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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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志淵
1864년(고종 1) 11월 30일 ~ 1921년 10월 2일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기
2.2. 애국 · 계몽 운동
2.3. 일제 강점기 활동
3. 친일반민족행위자?
4. 사후


1. 개요


대한제국 때의 계몽 운동가, 언론인이다. 본관은 인동(仁同)[1],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또는 舜紹), 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본명은 장지윤(張志尹).
1905년 황성신문[2]에 주필로서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기고해 유명하다. 구한말에 애국 · 계몽 운동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으나 경술국치 이후 1914년부터 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논설 730여 편이 문제가 되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말년에 시베리아에서 의병활동을 지휘했다는 일본 외무성의 문서가 2009년에 공개되었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장지연은 1864년 11월 30일 경상도 상주목 내동면 동곽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인봉동·성동동 근처)에서 아버지 장용상(張龍相)과 어머니 문화 류씨 류성림(柳成霖)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년 6월에 향시(鄕試) 응제과(應製科)에 합격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으며, 이후에도 과거에 4차례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1894년(고종 31) 2월 식년시 진사시에 3등 683위로 급제했으나# 이 무렵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면서 관리로 임명되지 못했다.

2.2. 애국 · 계몽 운동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을미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 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같은 해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 초안을 짓고 독소를 맡았다.
1898년 4월에는 경성신문을 인수, '대한황성신문'으로 개칭하여 발행에 참여했고 9월에 '황성신문'으로 개편할 때에도 참여했다.
같은 해 10월 독립 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 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 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기자, 바로 다음 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했다. 이 사건으로 11월 21일 투옥되었고 이어 황성신문도 정간되었다.
1906년 1월 석방되었으나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에도 장지연은 구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수많은 교육 활동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애국 부인전'이라는 책을 냈는데 바로 잔 다르크의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초기 신채호처럼 역사적 인물로서 애국 영웅 정신을 고취시키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한국 사상 최초로 잔 다르크라는 인물이 언급된 사례이다.
친일 단체 일진회와 정면으로 대립했던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3]의 간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면서 1년가량 머물렀고 이후 귀국해 경남 진주에서 1910년 한일합방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되기도 했던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다.

2.3. 일제 강점기 활동


그러나 1914년부터의 행적 탓에 논란이 상당하다. 1914년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라는 총독부 인사의 권유로 조선 총독부 어용 신문사인 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친일 한시와 사설 730여 편을 기고했던 것.
친일 전력이 밝혀진 후 관련 연구 학자 대다수와 여론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친일 행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언론 활동을 두고 장지연은 '1. 객원으로 대하고 사원으로 대하지 않는다, 2. 원고 내용은 "일사유사"[4], 종교 풍속에 한정하고 신문사 안이 아닌 밖에서 작성해 보낸다, 3. 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자신도 신문사 활동을 마친다'는 조건에 입각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 매일신보에 발표된 논설이나 작품에는 조선 총독부의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성을 띤 언설이 많다. 이 때문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됨은 물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1918년 12월 1일자 매일신보에의 논설 기고를 마지막으로 1919년 4월 경상남도 양산군을 유람했다. 3.1 운동이 발생했지만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1921년 초에 상기한 생활 습관으로 결국 술병이 들었다. 일본 외무성의 문서에 의하면 1921년 5월 경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경천의 초청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마을인 주우찌하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후 술병으로 인한 병세가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끊으면서까지 치료에 몰두를 했지만, 결국 그해 10월 2일 사망했다.

3. 친일반민족행위자?


장지연이 친일반민족행위자란 주장이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장지연은 없다. 다만 친일인명사전에는 있는데 친일인명사전의 등재기준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인물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선정한(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은 동일한지 궁금합니다'''만약 동일하다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인물을 기반으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동일하지 않습니다. '''위원회는 죄질이 무거운 반민족행위자를 선정대상'''으로 한 반면 연구소는 반민족행위자는 물론 '''부일협력자까지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즉 장지연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등재된 것이 아닌 부일협력자란 면에서 등재된 것이다. 그러므로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선정에선 제외되고 친일인명사전에는 선정된 것이다. 장지연을 비판할 때 친일반민족행위자란 이유로 비판하는 건 엄연히 오류인 셈.
한편 2009년 9월 15일에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장지연이 말년에 시베리아에서 의병을 지휘했다는 일본 외무성 문서를 공개하였다.기사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가 1921년 5월 5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불령단관계잡건 시베리아편'에 의하면 장지연이 ‘경성 매일신보 기자였던 자이지만 김경천의 초청에 응해 도래했다. 주우찌하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라서 그가 부일협력을 했으나 말년에 다시 독립운동가가 되었고 친일파로 단정짓기 어렵다는 학계의 의견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말년을 취생몽사했다는 기록과 증언들도 존재하고 있기에기사 이는 심층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4. 사후


1962년 대한민국 행정부 측이 건국 훈장을 추서했으나 1990년대부터 현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강명관과 재야사학자 이이화 등이 진행한 연구에서 친일 의혹이 제기되어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이에 2010년 12월에는 국가보훈처에서 건국훈장 서훈 취소를 결정했고 2011년 4월 5일 확정되었는데 후손들의 제소 결과 서울행정법원, 서울고등법원에서 서훈을 취소한 기관이 서훈 처분권자인 대통령이 아닌 국가보훈처라는 이유로 무효로 판결하였다. 그러나 결국 2014년 10월 13일 대법원이 국가 보훈처의 서훈 취소 표명은 대통령이 처분을 대외적으로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피고를 국가보훈처가 아닌 대통령으로 지정했어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서울 고등 법원 판결을 파기환송하였다.

[1] 상장군 금용(金用)계 남산(南山)파 17대손 '''지(志)''' 병(炳) 항렬. 인동 장씨 32세.[2] 대한매일신보에도 실렸다.[3] 대한 협회는 대한 자강회를 계승한 단체로, 후에 일진회와 타협해 국권 피탈 후 해산한다.[4] 장지연이 편찬한 조선 시대 중ㆍ하층민들의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