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무제

 


'''북위 제3대 황제
世祖 太武皇帝 | 세조 태무황제 '''
'''묘호'''
'''세조(世祖)'''
'''시호'''
태무황제(太武皇帝)
'''연호'''
시광(始光, 424년 ~ 428년 1월)
신가(神䴥, 428년 2월 ~ 431년)
연화(延和, 432년 ~ 435년 1월)
태연(太延, 435년 ~ 440년 6월)
태평진군(太平眞君, 440년 6월 ~ 451년 6월)
정평(正平, 451년 6월 ~ 452년 2월)
'''생몰 기간'''
408년 ~ 452년 3월 11일 (44세)
'''재위 기간'''
'''북위의 황제'''
423년 12월 27일 ~ 452년 3월 11일 (29년)
'''능호'''
운중금릉(雲中金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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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발(拓跋)
''''''
도(燾)
'''부모'''
부황 태종 명원황제 탁발사
모후 명원밀황후 두씨
'''황후'''
태무황후 혁련씨, 태무경애황후 하씨

1. 개요
2. 생애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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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제3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태무제(太武帝). 휘는 도(燾).
북쪽의 유연, 동쪽의 북연, 서쪽의 북량북하, 남쪽의 유송 등 사방의 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화북을 통일하여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열었던 북위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군주.'''
불교삼무일종의 4대 법난 중에 자랑스러운(?) 필두로 불린다. 성격이 용무엄혹(勇武嚴酷), 쉬운 말로 용감하지만 엄청 혹독한 성격이었다.

2. 생애


탁발도는 황제로 즉위하자 현 외몽골 일대의 유연을 쳐서 큰 타격을 입힌 뒤, 이어 북하, 북연을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시켰다. 감숙성의 영토를 확보하고 서역 20국에게 조공을 받았다. 446년 불교 폐지, 폐불의 조서를 내린다. 내용은 이렇다.
"후한의 명제가 사악한 거짓에 빠져 오랑캐 귀신을 믿고 천도를 어지럽히니 이때부터 예의가 허물어지고 천하가 혼란에 빠졌다. 이에 오랑캐 귀신을 소탕 박멸하여 옛날의 태평 시대를 회복하려고 한다. 지금부터 감히 오랑캐 신을 믿거나 흙이나 나무로 사람 모양을 하여 섬기는 자는 가족을 모두 죽인다. 불교 형상과 경전은 모두 불태우고 중은 늙고 젊음에 상관없이 다 묻어버린다."
승려들은 모조리 갱살되었다. 배후에는 유교도교짜고 치는 고스톱이 있었다고(...) 특히 도교가 이때 번성한다. 다만 크게 번성한 도교 종파인 신천사도의 창시자 구겸지는 북위의 불교 탄압에 오히려 반대했다.
하지만 모든 계책을 성공시켰으며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미래를 내다보는 듯이 상황을 다 맞히던 당대 최고의 전략가인 최호를 숙청하고 나서[1][2] 유송을 정벌하러 갔으나 군량 부족으로 후퇴했고 도중에 유송의 대신 장질이 지키고 있던 우이성을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때의 남정에서 군사의 절반을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태무제는 북쪽 병사와 가병들의 장강 도하를 도울 땟목 제조를 위해 갈대밭을 베어버리라 명했지만, 현명하게도 위험한 도하를 강행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남조가 보여준 우월한 수전 능력과 선박제조술은 막대한 방어적 이점을 선사해주었다. 반면 북조 정권들은 기병술에 더 익숙했고 상시적인 수군 전력을 유지하는 데 익숙치 않았다. 북중국의 건조한 기후는 적은 수의 조선공만을 배출했고, 그나마도 북쪽 조선공들은 상대적으로 얕은 북쪽 강들의 항행에 익숙한 소형선박의 제조에만 힘쓰는 경향이 있었다. 광활한 남쪽 강을 항행하는 남조 정권들의 함대와 맞닥뜨릴 경우, 북조의 군대는 물고기밥이 될 가능성만 높을 뿐이었다.
이후 남정을 떠났을 때 태자 탁발황에게 감국[3]을 맡겼는데 탁발황은 휘하의 도성 등의 신하를 신임했다. 종애라는 태감(환관)은 도성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탁발도가 남정에서 돌아오자 도성 등의 탁발황 휘하 인물들의 죄를 날조해서 보고했고 탁발도는 이들을 전부 죽였다. 자기 부하들을 아버지가 죽이는 걸 본 태자 탁발황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자리에 누웠다가 바로 병사했고, 탁발도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452년, 종애는 탁발도가 자신을 추궁할까봐 겁이 났고 이에 사람들을 동원해 그를 독살하면서 이렇게 탁발도는 허무한 최후를 맞게 된다. 태무제의 다음으로 즉위한 고종 때 폐불 정책은 중단된다.

3. 둘러보기





[1]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공식적 원인은 국사를 편찬할 때 가감없이 기록해서 북위 왕조의 잔혹하고 음란한 역사를 다 적었고, 이걸 대로에 비석으로 떡하니 새겼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태자와 관원 문제로 다투기도 하는 등 신하로서는 위험한 행동을 했다. 또한 유송을 정벌하는 걸 반대하고 오로지 북하, 유연 등 오랑캐 국가만 정복하길 주장한 것 등 한족으로서 그가 냈던 계책들이 전부 한족의 안위를 살피는 계책이었다는 점이다.[2] 사실 이 필화 사건으로 인하여 이후 북위의 사관을 포함한 관료들이 북위 탁발씨 황실에서 일어나는 내밀한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고 한다. 남조의 유송과 남제 황실에서 벌어진 온갖 황음무도한 일들은 기록으로 남아서 훗날까지 전해진 것과 달리 북위 황실의 경우에는 당시 한족 관료들이 보기에 황음무도라고 볼 수 있는 선비족의 풍습이 상당히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실 내부의 이야기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요기가 가득한 황실"이라는 등의 비난이 얼핏얼핏 훗날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북위 황실 내부의 비사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 하긴 위진 남북조 시대의 사회상과 정치 체제 자체가 폭군을 만들어낼 소지가 다분하였고 이런 분위기는 통일 왕조라고 하지만 사실상 마지막 남북조시대 왕조이기도 한 수나라까지 이어진다.[3] 조선의 대리 청정과 같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