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 마타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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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 마타베에 모토츠구(後藤又兵衛基次). 후등기차.
1560년 5월 5일 ~ 1615년 6월 2일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사나다 노부시게, 모리 카츠나가, 쵸소카베 모리치카, 아카시 테루즈미(타케노리)와 함께 오사카 5인중五人衆이라 불린다.
벳쇼(別所)가 가신인 구로다 모토쿠니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구로다 요시타카(구로다 칸베에)가 거두어 길렀다.
구로다 칸베에가 당주이던 시절에는 많은 활약과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았으나, 칸베에가 은퇴하고 아들인 구로다 나가마사가 뒤를 잇자 뭔가 여러 모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이에 나가마사가 점점 치사하게 굴고, 심지어는 모반 혐의까지 뒤집어 씌우려하자 분노해서 뒤집어엎고 낭인이 되었다.
나가마사와 모토츠구의 사이가 이렇게 나빴던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1) 요시타카가 당주이던 시기, 영내에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진압하러 갔던 나가마사가 실패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문책당하게 되었을 때, 나가마사를 포함한 휘하 무장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도 유독 모토츠구만이 머리를 꼿꼿이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있었다고 한다. 요시타카는 이에 대해 별달리 꾸짖지 않아, 결국 나가마사의 입장이 애매해져서 이 때부터 사이가 틀어졌다는 설
2) 임진왜란 당시 나가마사가 조선군의 장수와 맞붙어서 강에 빠져서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데도 곁에 있던 모토츠구는 이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옆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가 왜 주군을 돕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적에게 이렇게 당할 정도라면 내 주군이 아니오.'라고 답했다고. 나가마사는 겨우겨우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이 일을 계기로 모토츠구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하는 설
어쨋건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이었던 듯 하다.
마타베에는 상당히 명성이 알려진 맹장이었으므로 구로다 가에서 나온 뒤로도 여기저기서 영입하려 했고 잠시 사관하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나가마사의 치사한 입김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614년 오사카 겨울의 진이 발발하자, 이에야스가 파격적인 대우로 거두어들이려 했으나 감사하면서도 이를 거절, 오사카 성에 입성한다. 당시 그가 한 말은 '(도요토미) 히데요리 공께는 선봉을 맡음으로써 은혜를 갚고, 이에야스 공께는 싸움이 벌어진 첫 날에 싸움터에서 전사함으로서 보답하겠노라.'였다고 한다.
오사카 주전파 중에서도 제일의 맹장으로, 겨울의 진에서는 선봉을 맡아 도쿠가와 측의 예봉을 무너뜨렸다.
여름의 진에서는 이에야스로부터 '귀공의 거취에 전투의 향방이 달려있다.'라며 배신을 권유받았는데, 사실 오사카 측에서의 대접은 개념이 없는 히데요리로 인해 형편이 없었고 승산도 없었다. 마타베에는 배신 권유를 듣고는 '무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며, 오사카 측에 대한 의리와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도쿠가와 측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수차례 돌격을 감행하며 마구 활약을 펼치다 앞서 한 말 그대로 오사카 여름 전투 첫 날 도묘지 전투에서 전사했다. 원래 모리 카츠나가와 사나다 노부시게가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안개 때문에 둘이 헤매는 바람에 시간을 허비해 결국 시간이 안 맞았다.
매우 거구의 사내였다고 한다. 마타베에가 여름의 진에서 빈사의 총상을 입자 측근들이 이를 옮겨서 숨기려 했는데, 너무 무거워서 옮길수가 없는 관계로 목만 잘라서 몰래 묻어버려 적들이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는 안습한 일화가 있다.
정사가 아닌 일설에는 모토츠구(고토 마타베에)가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살아남아 야마토 지방(현재의 나라)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여생을 마쳤다고도 한다. 그가 은둔 생활을 한 곳에는 '마타베 벚꽃'이라는 벚나무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알려진다.
5인중 중 가장 연장자이기도 하여 모에화에서는 오사카의 아버지 취급받고 있다.
고토 마타베에(백화요란 사무라이 걸즈) 참조.
전형적인 맹장으로 등장.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에서는 통솔 85 무력 88 지력 57 정치 16 특기 창금지삼.
고토 마타베에(전국 바사라) 참조.
고토 마타베에 모토츠구(後藤又兵衛基次). 후등기차.
1560년 5월 5일 ~ 1615년 6월 2일
1. 소개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사나다 노부시게, 모리 카츠나가, 쵸소카베 모리치카, 아카시 테루즈미(타케노리)와 함께 오사카 5인중五人衆이라 불린다.
벳쇼(別所)가 가신인 구로다 모토쿠니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구로다 요시타카(구로다 칸베에)가 거두어 길렀다.
구로다 칸베에가 당주이던 시절에는 많은 활약과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았으나, 칸베에가 은퇴하고 아들인 구로다 나가마사가 뒤를 잇자 뭔가 여러 모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이에 나가마사가 점점 치사하게 굴고, 심지어는 모반 혐의까지 뒤집어 씌우려하자 분노해서 뒤집어엎고 낭인이 되었다.
나가마사와 모토츠구의 사이가 이렇게 나빴던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1) 요시타카가 당주이던 시기, 영내에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진압하러 갔던 나가마사가 실패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문책당하게 되었을 때, 나가마사를 포함한 휘하 무장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도 유독 모토츠구만이 머리를 꼿꼿이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있었다고 한다. 요시타카는 이에 대해 별달리 꾸짖지 않아, 결국 나가마사의 입장이 애매해져서 이 때부터 사이가 틀어졌다는 설
2) 임진왜란 당시 나가마사가 조선군의 장수와 맞붙어서 강에 빠져서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데도 곁에 있던 모토츠구는 이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옆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가 왜 주군을 돕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적에게 이렇게 당할 정도라면 내 주군이 아니오.'라고 답했다고. 나가마사는 겨우겨우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이 일을 계기로 모토츠구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하는 설
어쨋건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이었던 듯 하다.
마타베에는 상당히 명성이 알려진 맹장이었으므로 구로다 가에서 나온 뒤로도 여기저기서 영입하려 했고 잠시 사관하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나가마사의 치사한 입김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614년 오사카 겨울의 진이 발발하자, 이에야스가 파격적인 대우로 거두어들이려 했으나 감사하면서도 이를 거절, 오사카 성에 입성한다. 당시 그가 한 말은 '(도요토미) 히데요리 공께는 선봉을 맡음으로써 은혜를 갚고, 이에야스 공께는 싸움이 벌어진 첫 날에 싸움터에서 전사함으로서 보답하겠노라.'였다고 한다.
오사카 주전파 중에서도 제일의 맹장으로, 겨울의 진에서는 선봉을 맡아 도쿠가와 측의 예봉을 무너뜨렸다.
여름의 진에서는 이에야스로부터 '귀공의 거취에 전투의 향방이 달려있다.'라며 배신을 권유받았는데, 사실 오사카 측에서의 대접은 개념이 없는 히데요리로 인해 형편이 없었고 승산도 없었다. 마타베에는 배신 권유를 듣고는 '무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며, 오사카 측에 대한 의리와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도쿠가와 측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수차례 돌격을 감행하며 마구 활약을 펼치다 앞서 한 말 그대로 오사카 여름 전투 첫 날 도묘지 전투에서 전사했다. 원래 모리 카츠나가와 사나다 노부시게가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안개 때문에 둘이 헤매는 바람에 시간을 허비해 결국 시간이 안 맞았다.
매우 거구의 사내였다고 한다. 마타베에가 여름의 진에서 빈사의 총상을 입자 측근들이 이를 옮겨서 숨기려 했는데, 너무 무거워서 옮길수가 없는 관계로 목만 잘라서 몰래 묻어버려 적들이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는 안습한 일화가 있다.
정사가 아닌 일설에는 모토츠구(고토 마타베에)가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살아남아 야마토 지방(현재의 나라)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여생을 마쳤다고도 한다. 그가 은둔 생활을 한 곳에는 '마타베 벚꽃'이라는 벚나무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알려진다.
5인중 중 가장 연장자이기도 하여 모에화에서는 오사카의 아버지 취급받고 있다.
2. 대중 문화 속 고토 마타베에
2.1. 백화요란 사무라이 걸즈
고토 마타베에(백화요란 사무라이 걸즈) 참조.
2.2.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전형적인 맹장으로 등장.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에서는 통솔 85 무력 88 지력 57 정치 16 특기 창금지삼.
2.3. 전국 바사라 시리즈
고토 마타베에(전국 바사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