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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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초대 황제. 탁발규는 본래 국호를 위(魏)라고 공표했지만 이후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난 후부터 오늘날까지 동위와 서위를 구분하는 것처럼 다른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위라고 불린다. 묘호는 열조(烈祖)였으나 이후 태조(太祖)로 바꾸었다. 시호 또한 본래 선무황제(宣武皇帝)였으나 도무황제(道武皇帝)로 바꾸었다.
남북조시대의 황제답게 시호인 도무제(道武帝)보다 본명인 탁발규(拓跋珪)로 자주 불리는 편이다. 실제로 인터넷에 탁발규를 치면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도무제보다는 탁발규라고 부른다. 비슷한 경우가 삼국시대의 유비나 손권. 생전에는 화북 통일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후 북위의 2대 황제 명원제와 3대 황제 태무제가 그의 뒤를 이어 정복 사업을 계승한 결과, 북위는 마침내 화북을 통일하게 된다.
탁발규는 화북 통일에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2. 특징
탁발규는 전진에게 멸망한 대나라의 후손으로 전진이 비수대전에서 참패로 무너져 패망의 길을 걷게 되자 탁발규는 이 틈을 타서 대나라 왕을 자칭하고 자립하니 이때 나이가 겨우 '''16세'''였다. 이후에는 끝내 화북에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고 후대에는 아들 탁발사, 손자 탁발도가 끝내 화북을 통일해 화북에 패권을 잡았으니 여러모로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나라 왕을 자칭해 자립했을 때 현대 기준으로 중학교 3학년인 16세였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거기에다 한나라의 상제나 소제처럼 섭정도 아닌 독립하여 직접 나라를 통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16세와 이때의 16세를 같다고 보면 안 된다. 이때 16세면 충분히 섭정 없이도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나이다. 당시에는 50대도 충분히 노환으로 죽을 수 있는 시기였다. 거기에다 탁발규는 당시 다름아닌 대나라 왕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의 손자였고 전진의 의해 빼앗긴 옛 영토를 되찾는다는 명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손견의 아들 손책의 경우 191년 아버지 손견이 황조의 함정에 걸려 죽고 장남 이었던 손책이 집안의 수장으로 가문을 이끌었는데 이 때 손책의 나이는 겨우 17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손책은 가문을 섭정 없이 잘 이끌어 냈다. 이 말고도 이런 경우는 수 없이 많다. 당장 아버지 손견과 동생 손권만 해도 어린 나이에 집안을 이끌었다. 이렇듯이 이때의 나이를 지금의 나이와 같게 보면 안된다. 이때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성인취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났으니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본래 부견은 전연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을 무너뜨려 오호십육국시대 최초로 화북을 통일하여 나라를 발전 시켰으나 오호십육국시대의 최고의 정치가이자 책사로 손꼽히는 왕맹이 죽자(삼국시대를 예로 들자면 유선이 제갈량을 잃은 것이다.) 천하통일의 야망을 꿈꾸고 무리하게 동진으로 출진했다가 나라가 몰락의 길을 걷는 꼴이 되어 버렸다. 이 덕분에 탁발규는 옛날 전진의 의해 무너졌던 대를 부활시키고 화북의 패권을 잡았다. 한 마디로 비수대전이 없었다면 부견이 천하통일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고 그러면 탁발규의 위나라도 존재할 수 없었다. 비수대전이 탁발규에게는 큰 도움이 된 셈.
백 년이 넘는 시기 동안 지속된 오호십육국시대를 끝내 종결시키고 북위를 세워 남북조시대를 열었으니 남북조시대의 위인을 넘어 중국사의 위인 중 한사람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장남 탁발사는 제왕(濟王), 차남 탁발소는 청하왕(淸河王), 삼남 탁발희(拓跋熙)는 양평왕(陽平王), 사남 탁발요(拓跋曜)는 하남왕(河南王), 오남 탁발연(拓跋連)은 광평왕(廣平王), 막내 탁발여(拓跋黎)는 경조왕(京兆王)을 받았다.
3. 생애
3.1. 초기 생애
탁발규는 371년, 탁발선비가 세운 대국(代國)의 왕 탁발십익건의 손자로 태어났다. 탁발규의 아버지 탁발식은 탁발십익건의 세자였으나, 장손근이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에 탁발십익건을 구하려다가 갈비뼈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아들이 태어난 해에 죽었다.
이후 376년, 화북의 최강자였던 전진의 황제 부견이 대국을 공격하여 결국 멸망시키고 말았다.[1] 당시 탁발규의 나이는 불과 6세에 불과했는데, 생모인 하란씨와 함께 독고부의 수장 유고인에게 의탁하였다.
383년, 화북을 통일한 부견은 천하 통일의 야심을 불태우며 100만 대군을 일으켜 장강 이남의 동진을 정벌하려다 되려 비수대전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부견의 휘하에 있었던 이민족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켜 전진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 틈을 타서 모용선비족의 모용수와 모용충은 각기 후연과 서연 정권을 수립했고, 강족의 요장은 후진 정권을 수립했다. 모용수에게 배신당해 관동 일대를 잃은 부견은 곧 모용충의 공격으로 장안이 포위되자 도주하다가 요장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런 혼란통에 탁발규가 의탁하고 있던 독고부의 유고인이 죽었다. 그러자 유고인의 동생인 유권이 뒤를 이어 독고부의 수장이 되었다. 385년에는 유고인의 아들 유현이 숙부인 유권과 탁발규 등을 모두 죽이고 권좌를 독점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를 눈치챈 탁발규는 어머니의 처가인 하란부로 달아나 외숙부 하란눌에게 의탁했다. 이때에 하란눌의 동생인 하란염간은 탁발규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재능이 출중한 것을 알고는 후환이 두려워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부하인 울고진과 탁발규의 생모 하란씨의 방해 때문에 실패했다.
3.2. 재위
3.2.1. 북위의 건국
386년 정월, 하란부로 도망오면서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겨왔던 탁발규는 마침내 야망을 실현에 옮기기 시작했다. 탁발규는 옛 탁발선비들의 무리들을 규합하여 우천에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곳을 도읍으로 하여 멸망했던 대국(代國)을 부활시켰다. 당시에 그의 나이는 불과 16세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국호를 위(魏)로 고쳤다. 후대에는 탁발선비가 세운 위나라를 다른 위나라와 구분하여 "북위(北魏)"라 칭한다.
이후 387년 5월에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독고부의 유현을 토벌했는데, 크게 패한 유현은 서연의 모용영에게 망명했다. 388년 5월에는 북쪽의 고막해를 토벌하여 크게 이겼고, 7월에 고막해의 무리가 모여 반격을 꾀하자 이 또한 격파했다. 389년 봄에는 튀르크계 고차의 여러 부락들을 정벌했으며, 이듬해(390)에도 고차를 토벌하는 한편, 후연의 황제 모용수와 손을 잡고 하란과 흘해의 여러 부락을 격파했다.
390년에는 북방에 위치한 몽골계 유목민족인 유연을 정벌하여 크게 이겼고, 또한 철불부의 유위진을 공격하여 그 일족을 모두 잡아 죽였다.[2] 그리하여 39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탁발규가 다스리는 북위는 그 영토가 급격히 팽창하여 오늘날의 오르도스와 내몽골 일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3.2.2. 부락해산
도무제는 이른바 '부락해산'이라 불리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부락은 선비족의 유목적 단위를 한자로 통칭하는 것으로, 추장이나 대인과 같은 유목적 지도자가 이끌고 있었다. 도무제는 이런 부락을 해산하고자 했는데, 유목적 질서를 해산하고 중화제국적 질서를 추구하기 위함이었다. 대인과 같은 지도자들은 중화적 관료로 편입되었으며, 유목적 권위가 아니라 황제에 의한 임명에서 권위가 나오도록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런 부락해산은 잘 실시되지 못하였다. 유목민들은 성이 없고 이름만으로 불렸는데, 한족 사가들은 필요에 따라 그들의 부족명을 성처럼 기록하였다. 예를 들면 탁발규는 탁발 부족의 규라는 뜻이다. 여기서 규는 한화된 이름으로 선비족 이름은 따로 존재한다. 이는 도무제의 부락해산 이후에도 부락은 해산되지 않았고 부족의 성으로 남아 부락의 지도자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란부나 우문부 등 유목적 부락은 여전히 건재하였고, 북위의 귀족으로서의 자리까지 잡아가고 있었다. 비록 명문상 부락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들 북위의 귀족들은 여전히 부락을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북위 조정은 부락을 파괴해 그 정체성을 희미하게 만든다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북위의 귀족으로서 자리잡게 하였고 이는 북위가 멸망한 후에도 지속된다. 또한 선비족 외 다른 부족에게는 부락해산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이에 북위가 굳이 부락해산을 강요할 정도로 다른 종족의 힘이 강하지 않았다는 견해와 북위의 힘이 부족해 타 부족에게까지 부락해산을 강요하지 못했다는 견해가 있다. 어찌 되었든 후일 해산당하지 않은 계호족의 이주영이 북위의 권력을 장악해 북위를 멸망의 길에 서게 한다.
3.2.3. 후연과의 대결
후연의 황제 모용수는 처음에는 탁발규를 지원하여 주변의 이민족들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탁발규의 세력이 예상보다 급속히 강성해지자 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395년 11월, 모용수는 태자인 모용보에게 군사를 내주어 북위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에 탁발규는 모용수가 죽었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려 모용보를 퇴각하게 만든 후, 그가 방심한 틈을 타서 20,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그 뒤를 추격하여 참합피에서 모용보가 거느린 후연군을 크게 격파했다. 대승을 거둔 탁발규는 포로로 잡은 50,000명이나 되는 후연 군사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를 참합피 전투라 한다.
이듬해인 396년 3월, 모용보의 참패에 분노한 모용수는 70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반격을 시도했다. 노련한 백전노장이었던 모용수는 북위 측이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고 선발군을 보내서 순식간에 북위의 요충지인 평성을 함락시켜 탁발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모용수는 몸소 평성으로 진군하던 중, 참합피에서 탁발규에게 학살당한 후 산처럼 쌓여있던 후연 병사들의 시체를 발견한다. 모용수는 잠시 행군을 멈추고 위령제를 지내도록 했는데, 참합피 전투에서 아버지와 아들, 형제를 잃었던 후연의 병사들이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그렇잖아도 노환에 시달리던 모용수는 이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고는 충격과 울분을 견디지 못해 병이 도지는 바람에 곧 피를 토하고 쓰러져 중산으로 돌아오던 중 사망하고 말았다. 한편 탁발규는 모용수가 진중에서 죽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급히 그를 추격해왔으나, 이미 평성이 후연에게 함락된 것을 보고는 놀라서 도성마저 내팽개치고 음산으로 달아나 숨는 등의 망신을 당했다. 어찌되었든간에 이후로 후연은 점차 북위에 대한 우위를 잃어가게 되었다.[3]
모용수가 죽고 나서 후연의 기세가 크게 꺾이자 탁발규는 40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396년 6월에는 후연의 영역이었던 오늘날 하북성 일대를 공격하여 광녕, 상곡을 점령하였으며, 그해 9월에는 병주, 상산을 점령하였다. 그 결과 397년에는 산서성 너머의 하북과 하남 지역까지 북위의 세력이 뻗쳐나가기 시작했다. 모용수의 뒤를 이어 후연의 황제가 된 모용보는 북위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수도 중산을 버리고 북쪽의 용성으로 천도해야 했다. 결국 397년 10월과 이듬해(398) 1월에는 후연이 지배하던 관동 지역의 중심지었던 중산과 업도 북위의 손에 들어갔다.
398년, 탁발규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을 순행하며, 후연의 옛 도읍인 중산과 업 등의 주요 점령지에는 행대(行臺)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그 통제력을 강화하였을 뿐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던 10만 이상의 인구와 관리들을 강제 이주시켜 저항 세력이 일어날만한 싹을 잘라버렸다. 그해, 순행에서 돌아온 탁발규는 7월에 이르러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고, 12월에는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하여 북위는 최대의 라이벌인 후연을 제압하고 화북 최강의 패권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탁발규는 흉노와 유연, 후연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중화적 국가 체제를 채용하여 예절 교육과 관제(官制) 등을 다듬고, 신국도 평성에 한족 명사를 들여 경영하였다. 그리고 몽골쪽으로 이동해 온 여러 부족을 해산시켜 주(州), 군(郡)의 호적에 넣는 정책 등을 마련하여 나라의 기초를 다졌다.
3.3. 말년
탁발규는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보잘 것 없는 세력이었던 북위를 화북 최강의 세력으로 키워놓았으나, 말년에는 심한 폭정을 일삼았다. 이는 한식산(寒食散) 중독 때문이었다. '''한식산'''은 5종류의 중금속과 광물을 섞은 마약의 일종으로 '''오석산'''(五石散)이라고도 불린다. 한식산은 복용한 사람으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심신을 안정시켜주며 환각을 체험할 수 있는 효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독성이 있어 건강에는 매우 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식산은 위진 시대 이래로 "병을 고칠 뿐 아니라, 정신을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보약으로 알려져왔다. 한식산을 보약으로 복용해왔던 탁발규는 말년에 들어 심신이 크게 피폐해져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4]
탁발규는 한식산의 부작용으로 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기도 했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때로는 혼잣말을 끝없이 중얼거렸다. 또한 조금이라도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주변의 대신들조차도 마구 죽여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가족들과의 사이도 벌어졌다. 탁발규는 한무제의 고사인 '''자귀모사'''(子貴母死)[5] 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이 죽고 난 후 외척들이 발호할 것을 염려하여 태자 탁발사의 어머니인 황후 유씨를 죽여버렸다.[6] 효심이 깊었던 탁발사는 이에 충격을 받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결국은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져 궁 밖으로 나가 버렸다.[7]
한편 탁발규는 젊은 시절에 이모였던 하란씨의 외모가 빼어난 것을 보고는 그 남편을 죽여버리고(...) 자신이 하란씨와 혼인한 일이 있었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탁발소는 성격이 난폭해서 아버지인 탁발규와 사이가 나빴다.[8] 409년, 제정신이 아니었던 탁발규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하란비에게 욕을 퍼붓고는 궁에 가두어 죽여버리려 하였다. 하란비는 아들 탁발소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침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탁발소는 궁인들과 모의하여 궁궐 담장을 넘어 아버지 탁발규를 살해하고 말았다.
결국 이처럼 탁발규는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차남 탁발소에게 살해되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에 불과했다. 탁발규가 살해당한 후, 그의 장남이었던 탁발사가 궁으로 돌아와 이복 동생 탁발소와 하란비를 제거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9]
그나마 탁발규의 사례로 인해 마약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안 북조에서는 마약 사용을 거의 하지 않았고 북위는 비교적 발전했다.[10]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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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강 석굴의 대불이 그의 얼굴을 본뜬 것이라 한다.
5. 둘러보기(계보)
[1] 《위서》에서는 대국이 멸망할 당시에 탁발십익건이 아들인 탁발식군 등에게 배신당하고 살해되었다고 하였으나, 《진서》에서는 부견이 탁발십익건을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했다고 전한다. 후자의 기록이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2] 유위진의 어린 아들이었던 혁련발발은 학살로부터 살아남아 훗날 북하를 건국하고 제위에 올랐다. 지금은 그가 남긴 통만성 유적이 유명하다.[3] 결국 후연은 내분으로 망하고 그 대신에 북연이 들어섰으나, 북위 3대 황제인 태무제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북연의 마지막 왕인 풍홍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의탁하였으나 결국은 살해당했다.[4] 아마도 탁발규는 어릴 적부터 주변 사람들과 친족들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등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기 때문에 심적으로 굉장한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한식산을 탐닉한 데에도 이런 정신적인 문제가 한몫했을 가능성이 있다.[5] 한 무제는 늘그막에 얻은 어린 아들인 소제 유불릉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는데, 그의 어머니인 구익 부인 조씨가 자신의 사후에 권력을 쥐게될 것을 염려하여 그녀를 강제로 자결하게 하였다.[6] 이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유목 민족의 사회 풍습이 짙게 남아있어 씨족 사회의 전통이 남아있었고, 모계의 힘 또한 강하여 자칫 잘못했다간 황제의 권력이 위협받기 쉬웠던 까닭도 있었다.[7] 아이러니하게도 탁발사 또한 훗날 아버지와 똑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이후로 태자가 황위를 잇기 전에 그 친모를 죽여서 외척의 발호를 막는 것은 이후로 북위 황실의 관습이 되어버렸다.[8] 탁발규가 어찌나 탁발소를 싫어했는지, 하루는 탁발소가 사고를 치자 우물에 거꾸로 매달아 방치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풀어주었다고 한다.[9] 탁발규가 죽었을 당시 그의 아들인 탁발사와 탁발소는 고작 18세, 16세의 소년에 불과했다.[10] 당장 송나라의 명제는 마약중독으로 의심되는 행동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