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련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최석련'''
'''崔碩連'''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81년 6월 4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마룡리
<color=#fff> '''사망'''
1938년 9월 1일
평안북도 의주군
<color=#fff> '''종교'''
천도교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석련은 1881년 6월 4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마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안북도 의주군 천도교 대교구장을 맡고 있던 1919년 2월 천도교단 내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자 상경하다가 선천군에서 독립운동계획을 전해듣고 의주로 돌아오다 최동오에게 특사를 파견했다.
특사는 3월 1일 의주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니 천도교인들을 이끌고 의주 읍내로 들어오라는 최석련의 지시를 전달했다. 최동오는 이에 따라 3월 2일 의주읍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의주 인근 7개 군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최석련은 1919년 7월에 최동오를 비롯하여 김의종(金義宗)·신숙 등의 해외 망명을 배후에서 도왔으며, 만주 안동현(安東縣)에 임시정부 연락기관으로 삼산상회(三山商會)를 세우는 등 의주를 거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독립군에 대한 군자금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7월, 그는 군자금 3천여 원을 모집하던 중, 동지 김의종이 일경에 붙잡힐 때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의 지도자로 활동하는 한편 천도교의 항일조직인 오심당(吾心黨)에 관계하다가 1934년 붙잡혔다. 오심당은 1923년 천도교 청년조직의 핵심적 지도자들이 점조직의 형태로 조직한 것으로, 일제가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를 이용하여 일제히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자금 모집 및 조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그러나 1934년 9월 발각되어 당원 230여 명이 붙잡혔고, 당원들은 60여 일 동안 고초를 치러야 했다.
이후 수년간 고문에 시달리다 출소했으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9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최석련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