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쿠라 시게나가
片倉重長
(1584. 12. 25 ~ 1659. 3. 25)
전국 시대와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다테 가문의 가신으로 다테 마사무네를 섬겼으며, 카타쿠라 카게츠나의 아들이다. 이름은 카타쿠라 시게나가(片倉重長) 혹은 카타쿠라 시게츠나(片倉重綱)[1] 이며, 아명은 야자에몬(弥左衛門), 사몬(左門), 사에몬(左衛門), 통칭은 코쥬로(小十郞), 법명은 신쇼인(真性院).
태어나기 전에 마사무네가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인지라 카게츠나는 아들이 훗날 마사무네를 위협할 것을 염려해서 죽이려고 했지만 마사무네가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편지를 보내면서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다.
1591년에 다테 시게자네를 에보시오야로서 성인식을 올리면서 카타쿠라 시게나가(片倉重長)라 칭했으며, 같은 해에 아버지 카게츠나와 함께 주군인 마사무네를 보좌하여 교토 후시미로 가서 1599년까지 체류하여 그 사이에 타이코에게 하오리를 헌상하였다.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 때 와타리 성을 지키는 것을 명령받았지만 카게츠나와 함께 출전하는 것으로 첫 출전을 해서 시로이 성 전투에 참전했다.
1614년에 아버지인 카게츠나가 병이 들면서 대신 다테 마사무네 휘하에 선봉으로 참전하면서 1월 11일에 마상 60기, 철포대 300명, 궁병 100명, 창병 200명 등을 포함한 1000여 명을 이끌고 시로이시 성에서 출진했는데, 적은 오사카라면서 아군이 승리해서 이름을 신관으로 끌어올리자면서 격려했다. 시게나가는 행군 도중에 코피를 흘려 가신들이 이를 불길하다고 여겼지만 오우미의 오츠에 들어갈 때 이상한 노파가 나타나 두 개의 문짝이 달린 궤의 아타고곤겐의 신령님을 주면서 이를 목에 걸고 전공을 세우라고 전하자 시게나가는 가신을 지켜 쫓아갔지만 노파는 이미 사라졌다고 한다.
시게나가는 이로 인해 군신 아타고곤겐이 힘을 빌려줬다고 기뻐하면서 그의 군세는 사기가 올랐고 시게나가는 오사카 포진 앞의 아타고 산에서 참배했으며, 10월 29일에 선봉이 되어 센바에 포진해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는 전사자가 2명만 나왔다.
1615년에 4월에 오사카 여름의 진 때 시로이 성에 사자를 파견해 고향에 돌아온 신하들을 불러들였고 4월 9일에 에도로 출진해 도중에 합류하는 가신이 많았으며, 4월 18일에 마사무네가 카게츠나에게 문안 편지를 보내 시게나가를 중용한다는 것을 전했다고 한다. 5월 5일에 오사카의 도묘지 입구에 포진하면서 군대를 둘로 나누고 한 쪽은 복병을 주변 언덕에 잠복시켰으며, 5월 6일에 고토 마타베에를 물리치거나 오사카 성 제일의 괴력을 가진 장수라고 하는 스스키다 카네스케를 죽이는 등의 활약을 하거나 사나다 노부시게의 차남인 다이하치(사나다 모리노부)를 비롯한 노부시게의 자식을 구출해 시로이 성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오사카 여름의 진 때의 활약으로 인해 아버지에 뒤지지 않는 지용을 겸비한 무장으로 오니 코쥬로(鬼の小十郞)라고 칭해졌지만 아버지로부터 일군의 장으로서 난전 중에 뛰어들어 위험에 노출했다고 질타받았으며, 전투 결과 시게나가의 군세에서 전사자는 8명, 수급은 153개를 취했고 그 중에서 시게나가는 81개의 수급을 취했다고 한다.
11월 1일에 시라이시 성의 1만 3천석을 하사받았고 1620년에 노부시게의 자식 중 한 명인 사나다 노부시게의 딸 오우메를 후실로 맞아들였다고 하며, 일설에 따르면 오사카 전투에서 유키무라가 시게나가의 활약을 지켜보다가 혼인을 신청하는 편지를 화살로 묶어 시게나가의 진에 보냈고 오우메를 오사카에서 데려와서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상당한 미소년이라서 오사카에 올라갔을 때 오사카 성내에서 소란이 일어날 정도였으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구애도 했다고 한다.
시게나가는 오우메 이전에 아내가 있었지만 젊어서 그 아내가 사망하자 후처로 오우메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으로 시게나가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자식은 딸 한 명 밖에 없었고 오메와 화목한 사이였지만 자식복이 없었다.
어느날 시로이 성에 마사무네가 찾아올 때 마사무네가 오메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이 배에 남자가 묵고 있는 것이냐면서 내가 조금만 젊었다면 대신 힘쓴다고 농담을 했는데, 이를 듣고 오메는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오메와의 사이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시게나가의 딸이 시집을 가서 카게나가를 낳았다.
1631년 4월 21일 아침에 시로이 성에 숙박한 마사무네에게 솜 2단, 황금 10장 등을 바쳤지만 마사무네는 솜 50단을 받고 나머지는 시로이 성이 파손될 경우에 수리비에 충당하도록 했으며, 1632년 1월에 시게나가는 타국 출진 인원에 대한 비밀 문서를 다테 가문에 제출했고 이에 따르면 마상 60기, 철포대 300명, 궁병 100명, 창병 250명 등을 포함한 1467명이라고 한다.
1636년 4월에 주군 마사무네가 산킨코타이로 에도로 향하는 도중에 시로이 성에 하룻 밤을 묵자 양자인 카타쿠라 카게나가와 함께 마사무네를 찾아갔으며, 사후 양자가 된 외손자인 카게나가가 카타쿠라 가문을 계승했다.
(1584. 12. 25 ~ 1659. 3. 25)
전국 시대와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다테 가문의 가신으로 다테 마사무네를 섬겼으며, 카타쿠라 카게츠나의 아들이다. 이름은 카타쿠라 시게나가(片倉重長) 혹은 카타쿠라 시게츠나(片倉重綱)[1] 이며, 아명은 야자에몬(弥左衛門), 사몬(左門), 사에몬(左衛門), 통칭은 코쥬로(小十郞), 법명은 신쇼인(真性院).
태어나기 전에 마사무네가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인지라 카게츠나는 아들이 훗날 마사무네를 위협할 것을 염려해서 죽이려고 했지만 마사무네가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편지를 보내면서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다.
1591년에 다테 시게자네를 에보시오야로서 성인식을 올리면서 카타쿠라 시게나가(片倉重長)라 칭했으며, 같은 해에 아버지 카게츠나와 함께 주군인 마사무네를 보좌하여 교토 후시미로 가서 1599년까지 체류하여 그 사이에 타이코에게 하오리를 헌상하였다.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 때 와타리 성을 지키는 것을 명령받았지만 카게츠나와 함께 출전하는 것으로 첫 출전을 해서 시로이 성 전투에 참전했다.
1614년에 아버지인 카게츠나가 병이 들면서 대신 다테 마사무네 휘하에 선봉으로 참전하면서 1월 11일에 마상 60기, 철포대 300명, 궁병 100명, 창병 200명 등을 포함한 1000여 명을 이끌고 시로이시 성에서 출진했는데, 적은 오사카라면서 아군이 승리해서 이름을 신관으로 끌어올리자면서 격려했다. 시게나가는 행군 도중에 코피를 흘려 가신들이 이를 불길하다고 여겼지만 오우미의 오츠에 들어갈 때 이상한 노파가 나타나 두 개의 문짝이 달린 궤의 아타고곤겐의 신령님을 주면서 이를 목에 걸고 전공을 세우라고 전하자 시게나가는 가신을 지켜 쫓아갔지만 노파는 이미 사라졌다고 한다.
시게나가는 이로 인해 군신 아타고곤겐이 힘을 빌려줬다고 기뻐하면서 그의 군세는 사기가 올랐고 시게나가는 오사카 포진 앞의 아타고 산에서 참배했으며, 10월 29일에 선봉이 되어 센바에 포진해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는 전사자가 2명만 나왔다.
1615년에 4월에 오사카 여름의 진 때 시로이 성에 사자를 파견해 고향에 돌아온 신하들을 불러들였고 4월 9일에 에도로 출진해 도중에 합류하는 가신이 많았으며, 4월 18일에 마사무네가 카게츠나에게 문안 편지를 보내 시게나가를 중용한다는 것을 전했다고 한다. 5월 5일에 오사카의 도묘지 입구에 포진하면서 군대를 둘로 나누고 한 쪽은 복병을 주변 언덕에 잠복시켰으며, 5월 6일에 고토 마타베에를 물리치거나 오사카 성 제일의 괴력을 가진 장수라고 하는 스스키다 카네스케를 죽이는 등의 활약을 하거나 사나다 노부시게의 차남인 다이하치(사나다 모리노부)를 비롯한 노부시게의 자식을 구출해 시로이 성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오사카 여름의 진 때의 활약으로 인해 아버지에 뒤지지 않는 지용을 겸비한 무장으로 오니 코쥬로(鬼の小十郞)라고 칭해졌지만 아버지로부터 일군의 장으로서 난전 중에 뛰어들어 위험에 노출했다고 질타받았으며, 전투 결과 시게나가의 군세에서 전사자는 8명, 수급은 153개를 취했고 그 중에서 시게나가는 81개의 수급을 취했다고 한다.
11월 1일에 시라이시 성의 1만 3천석을 하사받았고 1620년에 노부시게의 자식 중 한 명인 사나다 노부시게의 딸 오우메를 후실로 맞아들였다고 하며, 일설에 따르면 오사카 전투에서 유키무라가 시게나가의 활약을 지켜보다가 혼인을 신청하는 편지를 화살로 묶어 시게나가의 진에 보냈고 오우메를 오사카에서 데려와서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상당한 미소년이라서 오사카에 올라갔을 때 오사카 성내에서 소란이 일어날 정도였으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구애도 했다고 한다.
시게나가는 오우메 이전에 아내가 있었지만 젊어서 그 아내가 사망하자 후처로 오우메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으로 시게나가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자식은 딸 한 명 밖에 없었고 오메와 화목한 사이였지만 자식복이 없었다.
어느날 시로이 성에 마사무네가 찾아올 때 마사무네가 오메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이 배에 남자가 묵고 있는 것이냐면서 내가 조금만 젊었다면 대신 힘쓴다고 농담을 했는데, 이를 듣고 오메는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오메와의 사이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시게나가의 딸이 시집을 가서 카게나가를 낳았다.
1631년 4월 21일 아침에 시로이 성에 숙박한 마사무네에게 솜 2단, 황금 10장 등을 바쳤지만 마사무네는 솜 50단을 받고 나머지는 시로이 성이 파손될 경우에 수리비에 충당하도록 했으며, 1632년 1월에 시게나가는 타국 출진 인원에 대한 비밀 문서를 다테 가문에 제출했고 이에 따르면 마상 60기, 철포대 300명, 궁병 100명, 창병 250명 등을 포함한 1467명이라고 한다.
1636년 4월에 주군 마사무네가 산킨코타이로 에도로 향하는 도중에 시로이 성에 하룻 밤을 묵자 양자인 카타쿠라 카게나가와 함께 마사무네를 찾아갔으며, 사후 양자가 된 외손자인 카게나가가 카타쿠라 가문을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