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루스

 


[image]
'''휘'''
마르쿠스 누메리아누스 카루스(Marcus Numerius Carus)
'''제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
(Marcus Aurelius Carus Augustus)
'''생몰 년도'''
222년 ~ 283년
'''재위 기간'''
282년 ~ 283년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황제 즉위
2.3. 갑작스러운 사망
3. 평가


1. 개요


로마 제국의 제42대 황제. 즉위 전 풀네임은 마르쿠스 누메리아누스 카루스, 황제 즉위 후 취한 풀네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이다. 프로부스 황제가 282년 8월에 병사들에게 살해된 후 황제에 즉위하여 사산조 페르시아 정벌에 착수해 승승장구했으나 283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카루스는 222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한 기록에는 그가 일리리아 사람이라고 기술되었고 어떤 기록은 갈리아 사람이라고 기술되었으며, 또다른 기록에는 그가 아프리카 태생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현대 학계에서는 카루스가 갈리아의 도시 중 하나인 나르보(오늘날의 프랑스 나르본)에서 태어났다고 보고 있고, 최근에는 확정적으로 카루스가 나르보 태생의 갈리아 출신 로마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카루스는 로마에서 고급 교육을 받았던 듯하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공적을 쌓았으며 출세 과정은 어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그가 즉위 전까지 일반병졸로 입대해 군경력을 쌓고 즉위한 케이스가 아닌, 상류층 자제 내지 부유한 기사계급 출신의 출세가도를 밞았다는 것이다.
카루스는 고향을 떠나 일찍이 로마에서 고대 상류층들이 받은 문학, 법률, 철학, 예술 등을 배웠고, 당시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역사가에게도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비슷한 연배의 일리리아 장교 출신 황제들과 달리 40여년 동안 원로원 의원을 지내면서 민간과 군대를 포함한 여러 직책을 수행했다고 한다.
282년 카루스는 프로부스 황제에게 신임을 받아 근위대장에 임명되었고, 사산왕조 페르시아 원정에 참전해 시르미움으로 동행했다.

2.2. 황제 즉위


282년 8월, 프로부스가 시르미움 근교에서 진행된 토목 공사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폭동에 휘말려 참혹하게 살해됐다. 이후 근위대와 원정군은 시르미움에 머물던 근위대장 카루스를 추대해 황제로 선포했다.
새황제 카루스는 즉위하자 마자 프로부스를 살해한 병사들을 처형하고 프로부스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그의 즉위는 본인이 제위를 노리고 음모를 꾸며 벌어진 일도 아니고, 간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진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즉위 당시 카루스는 전임자보다 6살 많았는데, 순수 군인 출신 황제들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와 달리 무려 40여년간 원로원 의원 생활을 했고 근위대장에 올라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카루스는 즉위 후 자신이 황위에 오른 사실을 원로원에 통보하면서도 로마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프로부스가 미처 추진하지 못했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벌이기로 마음 먹었다.[1]
카루스는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기 전 두 아들 카리누스누메리아누스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줬다. 그리고 카리누스에게 갈리아 지방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고 로마로 돌아가서 내정을 정비하게 했다. 반면에 작은 아들 누메리아누스는 원정에 동참시켰다. 이후 카루스는 사르마티아족을 정벌해 일리리아의 안전을 확보했다. 약 1만 6천 명의 사르마티아족이 죽었고 2만 명은 포로로 붙잡혔다.
283년 페르시아와 로마 간의 변경 지대에 도착한 카루스는 페르시아에게 선전포고했다. 이에 페르시아의 왕중왕 바흐람 2세는 평화 협상을 제의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왕중왕이 보낸 사절단이 로마군 진영에 도착하여 황제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자, 병사들은 풀밭 위에 앉아 있던 한 군인에게 안내했다. 그 군인은 말라 비틀어진 베이컨과 딱딱한 콩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남루한 보라색 외투만이 그가 황제라는 걸 알려줬다.
카루스는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면서 페르시아 왕이 로마 제국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페르시아는 이 대머리처럼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거라고 말했다. 사절단은 공포로 몸을 떨며 물러갔고, 카루스는 곧바로 자신의 위협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이끄는 로마군은 메소포타미아를 파괴하고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을 함락시켰다. 카루스는 여세를 몰아 티그리스 강까지 진군했고 곧 강을 건너 페르시아를 정복하기로 했다. 당시 페르시아는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피폐해졌고 군대의 대부분은 인도 접경 지대에 붙들려 있어서 로마군의 침략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카루스는 뜻밖의 최후를 맞이한다.

2.3. 갑작스러운 사망


283년 중순, 카루스는 티그리스 강을 도하해 사산조 페르시아를 완전 정복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돌연 병에 걸린 그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병영에 심한 폭풍우가 몰려오고 천둥과 번개가 쉴 새 없이 쳐서 병사들이 혼란에 빠진 와중에, 갑자기 엄청나게 큰 천둥소리가 들려오더니 황제의 천막이 번개에 직격되어 화염에 휩싸였다. 화재는 곧 진압되었으나 황제의 천막은 이미 불태워졌고 카루스는 사망한 뒤였다. 그의 사인은 낙뢰사로 기록되었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음모가들이 폭풍우가 심한 틈을 타서 황제를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평가


짧은 재위 기간동안 대단한 군사적 능력을 보여줬음에도 평가가 박한 황제다. 카루스는 일생동안 엄격하고, 도덕적이었으며 예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프로부스 사후 즉위하는 과정에서 원로원에게 로마 귀환 대신 원정을 계속하겠다는 것을 드러낸 부분, 아들 카리누스 부부가 워낙 평이 안 좋은 까닭에 원로원에게 즉위 직후 오만하고 탄압적 행동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타키투스와 프로부스 시대동안 두 황제가 취한 원로원에 대한 호의적 태도, 원로원 권위 보호조치와 반대로 반대파에 대한 강경한 행동 탓에 프로부스 암살의 배후가 아니냐는 오해도 샀다고 한다. 아울러 장남이 디오클레티아누스와의 내전 중 암살되고 몰락한 이유 때문에 사후 후대 로마인들에게는 폭군이라는 오명까지 들었다.


[1] 카루스의 결정은 황제 본인의 뜻도 있었고, 그를 옹립한 원정군 수뇌부들의 요구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로원 입장에선 옛 동료였던 카루스가 일방적으로 “지금부터 내가 황제가 됐고, 원정은 계속 할테니까 서방을 담당할 장남에게 협력이나 잘해라” 식으로 통보한 태도에 화를 냈고, 이는 전임자 프로부스가 항상 원로원을 배려한 행동과 달라서 카루스의 평가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