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오(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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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최동오(崔東旿)
이명
최학원(崔學源), 최동오(崔東五)

의산(義山)
본관
해주 최씨
생몰
1892년 6월 22일 ~ 1963년 9월 16일
출생지
평안도 의주부 월화면 마룡동
(현 평안북도 피현군 용흥리)
사망지
평안남도 평양직할시
매장지
애국렬사릉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3.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2.4. 북간도에서의 활동
2.5. 위기에 직면하다
2.6. 이후의 독립운동
2.7. 해방, 그리고 납북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납북자.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아들은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주범이자 월북자인 최덕신이다.

2. 생애



2.1. 초년기


최동오는 1892년 6월 22일 평안도 의주부 월화면 마룡동(현 평안북도 피현군 용흥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계와 어린 시절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고향인 마룡동에서 서당을 개설해 향리의 아이들을 교육했는데, 이것으로 볼 때 그는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3년 여름, 최동오는 동학에 입도했고 1908년부터 교회 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교회 활동은 손병희를 따라 비밀 운동에 종사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손병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 아니라 의주교회 중진들과의 밀접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교회의 기밀과 관련된 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천도교 포교에도 열성적이어서 불과 1년 사이에 수십 인을 전도해 내어 1910년에 봉훈(奉訓)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최동오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그가 1911년 2월 천도교의 기관지 <천도교회월보>에 기고한 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는 천도교를 천(天)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여 천도(天道)로서 세상을 구원하는 대종교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천도교의 진리에는 유교, 불교, 도교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과 사회는 천도교의 교화를 통해서만 변화될 수 있으며, 천도교는 타락한 세상을 교화를 통해 지상천국으로 바꾸는 종교라고 봤다. 또한 천도교는 천이 부여한 인간의 선한 본성을 보전하며, 아울러 인간의 타락한 성품과 질병 가운데 고통받는 몸을 본래의 상태, 곧 천과 같은 상태로 회복하는 종교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천도교를 '지상천국'의 건설과 '인간성'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종교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이런 점에서 조선 민족 또한 천도교의 교화를 통해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동오는 천도교인의 사명에 대해 "16억 인류와 5대양 6대륙에 천도교를 전파하여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1912~1913년 사이 만주 일대와 중국 관내 지역을 동분서주하며 포교에 매진했다. 그 과정에서 신해혁명 후 건국된 중화민국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며 큰 감명과 인상을 받은 듯하다. 그는 신해혁명을 단순히 봉건왕조를 타도한 공화혁명이 아니라 한족이 만주족의 국가인 청나라를 전복한 민족혁명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민족혁명으로서 신해혁명의 역사적 현장을 경험하고 말할 수 없는 회포와 감상을 가졌다고 밝혔다.
최동오는 이러한 신해혁명을 지켜보고 사회의 변화는 종교적 교화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교훈을 받은 듯하다. 그는 <천도교회월보> 1915년 4월호에 <우리의 본분(吾人之本分)>이란 제목의 글을 게재해 인간의 본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과 몸의 회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성(性)으로는 천의 일을 하며, 신(身)으로는 세상의 일을 해야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종교적인 실천 뿐 아니라 세상의 일인 정치, 사회적 실천 또한 온전히 달성할 때 비로소 천도교의 진리가 성취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논리에 근거해 조선민족을 구원해야 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다만 그는 여전히 천도교인의 본분과 책임은 전 세계와 전 인류를 천도교의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라 하여 강력한 전도주의를 주창했다.
최동오는 신해혁명을 체험한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중국 본토와 만주 일대를 주유하면서 포교활동에 종사했다. 그 결과 1913년 그는 천도교 교훈(敎訓)에 임명되었다. 이후 천도교 중앙종학원에 입학한 그는 고등사범과와 법정과를 졸업하고 늦어도 1915년부터는 의주군 월화면 제 540호 교리강습소의 강사로 활약하면서 면내 교인들의 계몽과 교리 강습에 종사했다. 이후 1916년 강도사로 임명되어 의주 대교구의 중견 인사로 거듭났다.

2.2. 3.1 운동


최동오는 경성의 천도교 중앙총부로부터 1919년 1월 3일부터 2월 21일까지 49일간 특별기도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교회의 두목(頭目)들은 최동오에게 이번 기도가 마지막 기독가 될 것이라고 암시를 줬다고 한다. 이에 최동오는 인근 면, 동의 청년동지 수십 인과 함께 고향의 천도교교리강습소에서 49일 기도를 드렸다. 당시 그는 천도교 지도부가 독립선언서 공표 및 만세시위를 전개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특별기도가 끝나면 뭔가 커다란 사건이 생길 것을 예감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교인 청년들과 함께 '대동청년회(大東靑年會)'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후 의주 대교구장 최석련이 천도교단 내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자 상경하다가 선천군에서 독립운동계획을 전해듣고 의주로 돌아오다 최동오에게 특사를 파견했다. 특사는 3월 1일 의주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니 천도교인들을 이끌고 의주 읍내로 들어오라는 최석련의 지시를 전달했다. 최동오가 이 지시를 전달받은 시각은 2월 28일 밤 10시였다. 최동오는 서둘러 인근 면, 동의 천도교인들과 비밀리에 연락, 접촉했지만, 3월 2일 새벽녘에야 비로소 의주읍내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래서 천도교는 3월 2일에서야 첫 시위를 감행할 수 있었다.
최동오는 최안국과 함께 의주의 남문 밖 시장에서 독립운동의 취지를 연설하고 회집한 군중을 지도하여 시위를 전개했다. 3월 3일에는 중앙의 지시에 따라 기독교와 연합으로 시위를 전개할 것을 합의하고 '독립민회(獨立民會)'를 결성했다. 회장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유여대 목사가 맡고, 부회장은 천도교측인 최안국이 맡았으며, 간사(幹事)에는 기독교 측에서는 안석응이 맡고 천도교에서는 최동오가 맡았다. 3월 4일 양실학교에서 다시 시위를 전개하던 중 헌병대에 체포된 그는 신의주 형무소로 이감되어 한달 정도 수감되었다.
3.1 운동 후, 천도교는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않고 교단의 유지, 발전만을 주장하는 그룹과 독립운동을 계속 펼칠 것을 주장하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이중 전자의 노선을 견지한 그룹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최동오는 천도교단은 3.1 운동 때와 같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여겼기에 이런 상황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는 천도가 허락하지 않는 인면수심의 일본제국주의는 반드시 정의, 인도에 굴복하여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천도교인은 천도와 인도주의에 따라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의 뜻이자 우리의 사명인 독립을 지금까지 실현하지 못했으니 천도교인을 비롯한 2천만 각 개인은 피할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있다면서, 아직까지 독립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3.1 운동 때 함께 투쟁하다 산화한 동지들에 대한 죄일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에 대한 죄이며, 나아가 자신의 신앙의 대상인 천의 뜻을 배반한 죄라고 하였다. 하지만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기엔 일제의 탄압이 심했기에, 최동오는 해외 망명을 택한다.

2.3.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1919년 여름, 최동오는 천도교 포덕 60주년을 기념하여 국외 포덕을 실시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중국으로 향했다. 그는 천도교와 해외의 독립운동세력간의 연대와 제휴에 특별한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당시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한성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그리고 만주의 각종 독립운동 단체들이 난립하는 바람에, 천도교 세력은 연대할 마땅한 대상과 구체적 방략을 정하지 못했다. 결국 이때의 시도는 무위에 그쳤다.
1919년 9월 11일 통합임시정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임정은 천도교에 특파원을 보내 독립운동에 관한 제반사항을 협의하기 위해 천도교 대표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최동오는 1919년 10월 의주와 선천 지역 천도교단의 후원 아래 천도교 대표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되었다. 그는 상하이에 도착한 뒤 먼저 상하이에 체류하고 있떤 천도교인들을 규합한 후 프랑스 조계의 한 주택을 얻고 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안창호와 그 측근들의 주도로 운영되고 있던 <독립신문>에 의연금을 납부했고, 11월 3일에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법무총장 신규식, 재무총장 이시영의 취임식에 천도교 대표로 참여했다. 이렇듯 임정 및 상해 독립운동세력과 활발하게 교섭을 벌인 그는 안창호, 이동휘, 유동열 등과 만나 천도교와 임시정부 사이의 협력에 관한 건을 비롯하여 독립운동 전반에 대해 협의했다. 그 결과 자신을 비롯한 천도교단은 임시정부가 정부로서 온전히 제 기반을 확립하여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도록 협력하기로 했다.
1919년 11월, 최동오는 고일청(高一靑), 이유필, 조병준과 함께 임시정부 의주군 조사원이 되어 의주 지역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등의 실태를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1월 14일에는 임시정부에 입각해 내무부 참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내무부 참사로 재직하면서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가 안창호와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안창오가 최동오와 같은 평안도 출신인 점도 주효했겠지만, 안창호가 주도하던 흥사단과 최동오가 신봉하는 천도교가 윤리적 실천을 중시하는 사상을 추구한다는 점 때문에 서로 협조할 만 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는 1920년 1월 15일 내무부의 소관 업무로 선전위원부를 설치하고 친히 선전위원장이 되어 임정의 선전사업 일체를 주관했다. 하지만 인적자원이 부족해 국내에 파견할 선전원을 구하지 못했다. 이에 최동오는 장경순, 김홍선 등 천도교인을 선전원으로 소개해 안창호의 선전사업을 도왔다. 최동오는 이들을 국내 및 만주 안동현 등으로 파견하여 선전대를 조직하고 오도록 했으며, <독립신문>을 국내외에 배포하기 위한 신문 배포 기관소를 설치하도록 했다.
1920년 초, 안창호는 비행기를 활용한 선전 활동을 적극 모색했다. 그는 비행기를 구입해 국내에 대량의 선전 삐라를 살포하여 임정의 메시지와 명령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자금을 마련할 길이 마땅치 않다 고민하다 최동오에게 20만원을 요청했다. 이에 최동오는 국내교단에 임정의 자금 후원 요청을 전하고 그 뜻을 살핀 뒤 1920년 2월 17일 안창호에게 국내 천도교단에 교섭해 본 결과 어쩌면 장차 준비될 만한 희망이 있다고 전했다. 이후 2월 19일에는 안창호를 재차 방문하여 천도교단의 안전을 도모하고 일의 성공을 위해 비행기 경비 마련의 일은 절대 비밀을 엄수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 이 문제는 일단 자신에게 전임시켜 달라고 했다. 안창호로부터 승낙을 얻어낸 최동오는 장경순을 국내로 파견하여 비행기 구입 자금 20만원의 경위를 의주대교구장 최석련과 선천대교구장 이군오에게 설명하고 후원을 얻어올 것을 명령했다. 아울러 장경순에게 국내에 선전대를 조직하고 오도록 했다. 최동오는 이렇듯 선전 업무에 최선을 다한 공을 인정받아 1920년 3월 4일 내무부 지방국장으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4월 7일에는 안창호에게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면서 국내에 들어간 장경순으로부터 한 10만원 정도 마련되었다는 소식이 있음을 전했다.
그러나 최석련, 이군오와 의주 및 선전 일대의 천도교 중견들은 교회의 운영과 유지상 20만원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20만원 자체가 두 지역 교회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비용인데다 당시 천도교 상황이 반일적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최석련과 이군오는 3.1 운동 당시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활동했던 신숙에게 상하이로 가서 이런 상황을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신숙은 이를 수락하고 신상태와 함께 4월 23일 서울을 출발했다. 천도교단으로부터 신숙의 파견 소식을 접한 최동오는 장경순을 안동현으로 파견하여 그를 데려오도록 했다. 장경순은 신숙, 신상태와 함께 4월 30일에 상하이에 도착했고, 최동오는 5월 4일 안창호와 만나 천도교단의 입장을 전하고 신숙이 천도교로부터 파견되어 왔음을 보고했다. 그러면서 신숙을 만날 때 "우리의 대사"가 머지 않아 이루어질 것을 명확히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5월 7일, 안창호는 신숙, 신상태와 처음으로 만나 임정의 독립운동방략을 설명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행기 구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숙은 국내 천도교단의 입장을 전하며 지금같이 경계가 삼엄한 상황에서 천도교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는 그와 같은 큰 비용을 마련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후 신숙은 최동오에게 교회의 입장을 설명하고 상하이 주재 천도교인들과 향후 운동 방략에 대해 장시간 협의했다. 그결과 관내지역 천도교인들의 독립운동으로 인해 국내 천도교인들이 탄압받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관내 지역에서 독립운동과 교회활동을 분리하여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즉 독립운동은 별도의 정치기관을 설립하여 그 명의로서 활동을 전개하고, 상해 주재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종교기관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정치기관으로 1919년 4월 6일 상하이 주재 천도교인들에 의해 결성된 바 있는 통일당(統一黨)을 계승하기로 하고 통일당의 강령과 당의를 그대로 채택했다.
하지만 최동오는 통일당의 강령과 당의가 미흡하다고 여기고 1921년경 천도교의 교리와 쑨원의 삼민주의를 결합해 통일당의 강령이자 관내지역 천도교인의 항일독립운동의 이념으로서 '삼대주의(三大主義)'를 확립했다. 그가 제시한 삼대주의는 다음과 같다.

1. 사상혁명의 이론으로서 '인내천(人乃天)'의 인본주의(人本主義)

2. 정치혁명 이론으로서 '사민평등(四民平等)'의 민본주의(民本主義)

3. 경제혁명의 이론으로서 '노고근면(勞苦勤勉)'의 노본주의(勞本主義)

그리고 위와 같은 독립운동의 목표를 주도적으로 성취할 통일당의 간부로서 정치부장에 최동오를 비롯하여 총리에 신숙, 경제부장에 김의종, 문화부장에 이영근이 선임되었다. 또한 상하이 천도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천도교 상해성화회실(上海聖化會室)을 설립하기로 했다. 그래서 교인 1명을 국내로 파견하여 최석련, 이군오로부터 임시포덕비 만여 원을 후원받아오게 한 뒤 1920년 음력 4월 5일 천도교 상해성화회실을 임시로 상해 프랑스 조계 보강리에 설치하고 천일 기념식을 거행했다. 당시에 참석한 상하이 일대 천도교인의 수는 약 10여 명이었다. 이후 상해 성화회실은 상하이에 거주하는 천도교 독립운동자를 정치적으로 결집시키고 천도교인들이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20년 5월 11일, 최동오는 안창호에게 임정에 대한 지원 문제로 교인들의 불만이 높으며 임정을 후원하고 있는 교인들이 위험에 빠졌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더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임정을 지원할 수 없으니 은행이나 회사를 설립해 다량의 주식을 발급하여 자금을 수집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안창호는 회사 설립을 명분으로 자금을 모금하여 이를 독립운동에 사용하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니 본인은 찬성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이에 최동오와 신숙은 회사는 회사대로 운영하면서 정부에서 회사로부터 정당한 채권채무관계를 맺어 돈을 빌리면 국민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며 추진을 주장했다. 이에 안창호는 재무차장 윤현진과 상의 후 확답하겠다고 답했다.
다음날, 최동오는 안창호를 찾아가 천도교에서 제안한 회사설립계획의 추진여부에 대해 물었다. 안창호는 윤현진과 상의한 결과 임정에서는 그 계획을 추진할 의사가 있다고 전하면서 최동오, 신숙, 안창호, 윤현진 4자 회담을 갖고 그 구체적 실현을 위해 논의하자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날 최동오를 포함한 4인이 회사 설립에 관해 혐의한 결과, 먼저 회사의 자본금은 200만원으로 하고 주식의 가격은 한 주당 50원으로 정했다. 그리고 제 1회 모금 액수를 50만원으로 하되 그 돈의 반은 최동오와 신숙이 책임지고 모금하고, 나머지 반은 안창호와 윤현진이 마련하기로 약정했다. 또한 그 세부적인 진행방침은 윤현진에게 기초하게 한 후 4인이 다시 합의하여 진행하기로 했다.
5월 14일 재차 협의에 들어갔을 때, 최동오와 신숙은 회사를 둘로 나눠서 천도교측 한 사람과 정부측 사람으로 두고 주식을 수집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안창호는 찬성을 표했다. 5월 15일 네 사람은 대동여사에서 오찬을 함께하며 자금 모집에 관해 다시 장시간 협의했다. 그결과 최종적으로 최동오와 신숙이 천도교와의 협의하에 회사명을 정하고 25만원을 준비하기로 하고, 안창호와 윤현진 또한 25만원을 책임지고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50만원이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 일을 진행하게 되면 일을 자칫 그르칠 수 있으므로 한달 반 이내에 최동오와 신숙 두 사람이 5만원을, 안창호와 윤현진이 5만원을 준비하기로 했다.
최동오는 이 밖에도 국내 천도교 독립운동세력과 임정간의 연락과 교섭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1920년 2월 17일 안창호를 만나 국내에 천도교인들이 청우조관(淸雨朝館)이라는 정치기관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진행하기로 했으니 임정에서 이 단체를 승인, 후원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이에 안창호는 독립운동기관이 조직되는 건 극히 찬성할만한 일이라며 후원 의사를 전했다. 이후 최동오는 2월 25일과 3월 23일 안창호를 만나 임정에서 청우조관의 승인서를 발송해주기를 부탁했다. 또한 그는 임정 내에서 천도교의 권익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는 1920년 5월 1일 내무부조사표 안에 천도교 명예손상에 관한 건이 기입된 것을 보고 내무총장 이동녕에게 삭제를 요구한 일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임정의 사료 편찬을 열람한 뒤 기독교에 관한 일은 자세하고 분량도 많지만 천도교에 관한 일은 불만스러운 점이 많다며 자기가 천도교에 관한 내용을 다시 기록하겠다고 나섰다. 안창호는 이에 찬성을 표했다고 한다.

2.4. 북간도에서의 활동


1920년 5월 말, 최동오는 왕삼덕, 안정근과 함께 임정 특파원의 자격으로 상하이를 떠나 북간도로 향했다. 그는 현지에서 이용과 합류한 뒤 북간도 지방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후 파악된 간도 지방의 현황을 바탕으로 북간도 일대 독립운동단체와 지도자들에게 통보하여 7월 13일에서 15일에 걸쳐 사흘간 북간도지방 각 단체 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7개 안건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간도에 대한민단을 설립하고 조선 국경 방면 대한 무력 공작을 중단하고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며, 대한민단 외에 종래의 정치 단체들을 폐지하고 그 임무를 대한민단에 옮길 것이며, 간도 각 무력단체롤 통합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임명한 사령관에 지휘 아래 군사 행동을 집행하는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해 대한국민회 측은 7개 조항 전부에 대해 찬성을 표하고 즉각 실시를 주장했다. 그러나 독군부사령관 홍범도 등 무단파는 다른 안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제 4항 무력단체의 폐지 및 제7항 각지에 배회하는 무력대의 집결과 일부 무장부대의 해산 등에 대해서는 단체 유지상 동의하기 어렵다는 뜻을 표방했다. 한편 대한군정서 측의 대표자는 대체로 찬동을 표하지만 대한민단이라는 새로운 기관을 설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며, 만약 새롭게 민단을 조직하게 되더라도 그 민단의 운영권은 군정서에서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제 7항의 무장대의 일부 해산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렇듯 주요 단체의 의견이 달랐기에 최동오를 비롯한 임정의 특파원들은 이를 조율하는 데 상당한 애를 먹었다. 그러나 각 단체의 의견 조율에 노력한 결과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결의하게 되었다.

1. 향후 각 단이 군사적 행동을 취할 시 군정서에 연락하고 행동할 것

2. 새롭게 조직되는 대한민단은 북간도 지역 동포들의 단결심을 굳게 하고 독립사상을 선전하여 이를 고취시키며, 중국에 대한 외교상의 원할 등 일반 행정사무를 맡을 것.

그러나 일부 조항에서만 합의를 봤을 뿐, 합의를 보지 못한 나머지 조항들에 대해서는 군정서가 실권을 장악하는 걸 두려워한 나머지 타 단체들이 도저히 승인하기 어렵다며 거부했다. 결국 7월 25일경에 의란구 구룡평에서 제2차 협의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해산했다.
7월 20일, 최동오를 비롯한 정부위원들은 연길현 지인향 의란구 구룡평에서 다시 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 결과 북간도에는 새로 행정, 군사 양 기관을 설치하고 행정기관은 대한민단으로, 군무기관은 동도군정서 및 동도독립군서로 칭하기로 했다. 민단은 북간도 한인의 생명, 재산의 보호와 민심의 지도, 대외교섭 사무등의 행정사무를 통합하기로 하였으며, 단장에는 대한국민회 회장인 구춘선, 부단장에 서상룡을 선출하고, 정부위원 이용을 민단고문으로 하여 임정의 감독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군무기관으로서는 대한군정서를 동도군정서로 개칭하여 서장에 서일, 사령관에 김좌진을 임명하여 4개 대대를 편성하고 홍범도의 독군부를 동도독립군서로 개칭하여 홍범도가 서장과 사령관을 겸임하고, 안정근이 이들 군무기관의 고문이 되어 임정의 명령을 받도록 했다.

2.5. 위기에 직면하다


북간도에서 나름대로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수행하고 돌아온 최동오는 1920년 8월 초에서 9월 초에 상하이로 돌아왔고 9월 4일 밤 대한인거류민단에서 정부요인과 민단직원 및 사관학교 직원, 생도 등 120~130명 앞에서 '간도형편과 상해동포'라는 제목으로 강연회를 가졌다. 그리고 9월 20일에서 25일 사이에 실시된 상해지역의 대한인거류민단 의사회 의원선거에서 피선거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곧 위기에 직면한다. 이는 신숙과 임시정부 인사들이 갈등을 저지른 데서 비롯되었다. 1920년 6월 4일, 안창호는 신숙에게 8월에 미국 의원단으로 구성된 동양시찰단이 상해를 거쳐 북경과 국내 및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천도교단이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신숙은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에 정부 조직을 개설한 후 국민들에게 거족적 시위운동을 전개토록 포고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은 임시정부가 이미 있는데 국내에 또다른 정부 조직을 개설하는 것은 임시정부를 파괴하자는 것이라며 거절했다. 이후 신숙은 몇몇 상해 독립운동가들에게 총독부의 명령을 받고 임정을 파괴하려는 총독부의 밀정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아울러 당시 그에 의해 주도되던 관내 지역 천도교인들도 정부 파괴를 획책하는 세력이라는 비난에 처했다. 게다가 앞서 언급되던 회사 설립 문제가 결국 좌절되자[1], 신숙은 그 책임을 안창호와 임정에 추궁했으며, 임정의 독립운동방략에 대해 비판했다. 그리고 신숙은 미국의원단 내방 시 미의원들에게 천도교와 손병희를 소개하자고 제안했지만, 안창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게다가 신숙은 천도교에서 임정으로 보낸 돈 30만원을 중간에서 착복했다는 추문에 시달렸다. 급기야 안창호는 신숙을 찾아가 30만원의 행방을 물으며, 이 문제로 정부와 상하이의 독립운동자 사이에 불평이 많다는 점을 토로했다. 그 밖에도 독립운동 자금과 관련한 각종 스캔들로 상하이 지역의 독립운동자들에게 수차례에 걸쳐 규탄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숙은 안창호 및 임정과는 더이상 독립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고 여겼다. 결국 신숙은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의 반 임정세력과 연대하여 군사통일회를 발기하고 임시정부가 무능하다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최동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임정 내에서 정치적 입지가 최악 상태로 떨어지자 정치적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종교활동에만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20년 8월말 상하이로 귀환한 뒤 1921년 2월 초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종교 활동에만 전념했다. 거기에 1920년 10월 일제가 간도 참변을 단행하면서 북간도의 독립군단체들이 연해주로 이동하면서, 최동오가 애써 성취한 성과도 무산되고 말았고, 1920년 12월 이승만이 상하이로 온 후 임정의 정쟁이 더욱 심해져 1921년 1월 국무총리 이동휘가 임정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임정은 정부로서의 대표성과 위상에 손상을 입고 말았다.
최동오는 임정의 상황이 좋지 않자 1921년 2월 초 정치 활동을 재개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을 포함하여 임시정부의 외곽에서 활동하던 인물들과 연대를 추진해 이들과 함께 정부 개혁에 대해 논의한 후 교인 이민창 및 박은식, 왕삼덕, 원세훈 등 14인과 더불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그는 선언을 통해 임시정부의 무능과 분열을 비판하고 근본적인 대개혁으로 "강력한 통일정부의 재조직과 결집에 의한 최선의 독립운동방식의 정립"을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최동오는 1921년 2월 10일부터 7일간 감옥에 갇힌 독립운동가들의 건강과 조국의 광복을 위해 상해 지역 천도교인들과 함께 특별기도를 행했다. 그리고 1921년 3월에는 임시 성화회실을 확장하여 전교실을 설립하기 위해 김홍선을 서울에 파견했다. 1921년 4월 4일에는 성화회실에서 천일기념일을 거행했다. 그는 이런 종교적 행사를 통해 외부에서 관내지역 천도교인들에게 쏟아지는 정치적 공세로 힘들어하는 교인들을 격려했으며, 아울러 신숙이 임시정부를 박차고 나가면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등하는 교인들의 단합과 통합을 모색했다. 또한 그는 상하이와 베이징 일대의 천도교인들에게 연락해 곧 도래할 손병희의 생일을 기념, 축하할 것을 제의했다. 그는 손병희의 신수축하회를 통해 천도교인들의 정치적 위상을 재고하길 희망했다.
이후 그는 <독립신문>을 통해 손병희의 생일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생일시 모집 행사를 벌였다. 그리고 천도교인들의 인맥을 동원하여 각 운동그룹의 지도자들을 생일에 초대했다. 그 결과 1921년 4월 8일 손병희의 생일에 임시정부 각 총장 이하 직원과 의정원 의장 및 의원, 아울러 전 국무총리 이동휘 등 80여 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날 기호파의 거두인 이승만, 신규식, 노백린 3인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 이들과 관내 지역 천도교인과의 갈등을 확인시켜줬다.
최동오는 1921년 5월 12일 안창호여운형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연설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5월 19일 오후 7시 상해 한구로 예배당에도 이어진 연설회에도 재차 참여했다. 그는 안창호의 연설이 끝난 뒤 국민대표회의 개최에 찬성하는 이들과 함께 주소와 성명을 기재했다. 이후 5월 25일에 조직된 국민대표회 기성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재무를 담당하여 향후 추진할 국민대표회의 추진 자금을 천도교로부터 후원받기로 했다. 국민대표회 상해기성회는 북경군사통일회의와 협의를 한 끝에 9월 15일 국민대표회의를 개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필요한 7~8천 이상의 비용을 마련할 방도가 없어서 개최는 차일파일 지연되었다.
상해기성회의 최동오와 북경군사통일회의의 신숙은 자금 확보를 위해 천도교인 김홍선, 장경순, 김의종 등을 국내로 파견하여 의주대교구장 최석련과 선천대교구장 이군오에게 자금의 후원을 요청했다. 이에 최석련과 이군오는 한명하, 홍기하, 박승환, 김의종 등과 함께 자금 모집에 나서 최석련이 3천원을 모집하고 이군오가 1만 3천원을 모집했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는 바람에 최석련과 이군오를 비롯해 자금모집에 나선 4인과 국내와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던 장경순, 김의종도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이들에 의해 운영되던 천도교인들의 중간연락기관인 안동현의 삼산상회와 대련에 설치되었던 대신상점도 모두 폐쇄되었다. 이렇게 되자 최동오는 경제적 후원이 끊기고 정치적 영향력의 근원이었던 국내교회와의 단절까지 초래되면서 더이상 관내 지역에서 정치력의 유지와 독립운동의 지속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
최동오와 신숙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다 손병희를 상하이로 망명시키는 일을 논의했다. 손병희는 국내에 광범위한 체계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고 3.1 운동 당시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한 경험이 있으므로 그가 상하이로 오게 된다면 독립운동세력들 사이에 갈등과 정쟁을 종식시키고 결속과 통일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는 손병희의 생일 때 이승만을 제외한 대다수 거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손병희를 칭송한 사례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손병희를 망명시킨 뒤 국민대표회의를 성사시킨 후에는 손병희를 임정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손병희는 병보석으로 출옥 후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 통제를 받고 있었기에 이들의 계획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최동오는 상하이에서 활동하기에 어렵다고 판단하고 상하이 지역 천도교인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그는 베이징에 자리를 잡은 뒤 만주를 잠시 방문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한 뒤 1921년 9월 18일 상하이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독립운동계 인사들의 관심은 국민대표회의가 아니라 태평양, 극동문제와 해군 군축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개최 예정이던 태평양회의에 집중되어 있었다. 최동오는 상하이 도착과 동시에 임시정부가 마련한 외교연구회에 참석하여 외교원회원을 맡아 활동하다 10월 초순에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이후 최동오는 신숙과 함께 '북경전교실'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국외 포덕을 명분으로 하여 베이징 일대에 교회를 설립한 후 천도교 중앙총부로부터 공식적인 인가를 얻기로 했다. 그러면 합법적으로 관내 천도교인의 국내 출입을 꾀할 수 있으며 단절된 국내 교회와의 교통을 회복하고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남형우, 강지산, 이우명 등 관내 천도교인 13명에게 이 같은 계획을 알리고, 그 실현을 도모했다. 이날 모임에서, 최동오는 북경전교실의 총책임자인 전교사로, 신숙은 순회교사로 선정되었다. 이후 '북경전교실 설치의 건'과 '전교사, 순회교사 승인의 건'을 경성중앙총부에 제출했고, 9월에 정식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10월에는 북경전교실 경비보조금 예산표를 마련하여 경성중앙총부에 제출해 매년 1만 8천원을 종앙총부에서 교부해 줄 것을 청구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을 실제로 실현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지원과 관내 천도교인과 국내 천도교인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앙총부 내에 믿을만한 지원, 후원 세력이 확보되어야 하고 그 세력과의 안전한 교섭루트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일제의 탄압 때문에 둘 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동오는 대신에 동경천도교청년회의 방정환, 박사직, 민석현, 박달성[2] 등 인사들과 접촉해 그들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그는 11월 13일에 천진에서 배를 타고 동경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모지 수상경찰서로 호송되었다. 일제는 그가 상해임시정부 지방국장이라 하여 고베 수상경찰서로 이관해 다시 취조했다. 그 결과 그가 임시정부의 선전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18일 밤에 고베수상경찰서 경관의 호송 하에 시모노세키까지 이송해 시모노세키에 출장 중인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붕에게 인도했다. 최동오는 그날밤 9시밤에 시모노세키를 떠나는 연락선으로 경성에 호송되었다. 하지만 그는 일관되게 자신은 천도교에서 중국에 파견한 전도사이며 일본에 간 목적은 천도교 청년지부장을 만나본 후 포교에 대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것이지 그 외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일제는 뚜렷한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23일에 방면했다.
감옥에서 나온 최동오는 중앙총부 및 의정원 의원 등과 접촉했다. 그리고 천도교 의정원회의에 참석해 국외포덕을 주장하면서 북경전교실 설치의 타당성에 대해 설명하고 후원을 요청했다. 이에 의정원은 매녕 보조금 3,600원을 북경전교실에 지급하기로 하고 또 중앙총부에서는 특별히 창립비의 명목으로 2,000원을 후원했다. 최동오는 1922년 1월에 김홍선과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갔고, 이리하여 관내 지역 천도교인들과 국내 천도교단과의 교섭 루트가 확보되었다.
최동오의 이러한 노고로 중앙총부로부터 얼마간의 자금을 지원받은 관내 지역 천도교 독립운동가들은 다시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이 자금은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기에는 너무 부족했고, 설상가상으로 1922년에 지급된 실제 금액은 2,400원에 불과했다. 따라서 국민대표회의 개최자금을 마련할 다른 방안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최동오는 1922년 9월 1일 북경전교실의 유지, 발전에 대하여 논의한다는 명분 아래 교인 대회를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북경전교실을 신축한다는 명분으로 국내 천도교단으로부터 1만 5천원을 지원받기로 했다. 또한 국외포교책임자를 양성한다는 명분 아래 중앙총부와 지방교구에서 천도교 청년 가운데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국외 유학생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
최동오는 이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국내로 가기로 하고 국내로 들어와 1922년 12월 11일 경성에서 열린 제1회 종법사회에 참석해 의장으로 피임되었다. 그리고 중앙총부 종리원에 북경전교실 건축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일반 교인들은 기관 중심으로 추진하기보다는 일본 교인들의 협동으로 함이 더 낫겠다고 했다. 이에 최동오는 이들과 협의한 끝에 12월 23일 오후 1시에 천도교 교당에서 천도교 북경교당 건축기성회를 조직했다. 이날 임시의장으로 이종린을 추대한 후, 그의 사회로 북경교당 건축기성회 취지서 및 간장(簡章)을 마련했다. 이 간장에 따라 본부 위원 7인을 총회에서 선정하고, 본부위원들로 하여금 각 군마다 2인 이상의 위원을 선정하기로 했다. 이날 본부위원으로 나인협, 정광조, 김병준, 권병덕, 이인숙, 김옥빈이 피임되었고, 위원장으로는 이종린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기타 경영방침은 이들 위원들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이날 입회원은 2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최동오는 성금을 조성하기 위해 각지로 순회강연을 떠났다. 그가 얼마나 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숙의 회고에 따르면 '다소의 자금'이 합법성을 띠고 송금되면서 국민대표회의 소집 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이토록 고생한 끝에 1923년 1월에 열린 국민대표회의는 반년간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 끝에 파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2.6. 이후의 독립운동


최동오는 국민대표회의가 허망하게 끝나버린 뒤 창조파에 속하는 김규식 등 30인과 함께 연해주에서 신정부인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을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일제와 갈등을 빛는 걸 원치 않았고, 결국 조선공화국은 소련의 압박으로 해산당했고 그는 1924년 3월 연해주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만주로 향한 그는 만주 일대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김동삼, 현익철, 김이대(金履大), 김원식(金元植)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다. 또한 1926년에 길림성 화전에 위치한 화성의숙 숙장을 맡았다.
바로 이 시기에 김일성이 화성의숙에 입학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최동오는 김일성을 자기 집으로 불러 밥을 먹이는 등 마치 아들 돌보듯 아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후 고루한 민족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화성의숙에서 중퇴했다고 한다. 그러자 최동오는 대단히 노여워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고 한다.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 아무튼 꼭 성공하게”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이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교정에서 선생님은 떠나는 제자를 붙들고 생활에 교훈이 될 좋은 말씀을 퍽이나 오랜 시간 많이 들려줬다. 그 어린 제자는 그날 선생님의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어 드리지 못하고 뒤돌아선 것이 두고두고 가슴이 아팠다.”

이후 최동오는 1927년 11월 길림으로 가서 그 지역 교민들을 위한 길림한교문제연구회(吉林韓僑問題硏究會)를 조직하고 그 대표가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8년 4월에는 김동삼(金東三)과 함께 정의부(正義府) 대표로 길림에서 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와 통합할 것을 목적으로 3부통합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11월 3부 통합운동의 결과로 조직된 국민부(國民府)의 중앙집행위원 및 외교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으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조직되자 중앙위원 겸 국제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1931년 7월 2일 만보산 사건이 벌어지자, 최동오는 길림한교만보산사건토구회(吉林韓僑萬寳山事件討究會)를 조직하여 중국관민과의 교섭 및 사건의 실정조사를 진두지휘했다. 9월 13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해 만주를 침략하자, 그는 이듬해 11월 관내로 이동해 베이징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유동열, 현익철, 양기탁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활동을 지속했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임시정부로 복귀해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1935년까지 재임했으며, 1935년 7월에는 김원봉,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으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지만 서로 뜻이 맞지 않자 곧 갈라섰다.
1937년 지청천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재건한 그는 한국국민당과 합당해 한국독립당 창당에 가담하여 상무위원 겸 비서주임을 맡았으며, 1939년 11월에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42년 10월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의 감사로 선임되었으며,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재직 중에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작전권이 중국에게 귀속되는 것을 조건으로 중국내에서의 군사활동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광복군행동9개준승(光復軍行動9個準繩)을 취소하도록 제안하는 등 활발한 의정활동을 폈다. 1943년에는 임시정부 법무부장에 재임명되어 1944년까지 활동했으며, 이후에도 한국독립당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충칭에서 8.15 광복을 맞이했다.

2.7. 해방, 그리고 납북


최동오는 1945년 11월 3일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게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후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을 맡았고, 그해 7월 좌우갈등을 극복하고 한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좌우합작위원회의 우측 위원으로 활동했다. 12월 과도입법의원이 구성되었을 때는 관선의원으로 뽑혀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1948년경 유엔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자, 그는 이를 막기 위해 김구, 김규식과 함께 1948년 4월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김일성은 옛 스승인 최동오를 자택으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북연석회의는 김일성 등 북한 정권의 요식행위였을 뿐이었고, 남북 분단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후 서울에서 거듭된 실패에 좌절하고 있던 그는 6.25 전쟁 발발 후 서울이 점령되자 인민군을 앞세운 김일성의 '초청'을 받고 여러 인사들과 함께 북으로 가게 되었다. 최동오는 북으로 모셔진 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회의 간부로 활동하고 장관급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이렇다할 활동은 하지 않고 13년간 조용히 지내다 1963년 9월 16일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매장되었다.
그는 납북 행적과 아들 최덕신의 월북 행위 때문에 독립운동가로서 인정받지 못하다가 1990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 회사 설립 자본금으로 쓸 예정이던 50만원을 결국 모으지 못했다.[2] 독립유공자 박달성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