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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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무에타이 선수. 한때 K-1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던 선수.
1983년 9월 13일 생.
K-1에 데뷔하기 이전에는 태국에서 무에타이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태국의 유명 무에타이 단체인 라차담넌 웰터급과 슈퍼 웰터 웨이트 챔피언. 다만 라차담넌은 유명 단체이기는 해도 부동의 1위 단체인 룸피니에 밀리고 태국에서 웰터급과 슈퍼 웰터 웨이트는 인기 체급도 아니었다. 정상급 무에타이 선수인 것은 맞지만 레전설급은 아닌 딱 그정도. 그러나 K-1 2004 서울 예선에 참가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원래 도저히 K-1 에서 뛸 만한 체급의 선수가 아니었고 본래 뛰는 체급도 K-1 MAX에서 뛰었어야 하는 선수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K-1 서울 예선에 참가하게 된다. 아무래도 당시 데니스 강의 첫 승을 위한 떡밥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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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데니스 강을 1라운드에 펀치로 KO시켜버리고 당시 일본의 강자 나카사코 츠요시를 꺾고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에서 코야스 신고까지 꺾어버리며 예상하지 못한 우승을 차지하며 K-1에 본선 무대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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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 상대는 알렉세이 이그나쇼프. 당시만 해도 레미 본야스키의 라이벌로 여겨지던 선수였고 두 선수의 체중차이는 30kg 가량이었다. 당연히 이그나쇼프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연장 판정승을 거두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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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상대는 당시 미국 예선을 통과한 마이티 모였는데 1라운드 내내 카오클라이가 도망 다니며 다소 지루한 공반이 펼쳐지다 라운드 막판에 날린 플라잉 킥 카운터에 KO승을 거두며 4강에 진출한다. 마이티 모 또한 한번 걸리면 골로가는 사모안 파이터였고 이를 의식한듯 극단적 아웃복싱, 빙빙돌기를 하다가 막판에 마음먹은듯 날린 플라잉킥이 오른쪽 두부에 정통으로 들어가며 승리. 모가 쓰러지자 펄펄 뛰면서 기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4강에서 무사시와 대결하고 아쉽게 판정패를 당했지만 80kg, 그것도 평소에 뛰는 체급은 웰터급인 선수가 4강까지 나갔다는 것은 일대 파란이었다.
다음해 서울 예선에서도 결승까지 올라가나 두배나 차이나는 체중을 극복 못하고 결국 결승에서 최홍만에게 패배.[2] 전년도 8강 진출자 자격으로 16강에서 레이 세포와 대결하나 판정패한다. 레이 세포가 다운을 하나 빼앗았기 때문에 세포의 손을 들어줘도 될 경기이긴 했지만 둘의 체중차나 스코어 차가 너무나 심했고 경기 후 레이 세포의 카오클라이를 비하하는 무례한 인터뷰까지 겹치면서 국내 이종격투 커뮤니티에서는 한 동안 레이 세포가 엄청 욕을 먹었다. K-1에서도 카오클라이를 매우 못마땅해 하고 있었고 이것이 판정에 반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해 서울 예선에서 나카사코 츠요시에서 패한면서 K-1 본선무대와는 멀어졌다.
이후 자신의 체급과 헤비급을 왔다갔다하며 경기를 펼치지만 정작 자신의 체급에서는 별 다른 족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다음해 터키 그랑프리에 4강에 올랐으나 마고메도프에게 KO패를 당한 이후 박용수를 판정으로 꺾은 것을 제외하면 이전만큼의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사실 쁘아까오와는 다르게 태국 탑 랭커도 아니고 유명한 선수도 아니었지만 준척급 정도 되는 낙무아이가 타 입식으로 왔을때 어떤 파란이 일어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였으며 한때 무에타이 최강론이 펼쳐지기도 했다. 최하 30kg차이, 최홍만과는 80kg가까이 차이가 났었고, (전성기 최홍만은 지금의 최홍만과는 넘사벽이었다) 거구의 상대들에게도 전혀 기죽지않고 미들킥, 플라잉킥을 날려대던 패기의 낙무아이이다.
180cm 80kg 라는 헤비급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몸집이라 극단적인 아웃복싱을 사용한다. 이 점 때문에 K-1에서 카오클라이를 못마땅해 했다. 정작 자신의 체급에서는 선전하지 못했다는게 특기할 만한 점이다.
자신의 체급보다 훨씬 윗체급의 선수들과 싸웠다는 점에서 미노와맨과 비교받는 경우도 있으나 카오클라이가 좀 더 고평가를 받는다. 미노와가 하체 관절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3] 종합 룰과 달리 카오클라이는 입식, 즉 타격으로만 상대했기 때문이다.
비록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헤비급에 아주 미달하는 몸집으로 K-1 4강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인정받을만한 선수이다. 다만 체급의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고 파이팅 스타일로 인한 K-1의 견제, 그리고 어느 정도 스타일이 파해되면서 이후에는 이전만큼의 포스를 내뿜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일화로는 알렉세이 이그나쇼프를 꺾은 이후 당시 K-1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노장인 마이크 베르나르도와 타 단체에서 내기 경기를 가졌다는 점. 그냥 경기한게 아니라 K-1 8강 진출권을 내기로 캐삭빵 경기였다. 카오클라이가 패배할 시 8강 진출권을 넘기겠다고 하고 베르나르도도 O.K. 내기라고 하기도 애매한게 카오클라이는 지면 K-1 진출권을 잃지만 베르나르도는 잃을 게 없었다. 이미 카오클라이를 못 마땅하게 보고 있던 K-1에서도 승낙을 했지만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최홍만과의 대결이 인상적이었는지 2000년대 중반 당시 한국에서 인지도가 높고 인기가 있었다. 애초에 한국에서 K-1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최홍만의 데뷔 때문이었으니. 때문에 이미 K-1에 먼저 데뷔해 K-1 MAX를 제패한 쁘아까오는 한국에서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기에, 오히려 쁘아까오보다 카오클라이가 한국에서는 훨씬 유명한 편이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화끈하게 치고받는 걸 선호하는 일본의 K-1 관객층에겐 샥샥 피하면서 도망다니는 카오클라이의 시합은 재미없게 느껴진 듯.[4] 게다가 정작 테크니션 팬층이 많은 K-1 MAX로 체급이동을 한 후에는 저조한 성적으로 역시 인기를 얻지 못했다.
태국의 무에타이 선수. 한때 K-1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던 선수.
1983년 9월 13일 생.
1. K-1전적
K-1에 데뷔하기 이전에는 태국에서 무에타이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태국의 유명 무에타이 단체인 라차담넌 웰터급과 슈퍼 웰터 웨이트 챔피언. 다만 라차담넌은 유명 단체이기는 해도 부동의 1위 단체인 룸피니에 밀리고 태국에서 웰터급과 슈퍼 웰터 웨이트는 인기 체급도 아니었다. 정상급 무에타이 선수인 것은 맞지만 레전설급은 아닌 딱 그정도. 그러나 K-1 2004 서울 예선에 참가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원래 도저히 K-1 에서 뛸 만한 체급의 선수가 아니었고 본래 뛰는 체급도 K-1 MAX에서 뛰었어야 하는 선수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K-1 서울 예선에 참가하게 된다. 아무래도 당시 데니스 강의 첫 승을 위한 떡밥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1]
[image]
그러나 데니스 강을 1라운드에 펀치로 KO시켜버리고 당시 일본의 강자 나카사코 츠요시를 꺾고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에서 코야스 신고까지 꺾어버리며 예상하지 못한 우승을 차지하며 K-1에 본선 무대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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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 상대는 알렉세이 이그나쇼프. 당시만 해도 레미 본야스키의 라이벌로 여겨지던 선수였고 두 선수의 체중차이는 30kg 가량이었다. 당연히 이그나쇼프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연장 판정승을 거두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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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상대는 당시 미국 예선을 통과한 마이티 모였는데 1라운드 내내 카오클라이가 도망 다니며 다소 지루한 공반이 펼쳐지다 라운드 막판에 날린 플라잉 킥 카운터에 KO승을 거두며 4강에 진출한다. 마이티 모 또한 한번 걸리면 골로가는 사모안 파이터였고 이를 의식한듯 극단적 아웃복싱, 빙빙돌기를 하다가 막판에 마음먹은듯 날린 플라잉킥이 오른쪽 두부에 정통으로 들어가며 승리. 모가 쓰러지자 펄펄 뛰면서 기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4강에서 무사시와 대결하고 아쉽게 판정패를 당했지만 80kg, 그것도 평소에 뛰는 체급은 웰터급인 선수가 4강까지 나갔다는 것은 일대 파란이었다.
다음해 서울 예선에서도 결승까지 올라가나 두배나 차이나는 체중을 극복 못하고 결국 결승에서 최홍만에게 패배.[2] 전년도 8강 진출자 자격으로 16강에서 레이 세포와 대결하나 판정패한다. 레이 세포가 다운을 하나 빼앗았기 때문에 세포의 손을 들어줘도 될 경기이긴 했지만 둘의 체중차나 스코어 차가 너무나 심했고 경기 후 레이 세포의 카오클라이를 비하하는 무례한 인터뷰까지 겹치면서 국내 이종격투 커뮤니티에서는 한 동안 레이 세포가 엄청 욕을 먹었다. K-1에서도 카오클라이를 매우 못마땅해 하고 있었고 이것이 판정에 반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해 서울 예선에서 나카사코 츠요시에서 패한면서 K-1 본선무대와는 멀어졌다.
이후 자신의 체급과 헤비급을 왔다갔다하며 경기를 펼치지만 정작 자신의 체급에서는 별 다른 족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다음해 터키 그랑프리에 4강에 올랐으나 마고메도프에게 KO패를 당한 이후 박용수를 판정으로 꺾은 것을 제외하면 이전만큼의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사실 쁘아까오와는 다르게 태국 탑 랭커도 아니고 유명한 선수도 아니었지만 준척급 정도 되는 낙무아이가 타 입식으로 왔을때 어떤 파란이 일어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였으며 한때 무에타이 최강론이 펼쳐지기도 했다. 최하 30kg차이, 최홍만과는 80kg가까이 차이가 났었고, (전성기 최홍만은 지금의 최홍만과는 넘사벽이었다) 거구의 상대들에게도 전혀 기죽지않고 미들킥, 플라잉킥을 날려대던 패기의 낙무아이이다.
2. 파이팅 스타일
180cm 80kg 라는 헤비급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몸집이라 극단적인 아웃복싱을 사용한다. 이 점 때문에 K-1에서 카오클라이를 못마땅해 했다. 정작 자신의 체급에서는 선전하지 못했다는게 특기할 만한 점이다.
자신의 체급보다 훨씬 윗체급의 선수들과 싸웠다는 점에서 미노와맨과 비교받는 경우도 있으나 카오클라이가 좀 더 고평가를 받는다. 미노와가 하체 관절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3] 종합 룰과 달리 카오클라이는 입식, 즉 타격으로만 상대했기 때문이다.
3. 기타
비록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헤비급에 아주 미달하는 몸집으로 K-1 4강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인정받을만한 선수이다. 다만 체급의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고 파이팅 스타일로 인한 K-1의 견제, 그리고 어느 정도 스타일이 파해되면서 이후에는 이전만큼의 포스를 내뿜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일화로는 알렉세이 이그나쇼프를 꺾은 이후 당시 K-1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노장인 마이크 베르나르도와 타 단체에서 내기 경기를 가졌다는 점. 그냥 경기한게 아니라 K-1 8강 진출권을 내기로 캐삭빵 경기였다. 카오클라이가 패배할 시 8강 진출권을 넘기겠다고 하고 베르나르도도 O.K. 내기라고 하기도 애매한게 카오클라이는 지면 K-1 진출권을 잃지만 베르나르도는 잃을 게 없었다. 이미 카오클라이를 못 마땅하게 보고 있던 K-1에서도 승낙을 했지만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최홍만과의 대결이 인상적이었는지 2000년대 중반 당시 한국에서 인지도가 높고 인기가 있었다. 애초에 한국에서 K-1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최홍만의 데뷔 때문이었으니. 때문에 이미 K-1에 먼저 데뷔해 K-1 MAX를 제패한 쁘아까오는 한국에서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기에, 오히려 쁘아까오보다 카오클라이가 한국에서는 훨씬 유명한 편이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화끈하게 치고받는 걸 선호하는 일본의 K-1 관객층에겐 샥샥 피하면서 도망다니는 카오클라이의 시합은 재미없게 느껴진 듯.[4] 게다가 정작 테크니션 팬층이 많은 K-1 MAX로 체급이동을 한 후에는 저조한 성적으로 역시 인기를 얻지 못했다.
[1] 하지만 이 후로도 당분간 K-1에서 계속 활동한 걸로 봐서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에서는 체중감량이 힘들어서 감량없이 나갈 수 있는 K-1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많다. 실제로 세계 무대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기량을 보이다가도 감량이 힘들어서 은퇴한 선수도 있기에 아주 가능성이 없는 추측은 아니다.[2] 입식 격투기에서 거의 도박성 기술인 플라잉 하이킥이 엄청난 키차이 때문에 턱이 아닌 목에 들어가서 실질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후에 최홍만을 KO 시킨 마이티 모가 이 하이킥에 맞고 KO 당했다는 것이다.[3] 관절기는 오래전부터 파워 차이가 나는 상대 등을 잡을때 사용하는 전략이다.[4] 일본에선 피하기만 한다고 매트릭스라는 별명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