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바야카와 히데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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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지(高台寺) 소장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초상[1]
1. 개요
2. 생애
2.1. 도요토미의 귀공자
2.2. 코바야카와 가에서
2.3. 정유재란과 그 후
2.4. 동서군 분열과 세키가하라
2.5. 오카야마 번주
3. 참고 문헌
4. 기타
5. 창작물


1. 개요


'''이름'''
'''木下秀俊''' - '''羽柴秀俊''' - '''小早川秀俊''' - '''小早川秀秋''' - '''小早川秀詮'''
'''한국명'''
기노시타 히데토시 - 하시바 히데토시 -
코바야카와 히데토시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秀秋, 秀詮)
'''별칭'''
'''킨고(金吾)'''[2], 킨고 쥬나곤(金吾中納言), 치쿠젠 쥬나곤(筑前中納言)[3], 오카야마 쥬나곤(岡山中納言)[4].
'''생몰년'''
1582년 ~ 1602년 10월 18일(음력) 12월 1일(양력)
쇼쿠호 시대의 다이묘. 코바야카와 가 당주. 도요토미 일문의 세이카 가격 쿠게나리 다이묘로, 탄바 카메야마, 북규슈 치쿠젠, 에치젠 등지의 영주를 지냈으며, 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 그 공으로 초대 오카야마 번주가 된 인물.

2. 생애



2.1. 도요토미의 귀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내 키타노만도코로 네네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다섯번째 아들. 생년에 대해서는 이전에는 1570년대 말부터 1580년대 초까지 넓은 범위의 추정이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1595년에 쓰여진 무라야마 서장에서 "오(午)년에 태어나 14살이 되셨다"고 언급한 것을 근거로 하여 1582년생설로 굳어졌다. 탄생 이후 어린 나이로 친자식이 없던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고, 그 시점은 늦어도 1585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해에 히데요시의 서장에서 그의 양녀였던 고우히메[5]와 함께 언급되기 때문. 이 이전 시점 히데요시에게 양자 히데카츠[6]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가 이 시기에는 병을 앓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이 당시 킨고는 히데요시의 유일한 양자였다고 할 수 있다.
1588년 히데요시의 저택인 주라쿠테이에 덴노가 행차하였을 때 덴노와 도요토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다이묘들의 서약서를 덴노의 대리로서 받는 등 도요토미의 후계자, 주요 일족으로 대접받았다. 이후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탄생하자 후계자의 자리는 상실하였으나 히데요시의 양자 자리는 유지하였고, 탄바 카메야마를 영지로 받았다. 이는 히데토시를 츠루마츠를 보좌하는 공가이자 일문 다이묘로서 성장시키려는 히데요시의 의중이 담겨있었다고 할 수 있다.

2.2. 코바야카와 가에서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이듬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다.[7] 1595년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숙청될 때 그에 연루되어 탄바의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 탄바 몰수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양부 타카카게의 은거에 의하여 그의 영지인 북규슈 치쿠젠을 상속받기에 탄바의 영지를 도요토미 정권에서 회수한다는 형태를 취했지만, 당시의 서장을 살펴보면 당초의 타카카게 은거 - 히데토시의 상속 예정보다 빠른 속도로 급히 이루어진 일임이 확인되어, 사실상 히데츠구 사건에 연좌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탄바를 상실하고 코바야카와 가를 상속하는 것으로서 히데토시의 도요토미 일족 다이묘로서의 지위는 소멸하였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히데아키는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 다이묘들 중 상당한 상위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회측의 기록에서 명의 사신을 히데요시와 함께 응접하였던 최고의 다이묘 여섯명의 이름에 다른 세이카 다이묘들[8]과 함께 킨고도노(金吾殿), 즉 히데아키가 있었던 것이 그 근거. 1597년 타카카게가 죽은 후 이름을 잘 알려진 히데아키(秀秋)로 바꾸었다.
제 1기 치쿠젠 다이묘 시절 히데아키의 정치는 히데아키가 아닌 가로 야마구치 무네나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는 히데요시에 의하여 히데아키의 가신으로 보내진 인물로, 도요토미 정권의 행정관 중 하나였다. 그는 검지를 실시하고 연공을 조정하는 한편 치쿠젠, 그 중에서도 특히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던 하카타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서 만들려고 한 히데요시의 의향을 철저히 반영하여 하카타 마치슈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통제를 강화하여 마치슈를 압박하였다. 이외에도 전쟁의 기지로서 철저한 전시 태세로 영지를 운영해나간 무네나가에 대하여 히데아키는 상당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히데요시 역시 양자의 대립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는 이후 정유재란 시기 히데아키에게 무네나가의 뜻에 따를 것을 명령하는 근원이 된다.

2.3. 정유재란과 그 후


그 후로는 정유재란에 참가하였으며, 일부 기록에서는 정유재란의 총대장으로 기록되어있다. 전후 30만 석의 치쿠젠에서 15만 석의 에치젠으로 전봉되었다. 히데아키가 물러난 치쿠젠은 도요토미 정권의 부교 관리지가 되었다. 이 전봉의 구체적인 이유는 불명확하다. 2차 사료, 군키모노 등에서는 울산성 전투 때 총대장의 신분으로 직접 나아가 싸웠기 때문에 "대장의 본분을 잊었다"며 히데요시에게 질책당하고 전봉된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러한 일로서 전봉되는 것은 다소 상식적이지 않으며, 히데아키의 울산 참전 여부 자체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상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아키의 이봉은 정유재란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파악된다. 이에 대한 시각들을 살펴보면, 당시 히데아키와 무네나가의 대립은 완화되지 않고, 양자의 대립이 심화되자, 히데요시가 자신의 의중에 따르지 않는 히데아키를 전쟁의 총지휘관역에서 배제하는 한편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영지인 치쿠젠에서도 배제한 것이라는 시각, 히데요시 사후 조선에서의 철수가 완료된 이후 치쿠젠 영지로 복귀하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군의 철수 거점인 치쿠젠을 도요토미 정권 측에서 직접 관리하며 제장들의 귀환을 감독하기 위해 히데아키를 에치젠으로 이동시켰다는 시각, 일본군 철수 목적이 아닌 장기화된 전쟁의 병참 기지로서의 안정화를 위하여 그에 반대하던 히데아키를 배제하고 치쿠젠을 정권에서 직접 관리하려 시도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어느 것이던 정유재란과 연관이 있으며, 히데요시가 히데아키를 견제하려 한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이봉으로 인하여 히데아키의 원 가신단은 해체, 일부는 히데아키를 따라 에치젠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주가인 모리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일부는 이시다 미츠나리 등 도요토미 정권의 인물들의 치하에 들어갔다. 지속적으로 히데아키와 대립하여 결국 이봉의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는 가로 야마구치 무네나가의 경우 완전히 독립 다이묘로서 카가 다이쇼지 성주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전쟁이 완전 종결된 뒤 히데아키는 본래 영지였던 치쿠젠의 다이묘로 복귀, 농민의 안정화를 꾀하는 한편 야마구치 무네나가가 탈취하였던 하카타 상인들의 특권을 다시 그들에게 부여하고 간섭 정지를 선포하여 상업 증진을 도모하였다.

2.4. 동서군 분열과 세키가하라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도요토미 정권은 정권 핵심 인물들(십인중)에 의한 합의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 시기 히데아키는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도요토미 일문으로서 고다이로에 준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일례로, 덴노의 퇴위 의사를 알리는 칙사 파견의 대상에 대하여 쿠죠 카네타카(九条兼孝)가 일기에 기록한 것을 보면 도쿠가와, 마에다 등 고다이로와 함께 히데아키에게 칙사가 보내졌다고 나온다. 또한 이에야스의 참내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에야스의 뒤를 이어 히데이에, 히데아키가 봉헌한 것을 언급하고 타 다이묘들의 봉헌을 기록하여 히데아키의 위치가 여타 다이묘들 이상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도요토미 정권 내부는 점차 혼란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와 마에다 겐이, 마시타 나가모리, 나츠카 마사이에(도요토미 삼봉행), 고니시 유키나가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아사노 요시나가[9] 등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오대로 사이에서도 1인자라 할 수 있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토시이에, 모리 테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카게카츠 사이의 갈등이 격발되었다. 두 갈등은 서로 얽히게 되어, 구로다, 후쿠시마, 아사노, 가토, 호소카와 등이 도쿠가와가 연합하고 이시다, 봉행중, 고니시와 반 도쿠가와 파가 연합하는 형세가 나타났다.[10] 이러한 갈등 속에서 히데아키는 특정 진영에 속하여 움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1600년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을 이끌고 동진하자, 오사카 일대에서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테루모토, 도요토미 삼봉행과 이시다 미츠나리는 거병하였다(아이즈 정벌과 서군 거병). 히데아키는 이 시점에 서군에 가담하였고, 토리이 모토타다가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을 공격하는 데 주력으로서 군을 이끌고 참여하는 한편 다이고, 오츠, 야마시나 등 기나이의 요충에 군을 전개, 해당 지역들을 제압하였다. 적어도 서군 거병 초기에는 히데아키는 오사카측의 주력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이후 히데아키의 정확한 움직임은 명확치 않다. 확실한 것은 이 시기 히데아키에게 동군 측에서 접근해온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구로다 나가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가 있다. 이들은 동군이 키타노만도코로 네네를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며 히데아키에게 에도측으로 돌아설 것을 요청하였다. 히데아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동군에 가담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이 이루어진 시점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세키가하라의 본 전투 이전이라는 것만에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음력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동서군이 격돌하는 결전이 벌어졌다. 시라미네 쥰(白峰旬) 박사의 당대 서장, 일기에 근거한 연구에 의하면, 당일 히데아키와 오사카측, 에도측의 움직임은 다음과 같다.
1. 히데아키의 에도측 가담을 오사카측이 확인, 오가키 성을 나와 히데아키의 토벌에 나섬.
2. 이에야스, 오사카측을 쫓아 세키가하라로 진군.
3. 개전. 히데아키,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격파. 에도측과 함께 오사카측에 맹공.
4. 정오경, 오사카측 궤멸. 2시간만에 세키가하라 전투 종결.
결전 후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에게 오사카측을 격파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에 대하여 감사받으며 그 자식인 히데타다에 맞먹는 대우를 약속받았다. 그 뒤 미츠나리의 본거지 사와야마를 공격하는데 참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를 보여주는 1차 사료는 없다. 문서상에 나타난 히데아키의 이후 행적은 우키타의 본거지인 비젠 공격이다. 일전 우키타 소동 때 우키타 히데이에와 반목한 비젠의 무사들을 포섭한 히데아키는 전 우키타령을 무난하게 접수하였다.

2.5. 오카야마 번주


동서군 전쟁의 공적으로 히데아키는 옛 우키타의 영지인 비젠, 미마사카로 가증전봉, 오카야마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영지에서 그는 농업 진흥책을 시행하는 한편 오카야마 성에 해자를 정비하고[11] 구루와를 정비하여 조카마치를 확대, 정비하였다. 누마 성(비젠 카메야마 성)의 천수를 오카야마로 옮겨 망루로 사용하게 하기도 하였다.
1601년, 히데아키는 히라오카, 이나바, 마츠노, 스기하라 등 중신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행하였다. 숙청 과정에서 스기하라는 처벌, 죽임을 당했고, 이나바, 마츠노, 히라오카는 출분하였다. 이는 중신 세력들의 권력이 다이묘인 히데아키의 권력을 위협하였기 때문이었으며, 에도 초기 여러 번주들에 의하여 행해진 권력 집중 정책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중신 세력을 일소한 뒤 히데아키는 군의 법도를 정비하고, 세키가하라 이후 낭인이 된 무사들을 등용하고, 농촌 진흥을 실시하고, 검지를 통하여 정확한 영지의 생산력을 파악하였다. 히데아키의 이 개혁 정책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오카야마 번의 경제, 군사는 모두 안정되었고 히데아키의 권력 역시 그의 측근들에 의하여 굳건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 개혁은 모두 완벽히 끝을 맺지 못했다.
1602년, 히데아키는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스승이던 쇼고인 도쵸의 글에 의하면 매사냥을 나갔다 돌아온 뒤 갑작스럽게 쓰러졌고, 이튿날 상태가 급속히 악화, 그 다음날에는 상태가 완화되었으나 새벽 결국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3. 참고 문헌


  • 구로다 모토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戎光祥出版, 2017
  • 구로다 모토키, "근세 초기 다이묘의 신분질서와 문서", 戎光祥出版, 2017
  • 미츠나리 쥰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 히데아키", 미네르바, 2019
  • 구로다 모토키, "하시바를 칭한 자들", 카도카와 선서, 2016

4. 기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름[12]이 종종 보이는 무장. 물론 조선측이 첩보로 얻은 정보가 대부분이다보니, 다소 부정확한 내용도 많이 보인다. 그 예 중 하나인 정원이 비변사가 항왜를 공초한 것으로 아뢰다의 경우에는 가족 관계부터 틀려놓았다.[13]
죽은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3년 안에 천벌이 내릴 것이라고 저주 때문에 앓다가 죽었다는 설은 있었지만 이건 물론 헛소리다.[14] 이외 '길에서 시비가 붙어서 칼에 베여서 죽었다', '식사를 나르다가 엎어버린 코쇼[15]에게 할복을 강요하다가 거꾸로 베여서 죽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방침 때문에 암살당했다', 낙마설 등이 사망의 원인으로 주장되나, 일단 당대 기록상[16]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은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두 명의 형이 모두 병몰했기 때문에 '유전병이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설이 있다. 술로 인한 주독으로 죽었다는 의견이 현대에는 있다.
자신에게 훈계를 하는 가신을 베어죽이거나 히데아키의 인물됨에 실망하여 재야로 내려갔다는 가신이 있다는 점하고 인기가 낮다는 점[17]에서 능력 면에서도 혹평을 받아왔으나 실제로 히데아키의 지배령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었다는 점과 전공을 세운 기록이 있기 때문에 창작 작품이나 후세의 평가만큼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 정설. 또한 기록에 따르자면 히데아키의 죽음을 백성들이 몹시 아쉬워했다는 부분이 남아있다. 또한 가신에 대한 이야기의 경우 전형적인 다이묘들의 권력 장악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요즘 학계의 주류 의견이다.
특히나 어릴적부터 상당히 총명하여 와카 등을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는 말도 있고, 특히나 천하를 갈랐지만, 정작 다수의 대다이묘들은 천하를 가르는 전투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렇게 넓은 영지를 지닌 다이묘는 아니면서도 병력을 정말 미친듯이 긁어모아 무려 15000명의 병력을 동원, 요충지에 진을 쳤고. 정말 다수의 병력이다보니 이에야스로부터는 참전을 댓가로 비젠과 미미사카 2개국을 포상으로 받을 것을 약속받았고, 미츠나리로부터는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때까지 관백의 자리와 함께 근기 지방 2개국을 포상으로 받을 것을 약속받았던걸 보면, 확실히 그냥 범용한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모가미 요시아키다테 마사무네의 숙부인데다가 사이가 안 좋았다는 이유만으로 음흉하며 간계를 꾸미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하고 비슷한 요량이다. 일본 내에서는 서군을 치켜올리면서 서군을 배신했기 때문에 부당한 비난까지 듣게 된 기색이 강하다.
어쨌거나 코뱌아카와 히데아키에 대해서는 다른 다이묘들과 마찬 가지로 일본에서도 연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서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따라서 게임이나 소설의 인물됨은 어디까지나 후세의 창작이다.

5. 창작물



5.1. 전국 바사라 시리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전국 바사라) 문서 참조.

5.2. 지휘봉의 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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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신장 170cm, 비주얼 연령 16세, 취미는 웃는 얼굴 연습. 좋아하는 것은 죽순이다.
불편할 정도로 정중한 태도에 생글생글 웃는 얼굴, 천사 날개를 연상시키는 어깨 갑옷까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착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역시나 여기서도 배신자. 도쿠가와 측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본색을 드러낸 뒤에는 머리카락도 삐죽삐죽 솟고 1인칭도 달라지며(와타시 → 오레) 말투도 거칠게 변한다. 도쿠가와 측의 신호로 오오타니 군을 급습하나 오히려 배신에 대비하고 있었던 오오타니 요시츠구에게 패퇴. 이후 등장이 없다가 마지막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호통을 듣고 패배한다. 실제 인물의 최후 탓인지 이때 그동안 배신한 사람들의 허깨비를 보는 듯한 대사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코바야카와 가의 양자로 간 것에 상처 받아 인간은 모두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라 여기게 되었다. 믿을 만한 친구도, 믿을 만한 가신도 없는 처지라 오오타니 요시츠구에게도 시마즈 요시히로에게도 동정 받았다.

5.3. 토탈 워: 쇼군2


히스토리컬 배틀에서도 당연 배신한다. 처음 로딩 화면 때 적군 측으로 소개되어 있어 배신할 거란걸 눈치 챌 수 있다. 군세는 약 1000여명으로 맵 서쪽에 짱박혀 안 싸우고 있다가 도쿠가와 군이 밀리기 시작하면 배신한다. 문제는 아군은 필경 도쿠가와 군과의 싸움으로 약해져있을테고 근처의 시마즈 군은 수도 적고 삐져서 그 전에 안 도와주다가 코바야카와에게 밀려나가기 일쑤다. 그저 도쿠가와 군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쓰러뜨리고 코바야카와 군을 상대하는 수밖에 없다.

5.4.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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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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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그냥 봉록 축내는 쓰레기다. 천하창세천도에선 하카타 지방의 다이묘로 나오는데, 자기 능력치가 전국 패왕 급인 것도 모자라 가신들의 수도 능력치도 변변찮은데다 영지 양 옆에 구로다 간베에나베시마 나오시게라는 무시무시한 세력이 있어서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한다(사실 역사상 영지 경제력을 조금이나마 반영해 줘서 초기 기반은 히데아키가 약간이나마 더 강하지만 도저히 그거로 만회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인기가 보잘 것 없어서 순수한 하드코어 플레이용 세력으로 꼽힌다. 심지어 혁신에서 아예 술먹고 시동을 괴롭히다가 '''시동의 손에 죽어버리는 이벤트'''까지 있다! 그러나 창조에서는 약간 재평가(?)받았다. 개명 이벤트에서 미래를 내다본 말을 하고 목소리도 침착한 청년의 목소리다.
창조 PK에서 이시다 미츠나리로 세키가하라 전국전을 진행했을 경우 조건에 맞추어 이에야스와의 약조를 어기고 만오천의 병력을 가지고 서군으로 참전한다. 그리고 승리하면 서군 장수들 끼리 덕담 나누고 있는 가운데 미츠나리가 자신을 관백을 추천하겠다고 하니 대놓고 기뻐한다.
게임 이벤트 내에서는 나름 머리 굴리거나 통찰력이 있는 듯한 묘사가 많이 나오는데 정작 게임 내 능력치가 폐급인 케이스.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선 합전 85 내정 73으로 역대 최강 능력치로 폭풍 상향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찌질함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에피소드 세키가하라때 아무튼 미츠나리가 나쁘다며 배신한다. 격파하면 이 싸움 내게 무리라며 도망간다. 거기다 주색으로 엉망진창으로 살다 요절했다는 설명까지 덤. 이럴거면 능력치는 왜 폭풍 상향했는지가 의문일 정도.

5.5. 태합입지전 시리즈


역시 쓰레기. 한데 여기서는 유일하게 나오는 시나리오가 1598년 태평의 장인데 큐슈 북부의 다이묘로 나온다. 물론 능력치는 가장 높은 능력치도 40밖에 안되는 쓰레기.수하에도 쓸 만한 놈이 없는 주제에 세키가하라에서 전용이벤트가 있다. 서군에 참가하는 분기를 고를 경우 이에야스의 밀서가 오고 머뭇거릴때에 이에야스가 철포를 쏘며 재촉하는데 이 때 이에야스 편을 들면 동군이 이기고 미츠나리 편을 들면 서군이 이긴다. 특이한 점으론 다른 이벤트에 참여하는 다이묘들은 대개 한 쪽 편을 들 경우 다른 한쪽 편에 선 인물과 이벤트 전투가 있는데, 한쪽 편을 들 경우 그냥 그 쪽이 승리한다. 서군 편을 들경우 오와리로(거성은 키요스성), 동군 편을 들경우 빗추국으로(거성은 오카야마성) 전봉되는데 어느 쪽으로 가도 기존보다 땅은 넓어지니 선택은 자유. 다만 성의 수는 서군 편을 들어서 오와리로 전봉될때가 더 많다. 그리고 동군 편을 들 경우 더 이상 이벤트 진행은 없으나 서군 편을 들 경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승리할 경우 서군 측 장수들에게 나오는 가상 이벤트인 후지미강 전투가 있다. 원군으로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가 붙긴 하지만 여기서 패하면 게임 오버된다.

5.6. 전국무쌍 시리즈


4편까지 이어진 지금까지 쭉 클론 무장이다. 비중도 그냥 세키가하라 전투 도중에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에 붙는 배신자 A 수준. 4편과 4-II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코바야카와 군 진영에 대포를 쏘는 것을 신호로 미리 내통한 동군에 붙는데 이때의 목소리가 가히 찌질함의 극치를 달린다. 다른 사람 욕하는 일이 거의 없는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인면수심인 놈"이라고 대놓고 까댈 정도다. 100만인의 전국무쌍에서는 미소년으로 나온다.

5.7. 세키가하라(2017)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가솔들을 참형장에 데리고가는 인솔자로 첫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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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츠구의 측실이었던 코마히메만은 살려달라고 미츠나리[18]에게 부탁했지만 성과가 없자 미츠나리에게 실망하였다. 울산성 전투에서 후퇴하던 조선군의 뒤를 쫓아 수급을 벤일로 도요토미에게 일개 병졸처럼 처신한다며 전봉처분을 받는다. 이때 이에야스가 배후에 미츠나리가 있다며 언질하면서, 대응방법을 알려준다. 또한, 가신으로 삼으라며 무예가 뛰어난 무사까지 준다. 미츠나리와 이에야스의 대립이 격화되어 결전이 촉발될 지경이 되자 어느쪽에 서야할지 갈팡질팡 하고 있는 사이에[19], 코다이인이 가신들의 자식들을 인질로 내주고 환심을 사라고 한다. 세키가하라에 서군으로 출전을 했으면서도 전투가 끝날때 까지 어느쪽으로 가담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고, 가신들이 이에야스에 가담해야 한다는 청을 거절하면서 몸싸움까지 벌이는 지경이 된다.[20] 서군 가담을 청하는 미츠나리의 사신(시마 사콘의 아들)을 보고 히데아키는 서군으로 가담하려고 마음을 정했지만, 가신들이 사신을 베어버리며 이에야스에게 가담한다.[21] 전투에 나선 히데아키의 군사들은 서군 최일선에서 분전하던 오타니 요시츠구군을 괴멸시킨다. 마지막에 사로잡힌 이시다 미츠나리를 보며 눈물짓는다.
여담으로 NHK 대하드라마와의 차별화를 두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진바오리의 전체적인 색과 군기의 색이 푸른 색이다. 대하드라마에서는 보통 붉은색 진바오리를 입으며 병사들도 붉은색 군기를 쓴다.

5.8. 카게무샤 도쿠가와 이에야스


테레비 도쿄의 특집극 카게무샤 도쿠가와 이에야스(影武者 徳川家康) 에서 등장.##
가신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등 안하무인 대책없는 부자짓 도련님으로 나온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카케무샤인 세라다 지로사부로와 함께 진중에 있다가[22] 서군측에서 보낸 무사에게 암살당한다. 가신들이 기지를 발휘해 카케무샤가 전사한 것으로 꾸민다. 서군측에서는 이에야스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트리자 기세가 올라 동군은 수세에 몰린다.그때까지 동군과 서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히데아키측에서 가신들을 보내 진짜 이에야스가 죽었는지 알아보게 한다. 카케무샤인 지로사부로가 히데아키측이 동군에 합류하지 않는다고 꾸짖자 히데아키는 진짜 이에야스로 생각한다. 이때 히데아키 진영에 대포를 쏘고 병사를 보내 조총을 쏘는 등 위협하자 부랴부랴 동군측에 가담한다.

[1] 이 초상화는 사후 그려진 것으로, 코다이인이 히데아키를 추모하고자 하여 그려진 것이다. 초상화의 히데아키는 유년기의 모습에 가깝다.[2] 그의 관위인 사에몬노카미의 당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구로다 모토키 박사는 아명이라 주장하였다.[3] 북규슈 치쿠젠에 영지를 두고 있던 시절.[4] 세키가하라 전투의 공적으로 오카야마에 이봉된 이후.[5]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인.[6]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7] 히데아키를 양자를 받은 것으로 타카카게의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의 지위는 더욱 상승, 최종적으로는 쥬나곤의 관위에 올라, 코바야카와 가문은 세이카에 해당하는 가격(家格)을 얻는다.[8] 이후 히데요시의 죽음 직전 오대로가 되는 인물들.[9] 아사노 나가마사의 아들.[10] 하지만 이 역시 확실한 적대 양상이었던 것은 아니어서, 삼봉행과 테루모토는 이에야스에게 협력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고, 마에다 토시나가의 주도에 의하여 벌어졌다고 생각되어져 이에야스가 카가 침공을 준비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던 이에야스 암살 미수 사건 당시에는 미츠나리조차도 이에야스에 협력하였다.[11] 평민 뿐 아니라 무사들까지 정비에 참여시켜 20일만에 빠르게 완성시켜 현재 그 해자는 "20일 해자"로 불린다.[12] 엄밀히 말하자면, 별칭인 킨고나 치쿠젠 쥬나곤으로 나온다.[13] 삼하가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데,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의 아들이 아니다. 타카카게는 딸이 없다. 1595년 당시 히데아키는 14살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부정확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이 히데아키인 걸 알 수 있는 것은 코바야카와와 관련되어 있고 축전주라는 사실을 통해서다.[14] 요시츠구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보이는 것은 17세기 말 - 18세기 초 성립된 군키모노(군담소설)들이다.[15] 시중을 드는 역할을 가진 비교적 신분이 낮은 무사 등의 자식.[16] 상술한 쇼고인의 기록[17]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이 인기가 높은 무장은 낮은 무장의 공로까지 흡수하는 경우가 있다. 사나다 노부시게모리 카츠나가 항목 참조.[18] 미츠나리도 히데요시에게 코마히메를 살려줄것을 청했지만 거절해서 미츠나리도 어쩔수 없었다.[19] 이때 미츠나리와 함께 후시미성을 함락시켜서 이에야스가 자신을 미츠나리 편으로 생각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20] 가신이 주군에게 대드는 장면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가신들의 가족들이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내진 상황과 이미 대세가 동군편으로 기울었던 상황이었다. 애초에 도요토미 일가였던 히데야키가 중간에서 갈팡질팡하는것 자체가 서군에 마음이 없다는 의미 이기도 하다.[21] 이부분이 굉장히 처절하고 비장하게 그려진다.[22] 진짜 이에야스와 카케무샤가 같은갑옷을 입고 한 공간에 있었다.서로 번갈아 가며 명령도 할정도로 완벽히 속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