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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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Theodor Dreyer'''
(1889. 2. 3 - 1968.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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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는 <잔 다르크의 수난>이나 <오데트>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영화감독이다.
코펜하겐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드레이어는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냈으며, 2살이 됐을 때 양부모에게[1] 입양되었다. 그의 성인 드레이어는 양부모의 것이다. 드레이어는 양부모 아래에서 썩 행복하진 않은 유년기를 보냈으며, 이 시기 받은 엄숙주의적 교육은 훗날 드레이어의 영화 세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드레이어는 학교를 졸업한 뒤 신문 기자가 되어 활동했으나, 곧 영화 업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노르디스크 필름에 입사하여 편집자 등을 거쳐 1919년 <재판장>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1925년 그가 만든 <집안의 주인>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자,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들은 드레이어에게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오게 된다. 제작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 카트린 드 메디시스, 잔 다르크 중 한 명에 관한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드레이어가 선택한 것은 잔 다르크였다. 주연 배우를 찾는 데 고난을 겪던 드레이어는 우연히 들어간 극장에서 연극 배우 르네 잔 팔코네티를 보게 되고, 그녀를 주연으로 낙점한다. 그렇게 드레이어는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화려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여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잔 다르크의 수난>을 만들게 된다.[2]
그러나 영화는 오늘날 평가받는 것에 비해 그닥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드레이어는 4년 동안 신작을 만들지 못했다. 1932년 그는 니콜라스 드 군즈버그라는 귀족에게 투자를 받아 부분 유성 영화인 <뱀파이어>를 만든다. 이 이후 극단적인 과작의 경력이 시작된다.
1943년 덴마크가 나치 점령하에 있던 시절, 드레이어는 약 10년만에 헨리크 입센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여 <분노의 날>을 내놓는다. 이 작품부터 황량한 롱테이크, 음울한 주제, 종교적 테마 등으로 대표되는 드레이어의 후기 양식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2년 후 드레이어는 <두 사람>이라는 영화를 스웨덴에서 찍었는데, 훗날 그는 이 작품을 부정했다.
드레이어의 전성기는 전쟁 이후에 찾아온다. 시네마테크의 활성화로 고전, 특히 무성 영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자 그의 영화도 덩달아 재평가받았고 1955년 <오데트>[3] 가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정점을 찍었다. 드레이어는 1964년 <게르트루드>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드레이어는 자신의 후기 양식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는데 대다수 롱테이크는 5분이 넘을 정도이고, 배우들은 극도로 절제된 연기를 선보인다. <게르트루드>는 이런 이유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당히 상반되는 평을 받았으며 일부에게는 야유까지 받을 정도였다.[4]
그는 이후에 예수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제작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를 이루지는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5]
자신의 어머니의 기구한 인생[6] 때문인지 작중에서 고통받는 여성들에 대해 동정적인 면모를 보이는 편이다. 이런 이유로 미조구치 겐지, 막스 오퓔스 등과 함께 초기 페미니스트 영화감독으로 언급되곤 한다. 비록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페미니스트는 아니었으나 이러한 이유로 여성주의 평론계에서도 상당히 각광받는 편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주류적 형식과는 거리를 둔 편이다. 초기작에서의 실험적 몽타주 기법, 극단적 클로즈업이나 후기작에서의 끝이 보이지 않는 롱테이크 등등이 대표적인 편이며, 경력 동안 전반적으로 180도 법칙을 거부한 것도 특징으로 지적된다.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고루 거장으로 추앙받았으며,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또한 드레이어의 작품[7] 에 영향받았다고 한다. 동향 출신인 라스 폰 트리에도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한 바 있다.[8]
여담으로 야마모토 유타카도 드레이어의 팬인 것으로 보인다. 드레이어의 <오데트>에서 이름을 따 자신의 스튜디오 Ordet의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Carl Theodor Dreyer'''
(1889. 2. 3 - 1968.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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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는 <잔 다르크의 수난>이나 <오데트>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영화감독이다.
2. 소개
코펜하겐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드레이어는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냈으며, 2살이 됐을 때 양부모에게[1] 입양되었다. 그의 성인 드레이어는 양부모의 것이다. 드레이어는 양부모 아래에서 썩 행복하진 않은 유년기를 보냈으며, 이 시기 받은 엄숙주의적 교육은 훗날 드레이어의 영화 세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드레이어는 학교를 졸업한 뒤 신문 기자가 되어 활동했으나, 곧 영화 업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노르디스크 필름에 입사하여 편집자 등을 거쳐 1919년 <재판장>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1925년 그가 만든 <집안의 주인>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자,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들은 드레이어에게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오게 된다. 제작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 카트린 드 메디시스, 잔 다르크 중 한 명에 관한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드레이어가 선택한 것은 잔 다르크였다. 주연 배우를 찾는 데 고난을 겪던 드레이어는 우연히 들어간 극장에서 연극 배우 르네 잔 팔코네티를 보게 되고, 그녀를 주연으로 낙점한다. 그렇게 드레이어는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화려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여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잔 다르크의 수난>을 만들게 된다.[2]
그러나 영화는 오늘날 평가받는 것에 비해 그닥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드레이어는 4년 동안 신작을 만들지 못했다. 1932년 그는 니콜라스 드 군즈버그라는 귀족에게 투자를 받아 부분 유성 영화인 <뱀파이어>를 만든다. 이 이후 극단적인 과작의 경력이 시작된다.
1943년 덴마크가 나치 점령하에 있던 시절, 드레이어는 약 10년만에 헨리크 입센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여 <분노의 날>을 내놓는다. 이 작품부터 황량한 롱테이크, 음울한 주제, 종교적 테마 등으로 대표되는 드레이어의 후기 양식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2년 후 드레이어는 <두 사람>이라는 영화를 스웨덴에서 찍었는데, 훗날 그는 이 작품을 부정했다.
드레이어의 전성기는 전쟁 이후에 찾아온다. 시네마테크의 활성화로 고전, 특히 무성 영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자 그의 영화도 덩달아 재평가받았고 1955년 <오데트>[3] 가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정점을 찍었다. 드레이어는 1964년 <게르트루드>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드레이어는 자신의 후기 양식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는데 대다수 롱테이크는 5분이 넘을 정도이고, 배우들은 극도로 절제된 연기를 선보인다. <게르트루드>는 이런 이유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당히 상반되는 평을 받았으며 일부에게는 야유까지 받을 정도였다.[4]
그는 이후에 예수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제작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를 이루지는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5]
3. 기타
자신의 어머니의 기구한 인생[6] 때문인지 작중에서 고통받는 여성들에 대해 동정적인 면모를 보이는 편이다. 이런 이유로 미조구치 겐지, 막스 오퓔스 등과 함께 초기 페미니스트 영화감독으로 언급되곤 한다. 비록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페미니스트는 아니었으나 이러한 이유로 여성주의 평론계에서도 상당히 각광받는 편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주류적 형식과는 거리를 둔 편이다. 초기작에서의 실험적 몽타주 기법, 극단적 클로즈업이나 후기작에서의 끝이 보이지 않는 롱테이크 등등이 대표적인 편이며, 경력 동안 전반적으로 180도 법칙을 거부한 것도 특징으로 지적된다.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고루 거장으로 추앙받았으며,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또한 드레이어의 작품[7] 에 영향받았다고 한다. 동향 출신인 라스 폰 트리에도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한 바 있다.[8]
여담으로 야마모토 유타카도 드레이어의 팬인 것으로 보인다. 드레이어의 <오데트>에서 이름을 따 자신의 스튜디오 Ordet의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4. 작품
- <재판장> (1919)
- <마녀> (1920)
- <사탄의 책> (1921)
- <서로 사랑하라> (1922)
- <옛날 옛적에> (1922)
- <미카엘> (1924)
- <집안의 주인> (1925)
- <글롬달의 신부> (1926)
- <잔 다르크의 수난> (1928)
- <뱀파이어> (1932)
- <분노의 날> (1943)
- <두 사람> (1945)
- <오데트> (1955)
- <게르트루드> (1962)
[1] 그의 양부의 이름도 그와 동일하게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이다.[2] 프랑스의 유명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도 제작에 참여했으며, 그는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3] 덴마크어로 '말(word)'라는 뜻이다.[4] 오늘날에는 호불호가 좀 갈리는 편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호평받는 편이다.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실시한 위대한 영화 투표에선 43위를 차지했다.[5] 그 작품은 드레이어 최초의 컬러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6] 드레이어의 어머니는 드레이어를 입양보낸 후 다시 한번 임신한다. 그녀는 아이를 낙태하려고 독극물을 먹었다가 자신이 중독되어 세상을 떠났다.[7] 특히 <게르트루드>[8] 드레이어가 생전에 입던 양복을 구해서 입고 다녔다는 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