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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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신숙(申肅)
아명
신연길(申連吉)
이명
신태봉(申泰鳳), 신태련(申泰鍊)

강재(剛齋), 시정(是丁), 치정(癡丁)
본관
평산 신씨
생몰
1885년 음력 12월 29일 ~ 1967년 11월 22일
출생지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매장지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천도교 신자가 되다
2.3. 독립운동
2.4. 상하이
2.5. 만주
2.6. 이후의 독립운동
2.7. 광복 이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천도교 신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신숙은 1885년 음력 12월 29일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에서 신석범(申錫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연길(連吉)이고, 열 두살에는 태봉(泰鳳), 스물 한 살 때에는 태련(泰鍊)으로 바꾸었다. 신숙(申肅)이란 이름은 1920년 4월 국외로 탈출하면서부터 사용했다. 그는 4대 독자로, 7살때 천자문을 가르치던 조부가 한자 밑에 단 한글을 보며 뜻을 풀이하는 것을 보고 사흘 만에 한글을 완전히 터득했을 정도로 총명한 아이였다고 한다. 12살 때는 가평에서 명망이 높던 한학자 이규봉(李圭鳳)의 문하에서 배웠다.
신숙은 16살 때 가평군 군내면 약정대리(約正代理)가 되었고, 18세에는 외서면 약정(約正, 지금의 면장)을 거쳐 가평군 서기로 근무했다. 1903년 4월, 그는 19살의 나이에 의병장 최도환의 둘째 딸 최백경(崔百卿)과 혼인했다. 그는 평소 사색하기를 좋아했고 세상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무렵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가르치며 보국안민의 대의를 실천할 것을 촉구하던 동학이었다.

2.2. 천도교 신자가 되다


1903년 12월, 신숙은 동학에 입도하고 이 사실을 부모에게 고백했다. 부모는 나라가 엄히 금지하는 동학에 가담한 그가 죽을까봐 눈물로 말렸고, 그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기 어려워 배교한 것처럼 행동하며 조용히 지냈다. 이듬해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동학교도들은 '진보회'를 조직한 뒤 일제히 두발을 자르고 서양식 의복을 착용하며 개화운동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신숙은 이 소식을 듣자 자신도 가담하기로 결심하고 1905년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로 올라온 신숙은 경무청에서 세운 경무학교에 입학하여 3주간 훈련을 받고 순검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순검으로 재직하면서 대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야학으로 법률도 전공했다. 경무학교 특과생에 당선되어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당국이 승진 약속을 지키지 않자 순검을 그만두었다. 이후 그는 <국민신보> 기자로 취업했지만, <국민신보>가 친일적 성향을 보이자 반년 만에 사직하고 1907년부터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취업해 4년간 근무했다.
이 시기 애국적 지식인들은 민족 계몽을 위해 학교를 설립해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도 여기에 동참해 인쇄국에 근무하면서 김남수(金南壽)․김남규(金南奎) 등과 함께 청파동에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을 맡아 육영사업에 진력하면서 애국단체를 찾아가 강연을 하는 등 구국활동을 전개했다. 훗날 천황을 노린 의거를 단행한 이봉창이 문창학교 출신이다.

2.3. 독립운동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신숙은 동지 정한교와 함께 동학 신도였으나 일진회에 가담한 뒤 매국행위를 벌이는 이용구를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단도를 가슴에 품고 기회를 엿봤다. 그러나 이재명이완용 암살 미수사건이 벌어진 후 당국의 경계가 강화되자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던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단행되었을 때, 그는 인쇄국에 강제 구류되어 조약문과 순종의 칙유문을 교정해야 했다.
이후 신숙은 천도교종학강습소 강사, 천도교종앙총부 도사실 서계원을 거쳐 1914년에는 천도교 대구대교구장, 1917년에는 중앙총부 대총사 종법원 겸 의사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1919년 1월, 고종이 일제와 매국노들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조선 전역에 퍼졌다. 이에 신숙은 만세시위 운동계획에 가담하고 2월 27일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사장 이종일의 지휘 아래 김영륜과 함께 밤새도록 인쇄한 2만 매의 독립선언서를 수레에 넣고 그 위에 석탄을 담아 석탄수레로 위장하여 교동 이종일 사택으로 운반하여 전국 각지에 이를 배포했다.
이후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을 때, 그는 태화관 입구 중국요리점에서 동지들과 함께 술을 나누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일시 갇혔다가 자신이 요리점에 찾아온 평범한 손님이라고 진술한 것이 통해 훈방 조치되었다. 이후 신숙은 만세운동을 지원하는 동시에 의친왕과 김가진(金嘉鎭), 전협 등이 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했다가 일시적으로 체포되었고, 5월 1일에 다시 헌병대사령부에 체포되어 혐의를 부인했다가 3차례나 지독한 고문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었다가 수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국내에선 더이상 독립운동을 제대로 펼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해외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2.4. 상하이


1920년 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천도교중앙총부에 천도교 대표 한 사람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자, 신숙은 선천교구장 이군오(李君五)와 의주대교구장 최석련 등을 만나 상의했다. 이들은 이미 최동오(崔東午)․김의종(金義宗)․이민창(李民昌) 등을 만주로 보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신숙은 두 사람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출국하여 활동하라"는 권유를 받고 4월 23일 극비리에 신상태(申相泰)[1]와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만주에서 비밀연락장소인 삼산상회(三山商會)에 들어가 한동안 은신했다가 상하이에서 온 장경순(張敬順)의 안내로 영국인이 경영하는 상선을 타고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신숙은 안창호를 만나 만주 지방에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한 개척회사를 설립하자고 제의했다. 안창호가 이를 승낙하자, 신숙은 몇몇 동지를 국내와 대련으로 파견해 자금 2백원을 마련하게 했다. 그러나 대련으로 보냈던 동지가 체포되면서 모든 계획이 발각되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이후 신숙은 최동오, 김의종, 김홍선, 장경순, 이민창 등과 함께 천도교상해전교실(天道敎上海傳敎室)을 설치했고, <천도교사실(天道敎事實)>이란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천도교 포교활동에 진력했다. 이와 함께, 그는 천도교의 이념에 입각한 통일당을 조직했다. 통일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국민의 마음과 힘을 통일시켜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신시대 신이상에 기초한 신국가를 건설한다.

둘째, 인본주의를 창명하여 구천지 구사회를 신천지 신사회로 개조하고 조선적 신문화를 세계에 건설한다.

셋째, 전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강권을 배제하고 세계의 대동을 실현한다.

넷째, 산업 및 교육의 새로운 설비를 도모하고 인류공동생활의 행복을 증진한다.

통일당은 총리에 신숙, 정치부장에 최동오, 경제부장에 김의종, 문화부장에 이민창을 각각 선임했다. 이즈음 만주 각지에 무수한 독립단체가 난립하여 서로 갈등을 빛었다. 신숙은 이들을 통합시켜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0년 9월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가서 신채호, 박용만 등과 더불어 군사통일촉성회를 발기시켰다. 이후 1921년 4월 노령, 북만주, 하와이 및 국내 등지에서 8개 단체의 대표가 베이징에 모여 서직문(西直門) 밖 삼패자화원(三牌子花園)에서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했다. 통일당 대표로 참석한 신숙은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박용만, 강구우(姜九禹)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군정부(軍政府) 구성을 시도했다. 또한 신성모(申性模), 황학수 등과 함께 통일당의 대표로서 당시 미진한 활동을 보이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문에 서명하기도 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때 신숙은 국민대표회의 주최 순국선연추모행사 준비위원과 회규기초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월 31일 개막식에서 안창호, 김마리아 등과 함께 연설하고 의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는 창조파의 중심인물로서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국민대표회의를 독립운동을 전반적으로 인솔하는 최고기관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를 해체하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사수하려는 개조파간의 극한 대립으로 인해 별다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5개월간 갑론을박하다가 결국 해산되었다.
1923년 6월 3일, 창조파는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라는 독자적인 정부를 발족시켰다. 신숙은 이 정부에 가담해 외무위원장 김규식, 군무위원장 지청천, 재무위원장 윤덕보, 경제위원장 김응섭과 더불어 내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원조를 받아내기 위해 1923년 8월 20일 김규식, 지청천, 윤해, 원세훈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코민테른 동양부장 대리인 파인블크를 비롯한 소련 관계자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 끝에 원조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하자, 국내 정치문제로 외국의 사정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진 소련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25년 3월 만주 길림으로 돌아왔다.

2.5. 만주


그가 만주에 이르렀을 무렵, 만주의 독립세력은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 분리되었고 국제공산당과의 교섭도 원활하지 않아 효과적인 독립운동이 어려웠다. 이에 신숙은 독립운동은 일단 접어두고 천도교의 포교사업에 전념해 액목현 교하에 정착하여 천도교납법구총리원(拉法溝宗理院)을 설립하고 새로운 운동방략을 모색했다. 이듬해, 그는 가족들과 하얼빈에서 재회했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하얼빈, 이도하자 등에 있는 중국인 농장에서 생활하다가 1927년 2월 이도하자 부근의 송봉산에 정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신창학교(新昌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는 한편, 현지 한인농장을 연합하여 자치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8년 1월, 신민부의 민정위원장 최호(崔顥)가 찾아와 신민부․정의부․참의부의 통합을 위해 신민부의 전권대표로 활동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신숙은 이를 수락하고 신민부 민정위원 자격으로 삼부통합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 7월 중동선 위하현에서 신민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이 창당했을 때, 신숙은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 등 3대 강령과 정치이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며, 한국독립당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석권하고 1932년 3월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국시켰다. 이에 한국독립당은 중국군과 연합해 항일연합작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신숙은 한국독립군 참모장 자격으로서 남대관(南大觀)과 함께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호로군연합사령부(護路軍聯合司令部)와 접촉하여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합의했다. 한국독립군은 길림자위군 중로연합군(中路聯合軍) 제3군 독립영으로 편제되었고, 신숙은 참모직을 맡았다. 이어 한국독립군은 중국구국군 보병 제8여단 23단의 시세영(柴世榮)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토일연합군(中韓討日聯合軍)을 결성하고 결박호, 팔도하자, 동경성, 양모림,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공세와 한인사회의 와해, 그리고 동북항일의용군 일부부대와의 갈등 등 여러 악재가 터지자, 한국독립군은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숙은 만주를 떠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남기를 원하는 40여 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오상현 사하자의 자치단장 심경산(沈慶山)의 도움으로 한인 농촌에 분산 주둔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그는 중국정부 고위층과 면담을 추진해 독립군을 유지하고자 노력했고, 1933년 2월 김상덕(金尙德)과 함께 남호두를 출발, 4월 초 장춘을 거쳐 봉천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국내로 잠입하여 천도교 중앙총부의 동지들로부터 재정 후원을 받은 뒤 안동, 대련, 천진을 거쳐 5월 말에 상하이에 돌아왔다.

2.6. 이후의 독립운동


신숙은 상하이에 돌아온 뒤 신한독립당의 윤기섭, 신익희 등과 만나 한국독립당과의 합당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이들의 협조를 받으며 20여 명의 기자를 초청해 한국독립군의 활동 상황을 발표했다. 그는 난징으로 가서 중국정부의 후원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 있다가 왕덕림(王德林)이 유럽을 순방하고 상하이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상하이로 달려와 이범석의 소개를 통해 왕덕립 부대의 부대장 공헌영과 면담해 그로부터 6백원의 후원금을 얻었다. 또한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가지고 온 김규식으로부터 5백원을 지원받았으며, 이를 베이징으로 가져가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에게 전달했다.
1933년 11월, 신숙은 베이징에서 가족과 만났고 거기서 1935년까지 거주했다. 그러다가 1935년 말 만주에서 자신을 찾아온 장남 신원균으로부터 노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로 가다가 12월 4일 영구 항구에 도착한 배에서 내리던 중 일본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후 보름동안 취조를 받고 길림 일본 영사관 경찰서로 인계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자신이 일개 중국인이라고 끝까지 주장한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끝내 노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이후 일본 형사들의 감시 때문에 더이상 독립운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길림에서 아이들의 교육과 교민들의 생활 개선에 집중했다.

2.7.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으로 조선이 해방되었지만, 8월 19일부터 소련군이 만주에 진주하면서 치안은 극도로 혼란했다. 이에 신숙은 이도하자에서 한인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이들의 귀국을 돕는 일을 적극 추진했다. 그는 길림성 동영학교(同榮學校)에서 개최된 길림조선인회 결성대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어 소련군정 하에서 밀려드는 피난민을 수습하고 귀국 희망자들을 알선했다. 또한 소련군이 동포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여성을 겁탈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단신으로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대책을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신숙은 또 장춘에서 남북만주 지역 한인들이 교포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한인통일기관이라 할 수 있는 동북한국민회연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전체 교포에게 보내는 담화문을 발표해 합심해서 난국을 타개해 나갈 것을 호소했다. 또한 1946년 8월 봉천에서 개최된 동북한국교민회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난징과 베이징 등지의 중국정부 기관을 오가며 한인의 귀국을 위해 노력했으며, 천진의 미군정 출장소를 방문해 한인의 귀국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1946년 12월 한반도로 돌아온 신숙은 중국에 남아있는 한인들의 귀국을 위해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등과 협상했다. 그는 1947년 3월 동북한인교민대표 자격으로 '재만 동포의 구출 및 재산반환 교섭'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과도입법의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4월엔 김규식의 권유로 입법위원이 되었고, 한인동포 귀환을 위해 조사단을 구성했다. 1947년 6월, 신숙은 천도교보국당 대표로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8년 3월에는 민족자주연맹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4월 11일에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연락원 자격으로서 평양에 가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남북 분단 저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신숙은 천도교중앙총부 도사로 추대되었고, 만화회(萬化會)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서 종교활동에 진력했다. 이후 6.25 전쟁 시기 부산으로 피신한 그는 천도교보국연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신한 천도교인 수습과 조직 발전을 위해 각 지방에 지부를 조직했다. 그리고 1957년 동학회가 조직되었을 때 고문을 맡았으며 1960년에는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 3월 천도교 이념에 입각한 정당으로서 동학당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대표책임위원으로 추대되어 창당을 준비했지만 실제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에는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부의장으로 추대되었고, 과도내각이 들어서면서 실시된 7.29 총선 때 철원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그는 갑작스런 중풍에 걸려 몇년간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완치되지 못하고 1967년 11월 22일 서울 강북구 가희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83세. 그의 유해는 강북구 우이동의 북한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신숙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신상태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