관이 을미사변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았다.
2011년 7월 22일 유인촌 당시 대통령실 문화특보가 서울소방학교 특강에서 한국의 전통문화와 대중문화에 대해 강연을 하다가 '''경복궁의 담이 낮아 민비가 살해되었다는''' 독특한(…) 주장이 노컷뉴스에 처음 실려 파장이 일었다. 이미 문체부 장관 시절 '찍지마 사건' 등의 구설수로 시선이 곱지 않던 안티들은 역사스페셜 진행하던 인간이 저딴 소릴 한다면서 엄청나게 깠고, '민비'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정치블로거 임병도는 자신의 블로그 '아이엠피터'를 통해 그가 진행했던 <역사스페셜> 2001년 11월 17일 방영분 내용과 비교하며 극단적으로 비난했다.
그래도 아주 헛소리는 아닌게, 조선의 건축양식 자체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패시브로 있는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방어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좁고 높은 중세식 탑 정도 되면 폭파용 폭약이나 대포를 가져오기 전까진 뚫리지 않는다. 칼을 들었건 자동소총을 들었건 패닉룸같은 효과가 있으니까. 정작 해당 강연 당시에는 청중들 사이에선 분위기가 좋았다고들 하며, 소방관 중에선 나름 배울 점이 있다고도 했다.(참고)
사족으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중에 김진명의 '황태자비 납치사건'이 있는데 작가의 주장에 의하면 명성황후 민씨의 죽음은 (시간을 포함한) 매우 치욕적인 죽음이었다고 하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는 소설 속에서는 이시즈카 에조가 작성한 '한성공사관발 제 435호 전문'으로 묘사된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 있다. 고영근 문서 참조.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는 청량리 밖 홍릉에 매장되었는데, 미국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가 방한했을 때 수행원들과 함께 이 능을 방문했었다. 그런데 앨리스와 그 수행원들이 이 능의 석물에 '''올라타서''' 인증샷을 찍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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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뒷날 1919년에 남편 고종이 사망하자 천장하여 남편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의 홍릉에 합장되었다. 그리고 청량리 홍릉 자리에 들어선 것이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묘로 이를 '영휘원'이라고 부르는데 '구 홍릉'이라는 지명 역시 있으며, 이 주변에는 수목원이 있고 근처에 세종대왕기념관도 있다.

5.1. 조선인 협력자들


명성황후 살해 사건 당시 조선인 고위직 협력자는 흥선대원군[30], 유길준[31], 영선군, 이두황, 이진호, 이주회, 우범선, 구연수 등과 도성수비대 3개 대대의 병사들.
이중 우범선은 우장춘의 아버지이고, 구연수는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하다.
한국 땅을 처음 밟는 일본 낭인들이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자마자, 이주회, 우범선, 이두황 등 3대대장과 전 군부차관 이진호 등이 협력하고 개화파 거물 유길준까지 가세하면서 일본낭인들은 반나절도 안 돼 한성에 들어왔다.
민족문제 연구소의 윤덕한이 쓴 《이완용 평전》에 의하면, 사실 대원군이 여기에 많이 개입되어 있다. 그는 출발 전에 고유문을 붙였는데, 간단하게 쓰자면 다음과 같다.
"왕비와 그 무리들이 (원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민씨일족을 가리키는 것이 많음) 나라를 망치니 두고 볼 수 없구나. 피를 봐서라도 나라를 지킬테니, 너희들은 나서지 말고 할일이나 계속 하라. 방해하면 보복하겠다." 대충 이런 뜻이었다. 그 날 대원군은 실패에 대비해, 손자인 이준용에게 일본으로 도망가라고 했다.[32]

5.2. 무시당한 을미사변?


명성황후의 살해소식에 유생들이 을미의병을 일으켰으며 이것이 전국적인 의병봉기로 이어졌다는 설이 가장 잘 알려진 시각이지만,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비판하는 측에서는 이는 KBS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 방영한 내용을 맹신하는 것으로, 을미사변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의 주요 구성원은 유생들이었으며, 직접적인 실력행사보단 일본세력의 국외 추방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주를 이루었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의병은 단발령 시행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으로 번진 것이다. 즉, 명성황후는 당시로선 효를 상징하는 머리카락보다 중요도가 떨어졌다는 것.
그런데 이는 을미의병의 성격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는 반박도 있다. 을미의병은 처음부터 근왕운동적 성격과 성리학적 질서 보호라는 명분이 작용했다. 즉,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을미사변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왕실은 물론 성리학적 세계관을 위협한다고 위정척사파 유생들이 생각했던 것이다. 이 경우, 당연히 을미사변은 을미의병의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를 폐위시키려 하자 유생들이 토역소를 올렸고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운운하며 각지에서 창의소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을미의병은 단발령뿐 아니라 을미사변에 대해서도 분노하며 일어난 운동이 맞다는 것이다.

5.3. 2009년 TV 아사히의 보도


2009년 TV 아사히에서 일본에서는 최초로 을미사변에 대한 보도를 했다. 이 보도에 자극을 받은 일본의 모든 혐한파들은 "모든 것은 조선인의 조작"이라든가 "모든 게 조선을 위해서였다."는 개드립을 인터넷상에서 뿌렸는데, 되려 혐한의 입지들을 축소시키는 일이 되고 말았다.

5.4. 명성황후는 죽지 않았다?


2013년 7월 1일,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명성황후가 을미사변 때 죽지 않고 탈출했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기사
정교수가 발견한 문서는 1896년 2월 6일, 러시아주재 독일공사 후고 라돌린이 총리 앞으로 보낸 암호문서 해독문인데 이 문서에 의하면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매우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보낸 문서도 발견했는데 이 문서에는 "왕과 왕세자(순종)은 피살을 모면한 것 같다. 그리고 '''왕은 왕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라고 했다는 것. 힐리어는 을미사변 직후 작성한 문서에서도 "일본인들이 궁녀 서너 명을 죽였으며 '''왕비는 사라졌는데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작성했으며 이후 힐리어는 베베르의 방문을 받았는데 베베르가 왕비의 생존 가능성이 있음을 말했다는 보고서도 작성했다고 한다.
과연 정교수가 발견한 문서가 실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는 의문이 생기긴 한다. 만약 명성황후가 탈출했다면 왜 이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쉽게 납득하기는 힘들다. 명성황후가 살아있었다면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이후에라도 드러내서 일본을 궁지로 몰 수도 있었는데 왜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그런 카드를 활용하지 않았을까? 명성황후는 이전 임오군란 때도 큰 난리통에 궁녀 옷으로 변장하고 궁을 탈출해 숨었고[33], 조정에서는 왕후 실종을 '사망'으로 공식 선포하여 왕후의 국상(國喪)을 선포한 적이 있다. 만일 왕후가 살았다면 임오군란의 해프닝이 그대로 재연된 셈인데, 그 때는 사태가 진정된 후 왕후가 직접 돌아왔지만 이 때는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일각에서는 일본이 외교가에 역선전을 살포한 걸 독일과 영국이 착각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정교수와 일부에서는 당대 최강대국인 독일과 영국이 일본의 역선전을 아무 확인도 않고 덜컥 믿고 본국에 보고했겠느냐, 명성황후는 일본의 재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숨어 살다가 곧 사망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결국 구체적인 사료가 더 발굴되지 않는 한은 쉽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듯하다.

6. 추존 황후인가? 아니면 정식 황후인가?


일부 주장에 따르면 명성이라는 시호를 받은 후에 황후로 "추존"되었는데, 추촌된 호칭은 부르지 않은 것이 관례임으로 명성황후가 아니라 명성왕비 또는 명성왕후로 불러야하고, 이는 뮤지컬 명성황후와 KBS 역사드라마 명성황후의 영향에 따른 전혀 근거가 없는 호칭이라고 주장하면서 명성왕후를 명성황후로 부르려면 흥선대원군도 흥선왕으로 불러야한다고 억지주장을 펼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역사적으로 무지한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언론이나 역사책에서 명성황후는 추존된 황후라고 역사적인 오류를 버젓이 써놓고 있다. 물론 살아생전에 황후가 된 것은 아니지만, 황후에 올려진 과정을 살펴보면 "황후로 추존"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거지이고 역사적 팩트를 왜곡한 것인지 금방 탄로가 난다.
위에 서술된 바대로 고종은 을미사변이 터지고 난 후에 공식적으로 중전의 사망을 백성들에게 발표하지 않았다. 임오군란 당시에 경복궁을 탈출한 중전 민씨가 여주를 거처 충주까지 대피하였다가 몇년 후에 경복궁으로 환궁한 사실과 경험을 고종은 이미 겪었었기에, 을미사변이 일어났어도 중전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고종으로서는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러한 희망과 기대가 중전 민씨의 사망선포를 즉각 실시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러면서도 고종은 중전 민씨의 장례준비는 진행하되, 시간을 질질 끄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는 임오군란 때에 명성황후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한 흥선대원군이 서둘러 장례를 치룸으로서, 조선시대 형벌 중에 하나인 팽형(烹刑)의 방법을 흥선대원군이 며느리인 중전 민씨에게 사용하려고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러한 과거의 경험을 이미 겪은 고종은 친일파 내각인 김홍집 내각을 앞세운 조속한 장례식 집행이라는 일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팽형은 탐관오리들에게 주로 내려졌던 형벌로서, 의금부가 있었던 지금의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 세종대로에서 장작물에 가마솥을 놓고서 죄인을 가마솥에 들어가게 한 후 장작물에 불을 붙이는 시늉을 하고 일정 시간 이후에 가마솥 속의 사람을 시체 꺼내듯이 꺼내어서 가족들에게 돌려주었는데, 가족들은 돌려받은 사람을 집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살게해놓고 진짜 사망한 사람의 장례과 동일하게 장례식을 치루고 기일마다 제사도 지냈으며, 팽형은 당한 사람은 거주하는 건물 밖으로는 출입도 못하는 그야말로 살아도 산것 같지 않은 죽은 사람처럼 보내도록 하는 형벌이었기에, 흥선대원군은 며느리인 중전을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기 위해 임오군란 당시에 장례식을 아들인 고종에게 독촉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논란이 출발을 한다.
중전 민씨가 황후가 된 추존 황후인가? 아니면 정식 황후인가?
추존황후는 무식이라는 개인의 생각을 정도인것 처럼 하는 것은 지양하자. 사후 대한제국 선포후에 명명된 황후가 과연 진정한 황후인가? 형식적 의미와 실질적 의미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형식적으로는 사후에라도 황후라고 정식 등극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라는 것은 형식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각종 논문과 역사학계에서도 황후는 정식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이를 무식하다라고 하면 이 또한 역사왜곡이고 스스로를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고종을 황제로 볼 것인가? 왕으로 볼것인가에 대해서도 왕이라는 견해가 통설이다. 조선역사의 일부이고 대한제국을 황제국가로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나라는 없다.
심지어 역사학계에서는 대한제국을 새로운 왕조로 볼 것인가? 아니면 조선왕조의 연속인가에 대한 주제에서 통설(거의 모든 학자의 견해)로서 조선의 연속으로 본다. 태정태세문단세~ 로 이어지면서 정순헌철고순이라고 그 끝을 맺음에서 보듯이 조선의 역사다. 모든 연표에서도 조선의 국왕으로 표식하고 당연시하지 고종과 순종을 새로운 왕조로 보는 견해도 없고 그런 역사연표의 도식도 없다.
다음, 고종을 황제로 볼 것인가? 왕으로 볼것인가에 대해서도 왕이라는 견해가 통설이다. 대한제국 황제라는 형식적인 선언에는 대부분 동의를 하지만 이를 진정한 황제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고종마저 황제라는 것에 실질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데 고종비 민씨를 황후로 끝까지 부여해야 한다는 논리는 의미가 없다. 마치 기획부동산 같은 회사에서 직원(심지어 텔레마케터)의 직책을 대외적으로 부풀리기 위해 가장 말단이 과장, 그 위는 부장, 이사로 명명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로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6.1. 추존황후가 맞는가?


병조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면서 청나라의 형제국에서 속국으로 조선의 지위가 격하되는 과정을 겪고,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임진왜란 때 도와준 재조지은을 잊으면 안된다는 성리학의 논리가 조선이 망할때까지 관통하고 있었다.
그래서 곳곳에 관우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 데 그 중에 지금도 남아있는 유명한 관우사당이 서울 종로구 황학동의 동묘이며, 조선 왕실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인 경복궁 후원 안에 청나라의 서슬퍼런 감시를 피해가면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조선은 명나라를 계보를 이어가는 소중화국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내외명부의 법도와 호칭의 위계에 관한한 명나라의 예법이 조선 멸망때까지 유지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명나라 예법에 따르면 사망한 후에 추숭 또는 추존을 통해 비빈을 황후에 봉하는 경우는, 황제의 정후가 아닌 후비나 후빈들 즉 후궁들의 소생으로서 황제가 된 사람의 생모를 후궁으로 추존해왔었다.

6.1.1. 추존 황후의 지위로 나타나는 황실 내부 위계상의 오류들


이를 명성황후에 대입해보자 중전 민씨를 사후 황후로 추존하면 그의 아들인 순종황제는 적장자가 아니라 적서자가 되는 것이며, 명성황후는 출신이 왕비가 아닌 고종의 후궁이 되는 것이다.
즉 황제국의 내외명부 위계상으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명성황후가 동급으로 격하되어 버린다. 그리고 출신직급상으로는 명성황후가 순헌엄귀비 엄씨와 동급인 후궁으로 격하되는 것이다.
혹자는 왕후라고 불리우니 영친왕비보다 높은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하겠지만, 조선조 왕들의 경우 승하하면 묘호와 함께 시호를 받는추숭 작업이 따르지만 왕비는 그러지 아니하였고 그저 왕비에서 왕후로 존칭을 변경하는 수준으로 대우해왔다.
만약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했더라면,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는 지금쯤이면 영친왕후 이방자로 불리우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대입하여 생각해보면 명성황후를 명성왕후로 부르자는 것은, 순종의 입장에서는 어머니를 황태자가 아닌 황자의 아내인 며느리나 제수씨의 위치에 가져다 놓은 꼴이 되고, 어머니가 황태자보다 낮은 지위의 왕실 인물이 되어버리는... 그야말로 위계상으로나 족보상으로나 모든 것이 꼬여버리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는 정조의 생모이기는 하나 왕실적통법적 어머니는 아니었기에, 왕후로 추존되는 것은 고종 때에 와서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혜경궁 홍씨도 왕후로 추존한 것이기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추존된 명칭으로 현재는 부르지는 않지만, 명성황후는 순종황제의 친모이자 왕실적통법 상으로도 어머니이기에 명성황후를 혜경궁 홍씨와 비교할 수는 없다.
조선 왕실의 대표인 고종이 이러한 예법과 법도를 모를리가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이다. 따라서 고종은 중전 민씨가 비록 을미사변으로 유명을 달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전 민씨를 황후로 "추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의 추존 황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중전 민씨의 장례식 준비가 시작되었으며, 그 장례식의 준비 과정 속에서 "명성"이라는 시호가 결정되었고 "대행왕비"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나, 아관파천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고종의 덕수궁 환궁과 칭제건원을 통한 대한제국 선포에 따라 황후가 되었으니 "추존황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성황후가 아닌 명성왕후로 부르자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역사적인 팩트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대한제국 당시의 예법과 법도에 관한 무지함만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 위계상의 오류라면서 고종비 민씨를 추존이 아닌 정식 황후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다. 논리오류의 대표적인 것으로 궤변에 가깝다.
고종은 조선 26대 왕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형식적으로는 황제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새로운 황조인 초대 황제로 보는 견해는 없다.
따라서 고종마저도 조선의 국왕으로 보는데, 고종비 민씨를 끝까지 명성황후이고 실질적 황후라고 주장하는 것은 애처롭기 그지 없다. 망한 왕조나 망한 가문의 과정적 표현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다.

6.1.2. 명성황후 "추존"에 관련한 의궤나 실록의 기록이 있나?


그러나 기록의 나라 조선에서는 모든 과정이 실록과 일성록과 의궤로 기록되는 나라이다. 하다못해 태조의 어진을 모사하는 것도 모사도감을 설치하고 모사도감의궤를 편찬할 정도로 기록에는 철저한 나라였다. 그러한 기록의 나라 조선과 조선을 잇는 대한제국의 의궤와 실록에는 중전 민씨를 "추존"하는 추봉도감이나 추숭도감이 설치된 적도 없고, 추숭 과정을 기록한 추숭의궤 또한 없다.
이러한 추존황후론을 따르면 또 다른 문젯거리가 발생하는데, 바로 순종황제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시호문제이다. 순정효황후 윤씨는 1966년 박정희 정권시절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였는데, 당시 황후 윤씨의 시호를 정한 것은 전주이씨 종친회가 아닌, 박정희 정권의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이 주도한 "윤황후장례준비위원회"에서 결정한 것이다.
시호를 정한다는 것은 추숭이나 추존의 과정의 한 부분인데, 왕조국가의 왕이 정한 시호도 아닌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정한 시호는 인정하여 온 국민이 그 시호가 당연하다고 인식하고 사용하면서도, 명성황후는 추존황후임으로 황후가 아닌 명성왕후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일례로 영화 마지막황제로 그 존재가 깊게 각인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예로 들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선통제로 부르지 않는다.그냥 푸이라고 부른다. 푸이는 묘호도 없다. 그럼으로 명성황후가 아니라 명성왕후로 불려야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자는 순정효황후 윤씨를 그냥 윤황후로 부르자고 하는 꼴과 같다.

6.2. 정식황후라는 증거는?



6.2.1. 고종실록과 대례의궤



6.2.2. 명성황후책봉 금책과 금보



6.2.3. 문화재청의 세계기록유산 기념메달 제작 및 판매



7. 평가


급진개화파이자 명성황후의 반대파였던 유길준은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여인'''이라고 평했다.
명성황후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명성황후 자신과 민씨 일가에게 이익이 되는 길이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을 뿐이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에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맹렬히 비판한다. 특히 개혁 세력들의 주장을 묵살하며 제국을 운운[34]하는 시대 착오적인 주장을 내세운 고종을 부추겼다.
당시 민씨 일파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민영준은 백성들이 하도 씹어대는 통에 이름까지 민영휘로 바꿀 지경이었다. 그가 평안감사로 일하면서 평안도 백성들을 끔찍하게 수탈한 탓에 후일 그가 휘문의숙을 세웠을 때 이들의 주요 수탈 대상이었던 평안도 출신들은 발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민씨 일파의 패악질은 놀랍게도 일제강점기까지 계속되었는데, 가장 적극적인 친일파 중에 상당 지분을 민씨 일파가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자행한 친일 행위의 비중이나 악영향 역시 가늠할 수 없이 막대하였다.
최근에는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명성황후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는 일본의 금전 제공과 그에 따른 일본의 영향력 확대, 또 일본에 빚지는 것을 사전 차단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덧붙이자면 당시 일국의 왕비로서 일본의 차관을 받기로 하는 결정은 딱히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일이 아니므로, 아마도 명성황후 자신이 러시아 등 외세의 힘을 끌어들이는 와중에도 일본만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받지 않은 것으로 보거나, 혹은 대여금(차관)은 나중에 갚아야 할 돈이므로 굳이 받지 않은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여러 면에서 간략히 정리하면 자신의 나라가 아닌, 자신만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싸운 황후라 할 수 있다.

7.1. 질투


남편인 고종과 초반에만 데면데면 했을 뿐 금슬이 좋았으나 정작 후손은 순종 말고 없었다. 실제로는 4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릴 때 죽고 순종만 살아남았다.[35] 이 때문인지 후궁들에 대한 질투가 심했다고 한다.
사실 어떤 왕비든 그럴 수 있기는 하나[36]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 조선시대의 왕실법도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고종보다 더 권력을 가진 여인으로서 고종의 다른 아들들인 완친왕, 의친왕의 생모들을 궁궐에서 내쫓았다.[37] 본래 왕이 죽기 전에 후궁이, '''그것도 왕의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 나가 사는 일은 조선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명성황후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38]

7.2. 미화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 열강들의 이권다툼에 정면으로 도전한 여걸로 묘사되며 팬들이 확 늘어난 뒤에 1990년대 말, 명성황후를 애국자에 가깝게 미화한 뮤지컬 명성황후와 KBS2 드라마 명성황후가 대박을 쳐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한 국모'라든가 '열강의 이권다툼에 맞서 싸운 여걸'이란 식으로 마치 잔 다르크(1, 2.)처럼 묘사된 게 이미지로 굳어져서 팬들이 대책 없이 미화한다. 사실 영화, 드라마계에서 명성황후 미화는 60년대부터 내려온 나름의 전통이다. 1965년에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라는 영화가 나왔고, 근래에는 미화하는 웹툰 해서도 나왔다.
2001년 KBS2 드라마 명성황후 방영 후는 대중에게 미화된 이미지가 가장 강하던 시절이었다. 조수미의 명곡 '나 가거든'은 길거리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었고 이미연과 정준호가 출연한 그 나 가거든 뮤직비디오 또한 상당히 유명하며 2004년 당시 게임 이터널시티에 느닷없이 명성황후를 지키라는 전용 미션이 생겼을 정도. 일반 대중도 드라마를 통해 명성황후에 대한 이미지가 정립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명성황후 때문에 말싸움이 붙곤 했다.
하지만 역사에 대해, 특히 한국사에 대해 어느정도(평균 이상) 지식만 있더라도 명성황후를 미화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드라마를 통해 유명세를 떨치면서 명성황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났고 진실에 대해서도 서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명성황후의 긍정적인 점을 찾을 수 있다면 자신이 살해당함으로써 '''일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일제의 야욕을 드러낼 재료로 보면 명성황후가 선하면 선할수록 일제의 악행과 대비돼서 시청자가 느끼는 일제에 대한 분노를 손쉽게 키울 수 있다. 이후 습격자들을 처단도 못하기에 망국 직전의 나라의 애처로움은 한껏 배가된다. 바꿔 말하자면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기막힌 시점에 죽은 사람.' 물론 일제의 조선 침략 야욕이 밝혀졌음에도 딱히 달라진것도 막아내지도 못했으니 크게 의미는 없다. 어쩌면 명성황후의 역할은 크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해둘 필요는 있다.
다만 공식 사료에서는 묘사되는 바가 거의 없었으며, 매천야록 등의 야사에서 나온 주장 및 비판이 많다.

7.3. 다른 시각



7.3.1. 옹호론


명성황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통 미디어에서나 사람들의 인식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에 초점을 맞춘다. 이 과정에서 명성황후는 권력에 눈이 먼 왕비로 묘사되고, 고종은 아무 힘이 없는 무능한 왕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를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권력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우선 흥선대원군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이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고종에게 권력을 물려줘야 할 위치였다. 하지만, 대원군은 왕의 나이가 찼음에도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고종과 대원군의 갈등이 시작된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아무리 왕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대원군의 입장에서도 왕이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말하는 것과 황후가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명분에 맞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는 고종의 입장과 왕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는 대원군의 입장은 곧 명성황후를 통한 대리전으로 변하게 된다. 실제 조선의 권력은 고종에게 있었다. 가령 민씨 일가가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기 시작할때 고종이 이를 묵인한 것은 고종이 허수아비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종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기반이 없었던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충신들로 채워진 신하들보다 황후의 친인척들을 더 신뢰했던 것이다.
명성황후는 살해당하기 전 일본이 제시한 거액의 뇌물을 거부했다.[39] 살해당했다는 것이 오히려 일제의 조선침략에 명성황후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는 근거가 된다. 그렇지 않고 명성황후가 일제에 긍정적이고 협조적이었다면 일본이 살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이유는 명성황후가 자꾸 일본이 아닌 청이나 러시아 같은 다른 국가들을 조선에 끌고와서 '''일본이 조선을 독점하는 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지 명성황후는 일본과 맞써 싸운 시대의 영웅이 절대 아니다. 당시 상황만 해도 삼국간섭 이후 조선은 러시아의 힘을 의식해 친일내각을 숙청하고 김홍집의 3차 친러내각을 수립한 시기였고, 러시아 역시 일본과 한반도 분할논의를 하다가 결렬되어 용암포사건을 계기로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은 조선이 일본을 견제하는 것 이외에 이득될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러시아도 식민지를 만들던 제국주의 강대국들 중 하나였고 러일전쟁 전까지만 해도 각종 이권을 침탈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 비판론자들이 명성황후의 사치를 비판하는 주된 근거는 매천야록에 있다. 문제는 매천야록은 신빙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매천야록이 야사로 보기도 어렵다는 건 둘째치더라도 저자인 황현 선생은 생전에 명성황후를 굉장히 싫어했는데, 명성황후의 인사등용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명성황후의 가장 큰 실정이라 지적되는 '''사치, 부패, 향락, 매관매직보다 더 중하게 여긴 단점이 고작 여자가 정사에 관여한다는 거'''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정치적 입장이 달랐을 것이라는 주장이 신빙성을 얻기도 한다. 물론 현대적 관점으로 과거의 시대적 가치관을 단정짓는 것은 삼가야 하겠지만서도, 역사성 있는 인물을 고작 그런 이유로 단정지었던 인물의 의견을 어디까지 수용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심히 의문스럽다.
그렇기에 같은 저자의 같은 책 속에서 어느 것은 믿을 수 있고 어느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인지, 어느 게 사실 이고 어느 게 허구인지 무조건 수용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검증해야한다.
또한 역사학자들도 매천야록을 고증을 위한 사료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사실성과는 거리가 먼 당시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구나 쯤으로 또는 당시 모습을 이해하는 여러가지 방법중에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어설프게 아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한다 했던가. 매천야록을 근거로 의견을 타진해나갈 때는 그 자체로 논리 오류의 덫에 빠질 것을 염두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는 매관매직에 대한 기록은 있어도 사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조선에서 쓴 것도 아니고, 일제에 의해 쓰여진 책인데도 전혀 없다. 심지어 왜곡이 심해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는 역사서인데도 말이다.
명성황후가 매일같이 연회를 베푼 기록에 대해서도 실제로 그 호화찬란한 연회에 참석했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은 표범가죽 카펫은 명성황후의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해당 카펫이 명성황후가 쓰던 것이라는 것은 미국의 <라이프>라는 신문에서 나온 내용이며 명성황후가 썼다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증거로 표범가죽 카펫에 새겨져있는 오얏꽃 문양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꿀때 사용한 대한제국의 상징인데, 대한제국의 건립은 을미사변 2년 뒤에 일이다.[40]
당대 인물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
뛰어난 침착성과 무엇인가를 탐색해내려는 듯한 눈빛을 지닌 총명한 여인.
왕후는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왕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이 하나같이 감탄하곤 했다.
  • 영국 왕립 지리 학회 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저서《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명성황후와 흥선 대원군과의 정치적 대립에 대해서 언급하면서도, 명성황후를 '대화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였다.
>왕후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머리장식으로는 왕관을 쓰지 않았고 모피로 가장자리를 단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당시)
>그녀는 머리 위에 진주와 산호로 만든 장식을 단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기 전 만났을 때)
  •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명성황후와 대한제국》에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라고 썼다.
결정적으로 명성황후의 사치설을 부정하는 가장 큰 근거는 고종의 비자금이다. 고종의 비자금은 신무기 구입, 전기 및 전화 설치, 은행 설립, 제중원 건립 등에 쓰였으며 일제강점기시절에는 대한독립군의 주요자금으로 쓰였다. 이 비자금은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마련한 것인데, 황후가 사치가 심했다면 고종에게 이런 거액의 비자금이 존재할 수가 없다.#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돈이라는 것이 논란의 여지는 될 수 있어도 명성황후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쓰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그리고 명성황후는 원래 머리가 좋고 수완이 뛰어난 여자로 처음 궐에 들어왔을 때 고종에게는 이미 궁인 이씨(영보당 귀인 이씨)가 있었고 첫 아들인 완화군을 낳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 후 자연스럽게 철이 든 고종과 부부로서의 금슬은 물론 정치 파트너로서 신뢰를 확실히 얻었기 때문에 시아버지이자 상왕도 아니면서 대리청정 수준으로 권력을 누린 흥선대원군과 맞설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명성황후가 뛰어난 정치가라도 왕비는 왕에 의해서 언제든 폐위될 수도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이기 때문에 2세 생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제로 4남 1녀를 낳았음에도[41] 살아남은 자녀가 순종 하나뿐임은 중전으로서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순종을 낳기도 전에 흥선대원군이 궁인 이씨가 낳은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척을 지며 정치판에 등장하는데, 한 사람으로 봤을 때는 살기 위해 독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이 되기도 한다. 동정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명성황후 개인의 처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이 일본인들이 전략적으로 명성황후의 악행만 남겼다는 설이 지금까지 적용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7.3.1.1. 언더우드가 받은 100만냥은 어마어마한 금액?

결론부터 말하면 굉장히 오류가 많고 왜곡된 주장이다.
KBS 역사저널 그날 '명성황후' 편에서 나온 1895년 조선의 세입이 480만냥인데 명성황후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아내이자 선교사인 릴리우스 언더우드에게 결혼축의금으로 100만냥을 주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래 짤방을 활용해 이것이 명성황후 사치의 증거라는 글이 인터넷 커뮤니티나 블로그에 퍼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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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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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95년 조선의 세입이 480만'''냥'''이란 것부터 틀렸다. 고종실록에 기록된 1895년의 세입은 480만'''원'''이다. # 1원=100전이고 1냥은=10전이다. 원과 냥이 쓰인 시대가 달라 가치가 같진 않지만 최소한 1원=10냥이었다. 실록에 기록된 세입액 마저 왕실 재정인 내탕금은 포함하지 않았기에 국가 전체의 세입액도 아니었다.
또한 1883년 당오전의 발행과 1892년 백동화의 발행으로 인해 화폐의 가치가 엄청나게 변동하던 시기이고 고종실록은 1935년에 집필이 완성되는데 480만원조차 40년 이전의 원과 같은 가치인지 아닌지도 불명확하다. 그래서 당시 물가가 어땠는지 비교하여 100만냥의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릴리우스 언더우드가 100만냥을 받았다고 쓴 대목의 전체 내용은 이렇다.

“그 소중한 날(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결혼하는 날) 아침에 조랑말들의 방울소리가 우리 앞마당에서 들려왔다. 나는 곧 그 앙증맞은 짐승들의 긴 행렬이 중전마마의 선물을 잔뜩 싣고 도착한 것을 알았다. 자그마치 현금 백만냥이었다. 꼭 ‘아라비안나이트’ 속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때에는 2,500냥에서 3,000냥이 1달러쯤 되었기 때문에, 그 돈은 너그러운 조선 왕비께서 손쉽게 주실만한, 또 선교사 한사람이 쉽게 처리할만한 액수였다. 두 분 마마께서는 우리의 혼례에 나인 네댓 사람을 보내 주었다. 군대에서는 아주 계급이 높은 한규설 장군이 대표로 왔고, 내각에서는 왕비의 가까운 친척이며 두 분 마마께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민영환이 참석했다.” - #

2500냥~3000냥=1달러 쯤, 왕비께서 손쉽게 줄 만하고 선교사 한사람이 쉽게 처리할만한 액수라고 덧붙였는데 앞뒤 자르고 100만냥과 조선정부 한해 세입이 480만냥이라는 선동을 한 것이다.
1달러를 2500냥으로 잡아보면 400달러, 3000냥으로 잡으면 333달러 쯤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선교사 한명이 쉽게 쓸 수있는 금액인데 조선의 한해 세입이 아무리 작아도 선교사 5명이 쉽게 처리하는 금액 밖에 안될까? 그럼 당시 달러의 가치도 어떤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 물가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이 또 있는데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을 치료한 호레이스 알렌이 남긴 기록이다.

1884년

집 계약 완료 45만냥, 365달러

중국인 청지기: 월급 15달러

일본인 요리사 와타나비: 월급 10달러

집 수리 기간동안 조선호텔 숙박비: 하루 1.5달러

알콜 중독자 핼리팩스를 위한 식량과 땔감: 60달러

1885년

민영익이 우정의 표시로 지불한 돈: 10만냥

무명옷 한 벌: 12원 50전

닭고기 한 마리: 20센트, 생선값은 닭고기와 같음

두 그릇 분의 쇠고기: 10센트

하루 한 칸의 방을 데우기 위한 말 한 마리의 나뭇바리: 30센트

하룻밤 집 한 채 난방비: 1달러

민영익에 대한 의료비: 100달러 청구(나머지는 의료봉사)청국 병사에 대한 진료비: 215달러 청구

일본 공사관 의사로서 의료활동: 연 500달러 받기로 함

묄렌도르프와 체결한 해관총세무사부 의사: 연 720달러 받기로 함

데니 판사를 고종의 외교 고문관으로 부임: 연봉 7,000달러 예상

조선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교사 3명, 농업 전문가 1명 고빙: 월급 160 달러 - #

집 계약을 하는데 45만냥, 365달러 라고 하고 있다. 45만냥의 가치가 365달러라고 기록한 게 맞다면 대략 1달러는 1232냥이 된다.
또 자신이 조선의 해관총세무사부 의사가 돼서 받은 연봉은 720달러인데 88만 7000냥이고 데니 판사가 고종의 외교 고문관이 되어서 받은 연봉 7000달러는 862만냥이다.
알렌이 이 기록을 남긴 해는 1884~1885년이고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가 결혼한 해는 1889년이다. 1883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당오전 때문인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4~5년 만에 1냥의 가치가 1/2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데니판사가 받은 연봉 7000달러는 10년 뒤인 1895년 기준으로 1700만냥을 받은 것인데 무려 언더우드 부인이 받은 축의금의 17배에 해당한다. 그럼 이건 조선 한해 세입의 3.5배에 해당하는 연봉을 준 것이 된 셈이다. 정부 세입의 몇배를 초과하는 연봉을 줬다니 얼마나 말이 안되는 주장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종합해 보면 릴리우스 언더우드가 명성황후로부터 받은 결혼축의금 100만냥의 가치는 333~400마리의 닭고기 또는 생선, 정부가 고용한 미국인 교사 월급의 2~2.5배의 금액, 고종이 외교 고문으로 고용한 데니판사 연봉의 17~2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릴리우스 언더우드가 기록한 그대로 아라비안나이트 이야기처럼 엄청나게 많은 돈 같지만 이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상황으로 실제 가치는 미국인 교사 월급의 2배 정도 해당하는 금액이며 선교사인 자신이 쉽게 쓸 정도의 축의금을 준것이지 무슨 조선정부 한해 세입의 4분의 1 또는 5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준게 아닌 것이다.

7.3.2. 비판론


명성황후가 사치를 포함한 악행에 대한 기록은 매천야록 말고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유길준[42]의 증언이라든지 남가록(南柯錄)[43] 등에서 상당수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가장 유명한 것이 매천야록이기 때문에 매천야록을 예로 드는 것이지, 명성황후의 사치를 포함한 악행이 매천야록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44] 그리고 결정적으로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인들과 시위대의 주 목표는 고종이 아닌 왕비 민씨와 여흥 민씨 외척들이었다. 왕비는 도주했고 민씨 일파도 도주하거나 시위대에 잡혀서 살해당했다. 민씨 일파가 군인들과 민중한테서 얼마나 증오의 대상이었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매천야록이 현재 사학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믿거나 말거나 식의 당시대 야담, 그리고 이를 당시 기득권층인 사대부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왜곡없이 서술했기 때문이다. 야담이 있다는 것이 매천야록의 가치를 깎아내리거나 신뢰성 없는 허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역사서 혹은 실록들 또는 당시에 조선과 교류했던 여러 외국의 자료 등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독특한 내용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빠트릴 수 없는 소중한 자료이다. 무엇보다 사학에서 무척 중시하는 것이 1차 사료[45]이다. 1차 사료 자체가 진실이라 볼 수는 없지만 귀중한 기록인 것이다. 다만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재야의 문인이며, 직접 국정을 돌본 적이 없으므로 교차검증을 통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매천야록을 '갑오경장 이전 기록은 들은 것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자체가 잘못 전달되어 틀린 부분도 약간 있고 다소 과장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리고 갑오경장 이후 사실에 대해서도 편년체로 기록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황현 자신이 직접 보고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기술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사료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한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반드시 읽어야 정도로 가치가 매우 높다.' 고 서술하고 있다. 매천야록의 사실 자체가 잘못 전달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역사서와 교차 검증해 어느 정도 사실로 밝혀진 부분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잘못된 사실이 실려 있다고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라면 삼국유사삼국사기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46]
특히 무녀인 진령군을 총애하여 국고를 파탄낸 책임이 크다. 민씨 척신정치를 할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동시에 정치를 함에 있어서 무속과 같은 샤머니즘에 의존하는 추태는 왕조차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명성황후의 본질적 문제였다.[47] 민씨 척족들의 부정부패와 사치, 매관매직의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가뜩이나 국력이 열악한 현실로 기울어 가던 조선의 재정을 제대로 파탄냈을뿐만 아니라 부정부패를 더욱 심화시킨다. 결과적으로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민란을 제대로 진압하거나 달래지 못한 사태에서 명성황후와 그 일족 정권이 생각한건 외세인 청나라에게 반란세력 진압을 명분으로 군사력을 빌린다는 말도 안 되는 일들 뿐이었다. 한마디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여 자국민을 진압하게 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다.''' 개항에서도 조선을 거의 다 내주다시피 했다. 특히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이후 보여주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추태는 그야말로 19세기 조선의 참담한 까막눈 현실로, 조선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48]
명성황후는 고종의 내정에서의 무능한 행태에도 한 몫을 했다. 임오군란을 직접 촉발한 건 명백하게 민겸호였는데, 명성황후는 사실상 민씨 일파의 최고 권력자였음에도 민겸호의 탐학질을 방관했다. 만약 그녀에게 양심이나 판단력 둘 중 하나라도 있었다면 당연히 자기들 목숨을 직접 지키는 군인들까지 등쳐먹는 민겸호의 행태를 민씨 일족 단위에서 저지하거나, 고종에게 직접 자기 일족의 무능한 자들을 등용하지 말라고 제안했어야 했다. 오히려 민겸호가 열심히 군인들을 등쳐먹는 동안 자기 자신도 진령군과 아들의 호화 결혼식에 돈을 퍼다 쓰다시피 했으니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가장 큰 문제는 외척의 세력으로 '''세도정치를 부활시키고, 삼정의 문란을 다시 일으킨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명성황후의 정치 입지가 커지자 민씨 일족들이 세력을 잡았고 흥선대원군이 간신히 막은 매관매직이 다시 성행했다. 백성들 입장에는 이런 민폐가 따로 없다. 민심은 민씨 일족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권력을 잡았으면 민심을 다잡아 권력을 단단히 해야 했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기된 외국인의 평가로 그를 옹호하기엔 객관성이 부족하다. 민영익을 치료해준 알렌은 사례로 10만 냥을 받았으며, 명성황후를 호평한 릴리아스 언더우드도 자신의 책 '조선견문록'에 명성황후가 결혼 축의금을 100만 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숍의 여행기록의 내용도, 당시 일본에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여 백성들은 빈곤에 시달리고 구식군대에 지급할 급여가 없어 쌀과 모래를 섞어 지급하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머리 위에 진주와 산호로 만든 장식을 단 것이 사치가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명성황후가 총명하다며 부정적 평가를 반박하는 이도 있지만 당대에도 여우같다는 악평을 들었지언정 멍청하다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명성황후는 대체로 서양인들에게 친절했기 때문에 나쁜 평가를 받을 이유가 없고, 멍청하지 않았다는건 이미 당대의 반대자들조차도 대부분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총명하다면서 반박하는 것도 허수아비치기에 불과하다.
또한 명석한 머리는 나쁘게 볼 여지가 더 많다. 그냥 멍청해서 이용당했다면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그렇게 현명하다고 알려진 사람이[49] 자신의 개인적인 사치와 향락을 위해 척족을 양산하고 재정을 파탄냈으며, 타국에 마지막 남은 권리들을 퍼줬다면 더 평가가 나빠질 수 밖에 없다. 고종이 개인적 자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매관매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이 크다.[50] 고종이 비자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사치를 안 했다고 보는건 별개의 문제다.

8. 호칭 문제


보통 명성황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명칭으로는 '명성황후', '왕후 민씨', '민비' 3가지가 있다.[51] 이 중에서 문제가 되는 명칭이 '성+비'로 된 '민비'인데, 1983년부터 국사교과서에서 '민비'를 '명성황후'로 표기하기로 하면서 '성+비'로 된 명칭은 공식명칭이 아니라고 결론이 났다.
이 점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조선에서의 정식 명칭은 중전 또는 "고종비 민씨"로 부르는 것은 맞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악행스러운 왕후에 대해서는 비와 성을 거꾸로 부르는 경향도 있다. 희빈장씨를 장희빈으로 부르는 것 등이다.
사실 공식명칭이 꼭 통칭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대중들이 '민비'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비'로 된 명칭은 한반도에 있던 나라의 왕비의 공식명칭으로 사용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52] 다시 말하자면 정부가 국민들에게 가급적 사용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 것이지, 아예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강제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사적인 자리에서 명성황후를 가리킬 때 공식명칭을 사용할지 공식명칭이 아닌 '민비'를 사용할지는 순전히 개인의 호불호 문제이다.# 그런데 명성황후 민씨는 보기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이라, '민비'란 호칭을 사용해야 할지 아닐지 하는 문제가 명성황후를 어떻게 보느냐는 감정적인 부분이 작용해서 계속 논란이 된다.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 대부분은 '민비'라고 호칭함을 보면, 이 논란은 그녀를 어떤 명칭으로 부를지보다는 그녀를 보는 관점과 더 관련이 깊다는 걸 알 수 있다.[53] 이것은 명성황후와 마찬가지로 성+비로 된 명칭으로 흔히 불렸던 순정효황후 윤씨는 정식 시호를 받은 명성황후와 달리 '순정효황후'라는 호칭이 아무 공적 권위가 없는 사시(私諡)인데도 1983년 이후로 이런 논란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논란을 크게 보면 둘로 나눌 수 있다.
  • 민비는 대한민국 공식명칭이 아니니 사용해선 안된다 vs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며 개인이 어떤 명칭을 사용하든 표현의 자유이다
  • 민비는 일제가 만든 명칭이니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사용을 금해야 한다 vs '성+비'로 된 명칭을 조선에서도 썼으니 일제가 만든 게 아니다
전자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이 있고, 후자는 문제의 명칭을 누가 만들었느냐와 관련이 있다. 역사적으로 후자는 꽤 중요한 문제인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의 황족들의 칭호를 격하했고 이 당시 일제가 만들어 그들의 호칭으로 쓰인 명칭들은 법적인 처벌을 받는지와 관계없이 대한민국에선 일반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선 대부분 일제가 만든 조선의 황족들의 명칭들을 호칭으로 사용해야 할지 말지는 논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후자의 논쟁에서 어떤 결론이 나느냐가 전자의 논쟁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위키에선 후자의 논쟁에 대한 양측의 주장을 간단히 서술함으로써 '민비'라는 명칭이 사적인 경우에서도 호칭으로 사용하는데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8.1.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다


생전에 사용된 '''공식''' 호칭은 결코 '민비'인 적이 없었다. 당대 기록에선 대부분 중전, 중전마마, 왕비, 중궁전하 민씨 정도로 적혀 있다. 조선의 왕비 중에서 '성+비'로 만들어진 명칭이 유명한 경우로는 명성황후와 순정효황후가 있는데, 그것도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후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매천야록윤희순의 격문 '왜놈 대장 보거라'에 '민비'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이 두 기록은 당대에 '민비'라는 호칭이 쓰였다는 걸 증명한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 전해지는 매천야록은 황현의 후손의 필사본으로 1920~30년대에 쓰인 것이고 현재 전해지는 윤희순의 격문은 윤희순 의사 말년(1935년 사망 직전의 회고록)에 재 작성한 해평 윤씨 일성록의 기록이다. 원본은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현재 전해지는 기록은 이보다 10년 이상 지난 뒤에 작성된 것이므로 단어 몇 개가 바뀌는 식으로 원본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조선에서 '성+비'로 된 호칭으로 왕비를 부르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성+비'로 된 명칭이 왕비를 부르는 통칭의 하나가 되었을 거라는 주장인 것이다.
민비 부정론자들은 조선일본의 호칭 체계를 비교해서 이런 명칭이 생겨난 원인을 이렇게 추정하고 있다. 조선의 여성들은 통칭으로 통상적인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다. 왕실 여성들도 존호나 지위명이 통칭으로 쓰였고, 후궁은 대부분 직첩명+성씨(또는 성+직첩명)이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호칭 체계는 조선과 다르다. 일본에선 여성에게도 통상적인 '이름'이 있지만, 일본 황실은 성씨가 없다. 그 때문에 황족과 결혼한 여성을 통칭할 때 주로 '이름+비', '이름+황후'가 쓰인다. 호칭 체계에서 두 나라가 같았던 건 군주의 정실 부인에게만 시호를 올렸고 이를 통칭으로 사용했다는 것 정도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에 왕공족이라는 신분을 만들어 조선의 황족들을 집어넣었다. 조선 초기 이후로 왕비는 대비가 되지 않는 한은 존호를 받지 않았으므로, 일본 입장에선 명성황후와 순정효황후에겐 성씨 외에는 마땅히 '이름'으로 쓸 명칭이 없었다. 당시 명성황후에겐 고종이 준 시호가 있었지만, 조선을 병합하고 그 나라의 황족들의 신분을 격하시킨 상황에서 그 시호를 '이름'으로 쓴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통칭으로 사용될 호칭으로 '성+비'로 만든 명칭이 생겼고, 그 후로 이 호칭이 일본인들이나 조선인들 사이에서 통칭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조 링크 참조 링크2또한 1910년 이전에 쓰이는 사례들은 모두 일본 측의 기록인데 1868년에 일어난 서계거부사건(혹은 국서거부사건) 이후 일본에선 조선 왕실을 가리킬 때 '이왕'과 '민비'라는 단어가 등장했다고 한다.[54]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일본의 방식에 맞게 바뀐 것으로 봐야 하는데 이는 일제의 잔재의 하나이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8.2.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 아니다


왕비후궁을 호칭할 때 지위명, 시호(의 약칭), 직첩명+성씨(또는 성+직첩명) 등을 사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경우다. 폐서인이 된 왕비를 지칭할 때 '성+비'로 된 명칭이[55], 폐서인이 된 왕세자빈을 지칭할 때 '성+빈(嬪)'으로 된 명칭이 사용된 경우[56]가 기록에서 종종 발견되고, 왕실의 어른인 대비를 '성+대비'로 된 명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걸 보면, 왕비의 호칭으로 '성+비'로 된 명칭이 백성들 사이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이런 명칭이 있었다 해도, 공식적인 게 아니니 사료에는 이런 명칭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게 정상이다.[57] 그러니까 폐서인이 된 왕비가 아닌 이를 '성+비'로 된 명칭으로 호칭한 경우가 사료 중에 하나라도 발견이 된다면, 당대에 백성들 사이에서 그런 명칭이 통칭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이 지은 격문 <왜놈 대장 보거라>에서 보면 '더욱이 우리의 민비를 살해하고도 너희 놈들이 살아서 가기를 바랄쏘냐.'라는 부분이 있다. '민비'라는 부분을 '국모'로 쓴 경우도 있는데, 독립기념관의 기록국가보훈처 대표블로그에서는 '민비'라고 쓴다. 그리고 매천야록에서 명성황후를 가리키며 사용하는 호칭에 '민비'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매천야록 공식 국역 자료) 2013년에 발생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논란 등을 들어 번역에 문제가 있다[58]고 지적할 사람은 원문을 찾아보기 바란다. 분명히 '민비(閔妃)'라고 되어 있다. 매천야록은 그 특성상 거기에 실려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는 맹신할 수는 없는 자료지만, 그건 책에 실린 일화의 신빙성 유무 때문이니 호칭에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윤희순 의사와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둘 다 양반으로, 명성황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당대에 아예 없는 명칭을 새로 만들어서 호칭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민비 긍정론자들은 주장한다. 특히 윤희순의 <왜놈 대장 보거라>는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해 일본에게 분노해, 조선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테니 좋은 말로 할 때 너희 나라로 가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둘 다 현재 전해지는 기록이 원본이 아니며 이 기록들은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작성된 거라 원본 내용 일부가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또 다른 필사본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왜곡된 게 맞는지, 왜곡된 부분이 어디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민비라는 단어가 원본에 없다는 주장에 근거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8.3. 고종과의 형평성?


본래 명성황후 민씨의 호칭 문제는 민비 부정론자든 민비 긍정론자든, 명성황후 민씨 한 명을 대상으로 하여, 민비라는 호칭을 사석에서 사용함이 적절한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2017년 일부 민비 긍정론자들 사이에서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부른다면 고종도 광무제라고 불러야 한다'''는 논리가 나왔다. 이들의 주장은 명성황후 호칭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아내인 민비는 황후 취급하는 주제에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은 황제가 아닌 조선 왕 취급하여 고종이라 비하해서 부르며 남녀 차별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고종은 왕의 호칭이니 그렇게 부른다면 고종의 아내인 민씨도 황후가 아니라 왕비로 취급하여 민비로 불러야만 부부 간 호칭의 형평성이 성립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는 '고종' 같이 '~조', '~종'으로 붙이는 묘호는 본래 황제의 나라에서 황제 사후 종묘에 오를 때 붙여지는 명칭이라며 조선 왕의 호칭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가 없어서 나오는 말이다.[59] 또한 '고종'을 조선 왕의 묘호로 보고 민씨를 황제가 아닌 왕의 왕비로 취급한다 해도 조선 왕의 왕비의 시호(의 약칭)은 '성+비'가 아니라 'XX왕후'이므로, 민씨를 민비로 부르면서 고종을 고종으로 부른다면 '부부 간 호칭의 형평성'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고종 황제는 칭제를 했고, 그 이전의 조선의 왕은 묘호가 본래 중국 황제의 호칭이든 뭐든 간에 황제가 아닌 왕이었음이 분명하므로 양자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명성황후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면 '광무제'는 부적절하다 할 지라도 '고종'이 아닌 '고종 황제'라고 표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고려한 건지, 1983년부터 국사교과서에서는 '고종'을 '고종 황제'로 고쳐 표기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고종을 굳이 '고종 황제'라고 부르는 경우는 대한제국에 대한 걸 이야기할 때가 아니면 드문 편이다. '고종 황제'라는 호칭조차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고 별로 이를 문제 삼는 사람도 없는 것이 일반적인 걸 보면, 논란이 있는 '민비'는 몰라도 '명성황후'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이중잣대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인조실록에 만력제를 그냥 신종(神宗)이고 표기한 기록이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로 추존된 태조 장조(사조세자) 정조 순조를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서 장조의황제 정조선황제 순조숙황제라고 호칭하기도 하지만 묘호로만 호칭하기도 했으므로, 고종황제를 그냥 고종이라고만 호칭한다고 해서 명성황후 민씨의 호칭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건 아니다. 게다가 애초에 x종, x조라는 시호 자체가 본래는 황제에게만 쓸 수 있는 칭호이며 조선이 유교식 체제를 어기고 외왕내제격으로 왕을 종, 조의 시호를 붙인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은 '''왕, 황제를 섬기지 않는 공화국'''이며, 그러므로 왕, 황제에 대해 존경을 표해야 할 의무가 없다. 따라서 고대 왕조의 군주를 경칭으로 부를 의무가 없다.

9. 사진과 초상화 논란



9.1. 사진



9.1.1. 떠구지 머리쌍비녀의 사진


[image]
Korean palace-woman in full regalia(대한제국멸망사, 1906)
[image]
'''명성황후 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진.''' 떠구지머리(거두미머리, 큰머리)와 쌍비녀차림의 사진이다. 프랑스 잡지 <르 뚜르 뒤 몽>(1904)에 나왔으며 자료제공자인 아장 박사는 설명에 “일본의 과격분자에 의해 살해된 한국황후”라고 달았다. 원본사진인 테리 버네트의 <코리아:시간의 굴레에 갇힌…(Korea : Caught in Time)>(1900)에서도 명성황후라 나왔다.사학자 장도빈(張道斌)의 저서 <대원군과 명성황후>(1927)에도 명성황후라 서술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궁녀로 나와있는 기록도 역시 존재한다. 호머 헐버트의 <대한제국 멸망사>(1906-‘정장한 궁녀’)와 언더우드 여사의 <조선생활기>(1905-‘정장한 귀부인’), 샤를 알레베크의 사진엽서가 그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이고 원로 사학자들에 의하여 1977년부터 국사교과서에도 실린 명성황후 추정사진으로는 가장 유서깊은 사진이지만 비교적 근래에 부정론이 되두되어 논란 중이라 교과서에서 빠졌다.
이미 1900년대 초엽부터 알레베크 사진엽서[60]등 서구를 중심으로 궁녀의 사진으로 유통되던 사진이라 명성황후의 사진일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하며[61] 일각에서는 신발도 신지 않은 버선발 차림으로 사진을 찍는 등 왕비로서 지킬 체통과 의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부정론이 있다. 또한 조선 시대 여성 복식의 중심은 가체(加髢)다. 가체를 보면 왕비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비녀를 두개 꽂은 모양은 내명부의 신분이 높은 사람만 할 수 있으며, 떠구지머리 역시 상궁들이 하는 머리지만 왕비와 왕세자빈 역시 예장할 때 하는 내명부 공통의 머리다. 더구나 가체의 크기도 엄청나게 크다. 남아있는 구한말의 떠구지머리를 한 사진들 중에서도 매우 큰편에 속한다. 가체의 크기는 지위를 상징한다. 버선발 차림도 좌식생활을 하는 한국의 문화를 생각해보면 사진을 찍으러 출궁해서 사진관으로 가는식으로 밖으로 나가지 않고 궁내의 실내로 사진사가 들어와서 찍었기 때문에 신발을 신지 않았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중전이라고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돌아다닌 것은 아니다. 발 역시도 단정하게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놓여있다.
해당 내용은 10년 전에 이미 논파된 것으로 사실이 아니다. 1900년에 촬영된 집옥재로 추정되는 서재와 카펫을 배경으로 한 명성황후의 사진은 흔히 알려져 왔던 명성황후의 사진과 1894년 11월자 미국 잡지에 게재된 배경 사진을 조잡하게 합성한 위조사진이다. 즉, 본 문단 최상단에 위치한 사진이 오히려 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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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알려진 명성황후의 사진합성에 활용되었던 원본 배경 사진#
조선은 유교적 예법의 나라고 궁녀들도 예법으로 속박받는 자유가 없는 존재들이다. 대충대충 몸가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체통이 없어서 평민의 사진일 순 있어도 상궁의 사진일 순 없다. 이게 상궁의 사진이라면 그것으로도 이례적인 사진이다. 이제껏 버선발을 노출한 궁녀의 사진은 없다. 다른 궁녀들의 사진들과 비교할때 이질감이 크다. 오히려 왕실의 권력자들의 사진들 중에 여유가 느껴지는 사진도 있다. 명성황후는 순종적인 성품이 아니라서 집권세력인 민씨척족의 정치적 수반으로 왕까지 품으며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당대의 집권자였다. 거기다 시아버지하고도 싸우는 호방한 여장부형의 성격으로 유교전통적 여인상과는 매우 달랐다. 물론 반대였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오히려 권력에 짓눌리는 궁중법도 속의 상궁이라면 남이 볼까 두려워서라도 감히 버선발로 여러 물건들이 올려놔진 서재에서 여러사람이 볼 수있는 사진을 찍을 수는 없어도 권력 위에 올라탄 명성황후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또한 복장이 왕후치고는 수수한 편인데 윗 문단의 명성황후를 만났던 외국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장식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 것 같았으며, 또 거의 달지도 않았다고 하고 있으며 목걸이, 팔찌, 브로치등의 꾸미개 장식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기록과 오히려 일치한다. 직접 만난 사람들의 기록이며 당대의 1차사료다. 만약 복장이 화려하다면 이러한 기록들과 배치되는 것이다.
북한 같은 경우는 이 사진을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어쨋든 과거 정설로 여겨져서 교과서에까지 실렸던 이 사진의 위상은 많이 떨어진게 사실이다. 복장도 순정효황후사진과 비교하면 수수하고 궁녀사진이나 삽화와 유사점이 많으며 원본사진의 배경도 단정치 못한 점 때문이다. 다른 왕실사진은 단정한 배경들이 대부분이다. [62]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점점 부정론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사진의 영향력은 강력하여 드라마영화, 뮤지컬, 각종행사등에서는 여전히 떠구지머리와 쌍비녀의 명성황후가 자주 보인다. 아무래도 오랜기간 국사교과서에 명성황후 사진으로 실려있어서 명성황후 하면 바로 떠오로는 사진이고 목재로 된 나비모양의 커다란 가채와 쌍비녀가 독특해서 일 것이다. 이는 역시 사진논란이 있었던 흥선대원군과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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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 약1년전에 일본에서 석판화 양식으로 그렸다는 명성황후-고종-흥선대원군의 3자 합동 초상화인데 명성황후의 모습이 이 사진과 일치한다. 이 그림은 명성황후 관련 그림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이다.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이나 초상화는 모두 사후에 발행된 것이나 이것은 유일하게 생전에 나온 것이고 연대, 주소, 출판사, 발행일자, 편집자명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있으며 발행인이 일본에서 당대 최고의 석판화가이자 천황의 초상화를 최초로 보급할 수 있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매우 권위있는 사람인 출판사 신양당(信陽堂)의 '오카무라 마사코(岡村政子)'이다. 더구나 이 그림이 그려지기 6개월 전에 메이지 덴노 부처의 초상화를 역시 석판화 양식으로 그렸는데 실물과 같다. 만약 여기서 그려진 왕비 민씨가 실은 궁녀를 그린 초상화라 가정하면 고종, 흥선대원군 거기에 더해 메이지 덴노와 쇼켄 황후의 초상은 각각 본인의 얼굴을 그렸는데 명성황후만은 본인이 아닌 다른 궁녀의 모습을 그려넣었다는 얘기가 된다. 다른 사람의 초상화는 모두 본인의 실물과 같다. 이 그림은 일본에서 그린 것이라 서구에 비하면 훨씬 가까운 국가이고 일본 역시도 군주국으로 그 국민들 역시 군주국의 신민들이다. 왕후를 궁녀로 대충 그려넣는다는 것은 군주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결례라는것을 모를리가 없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위 사진이 명성황후라는 것에 무게를 실어주는 증거가 되는 그림이다. 조선국귀현초상(朝鮮国貴顕肖像) (발굴특종②) 캐나다 거주 중국인에게서 입수한 민비 초상화
그러나 일본 석판화가 실물과 가장 가까울 것이라는 주장 역시, 논리를 한껏 비약시킨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아래에 열거된 프랑스, 미국 신문이 인종차별 황색저널이어서 엉뚱한 사진을 넣은 것이 아니다. 민비 문제의 핵심은, 당시에 그 누구도 민비의 사진을 구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사를 쓰다가 상상화나 엉터리 그림에 손을 대게 되는 것이다.[64]
출판사 신양당이 일본에서 얼마나 신용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들만이 민비 사진을 구할 수 있는 특단의 방법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민비는 오래된 유교적 규범에 따라서 궁중에 숨은 채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처신으로 일관했다. 위의 석판화를 분석해보자면 상기의 알레베크의 사진엽서에다 얼굴만 '''특징없이 무난한 조선 미인상'''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든다. [65] 또한, 민비 생전이건 아니건 이 문제가 특별히 달라지는 점도 없다.

9.1.2. 이승만의 책 "독립정신"에 실려있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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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명성황후 사진으로 알려졌던 사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목구비를 조금씩 고쳐그린 수십 가지 합성본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사진의 원본 사진이 있는데,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링크 1990년에 명성황후 사진으로 국사 교과서에 실렸지만 논란 끝에 1997년 삭제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저 원본 사진의 캡션이 기생의 사진이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단국대의 황필홍 교수는 이승만의 '독립정신'(1910년), 박은식의 '한국통사'(1917년), 장도빈의 '대원군과 명성황후'(1927년), '별건곤'이 발간한 사진 부록 '근대조선의 인물화보'(1932년)에 모두 이 사진이 명성황후라고 실려있는 것을 근거로 이 사진이 실제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주장한다.기사 명성황후의 조카였던 민영찬도 이 사진을 명성황후로 지목했다.

9.1.3. 흥선대원군과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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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미국에서 발간된 박물관 보고서엔 "궁궐에서 시중을 드는 여인", 1893년 독일의 에른스트 폰 헤센-바르테크가 쓴 '코레아' 궁녀, 1894년 발간된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등의 책자에는 '조선 왕의 시종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2006년 사진의 원본이 공개됐고 앨범에 함께 실린 4장의 사진중 왼편에는 고종과 순종의 사진이, 오른편에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 있으며 아랫쪽에는 흥선 대원군의 사진 2장이 배치됐다.
특히 명성황후 추정 사진 설명문에는 필기체로 'Die ermordete Königin'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살해된 왕비'라는 뜻이다. 대원군과 사진의 배경이 정확히 일치하며 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점, 유순한 눈빛과 다르게 날카로운 인상이 기록과 일치함으로 명성황후의 실물 사진이라는 의견이 있다. 서울대학교 이태진 명예교수는 여성 사진의 뒷배경이 같은 사진첩의 대원군 사진 속 배경과 똑같아 명성황후가 함께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명성황후를 직접 접견한 드 게르빌이라는 프랑스 여행작가가 1차로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10월호에 사진과 함께 명성황후라 소개했고, 1895년 12월 14일자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아메리칸>에 쓴 ‘명성황후는 왜 살해됐나(Why Queen Min Was Murdered)에도 나왔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첩인 초선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명지대학교 김차규 교수는 사진 속 여인이 평복을 입었으며 뒷배경이 같은 대원군 사진이 임오군란 뒤 중국 억류 때 즐겨 입은 중국풍 복식 차림이란 점을 들어 대원군을 수행한 시종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또한 동(同)대학교의 조효순 명예교수는 황후는 평상시 소례복차림이어야 하는데 머리 위에 올린 가채에 떨잠 장식이 없고, 저고리 위에 황후가 입는 당의가 없으며 홑치마가 아닌 두벌의 치마를 입어야해서 궁중 복식의 예법에 맞지 않아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의친왕의 딸 이해원 여사는 대원군의 첩인 초선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확실히 오른쪽 이래의 대원군사진의 카페트와 뒷배경이 같아 같이 찍은것으로 보이며[66] 대원군사진은 복장을 보면 임오군란이후 청나라에 억류된뒤 귀향하여 운현궁에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명성황후가 출궁해서 운현궁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는 말이 되는데 조선시대에 왕비가 무려 시스루치마를 입고 출궁해서 시아버지를 만나고 사진을 찍었다는 얘기가 된다. 시스루차림을 하지 않았더라도 왕후가 궁밖으로 출궁하는것은 드문일이고 만날려면 왕이나 왕비의 가족이라해도 그 가족이 입궁해서 알현하는것이 일반적이므로 대원군이 입궁해서 같이 찍는게 자연스럽다.
궁안이라도 다른사람들 눈이 있는데 실외를 시스루치마차림으로 돌아다니긴 어려웠을것이다. 대원군의 중국식 복장으로 보아 청나라 억류 이후로 추정되는데 그후 권력에서 배제되어 입궁한적이 거의 없다. 입궁해서 찍었더라도 관복을 입지 저런옷을 입고 입궁하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는 철천지 원수지간이지 한가롭게 가족사진이나 같이 찍고있을 사이는 더더욱 아니다. 대원군이 암살시도를 할 수도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명성황후가 암살위험을 느낄것인데 그것을 감수했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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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월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기사로 호머 헐버트가 썼다. The Corean Empress Who Was Murdered라는 설명으로 살해당한 한국의 왕비란 뜻이다. 호머 헐버트는 지한파 미국인으로 고종황제의 측근역할을 했던사람이다. 이 사진이 명성황후라는데 힘을 실어주는 증거중 하나다.
사실 여부와 별개 찡그린 표정이 꽤 사악하고 악독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인터넷등지에서 명성황후를 깔때 자주 쓴다.

9.1.4. 기타


  • 사진을 찍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에, 사진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명성황후는 자신의 특집기사를 쓰러 외국 특파원이 방문했을 때, 사진이 찍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유는 첫번째로 암살위협이다. 당시 명성황후는 암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벽 5시까지 잠들지 않았으며,[67] 침실이 여러 개 있었고, 침실에도 비밀문이 있어 비상시 빨리 피신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소용이 없었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외모를 밝히는 것을 꺼렸다. 그런데 세자가 사진을 찍자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사진 자체를 혐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반대의 이야기도 있는데 이사벨라 비숍 여사에 따르면 사진찍기를 좋아했다는 언급이 있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명성황후가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당대에는 상당히 미인이었으나 어릴적 앓았던 마마 때문에 얼굴에 얽은 자국이 남아있었다고 종친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또 당시 명성황후는 서양 부인들이 사용하던 화장품을 공수해 사용했는데 너무 진하게 발라서 납중독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그만큼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어느정도 있었던듯 하다.
  • 일본측의 훼손설이 있다. 고종은 명성황후 사후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사진을 찾기도 했으며 끝내 찾지 못하였다. 고종이 없는 사진을 찾으려고 거액을 현상금을 걸을 리도 없으니 을미사변 직후 일본측에서 사진을 없앴을 수도 있다. 일제의 사후대응은 발뺌이었고 흥선대원군이 사주한 국내권력다툼으로 인한 정변으로 꾸미려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낭인일본군 장교에게 주살되었다. 자기들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데 한밤중에 목격자도 없는 후미진 곳에서 조용히 암살한 것도 아니고 일본식 복장을 입은 인원 다수가 전투를 벌이며 일국의 궁전에 쳐들어가 낭인들에게 둘러싸인 왕후를 살해했고, 그때는 해가 솟아오른 아침이었다. 수많은 궁인들과 구한국 군인들 심지어 서양인까지도 목격하는 데서 일을 크게 벌였으니 일본은 초조하게 제발 저리면서 할 수 있는 한 최대 은폐를 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하며 그 중 한 방법으로 그날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명성황후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없애거나 훼손시키고 궁녀로 둔갑시키는 한편, 일본인은 조선의 왕비를 죽인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증거인멸을 목적으로 살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에 주한일본공사의 명령으로 궁궐 안에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워버리기까지 했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 고종도 못 찾을 정도였으니 확실한 사진이 없는 건 그렿다쳐도 해방 이후에도 명성황후를 모셔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상궁 등 궁인들이 살아있었다는데 위 3개 사진이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근거도 없다는 건 좀 이상하긴 하다.

9.2. 초상화



9.2.1. 명성황후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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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영정. 독립정신에 실려있던 사진과 외모가 흡사하다.

9.2.2. 민씨부인(閔氏夫人)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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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공개되었다. 역시 진위 여부는 불명. 단순히 족자에 민씨부인(閔氏夫人)이라고 써진 것에 대하여 명성황후로 추측하는 것인데, 그냥 민씨 성을 가진 일반 부녀자일 수 있는 것이다. 또, 왕비가 일반 부녀자 같이 머릿수건을 쓰고 있을리가 없다. 그림의 스타일 또한 전통적인 한국화 초상화와는 젼혀 다르고, 서양화 화풍이 많이 가미되어 있어 20세기에 들어선 후에 그려진 그림으로 보인다.

9.2.3. Le petit Parisien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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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Le petit Parisien 1895년 부록의 인물화로 중국풍의 삽화다. 설명이 LA REINE DE COREE로 한국의 왕비란 뜻이다. 실제모습하고는 차이가 있는 상상화로 여겨진다.

9.2.4. Novoe Vremy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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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Novoe Vremy 1895년 10월 21일자 별지 8쪽의 인물화이다. 살해당한 조선의 황녀라는 설명이 기사에 나와있다. 역시 중국풍이다.

10. 창작물에서 나오는 묘사


1965년작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에서는 최은희가 명성황후 역을 맡았는데, 을미사변 장면에서 일본 자객들에게 맞서 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이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68]
2001년 KBS2에서 방영한 동명의 드라마는 명성황후 민씨를 미화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다만 드라마 자체는 수작인 명작 드라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문제다.
이후 명성황후(뮤지컬)에서 미화의 정점을 찍는다. 그 외에도 불꽃처럼 나비처럼(영화) 등 미화된 창작물이 많았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부정적인 면모들이 밝혀지고 대중에 알려지면서 그 이후에 나오는 사극에서는 부정적인 모습이 늘어나고 있다.
KBS2 수목드라마 조선총잡이에서는 이전의 명성황후 드라마와 달리 미화없이 사실에 맞게 표현했다. 조선총잡이를 맡은 감독은 공주의 남자를 감독했던 사람인데, 여기서도 수양대군한명회를 사실에 맞게 묘사한 바 있다.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 김지현이 연기하였다. 여기서 정치 권력에 집착하며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의 승리를 믿거나 동학 운동을 왕권에 방해되는 요소로 생각하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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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와 타츠야 작가의 만화 러·일전쟁 이야기에서는 저렇게 프리저같은 표독한 눈매를 한 악녀로 등장한다(…). 오른쪽에서 사자후를 내지르는 사람은 흥선 대원군 민비가 한국에선 미화되는데 일본에선 실제모습(?) 그대로인게 아이러니..[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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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좌익(말 그대로 업계 최좌익)성향인 야스히코 요시카즈 작가의 왕도의 개에서는 기품있지만 무시무시한 인물로 등장. 청나라 측 고문으로서 조선을 제 안마당처럼 여기는 위안스카이조차 그 면전에서는 쩔쩔 맬 정도로 만만치 않은 위엄을 지녔지만, 정작 백성은 굶주리는데 불꽃놀이 같은 대규모 행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하는 것은 물론이요, 나름대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하던 김옥균을 암살하고, 조선으로 실려온 김옥균의 시체를 토막내어 '''대원군이 보라고''' 양화진에 걸어놓는 등 잔혹한 왕비로 묘사된다. 어느 쪽이든 일본에서는 좋게 보지 않는 듯. 같은 만화에 함께 등장하는 고종은 명성황후와 위안스카이에게 눌려 지내는 완전 쪼다에 무능력자로 나온다.
카카오페이지에서 김영오작가가 연재한 요괴난전에서 등장하며 오라버니의 죽음과 힘들게 얻은 아이의 죽음을 흥선대원군의 짓이라 생각해 그를 증오하고, 자신과 척족을 지키기 위해 흥선대원군과 싸우며 모든 권력을 취하려 한다.
몬스터넷의 온라인 게임 이터널시티의 캠페인에서 중요한 인물로 나온다. 캠페인 자체가 과거로 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당하는 것을 막는 내용이며, 게임이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다보니 당시의 대중적 인식에 따라 명성황후를 마치 위인처럼 다루고 있다.
대체역사물에서는 세간의 부정적 인식이 반영된 탓인지 대부분 탐욕스럽고 표독하며 자기 아들만 편애하는 인간말종 수준의 악녀로서 묘사된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고종 황제가 청나라 공친왕의 딸인 소양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일개 평민 아녀자가 되었고, 대한제국 사회를 뒤흔든 불륜사건을 일으킨다. 그것도 대상은 사위인 이완용이었다. 결국 민자영은 사위와의 사이에서 임신하고, 이는 곧 최익현의 대한일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여흥 민씨의 추악한 행위와 이 때문에 양반이라는 상징이 박살나지 않도록 나선 안동 김씨 및 유력 가문들의 연결고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자신의 아들 이척을 왕위에 올리려고 고종의 서장자 완화군 이선을 천연두로 암살하려 하고, 몸이 약한 아들의 건강을 기원한답시고 천문학적인 국가 재산을 굿판에 쏟아 붓는 부패하고 탐욕스런 악녀로 묘사된다. 임오군란이 터지자 도망치는 것까지는 원래 역사와 똑같으나 미래인이 빙의하여 죽지 않고 살아남은 완화군이 외국으로 도피해 힘을 키워 임오군란이 터지는 상황에 맞춰 귀국해 상황을 수습하였고, 임오군란의 충격과 장거리 도피행으로 체력이 약해진 명성황후는 완화군과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그 동안의 벌어진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의 책임을 물어 폐서인이 된 후 비공개적으로 익산 미륵사에 유폐된다. 그렇게 잊혀지는 듯싶었으나 고종에게 시종을 보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렸고, 이 사실을 안 고종이 청국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모르고 청국의 개입을 막으려고 한 완화군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완화군이 보빙사로서 미국에 있을 때 흥선대원군에게 암살당한다. 이후 병사로 처리되어 충주의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고 한다.
'역적조련사 : 조선을 바꾸다' 에서도 완화군을 죽이려고 시도하는 악녀로 등장하며 미래인이 빙의한 완화군을 어떻게든 처리하려 들지만,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본을 끌어들여 전쟁이 터지고 이 와중에 고종과 세자 이척이 도망치다 사망하자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고 폐인이 되어 알아서 리타이어한다.
'슬기로운 조선생활'에서는 임오군란으로 도망치다 자신을 험담하는 어느 아낙을 보고 앙심을 품었다가 환궁할 때 그 아낙에게 복수한답시고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수십명의 여성을 싸잡아 학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산다. 이 소식을 접한 주인공 진영이 이를 도저히 좌시하지 못해 명성황후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진령군의 건의로 관우사당을 짓는다는 걸 역으로 활용해 사당건축 현장에 일행을 인부로 잠입시켜 폭약을 매설하고 사당완공식 당일 명성황후가 들어갈 때를 노려 폭약을 터뜨려 폭사시켜버린다. 당연히 고종을 포함한 위정자들은 분노와 공포로 떨지만, 많은 백성들이 통쾌해 한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그나마 긍정적으로 묘사되는데 정확히는 귀남의 변함없는 애정(첩 없음) 및 적당한 수준에서 권력욕을 발휘할 길을 터준 덕분에 성질이 많이 가라앉은 것. 그 덕분에 여흥 민씨를 끌어들여 이렇다 할 패악질을 저지른 것도 없고 시아버지와의 사이도 양호해서 흥선대원군이 자신이 죽은 뒤 종실을 뒤에서 받칠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물론 만만치 않은 권력욕의 화신인 흥선군인데다 중전도 아직 젊은 만큼 권력을 간단하게 내주고 있지는 않으나 천천히 흥선군에게서 정보자산 등을 물려받고 있는 중이다. (자청한) 일의 산에 파묻혀있을거라고 류큐로 유람간 대원군이 평했을 정도다. 물론 시간이 지나 나이가 40이 넘으면서는 슬슬 권력에서 손을 놓을까도 생각 중이다.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에서는 비슷한 장르의 작품 명성황후(뮤지컬)와 비교하면 조금 더 중립적으로 그려졌다. 극 중의 명성황후는 왕실 입성 초기엔 어느 정도 선한 의지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시부 흥선대원군과 수구세력, 외국 열강과 개화 세력 사이에서 정신적 압박을 받다가 흑화하여 히스테릭한 광기를 보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11. 명성황후를 연기한 배우


  • 영화 대원군과 민비 (1959) - 황정순
  •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1965) - 최은희
  • 영화 전하 어디로 가시나이까 (1968) - 도금봉
  • 영화 민비와 마검 (1970) - 사미자
  • 영화 경복궁의 여인들 (1971) - 윤정희
  • 영화 삼일천하 (1973) - 도금봉
  • MBC 민비 (1973) - 김영애
  • KBS 8.15 특집극 대한국인 (1979) - 황정아
  • MBC 8.15 특집극 의친왕 (1980) - 김영애
  • KBS2 TV문학관 횃불 - 김을동
  • KBS1 풍운 (1982) - 강수연(아역), 김영애[70]
  • MBC 거부실록 (1982) - 이미숙
  • MBC 한미백년 (1982) - 최명길
  • KBS1 이화 (1987) - 김교순
  • KBS2 바람과 구름과 비 (1989) - 윤지숙
  • MBC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 (1990) - 이잎새(아역), 김희애
  • KBS1 다큐멘터리극장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특집 (1994) - 미상
  • KBS1 찬란한 여명 (1995) - 하희라
  • SBS 안중근 (1996) - 김영애
  • KBS2 명성황후 (2001) - 문근영(아역) 이미연, 최명길[72]
    • 나 가거든 MV - 문근영(아역), 이미연[71]
  • 영화 한반도 (2006) - 강수연[73]
  •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2009) - 수애
  • SBS 제중원 (2010) - 서이숙
  • KBS2 조선총잡이 (2014) - 하지은
  • 영화 도리화가 (2015) - 이윤정
  • KBS2 장사의 신 - 객주 2015 (2015) - 최지나
  • SBS 녹두꽃 (2019) - 김지현
  • 뮤지컬 명성황후 - 이태원, 신영숙, 김소현, 최현주, 이혜경, 이상은, 조안나, 윤석화, 김원정
  • 창작가무극[74] 잃어버린 얼굴 1895 - 차지연, 김선영, 박혜나
  • TV조선 바람과 구름과 비 (2020) - 박정연

12. 기타


비숍여사의 기록에 의하면 특이하게도 미국식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궁녀들이 골초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딱히 이상하지는 않다.
2018년 9월 구한말 왕실 의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에게 하사됐던 명성황후의 부채가 134년 만에 알렌 후손의 기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고 한다. [단독] 명성황후 부채 134년 만에 귀환…알렌 후손 기증

[1] 명성왕후의 명성은 明聖, 명성황후의 명성은 明成으로 성의 한자가 다르다.[2] 왕비였던 인물까지 포함하면 당연히 1위는 희빈 장씨[3] 명성황후와 같은 씨족이니 당연한 것.[4]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정황상 고종이 했을 확률이 높다. 옛 교과서에서는 민비가 원병을 요청했다고 나오나 2006년 7월 1일 '임오유월일기'가 발견되며 학설이 깨져버렸다. 따라서 소거법상 고종 외에는 원병을 부를 수 있는 인물이 남지 않게 된다.[5] 자시 : 밤 11시~새벽 1시.[6] 현 도로명 지명은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이고 구 지번 주소로는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이다.[7] 본명을 두고 논란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기생의 기명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서에 기록되지 않고 여성은 당연히 이름을 갖고 있으나 다른 명칭으로 불릴 경우가 많고 남성보다는 평소에 이름을 사용하는 빈도가 낮아 보이며 족보에도 결혼을 하면 이름이 적히지 않고 남편의 이름만 기록되어 추정이 어렵다. 소설이 출처인 자영이라는 이름도 아명으로 전해지는데 줄리에트 모리오의 "운현궁", 정비석이 쓴 "소설 민비" 등에서 나온 작명이라는 것이다. 다만 정비석은 창작이 아니고 어느 연구자의 이야기를 듣고 적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 유력한 것은 아영으로 학술 자료의 기본이 되는 '열성왕비세보 열성황후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列聖皇后王妃世譜)'에는 아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보니 변경된 것으로 본다고 자영을 미는 중. 그 외에 아명은 당시 항렬을 따라서 정하였다는 말도 있으나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다른 항렬자를 사용한 예도 있어서 확실한 증거가 없다. 본명이 자영이라고 사전에 등록된 경우는 많지만 정식 사료가 아영인 것으로 봐서는 별도의 학술적 근거보다는 여흥 민씨 족보에 따른 것으로 추정 중.[8] 고종은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입승대통)이 됐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법적인 아버지가 더이상 아니었다. 대비 조씨와 흥선대원군이 혼인 관계였던 것이 아니다.[9] 신부 후보들의 신상 정보, 사주, 조상들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문서.[10] 그러니까 명성황후는 시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같은 항렬이다. 고종이 즉위 전 어릴 때 이미 명성황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안국동 이모'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고종은 이모뻘과 결혼한 것이다.[11] 승정원일기 11월 8일 기사에는 大便不通之症이라고 쓰여 있다. 추정컨데 묘안증후군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으로 1년에 항문이 없는 신생아가 5천 명 정도인데 병원에서 항문을 만들어 준다고.[12] 한마디로 궁인의 태를 빌어 난 아이라도 왕자군이기만 하면 자동으로 왕위계승권 서열의 이름을 당당히 올릴 정도로 자손문제가 심각했었다.[13] 신 안동 김씨 중 서울 장동에서 기거하면서 세도정치를 한 일파들을 일컫는 말. 오타 아니다.[14] 궁녀들이 떼로 죽은 일이 있어, 이 때 죽은 줄만 알았다는 설이 있다. 또는 살아있어도 돌아오지 말라고 국장을 선포했다는 설도 있다.[15] 청의 원군을 요청한 것은 윤태준과 접촉을 마친 고종이란 설이 있다. 2007년에 발견된 문헌에선 당시 명성황후는 도피하는데 바빠서 청나라와 접촉할 여유와 능력이 안 되었다. 그리고 시기상으로 본다면 청에 원군을 요청한 것은 영선사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16] 그들의 예견은 맞긴 했다. 청나라식 개혁인 양무운동의 경우 성과가 없던 건 아니었으나 결국 격변하는 국제 정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지지부진 개혁하며 중요한 것을 제대로 손보지 못하고, 안에선 보수파들의 방해 등으로 인해 개혁파도 제대로 기를 못 펴서 일본처럼 완벽하게 근대화를 하지 못했다. 특히 군대 부분이 빛 좋은 개살구식 강화를 거쳐서 청일전쟁에서 훌륭하게 폭망.[17]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 영국의 여류 여행가로 많은 사진집과 기행문을 남겼다. 중국에 갔다가 1894년 조선에 왔는데 3년 체류하는 동안 청일전쟁, 동학농민전쟁, 연해주 이주 조선인 등 궁중 문화부터 서민문화까지 다양한 체험을 책으로 남겼다. 책 제목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었다. 조선에 올 당시 벌써 나이가 60대 중반이었다.[18]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1854~1925): 프랑스 국적이지만 독일인이다. 알자스-로렌 출신으로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고용돼 조선으로 건너왔다. 서양 귀빈들이 늘어나 궁중에 서양 요리사로서 궁에서 일했다. 고종 부부에게 점차 신임을 얻으면서 1895년에는 덕수궁 근처에 황실 소유지까지 하사받게 된다. 그 자리에 손탁 호텔을 지어 운영하나 을사조약 이후 조선이 망하자 고국으로 돌아갔다.[19] 훗날 차르가 되고, 러시아 혁명 때 처자식과 함께 죽는 그 니콜라이 2세가 맞다.[20] 산조는 순사로 테러 이후 잡혀 무기징역을 받은뒤 테러 4달만에 홋카이도 감옥에서 병사한다. 러시아와 일전을 각오하게 만들 정도로 일본에 큰 위기를 안겨줬던 인물. 놀란 당시 일본인들은 산조란 이름을 쓰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공포감에 떨었으나, 러일전쟁에 일본이 승전한 후 재평가됐다.[21] 여담으로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때 니콜라이 2세의 피가 묻은 옷이 증거품으로 남았는데, 이게 훗날 살해당하고 암매장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시신을 찾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다.[22]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고종이 사방에 구원을 요청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 중 한명으로 독일 제국빌헬름 2세가 있었다.빌헬름 2세는 고종의 간절한 구원 요청에 한국 사정에 좀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절엔 해외 진출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빌헬름 2세 시절도 동북아시아에서 집적거릴 여건은 안 돼서 소득은 없었다.[23] 결론적으로 이들이 황실에 붙었던 것도 친일로 돌아선 것도 사실상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였음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24] 훈련대 병사들과 순검들간에 싸움이 붙었다는 말도 있지만 결정적인 사건은 훈련대의 후원자인 박영효가 반역죄로 몰려서 일본으로 망명하면서였다.[25] 시위대는 편성기 겨우 3개월째인데다가 무기와 탄약도 빈약했다.[26] 갑오개혁 때 '왕세자'를 '왕태자'로, '왕비'를 '왕후'로 격상했다.[27] 이 당시 그녀는 대행왕후라고도 불렸는데, 여기서 대행(大行)은 시호가 확정되기 전까지 임시로 쓰는 칭호다.[28] 일본 경찰관이 사살했다고 함.[29] 호레이스 앨런을 비롯한 구미의 인사들이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고 한 사건인데 일본은 구미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데 우리가 간섭하는게 뭐가 문제냐?란 논리로 미우라와 낭인들을 석방시켰다.(...)[30]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흥선대원군이 일본대사관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왕비 암살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폭로했다.[31] 유길준은 40년지기 친구 윤치호가 일기에서 유길준이 낭인들에게 협조했다고 기록했다.[32] 참고로 이준용은 명성황후 때문에 죽을 뻔 했는데, 왜냐하면 이준용과 흥선대원군의 쿠데타 시도가 들통났기 때문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형인 흥친왕은 반란에 연루되어도 처벌 받지 않았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은 반란이 발각되었을 때 가차없이 죽었다. 흥친왕의 아들인 영선군 이준용이 반란에 연루되자 죽일까 말까가 논란이 된 것이다.[33] 이 과정 중에 썰이 하나 있는데, 궁녀로 변장한 명성황후를 본 한 노인이 "자네가 늙은 여우 때문에 고생이 많구만." 이라고 했다고 한다. 늙은 여우는 당시 명성황후를 비판하는 별명이었는데, 명성황후는 노인의 말을 듣고 웃어넘겼지만, 이후 다시 궁으로 돌아온 후 그 노인이 살던 마을을 초토화했다는 썰이다.[34] 러시아 제국차르 체제나 독일 제국카이저 체제와 같은 전제왕권을 추구했다고 한다. 민씨 일가가 친러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종 본인이 왕권 강화에 관심이 많았다.[35] 이에 살아생전 순종을 위한 제사 등에 아낌 없이 재물을 써서 사치했다는 말이 있다.[36] 조선 시대엔 여자의 질투를 칠거지악 중 하나로 여길 만큼 금기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해도 문제삼는 것도 있다. 혜경궁 홍씨효정옹주도 남편들의 후궁이나 첩 문제 때문에 시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질투를 안 하냐고 질책받기도 했다. [37] 고종이 후궁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승은을 입은 궁녀가 있으면 그 다음날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야사도 있다. 참고로 순헌황귀비는 쫓겨났다가 을미사변 이후에야 다시 들어왔다.[38] 근데 사실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서 사는 경우가 아예 없지도 않았다. 헌종의 후궁 숙의 범씨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그 예시. 그렇지만 명성황후는 단지 질투 때문에 무작정 후궁들을 추방했다는 게 문제.[39] 이는 황족인 명성황후가 차관형식의 뇌물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거절했다는 의견도 있다. 정 돈이 필요하면 왕실 내탕금 등 필요한 돈을 조달할 방법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40] 또 카펫에 쓰인 표범가죽은 조선표범이 아닌 중국 표범이었다.[41] 심지어 기형아 출산도 했었다.[42] 후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하였고, 이완용보다 더한 친일파로써 현재 비판론자들도 인정하지 않는다.[43] 저자인 정환덕은 과거에 급제 못하다가 역술로 점 봐준다고 하여 출세한 자이다.[44] 매천야록 외에 어디에 기록되어있는지 출처가 필요하다.[45] 당대인이 그 시대를 겪고 서술한 자료.[46] 매천야록의 신빙성을 말하는 것과 별개로 이 항목에선 다양한 정황들을 근거로 명성황후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천야록의 신빙성에 대한 논쟁이 무의미하다곤 할 수 없다. 또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도 교차검증이 필요할 만큼 논란이 있으나 다른 사료가 많이 없어, 분석을 못하는 실정이지 매천야록도 믿을 수 없다면, 삼국유사도 믿을 수 없단 식의 논리는 맞지않다.[47] 다만 이것은 납득한만 한게 있는게 후사를 낳은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실제로 명성황후는 여러 번 후사를 낳으려 했으나 갓 태어난 아기들은 얼마 못가 사망하였는데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왕조 국가에서 왕비가 가장 중요한 일은 후사를 낳은 일인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후사를 낳으려고 애를 쓸 것이다.[48] 사실 조선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국제 정세를 잘 몰랐다. 대표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인 일본조차도 맨처음에는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예가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도 유독 폐쇄적인 외교정책을 고집해 서양과의 교류가 없었던 조선은 국제 정세를 더더욱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편전쟁 당시 일본이 네덜란드를 통해 영국이 거의 손가락 하나로 중국을 쓰러뜨렸다는 진실을 알고 경악에 빠져 있을때, 조선에서는 '''서양 오랑캐가 천자님에게 덤비다가 토벌되었다'''라고 완전 거꾸로 알고 있을 지경이었다...[49] 실제로 중전에 간택된 것도 현명하다는 이유였다. 무엇보다 똑똑하지 않았다면 그때까지 의회정치를 멀쩡히 하던 일본이 굳이 여러 리스크를 감수하고 주권이 아직 존재하는 나라의 왕비를 궁궐까지 침투해서 죽일 이유가 없다.[50] 조선시대 매관매직 문서 발견 한때는 매천야록을 쓴 황현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도 있었지만 사료가 발견됨으로서 고종 시기에 매관매직이 이뤄진 것은 확실하다.[51] 사실 2000년 이후로 대한제국기에 황후로 추존된 조선의 왕비들의 황후로서의 명칭은 네 글자보다는 다섯 글자로 된 경우가 주로 쓰이는데, 명성황후만은 '명성'''태'''황후'로 부르는 경우가 적다.[52] 한국의 왕비 중에 '성+비'로 된 명칭이 공식명칭 비슷한 위치에 있는 예외적인 사례는 궁예의 아내 강비뿐이다. 정사에 나온 그녀의 명칭인 '부인 강씨'의 경우, 명칭만 봐선 그녀가 왕비라는 걸 알기 어렵기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편이다.[53] 세조선조, 인조 등 평가가 엇갈리는 일부 군주들 또한 그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서는 정식 명칭이라 볼 수 있는 묘호가 아닌 본명이나 왕자 시절의 칭호가 폄칭으로 사용되는 일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사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선 '민자영' 또는 멸칭으로 명성황후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와 별개로 연산군광해군이 후대에 명칭이 격하되었듯이, 명성황후도 평가에 따라 명칭을 격하할 수 있다는 입장이 있으나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민비나 기타 멸칭으로 부를 뿐이다.[54] 일본과 조선은 대마도를 거쳐 거래했었는데 일본이 대마도로 보낼 때는 일본갑 조선을로 보냈는데 대마도가 자체 필터링을 거쳐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보낼 때는 조선갑 일본을로 바뀌었고 반대로 조선에서 대마도 대마도에서 일본으로 보낼 때는 마찬가지로 필터를 거쳐 조선갑 일본을이 → 일본갑 조선을로 바뀌어 일본 조정에 보내진다. 이는 조선 일본 양국의 암묵적 용인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대마도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되기 위해 위조한 것도 있지만 대마도 입장에서는 조선일본의 사이가 좋아야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에 껄그러운 내용들을 순화해서 좋게좋게 넘어가게끔 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로는 상황이 바뀌어 일본이 직접 조선으로 외교문서를 보내자 서계거부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 이후 운요호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여러 차례 외교적 시비가 있었고 이때 일본에선 정한론이 대두되는 등 조선에 대한 악감정이 커졌다. 이 외교적 시비와 '일본은 상국, 조선은 하국'이란 인식에 나온 명칭인 것.[55] 예를 들면 연산군의 아내 폐비 신씨를 신비(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를 윤비(성소부부고, 순암집의 기록)라고 불렀다.[56] 민회빈 강씨의 경우는 현재 '강빈'이라는 통칭이 '민회빈'이라는 시호보다 더 많이 불린다.[57] 현대의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대통령들을 비하하는 호칭은 차고 넘치지만, 이러한 호칭들은 공식명칭이 아니니 공식 자료에선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해당 명칭들이 해당 대통령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58] 국역본에선 원문에 없는 '성+비'로 된 명칭을 사용해 표기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이 때문에 '성+비'로 된 명칭이 자주 쓰인 줄 잘못 아는 경우도 있다.[59] '연호+제' 형태의 황제호칭은 명, 청대에 황제 한 명 당 한 가지 연호만 쓰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되면서 정착된 호칭이지 직전 원나라 까지만 하더라도 (죽은) 황제의 호칭으로 묘호를 압도적으로 많이 썼다. 그래서 명목상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이었던 한반도 왕조들에서는 원칙적으로는 쓸 수 없었고 심지어는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을 친다고 무고했는데 그 근거 중 하나로 바로 제후국 주제에 묘호를 쓴다는 것을 들 정도였다. 일단 정응태가 무고한 것은 밝혀졌으나 묘호 사용만은 사실이었기에 이것만은 중국에 고려 때부터 이어온 실수였다고 싹싹 빌어야할 정도였다. 물론 몰라서 쓴게 아니라 자기 자존심 세우게기 용으로 쓴 것이다. 건국 시점부터 대놓고 외왕내제했던 고려에 비해, 건국 시점부터 멸이라는 확고한 슈퍼파워가 있었던 조선이 사용한 약화된 외왕내제라 보면 된다.[60] [image] 사진아래에 설명이 불어로 Dame du Palais. Costume de ceremonie로 써있다. 이는 정장 차림의 궁중 여인이라는 뜻으로 궁녀로 해석된다. 왕비였으면 여인을 뜻하는 Dame란 단어 대신 왕비를 뜻하는 reine을 썼을 것이다. 더구나 샤를 알레베크는 자신이 만든 총 48장의 알레베크 사진엽서에 명성황후 장례식 사진을 다수 실을 정도로 명성황후 장례식을 중시했는데 명성황후를 궁녀로 설명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1900 파리 엑스포에 기념품으로 사진을 팔았는데 왕후를 궁녀로 설명한 사진을 팔았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그는 1897년 한국에 처음 왔는데 그 때는 이미 을미사변 이후이다. 다만 연대상으로 더 빠른 조선국귀현초상에 이미 같은 그림이 있다는 점을 볼 때 알레베크 사진엽서의 사진들이 다 그가 찍은것인지는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사진에는 고종황제, 순종황제의 사진도 있기 때문에 명성황후가 있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탁지부 대신 이용익이나 친러파 권력자 김홍륙 같은 정부 고관부터 농민, 아녀자, 아이, 기생같은 다양한 다양한 사람들의 사진도 있어 역시 추론을 더 어렵게 한다. https://fr.wikisource.org/wiki/Souvenir_de_S%C3%A9oul,_Cor%C3%A9e_:_1900[61] [image] 다른 명성황후 추정사진 엽서로 한일통신합동기인 1909년의 엽서로 An Old Woman in the Corean Court, 韓國宮中の老女(한국궁중의 늙은 여자)라 쓰여있다.[62] 상술했듯 합성사진으로 밝혀졌다.[63] 다만 1866년경 병인양요 당시 촬영되었다는 흥선대원군의 사진은 곧 흥선대원군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며 촬영 시기 역시 1860년경이 아닌 1880년대 중반으로 밝혀졌다.[64] 비슷한 현상이 현대에서도 일어난다. 북한 김정은이 처음 거론되었을 때 아사히 신문에 실린 엉터리 김정은 사진을 생각해보라.[65] 만약 알레베크의 사진엽서가 민비라면, 신양당측도 그 사진을 똑같이 모사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얼굴을 바꾼 것을 보면, 당시 신양당측도 알레베크 사진이 민비가 아니라는 점만은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즉, 알레베크 사진은 역시 민비가 아니다.[66] 심지어 뒷배경의 주름까지 같다.[67] 조선 궁궐의 아침 일과가 보통 새벽 5~6시쯤 시작되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밤을 샜다는 이야기가 된다.[68]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는 영화인데 정작 청일전쟁 장면은 일본 극우 영화의 필름을 그대로 갖다 붙였다는 게 함정.[69] 단, 해당 만화는 일본의 한국침략을 미화하는 우익적인 사관이 들어간 만화이기 때문에 걸러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70] 이로써 김영애는 명성황후만 3번 맡게 된다. 1940~50년대생까진 명성황후가 김영애의 대표캐릭터로 각인이 되었을 정도였고, 이후 김영애의 연기는 명성황후의 캐릭터를 구축한 하나의 전범으로 꼽혔다[71] 드라마에서는 최명길이 을미사변을 당하지만, 뮤직비디오에서는 이미연이 중년의 명성황후 역까지 맡아 을미사변을 당한다.[72] 최명길의 경우 연장 출연에 반대한 이미연의 대타로 캐스팅 된 것이며, MBC 한미백년에 이어 두 번째로 명성황후 역을 맡았다.[73] 아역 시절이던 1982년 풍운에 출연하여 명성황후 역을 맡았다.[74] 사실상 뮤지컬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