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부스

 


[image]
'''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Marcus Aurelius Probus Augustus)
'''생몰 년도'''
232년 ~ 282년
''' 출생지 '''
일리리아 시르미움
'''재위 기간'''
276년 ~ 282년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황제
2.2.1. 제위 등극
2.2.2. 게르만족과의 전쟁과 제국 재건
2.3. 암살
3. 평가


1. 개요


로마 제국의 제41대 황제. 풀네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이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발탁된 이래 갈리에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276년 7월 타키투스가 병사하자 플로리아누스를 제압하고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6년 동안 게르만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내부 반란을 모조리 제압했으며 토목 공사를 실시해 내정을 닦았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 정벌을 위한 전쟁 준비 도중 군인들의 폭동으로 살해되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프로부스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230년에서 235년 사이에 일리리아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드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프로부스는 232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한편 로마의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프로부스 아버지의 이름은 달마티우스라고 한다. 프로부스는 일리리아의 평범한 농민 가정에서 성장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성년이 됐을 시기인 250년대에 군대에 입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어린 병사였던 프로부스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고 그를 군단 하위부대 지휘관에 임명시켰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인 승진으로 군 사령관이 되었지만, 프로부스는 일리리아 속주 국경 일대에서 사르마티아인들과 전투를 치루는 내내 승리를 거뒀다. 따라서 얼마 안 가 황제와 로마군 전우들에게 자신의 진가를 여실히 보여줬다고 한다.
이후 프로부스는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치세 아래에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같은 장교들과 함께 치열했던 일리리아 일대 방어선을 담당하며 뛰어난 군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갈리에누스 암살 이후에도 프로부스는 로마군 장군으로 있으면서 실력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따라서 그는 일리리아계 군인황제들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우수한 군 사령관으로서 활약했다. 특히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팔미라 제국을 정복할 때, 별동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해 단숨에 평정함으로써 팔미라 제국의 배후를 없애버리고 밀이 공급되지 않아 곤경에 처해 있던 로마를 구원했다.
275년 9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비서 에로스와 마찰을 빛다가 에로스의 농간에 속은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프로부스는 이미 명망높은 군인 이상의 군부 내 최고 거물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그의 역량과 명성은 이미 아우렐리아누스와 비슷했고, 일리리아 방어선 일대에 있을 때부터 병사들의 신망이 상당했다. 하지만 프로부스는 어찌된 일인지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 존경하는 황제의 갑작스런 사망에 충격받아서 황위에 오를 야심을 품을 겨를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아직 황제를 칭하기에는 동료들의 지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사실은 시르미움에서 열린 긴급 군사회의에서 원로원에 차기 황제 선출을 맡기자고 결의했을 때 프로부스도 동의했다는 것이다. 제위 공백 9개월 후, 원로원의 추대로 황위에 오른 타키투스 황제는 프로부스를 동방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외적의 침략을 경비하게 했다. 이후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알 수 없지만, 그가 동방 국경을 책임지는 동안 제국 동방이 평온했다고 한다.

2.2. 황제



2.2.1. 제위 등극


276년 7월 타키투스 황제가 노환으로 사망했다[1]. 이때 타키투스의 이부 동생인 플로리아누스가 원로원과 군대와의 상의도 거치지 않고 제위에 올라 황제를 선언했다. 그러자 황제 임명과 폐위 권한을 행사할 수 있던 군대는 반발했고, 동방 주둔 로마군들은 타키투스에 이은 실질적인 실권자 프로부스가 황제라고 선포했다. 이때 프로부스는 국경방어와 치안 뿐만 아니라 오랜 내전과 전쟁으로 망가진 동방 속주들의 평화와 질서유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플로리아누스가 권좌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프로부스는 비로소 황제를 자칭했다.
플로리아누스는 자신을 황제로 선포한 뒤, 게르마니아 일대 로마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진군해 프로부스과 일전을 치루려고 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 경험을 가진 프로부스는 플로리아누스군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게릴라 전술로 플로리아누스의 원정군을 괴롭혔다. 게르마니아의 추운 날씨에 익숙했던 플로리아누스의 로마군은 덥고 건조한 소아시아에 적응하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열사병에 걸렸다. 이렇게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자 결국 플로리아누스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살해되었고, 프로부스는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2.2.2. 게르만족과의 전쟁과 제국 재건


프로부스는 상술했듯 공통분모가 많은 아우렐리아누스처럼 군사적 역량, 공훈은 당시 로마군 최고 수준급의 순수군인 출신 장군이었으며,[2] 교양적인 측면과 정치, 행정 능력 등 통치술은 아우렐리아누스보다 훨씬 뛰어났다. 따라서 제국의 모든 군대가 단독황제가 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음에도 곧바로 원로원에 전갈을 보냈다. 이때 프로부스는 원로원에게 경의를 표하며 자신이 황제를 칭한 것은 부하들의 억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라고 밝히고, 자신은 황위에서 물러날 테니 원로원이 다른 사람을 황제로 추대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원로원은 이런 프로부스의 말에 고마워 하면서 그를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황제로 인정했다.
이렇게 군대와 원로원 모두의 지지를 얻은 프로부스는 아우렐리아누스 암살 후 혼란을 틈타 제국 서방의 중심부인 갈리아 전역을 약탈하고 있던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등 게르만족들을 서둘러 토벌하러 277년 출정했다.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만족들은 이미 부유한 갈리아 일대의 70여개 도시들을 점령하고 갈리아 일대의 농경지들을 황폐화시킨 터라 프로부스는 일년 가까이 전투를 치뤘다. 이때 프로부스는 라인강 서쪽 일대에 새로이 요새들을 쌓고 뚫린 라인 방어선들을 재정비했으며, 자신에게 복종한 게르만 청년 1만 6천 명을 로마군에 입대시킨 후 이들을 50~60명 단위로 나눠서 제국 전역에 분산시켰다. 또한 그는 다뉴브 강을 도하하여 발칸 반도에 침입한 고트족을 무찌르고 고티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278년, 프로부스는 갈리아를 침략한 알레만니족과 롱기오네스족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끝에 격퇴했고, 그가 파견한 장군들은 프랑크족을 격파했다. 그는 거침없는 공격전술과 추격전을 펼쳐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일부 자료에는 그의 군대가 게르만족 40만 명을 학살했다고 하지만 역사학계는 이것을 과장으로 간주하고 있다. 갈리아에서 게르만족을 격파한 프로부스는 여세를 몰아 라인 강을 건너 여러 부락들을 불태우고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이후 프로부스는 라이티아, 판노니아 일대로 처들어온 반달족, 알레만니족 등 제국 각지의 반역자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이렇게 서방 일대를 안정화시킨 프로부스는 트라키아 지방의 황폐화된 변경 지대에 야만인 포로나 도망자를 정착시켜 새로운 식민 도시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러시아 남부 일대에서 다른 게르만 군대의 공격, 식량난 등으로 로마 국경까지 밀고 내려오던 게르만족의 분파 바스타르나이족 10만명을 로마 국경 내 트라키아 황무지에 살도록 해줬다. 이때 프로부스는 과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러했듯 이들에게 땅, 가축, 농기구, 기타 유인책을 주어 그들이 장차 제국에 로마군에 복무할 군인의 재목을 길러내길 기대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이후 로마 제국의 국경 방어와 지역 복구에 큰 도움을 줬다.
프로부스는 소아시아 남부 일대에서 해적질을 하던 게르만족들을 토벌한 뒤, 전역한 퇴역병들과 그 가족들을 새로 건설될 식민도시에 정착하게 했다. 이런 제국 재건 정책들과 동시에 그는 군대를 수차례 동원해 갈리아, 판노니아 및 기타 지역에 끊임없이 '유익한 노동'을 부과함으로써 군대의 일탈을 미연에 방지했다. 이집트에 주둔할 때는 식량의 원활한 공급망 재건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나일 강의 준설 공사를 했다. 또 갈리아와 판노니아에서는 구릉 지대에 포도밭을 일궜다. 이처럼 프로부스는 전쟁에만 힘을 쏟던 인물이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자신의 역량을 드러내면서 오랜 내란과 외침으로 황폐해진 제국과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고자 했다.
서기 281년, 프로부스는 로마에서 수많은 외적과 반역자들을 성공적으로 토벌한 것을 기념하는 개선식을 개최했다. 이때 프로부스는 이때 끝까지 저항하다가 포로가 된 이들을 검투사 경기에 투입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날 80명의 검투사들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조리 체포되었고, 프로부스는 그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2.3. 암살


프로부스는 서방에서 거둔 훌륭한 공적을 기념하는 개선식을 마친 후, 즉위 전까지 담당한 동방 문제를 완전히 끝내고 싶어했다. 따라서 서기 282년, 프로부스는 모든 동방 일대의 안전을 위협하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정벌에 착수했다. 이때 그는 정벌을 위한 전쟁 준비에 착수하던 중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시르미움을 원정 중 처음으로 들릴 도시로 정하고 행군했다.
그해 8월, 프로부스는 군대를 동원해 시르미움 근처의 습지를 메꾸고 배수로를 건설하는 공사를 실시했다. 평시에도 군사훈련을 실전같이 강하게 실시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불만은 계속되는 토목공사 투입으로 인해 높았다. 그러던 중에 병사들은 무더운 여름날에 황제의 질책을 받아가며 습지를 메꾸던 중 자신들이 왜 이런 고생을 하냐며 불만을 품었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티아에서 자신들의 처지에 분통이 폭발한 병사들이 무기를 집어들고 폭동을 일으켰다.
반란 참가자들은 프로부스의 엄격한 훈련방식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원로원 의원 출신의 근위대장 마르쿠스 누메리아누스 카루스를 황제로 선포한 뒤[3], 프로부스가 있던 시르미움 배수로 공사 현장으로 전갈을 보냈고 시르미움 일대의 병사들에게도 그 뜻이 전달됐다. 예상대로 시르미움 주둔 병사들은 그동안 쌓인 설움과 불만이 폭발해 무기를 들고 반란에 동참했다. 뒤늦게 위험을 깨달은 프로부스는 작업 감독을 위해 세워진 높은 탑으로 피신했지만, 그 탑은 곧 병사들에게 허물어졌고 프로부스는 수많은 창과 칼에 찔려 사망했다. 그 후 새 황제가 된 카루스는 프로부스를 죽인 병사들을 처형하고 프로부스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3. 평가


황제이자 고결한 인간이며, 모든 미개한 국가와 반란자들의 정복자인 프로부스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로마황제열전> 중 프로부스의 비문에 기록되었다는 문구'''

프로부스는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공정한 사람이었고, 군사적 명성에서는 아우렐리아누스에 필적하면서도 고귀한 성품이라는 덕목에서는 그를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에우트로피우스, <약사> 중 프로부스 편'''

프로부스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고결함’ 또는 ‘미덕’을 뜻한다, 그런데 그는 이런 자신의 이름 뜻처럼 후세 로마인들에게 “이름처럼 고결한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즉, 사후 프로부스에 대한 평가는 그가 어이없이 사망한 직후부터 4, 5세기 이후의 후대 시대에도 로마인들에게 일관되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근대 이후 학자들에게 콤모두스, 세베루스 왕조 이후 가속화되고 있던 로마제정 체제의 폐단으로 희생된, 유능하지만 불운한 황제 중 한명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또 3세기의 위기라고도 불리는 군인황제시대동안 즉위한 순수 군인 출신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와 더불어 ‘이 세기의 가장 유능하고 양심적인 황제’로 불린다. 즉, 프로부스에 대한 인물됨과 업적에 관한 평가는 단순히 근대 이후 나타난 재평가가 아니라 프로부스 생전부터 나온 평가였다.
그렇지만 이런 세간의 평가와 별개로 정작 폭동을 일으켜 프로부스를 살해한 병사들과 일부 병사들에게 프로부스의 평은 동의도 없이 “이리저리 뺑뺑이 돌린다”, “훈련도 빡세고 전투는 매일 치루는데 온갖 공사일까지 노예부리듯 부린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사건 당시부터 좋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프로부스는 이런 측면에서 너무 명백한 치명적 실수로 어이없이 사망했다고 일관되게 평가받는다. 실제 사건 당일 로마군은 자기들 방식으로 기록말살형을 연상시키는 모양새를 취했다. 카루스의 명에 따라 프로부스의 유해를 무덤을 만들어 매장했음에도 로마군 병사들은 비문에 프로부스의 이름을 넣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병사들은 비문 일부를 지우기도 했다. 또 로마군 병사들이 프로부스 죽음에 죄책감을 가졌다고 해도 그들은 프로부스를 자기들 방식대로 행동했다. 따라서 로마군 중 일부는 죽은 황제의 무덤이나 기념비 앞에서 헌화를 하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프로부스를 기릴 기념비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즉, 프로부스는 적어도 휘하 페르시아 원정군 내에서는 엄격하고, 제국 각지에서 황폐해진 지역 재건과 노동에 병사들의 기본적인 동의없이 투입하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황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부스는 상술했듯 공통분모가 많은 두 전임자처럼 군사적 역량이 뛰어나고, 공훈이 많아 당대와 후대 모두에게 평이 상당히 좋았다. 원로원과 로마군 대부분 그리고 민중들은 프로부스가 재위 내내 묵묵히 국가를 처들어온 외적을 막고, 최대한 주민들의 생업에 지장이 생기지 않게 노력한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따라서 후대 로마인 중 에우트로피우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은 프로부스를 “근면하고 묵묵했던 영웅”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고 군대의 불만에도 사람들은 프로부스를 추앙했다고 한다. 또 당대, 후대 로마인들은 프로부스를 그의 두 전임자 중 아우렐리아누스와 공통점이 많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 이때 에우트로피우스로 대표되는 로마인들은 아우렐리아누스와 비교해 프로부스는 성격적, 교양적인 측면은 훨씬 괜찮았고, 정치, 행정적 능력은 아우렐리아누스보다 확실히 뛰어났다고 말했다. 이런 까닭에 그의 암살 사건은 어이없게 벌어진 참사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국은 프로부스 암살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장 전까지 또 다시 혼란한 상황들을 경험하게 된다.

[1] 주장이 두 개로 갈리는데, 판노니아 내 군영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와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암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2] 실제로 황제로 선언되기 전까지 프로부스처럼 제국 국경 전역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인물은 아우렐리아누스 외에는 없었다.[3] 카루스의 황제 선포는 카루스가 프로부스를 살해하기 위해 계획한 결과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직후 카루스는 원로원에게 “병사들이 나를 황제로 선포했고, 나 역시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루러 가는 중이니까 로마에 못 간다”는 식의 통보를 한 탓에 카루스의 이미지는 프로부스의 좋은 이미지와 겹쳐 최악 수준 가까이 떨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