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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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申相玉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1926년 10월 18일, 함경북도 청진시 출생. 한때 함경북도 회령시와 경성군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함경북도에 있는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1945년에 도쿄예술대학을 중퇴하였다.
본관은 평산 신씨. 여담이지만 현대의 평산 신씨 중에서는 항렬이 꽤 높은 편이다(신익희의 동생 뻘이다.). 지금 살아 있는 장남 신정균(1963년생)이 균(均)자돌림.
2. 활동
해방 후 1946년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한 적이 있었고, 1948년 영화 '희망의 마을'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 이듬해 1949년 영화 '여성일기'의 미술감독을 맡았고 이어 같은 해 1949년 영화 '파시'로 영화 조감독으로 데뷔하였으며 1952년에 16mm 영화인 '악야'라는 작품으로써 본격적인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배우였던 부인 최은희와 1953년에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으며,[3] 양자인 신정균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인지도는.....
중간에 배우 오수미와 사귀게 되면서 아내인 최은희와는 이혼했으나 최은희가 1978년 1월 14일에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자 그녀의 행방을 찾다가, 그 역시 같은 해 7월 19일에 홍콩에서 납북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항목 참고.[4]
다행히 북한에서도 영화 활동을 이어 나갔다.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면서 '소금', '불가사리' 등의 영화를 제작했다. 1960년대 이래로 북한영화의 소재가 체제선전이나 계몽성 코미디, 첩보물 등 장르가 편중되어있었던 이유도 있고 무엇보다 재미도 있었기때문에 북한 영화계와 인민들에게 신성한 충격을 줌과 동시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고, 김일성, 김정일 부자도 흡족해할만큼 작품성도 뛰어나서 해외에서도 상을 탈 정도였다. 그러다가 1986년 3월 13일 최은희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도중,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했다.
그리고 1987년 11월 29일에 김현희가 일으켰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다룬 반공 영화인 '마유미'를 대한민국 복귀작으로 제작하여 1990년에 내놓았다. 이 때 김현희와 도플갱어급으로 닮아서 캐스팅한 배우가 당시 무명이었던 김서라. 미국에서 닌자 키드 아동 액션 영화를 제작 하였다. 당시 감독은 전 터틀타웁. 1994년에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지냈다. 같은 해에 정치 스릴러 증발이 비경쟁 초청되었다. 2000년에 미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추천하는 한국고전영화 #
3. 사망
이후 간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2006년 4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가현리 소재의 천주교 공원 묘지다.
4. 연출작 일람
임권택 감독의 경우처럼, 워낙 연출한 작품이 많아서 대표작만 추려도 수십편이 넘는다. 연출을 하였지만 크레딧에 넣지 않은 경우도 부지기수. 이하 목록은 나무위키에 항목이 작성되었거나 그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 경우만 모아놓은 것이다.
- 1961년 성춘향
- 1961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1962년 열녀문(영화)
- 1964년 벙어리 삼룡이
- 1964년 빨간 마후라(영화)
- 1968년 내시
- 1969년 내시 2
- 1973년 이별(영화)
- 1985년 불가사리(영화)
- 1990년 마유미(영화)
- 1994년 증발(영화)
[1] 한국영화감독사전에는 1925년 10월 8일 생으로 기록돼 있다.[2] 이 중 둘은 오수미 소생이다.[3] 불임인 관계로 친척조카를 입양하였다. 아들 신정균은 신상옥의 사촌의 아들인 당조카이고, 딸 신명희는 육촌의 딸인 재종질녀. 그 시대에는 충분히 있을 법 했던 이야기다. 훗날 두번째 부인인 오수미 사이에 아이가 생겨 최은희가 불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4] 오수미는 신상옥이 납북되자 홀로 신상옥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들을 키우다가 유명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했으나 1992년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이후에 신상옥과 최은희는 재결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