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노부시게

 


'''오사카 오인중'''
'''사나다 노부시게'''
모리 카츠나가
고토 마타베에
아카시 테루즈미
쵸소카베 모리치카
'''사나다 일족'''
사나다 유키타카
사나다 마사유키
사나다 노부유키
사나다 노부시게
[image]
真田信繁(さなだ のぶしげ(진전신번)
(1567년?[1] 1570년 03월 08일 ~ 1615년 06월 03일, 음력 05월 07일[2])
1. 개요
1.1. 이름
2. 생애
2.1. 유년기 ~ 청년기
2.4. 기타 이야기거리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부름을 받고, 오사카 전투에 참전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죽음 직전에 몰아넣는 등, 눈부신 활약으로 일본 역사에서 불멸의 이름을 얻었다.
49살의 생애에서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의 삶은 제대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어서, 후대에 창작이나 야사가 많이 생겼다.
에도 시대 때부터 강담이나 가부키에서 용맹과감한 영웅담의 주인공으로 서민들에게는 뿌리깊은 인기가 있었다.
사나다 10용사사루토비 사스케를 발탁한 침착 냉정한 리더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게임에서는 긴 창을 휘두르는 근육질의 열혈 꽃미남으로 묘사되어 여성들의 인기를 얻기도 하는 등 여러 미디어 매체에 등장했다.

2016년, NHK 대하드라마시리즈인 사나다마루의 주인공으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1.1. 이름


유명(幼名 유소년기 때 이름)은 벤마루(弁丸/お弁丸, 辯丸)[3],
통칭은 겐지로(源二郎(源次郎))로, 전부 읽으면 사나다 겐지로 노부시게. 형인 노부유키의 통칭이 겐자부로(源三郎)이기 때문에 실은 차남이 아니라 장남이었다는 설도 있다. 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사나다가문은 장남이 언제나 요절했기에, 셋째에게 붙이는 겐자부로라는 이름을 장남에게 주는 전통이 있었다고 하고 이에 노부유키에게 주었고, 노부유키가 죽지 않고, 둘째 노부시게가 태어나자, 넷째 아들의 이름인 겐시로가아닌, 차남에게 주는 이름 그대로 겐지로를 주었다고 묘사하였다.
본명은 노부시게(信繁)[4]지만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전에 자칭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후세의 가탁으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 그 유래는 '유키(幸)'의 경우 사나다 가의 돌림자 급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의 없이 받아 들여지고 있지만 '무라(村)'의 경우는 누나인 무라마츠도노에서 따왔다는 설, 요도 무라마사에서 따왔다는 설, 아들 카타쿠라 모리노부(사나다 다이하치)의 주군이었던 다테 츠네무라에서 따왔다는 설 등으로 나뉜다.
다만 유키무라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된 문헌인 강담(講談) 소설 <난바전기(難波戦記)>[5]가 오사카 전투 60년이 지난 1672년에 나왔고, 다테 가 가신에게 시집 간 딸인 오샤부가 만든 가묘에도 '유키무라'라고 적혀 있는 등 그 출현 시기가 빠르기 때문에 생존 할때도 쓰이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있다. <난바 전기>에서는 오사카 입성시 개명했다고 하는데[6], 실제 역사에서는 오사카 입성 후에도 노부시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에도 시대에는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쳐 대항하고, 특히나 아들인 노부시게는 이에야스의 목숨을 빼앗을 뻔한 적도 있어서 반역자 취급이었는데, 그래도 서민들 사이에는 영웅으로 인기가 있어 후대의 강담과 소설의 창작자들이 에도 막부의 검열을 피해 본명인 노부시게를 바꿔서 유키무라라는 가명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그의 영웅담을 다룬 강담 기록 <난바 전기>는 에도 막부에 의해 금서가 되어 서민들 사이에서는 몰래 인기가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현대 매체에서도, 심지어 NHK 대하드라마 같은 꽤 고증에 신경쓴다는 사극에서도 노부시게는 그냥 말년에 유키무라라고 개명했다는 설정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위키들에서는 유키무라 보단 노부시게로 표제어를 삼아야 한다는 논리에 반발해서 키배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고, 나무위키에서도 이 문서 처음에는 그냥 대중적으로 알려진대로 '사나다 유키무라'라고 표제어를 정했었다. 그렇다보니 일본에서는 그가 꼭 이름을 유키무라로 개명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는데 그냥 죽어라 노부시게만 무조건 옳다면서 이것만 쓰려고 환장한 인간들이 있다고 까는 경우도 가끔 있다.(...)
특히 일본어 언사이클로피디아일본어 위키백과에서 일어난 어처구니 없는 편집전쟁을 이런식으로 깐다.원문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그의 본명은 노부시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현재는 유키무라라고 불리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생략하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유키무라가 더 멋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노부시게 쓰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자손들도 사람들이 "사나다 유키무라의 자손입니까?"라고 물으면 기꺼이 조상의 이야기를 한 마디 해 주는데, "사나다 노부시게의 자손입니까?"라고 물으면 무시당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키무라(幸村)라도 좋잖아?"라고 생각하고 있고, 교과서나 참고서에도 사나다 노부시게라고 실려 있는 것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이 위키피디아에 있다!!'''

그곳에서 '유키무라'라고 글을 올리면 어딘지 모르게 우글우글 역사를 잘 아는 집필자들이 모여들어 편집전이 벌어진다.

지금은 다소 진정되었지만, 이전에는 분쟁 끝에 '사나다 노부시게'와 '사나다 유키무라'가 2개의 페이지로 나누어져 있던 시기도 있다. 급기야는 '시게노 노부시게'니 '도요토미 노부시게'니 하는 소리도 못 들어본 듯한 이름으로 제목이 고쳐지는가 하면 편집 전투의 불똥이 다른 역사상 인물의 페이지에까지 미치는 등, 어처구니가 없었다.

상식 있는 언사이클로피디아의 편집자 제군은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일에 말려드는 일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부디 조심해 주기 바란다.

'''틀리더라도 위키피디아에 '유키무라'라고 쓰지 않도록.'''

솔직히 '노부시게'라는 이름도 좀 수상해. 물론 '유키무라'라는 이름의 처음 출처는 본인이 죽은 지 50년이 넘은 1672년 간행된 베스트셀러 군기 이야기 '난바전기'로 보이지만, 유키무라라는 이름인지는 어원을 포함해서 알 수 없다. 그런데 말이야 '노부시게' 라고 하는 이름도 알고 보면 말이야. 앞에서 말한 대로, 마사유키가 모시고 있던 타케다 신겐의 동생 노부시게와 같은 이름이 되지만, 당시의 매너에서는 가신들이 마음대로 주군의 근친 이름을 통째로 베끼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만약 같은 이름이 되면 가신이 꺼려 개명하는 것이 상례였다. 생각해 보자. 주군이나 그 근친의 이름에서 한 자 빌리는 거, 흔히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경우에는 이름 자체를 그대로 베낀다고. wwwww이놈들은 진짜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이야?

어쨌거나 그 시대의 기록이라는 것이 유키무라가 주군과 도망쳤다든가, 아니면 도쿠가와 너구리가 유키무라에게 죽임을 당하고 막부가 일 년 동안 카게무샤로 속였다가 일 년 후에 죽은 것으로 해 버렸다든가 하는 소문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이 사람의 이름도 결국은 그렇게 확정할 수 없을 것 같은 풍설 아니던가, 그렇지 않나? 이 자칭 역사 마니아 형씨들?


2. 생애



2.1. 유년기 ~ 청년기


사나다 마사유키와 야마노테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7]
아버지인 사나다 마사유키는 본래 시나노 북부의 호족으로, 다케다 가문을 섬기고 있었다. 본인이 받들던 다케다 가가 멸망한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복속, 그러나 3개월 후, 그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자, 우에스기 가, 호조 우지나오와 동맹, 하지만 3개월 후에는 호조 가를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 이에야스가 자신의 영지인 누마타 지역을 일부를 호조 가에게 양도하려고 하자 거부하고 다시 우에스기와 동맹, 분노한 이에야스와는 제1차 우에다 성 전투를 치르고,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 히데요시가 나서 화해를 주선하고 영지를 인정받는다.
독립 직후 여러모로 상황이 불안정하였으므로 전국시대의 관습에 따라 동맹의 조건으로 노부시게는 우에스기 가문에, 형인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가문에 볼모 생활을 했다.
노부시게는 우에스기 가에 인질로 간지 얼마 안 돼서 또 1587년 토요토미 가에 인질로 가는데, 인질이었지만 우에스기 가나 도요토미 가에서나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말이 인질이지 실질적으로는 항복하고 복종해온 가신의 아들이라 나중에 자신의 가신으로도 써먹을 인재들이라, 학문도 가르치고 잘 대접하는 것이 이 시대의 당연한 관습이었다.
도요토미 가에서는 도요토미 성도 받고 '사에몬노스케'라는 벼슬도 받았다. 형인 노부유키가 받은 '이즈노카미'와 품계상으로는 같지만 사에몬노스케는 명목상 내직이고 이즈노카미는 명목상 외직이기 때문에 정 비교하자면 사에몬노스케가 더 높다. 가문의 후계자보다 차남이 더 좋은 자리에 있었던 드문 케이스랄까. 히데요시에게 겐지로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좋은 대접을 받았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노부시게의 아버지 마사유키는 실질적인 다케다 류 군학의 계승자로, 도요토미 시대 때나 도쿠가와 시대 때나, 언제나 소규모 영주이면서도 견제를 많이 받았다.
1594년 경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었던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딸과 결혼. 일설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처조카라는 인연으로 맺어졌다고도 한다. 노부시게의 어머니 야마노테가 이시다 미츠나리의 처형이라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때는 500명의 병사로 조선에 출전을 명받았지만 결국 이뤄지지않았고, 히데요시가 전진기지로 삼았던 히젠 나고야 성(肥前名護屋城)의 산노마루를 지키는 친위대 역할의 하타모토 벼슬을 했다.

2.2. 세키가하라 전투


노부시게의 나이 30세가 되어갈 즈음에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보를 비꼬며 도발하였으므로 큰 싸움이 날 조짐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 이시다 미츠나리와 손잡은 나오에 카네츠구의 계략으로, 이에야스가 카게카츠를 치러 동쪽으로 향한 사이에 미츠나리가 군세를 일으켜 이에야스를 제압한다는 계책이었지만, 이에야스는 동쪽으로 가는 척 하다가 군세를 일제히 돌려 다테 마사무네와 모가미 요시아키에게 우에스기 집안을 상대하도록 하고 자신은 세키가하라로 향했다. 이 때, 마사유키는 큰 평가를 받고 있어서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양측의 가담 제의를 받는데, 노부시게는 서군(도요토미) 측의 오타니 요시츠구의 사위였고 노부유키는 동군 측의 혼다 타다카츠의 사위였으므로 형제간의 의견이 달랐고, 마사유키는 노부유키만을 동군으로 보내고 자신은 서군에 가담한다.
도쿠가와 측 본군은 차남[8]이자 후에 2대 쇼군이 되는 히데타다가 이끌고 후에 세키가하라에 도착하기로 했는데, 히데타다는 가는 길목에 서군인 마사유키의 성이 있었으므로 대군으로 공격하려 했다. 히데타다의 군대는 3만 8천. 반면 마사유키의 군대는 고작 2천여에 불과했던 터라 히데타다는 "어차피 공격하면 내가 유리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마사유키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했다. 마사유키가 항복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마사유키는 성문을 열고 항복할테니 성을 깨끗히 청소할때까지 기다려 달라라고 말했다. 히데타다는 마사유키가 순순히 항복하는것에 기뻐했지만... 그것은 마사유키가 농성전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벌기'''일 뿐이었다. 결국 이틀을 기다리다 히데타다는 성을 총공격했으나 노부시게가 성으로 통하는 좁은 길목에 버티고 무려 '''1주일'''을 버텼다.[9] 결국 히데타다는 피해만 왕창 입고 퇴각, 전장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도 못하는 실패를 저지르게 된다.
이렇듯 마사유키가 승리를 위한 포석을 깔아주었지만 세키가하라는 시궁창. 서군은 쫄딱 패하고 미츠나리는 잡혀 죽었다. 서군 측 영주들도 전봉, 혹은 감봉, 심하면 영지를 아예 빼앗기는 조치를 받는데, 원래 가진 것도 없었던 데다 죄질도 나쁘고 실력도 뛰어난 마사유키, 노부시게 부자는 사형에 처해질 예정이었지만 형인 노부유키와 사돈인 혼다 타다카츠의 탄원(사돈은 잘 두고 볼 일이다.)으로 키이국의 구도산(현재는 와카야마현의 구도야마 정) 지역으로 옮겨져 유폐생활을 하게 된다.[10]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이 사나다 부자 때문에 지참(전장에 늦게 도착하는 일)했기 때문에 이를 바득바득 갈며 사형을 요구했다.[11] 그러나 망설이던 이에야스에게 혼다 타다카츠가 "어르신 만약 그러시면 저와 일전을 나누셔야 될 겁니다."라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나다 부자를 살려두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폐 시절 노부유키는 골칫거리인 아버지와 동생에게 생활비를 보내주며 돌보았다고 하는데, 항상 까탈스럽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마사유키와 달리 노부시게는 얌전하고 미안해했다고 한다.이 시절 남긴 편지들을 보면, 아버지 마사유키는 아들에게 빚이 많으니 돈 좀 빨리 보내달라고 재촉하는 내용이 있다. 사나다 집안은 그래도 한 때는 다이묘라서 서민처럼 생활할 수는 없었고, 노부시게만으로도 정실과 측실의 자식이 10명이었다. 게다가, 따라온 가신들과 그 식구 약 50여 명까지 챙겨야 해서 항상 빚에 시달렸다. 그래서 구도산의 주민들에게서도 원조를 받았다고 한다.
형인 노부유키의 배려로, 유폐라고는 해도 구도산에서의 생활은 상당히 자유로웠던 편이었으며, 이미 그들이 구도산에 오기 전부터 주변 주민들에게도 '높으신 분들이 오시니 잘 모셔라'라고 통보될 정도로 배려를 받았다고 한다. 웬만한 여행이나 외출은 물론이고 사냥 역시 허락될 정도였다.
다만 금전적 형편은 안 좋아서, 소주를 사 마실 돈도 없었는지, 지인에게 "이 술독에 소주[12] 좀 채워서 보내달라. 보답으로 유카타용의 천을 한 포 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병으로 몸이 아프고, 이제는 이빨도 빠지고 수염에는 검은 것이 거의 없다"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편지를 분석하면, 몸은 작은 체구였던 것 같다. 형의 편지에 의하면, 평소 성격은 말수가 없고 인내심이 많아서 여간해선 화를 내지 않는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한다.[13]
이 시절, 만든 것이 사나다 끈(真田紐)으로, 가신들이 행상을 하며 사나다 끈을 팔고 다니면서 생활비도 벌고 전국의 정세도 살폈다고 한다.
1611년에 마사유키가 병으로 사망. 부친의 죽음으로 16명 있던 측근의 가신들은 고향[14]으로 돌아가고 노부시게 곁에는 2~3인만 남게되었다. 다음해에 노부시게는 출가하여 고하쿠(好白)라는 법명을 얻는다.[15]

2.3. 오사카 성에서 용맹을 떨치다


게이초 19년(1614년), 호코지 사건(方広寺事件)을 계기로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의 관계가 악화되어, 다이묘들의 가세를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의 도요토미 측은 로닌(牢人)[16]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구도산에 있는 노부시게에게도 사자를 파견하여 황금 200매, 은 30관(현재 가치로 10억 엔, 한국 돈으로 100억 원)을 주었다.
노부시게는 고향에 있는 부친 마사유키의 옛 가신들에게 참전을 호소하고, 구도산에서 탈출하여 아들 다이스케(大助, 사나다 유키마사)와 함께 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다. 소설 대망에서는 이 때 참신한 방법을 사용해서 탈출했다고 한다. 먼저 일부러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오사카 성에 들어가겠다고 소문을 퍼뜨린 다음, 사람들을 초대해서 송별 잔치를 열었다. 당연히 노부시게를 감시하던 도쿠가와군은 그 전에 노부시게를 체포하기로 하고, 손님들이 만취하여 저항하기가 힘든 잔치가 끝날 무렵에 습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노부시게는 이를 미리 계산해서 손님들에게 약을 탄 술을 주고, 잔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타고 온 말을 훔쳐서 탈출했다. 탈출에 성공한 뒤에는 모처에 말들을 묶어 두고, 사람들에게 말을 돌려주라고 도쿠가와군에게 글을 남겼다.
'사나다가 오사카 성에 들어갔다.'라는 소식에 이에야스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며 '아버지냐, 아들이냐!'라고 외쳤는데, 마사유키는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심했다고 한다.[17] 이에야스 입장에서 이 당시 알려진 정보만 가지고 그가 후일 본인을 거의 죽일 뻔할만한 용맹과 군략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예상하기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 40세가 넘어 병법과 군학이 완숙기에 접어든 데다 아버지로부터 다케다 류의 군학을 직접 전수받은 노부시게인지라 보통이 아니었다. 오사카 성은 남쪽의 대문 측이 약점이었는데, 이를 보완하여 산노마루 남쪽, 다마즈쿠리구치 밖에 '사나다마루'라 불리는 성채를 건설하고 요격과 보급을 용이하게 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는 다테 마사무네의 기마철포 부대, 에치젠 마츠다이라 부대, 가가 마에다 부대 등을 격파하여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오사카 측은 지도자인 토요토미 히데요리가 어려서 어머니인 요도도노가 실질적 지도자였는데, 또 이 아줌마와 친한 온건파의 보스인 오오노 하루나가가 실권을 잡고 있었으니,[18] 노부시게를 비롯한 주전파의 발언은 묵살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노부시게의 형인 노부유키가 도쿠가와 쪽이었으므로, 변절할지 모른다고 무시당했으며, 심지어 배신하면 처리하라고 사나다마루 뒤에 총포병까지 배치했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노부시게 팬들 사이에서 오사카 수뇌부의 인기는 바닥. 요도기미는 도요토미를 말아먹은 악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겨울의 진에서 이에야스는 꽤 타격을 입었고, 이에야스가 스스로 화평을 청하자 요도기미는 냉큼 받아들이고 화평 조건으로 해자도 메꾸고 사나다마루도 철거해버린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쿠가와 측도 충분한 여력을 남기고 있었고 사실상 시간을 끄는 것과 사나다마루를 피해없이 철거하는 것이 화평의 목적이었다. 내부에서도 화평을 받아들이지 말고 사나다마루를 보존하자는 여론이 있었는데 물론 묵살당했다.[19]
그리고 이듬해 여름, 해자가 없어지자 강화를 깨고 이에야스는 다시 쳐들어오는데, 이 전투가 오사카 성 여름의 진이다. 방어막이 사라진 오사카성은 아무리 일당천의 용자들이 모인 오사카 측이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방어할 거점도 사라진 상태에서 노부시게는 직속부대를 이끌고 정면으로 도쿠가와 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센다이의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의 군대를 긴창부대를 매복시켜 싸우는 전법으로 격파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숫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후퇴할 상황이 되었는데, 이때 노부시게 부대는 도쿠가와의 본진으로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하였다. 주전파의 무장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돌격한 끝에 전사하였고, 오오노 하루나가 등은 히데요리를 데리고 탈출하려다 잡혀 죽었다. 그리고 노부시게의 장남인 유키마사는 탈출 권고를 거부하고 히데요리의 죽음을 지켜본 뒤에 스스로 할복했다.
노부시게는 다케다 신겐이 즐겨 사용하던 '카게무샤'를 응용하여, 전장 여기저기서 자신이 출몰한 듯 보이게 하는 방법으로 도쿠가와 측을 혼란시키고 자신은 맹렬히 돌격하여 이에야스의 본진까지 도달하였다. 본진 돌격을 세 차례나 감행하였는데, 이 와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우마지루시(馬印 : 대장의 말 곁에 세우는 깃발)가 넘어질 정도였다.[20] 이 와중에 이에야스는 패배의 가능성을 예감하고 할복을 마음먹었다는 얘기도 있다.[21] 일설에 따르면 이때 이에야스는 노부시게에게 살해되었으며, 그 후 1년 동안은 이에야스의 카게무샤가 명목상 일본을 통치했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승리는 토요토미 측에게 미소를 짓지 않아, 네 번째 돌격 전에 시텐노지 가까운 곳에 있는 야스이 신사의 경내에서 부상자 치료와 휴식을 취하고 있던 노부시게 군을 이에야스 측이 습격하면서, 노부시게는 전사하고만다. 향년 49세. 목을 벤 자는 에치젠 마츠다이라 부대 조종대의 니시오 니자에몬이라고 전해진다.
참고로 이 이야기가 사나다 10용사의 소스 쯤 되는 이야기이다. 사나다 10용사는 허구이긴 하나, 모델이 되는 인물들도 엄연히 존재한다.[22]

2.4. 기타 이야기거리


이에야스는 그 용맹함을 두려워하며 '사나다야말로 일본 제일의 강자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 말은 시마즈 타다츠네가 노부시게의 용맹을 듣고 평한 말. 원문은 '眞田日本一の兵'인데, 여기서 兵은 '츠와모노'라 읽는다. 병사라기보다는 강자라는 뜻이라 보면 되겠다. 참고로 앞의 원문은 대략 '사나다(眞田) 히노모토이치노(日本一の) 츠와모노(兵)'라고 읽는다.
실제로 시마즈 타다츠네는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이야기로 전해들은 것 뿐이다. 더구나 그 목적도 도쿠가와의 본진이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돌파당했기 때문에 예전에 이에야스가 다케다 신겐을 치켜세운 것 마냥 노부시게를 치켜세운 것이다. 말하자면 '노부시게는 겁나게 강하지만 그 노부시게를 이긴 이에야스 님은 더 짱쎄다.' 그런 식으로. 물론 노부시게의 공이 훌륭하긴 했지만 활동한 시기가 너무 짧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까지의 수준인지는 판단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오사카 여름 전투 당시 전사한 게 아니라 실은 히데요리와 함께 시마즈에 몸을 위탁했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당시 칸사이 지방에는 '꽃 같은 히데요리 님을, 귀신 같은 사나다가 데리고, 가고시마로 달아났다(花の様なる秀頼様を, 鬼の様なる真田が連れて, 退きものいたよ鹿児島へ)'는 동요가 퍼졌다고 한다. 지금도 가고시마 지방에는 히데요리와 사나다 노부시게, 그리고 그의 아들 다이스케의 묘가 존재한다. 하필 탈출지가 가고시마였던 이유는 첫째 시마즈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전했으나 비교적 봉지 삭감이 적은 편이었고, 둘째 오사카의 요도가와의 물길을 타고 내려가면 큐슈였기 때문에 오사카로부터 탈출하고 몸을 맡기는 것이 용이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생존설은 노부시게 관련 군담에서 소재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에도 초기 군담인 <사나다 삼대기>에서도 노부시게가 장남 다이스케, 쵸소카베 모리치카, 고토 마타베에 등과 함께 사츠마로 도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고생한 나머지 겨우 1년 살고 사망했다고. 심지어 우리나라 심령 연구자 중의 한 명도 자신이 사나다 노부시게의 환생이라면서 이 생존설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아케치 미츠히데,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해서 아쉽게 죽음을 맞이하거나 약간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장수들에게는 전부다 하나 내지는 두 개이상의 생존설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빙성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10~20대의 인질 생활, 30~40대의 유배 생활이라는 안습한 일생을 살기는 했지만 오사카 전투 하나로 전국 시대 톱 클래스에 올라감으로서 '''인생 어차피 한 방'''이라는 만 대의 진리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후 그의 머리카락이라도 가지겠다고 도쿠가와 장수들 사이에서 약간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반역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딸들이 은근히 결혼 대상으로 인기가 있었다고.
자식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대부분 딸이고 장남은 전사, 삼남은 외갓집 입양 식으로 해서 실제로 그의 피를 이은 사람은 차남 다이하치(카타쿠라 모리노부) 하나로 평가된다. 딸 중 하나인 오우메가 카타쿠라 코쥬로의 아들이자 2대 코쥬로인 카타쿠라 시게나가에게 시집 간 게 유명. 이 때 차남인 사나다 모리노부 역시 목숨은 건져 다테 가를 섬긴다. 일설에는 노부시게가 직접 사위인 시게나가에게 편지 화살을 보내 구명을 요청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에도 막부에서는 집요하게 모리노부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다테 가에선 모리노부는 8살때 돌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가 이후 사실 모리노부는 노부시게의 아들이 아니라 유키타카의 4남 노부타다의 아들이라고 구라를 쳤다. 그리고 모리노부 역시 카타쿠라 씨로 성을 바꿨다. 이후 아들 타츠노부 대에 이르러서 막부의 사면령이 내려져 사나다 씨로 복성, 센다이번 사나다 씨를 이루었다고 한다.
사실 도쿠가와 측도 사나다 노부시게의 혈통이 각지에 남아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미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쥐었기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묵인한 것이다.
덧붙여 사나다 집안의 문장인 여섯 개의 엽전은 '육문전'이라고 부르는데, 죽어서 여섯 개의 길(축생도, 아귀도 등을 말하는 그거)에 들어가게 되는 인간에게 바치는 여비의 의미가 있다. 거기에 '황천 갈 여비 걱정 없으니 닥돌'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전국바사라 10화에서 다테가 언급한 '지옥 강을 건너는 뱃삯'은 이 육문전을 말하는 것. 오사카의 진에서는 육문전의 가문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으로 있던 형이 이 육문전을 가몬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형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고 한다.그런데, 노부시게의 유품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사나다 부대의 군기(군대 깃발)에는 육문전이 그려져 있어서, 어느 쪽이 맞는 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일화를 보면 성안에서 노부시게에게 동군에 있는 감색바탕의 육문전기에 대해 묻자 "저 깃발은 제 조카의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걸 보면 바탕천의 색을 달리썼을 가능성이 높다.
사나다의 아카조나에(赤備え)라는 빨간 색으로 칠한 것은 실제 역사에서는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만 사용했다라는 학설이 있다.
우에다 인근 전설에 따르면 사나다 유키타카는 텐구의 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라고 한다. 붉은 색은 다케다 쪽의 엘리트 병과의 상징이다.[23]
긴 십자창[24]을 휘두르는 이미지가 있지만, 오사카의 여름의 진에서는 말을 타고도 총을 쏠 수 있는 특수 제작된 총을 썼다. 실물이 발견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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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上宿許銃. 길이는 59cm. 일반 철포의 반 정도의 길이로, 총알을 빨리 장탄할 수 있어 10초에 한 발씩 쏠 수있는 장점이 있다. 말 위에서도 사격이 가능하다.
전해져오는 전설에는 마사유키가 번개를 손으로 잡아서 우물에 가뒀다는 우물이 있다.
무장언행록 등을 보면 생전에 아버지를 매우 존경했던 모양이다.
오사카 여름의 진이 시작하기 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쪽으로 넘어오면 시나노의 영주(40만석)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하면서 자신의 휘하가 될 것을 제안했지만 일본 영토의 반을 준다한들 히데요시와 그의 후계자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을 배신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당대 40만석을 넘는 다이묘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 밖에 없기 때문에 일본을 하나의 기업이라고 볼 경우, 계장급을 갑자기 사장의 자리에 스카웃하는 제안이다. 일설에 따르면 40만석이 아니라 10만석이라고도 하지만 10만석도 굉장하다.[25][26] 여하튼 후대의 창작인지는 몰라도 그런 기록이 있다.
후대엔 도요토미가에 충성한 무장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어느 정도는 후대의 창작이 가미 된 부분이 있다. 애시당초부터 노부시게의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 자체가 서군, 동군 어느쪽이 이기던지 가문이 존속할 수 있도록 가문의 판을 짜서 노부시게가 아버지와 함께 서군에 가담한 것이었고 마사유키 입장에선 사나다 가문 자체가 도쿠가와와 악연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선뜩 동군에 가담하기도 어려웠을것이다. 또 노부시게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입장이었다면 아버지 마사유키가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해 어느 한 가문에 무조건 충성하기 보단 난세를 살아가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을것이다. 이 때문에 이 당시까진 노부시게의 판단이 들어갈 여지는 비교적 적었으리라 판단된다.
또 오사카 전투 이전 유배 당시 노부시게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고 도쿠가와 막부 체제하에선 이런 곤경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그 자신 자체가 도요토미에 오랜기간 인질로 가 있었기도 했고 도요토미 가신들과 친인척 관계도 맺었던 만큼 그런 인연이 아예 없다고 하기엔 뭣하다. 어쨌거나 노부시게는 오사카 전투에서 자신을 부른 영주를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던 만큼 책임감이 강하고 맡은바 중임을 성실하게 대한 무장으로 봐야 마땅할 듯 싶다.
그 밖에도 다테 마사무네의 기마철포대를 꺾은 것으로도 유명. 기마철포대는 마사무네의 돈 지랄로 만들어진 것인데 당시 마사무네는 이것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으나 노부시게는 매복과 유인을 통하여 이것을 발라버렸다. 물론 마사무네는 복수를 다짐했겠지만 다시 기회를 얻을 새도 없이 노부시게가 죽어버렸다.
후세의 전승이나 소설에서 보여주는 모습들, 그리고 실제 역사의 결과를 분석한 결과, 전문가들이 평가하기를 군사적인 면에서는 뛰어났지만 정치적인 센스는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즉, 무능하고 멍청한 윗대가리들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대처하는 훈련이 없었다. 오사카 전투에서 삽질만 줄창하는 실전 경험이라고는 한번도 없는 요도도노나 그녀의 유모의 아들, 즉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소꼽친구라는 것만으로 출세한 오노 하루나가에 대해 이렇게 싸워야 한다는 정론을 주장했지만 결국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은 노부시게 본인에게도 그가 충성을 바쳤던 토요토미 가문에게도 결과적으로는 비극이었다. 어느정도는 자업자득이지만 주가 운이 없었던 셈.

3. 대중매체에서


[1] 사망 당시의 나이에서 역산한 것. 더 일찍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2] 그의 죽음과 더불어 서군 잔존 세력들의 숙청을 끝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겐나 엔부를 선언하고 오닌의 난 이후 약 145년 동안의 전란을 끝냈다.[3] 인도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지혜·음악의 여신인 변재천(辯才天, Sarasvati: 사라스바티)에서 따온 듯하다. 사라스바티는 강가와 함께 비슈누의 아내였는데 비슈누가 그녀들을 모두 거느릴 수 없자 라크슈미만을 남겨 두고 강가는 시르바에게, 사라스바티는 브라마(범천:梵天)에게 주었다고 하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4] 이 이름은 다케다 신겐의 동생인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문무를 겸비한 능력 있는 인물로 신겐을 보좌했지만 우에스기 켄신과의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에는 가신은 주군의 이름에서 글자를 따와서 자식의 이름에게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5] 현재는 오사카를 지칭하던 나니와로 읽지만, 당시에는 '난바 센키'로 읽었다[6] 사나다마루에서는 이 설을 따랐다[7] 일설로는 측실의 자식이라고 하기도 하다. 일설에 노부시게는 형 노부유키보다 한 살 위로 1565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이 설에 따르면, 야마노테도노는 노부시게의 존재를 알게 되자, 친자식으로서 키우는 대신에 노부유키보다 한 살 아래의 동생으로서 취급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사료적 증거는 없다.[8] 정확히는 삼남이나, 장남을 일찍 자결시켜서 차남으로 친다.[9] 아무리 수성에 유리한 길목을 점하고 있었다해도 10배는 넘는 적군을 1주일이나 붙들어둔 전과는 쉽게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비가 장판교에서 겨우 수 시간을 벌었지만 활약상을 꼽을 때 꼭 나오는 게 괜한 것이 아니다.[10] 원래 고야산(高野山)이었으나 노부시게가 정실 치쿠린인을 동반하였기 때문에, 금녀의 구역인 고야산에서 구도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11] 근대전에서도 그렇지만 전장에서 부대 하나가 늦으면 전선이 형성되지 못하고 아군이 우르르 무너질 수가 있기 때문에 지참은 엄벌로 다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할복을 명령받는 일조차 있었고 운이 좋아도 개역(가문의 재산을 몽땅 빼앗고 내쫓는 것) 처분이기 때문에 히데타다가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이에야스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히데타다는 이때 살아남았으나 그래도 분을 참지 못한 이에야스에 의해서 후계자지명을 받지 못할 뻔했다.[12] 이 시기의 소주는 현대의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식 소주라 위스키만큼이나 비싼 고급 술이기는 하지만.[13] 출전 : 역사비화 히스토리아 歴史秘話ヒストリア 真田幸村 ザ・ラスト戦国ヒーロー ~伝説に秘められた誇り~ http://www.pandora.tv/view/fx_keaton/35969284/, 「真田一族 戦国最強の絆~真田昌幸・信之・幸村」http://newskei.com/?p=3619.[14] 이들은 모두 형인 노부유키의 아래로 들어갔다.[15] 기무라 츠나모리(木村綱守)나 가와라 사쿄(河原左京)등에게 보낸 서장에 「真好白」「真好白信繁」등의 서명이 남아있다.[16]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떠돌이 무사 로닌(浪人)이 아니라, 영토와 지위를 잃고 몰락한 무사 계급을 말한다.[17] 이는 사실 노부시게에 대한 이에야스의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가독도 물려받지 못한 로닌인 노부시게가 할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버지 마사유키에 비하면 이전에 그렇게 잘 알려진 전공이 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18] 요도도노를 젖먹이고 키운 유모(乳母)의 아들로, 즉 두 사람은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소꿉친구. "히데요리가 이 두 사람 사이의 자식이다"라는 도 있다.[19] 다만 사나다마루의 보존은 철거가 화평 조건으로 내세워진 이상 불가능해졌는데 도쿠가와는 충실하게 조건을 이행한 상황에서 도요토미가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대외적으로 도요토미가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20] 이는 이에야스가 다케다 군에게 대패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갔던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후 두 번째였다고 한다.[21] 소설 대망에서는 이에야스가 자신의 호위 부대까지 방어를 위해 출격해서 이에야스 옆에 측근 1명만 남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3번이나.'''[22] 엄밀히 말하자면, 소스 자체는 노부시게의 활약상과 모리 카츠나가의 활약을 섞었다는 느낌이 강하다.[23] 통칭 아카조나에(赤備え) 라고 하는 갑주를 붉게 통일한 부대로서 타케다 가문에서는 맹장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이끄는 부대였고, 타케다가문이 멸망하고 도쿠가와 가문에서 타케다 가문의 유신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았던 이이 나오마사가 이 아카조나에를 물려받았다.[24] 치도리 쥬몬지야리라고 불리는 열십자창이다. 세키로에서 아시나 잇신이 동일한 물건을 사용.[25]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고 패전 후 개역(가이에키) 당하였으나, 다시 다이묘로 부활에 성공한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와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마저도 본래 영지로 복귀하기 전에 받은 영지는 무네시게가 무쓰 다나구라(棚倉) 1만 석, 나가시게가 히타치 후루와타리(古渡) 1만 석이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무네시게와 나가시게보다 지명도와 실적에서 떨어지는 노부시게에게 시나노 국 전체 40만 석을 선뜻 내어 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에 노부시게 본인도 진지한 제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추측된다.(위키백과) [26] 노부시게의 생애를 다룬 NHK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겨울의 진 때 10만석을, 여름의 진 때 40만석을 제안 받는 것으로 절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