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북위)
崔浩
? ~ 450년
청하(淸河) 최씨 출신으로, 5세기 중엽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말기의 인물이다.
아버지인 최굉(崔宏)은 북위 초기에 제도의 정비 과정에서 지휘자 역할을 하였으며, 태조(太祖) 도무제(道武帝) 때 정책 고문을 맡았다. 최굉은 북위 태종(太宗) 때 유일한 중국 한족 출신의 대신이었다.
최호는 유학, 사학, 서도, 천문, 술수 등에 능하여, 어린 나이에 직랑(直郞)으로 임명되었으며, 북위 태무제 시기인 431년에 한족이 될 수 있는 최고의 관직 사도(司徒)에 임명되었다. 최호는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20년 동안 북위 조정에서 중요한 업무를 당담하였다. 또 그는 도사 구겸지를 천거하여 도가를 숭상하고 태무제의 폐불 정책에 찬동하며 불교를 억제했다.
그러다 449년에 북위의 국사 편찬 작업의 총책임을 맡았는데, 이 작업은 한인관료들이 주관한 편찬 사업이었다. 사서의 편찬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그가 완성한 북위의 국사 30권은 그 형식상 편년체에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따랐으며 국사를 편찬할때 가감없이 편찬해서 북위 창업과정에서부터 당시까지의 내용을 숨김없이 표현하였고 여기엔 북위 왕조가 중화문명을 받아들이기전 이민족으로서 야만적인 풍습 그리고 신조들을 서슴없이 적어놨다.
이렇게 다 적은거 자체는 나라의 역사를 가감없이 상세히 적었다는 좋은 평가를 내릴만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대로에 돌로 된 비석으로 떡하니 새겨서 북위 선비족 황실의 치부를 대놓고 일반 백성들이 길가에서 그냥 볼 수 있도록 만천하에 공개해 버린것(...)''' 당시 황제인 태무제와 선비족 귀족들이 이를 좋게 볼 수 없는게 당연했고[1] 결국 최호의 일족과 내외손 관계에 있었던 화북 한족 귀족 128명이 함께 숙청되었으며 최호의 집안인 청하 최씨뿐만 아니라 범양 노씨, 태원 곽씨, 하동 유씨 등 최호의 친척 한인 사족들이 죄다 화를 입었다.[2] 이를 일명 '국사필화사건'이라 한다.
안 그래도 최호는 태자와 관원 문제로 다투기도 하는 등 신하로서는 위험한 행동을 했다. 또한 유송을 정벌하는걸 반대하고 오로지 북하, 유연 등 오랑캐 국가만 정복하길 주장한 것 등 그가 냈던 계책들은 전부 한족의 입장에서 한족의 안위만을 살피는 계책이었다, 또 최호는 북방의 사족대성(士族大姓)으로 성족문제(姓族門第)를 구별할 것을 주장하면서 오등봉작의 회복을 기도하여 한인 사족 세력을 발전시키려고 했는데, 이것이 북위 선비족 고위층들과 충돌을 야기했다. 상황이 이랬으니 북위 황실 입장에선 이들이 한인 명문 귀족이랍시고 겉으로만 충성하고 속으로는 지배층인 황실과 선비족들을 더러운 오랑캐로 깔보며 대역죄로서 능멸하려 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호를 비롯한 북위 최고 한인 문벌사족들이 주살되었던 이 사건의 이면엔 호족과 한족 관료 사이의 종족적 대립, 불교와 도교의 투쟁, 통치계급 내부의 권력투쟁 등이 깔려 있었다는 시각이 있다.
한편 태무제는 최호를 죽이고나서 한족 국가인 남조 유송을 정벌하러 갔으나 군량 부족으로 후퇴했고 도중에 유송의 대신 장질이 지키고 있던 우이성을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때의 남정에서 군사의 절반을 잃는 등 큰 손실을 보았다. 이전까지 최호의 조언을 듣고 싸워서 연전연승하던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결과였고 이는 최호의 군사적 식견이 매우 뛰어났다는 걸 방증한다. 그는 북조를 북위가 통일하게 만들어 준 북위 역사상 최고의 책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