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규(영화 감독)

 

1. 개요
2. 연출작 일람


1. 개요


1911년 12월 10일 ~ ?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영화 감독이었다. <심청>이나 <도생록> 등 괜찮은 영화들을 많이 만들기도 했던 감독이지만, 일제가 전시체제에 돌입할 당시 그에 편승한 '친일' 영화들을 여러 편 제작한 불명예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영화가 가미카제 특수부대의 미화와 내선일체를 강조한 '사랑의 맹서'(1945년 작)인데, 한 때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에서 이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었다. 또한 <집없는 천사>(1941)라는 영화는 다이쇼 말기 발령된 조선감화령 등으로 대변되는 조선총독부의 조선내 부랑아/고아 관련 정책 과 '일제신민으로서의 국민총화'를 종용하는 후반부의 부분으로 인해 이 역시 일본 제국의 프로파간다성향이 진한 영화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일본제국 프로파간다 관련만 제외하면 일반적인 드라마영화로는 나쁘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참고로 출연진중에 문예봉도 있다.
해방 이후, 일제강점기때 행적에 대해 후회하는 의미의 영화를 찍었는데, 대표작으로 1946년 제작한 <자유만세>[1]가 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 구속된 적이 있다. 6.25 전쟁때 납북당해 그 이후 행방불명 되었다.
한편, 그의 부인 김신재는 1983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미국에서 1998년 사망하였다.
여배우 복혜숙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그의 밑에서 연출부로 일했었던 신상옥, 정창화, 홍성기 감독은 최인규에게 욕을 얻어 먹고 구타를 당하는게 일이었으며[2], 최인규가 여배우들의 뺨을 때리는 일도 일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최인규는 그의 부인 김신재에게 까지 폭력을 사용하였는데, 한 번은 김신재를 2층에서 떠밀어 추락 시키는 바람에 김신재의 창자가 파열 되기 까지 했었다고 한다.
한편으론 기계를 매우 잘 다뤘고, 촬영 장비들에 대한 욕심과 열정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신상옥의 회고에 의하면 촬영을 위해 미군 부대에서 빌린 카메라를 촬영이 끝난 후 바로 돌려주지 않고, 카메라를 분해하여 뜯어본 후 그대로 다시 조립해서 카메라의 구조를 파악한 후 반납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흠좀무한 일화가 많은데, 신혼여행을 가던 도중 타고난 자동차가 고장이 나자 본인이 직접 수리하여 고쳐 타고 갔다는[3] 일화가 있고, 심지어는 영화를 편집하는데, 필름에 자신의 지문과 땀선이 남는다고 병원에 가서 손의 지문과 땀선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image]
캐리커쳐에서 최인규(왼쪽). 오른쪽은 같은 영화감독으로 윤봉춘인데, 이 분은 영화감독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셈.(...)

2. 연출작 일람




[1] 해방 후 제작된 첫 번째 극영화다.[2] 정창화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비슷한 증언을 한다.[3] 물론 그는 자동차에 대해 전혀 아는게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