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마사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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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애꾸눈이지만 두 눈이 멀쩡한 초상화. 이유는 아래 '생애' 문단에 서술한다.
伊達政宗(だて まさむね)
1567년 9월 5일 ~ 1636년 6월 27일, 음력 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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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기센다이시에 있는 다테 마사무네 기마 동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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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가의 문장. 센다이 대나무(仙台笹) 문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적으로는 '대나무에 참새(竹に雀)'로 더 많이 불린다.[2]
출토된 유골로 복원한 얼굴. 얼굴만 떡하니 나와서 약간 놀랄 수도 있다.
1. 개요
2. 생애
2.1. 가족
2.2. 전술가로서의 마사무네
2.3. 내정, 외교가로서의 마사무네
2.4. 취미 및 성격
2.5. 다테 마사무네의 유훈
3. 기타 사항
4. 후손
5. 창작물에서


1. 개요


'''독안룡'''
일본 전국시대도쿠가와 막부 때의 무장.
오슈 후지와라의 후예로 다테 가 17대 당주였으며, 아명은 본텐마루(梵天丸).[3] 통칭 토지로[4]라 불렸다. 유골을 통해 분석한 결과 신장 160cm[5], 혈액형은 B형이었다고 한다.
'마사무네'라는 이름은 아버지 다테 테루무네가 다테 가 중흥의 선조라고 불렸던 9대 당주 다이젠다이부(大膳大夫) 마사무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이 때문에 간혹 9대와 구별하기 위해 '다테 토지로 마사무네'로 부르기도 하지만, 17대인 토지로 마사무네가 워낙 대중적으로 보나 여러 면에서나 지명도가 높다 보니 특별한 언급 없이 다테 마사무네라고 하면 대개 17대를 말한다.

2. 생애


다섯 살 때 천연두를 앓는 바람에 한쪽 눈을 잃었다. 그 몰골이 추하다고 하여 친모인 요시히메와 동생 다테 코지로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살해 위협까지 받아야 했다. 결국 어머니와 동생이 그를 독살하려 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덕분에 결국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내쫓아 버린다.[6] 덕분에 하나뿐인 눈은 다테 마사무네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는데, 이에 대한 컴플렉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반드시 두 눈을 모두 멀쩡하게 그리도록 지시했다고 한다.[7] 외눈박이로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초상화나 목상 등에선 양쪽 눈이 모두 멀쩡한[8] 것은 사실 이 때문으로, 애꾸눈으로 그려진 초상화도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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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꾸눈으로 그려진 몇 안 되는 초상화 중 하나. 또한 마츠시마에 있는 즈이간지(서암사) 경내에는 목제로 된 마사무네 상(像)이 있는데, 이 목상도 애꾸눈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마사무네의 생전 모습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로 취급되고 있다. 이 즈이간지의 목상은 마사무네의 17번째 기일을 앞두고 정실 메고히메의 명으로 만들어졌는데, 남편의 진짜 모습을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메고히메의 뜻이 반영되어 애꾸눈으로 만들어졌다 한다.
물론 일가 모두에게서 미움을 산 것은 아니었다. 친부인 다테 테루무네는 다테 마사무네의 재능을 높이 샀기 때문에[9] 미워하기는커녕 그를 보호하고 교육하는데 힘써 스승으로 코사이 소이츠를 붙이고 카타쿠라 코쥬로를 심복으로 붙여 줬으며, 아예 일찌감치 가문까지 물려준다.
가문을 물려받은 다음 해, 회견을 마친 니혼마츠 요시츠구가 아버지인 테루무네를 납치하여 인질로 내세웠으나 마사무네는 이를 무시하고 아버지와 요시츠구를 철포대로 일제 사격하여 죽인다. 일설에는 테루무네가 자기는 상관하지 말고 함께 사살하라고 소리쳤다고도 하지만, 아무래도 사실 여부 판별은 불가능하다.[10]
어쨌든 아버지의 죽음 이후 니혼마츠 가문에서는 아들인 니혼마츠 요시츠나를 당주로 옹립, 다테 마사무네에게 대항하였고 다테 마사무네는 부친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13,000의 군사를 편제하여 아버지의 공양을 위한 전투라며 니혼마츠 가를 쳐들어가 공성전을 펼친다. 문제는 오슈 남부의 사타케의 귀신 사타케 요시시게가 오슈의 맹주이던 다테 가문에게 동맹 or 종속으로 맺어져 있었던 아시나, 이와키, 시라카와 유키 등등의 가문을 규합한 다음 도합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적으로 참전, 다테 마사무네와 일전을 벌인다.
그리하여 오슈의 패권을 건 히토토리바시 전투가 발생, 귀신 사타케 요시시게와 은근 허당 다테 마사무네의 가문의 명운을 건 일전이 벌어지는데 전투 결과는 병력 차도 그렇고 경험치도 그렇고 진종일 다테 군이 처발리다가 다테 마사무네의 병력이 거의 전멸하는 수준에 이른다. 다테 마사무네는 다테 시게자네의 분전덕분에 갑옷에 화살 한 대와 총탄 5대를 맞고도 간신히 살아서 모토미야 성으로 도망쳤고 다테의 중신이던 오니니와 요시나오는 후미를 맡아 분전하다가 전사한다. 다만 이때 사타케와 관동의 패권을 다투던 호죠 가문이 갑작스럽게 사타케 령으로 쳐들어오면서, 사타케 군은 퇴각한다. 덕분에 이후 남 오슈 지방과 아이즈는 사타케 가문의 세력권에 완전히 편입되었고, 특히나 아이즈의 아시나 가문에서는 3살이었던 영아 당주가 급사하여 '다테 가문의 다테 코지로를 당주로 삼느냐, 사타케 요시시게의 아들을 당주로 삼느냐'였었는데 이 전투에서 다테 가문이 패배하면서 사타케 요시시게의 아들을 당주로 삼으며 사타케 가문에 복속하게 된다. 결국 다테 하루무네, 이후 3대를 내려오며 다테 령의 남오우 지방 통치 체제는 완전히 붕괴한다. 다만 이후 사타케 가문은 관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력을 더욱 확대하던 호죠 가문과 싸우며 오슈 지방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게 된다.
이후 다테 마사무네는 아내인 메고히메의 가문인 타무라 씨 등과 연합하고 지속적인 공격 끝에 간신히 니혼마츠 가문의 본성을 빼앗는데 성공하나, 문제는 다테 가문의 아들을 후계자로 들이는 등 사실상 다테 가문에게 종속되어 있었던 오자키 가문이 친 모가미 중심의 독립파+친 다테 파로 나뉘면서 내분 후 반란... 다테 마사무네는 1만의 병력을 동원하나, 눈에 의해 행군이 방해받고, 쿠로카와 하루우지 등의 배반과 오자키 가문의 명장인 난죠 타카노부, 80대의 노장이었던 이치쿠리 호규[11] 들에 의해 격퇴 당한다. 다테 가문은 크게 패배하여 심지어 중신을 오자키 가문에게 인질로 바쳐가며 화의를 맺으며 오자키 가문의 독립을 허용하게 된다. 문제는... 오자키 가문의 뒤에는 오자키 가문의 딸을 정실로 삼았던 데와의 여우, 모가미 요시아키가 있었다는것. 다테 마사무네가 오자키 가문에게도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모가미 요시아키는 아시나/니카이도 가문을 남쪽에서, 본인도 대병력을 데리고 다테 령을 침공한다. 다테 가문 자체가 멸망할만한 대 위기였으나 다테 마사무네의 어머니이자 모가미 요시아키의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직접 가마를 타고 진중에 방문하여 모가미 요시아키에게 회담을 요청, 사실 이 때 모가미 가문도 혼죠 시게나가로부터 쇼나이 지방을 위협받고 있었기 떄문에 모가미 요시아키는 다른 조건 없이 퇴각한다.[12] 덕분에 다테 가문과 모가미 가문은 이후 세키가하라오사카 성 전투, 모가미 가문 멸망 전까지 상당히 강력한 동맹을 유지하게 된다.
그렇게 모가미 가문과의 동맹 성립 후, 다테 마사무네를 계속해서 귀찮게 하던 아이즈의 아시나, 니카이도 가문을 침공. 아이즈의 명가 아시나 요시히로는 총 1만 8천에 사타케 가문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다테 마사무네는 2만 1천의 병력을 동원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병력 차 자체는 비슷하였으나, 사실 아시나 가문의 당주인 아시나 요시히로는 아시나의 핏줄이 아닌 앞서 말했듯이 사타케 요시시게의 아들이었고, '아이즈의 명가 아시나 가문이 감히 사타케 따위에게!'하는 가신들의 이탈과, 본인의 정치력도 형편없었는지, 배반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며 이후 벌어진 스리아게하라 전투에서 아시나 가문은 패배하여 멸망당한다. 해서 다테 마사무네는 아이즈 전역을 손에 넣으며 본령인 오슈의 일부와 무려 50만석에 달하는 아이즈 전역을 손에 넣는 대 약진을 하게 된다!.. 오오 마사무네! 그러나 이것은 이전에 내려진 히데요시의 총무사령[13]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다음해에 히데요시에게 몰수당해 가모 우지사토에게 포상으로 내려진다.
어쨌든 비록 후에 영토는 빼았겼지만 스리아게하라 전투는 사실 전국시대 최대 수준의 대전 중의 하나기도 했고, 다테 마사무네 인생 최대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는 전투였기 때문에 다테 마사무네는 후에 말하기를 "가문의 명운을 건 전투였다."라고도 자주 자랑했다고 하며, 후에 도쿠가와 이에미츠도 당시 전투 승리자인 다테 마사무네와 패배자라 할 수 있는 사타케 요시노부를 불러 이 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 때 다테 마사무네는 신나서 이야기를 했지만 사타케 요시노부는 한마디도 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테루무네의 시절부터 동맹 관계였던 호죠 가 측은 도요토미에 대한 철저 항전의 방침을 세우지만, 호죠 가와 다테 가의 전력을 합치더라도 도요토미 세력에 대항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던 터라 미래는 매우 암울했다. 이에 호죠 가에 대한 의리와 다테 가의 존속 사이에서 장시간 고민하던 마사무네는 도요토미의 계속된 재촉에 굴복하여 결국 호죠를 버리고 도요토미 밑으로 들어간다. 그 직후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단이 늦은 것에 압력을 넣었으나 언변에 능했던 마사무네는 히데요시가 다도에 흥미가 있었다는 점을 이용하여[14] 자신 역시 다도에 깊은 관심이 있다는 식으로 어필하여 무사히 빠져나왔으며, 이후 히데요시는 다테 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오슈 지방의 다이묘로 군림하는 것을 허락했다. 반면 다테 측의 원군을 기다리던 호죠는 도요토미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투항하는데, 이 호죠 가를 두고 히데요시는 영지 대부분을 몰수하나 그래도 1만석을 허락하여 다이묘의 이름만은 지킬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1590년 동생인 다테 코지로(마사미치)가 급사하는데, 에도 시대의 자료에서는 모친과 코지로가 작당하여 장남인 마사무네를 독살하려 했다고 적혀 있으나 이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보니 호사가들이 적당히 지어낸 이야기란 의견도 있다.[15] 그럼에도 사극에서는 마사무네의 삐뚤어진 가족 관계가 클라이막스를 맞이하는 시점이기 때문에 모친의 독살 시도설은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여하튼 확실한 것은 마사무네가 1590년 동생인 다테 코지로 마사미치를 죽이고, 당주의 권한으로 7대 동안 절연을 선언했다는 것. 실제로 마사무네에서 7대가 지난 200여년 후가 되어서야 다테 가문 당주의 손에 다테 코지로가 정식으로 사면받아 가문의 일원으로 제사가 치러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일어난 카사이 오자키 잇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징계로 개역된 카사이 가와 오자키 가의 잔당들이 일으킨 반란 - 의 배후에 마사무네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니혼마츠 사건 당시 순사했던 한 부하의 아들이 자신의 대우에 불만을 품고 마사무네가 카사이 오오사키 잇키 선동을 했다는 상소문과 그 증거인 마사무네의 편지를 올리는 사건이 벌어지자 히데요시는 문책을 위해 마사무네를 수도로 호출한다. 이에 마사무네는 '어차피 죽을 거라면 화려하게 죽자'는 의미로 수의인 하얀 옷을 입고, 금박을 칠한 십자가를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16] 사실 이것은 마사무네가 정말로 죽을 생각이 있었다기보다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청문회장에서 마사무네는 자신은 편지를 쓸 때 바늘로 미세하게 구멍을 뚫어 그것을 '자신만의 숨겨진 사인'으로 삼는다고 주장했는데 증거로 올라온 편지를 살펴보니 정말로 바늘 구멍이 있었고, 이를 본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백을 믿고, 전봉[17]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그쳤다고 한다. 물론 정말로 히데요시가 마사무네의 결백을 믿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실상 마사무네가 잇키 사건에 관여한 것은 거의 확실했으나, 간신히 정권이 안정기로 접어들려는 시점에서 마사무네 같은 거물 다이묘를 함부로 제거하자니 너무 꺼림칙하고, 다른 다이묘들에게도 자신의 관록과 너그러움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매우 너그러운 처분을 내렸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그 뒤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고 조선을 치러 갔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였던 강항이 쓴 간양록에서는 '음흉하고 흉포한 왜장'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당시 히데요시는 1,500명 정도를 준비하라고 일러뒀지만,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의 적극성을 어필하기 위해 그 두 배에 달하는 인원을 동원하고, 도요토미 측의 식량 원조까지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이 때 출정하는 다테 가의 장비가 너무 훌륭해서 일본어로 멋쟁이를 뜻하는 '다테모노'라는 말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장들 중 거물급은 다이묘들이 다 모인 이 전투에서도 가장 거물이었다.[18] 하지만 정작 전장에 나갔을 때는 병량이 부족하고 전선은 계속 고착되는 통에 별 의욕도 없이 대충 싸웠다고 전해지는데, 애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별 충성심도 없는 다테 마사무네가 조선에 간 이유가 오로지 비위를 맞춰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이었으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1593년 3월 부산에 상륙한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치루고 조선에서 딱 6개월만 채우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기존까지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던 양자 히데츠구와 그 파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문제는 마사무네 역시 히데츠구 쪽과 상당한 교우 관계를 가졌다는 것인데, 본격적인 숙청이 시작되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빼면서 마사무네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도요토미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붙었다. 장녀 이로하히메를 이에야스 6남 타다테루에게 시집보내어 혼인동맹을 맺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편에 서는 대가로 7개국 50만석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뒤 약속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지막에는 아예 약속을 백지화시켰다.[19] 원래 다스리고 있던 영지가 약 60만석, 여기에 50만석을 더하면 110만석의 다이묘가 될 수 있었기에, 마사무네는 이 일을 못내 아쉬워 했다. 결국 평생 개간 사업에 열중한 끝에 말년에는 100만 석 영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20] 인간 승리라고 해야 할지 안습하다고 해야 할지.
게다가 견제받아서,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후에도 다른 다이묘들이 차례차례 귀국을 허락받는데도, 혼자서만 귀국을 허락받지 못했다. 에도 성 내부 정비와 에도 성 축성 공사를 명 받아서, 센다이 번에서 에도 성 공사로 42만 명의 인력을 동원했고, 공사비로 2만 7천량(현재 돈으로 36억엔) 정도의 돈을 써야 했다. 1603년 8월, 2년이 지나서야 겨우 고향으로 가도 좋다고 허락을 받고 돌아와보니 센다이의 영지는 황폐해졌고 재정은 빈털털이 상태였다.
해결책으로 범람하던 키타가미강(北上川) 물줄기를 돌리는 치수 공사를 15년간에 걸쳐 실시해서 새로운 농지를 개간했다. 여기서 나오는 쌀은 에도에 팔아서 재정을 확보했다. 그리고 센다이 성도 증축했는데, 전쟁을 위한 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천수각을 만들지 않았다.
어쨌건 에도 막부 설립 이후로 마사무네의 야망은 종지부를 찍게 되고, 막부의 유력한 다이묘로 남게 된다. 저항해 봤자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알자, 2대 쇼군이 된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다섯 번이나 다도회에 초대해서 친목을 쌓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에야스가 병으로 쓰러지자 마사무네가 모반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았고 전쟁 준비를 시작한 다이묘들도 있었다. 1616년 2월 마사무네는 직접 이에야스가 있는 스루가슨푸 성으로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3월 30일 이에야스는 그를 불러 아들 히데타다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두 사람은 함께 울었다고 한다.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은 순간이었다.
이에야스가 사망한 후, 막부의 원로로 대접받았으며, 히데타다는 죽게 되자 임종의 자리에 아들 이에미츠와 마사무네를 불러 놓고 이에미츠에게 마사무네를 자신[21]처럼 여기라고 당부했을 정도. 이에미츠가 "나는 나면서부터 쇼군이다"라고 선언하고 절대적인 쇼군에 대한 복종을 요구한 것도 마사무네의 조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에미츠가 모든 다이묘는 이제 자신의 가신이라고 선언하자, 맨 먼저 이에미츠에게 "이에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이 마사무네에게 토벌을 명해 달라"라고 말했다고. 다만 이제까지 해온 짓이 있었기 때문인지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아이즈번의 와카마츠 성[22]을 마사무네를 감시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개축하기도 했다. 당근과 채찍이라고 해야 될 듯.
1636년에 70세로 사망했다. 지세이는 다음과 같다.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속세의 어둠을 비추고 가네"

"曇りなき 心の月を 先だてて 浮世の闇を 照してぞ行く"


2.1. 가족


정실 메고히메 말고도 적어도 일곱 명의 측실을 더 두었다. 스페인 출신의 서양인 첩 미나미츠키노카타(南樹の方, 본명은 마리아)도 두었다지만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나온 내용이라고 한다. 자녀로는 이로하히메 등 10남 4녀를 두었다. 이밖에 사생아로 1남 1녀가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정실인 메고히메가 낳은 적자는 요절한 아이까지 포함해 기록이 남아 있지만, 측실이 낳은 서자는 성인 한 명밖에 기록에 남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고, 또 측실도 마사무네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여성만이 정식으로 기록되어 실제로는 그 밖에도 관계를 가진 여성이 더 있을 가능성도 있다.
서장자인 히데무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친해서 다테 종가를 잇지 못하고 대신 이요 우와지마 번주가 된다.[23] 다테 종가는 차남인 타다무네가 잇는다. 후손들은 대대로 센다이번주를 지냈다. 다테 지카무네 또한 그의 후손이다.

2.2. 전술가로서의 마사무네


애꾸눈인 탓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지만, 조부인 다테 하루무네+부친에게 물려받은 오슈 탄다이직 및 북동 지역 최고+전체 수위권의 병력 동원력을 가지고도 대부분의 굵직굵직한 전투에서 패배하거나 크게 밀리는 등 전쟁 쪽으로는 별로 뛰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전쟁에서는 너무 별로라 그 내정력을 가지고도 전국 과대사천왕에 당당히 뽑힐 정도. 약소 가문인 오자키 가문을 상대로도 패배하고, 비슷한 전력인 사타케나 모가미를 상대로는 가문 멸망의 위기까지 몰렸으니 일단 말은 다했지만.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동군이었던 다테 군은 서군에 속하는 우에스기 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일전만에 패배하였고, 결국 마사무네는 도망가는 기병들 틈에 섞여 우에스기 군의 칼 세례를 몇 차례나 받아야 했다. 이 때, 마사무네에게 쫓던 우에스기 가의 호걸 오카 사나이[24]는 후에 자신이 추격했던 인물이 마사무네란 사실을 알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입었던 갑옷이 꽤나 명품이었다는 모양.
덕분에 마사무네는 요네자와에 전봉된 우에스기 가문에게 내내 짓궂은 놀림을 받았다. 우에스기 가문의 지략가로 명망이 있던 나오에 카네츠구가 마사무네를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칠 일이 있었는데. 일개 가로와 다이묘의 신분 차이상 나오에가 멈춰서 인사를 올려야 했음에도 무시하고 지나가자 화가 난 마사무네가 나오에를 불러 세워 따졌다. 그러자 나오에는 쿨하게 "아이쿠, 마사무네 공인지 몰라 뵈었습니다. 얼굴을 뵌 적이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마사무네의 얼굴을 모를 리 없던 나오에가 이리 대답한 것은 '''"넌 맨날 져 가지고 도망치는 뒷모습만 봐서 얼굴은 몰랐네요."'''라는 조롱이었고, 마사무네는 얼굴을 몰랐다고 사과하는 상대에게 따질 수도 없어서 얼굴만 붉힌 채 자리를 떴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사카 여름의 진'에선 전초전부터 양측 주력 부대가 갑작스럽게 조우하는 예상 외의 일이 발생했는데, 사나다 노부시게는 이런 무의미한 전투로[25] 병력상의 피해가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 부대를 다급히 후퇴시켰다. 만약 이때 다테 마사무네가 마음 먹고 추격전을 벌였다면 유키무라 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겠지만, 마사무네는 유키무라를 두려워한 나머지 공격을 포기하고 전황을 관망하는 쪽을 택했다. 또한 당시 유키무라는 아군의 사기도 올릴 겸 다테 진영을 향해 "관동 무사 중엔 한 사람도 사내가 없느냐!"며 마구 조롱했을 정도.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무사에게 겁쟁이라는 말만큼 지독한 욕설도 없다. 하지만 마사무네로서는 내심 유키무라가 이에야스를 잡아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테니 단순히 유키무라가 무서워서 덤비지 못했다고 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나마 내세울만한 부분이 있다면 말 위에서 화승총을 쏘는 기마 철포대를 만들었다는 것 정도이다. 모 게임 등에서 다테 가문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지만, 사실 실제 운용은 오사카 여름의 진 딱 한번밖에 없다. 이조차 그 전투에서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크게 패배하여 두번 다시는 운용하지 않는다. 얼핏 생각하면 기병의 돌진력에 화승총의 화력이 더해지니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부대가 탄생할 것 같지만, 당시 화승총은 이동하면서 사격할 만한 물건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26] 기존보다 기동력이 우수해진 화승총 부대에 불과했다. 실제 운용을 살펴보면 말을 타고 달려가서 ''말에서 내린 후'' 총을 사격하여 적진을 교란하고, 이후 보병들과 함께 근접돌격을 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27]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도묘지 전투에서 이 기마 철포대를 적극적으로 전면에 내세우는데, 일단 고토 모토츠구의 병력이 괴멸당하자 구원을 온 사나다 노부시게, 모리 카츠나가 등을 상대로 카타쿠라 시게나가가 기마철포대를 포함한 군대로 반격하나, 사나다 유키무라가 창병들을 이끌고 측면을 공격하여 크게 패배한다. 당시 사나다 유키무라는 조총으로는 누운 적을 명중시키기 어렵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바닥에 붙은 채 창으로 말을 찌르는 전술을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상대가 중국이나 유럽의 기마대였다면 바닥에 누워있어 봤자 기마대 특유의 돌진력에 처참히 짓밟힐 뿐이었겠지만, 돌진을 하지 않으며 싸울 때는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 일본식 기병 스타일이었기 때문에[28] 가능했던 일.
결국 사실 기마 철포에서 '''기마''' 부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봤을때 이 기마 철포대가 진정으로 대단한 건 '기마 철포대'라는 발상이 아니라, '''그 발상을 진짜로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 있다.''' 기마 한 마리를 유지하는 비용이 일반 보병의 3배에 달하는 시대에 기마 철포대까지 창설했다는 건 그만큼 다테 마사무네가 엄청난 국력을 보유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군마가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 그의 영지였다는 것도 한 몫 했겠지만 말이다. 물론 오사카 전투 이후에 다테 가문에서 기마 철포를 양성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2.3. 내정, 외교가로서의 마사무네


무장으로서는 다른 다이묘들에 비하여 상당히 떨어진다고 봐야 하는 마사무네지만, 내정가 혹은 외교가로서의 마사무네는 가히 전국 다이묘 중에서도 최고라고 해도 될 만큼 대단하다.
우선 내정 부분에서는 센다이 평야를 개간하며 부하들에게도 개간 사업을 장려, 운하를 건설하는 등 내정에 힘을 쓴 끝에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58만 석이었던 영지를 말년에는 실질 백만 석으로 늘렸고, 자신의 아들에게도 계속해서 개발 사업을 장려하여 백년 후에는 무려 석고가 2백만 석까지 늘어나 일본 최대의 번이 된다.[29] 또한 대형 항구를 만들어서 에도에 이 쌀들을 판매하는 해상 판로를 개척한다. 이 쌀 판매는 대단히 활발했는데, 에도 시내에서 소비하는 쌀의 절반이 센다이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설명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내정도 대단했지만 특히나 대단한 건 외교 부분인데, 약간의 실패도 있었고 운이 따른 적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단 최초로 다테 가문이 망할 뻔했던 위기였던 사타케 가문과의 대전에서, 사타케 가문에게 패배하였으나 당시 선대로부터 동맹이었던 호죠 가문을 움직여 가문의 멸망을 막았고. 이후로도 호죠 가문과 계속해서 친선하며 강적인 사타케 요시시게를 호죠와의 싸움으로 묶어두었고 메고히메를 아내로 맞으며 타무라 집안과 혼인 동맹을 맺고 니혼마츠 가문을 압박, 니혼마츠 가문과 협상을 통해 성을 무혈 개성하고 아시나 가문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 오자키와의 전투에서 패배 후 벌어진 모가미 가문과의 대전에서는, 다테 요시히메를 직접 전장에 오게 하여 강화를 성공시켰고, 이후 모가미와의 동맹을 맺어 후방을 안정시켜 아이즈 정벌에도 성공한다.
이후 히데요시와의 상대에서는 호죠와의 동맹때문에 고민하다가, 오다와라 공방전에 늦게 참전하며 히데요시에게 감금당하기도 했으나 다수의 병력을 동원하여 히데요시를 만족시켰고, 또 센 리큐에게 다도를 배우고 싶다며 접근하는가 하면 본래 자신을 처벌할 생각이던 히데요시를 구워삶아 비록 아이즈는 빼앗겼지만 본래의 영토를 고스란히 유지한다.[30]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는 잇키를 선동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심지어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히데요시에게 "니가 반란을 하려고 했던 건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니 목숨만은 살려준다. 다만 너는 다시는 네 영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는 얘기까지 들었으나 어쨌든 약간의 영지 감봉과 함께 용서받았고, 이후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의 처형이 벌어진 축생총 사건에서도 사촌이라는 이유로 모가미 요시아키와 함께 반란 혐의를 썼으나 용서받는다. 반면 요시아키 쪽은 연금 처분.
그리고 히데요시 사후, 이번에는 도쿠가와와 연합하여 사돈 관계를 맺으며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까지 동군으로 참전하여 하세도우 전투 등에서 우에스기 가문과 싸웠으며, 댓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백만석으로 영지를 늘려줄 것이라는 약속장을 받는다. 심지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테가 동군 측인 난부 가문의 영지에서 반란을 선동했다는 트집을 잡아 약속을 백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서며 막부측의 경계심을 적절히 이용해 대규모 영지를 유지하고 막부의 원로 지위를 획득한다.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후견인이 되어 이에미쓰를 쇼군으로 세우는데 성공하며, 심지어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사석에서는 다테 마사무네를 '''아버지(또는 할아범)'''로 부를 정도로 가까운 관계가 된다.[31] 이러한 연표들을 종합해봤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전국 시대에서 외교 승리를 기록한 자.

2.4. 취미 및 성격


어려서부터 외국,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후엔 직접 서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에스파냐인들의 도움으로 유럽의 갤리온을 본따 "산 후안 바우티스타"라는 함명을 가진 서양식 배를 만든 뒤 로마 교황청으로 사절단을 보내 무역 허가서까지 얻어냈지만,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령을 내린 탓에 이 무역 허가서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덤으로, 이 때 유럽에 보낸 사절단을 이끌던 다테 마사무네의 가신 하세쿠라 츠네나가는 교황 바오로 5세 및 여러 귀족과 왕을 알현했을 뿐만 아니라, '''루벤스'''를 만나 멋진 초상도 남겼다. 자세한 것은 하세쿠라 츠네나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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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드 마크는 초승달 모양의 장식이 붙은 투구로 이곳저곳에서 곧잘 오마쥬 등으로 사용된다. 센다이 시에 위치한 미야기 스타디움 역시 이런 마사무네의 투구 장식을 본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다만, 미야기 스타디움은 미적 측면만 지나치게 우선한 나머지 일본에서도 스포츠를 관전하기 어려운 구장이 되어 버렸다.[32]
이런 투구 말고도 멋을 잘 부렸는지, 당시엔 멋쟁이 남자를 두고 '다테男'이라 부르는 게 유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테가 진짜 멋져서 그리 부른 것이 아니라 막부 등으로 행차할 때마다 길목에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돈을 뿌려대며 환심을 샀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로 인해 겉치레나 허세를 뜻하는 伊達(다테)의 어원이 됐다는 설도 있다. 참고로 역습의 샤아에서 아무로 레이가 했던 '뉴건담은 겉치레가 아냐!' 대사의 일본어가 νガンダムは伊達じゃない(뉴간담와'다테'쟈나이). 마사무네는 평생 상대를 기겁하게 하는 허풍과 과격한 언동 및 때로는 지나칠 정도의 계략 및 뒷공작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외에도 당시 남자들로서는 상당히 깨는 취미였던 '''요리'''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병사들이 먹을 전투식량을 개발하다가 취미로 변했다는 모양. '''"요리란 모름지기 제철 재료를 자연스레 꺼내서 주인이 직접 조리하여 대접하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센다이 근처의 몇몇 요리학교는 '''다테 가의 비전 요리법'''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정도. 정월의 오세치 요리에서 빠지지 않는 '다테마키'[33] 역시 다테 마사무네란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란 설이 있는데, 이는 유독 다테 마사무네가 '다테마키'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요리에는 조예가 깊었지만 음주 습관은 매우 나빴던 모양으로(술에 약했다고 한다), 숙취 때문에 '''쇼군'''과의 약속을 어겼던 적도 있다고 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끔살이다.
프라이드가 쓸데없을 정도로 높았던 걸로도 유명하다. 현재 기준으로 수억 엔에 달하는 다기를 감상하다가 떨어뜨릴 뻔 해서 허겁지겁 잡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까짓 다기 때문에 놀랐다는 사실이 괘씸해져 다기를 그대로 박살냈다는 일화[34]나 전장에서 좀 오버 액션으로 총알을 피했는데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 총알 날아다니는데도 불구하고 꼿꼿이 서 있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너무 거만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작당하여 도이 토시카츠와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 특히나 마사무네를 싫어하는 무장 4명을 마사무네와 함께 초대하여 같은 자리에서 저녁밥을 먹게 했다. 하지만 큰 싸움이 벌어질 거란 예상과 달리, 그날 밤은 의외로 조용히 넘어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도쿠가와와 도요토미가 사실을 알아 보니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자리란 걸 눈치 챈 마사무네가 요리사를 시켜 그들의 국을 전부 매우 뜨겁게 끓여놨고 그걸 마신 4명은 혀를 데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35]
겉보기와 달리 자신의 군사들은 유달리 아꼈다고 한다. 동맹을 제안하러 사신으로 보낸 병사가 타국에서 기습받아 불구가 되어 돌아오자 그 적국을 초토화시켰고 병사 몇 명이 포로로 되었을 때도 그 상대국을 쳤다고 한다. 또 카타쿠라 카게츠나를 비롯해서 심복들이 죽어나가자 '내 생명을 가져가는 것 같다.'며 한탄했다고 메이겐슈에 기록되어 있다.
도쿠가와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고 막부의 원로가 되고 나서도 묘한 포지션을 유지했으며, 얕볼 수 없는 노련한 책략가로 경계받았다. 스페인 국왕에게 보고된 여러 군인과 예수회 성직자들의 편지에는 대개 마사무네가 이에야스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던가, 언젠가 천하를 쥘 사람이라는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일화에 따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른쪽 눈은 어쨌느냐?"라고 묻자, "나무에서 떨어져서 오른눈이 튀어나왔는데, 너무 맛있어 보이기에 그만 먹어 버렸다."라 대답했다고 한다. 2대 쇼군 히데타다를 센다이 저택으로 초대해 요리를 대접했는데, 계략가였던 마사무네가 쇼군을 암살하는 게 아닐까 걱정한 중신이 "마사무네 님이 먼저 (독이 들었는지) 맛을 보시오"라고 하자, 버럭 화를 내며 "(막부의 기반이 약했던) 10년 전이라도 정정당당하게 반란을 일으켜서 싸웠으면 모를까, 비겁하게 독살하진 않았을 거다." '''내가 반란을 일으켰으면 일으켰지 독살을 왜 하냐'''는 이 엽기적인 대답에 히데타다는 껄껄 웃으면서 마사무네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히데타다의 사자들이 센다이로 와서 "이번 정월엔 쇼군께서 이러이러한 선물을 받고 싶어하신다."라고 넌지시 귀뜸을 하자 "천하의 쇼군께서 어린아이처럼 구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윗사람에게 올리는 진상품은 아랫사람이 고르는 법인데 이 마사무네의 안목을 믿지 못하는 거요?"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3대 쇼군 이에미츠가 매사냥을 너무 좋아해 사냥하다 해가 지면 아무 데서나 노숙하기도 해서 호위에 문제가 생기자, 슬그머니 이에미츠에게 "매사냥은 위험합니다. 저도 (매사냥을 좋아하던) 이에야스 공의 목숨을 노린 적이 있습니다."라고 해서 등골이 서늘해진 이에미츠는 다시는 매사냥을 하지 않았단 일화가 있다. 이 경우 단순히 이에미츠가 마사무네를 히데타다의 유언으로 아버지처럼 모셨기 때문에 따랐을 개연성도 있지만, '''마사무네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년에는 쇼군 앞에서 칼을 차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받았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손에 넣었다. 특히 이에야스보다 후대의 인물인 만큼 그의 사후에 쇼군이 바뀌는 것을 직접 보아왔고 측근으로서 역대 장군들을 쭉 섬겼기 때문에 에도 막부 초기의 중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찌 보면 장수로서보다는 행정가나 정치가로서 더 유능하고, 유명해진 인물이다.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워낙 많이 썼기 때문인지,''' 평소 가신들에게 보낸 편지와 서찰이 수천 통이 넘게 남아있어서 그의 성격을 대변해 주거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편지에서도 여러 모로 우스운 내용들이 발견된다는 게 문제(...). 특히 여러 부끄러운 이유로 '읽거든 태워버려라'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 서찰들이 현대까지 고이 보관되어 있는 점이 정조 어찰첩을 연상케 한다. 물론 마사무네의 가신들은 보험 삼아서 서찰을 보관해두진 않았겠지만.

글씨가 더러워서 미안하다. 새벽에 종자들과 함께 '''팔씨름'''을 하느라 팔이 후들거려 글씨를 제대로 쓸 수가 없다. 나이 값도 못하고 부끄러우니 '''읽거든 태워버려라(卽火中).'''

한밤중에 쓰느라 정신이 없어서 내용이 다소 산만하다. '''읽거든 태워버려라.'''(추신이 '''2개''' 써 있는 편지)

또 그의 편지 덕에 현대인들이 알게 된 에피소드 중 하나로, 부하인 카타쿠라 카게츠나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카게츠나가 주군인 마사무네에게 아들이 아직 없는데 자신이 먼저 아들을 얻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 나머지 '''아들을 죽이려고''' 해서, 이것을 듣고 경악한 마사무네가 카게츠나를 급히 뜯어말렸다는 일화가 있다.[36] 이외에도 달을 감상하는 시회를 열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 구름이 껴서 달을 못 보게 되는 바람에 모임이 침울한 분위기로 끝났고(...) 그 때 달이 나오지 않는 아쉬움을 소재로 쓴 시의 시어를 일부 수정해서 모임의 한 참석자에게 나중에 보낸 편지도 남아 있어서 문화인으로서의 면모를 짐작케 한다.
2017년 1월 11일 미야기 현 오오사키 시에 기증된 마사무네의 다른 편지가 토호쿠 지역 일간지 카호쿠신보에 공개되었다. 마사무네가 1610년 시나노 마츠모토 번주 이시카와 야스나가에게 보낸 것으로, 이시카와의 초대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과 편지이다. 그런데 초대에 응하지 못한 이유가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술을 들이붓듯 마시다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뻗어버려서'''였다고. (기사)[37]
우스꽝스러운 사건을 터뜨리는 사고뭉치의 이미지는 그가 죽을 때까지 늘 따라다녔는데, 나이가 든 후에도 갑자기 에도 성 안에서 막부의 중신이자 로주(老中) 신분인 사카이 타다츠구를 질질 끌고 가서 스모를 하겠다며 시비를 걸어 엎어치고 메친 끝에 '''지거나,''' 보고 싶었던 공연이 끝나버렸다는 이유로 갑자기 노 배우들에게 "배우와 '''관객'''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처음부터 다시 공연해라. 그렇지 않으면 '''전원 죽여버리겠다'''"라면서 땡깡을 부리는 등 황당하기 그지없는 에피소드들이 다른 다이묘들의 기록에 남아 있다. 본래부터 별난 행동, 돌출행동을 좋아하고 화려하고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도 있지만, 에도 막부의 초기는 조금이라도 거슬리거나 시비를 걸 구실이 생기면 다이묘를 가이에키[38] 처분하는 철권통치였기 때문에 과거의 위험인물 1순위인 마사무네가 일부러 막부측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웃기는 사건을 벌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이런 식의 행동이 정말 끔찍한 사건으로 번진 케이스도 없지 않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아군인 진보 데와노카미 시게스케의 부대가 패주하는 것을 보고 전부 쓸어버리라고 명령해서 아군과 적을 가리지 않고 벌집으로 만들었을 정도. 살아남은 진보 가문의 가신들이 막부에 항의하자 '도주하는 아군을 방치하면 아군 전열까지 무너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으냐?(=죽은 놈들이 먼저 겁쟁이처럼 행동한 게 잘못 아니냐?)'라고 역으로 따지고 들어서 무마했다고.[39]
서양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교역을 위해 일본에 온 에스파냐 탐험가 세바스티아노 비스카이노(1548~1624)가 그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통상을 위해 도쿠가와 히데타다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한 직후 에도성 거리에서 마사무네 일행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40] 역시 탐험가 일행을 알아본 마사무네가 사람을 보내 '자신을 위해 축포를 쏴 달라'라는 부탁을 하자 세바스티아노는 이에 부하들을 시켜 축포를 쐈다.[41] 총소리에 놀란 말들 때문에 실었던 짐들이 떨어지고 타고있던 사람도 떨어져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현장을 본 마사무네는 미친듯이 소리내서 웃었다고. 어쨌든 본인은 이 상황에 흡족했는 듯 자신이 직접 말에서 내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42] 에도 성내 자신의 집으로도 초빙한 이후 마사무네가 유럽식 갤리온을 건조하는 데에 세바스티아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2.5. 다테 마사무네의 유훈


인(仁)이 지나치면 약해지며
의(義)가 지나치면 완고해지되
예(禮)가 지나치면 아첨이 되나니
지(知)가 지나치면 거짓을 말하게 되고
신(信)이 지나치면 손해를 입느니라.
느긋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검약하여 재화를 쌓을지어다.
검약하는 방법은 자유롭지 못함을 견딜 줄 앎에 있으니,
이 세상에 객으로 온 것이라 생각한다면 무엇이 힘들겠는가.
세 끼의 식사가 맛없더라도
맛있게 먹을지어다.
원래 객의 신분이라 함은
찬의 맛있고, 맛없음에 따질 수 없는 것이니라.
오늘이 흘러감을 배웅한 후
자손형제들에게 두루 인사를 고하고
이 속세에 휴식을 청할지라.
사실 마사무네는 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유학 자체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막부 초기에 지배 수단으로 유학을 장려하던 것을 비꼬려는 의도였으리라 생각된다.

3. 기타 사항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고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도 남겨져 있으나 싸움을 워낙 못했기 때문에 10년이 아니라 50년을 일찍 태어났어도 다테 가문의 천하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 마디로 하후돈. 둘 다 싸움을 엄청나게 못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애꾸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싸움을 잘한다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마사무네가 아니라 테루무네의 이야기라는 설도 있으며 드라마 천지인에서는 나오에 카네츠구가 이 말을 하면서 마사무네를 놀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2ch 등지에선 전국시대의 거품 중 하나로 취급된다. DQN 4천왕 중 한 명으로도 꼽힌다. 다만 과대사천왕으로 놀리는 측에서도 50만석을 실질 백만석으로 만든 그 정치력이나 영지 경영 능력만은 진퉁, 아니 오히려 과소평가됐다고 치는 편.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정치가 혹은 사업가에 좀더 어울리는 인물이 군인의 이미지로 알려지고 있는 셈.
워낙 말도 안 되는 짓을 많이 저지른 탓에 '삽질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며, 호소카와 타다모토 등의 편지 기록에는 다테 마사무네가 오늘 또 기묘한 짓을 저질렀다 등등의 기록이 남겨져 있다.[43] 남자 애인(!)에게 '젊었을 때는 몸에 상처를 내서 내 마음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는데 이제 그런 짓까지는 못 하겠다. 대체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알아 줄래?'라는 내용의 편지가 남아 있어[44] 역사로까지 수비 범위를 넓힌 부녀자들의 좋은 떡밥이 되기도 한다.[45] 가장 유력한 사람은 시종인 타다노 사쿠쥬로라는 설이 있다. 게다가 카타쿠라 시게나가(카타쿠라 카게츠나의 아들)에게도 뽀뽀를 시전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남자 애인이 오직 다테 마사무네만의 특이한 취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세한 건 와카슈도 항목을 참조하자. 그렇다고 남색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여색도 화려했다. 소실 중에는 조선 여자도 있었고 유럽 여자도 있었다. 다이묘 중에서는 최초로 유럽인 소실을 둔 사람이다.
가문 자체가 혼인 외교를 잘 구사하던 가문이라, 여성과 정말 인연이 많은 편. 특히 상당히 강한 여성들이 많았던 것이 특징. 친모인 요시히메를 비롯하여, 니카이도 가문에 시집 가서 다테 마사무네와 싸웠던 고모인 다테 오나미, 부인 메고히메[46], 사타케 요시시게의 부인도 다테 마사무네의 고모였다.
한국에선 일본식 청주(淸酒)의 일종인 정종(正宗)이 다테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든 것이라는 카더라 통신이 존재한다. 근거인 즉슨 마사무네의 이름을 한국 식으로 읽으면 "정종"이기 때문이라고. 나름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상 청주인 正宗과 政宗은 한자부터가 다르다. 더욱이 正宗은 혼슈 남쪽 지방의 술이고, 마사무네는 혼슈 북쪽 지방 사람.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이 알고 싶다면 정종 문서를 참조하자.
이름을 영어로 쓰면 '''Date Masamune'''가 되는데 '''데이트 마사무네'''라는 해괴한 발음이 나버린다. 실제로도 센다이의 FM라디오 방송국 이름이 바로 'DATE FM'이다.
다만 당대에 유구사절단을 통해 로마 교황 앞으로 보낸 서간에는 Idate Masamune라는 표기가 있어서, 이를 토대로 원래 발음이 '이다테 마사무네'였음이 밝혀졌다. 이다테와 다테 두 발음이 한동안 공존하다가 다테 쪽으로 굳어져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본인은 초승달 장식의 멋진 투구를 썼지만, 정작 병사들의 투구는 괴상하기 짝이 없다. 꼬깔콘이라던지, 교통 표지판라든지 하는 식으로 까인다. 게다가 출전이 임진왜란기 조선 출정식을 묘사한 그림으로, 조선에도 저 모양으로 왔을 것이다.
다테 마사무네가 즐겨 사용하던 마상총이 의병에게 노획되어 그 집안의 가보로 내려왔는데, 그것을 다시 박정희의 경호실장인 박종규[47]가 직접 감정한 뒤 사들였다는 소문이 국내의 전통 군사 관련유물 수집가들 사이에서 나돌았던 적이 있다.(#) 다만 진실이 확인되지 않은 일화이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강항이 쓴 간양록에서도 마사무네가 언급되어 있으나, 일본어를 몰라서였는지 형과 자식을 살해했다는 오기(誤記)가 있다. 아마 아버지인 다테 테루무네가 니혼마츠 요시츠구에게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마사무네가 조총수들을 시켜 두 명을 쏴 죽여버린 일과 어머니와 동생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사실을 알게 하여 동생을 살해하고 어머니를 내쫓은 일을 잘못 알아들은 듯.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무덤 일부가 파괴되었다.[48](#)
오슈-센다이 지방의 다테 가문, 그 중에서도 마사무네의 인기는 대단해서 센다이시의 상징처럼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때문에 일본인들이 센다이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대부분 다테 마사무네이다. 이름난 전국무장이 지역의 상징이 되는 것이 이 지역만의 일은 아니지만, 독안룡 술, 마사무네 떡, 마사무네 도시락, 마사무네 파르페(…) 등등 다양한 특산품이 존재한다고 하니 말 다한 셈. 심지어 라인 캐릭터샵이 센다이시에 생겼을 때도 다테 마사무네를 소재로 인테리어를 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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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이 다테 마사무네를, 샐리카타쿠라 코쥬로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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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전국 바사라 3다테 마사무네 제 2복장이 보라색 바탕에 원색의 물방울 무늬인 바람에 많은 유저들을 뿜게 했는데, 실제 마사무네가 즐겨 입었던 물방울 무늬 진바오리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49]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스핀오프작 노부'''냐'''가의 야망[50]의 다테 마'''샤'''무네도 이 진바오리를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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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센다이 시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실물. 이 사실이 알려진 후 일본 내의 팬들 반응은 "마사무네 공, 웃어서 죄송해요" 또한 이 진바오리가 의외로 유명한지, 다테 마사무네 관련 굿즈들 중에는 이 진바오리의 물방울 무늬를 사용한 것이 은근히 많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명목상으로나마 동군에 소속되어 참전했는데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함께 벌인 삽질은 명성이 높다. 그리고 그 전투 후 다테 마사무네는 땅을 여기저기 주워모아서 기어이 100만석의 대다이묘가 되었으며 이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음으로 많은 영지였다. 대충 시마즈 가문이나 마에다 가문의 영지와 비슷하다. 이들도 대체로 100만석 규모를 유지했다. 참고로 도쿠가와는 자기 직할령 400만, 하타모토의 영역 300만 해서 총 700만 정도다. 일본 전체의 총 석고는 공식적인 수준으로 따지면 2800만 석이다.
이 사람의 후손인 다테 지카무네는 센다이 번의 번주가 되자마자 사망해서 센다이 번의 폐지를 막기 위해 그의 이복동생[51]인 다테 나리무네가 대신 다테 지카무네 행세를 하며 3년 동안 다테 지카무네의 죽음을 숨겨야 했다. 이렇게 다테 지카무네의 죽음을 숨기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한 센다이번 다테 가문의 가신단이 벌인 활약은 은근히 코메디이다. 다만 이 꼼수를 막부 측에서도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센다이 번이 워낙 크고 중요한 지역이어서 함부로 폐번하기엔 막부로서도 부담스러워서 모르는 척 넘어가줬다는 해석도 있다.
재미있게도, 이 지카무네의 증조부인 다테 무네무라가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다른 가문인 호소카와 가문을 구한 선례가 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개그 콤비 샌드위치맨의 다테 미키오가 이 사람의 후손이다. 다만 종가가 아니라 분가 쪽 혈통. 모친 쪽 가계가 다테 종가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개그맨을 할 거면 가명을 쓰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다.
1991년 센다이 아야시 천체관측소에서 발견된 소행성에 다테 마사무네의 이름이 붙어 있다.
페르소나 3에서 등장하는 월광관 학교 고등부 역사교사인 오노 선생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투구도 똑같은 걸 쓰고 있다.
현재 대전 시티즌의 플레잉 코치인 김은중베갈타 센다이에서 활약하던 당시에 얻은 별명이 다테 마사무네의 별명인 독안룡이었다. 베갈타 센다이의 홈은 마사무네가 활약했던 지역인 미야기 현인데다 김은중 역시 다테 마사무네처럼 한쪽 눈이 안 보이기 때문.[52]
다테 마사무네가 가지고 있던 일본도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 오오쿠리카라, 타이코가네 사다무네가 현재 전해져 오고 있으며 이 셋은 모두 웹게임 도검난무-ONLINE-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구체관절인형회사인 보크스에서도 돌피 모델로 등장하였다.센다이 돌파 2에서 한정 돌피로 발매예정.#또 하나는 하세쿠라 츠네나가라고.다만 한국에서는 발표만 했다하면 보크스의 우익논란으로 뜨거워진다고.

4.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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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생존해있는 다테 마사무네의 직계 후손이자, 다테가(伊達家) 18대 당주인 '''다테 야스무네(伊達泰宗)'''의 모습이다.
다테 마사무네의 미친 존재감과는 달리 현재 생존해있는 직계 후손에 대해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아 매스컴 출연도 적다.[53]
다테가 답게 현재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거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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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격인 다테 마사무네의 복장을 하고 센다이 아오바 마츠리에 참가한 야스무네.

센다이시 지역 방송에서 이뤄진 다테 야스무네와의 인터뷰.

5. 창작물에서


다테 마사무네/기타 창작물 항목을 참조.

[1] 원래의 동상이 따로 있었으나 태평양 전쟁 당시 동상째 공출당하는 바람에 전후에 새로 만들어진 게 현재의 동상. 센다이 박물관 앞마당에 옛 동상의 흉상만 남아 있다.[2] 게임 전국 바사라 시리즈의 로고 배경에 쓰인 문장이 이것이다.[3] 브라만(梵)을 남성형으로 인격화한 힌두교의 창조신을 뜻하는 '범천(梵天)'에 '丸' 자를 붙인 걸로 보인다.[4] '지로'이지만 장남이다. 다테 가의 장남은 토지로라는 이름을 대대로 썼다고 한다. 앞에 붙는 '토(藤)'는 다테 가가 무츠(陸奥. 지금의 미야기 현~이와테 현 일대) 후지와라(藤原) 가의 후예이기 때문이다.[5] 당시 동양인 평균 키보다 5cm는 더 크다.[6] 사실 독살설은 후대의 창작이나 코지로를 죽이기 위한 핑계였다라는 말이 많다. 특히나 어머니는 결국 친가인 모가미 요시아키 령으로 가기는 하는데, 이게 다테 마사무네가 코지로를 처형하고서 8년 후의 일이다.[7] 다만, 이는 컴플렉스 때문이 아니라 마사무네가 "설령 병으로 잃었다 할지라도 부모에게서 받은 한쪽 눈을 잃은 것은 불효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초상화나 목상에 두 눈을 모두 그리거나 조각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8] 항목 상단의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오른쪽 눈이 왼쪽 눈보다 약간 작게 묘사되어 있다.[9] 일화 중에 5살인 마사무네에게 부동명왕은 험상궂지만 자비롭다고 말했는데 마사무네가 "다이묘의 모범이구나."라고 해서 재능을 간파했다고 한다.[10] 니혼마츠 요시츠구와의 교섭 시도도 미진했고 아버지가 있는데도 철포 사격을 한 일 등등 때문에 일본의 연구가 중에서는 '다테 마사무네가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해 아버지를 일부러 죽였다!'는 설도 있는 모양. NHK에서 방영된 마사무네의 진실편에서는 이 설을 소개하고, 아버지 덕분에 다이묘가 된 다테 마사무네가 그럴 리 없다며 반박하는 설을 함께 실었었다. 다만 당대에 다테 마사무네와 싸웠던 오나미히메는 마사무네 5역이라며 다테 마사무네의 5가지 잘못을 포고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죄였으며, 강항간양록에도 다테 마사무네를 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음험한 자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면 최소한 적국에서는 다테 마사무네가 아버지를 죽인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1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통솔, 지력 80이 안되는 애매한 명장들이다. 천도에서 호규는 제사지사라는 고급전법을 가지고 있어서 쓸 만은 하다.[12] 모가미 요시아키는 이때 자신의 여동생이 진중에 도착했다고 하자 직접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데리고 가서 고모에게 인사시킨 후 그 모습을 보며 아니 이렇게 사이가 좋은 데 왜 싸워야 하나 하면서 펑펑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시스콘...그리고 무조건 강화 이후에 요시히메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그대를 생각해서 강화한 건 아니었다..."[13] 다이묘 간 사적인 분쟁을 금지하는 명령. 1586년에 내려졌다.[14] 히데요시는 자신의 낮은 신분을 평생토록 수치스럽게 여겼고, 이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출생 배경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당시 고급 문화였던 다도에 빠져 비싼 자기 등을 사들였다.[15] 그도 그럴 것이 모자 간의 사이가 나쁘긴 커녕 도리어 자기 어머니와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다는 기록이 문헌 상에 남아 있으며, 이 독살 시도 이후 8년 후에나 어머니가 야마가타로 이봉한다.[16] 십자가하면 가톨릭을 떠올리지만 원래부터 일본에는 십자가형이 있었다.[17] 봉지, 즉 자신의 임지-영지를 옮기는 것. 보통 행정이나 처벌적인 의미로 명령되며 이 경우 사실상 땅을 빼앗겼다.[18] 다테 마사무네는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겨우 26세로, 나이와 연륜만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비해 한참 애송이였으나, 그 어린 나이에도 도요토미에게 개겨본 전적이 있으며, 이후 둘에게 비벼보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대다이묘다. 실제로도 다테 가문은 에도시대 이후 도쿠가와 가문에 이은 일본 2인자 가문이 되었다.[19] 전쟁 중 다테 마사무네가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같은 동군인 난부 토시나오의 영지에 속한 잇키(과거 와가 히에누키 잇키(1590)를 일으켰던 와가 타다치카가 세키가하라 전투 중에 일으킨 이와자키 잇키)를 몰래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에 대해선 이에야스 측이 59만석을 주기 아까워 하여 마사무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설도 있다. 에도와 가까운 다테 세력이 커지면 이에야스 본인의 가문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봤다는 해석도 있다.[20] 명목상의 고쿠다카는 64만 석이지만, 실질적인 수입이 거의 1백만 석에 달했다고 한다.[21]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22] 츠루가 성이라고도 불린다.[23] 막말 4현후 중 한명인 다테 무네나리가 그 후손이다.[24] 본명은 오카 사다토시. 당시 우에스기 가문이 미츠나리와 협공하기 위해 군비를 갖출 때 영입한 인물로 수전노로 이름이 높았지만, 나중에 우에스기 군이 전비 충당이 힘들어 곤란을 겪자 주군인 카게카츠에게 재화를 헌상하고, 동료들에게도 빌려주었고, 우에스기가 전봉 당하자 예전의(동료들에게 돈 빌려준) 빚문서들을 싸그리 불살라버린 대인배였다.[25] 당시 유키무라는 처음부터 이에야스의 본진을 노리는 작전을 세웠다.[26] 유럽처럼 권총인 피스톨이 일본엔 없었다.[27] 스즈키 마사야의 일본의 기마 군단 돌격 부재 설에 따르면 보병들과 함께 말에서 내려서, 근접 돌격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조실록 등에 나온 일본 기병의 모습처럼.[28] 왜냐면 일본은 기병 전술이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보니 명나라 기병한테 붙는 족족 박살이 났다.[29]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다테 마사무네》에서는 마사무네가 싸워 얻은 영지를 히데요시가 무력 개입하여 대폭 감봉시켰다고 부들거리는 마사무네에게 마사무네와 묘한 친분관계가 있던 이에야스가 '자네 영지는 실질 고쿠다카가 굉장히 과소평가되어 있고 미개발 상태라서 개발 사업만 잘 하면 백만 석 정도까지 거둘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좋은 영지를 히데요시가 미처 몰라서 준 건데 왜 화를 내는가?'하고 조용히 타이르기도 한다.[30] 히데요시는 자신을 천하의 패자로 선언한 뒤 센고쿠 시대를 끝낸다며 '소부지레이'를 선포하여 다이묘 간의 모든 싸움을 사사로운 것으로 엄금했는데, 마사무네는 이걸 어긴 혐의를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대규모 토벌로 인해 같은 혐의를 받은 시마즈 씨 등의 세력이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호조씨는 아예 멸망해버린 것을 생각하면 마사무네는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다고 해도 좋다.[31]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에선 동생만 총애하는 어머니에게 미움받은 일로 두 사람이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때 마사무네는 자신들과 비슷한 입장인 오다 노부나가의 예를 든다.[32] 이 때문에 J리그 팀인 베갈타 센다이는 시내 나나키타 공원에 위치한 축구전용 구장인 유어텍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33] 계란에 생선살이나 새우 같은 해산물을 으깨어 술과 함께 섞고 달게 간하여 두툼하게 부친 뒤, 그것을 김밥처럼 돌돌 만 음식.[34] 이 일화는 다테 마사무네의 일화가 아니라 중국 불교 선종의 경전에 나오는 일화다. 해당 일화에서는 자기를 박살낸 사람이 중국의 장군으로 나오며 이 책은 당연히 다테 마사무네의 생존 시기보다 더 오래 전에 출간됐기 때문에 이 일화는 선종 계열의 불교가 일본 사무라이 계층에 널리 퍼지면서 마사무네의 일화로 오해된 경우인 듯 하다. 이와 같이 일본 전국시대의 수많은 일화들이 알고보면 다른 원전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난세라는 전국시대의 특징으로 공신력 있는 역사서의 편찬이 이뤄졌던 시기도 아니고 대부분의 일화들이 각 가문들의 자화자찬용 기록에서 나온 것들을 조합한 것이다 보니 신뢰성이 떨어지는 일화들이 많다.[35] 일본식 식사에서는 우리나라처럼 국을 수저로 떠 먹는 게 아니라 좀 작은 국그릇을 들고 쭉 마시는 식으로 먹기 때문에 국을 저리 뜨겁게 데우면 당연히 혀를 덴다.[36] 단, 편지 내용에 '하도 아들을 죽이겠다 말하고 다닌다고 들어서 급하게 편지를 쓰는 바이다.'라는 구절이 있어서, 바로 죽이지 않고 죽이겠다고 주변에 공언하고 다닌 것으로 미루어 보아 주군의 인기 상승을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가능성도 있다.[37] 기사 본문에 이 편지의 실물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데, 술 취해서 쓴 것마냥 휘갈겨쓴 필체로 쓰여 있다.[38] 영지를 몰수하고 서민으로 강등시키는 처분. 즉 죽지만 않을 뿐 '''가문이 멸망'''하는 것이다.[39] 그런데 진보는 영지가 다이묘의 기준인 1만 석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세력만을 가진 무사였기 때문에 적의 본대에게 밀리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고, 그런 진보 부대를 밀린다며 쏴버린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잔인무도한 행동이다. 진보에 비하면 다테의 영지 규모가 깡패여서 이런 일을 저질러놓고도 어영부영 넘어간 것.[40] 참고로 이 통상 협상 자체는 꽤 진전이 이루어졌음에도 결국 가톨릭 포교 문제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41] 이들은 외국인이었고 살상 용도는 아니였지만 이런 행동은 목숨 거는 행위나 다름 없었다! 추신구라 참고.[42] 이에 "예의가 바른 사람이다"라고 평을 남겼다.[43] 다만 이건 당대 정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근기지방, 오사카·교토의 사람들은 이외의 지역을 상당히 무시했고, 덕분에 동북지방의 다이묘들은 일반적인 다이묘들보다 더욱 더 높은 교양을 갖추고 다도를 배우며, 예컨대 모가미 요시아키 같은 경우에도 상당한 문화인이었다. 다테 마사무네 같은 경우에는 기행을 했다고도 한다. 물론 동북지방의 경우 오슈의 광활한 토지를 기반으로 많은 고쿠다카(石高)를 보유한 지역이었다. 지금도 비록 데와국과 합친 것이긴 하지만 혼슈 전체 면적의 30%를 차지할 정도이니.[44] 이 말고도 '오늘 누구랑 뽀뽀했는데 절대 바람 핀 게 아니니 안심해라.'(...)라는 편지도 있었다 한다.[45] 이 때문인지 일부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다테 마사무네의 정실인 메고히메가 졸지에 Bitch 취급을 받는 일도 간혹 있다고 한다.[46] 교토 취락제에 인질로 가 있을 당시 마사무네에게 편지를 통해 교토의 정세를 알리는 등 다테 가의 외교관 역할을 했는데, 이 당시 남편에게 보낸 서찰 중 '''늘 비수를 품고 있어서 결코 치욕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 말고 계시라'''는 내용이 있다.[47] 일명 '''피스톨 박'''이라고 불리던 총덕후로 유명한 인물이다.[48]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1979년에 복원되었다.[49] 스핀오프작 전국 바사라 사나다 유키무라전의 개그 무기 중 하나가 이 물방울 무늬가 들어간 부채다..[50] 본편의 인물들이 고양이로 등장하는 소셜 카드게임 형식의 번외작이다.[51] 나이는 동갑인데 생일은 몇 개월 차이 난다. 부친은 동일 인물이지만 모친이 다른 인물인 이복 형제이다.[52] 다만 마사무네가 오른쪽인 반면 김은중은 왼쪽이다.[53] 이러한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흔한 편이다. 조상이 아무리 위인이라도 그 후손들은 조용히 살려고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