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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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크의 잔'''(Jeanne d'Arc), '''성녀 요안나 아르첸시스'''(Sancta Ioanna Arcensis) 또는 '''잔 다르크'''는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시대의 여군이다.[6]
프랑스의 구국영웅이자 가톨릭 성인[7] , 그리고 프랑스의 수호성인[8] 중의 한 명.[9] 평민 출신으로 잉글랜드 왕국과의 백년전쟁(1337-1453) 말기에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전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역전시켰다. 그녀의 기적적인 활약으로 인해 결국 프랑스가 백년전쟁에서 이기고, 잉글랜드를 대륙에서 축출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잔 다르크 자신은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고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조국 프랑스로부터 구명도 받지 못했으며, 종교 재판을 받고 억울하게 화형되었다. 그녀는 사후 프랑스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시복・시성되어 그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녀의 인생은 너무나 극적이고 놀라운 것이어서 오늘날에도 종종 회자되는 살아있는 성녀의 모델이자 여성 영웅의 대표로 손꼽힌다. '''17세'''의 평범한 문맹 시골소녀가 갑자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며 프랑스 왕실에 나타나 프랑스 왕국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반년 넘게 지속되던 오를레앙 전역을 열흘만에 승리로 이끌고, 영국 최고의 명장 탈보트[10] 를 포로로 잡더니(파테 전투) 역사에 남을 우회 대기동을 성공시켜 랭스를 함락시키고,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올려 백년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긴 인류 역사에서 불가사의해 보이는 일들이 많았지만, '''신화시대를 제외한 기록이 검증 가능한 시대에 이와 비견될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11] 잔 다르크의 존재가 기적처럼 느껴지는 건 그녀가 영국, 프랑스라는 서유럽의 양대 강대국간의 기록에서 교차 검증이 가능한 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활동하던 1400년대면 중세를 넓게 잡는 관점에서도 중세 말에 포함 시키는 시기이다. 그리고 중세의 편견과 달리 당대 지식인들은 어리석은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적군과 아군에게 비슷하고 교차 검증 가능한 기록이 남았으며 서로의 상황을 고려하면 거의 동일하게 취급받던 인물이다.
기동전 운영으로 영국군의 허를 찌르고, 사기가 떨어져 영국군만 보면 도주하던 프랑스 군의 사기를 고양시키고 전투를 선두에서 이끌어서 전세를 바꾸어 조국을 구하고, 심지어 일자 무식이었음에도 종교재판에서 당시 평생 신학만 다뤘을 재판관들을 논리로 이겨서, 화형도 억지로 시키게 만들었다. 이 모든 걸 20세도 채 되지 않은 시골 소녀가 이뤄냈다. 오죽했으면 잉글랜드 병사들도 그녀를 성녀라고 믿고, "우리가 성녀를 불태웠다"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냥 존재 자체가 놀랍고 그래서 더 여러가지 설이 오고 갔지만, 그냥 이해를 넘어 섰으니 그녀 자신이 믿었던 대로 '하느님의 기적이다'라고 퉁치고 넘어 가는 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 생몰년
생몰년은 1412년 1월 6일(추정) ~ 1431년 5월 30일. 생일로 알려진 1월 6일은 주님공현대축일인데, 잔 다르크가 샤를 7세를 왕위에 올린 것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또는 잔 다르크에게 신성함을 부여하기 위해 사람들이 날짜와 이야기를 지어냈을 수도 있고, 대충 그 무렵에 태어났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가톨릭권 유럽에서는 부모들이 자식들의 생일을 실제 날짜보다는 가까운 가톨릭 축일 날짜로 기억하는 예가 흔하였다. 생일이나 나이를 사소하게 생각해서, 공문서의 나이조차 라틴어로 대략(vel circlter, ver circa)이란 말을 덧붙여 썼다.[12] 잔이 태어날 무렵 밤에 닭들이 몇 시간 동안 날개를 퍼덕이며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1412년이라는 생년도 종종 의심을 받는데, 1407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잔이 스스로 재판정에서 19살쯤 되었다고 말하였으므로 1411년에서 1412년쯤에 태어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 1407년설은 후술된 공주 설과 얽히기도 한다. 프랑스는 1412년 1월 6일을 공식 탄생일로 보고 2012년에 600주년 기념식을 하는 등 후하게 대접한다.
3. 표기
흔히 알려진 'Jeanne d'Arc'는 현대 프랑스어식 표기이며, 중세 프랑스어로는 'Jehanne Darc(주안 다르크)'라 썼다.[13] 영어로는 조운 오브 아크(Joan of Arc)라고 쓴다. 잔(Jeanne)은 라틴어 이름인 요안나의 프랑스어식 표기. 이외에 패색이 짙던 프랑스군에게 전환점이 된 오를레앙에서의 첫 승리를 기려 '라 퓌셀 도를레앙(la Pucelle d'Orléans, 오를레앙의 처녀)'이라고도 불린다. 어린 시절에는 잔이 아니라 자네트(Jeannette)라고 불렸다고 한다. 다르크 외에도 타르트(Tart), 다르트(Dart), 데이(Day) 등 다른 성씨를 썼다는 말도 있다. 사서에 따르면 동레미 남쪽의 아르캉바루아(arc-en-barrois)에서 태어나 성을 다르크(d'arc)로 썼다는 소리도 있다. 현재 통용되는 이름으로 확정된 것은 사후 25년이 지나서의 일로, 재심 재판 공문서에 johanna darc로 기록됐다.[14] #
한국에서는 구한 말에 약안으로 불렸다가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에는 '잔 닥크', '짠 닥크', '짠 다크'로 불리었고,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는 '잔 다크'라는 표기가 많이 쓰여졌다.
1980년대 이후로도 '쟌 다르크', '잔느 다르크' 등 다양한 표기가 있지만 현대 국어 표준어 표기로는 '잔 다르크'로 통일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녀 요안나 아르크'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가톨릭 세례명으로 쓰일 땐 '요안나'이다.
4. 생애
4.1. 어린 시절
잔 다르크는 알자스-로렌의 지방에 속한 바르 공국의 동레미(Domrémy)[15] 라는 프랑스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양치기 아버지 자크 다르크와 어머니 이사벨 로메의 5남매 중 막내[16] 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애칭인 자네트로 불렸다는 얘기가 있다.
아버지 자크 다르크는 1380년생으로, 딸이 화형당한 이후 비통해하다가 2개월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1431년까지 살았다. 잔이 계시를 받아 집을 떠나겠다고 할 때에는 자신의 아들한테 "잔을 돌에 묶어놓고 물에 던져야 한다"는 말까지 했지만, 랭스의 대관식 때 잔과 재회했을 때는 그런 감정이 다 풀렸던 듯하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감히 구국의 영웅한테 감정대로 화를 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애초에 그런 말을 한 것도, 자신의 딸이 전쟁에 나가 위험하고 끔찍한 일을 당할까봐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테니 말이다.
어머니 이사벨 로메는 남편보다 어린 1384년생으로, 결혼 전 로마로 성지순례까지 다녀올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한다.[17] 교통이 불편하고 위험했던 당시에 일개 농민 여성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당시는 중세 시대였고,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않았고 도로가 제대로 포장되지도 않았다. 로렌에서 로마까지 지름길로 가려면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했고, 아니면 멀리 돌아서 가야 했다. 좋은 길은 통행료가 비쌌다. 도적, 사나운 짐승 등의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는 먼 길을 성지순례할 정도면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다.
이사벨 로메는 자녀들에게도 가톨릭 교리와 신앙을 열심히 가르쳤다. 잔이 순교한 이후로는 오를레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살았다. 1458년까지 살았으니 당시는 물론 지금 기준으로도 꽤 장수한 셈이며, 덕택에 자신의 딸을 죽인 원수인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땅에서 완전히 쫓겨나고[18] 딸이 명예를 회복하는 것까지 보고 죽었다. 잔의 명예회복 재판을 위해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교황에게 탄원했다고 하며 파리에서 열린 재판에도 참석했다고 하고, 그 모정을 기리기 위해서인지 잔의 고향인 동레미에는 이사벨의 동상도 있다.
잔의 형제로는 자크, 장, 피에르라는 세 오빠와 카트린이라는 누이가 있었다. 자크는 첫째 오빠로, 1402년에 태어나서 1452년까지 살았으며, 둘째 오빠 장은 1404년에 태어나서 1477년까지 살았으며, 언니 카트린은 1405년에 태어나서 1429년까지 살았으며, 셋째 오빠 피에르는 1408년에 태어나서 1467년까지 살았다.
카트린은 잔보다 7살 언니인데 Greux라는 지역의 시장의 아들 콜린(Colin)과 결혼하고 1429년 당시 첫째 아이를 출산 하던 중에 죽은 것 외에는 정보가 없다. 그러므로 잔이 활약할 1429년 즈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피에르는 잔의 4살 오빠인데 여동생 잔을 따라 전장을 누비고 다녔으며, 잔의 마지막 전투에도 동행해서 같이 붙잡혔는데, 잔과 달리 무사히 풀려났다. 사실 잔과 달리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굳이 심문해서 죽여야 할 이유가 없어서 무사히 풀려났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피에르는 잔의 둘째 오빠 장과 함께 1460년대와 1470년대 사이까지 생존했다. 장은 잔과 피에르와 마찬가지로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 왕국의 군인으로서 활동했으며 1477년까지 살았는데 향년 73세로 잔의 어머니[19] 와 함께 다르크 일가에서 장수했다. 첫째 오빠 자크는 군인이 되지 않은 대신 캐서린 코르비셋(Catherine Corviset)[20] 와 결혼해서 슬하에 자식이 많았다.
잔의 집안에 대한 묘사는 서로 엇갈린다. 가난한 소작농 집안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의 학습만화 및 위인전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지방의 부농이며 동레미의 말단 관리[21] 였다는 설이 유력하다.[22] 물론 그렇게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고,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정도. 집안 생활은 검소했다고 한다. 잔의 집안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링크 참조. 잔의 일가에 대한 정보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잔 다르크가 위인전에 나오는것 처럼 시골 출신의 평범한 소작농 출신이 맞다면 대다수의 농부 아이들이 그랬듯이, 잔 역시도 부모의 농사일과 가축 돌보기, 바느질과 요리 등의 집안일을 돕는 평범한 소녀였다. 다만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은,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이 아주 독실했다는 점.''' 그리고 대다수의 농부들이 문맹이었고 잔 다르크 또한 문맹이었다. 이 문맹이었다는 점 때문에 이후 잔 다르크의 업적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심증의 근거로 채택되고 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1429년과 1430년 사이 프랑스 주민들에게 편지의 서명을 쓴 정황으로 보았을 때 기본적인 글은 쓸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한계가 있어서 서명을 제외한 나머지 글은 휘하 기사 Louis de Contes와 신부 Jean Pasquerel에게 받아 쓰게 했다.
아버지가 양치기였으니 그녀도 양치기 일을 도왔을 가능성이 큰데, 양치기라는 일이 겉보기에는 평화로운 꿀보직처럼 보여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양이라는 동물은 온순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양치기에게 몸통 박치기를 자주 할 만큼 성격이 고약하다. 또한 양이 먹을 풀이 있는 산과 들에는 양들을 잡아먹으려는 늑대 무리나 한몫 챙기려고 강탈하려고 드는 도적들이 언제나 있었다. 따라서 평소에는 수십 마리의 양들을 통제하면서, 늑대나 도적이 나타났을 때는 양들을 지키거나 포위를 뚫고 도주하여 마을에 도움을 요청할 만큼의 무력이나 완력이 필수인 직업이 양치기였다. 그랬던 만큼, 잔 다르크도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자라지 않았지만 웬만한 싸움실력과 완력은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직업에 종사하던 성서의 영웅 다윗이 전쟁터에서 적장을 슬링샷을 이용해 헤드샷 저격 한 방으로 주님 곁으로 보내버린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민간인 중에서는 최상급 전투력을 요하는 직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2. 위기에 처한 프랑스
한편 잔이 살던 당시는 백년전쟁의 막바지로 전황은 프랑스에 대단히 불리했으며[23] , 왕이 되어야 할 도팽(왕세자) 샤를은 대관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그가 왕세자라 자칭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인 샤를 6세가 그를 호적에서 파버리고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를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켜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으로 추대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샤를 왕세자는 잔존 아르마냑파와 스코틀랜드의 도움에 힘입어 프랑스 남부에서 여전히 적법한 왕세자로 인정받고 있었고, 북프랑스를 장악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는 이를 토벌코자 하였으나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같은 해에 사망하고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이 되면서 정국이 어수선해져 본격적인 남하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전쟁은 장기전, 약탈전 위주로 변하였고 서로 자기 영역권 내에서 기반을 닦는 데에 치중하고 있었다.
한편 전쟁의 여파는 잔 다르크가 살던 동레미 마을에도 들이닥쳐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동레미 마을에 쳐들어와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일들이 발생하였고, 잔 다르크의 가족을 포함한 동레미 주민들은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인근 마을 뇌샤토[24] 로 피난해야 했다. 그리고 동레미는 샤를 7세의 아르마냑파를 지지하는 마을인데 비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를 지지하는 마을이 근처에 있어 동레미와 그 인근 마을 청년들이 서로 패싸움을 벌이는 일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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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혼란이 지속되던 와중 1425년, 불과 13세의 잔 다르크에게 성 미카엘,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카타리나의 모습과 함께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목소리에 처음에는 당황해서 거절했으나 그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1428년, 마침내 16세의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할 것을 결심하였다.[25]
이 부분에 대한 현대 역사학의 관점은 이렇다. 중세인들의 사고방식은 당연히 현대인들과 다르다. 이들은 기적이나 하느님의 음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민감했다. 현대인들에게는 당연한 현상도 이들에겐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26] 실제로 중세인들은 모든 사물에서 기적을 보았다.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을 때, 샤를의 궁정과 이후 잔이 받은 종교재판은 그것이 하느님의 음성인지 사탄의 음성인지 여부를 검증하려 했을 뿐, 음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잔의 체험은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잔 생전의 유럽 천지는 하느님의 섭리가 만물을 움직이며 그 권능이 성인들을 움직여 이적을 보여주고 있다고 믿는 세계였다.
또한 잔 다르크의 성녀 이미지 어필이 본인이 지휘권을 잡고 통솔하는데 있어 유리하는데 작용했었던 점, 실제로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실제 잔 다르크의 성격상은 가슴이 이끄는데에 충실한, 열혈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고무시켰던 인간형이 아닌 냉철하고 지성미 있고 박력있는, 머리를 앞세워 행동하는 냉철한 인간형에 가까웠단 점을 들어 잔은 마냥 신앙심에 이끌렸던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점을 철저하게 이용한 것이 아니냐라는 말도 나오곤 한다. 그러나 당시는 민중 신앙이 뜨거울 때라 잔의 신앙심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고 잔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켰고 전쟁 중에도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고 신앙심이 깊었기에 시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문맹의 평민 소녀가 어떻게 제정신으로 자신에게 천재적인 군사적 능력이 있는지 알며 목숨을 걸고 성녀 코스프레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27]
4.3. 나라를 구하다
결심을 굳힌 잔은 곧바로 보쿨뢰르 지방의 영주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에게 찾아가서 시농 성에 머무르고 있는 도팽 샤를을 알현하게 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당했으나, 잔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곳에 머물러 지냈다.
영주는 잔이 마녀라고 의심하였기에 구마 의식을 할 수 있는 사제를 보내 시험해 보았으나, 오히려 잔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여 고해성사를 하며 그 의심을 풀게 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끈질긴 요청에 장 드 메스와 베르트랑 드 폴뤼니를 비롯한 기사들은 잔의 뜻에 동조했고, 결국 영주는 샤를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잔을 시농으로 보내게 된다. 그곳으로 가려면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점령한 지역을 지나가야 했는데, 시농까지의 거리는 무려 435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425km보다도 더 먼 것이다. 시작부터 그런 어려운 조건이 있었으나, 아무런 신변의 이상 없이 무사히 도착한다.
그러나 샤를 왕세자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해서 자신의 시종에게 화려한 옷을 입힌 다음 자기의 자리에 가게 하고, 초라한 옷을 입고 구석에 숨어서 잔을 불러냈다. 그런데 변장한 시종을 한번 보고 곧바로 외면한 다음 샤를을 찾아내서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래도 마녀의 속임수라는 주장이 측근들에게서 계속해서 나오자, 다시 푸아티에로 보내서 성직자들의 심문을 받게 했다. 물론 잔은 거짓 없는 언변으로 이 심문에도 통과했다.
결국 잔 다르크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샤를 왕세자는 잔 다르크에게 일군을 주고 질 드 레, 라 이르, 장 돌롱 등의 유능한 기사들을 딸려주어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도록 출병시켰다. 당시 오를레앙은 루아르강의 요충지로서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잉글랜드군의 계획은 오를레앙을 함락시킨 뒤 루아르강을 건너 대번에 샤를의 본거지인 부르주까지 내려쳐 긴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것인데, 오를레앙 함락이 오랫동안 지체되어 양쪽이 서로 모두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출발 전에 기적 같은 일화가 있었는데, 잔은 "천사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트 카트린 드 피에르부아 성당의 제단을 파보면 검이 있을 겁니다."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 곳에서 검을 찾아내어 자신의 지휘용 검으로 삼았다. 오래되어 녹슬은 검이었지만 한번 닦아내자 새 검처럼 되었다고. 곧바로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간 잔 다르크는, 현지 사령관 장 드 뒤노아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설득해 군대를 조직하여 싸웠다.
한편 오를레앙에 입성할 때도 기적 같은 일화가 있었다. 잔 다르크가 군사들과 함께 오를레앙 성으로 입성하려면 성 앞을 가로지르는 큰 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러나 바람이 잔의 군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불거나 또는 바람이 불지 않아,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잔 다르크가 기도를 올리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하여 어려움 없이 잔의 군사들은 강을 건너 오를레앙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다. [28]
떠도는 말 중에 있는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전투엔 참전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며, 영어와 프랑스어 위키피디아에서 오를레앙 전투 항목이나 잔 다르크 항목 어디를 봐도 잔 다르크가 참전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없다. 오히려 전장에서 심각하게 눈에 띄는 순백의 갑옷과 옷을 입고 선두에서 싸웠으며[29] , 잉글랜드군을 차례차례로 패퇴시켰다.
마침내 1429년 5월 오를레앙을 해방[30] 한 잔 다르크는 한때 잉글랜드에 충성 서약을 하고 트루아 조약을 지지해서 프랑스 왕실의 의심을 사던 리슈몽 백작이 이끌던 군대를 만나 그에게서 "네가 성녀라도 두렵지 않고 마녀라면 더 두렵지 않다." 하는 말을 들었으나 결국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 이어서 파타이 전투에서 숫적 열세에도 적장 탈보트[31] 를 포로로 잡으며 잉글랜드군을 무찔렀고, 루아르 전역[32] 을 이끌며 루아르 강변에 주둔하던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을 연달아 격퇴했고, 여러 교량[33] 을 확보하였다.
당연하지만 이때 프랑스군은 포로로 잡은 잉글랜드군 중에서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포로들은 전부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 내용은 다른 것도 아니고 잔 다르크 위인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잔 다르크 본인이 직접 학살 명령을 내린 건 아니어서 가능하면 학살을 자제시켰고, 오히려 전장에서 죽어가거나 부상당한 잉글랜드군을 직접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기도 했다. 보장 시 성에서는 패잔병들을 보자 각자 소지품을 챙기고 가도록 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서 포로 학살이라는 부분에서 잔 다르크가 개입했다고 해도 비판받을 부분이 아니다. 사람들이 '포로를 죽이는 건 잔인한 행위다!'라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포로를 사람답게 대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약이 처음 나온 것이 1864년이며, 현재의 인권 개념이 담긴 협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9년에 나온 4차 협약인데, 현대에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하다.[34] 대인의 표본이자 비기독교인임에도 당시 중세에서 인정받았던[35] 살라딘도 리처드 1세와의 교섭이 실패하자 기독교 포로들을 학살했으나, 당시에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포로는 승자의 소유이며 따라서 사로잡은 이들이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 없다는 개념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5차례 거듭된 승리[37] 로 랭스[38] 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샤를이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게 해 주어[39] 그를 프랑스의 왕 샤를 7세로 만들었다. 샤를 7세는 잔의 공로를 인정하여 소원대로 고향 마을 동레미에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기 전까지 동레미는 조세 면제구역이 되었다.
4.4. 시련기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이후 잔 다르크와 잔의 수행자들은 프랑스 전역을 돌며 소(小) 영주나 국민들이 새로운 프랑스 왕 샤를 7세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했고 그것은 그런대로 먹혔으나 이는 왕실에게 양날의 칼로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즉, 잔 다르크의 성녀 타이틀을 보고 프랑스 왕실을 지지한 사람들인 만큼 잔 다르크의 말 한 마디에 프랑스 왕실을 흔드는 내부의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자크리의 난처럼 농민반란이 일어날 경우 농민 출신인 잔이 그들에 동조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게다가 왕실로부터 의심받는 리슈몽 백작을 잔이 신뢰하고 있었음은 샤를 7세파에겐 눈엣가시 같은 조건 및 설정이었다. 게다가 잔 다르크가 이전에 보드리쿠르에게 "프랑스 왕국은 왕세자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왕에게 맡기신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해석 방식에 따라 샤를과 그 측근들에게 있어서는 대놓고 표현은 못하더라도 내심 불편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즈음 샤를 7세파의 주교 등이 잔 다르크가 갑옷 위에 입은 금실로 짠 옷과 말 안장 밑을 장식한 비단으로 만든 천 등을 가지고 사치[40][41][42] 를 문제 삼기도 하는 등 서서히 잔 다르크와 프랑스 왕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게다가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전투 및 곧바로 이어진 랭스의 진격처럼 공격적인 전략과 신속한 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대관식 이후 비용이 많이 드는 전투를 통한 승리보다는 협상과 조약 등으로 이득을 취하려 하는 왕실과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물론 잔 역시 협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부르고뉴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샤를 7세는 몇 주만 기다리면 파리를 바치고 항복하겠다는 부르고뉴의 제안에 낚이는 삽질을 하고 만다. 그래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의 원군이 파리에 들어오도록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걸 알아차린 잔 다르크는 샤를 7세를 설득하여 생드니 등 파리 주변 지역을 탈환한 다음, 1429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43] 에 마침내 파리의 생 토노레 성문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며 성문을 열고 맞아주리라는 잔의 기대와는 달리, 파리 시민들은 잔을 여자의 모습을 한 괴물, 마녀, 창녀, 탕녀[44] 로 욕하면서 입성을 거부하며 오히려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과 합류하고 말았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고 잔 다르크는 허벅지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지휘를 멈추지 않았지만 공성전이 조금씩 장기화될 듯하자 불과 이틀만에 냉랭해진 왕실의 지원 부족으로 퇴각하였다.
물론 샤를 7세가 영지를 저당잡힐 정도로 프랑스 왕실의 재정난은 당시 상당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파리 함락이 성공할 경우 잔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경우를 두려워해서 일부러 이른 날짜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르고뉴인이 쓴 연대기 <파리의 부르주아의 저널>에 따르면, 파리 시민들은 당시 잔 다르크가 군대를 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당으로 가 기도를 올리거나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거나 무기를 나르는 등 잔 다르크와 맞설 준비를 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도 이러한 파리 시민의 반응에 열받아서 "저녁 때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힘으로 들어가서 인정사정 안 보고 모조리 다 죽인다."고 윽박질렀다고 하는데 당시 부르고뉴파가 잔 다르크에 대해 적대감을 가져서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썼을 수도 있고 설령 파리를 함락시켰다고 해도 그 전이나 그 후의 일을 생각하면 학살이나 약탈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이 연대기는 잔 다르크의 화형 모습도 묘사했는데 딱히 적대감을 드러낸 건 아니지만 다른 증언들과 달리 잔 다르크의 화형대 위에서 십자가를 찾는 등 경건한 모습은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생략했기 때문에 명예회복 재판 당시의 기록과 증언처럼 교차검증 하거나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잔 다르크의 업적이 그리 큰 영향력을 지속하지 못했으며 잔을 이단자로 몰아넣은 재판이 합법적이었고 공정하다가 얘기하는 등 부정적인 인식을 표현하는 영국의 역사가 줄리엣 바커조차도 자기 저서에 화형 당시 모습에 대해선 십자가를 손에 쥐고[45] 예수의 이름을 외쳤다는 표현을 썼으므로 화형 당시에 십자가를 쥐고 예수의 이름을 외친 일화 자체는 사실인 듯 하다.
이후 잔 다르크를 반대하는 국왕 측근 조르주 라 트레무유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라샤리테 전투에 나섰다가 물자 지원을 못 받으며 또 실패, 생피에르르무티에를 탈환하고 부르고뉴의 기사 강도들을 토벌하는 일 외에는 이렇다 할 승전을 올리지 못하면서 프랑스 왕실에서는 잔 다르크의 성녀 역할에 대해 서서히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듯 보인다. 결국 샤를 7세는 잉글랜드, 부르고뉴와 휴전을 하면서 잔의 뜻에 반대함을 대놓고 드러냈다. 일단 겉으로는 공로를 치하하며 잔과 가족들에게 귀족의 칭호를 주긴 했지만 그리 큰 봉토나 병사를 거느릴 권한도 없는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를 주었다.
사실 샤를 7세는 이전부터 잔 다르크를 껄끄러워 하고 있었다. 중세에는 잔 다르크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 자체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이 무렵 서양에서 왕이 되려면 형식적이게나마 교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오직 교회에서만이 왕을 대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잔 다르크가 앞으로의 왕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는 교회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논란이 일기에 충분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진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마지못해 선택한 상황에서, 섣불리 교회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파리를 비롯하여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가 점령한 지역을 공격해야 한다는 잔 다르크와 달리 샤를 7세는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다. 되도록이면 전쟁을 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서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외교는 힘의 논리로 통한다는 것을 샤를 7세는 몰랐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끝내고 싶었다. 한편으로 전쟁으로 잔 다르크의 명성이 계속 올라간다면 역으로 자신의 왕권이 추락할 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생피에르 르무티에를 함락시켰을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약탈하려고 하자 엄하게 이를 금지시키고 주민들을 지켜주었으며 (링크) 스코틀랜드인 병사가 약탈한 송아지 요리를 자신에게 내놓자(또는 그가 약탈한 식품을 먹은 걸 알게 되자) 먹지 않고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때렸다는 설도 있다.) (1 링크 2) 또한 휴전기간 동안 부르주에서 빈민들을 구제하는 선행을 베풀었다.
다만 잔 다르크가 약탈을 금지시켰고 포로를 보호했다고 하는 등 선행 사례 대부분은 사후 명예회복 재판 당시 증언이나 그 이후 전설에서 미담으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사실 잔 다르크가 참여한 전투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이 발생한 적이 있기는 하다. 잔 다르크가 자르조라는 마을을 함락시킨 다음에 포로와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마을과 성당까지 약탈당했다는 사례인데 (링크) 일부 경우는 심지어 잔 다르크의 위인전에도 내용이 실렸다. 물론 잔 다르크가 관여되지 않은 투로 말하지만 말이다. (링크)
일단은 잔 다르크가 이걸 지시했거나 직접 약탈에 참여했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잔 다르크 스스로는 약탈 자체에는 찬성하지 않은 듯 하다. 다만 이게 사실일 경우라도 잔 다르크의 군사들에 대한 영향력과 통제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즉 약탈과 학살에 잔 다르크가 관여하지 않았을 경우 잔 다르크의 지휘력 등 실질적인 능력이 있는지에 여부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어 진퇴양난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민간인들이 죽은 경우 해당 웹사이트에도 간접적으로 표현되었듯이 당연히 잔 다르크가 직접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린 게 아니라 대포로 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빚어진 참사로 보인다.
만약 잔 다르크가 직접 학살과 약탈에 관여했다면 훗날 잔이 재판을 받을 때 언급되었거나 피해자나 관련된 민간인 증인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우선시되긴 하지만 재판하는 측에서 결정적인 도덕적인, 법적인 약점으로 물고 늘어졌을 찬스였는데도 거의 얘기가 나오지 않고 상리스 주교의 말을 훔쳤다는 정도의 내용으로만 추궁받은 정황을 보아 직접 관여했을 가능성은 적은 듯하다.
잔 다르크도 프랑스군의 간부에 속한 이상 군사들의 약탈과 학살 등 민간인과 포로들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일에 대한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중세시대에 인권이 현대보다도 훨씬 부족할 수밖에 없고 현지에서 보급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 당연시된 시대이긴 했지만 말이다. 재판에서 언급이 거의 없던 이유도 잉글랜드군조차도 약탈을 당연시해서일 수도 있다.
한편 이 웹사이트에 따르면 잔 다르크가 민간인 약탈에 관여한 사례는 없고, 약탈한 물건을 쓴 사례는 적이 쓰던 검을 빼앗아 쓴 거라고 하는데 이건 현대 전쟁에서도 당연히 여기는 전리품 획득이다. 역사가 스티븐 웨슬리 리치, 레진 페르노드, 낸시 골드스톤 등은 "잔 다르크가 약탈을 금지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밝히고 있다. (링크 1 링크 2 링크 3)
4.5. 체포와 재판, 죽음
1430년 5월 23일 휴전한 사이에 다시 힘을 키운 선량공 필리프[46] 휘하의 부르고뉴파 군대가 콩피에뉴에 침입하자 잔 다르크는 왕실의 무관심 속에 대략 200명에서 400명으로 추정되는 자기 휘하의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급파, 부르고뉴군을 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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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이들을 물리쳤지만 증원군 6천 명이 나타난 뒤 상황이 역전되어 성으로 후퇴하면서 후방을 방어해야만 했다. 잔은 자신이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자신의 병사들을 최대한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잔이 들어오기 전에 성문과 연결된 다리가 끌어올려져 고립되었고[47] , 리니 백작 소속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옷을 잡혀 낙마당하면서 포로로 잡힌다. 훗날 지원군이 뒤늦게나마 오면서 콩피에뉴의 방어에는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잔 다르크 본인에겐 치명적인 상황을 맞은 것이다.
리니 백작은 포로로 잡은 잔이 탈출을 시도하자[48] 더 굳게 가두는 한편 자기 집안의 여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해주는 등 정중히 대접도 했다. 이때 잔 다르크와 가까이 지내던 리니 백작의 이모 '잔'[49] 은 잔 다르크에게 친절했는데 조카에게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에 넘기지 마라.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영지를 상속하지 않겠다."고 경고 섞인 설득을 했으나 불행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해 9월에 사망했다.
한편 리니 백작은 샤를 7세에게 전형적인 중세 유럽식 포로 처리법대로 "몸값을 내고 잔 다르크를 데려가라"고 제의했지만, 왕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샤를 7세에게서 잔의 정치적인 용도는 이미 다 사라져 버린 후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체포당하는 과정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왕의 측근들이 콩피에뉴 전투 당시 체포되도록 배신 혹은 방관했다는 말도 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리니 백작은 1만 리브르 트르누아(Livre tournois)[50] 의 거액을 받고 잉글랜드 측에 잔 다르크를 넘겨버린다.[51]
파리로 호송된 잔 다르크는 당시 잉글랜드파 및 부르고뉴파에 소속되어 있던 파리의 이단 심문관들에게 넘겨져 이단 재판을 받았다. 흔히 잔 다르크가 마녀 재판을 받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이단 재판이었다. 이 재판을 위하여 코숑 주교[52] 가 이끄는 무려 70여 명의 이단심문단이 만들어졌으나 잔 다르크의 혐의를 입증하거나 자백을 받아내는데 '''실패했다.''' 주교 이하 신학 전문가 70명이 달려들었지만 말 그대로 일자무식인 시골 소녀 한 사람에게 말빨로 발린 셈이다. 1대 70이라는 수적인 열세, 재판 성립부터 과정까지 당시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게 잔 다르크에게 불공평했던 상황이었던 것은 물론, 건강까지 악화된 상태인 등 모든 면에서 잔에게 극도로 불리한 조건이었음에도 말이다.
이 재판의 특이한 부분은, 바로 첫 번째 재판은 공개재판으로 했었는데, 해당 재판에서 얼마나 심하게 잔 다르크에게 발렸는지 다음 재판부터는 비공개 재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재판 과정의 자세한 기록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며, 논리정연하고 침착한 대응으로 인해서, 해당 내용에 의거해서 잔 다르크가 정신병을 가지지 않았다는 유력한 증거로서 사용되고 있다.
잔 다르크는 "검과 깃발 중에 어느 것이 더 좋냐"는 질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 깃발을 들었으며, "한 번도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만약 제가 은총 상태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만약 제가 은총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은총을 받았다면 함부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고 몰고 갔을 것이고 반대로 은총이 없다고 말하면 저주에 들렸다고 몰아갈 의도로 파놓은 함정이었지만 도리어 종교재판관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또 "미카엘 대천사에게 털이 있냐", "천사가 옷을 입었냐" 등등 천사의 외형에 관한 질문도 함부로 외형을 논하면 이단으로 몰릴 만한 질문이나, 오히려 상대에게 외형에 대해 역으로 논하게 만드는 답변을 했다. 글을 전혀 모르는[53] , 즉 수사학에 대한 지식을 구하기 매우 힘든 상태인 어린 소녀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던 사제들의 악의적인 추궁을 물리친 건데, 현대적으로 비유하자면''' 무학의 미성년자가 변호사 한 명 없이 혈혈단신으로 당대 최고의 재판관과 검사를 상대로 재판을 대등하게 벌이는 정도이다.'''
그 일부를 직접 살펴보자. 다음은 실제로 코숑 주교를 비롯한 재판관들이 던졌던 질문과 그에 대한 잔 다르크의 답변을 간추려서 재구성한 것이다.
결국 이렇다 할 혐의를 입증해내지 못한 코숑 주교는 마지막으로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죄라고 절대 할 수 없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괴상하게도 당시에는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동성애 예비음모로 보아 성경에 위배되는 종교적 범죄였다. 이에 잔 다르크는 "순결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잔의 재판 이전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한 여성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이미 있었으므로 잔의 주장은 정상적인 재판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재판 자체가 교회법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만 예를 들자면 먼저 종교재판의 판사 노릇을 하려면 일종의 자격증 같은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코숑은 그런 게 없었다.[55]
또한 잔 다르크에게 불리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면 재판을 열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일단 재판부터 열고 보라는 지령을 내려보냈고, 잉글랜드 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고문들의 도움을 받으며 재판에 임했지만 잔 다르크 측에 유리한 증인이 1명도 없었다. 잔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 또한 교회법을 어기는 일이었음은 당연.
불리한 상황에 처해진 잔은 교황청에 항소를 신청했지만[56] 재판정에서는 이를 저지했다. 게다가 잔에 대해 재판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잔의 고향 동레미로 조사관으로 니콜라 바이이라는 사람을 보냈는데 잔에 대한 나쁜 소문이나 증거를 전혀 얻지 못하고 바이이가 돌아오자[57] 코숑은 그에게 화를 내고 욕을 퍼부으며, 여행 경비[58] 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잔이 이미 푸아티에의 종교심문에서 문제없음을 환기킨 성직자 니콜라 드 우프빌은 오히려 감옥에 갇혔다가 영향력 있는 친구의 보증으로 겨우 풀려났고, 잔의 재판 자체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한 장 로이에라는 성직자도 나타나자 그를 살해하려는 위협을 가해서 그 성직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결국 로마로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잔의 고향 사람으로 꾸민 사람을 독방에 보내어 위로해주면서 대화하는 척 하면서, 엿보기 구멍을 통해 잔에게서 이단으로 보일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얻어내려는 수작까지 부렸다.
그나마 잔이 이단자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목숨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감옥에 여러 번 찾아와 회개하라고 설득하려고 했던 이상베르 드 라 피에르와 마르탱 라드브뉘가 있었는데, 코숑은 그 소식을 듣고 해명을 요구하며 닥달했고, 심지어 워릭 백작은 드 라 피에르에게 "센 강에다 던져버리겠다"고 말했다. 즉 "잔을 조금이라도 도우려는 의도가 보이면 죽여버리겠다"는 뜻이다.
다만 이러한 행위로 잔 다르크를 처음부터 죽이려고 재판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잔 다르크의 재판은 처음에는 공개재판을 통해서 잔 다르크에게 엄청난 망신을 주고 그 권위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등 사실 잔 다르크를 농락해서 무력화 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며, 아무리 중세 시대라고 해도 잔 다르크에게 줄 수 있는 범죄 혐의들로 일반적으로 사형을 언도할 수는 없었다. 특히 샤를 7세가 잔 다르크에게 무관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잔 다르크를 별 것 아닌 일로 사형할 수 없다"고 본 것도 있으며, 잔 다르크의 사형 소식에 온 프랑스가 충격에 빠질 정도로 사실 어처구니 없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았기 때문으로 잉글랜드도 이걸 모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공개재판에서 오히려 잉글랜드 측이 개박살나서 첫 번째 공개재판 이후 모든 재판이 비공개 재판으로 이루어졌을 지경이고, 재판 내용을 기록한 내용을 토대로 보면 잔 다르크가 굉장히 논리 정연하고 좋은 대응을 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 없이 모욕하고 권위를 떨어뜨릴 생각이었지만, 재판이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잉글랜드에 협력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만 남게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당연히 잉글랜드 및 부르고뉴파의 시각에서 진행된 재판이 공정하기는 힘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당파도, 잔 다르크의 요청으로 당시 재판관이 프랑스 왕실에 잔이 바라는 증거물들을 제출하라고 요청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잔 다르크를 구할 만한 문헌 기록 및 증거자료들을 전혀 제출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프랑스는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이미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인 탈보트를 포로로 붙잡은 상태였다. 당시 잉글랜드군 측은 탈보트와 잔 다르크를 교환할 의사도 있었지만 당시 관례였던 포로 교환 제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후 잔 다르크의 부하이기도 했던 프랑스 장군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붙잡히자 바로 포로 교환을 제의해 성사시켰다.[59] 이걸 봐도 사실상 샤를 7세는 잔을 구해줄 생각 자체가 없었고 아무것도 안 한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오를레앙 시민들이 자신들을 구한 잔 다르크를 구해내기 위한 몸값을 자발적으로 모금하자 그걸 몰수해버렸다.[60] 다만 잉글랜드가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혹은 1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서 데려온 포로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는 잉글랜드인 포로 중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1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포로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잉글랜드 지배하의 노르망디에서도 잔 다르크를 손에 넣기 위해 특별세를 도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어머니 이자보 드 바비에르 대비는 한술 더 떠 잉글랜드에 잔 다르크를 죽일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다만 이자보 대비는 트루아 조약 이후 부르고뉴파를 지지하였기에 아들 샤를 7세와 관계가 좋지 못해 적대적 수준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역사가 줄리엣 바커는 잔 다르크의 재판은 공정하고 합법적이었으며 잔은 이단의 혐의를 결코 피할 수 없었고 잔의 편을 드는 사람도 많았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람이 잉글랜드 사람이고 자신의 저서에서 아쟁쿠르 전투 등 잉글랜드의 승리를 강하게 묘사하고 잔 다르크가 나오는 책 제목도 "정복(Conquest)"으로 다분히 잉글랜드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 있는 언급처럼 그 당시에 내부에서조차도 공정하지 않다고 비판이 있었던 재판이었고, 영국인 변호사 브라이언 해리스도 자신의 저서 인저스티스에서 잔 다르크의 재판을 두고 사법살인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프랑스 왕당파 학자들은 이 재판을 맹렬히 비난했다.
재판을 받을 때 잔은 7년 안에 오를레앙에서의 패배보다 더 큰 재앙이 잉글랜드에 닥친다고 경고 혹은 예언을 했는데, 단순히 전투에서의 참패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잔의 죽음 몇년 안에 잉글랜드 왕의 섭정 베드퍼드 공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고, 아라스 조약에 의해 부르고뉴파가 프랑스 왕실에 협력하면서 파리까지 잃게 된다.
결국 잔은 고문과 화형 위협을 포함한 협박을 받아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61] 그러나 잔은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62] "서명하면 수녀원[63] 에 감금한다"는 약속과 달리, 여전히 군사 감옥에 가둬놨고 여자 옷을 입게 하고선 병사들을 보내 위협을 가했다. 이 상황에서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악마와 관계를 맺은 마녀로 몰 것이 뻔했다. 결국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잔은 남자 옷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빌미로 재판정은 이단 판결을 내린다.
가혹한 감옥 생활로 병에 걸린 잔은 화형 선고가 아니더라도 감옥에 계속 갇혀 있으면, 병으로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설령 종교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어도 잉글랜드에게는 군사재판이나 정치재판을 통해 포로나 반역자라는 죄목으로 처형하는 방법, 또는 독살이나 암살 등의 방법도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잉글랜드 측이 잔을 이단자이며 마녀로 몰아 종교재판을 고집한 이유는 잔이 감옥에서 자연사하거나 다른 죄목으로 처형당하거나 암살당하면 프랑스 측에게 오히려 영웅의 이미지로 민중들에게 보일 수도 있고, 샤를 7세의 위신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단자나 마녀로 몰아서 죽이면 샤를 7세의 위신 실추가 제대로 될 것이고 다른 처형 방법에 비해서 민중들의 반발심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계산한 일. 물론 결과적으로 이 계산은 소용없게 되었다. 오히려 역효과만 제대로 불렀을 뿐이다.[64]
이로써 잔 다르크는 화형을 선고받아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억울하게 화형에 처해졌다. 잔은 마지막 소원대로 화형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루앙 시민들과 잉글랜드 병사들 몇몇으로부터 십자가를 받았고, "나를 화형대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경건한 태도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수백 년 후 잔다르크가 시성되면서 루앙의 화형장 터에는 잔에게 봉헌된 성당이 지어졌으며, 특히 화형이 집행된 바로 그 지점에는 대형 십자가가 세워졌다.
그런 잔 다르크의 화형식을 본 군중들과 잉글랜드 병사들, 재판관들 대다수, 심지어 헨리 6세의 비서까지도 눈물을 흘렸고 "성녀를 죽였다"고 탄식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날은 물론이고 이미 처형 집행을 많이 한 베테랑 사형 집행인인 조프리는, 훗날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에서 "잔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증언했다.
결국 잔 다르크는 불길의 열기와 연기에 질식해 사망한다. 그러자, 잉글랜드 측은 일단 불을 끄고 죽은 19살 소녀의 옷을 전부 발가벗긴 채 잔의 알몸을 구경하러 모인 군중에게 내보이고 전시하는 모욕을 선보였다. 이는 잔 다르크가 성녀도 마녀도 아닌 평범한 여성이라고 부각하려는 '술수'였다.
잔 다르크가 죽는 순간 비둘기가 몸 속에서 나타나 날아갔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성해(聖骸)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잔 다르크의 몸이 3번씩이나 태워졌고 그 재는 세느 강에 흘려보내졌다는 것 뿐이다. 19세기 무렵에 잔 다르크의 화형 장소에서 잔의 유해로 추정되는 갈비뼈가 발견되었다며 보관했으나, 2006년 조사 결과 고대 이집트 미이라의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도 프랑스 국민, 신자들의 자작극이나 착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 루앙 시민들은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댔다고 한다. 루앙이 친잉글랜드파 도시였음에도 잔 다르크를 지지하거나 동정하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잉글랜드 정부가 당시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잔의 재판과 화형 때문에 책임질 일이 없으리라고 보증서를 발급해줬는데, 이게 잔의 재판에 대해 당시에도 비판적인 말이 많았고 민간 여론도 그리 좋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피에르 보스키에라는 수도자는 잔의 화형 당일 "악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가 처벌 받기도 했다.
당시 재판을 주도한 파리 대학교가 잔 다르크를 화형한 후 교황과 교황청에 보낸 서한(국역본). 마치 잔 다르크를 배려하면서 공정하게 재판을 하고 자신들은 원래 잔 다르크를 살리고 싶어했는데 잔 다르크가 이단이 재발한 탓에 할 수 없이 화형을 판결하고 집행해서 괴로워한 것인 양 교황과 교황청에 사기를 치고 있다.
4.6. 명예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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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의 고향인 동레미 라퓌셀에 세워진 잔의 어머니 이사벨 로메의 동상.
샤를 7세는 25년이나 지나서야 잔 다르크의 명예 복권을 선언하였고 교황청은 프랑스 왕실[65] 의 요청을 받아들여 1456년에 잔 다르크에 대한 복권재판을 지시했다.
장기간에 걸쳐 파리, 루앙, 오를레앙, 동레미 등 잔 다르크와 관련된 지역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전 유럽에서 성직자들을 초청해서 재판에 참여시키고 주민들에게 증언을 듣는 등의 조사를 한 다음, 잔 다르크 생존 당시 휘하에 있던 병사들과 관련 지역 주민들, 그리고 재판에 참여했던 재판관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증인들을 불러모아서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명예회복 재판을 실시한다. 이 재판에서 이단자이자 마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판결을 무효화하였으며,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이단, 마녀 혐의 및 파문 조치를 철회하여 무죄라는 결론을 내리고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판결내렸던 피에르 코숑을 이단자로 선언하고 주교직을 면직했다.
그런데 이건 이단자이자 마녀로 판결받은 잔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 꺼림칙한 샤를 7세와 유족들의 이해관계가 합일된 면도 있다. 정작 잔에 대한 종교재판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 아직 살아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코숑을 포함한 이미 죽은 관계자들이나 잉글랜드인들에게 죄를 떠넘기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등 얼버무리며[66] 처벌을 피한다. 이 때 잔에 생전의 모습과 행동이나 화형 당시에 대한 증언은 분위기상 찬양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교차검증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잔이 당하던 종교재판보다는 공정했지만 말이다.
재심 요청에서 실제로 재판이 열리기까지는 몇 년 걸렸다. 이유는 그 전에 잔 다르크의 재판에 대한 증거를 수집해야 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 당시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 중 핵심 인물 대다수는 이미 죽은 뒤여서 증언이나 증거를 찾기가 쉽지가 않았으며, 생존자들은 당연히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이나 증거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으니깐. 게다가 교황청에서도 오스만 투르크의 유럽 침입을 막는 데에 지원해준 잉글랜드의 눈치를 보느라 재판을 여는 것이 늦어졌다. 사실 잉글랜드 측의 인물도 거의 파문당하지 않았다. 헨리 6세와 베드포드 공, 워릭 백작은 그렇다고 쳐도, 피에르 코숑이 재판을 맡긴 했지만 실질적인 우두머리로 관여한 종교인은 잉글랜드 왕실 인사이기도 한 윈체스터 교구장인 헨리 보퍼트 추기경이었는데, 이 사람은 화형 당시에도 잔의 알몸을 보이라고 지시하고 재를 센 강에 버리라고 지시까지 한 인물이다. 일부 기록에선 화형이 정해진 잔에게 "잘 가라, 교회는 더 이상 지켜줄 수 없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잔의 죽음을 보고 울었다고 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추기경 명단에 당당히 있고 심지어 윈체스터에는 이 사람 이름을 딴 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참고로 헨리 보퍼트는 잔 다르크 재판에 관여한 것뿐만 아니라 종교인이면서 사생아(딸)까지 둔 위선자였다. 업보라면 업보랄까, 헨리 보퍼트를 자신들이 배출한 위인으로 여기던 잉글랜드 가톨릭계는 훗날 헨리 8세의 종교개혁으로 성공회가 세워지면서 거의 몰락했지만...
피에르 코숑이 잔 다르크에게서 반지를 빼앗아 헨리 보퍼트에게 바쳤는데, 이 반지는 이후로도 영국에서 쭉 소유하고 있다가 2016년 2월 프랑스에서 경매로 약 24만 파운드(한화 4억 원 가량)에 구입하여 반환되었다. (기사 1, 기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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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출처를 기록한 문서가 있으나, 이것이 진품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했는데[67] 어쨌거나 프랑스에서는 잔 다르크 반지의 귀환을 성대하게 축하하는 행사까지 열었다. 다만 영국 정부가 행사에 찬물을 뿌릴 뻔 했는데, "영국 법률상 문화재를 국외로 반출하기 위한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반지를 반환하라는 명령을 할 수 있다"면서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이에 발끈한 반지의 구매자는 군중에게 공개적으로 "여러분, 이 반지가 영국의 것입니까? (군중 야유) 아니면 프랑스의 유산입니까? (군중 환호) 야이 영국 놈들아! 갖고 싶으면 와서 가져가 봐라! '''It's too late!'''[68] 이건 우리 거다!"라며 응수해 주었다.
5. 사후의 평판과 영웅화, 시복, 시성
잔 다르크는 사후 프랑스 내에서 계속 존경받았다.[69][70] 공식적으로 시성하려는 움직임은 그저 오를레앙 일대의 주민들과 스코틀랜드에 그쳤다. (스코틀랜드는 1295년에 프랑스와 함께 잉글랜드에 맞서 동맹[71] 을 맺었으며 이는 1560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백년전쟁 시기에도 헨리 5세의 활약으로 궁지에 몰린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에 구원을 요청해 스코틀랜드군이 샤를 왕자를 돕게 되었는데, 이때 샤를이 지원 온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편성한 것이 1830년에 샤를 10세가 퇴위할 때까지 존속한 스코틀랜드 근위군[72] 이다. 이후 위그노 전쟁 때에도 200명의 스코틀랜드군이 위그노 편에 서서 싸웠으며, 2차 대전 때는 자유 프랑스의 수장 샤를 드골이 영국에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기리는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1995년에는, 동맹 7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시성과는 별개로 민중으로부터는 꾸준히 사랑 받았고,[73] 1580년에 프랑스 퐁타무송의 예수회 학교 학생들이 잔 다르크를 묘사하는 연극인 '오를레앙의 소녀'를 상연하는 등 결코 듣보잡은 아니였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시골 출신 평민 처녀가 왕국을 구했다는 사실을 외면하려 했고, 위그노 전쟁 때 개신교도들은 오를레앙에 있는 잔의 기념물을 부수기까지 했다. 계몽사상이 보편화된 근대에 와서는 오히려 잔의 행동 자체를 광신도의 전형으로 보았는데, 몽테스키외, 볼테르[74] 같은 학자들로부터 '까놓고 말해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게 딱 잔 다르크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식으로 전방위로 까이는 처지로 전락한다. 프랑스 혁명 때 혁명공화파들은 한술 더 떠 잔 다르크를 왕당파이자 가톨릭의 끄나풀로 규정짓고 오를레앙에서 잔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폐지하는 한편, 위그노가 그랬던 것처럼 기념물들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집권을 거치며 사실상 전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되자,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시킬 만한 떡밥으로 잔 다르크를 다시 들고 나와 잔 다르크에 관한 저작들이 프랑스 정부의 지원하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나폴레옹과 잔 다르크가 프랑스 본토 출신이 아니면서도 프랑스를 위해 싸운 것, 시민군을 주력으로 쓴 것 등등 닮은 점이 많아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 잔 다르크가 과장 된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내용과 반박은 아래에 따로 서술되어 있다.
이후 19세기 중반에서부터는 좌우파 모두가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앙드레 모로아(André Maurois, 1885.7.26 - 1967.10.9)의 "프랑스사(Histoire de la France, 1947)"에 따르면 좌파는 잔이 하층민 출신임을 내세우고, 우파는 잔이 왕권의 회복을 위해 싸웠음을 내세웠다고. 한편 전 프랑스 및 프랑스령 식민지에 걸쳐 잔 다르크의 동상이 2만 기 가까이 세워졌는데, 그 중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 있던 동상은 알제리 전쟁 당시 참수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슬람 국가에 세워진 지배국의 여성 우상이지만 해방의 상징이기도 하기에 그대로 있었으나, 프랑스의 몇 년째 계속되는,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는 무자비한 진압에 알제리인들이 분노했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을 반달리즘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이 동상은 결국 프랑스로 옮겨져 수리한 다음 보쿨뢰르에 다시 세워졌다. 보쿨뢰르로 옮겨진 동상 모습.
현재의 알제리에도 잔 다르크 동상이 있긴 있다. 스킥다에 있는데, 알제에 있던 동상처럼 광장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박물관 근처에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모습으로 있다. 보기크게 보기
잔 다르크의 시성 움직임 역시 국가적인 지원하에 일어나, '''1910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1920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엔 잔 다르크를 앞세운 포스터가 나오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연간에 패텡 정권하에서는 반영[75] /반유대[76] 및 프랑스 통합의 상징으로 잔 다르크가 이용되기도 했다. 나치 독일과 페탱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인 자유 프랑스 역시 국기에 잔 다르크를 상징하는 로렌의 십자가를 넣어 잔 다르크를 추종했다. 특히 샤를 드 골이 잔 다르크를 대단히 호평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극우파이자 인종차별주의자로 악명이 높은 정치인 장 마리 르 펜은 종종 잔 다르크 동상 앞에서 유세를 하고, 잔 다르크를 자신의 정치이념 아이콘으로 이용하여 유색인종과 이민자들의 차별을 정당화하려고 해서 논란이 일었다.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인을 추방한 것처럼, 지금 프랑스인들도 쳐들어온 외국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 우습게도 잔 다르크가 이끌던 병사들 전부가 프랑스인은 아니었고, 외국인 용병들도 상당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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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잔 다르크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프랑스의 상징 중 하나로서 존경받았는데, 극우파가 하도 자신들의 행각에 잔 다르크를 방패처럼 이용하며 설쳐서 좌파 진영에서는 혁명 정신을 형성화한 '마리안'이라는 가상의 여성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쓰는 경향이 강해졌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잘 표현되어 있는 바로 그 인물. 그 뒤로는 잔 다르크가 우파 정확히는 극우파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몇몇 잔 다르크 동상들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일부 프랑스 좌파가 잔 다르크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 심할 경우 잔 다르크를 왕당파와 파시즘의 상징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2012년 1월 6일 탄생 600주년을 맞아 역시나 르 펜 부녀가 잔 다르크를 팔아먹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도 잔 다르크의 고향을 방문하여 극우의 상징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이런 프랑스 정계의 움직임에 대해 잔 다르크는 외국인 혐오의 상징도 아니고, 정치적 이용의 도구도 아닌 모두의 인물이라고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지적했다. 해당 신문은 잔 다르크가 전장에서 진두지휘한 것이 아니라 군량미를 나른 수준이었다는 등 직책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또 당시 프랑스인들이 배신한 것(…)을 강조해서 언급했다.[77] 선거를 앞둔 노동절을 맞아 또 르 펜 부녀가 잔 다르크 동상 앞에서 유세하기로 하자, 보다 못한 좌파 진영에서는 하루 먼저 같은 곳에서 집회를 열어 우파의 잔 다르크 독점에 반대하기도 했다.
앙드레 모로아는 잔 다르크를 가리켜서 '''"프랑스인이 진지하게 행동할 때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이루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고 평했다.
6. 그녀에 대한 말들
'''잔은 인류의 평범한 종족들 중에서 너무나 뛰어난 존재여서 천 년 동안 그녀와 필적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인간의 타고난 선함과 용맹함을 예사롭지 않은 완벽함으로 구현했다. 정복할 수 없는 용기와 무한한 동정심, 단순함의 미덕, 정의의 지혜가 그녀 안에서 빛났다.'''
'''그녀는 인류가 낳은 사람 중 단연코 가장 비범한 사람이다.'''
'''하느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가 성인을 불태웠소.'''
― 레이시 볼드윈 스미스의 "바보들, 순교자들, 배신자들" (1997년)에 인용된 처형 이후 익명의 영국 군인.#
'''잔 다르크는 아마도 세상에 살았던 이들 중 가장 놀라운 사람일 것이다.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이상해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법정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그녀를 가장 적대시했던 적들로부터, 그녀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 앤드류 랑
'''때때로 역사의 결과는 군대의 힘으로 결정되기도 하고 우연한 사건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15세기 프랑스의 역사는 어린 소녀의 의지로 결정되었다. 이 소녀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전 군을 통솔한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7. 잔 다르크와 여성
20세기 초반 영국과 미국의 여성 참정권자들은 자신들의 상징 및 단체의 수호성녀로 잔 다르크를 내세워서 잔 다르크로 분장해서 행진을 하기도 했다. 1913년 경마 경기장에서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다가 사고로 사망한 영국의 여성 참정권자 에밀리 데이비슨은 사고 하루 전날 잔 다르크의 동상에 헌화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잔 다르크는 페미니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대의 사람이니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는 없고, 여성 권리에 대한 주장을 딱히 한 적도 없지만, 활약하던 당시 시대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여성상이었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심볼로서의 이미지는 강하다.
한편 잔 다르크와 다른 여성들 사이에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카트린 드 로셀이라는 여자가 잔 다르크를 만나 "내가 만난 성인이 밤마다 나타나 금은보화를 놓는다"는 주장을 해서,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잔이 "집안일이나 돌보라"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직접 확인해 보라"고 말했고, 잔도 궁금해져서 그에 동의했다. 그런데 첫째 날 잔이 그만 피곤해 잠이 들어서 확인하지 못했고, 카트린은 "그날 성인이 왔다 갔다"고 말했는데, 아마 거짓말일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어이가 없어진 잔이 둘째 날엔 중간에 잠들지 않고 끝까지 확인했으나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카트린 드 로셀이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한 잔은 "어리석은 일 하지 말라"고 무안만 주고 헤어졌다. 사실 카트린 드 로셀의 행위는 미신 수준을 넘어서 사기꾼에 가까운 행태라서 강력히 처벌해도 모자라지 않은 지경이었으나 그냥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잔이 종교재판에 회부될 때 카트린 드 로셀의 얘기가 인용되었는데도 잔에게 유리한 증거가 되지 못한 듯 하다.
또한 군사들을 따라다니는 매춘부들을 비롯한 여성 장사꾼들을 쫓아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중 한 명이 생계를 보장해 달라고 매달리자 열받아서 칼등으로 뒷목을 때려 기절시켜서 내보냈다고 한다. 21세기 기준으로 볼 땐 이런저런 구설수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당시는 15세기였고 잔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니 자신의 병사들이 매춘부를 사서 놀아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당대에도 잔 다르크를 경애하고 추종한 여성들이 존재했다. 브르타뉴 출신의 피에론(Pierronne)이라는 여인은 신비체험을 주장하고 잔 다르크를 추종하며 다니다가 잔 다르크가 붙잡히기 전인 1430년 3월에 친잉글랜드파에게 체포되었고 종교재판을 거쳐 같은 해 9월에 화형당했다. 천사들의 차림새에 대한 질문에 지혜롭게 돌려 말하며 대처한 잔 다르크와 달리[79] 천사들의 옷차림을 자세하게 말해버리는 바람에 이단으로 신속하게 판정되어 화형당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피에론이 잔 다르크를 동경하고 따른 것에 대한 보복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랭스에서의 대관식 때 잔을 성녀로 여기며 공경하는 여인들이 성화와 기도서를 들고 잔이 그걸 만져주길 바랐는데, 잔은 웃으면서 "자기 손으로 쓰다듬으세요, 여러분들 손이나 내 손이나 마찬가지인 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잔 다르크가 출정을 할 때 지원을 해준 이는 샤를 7세의 장모인 욜란다 데 아라곤[80] , 또한 포로로 붙잡힐 때 적의 진영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잘 해준 이들 중에선 같은 여성인 리니 백작의 이모 잔과 베드퍼드 공작 부인 등 귀족 여성들이 있었다.
8. 군인으로서의 잔 다르크
8.1. 잔 다르크에 대한 논란, 정말로 군사적 천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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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은 매우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어떻게 아무런 군사적 교육을 받지 않은 17세 문맹 소녀가 단 1년 만에 멸망의 기로에 선 한 나라를 극적으로 회생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먼저 따져 봐야 하는 점은 잔이 실제로 총지휘를 맡았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 이 점이 그동안 가장 논란이 큰 문제였는데, 관련 기록과 주변 인물의 기록 등을 참고해 봤을 때 실제로 총사령관의 직위를 행사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적군 잉글랜드군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베드포드 공작이 자신의 조카이자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6세에게 오를레앙에서의 패배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말서 비슷하게 쓴 편지와, 샤를 7세에게 '적법한 헨리 6세를 두고 프랑스 왕을 참칭하는 발루아의 샤를'이라며 가짜 왕이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이 두 편지 모두 잔 다르크를 비난하는 언급을 했다. "사탄의 추종자이자 끄나풀인 남장한 퓌셀[81] 이 백성들을 홀리고 있다"고 했다. 이를 볼 때, 적군에서도 잔 다르크를 단순히 얼굴마담 수준으로 본 게 아니라 실질적인 위협을 주는 적장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그 명령의 수준은 어떨까? 이 점이 매우 흥미로운데, 잔이 내린 지시 중 90% 이상이 공격 또는 공세적 지시라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잔이 보급이나 상세한 포위작전 등 세부적인 명령을 내린 기록이 드물다는 것. 대신 알랑송이나 뒤노아, 또는 질 드레에게 이러한 지시를 일임하는 내용이 더 많았다. 이는 좋게 말하면 잔이 매우 공격적인 지휘관, 나쁘게 말하면 무리한 공격[82] 을 일삼는 무모한 지휘관이라는 것. 그리고 이는 잔 다르크가 추상적인 목표(공세)를 잡고 세부사항을 휘하 장수들에게 맡겼다는 뜻이 된다. 오늘날의 군사용어로 따지면 대단히 공세지향적이고 임무형 전술을 적극 활용하는 지휘관이고, CEO로 비유한다면 큰 그림은 그리고 세부사항은 담당자에게 맡기는 스타일인 것이다. 잔은 현장 지휘관의 의견을 항상 존중했고, 비록 자기 의견에 반하더라도 항상 장수들의 말을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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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적 능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활약 챕터에서 소개된 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전쟁을 보는 잔의 큰 시각, 즉 전략적인 감각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장이다.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사이를 지나가는 대우회기동을 성공시킨 거나, 파리를 중심으로 한 대포위망을 완성시킨 점이나... 더군다나 저 행군로는 철저하게 잔의 고집을 따른 것이다. 그러면 저 계획에 실효성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상기했듯이 어느 정도의 도박성이 있었지만) 당연히 YES. 실제로 랭스 함락 이후 전투는 파리와 그를 위시한 센 강 이북-노르망디 지역에 국한된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잔은 이 대담한 공세계획 입안에서 단순히 닥치고 돌격해야 한다는 주장만 내세운 게 아니라 최종 목표와 이에 도달하기 위한 기동로, 그리고 필수 조건으로서 루아르 강 도하를 위한 다수의 핵심 교량 탈취 등의 요소를 조리 있게 설명하여 프랑스군 주요 지휘관들을 납득시켰다고 한다. 적어도 전략적 관점에서 잔 다르크의 군사적 천재성은 부인할 수 없다.
허면 잔 다르크는 어떻게 자기와 달리 오랜 세월 칼밥을 먹어왔을 장수들에게 명령을 순순히 내릴 수 있었을까? 이는 철저하게 중세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잔 다르크가 바로 성녀였기 때문이다. 중세에 왕은 교황보다 아래였는데, 그런 교황보다 높은 하느님이 직접 선택한 성녀, 그것도 왕이 직접 인증(?)한 성녀의 지시를 장수들이 무시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즉 잔 다르크는 성녀라는 무적의 타이틀과 권위 그리고 그것에 동반된 총지휘관의 직책을 이용, 소위 닥치고 돌격을 명령한 것이다. 처음 몇 번은 회의적이었고 마지못해 따르던 프랑스 장수들도 잔의 이 방식이 의외로 훌륭한 성과를 거두자 곧 잔을 인정하고 ‘성녀가 맞나 보구나’하고 그냥 순순히 지시를 따른다.
또 성녀라는 타이틀은 병사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제대로 전투를 하지도 못하고 패배를 거듭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는 중세 사회에서, 둘 다 그리스도교 국가인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받은 성녀가 프랑스에 출현해 군을 지휘한다는 건, 하느님이 프랑스 편을 든다는 의미로 받아져서 마치 하느님이 지원군을 보낸 듯이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고 잉글랜드군은 사기가 떨어졌다. 거기에 프랑스가 연패를 끊고 승리를 하자 과장된 신앙적 열정이나 공포가 잔 다르크의 하느님이 내린 군사적 능력에 대한 과장된 소문이나 심지어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낳았다. 이런 병사들의 사기 역전이나 승리에 대한 확신이 전투의 승패에 대한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잔 다르크가 성녀를 자처한 건 역사상 최고의 성공적 심리전인 것이었던 것이다.
헌데, 잔의 이런 공세적 전략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물론 공세적 전략을 통해 전쟁의 주도권을 뺏는다는 것은 좋았지만, 이런 전술에는 기본적으로 공세종말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쉽게 말하자면 어느 시점이 되면 병사들도 지치고 보급이 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잔은 초기 1년 동안 미친 듯이 공세를 펼친다. 그것도 쉼없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바로 샤를 7세의 무제한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그러면 샤를 7세는 왜 그랬을까? 단순하다. 잔 다르크를 직접 인증하고 사령관의 자리에 앉힌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본인이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즉 랭스 점령까지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왕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잔에게 무제한적인 지원을 퍼부은 것. 이를 이해한다면 랭스 점령 이후 잔과 샤를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이해가 된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동안의 지원으로 인해 왕실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기 때문.[83]
그리고 잔은 엄밀히 보자면 외부인사였다. 축구로 따지면 외국인 감독을 국가대표 자리에 앉힌 셈. 덕분에 잔은 선입견과 이해관계 없이 능력에 따라 인사를 배치할 수 있었다. 100년 전쟁 내내 보여준 잔의 합리적인 군사 행동은 여기서 도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잔은 귀족, 평민, 용병을 가리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적(부르고뉴파)과의 합작 또한 꺼리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이단 심문 과정에서 확인되는 잔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잔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잉글랜드의 상태 또한 환상적이었다. 군대는 오를레앙만 함락시키면 전쟁은 끝이라는 낙관적 태도에 빠져 방심했고, 내부는 젖먹이 헨리 6세가 왕위에 오른 덕분에 귀족들 간에 치열한 권력 다툼이 진행 중이었다. 때문에 잉글랜드는 잔의 미칠듯한 공세에 효과적인 대처가 힘들었다. 아니, 지역적 방어는 가능했을 지라도 이전처럼 국가적인 반격을 펼치는 것은 버거웠을 것이다. 여기에 부르고뉴파와의 동맹은 매일이 위태로웠고, 아무리 때려도 무너지지 않는 프랑스 때문에 국고는 바닥을 찍고 있었다. 때문에 백년전쟁에 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는 장미전쟁이라는 내전에 돌입한다.
즉 종합적으로 보자면, '''성녀 타이틀(+그로 인한 프랑스 군의 사기 상승) + 잔의 공세적 전략과 정확한 목표 설정 + 휘하 장수들의 뛰어난 보조 + 왕의 무제한적 지원 + 적진의 혼란'''이 모조리 겹친 덕분으로 희대의 역사가 터졌다고 볼 수 있다. 무명의 소녀였던 잔 다르크가 중세 유럽에 갑자기 나타나 성녀를 자처하며 프랑스를 구할 수 있었던 것에는, 잔 다르크 개인의 능력 외에도 이로한 상황과 행운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는 분명히 잉글랜드군을 모든 면에서 압도할 능력이 있음에도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며 병림픽을 하던 프랑스군의 정신을 질타하고 그들이 가야할 길을 정확히 제시하여 일으켜 세웠으며, 그 길을 가는 동안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함으로 마침내는 강력한 침략군인 잉글랜드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잔 다르크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신화에나 나올법한 영적인 힘으로 적을 홀로 무찌른 완전 무결의 초인이 아니었다. 허나, 잔은 여자에 배운 것 하나 없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매우 뛰어나게 지휘했고,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프랑스군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마침내는 지겨운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끝냈다. 이러한 점이 무엇보다 잔이 역사에 남긴 의의일 것이다.[84]
8.1.1. 보충 - 잔 다르크는 군사적 천재가 맞다
외국의 잔 다르크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단순히 '하느님이 여기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정도의 수준으로 보기엔 그녀가 제시한 작전은 훨씬 세세하고 세련되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예를 들면 오를레앙의 승리 이후 프랑스군의 공세계획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나오는데 잔 다르크는 르와강을 신속하게 도하하여 랭스로 진군하는 최단지점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르와강 인근의 특정 다리들을 신속히 확보해야 하는 전술목표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이를 샤를 7세에게 직접 설득하여 오를레앙 전투 이후 중구난방이던 공세계획을 단번에 정리해버리는 주도면밀함을 보인다.
결국 알랭숑 공작은 잔 다르크의 전략을 채택하게 되지만 알랭숑을 비롯한 다른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잔 다르크의 계획이 무모하기는커녕 매우 합리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는 기술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잔 다르크의 공세계획이 효과적이란건 샤르트르 공방전, 파타이 전투 이후엔 프랑스군은 별다른 저항없이 랭스로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증명되며 잉글랜드군은 이에 대해 손을 쓸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샤르트르에서의 공성전에선 성벽에 설치된 적군의 캐논포의 사거리와 접근시 위험지역에 대해 잔 다르크가 면밀하게 경고해서 실제로 알랭숑 공작은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즉 잔 다르크는 닥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닥돌 같은 게 아니라, 당시 공성전의 접근법이나 화기에 대한 지식도 충분히 있었던 걸로 보인다. 동시대 잉글랜드의 신학자나 역사가는 "농부의 딸내미 같은 무지랭이가 이렇게 세련된 군사작전으로 잉글랜드군을 패배시켰다는 것은 악마의 도움을 받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음"이라고 기록하는 걸 보면, 잔 다르크의 작전은 같은 프랑스군이나 적군인 잉글랜드군이 보기에도 매우 훌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아무튼 오를레앙부터 랭스 함락 이후 파리 포위까지 잔 다르크가 주도적으로 행한 공세작전을 검토해보면 '이건 뭐 한니발의 귀신이라도 씌였나?'는 느낌이 들 정도이고 잔 다르크 이전/이후의 프랑스군 지휘관에서 이런 군사적 능력을 보여준 장군은 찾아볼 수 없다. 고급 귀족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전략 전술과 프랑스군 화포 운영방법과 스펙만이 아니라 잉글랜드군의 전술과 병력 구성도 꿰고 있었다. 실제로 우회기동 포위 집중섬멸이라는 전략은 고대 그리스 로마 이후 처음 나온 것이기도 했다. 배운 것 없는 시골 처녀가 자기 부대 화기 스펙을 줄줄 외우고 그에 맞춰서 전술을 짜고 성공시킨 건 여러 모로 잔이 천재가 아니라면 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전근대 군사사에서 이따금씩 찾아볼 수 있는 무학의 군사 천재였다. 전술에선 역시 평균 연령대가 젊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빨랐던 부하들에게 많이 위임하는 편이었고, 전략에선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아서 부하들이 망설일 때도 앞장서 타당한 결정들을 내렸다.
8.2. 전쟁에 끼친 영향
잔 다르크가 활약한 기간은 길게 잡아 2년에 불과하지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잔 다르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뒤노아 경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 1천 명이 잉글랜드군 200명만 만나도 도망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이것이 사라졌다." 즉, 적을 보면 등을 보이기 바쁘던 병사들이 드디어 싸우게 되었다는 것.
사실 프랑스군의 군사적 역량, 병력 동원 능력과 그 병력을 유지할 경제력은 잉글랜드군보다 한수 위였다. 그러나 오랜 패전으로 인한 사기 저하로 병사들이 사실상 허수아비가 된 점과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인해 프랑스군이 너무 소극적으로 움직인 점이 잉글랜드군에게 군사적 우위를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갑툭튀한 성녀로 인해 프랑스군 본래의 역량을 내기 시작했고, 프랑스 장군들이 구사할 수 있는 전략적ㆍ전술적 선택폭은 크게 넓어져 전술적 유연성이 구현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된다.
기존 프랑스군은 그냥 닥치고 돌격의 기사 중심의 전술을 고수해왔다. 그도 그럴게 중세의 시작이라 불리는 기사가 처음 등장한 나라가 프랑스인 데다가, 당시 프랑스는 자국 내의 평원 지대에서 품질이 좋은 군마를 생산할 수 있었으니... 즉 오랫동안 쌓여온 기병 양성 체제 + 훌륭한 자원의 시너지 효과로 인해 발달했던 강력한 중기병 전술을 포기하기는 힘들었던 것. 또한 당시 기사들의 기득권 때문에 기사 중심의 전술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측면도 있다.[85] 이를 바꾸려면 공동체적 합의와 추진의 중심이 될 만한 강력한 인물이 존재해야 하는데, 백년전쟁 동안 프랑스에는 추진력 있는 인물이 부재했다. 당장 왕이 중심이 되자니 아직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존재였고, 그렇다고 달리 구심점이 될 만한 영주나 귀족도 없었기 때문. '''그런데 이 모든 장애요소가 잔 다르크가 등장하면서 해소되어 버렸다.''' 애초에 기사 계급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잔 다르크는 중기병 돌격 전술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고,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나름 당대 프랑스군의 구심점까지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
물론 기사 중심의 중기병 돌격 전술을 아예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중기병에 대한 의존을 떨쳐내고 상황에 따라 적시적소에 쓸 수 있게 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위에서 서술된 파타이 전투인데, 잉글랜드군이 전방에 목책과 말뚝을 설치하자 전면돌격이 아닌 측면으로 우회하여 돌격한 것이었다. 또한 대포의 사용도 등장한다. 물론 당시에 대포는 정확도나 연사력이 크게 낮아 효과적인 타격수단이 아니었지만 알랑송 공작을 위시한 프랑스 장군들이 전투에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부터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잔의 등장 이후 실로 오랜만에 프랑스가 전쟁의 주도권을 쥐었다. 이는 매우 의의가 큰데, 잔의 사후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이길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잔의 행보에서 얻는 군사적 자신감을 밑바탕에 깔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잔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멸망, 또는 최소 루아르강 이남으로 밀려 났으리란 것. 대표적인 증거로 잔 이전 프랑스군은 전투에 패배하면 바로 성으로 퇴각했지만 잔 이후에는 전투에 패배해도 좀비마냥 쉬지 않고 잉글랜드군을 몰아쳤다. 전체 인구 수에서 크게 뒤지는 잉글랜드는 결국 질적 물량적으로 월등히 앞서는 프랑스의 이런 공세를 견디지 못한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대륙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9. 잔 다르크가 과대포장된 인물이다?
잔 다르크는 나폴레옹 시대 이전에는 듣보잡에 영웅이 아니라 대단하지도 않은 인물이지만 나폴레옹이 영웅으로 과대포장하여 조작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일단 과대포장되었다는 모습은 전술했던 잔의 활약상 부분과 전쟁에 끼친 영향에 대한 부분만 읽어봐도 충분히 반박되는 주장이며,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부각시키긴 했지만 그 전에도 영웅으로 알려져서 아는 사람들은 아는 인물이었다.
일단 15세기에 잔 다르크는 기사도를 상징하는 인물 중 유일하게 여성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12 그리고 오를레앙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했으며, 생전에 베드포드 공이 쓴 잔을 비난하는 내용의 문서와 16세기의 영국에서 쓰여진 연대기와 아래에 언급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쁘게 묘사되어 오히려 영국에게 커다란 치명타를 줬음이 확실해지며, 주로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16세기에서 17세기의 화가 루벤스는 항목 상단에 있는 십자가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86]
게다가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찬양하고 공경하면서 기리는 일을 추진한 때가 1803년경인데, 아래에도 언급되지만 그 전에 이미 프랑스의 적대국이었던 영국의 로버트 사우디와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가 이보다 조금 앞서 잔을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이 쓴 <영국의 역사>라는 책에도 잔 다르크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오는데, 흄은 1711년에서 1776년까지 살았는데 나폴레옹은 1769년에서 1821년까지 살았다. 흄이 프랑스에 체류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벽지인 코르시카에 살던 어린 나폴레옹이 늙은 흄을 만나 잔 다르크를 언급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흄이 프랑스에서 잔 다르크에 대한 언급을 처음 듣고 그렇게 썼다면 오히려 잔 다르크가 프랑스에서도 듣보잡 인물이었다는 주장이 무색해진다.[87]
한국에서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띄웠다는 주장은 모 일간지에 실린 칼럼과 그걸 바탕으로 하여 실은 역사서적에 의해 널리 퍼졌는데, 이 책 자체가 가십성 역사를 과장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해서 쓴 책이기 때문에 정론을 쓴 책이라고 읽고 믿으면 곤란하다.[88] 그리고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소녀를 가지고 단지 이단자로 처벌하겠다고 왕자의 몸값 정도 되는 그런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지는 않을 것이다.
10. 잔 다르크 vs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둘 다 전설적인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고, 잉글랜드와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본 항목은 잔 다르크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둘 중 누가 더 우위인가를 묻는 대결놀이에 대해 다루는 항목이다. 물론 나폴레옹 시절에 들어서면서 전쟁 무기의 발전이며 군대의 체계화 등 차이가 난다는 점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10.1. 배경
잔 다르크는 태어나서 소녀가 되기까지 작은 시골 출신으로써 문맹이자 전략전술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이었다. 현대는커녕 나폴레옹 시절보다 여성의 권리가 좋았을 일은 별로 없었을 테니[89] 당연히 군대에 가본 적도 없었고, 전문적인 군사 교육은 커녕 일반 시민들이 배우는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받았을 리도 전무했다.
반면 나폴레옹은 주위 조건이 모든 면에서 잔 다르크보다 더 유리했다. 우선 조국 프랑스부터가 그랬는데, 잔 다르크 시절 프랑스도 약소국은 절대 아니지만 워낙 잉글랜드를 상대로 싸움마다 모조리 쳐발리면서 자존심은 구겨지고 국가는 언제 멸망당할지 모르는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다. 반면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그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프랑스 혁명을 통해 시민들의 자주성이 강해지고, 프랑스를 위협하는 외세 연합군 상대로 발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명성도 크게 올리는 등 영국과 더불어 명실상부 유럽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본인은 본토는 아닌 코르시카 출신이긴 했어도 아버지가 프랑스와 타협해 지방 법원의 판사 보좌관으로 승진한 이후 프랑스의 군사 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문 고급 군사교육을 받아 장군을 거쳐 나중에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다. 오늘날 나폴레옹 하면 그야말로 프랑스를 넘어서 유럽, 아니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서 명성을 떨친 사기급 캐릭터였다고 해도 딱히 과장된 것은 아니며 그런 나폴레옹에 위세에 눌린 다른 나라의 왕들조차 그를 대놓고 비난하지 못하고 그저 눈치를 보기에만 바쁠 정도였으니, 그 시대의 나폴레옹은 프랑스만의 왕이 아닌, 소위 유럽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을 보좌하는 주변 사람들 또한 차이가 있었다. 물론, 잔 다르크 주위 장군들도 나름 노력했고 아르튀르 드 리슈몽 백작이 그녀의 편에 서는 등 공기 취급받을 정도로 명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재능에서 독보적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볼 수는 없고, 잔 다르크의 직위 자체는 하느님이 직접 보내서 교황보다도 급이 높은 성녀라는 점이야 엄청났지만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볼 때의 그녀의 직책은 일개 장군, 잘해야 대장군 정도 되었다. 반면 나폴레옹의 신하들의 경우 주군인 나폴레옹이 칭기즈 칸과 맞먹는 전쟁영웅 소리를 듣는 천재였고 그런 황제 바로 옆에서 그를 보좌하며 전략 회의에도 동석하는 등 아무래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폴레옹을 바로 곁에서 보필하던 장군들의 이름은 나무위키에도 문서가 존재하는 장 란, 조아킴 뮈라, 앙드레 마세나, 장 바티스트 베시에르,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에두아르 모르티에, 루이 니콜라 다부, 미셸 네,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 등 전부 나폴레옹을 보좌했던 오랜 측근들이자 명성이 높은 장군들이었다. 어느 정도면 나무위키에 아예 틀:나폴레옹/26인 원수 문서가 존재할 정도.
10.2. 전략적 성과
결과 자체만 놓고 보면 잔 다르크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잔 다르크가 전세를 뒤집은 백년전쟁이 끝내 프랑스의 승리로 종결된 반면 나폴레옹의 대불 동맹 전쟁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편적인 결과만 보기에는 좀 더 복잡한 면이 많다.
잔 다르크의 경우, 프랑스는 물론 잔 못지 않은 명장들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워낙에 잉글랜드를 상대로 계속 패하기만 해서 병사들의 사기며 전투력이 말이 아니었고 나라는 언제 영국한테 항복하게 될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판국이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등장하면서 소위 '위닝 멘탈리티'를 회복한 프랑스는 그야말로 잉글랜드를 닥치고 무너뜨렸고, 결국 백년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자존심도 세우고 나라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랭스 점령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기세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백년전쟁이 근본적으로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문제삼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누가 프랑스의 정통성 있는 왕인가를 주장하는 전쟁에서 먼저 성공적으로 전통적인 대관식을 치른 프랑스는 승세를 잡을 수 있었다. 또한 잔은 파리 함락을 목적으로 하는 기동진을 성공적으로 완성시켜 부르고뉴와 잉글랜드의 상호 지원을 차단했고, 이는 앞선 승전들과 더불어 프랑스의 전쟁 승기를 굳혀 나가는 큰 전과였다.
반면 무리한 공세 전략은 그녀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전투 이전까지는 승승장구하며 입지를 다지던 잔은 파리 포위전에서 여러 번 군대를 물려야 했고, 잔 본인이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부상당해 실려나가면서 무패의 성녀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대관식을 치러 정통성을 어느 정도 확보한 후 피해를 수습하고자 했던 샤를에게 잔의 계속된 공세 요청은 거슬리는 것이었고, 왕의 신임을 잃은 잔의 전략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샤를의 지원 없이 휘하의 소수 병력만을 가지고 전투에 뛰어들었다가 포로로 잡힌 후 재판을 받았다.
나폴레옹의 경우, 수 차례 이어진 혁명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했고 거의 전 유럽이 달려든 대불동맹을 박살내고 독일과 이탈리아에 괴뢰국을 세우면서 유럽 전체에 위세를 떨쳤다. 대불 동맹 전쟁 후반기에 접어들기까지 나폴레옹의 전략적 식견은 의심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끊임없이 적대할 수 밖에 없으며 같은 독일 문화권을 가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무거운 전쟁 배상금, 신성로마제국 해체 등으로 강하게 견제했고 멀리 떨어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황제와는 영국에 대항하는 동맹까지 맺어 유럽 본토의 세력을 양분했다. 흔히 나폴레옹의 결정적 실책으로 알려진 대륙봉쇄령 역시 합리적인 조치로 볼 수 있는 면이 있었다. 1804년부터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영불해협과 북해 항구들을 봉쇄하기 시작했으며, 트라팔가 해전 승리 이후에는 이를 앨바 섬까지 넓혔다. 대륙봉쇄령은 이런 영국의 선 봉쇄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와 프로이센까지 대륙 봉쇄에 포함되자 영국 역시 큰 타격을 입어 물가가 사상 최대 수준으로 급등했다.
그러나 전쟁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나폴레옹의 대외 전략들은 여러 실패를 거듭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스페인에서의 실패였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래 프랑스의 오랜 동맹이었던 스페인은 포르투갈,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등 전 유럽의 열강들이 등을 돌린 가운데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프랑스의 우군이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완전히 손에 넣겠다는 계획 아래 스페인의 정치 갈등을 이용하며 군대를 상주시켰고, 이는 스페인 국민들의 반발을 사며 대대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러시아 원정은 그의 전략적 실패의 한 축이었다. 대륙봉쇄령에 반발한 러시아가 영국 선박의 정박을 암묵적으로 용인하자 나폴레옹은 이전 전쟁에서 항복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으로부터 물자와 인력을 뜯어 모스크바로 진격했으나, 러시아의 드넓은 영토와 혹독한 추위 때문에 전투에서는 승리했어도 수많은 병력을 잃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10.3. 전술적 성과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폴레옹의 압승임에 이견의 여지가 없다. 나폴레옹은 뒷배나 인맥 없이 신임 소위로 참전한 툴롱 포위전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진급했고, 곧 프랑스 혁명 정부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이름난 귀족이나 거부, 심지어는 본토 출신도 아닌 나폴레옹이 그처럼 부상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그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이었다. 쿠데타를 거쳐 종신 통령, 끝내는 황제까지 등극한 이후에도 나폴레옹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면서 예나-아우어슈타트,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같이 전쟁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여럿 만들어 내었으며, 그의 생애 후반기를 장식하는 전투이며 대중에게 그의 완전한 몰락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워털루 전투에서도 블뤼허의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웰링턴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나폴레옹의 전술적 능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으며, 그를 직접 상대하고 승리까지 거둬낸 아서 웰즐리를 비롯해 수많은 당대와 후대의 인물들이 나폴레옹의 군재를 고평가했다.
반면 잔 다르크는 대규모 군대를 직접 지휘한 경험 자체가 많지 않으며, 위 문단에서도 언급했듯 파리를 포위하는 기동진을 구축한 것은 훌륭했으나 정작 파리 공략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수 차례의 공성전과 연이은 소규모 야전에서 잔은 파리 함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뿐더러 무리하게 공성을 감행하다 스스로 부상을 입고 물러나기도 했다. 잔이 소속 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일반적인 지휘관이 아니라 성녀라는 타이틀 아래 주어진 특수한 위치였다는 것과, 20년 가까이의 프랑스 혁명 전쟁과 2년 남짓한 잔 다르크가 활약한 기간의 차이는 잔을 위한 변호가 될 수 있으나, 그를 감안하더라도 잔이 나폴레옹과 같은 전술적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10.4. 여담
나폴레옹은 잔 다르크를 높이 평가해서, 잔 다르크에 관한 저작들이 프랑스 정부의 지원하에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는 외국 연합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프랑스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앞서 서술했듯이 나폴레옹과 잔 다르크가 프랑스를 위해 싸우고 시민군을 주력으로 쓴 것 등 닮은 점이 많아 자기에게도 많은 호감거리가 되었을 것이고, 잔 다르크를 띄워주는 것은 나폴레옹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써먹기에 이만한 좋은 것도 없었을 것이다. 잔 다르크도 띄워주고 자신의 인기도 올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90]
11. 잔 다르크에 대한 다른 전설
- 잔 다르크 생존설: 당연히 이런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에게는 생존설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특히 잔 다르크의 경우 화형 직후 잔 다르크를 자칭하는 인물들이 여럿 나타났으며, 최소 1명 이상은 잔 다르크의 가족조차 본인으로 인정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잔 다르크의 가족들에게 가짜로 판명되어 재판에 넘겨져 처형당했다고 한다. 혹은 잔 다르크의 오빠들이 돈을 벌기 위해[91] 용병 여기사와 짜고 잔 다르크가 부활했다는 사기를 쳤다가 발각되어,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 당시부터 잔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부분에 주목하여 잔을 사랑하고 존경하여 죽음을 인정하기 싫은 민중들이 많았다는 추측을 하는 데 쓰이기도 하는 설.
- 잔 다르크 공주설: 생존설에서 파생된 것으로, 잔 다르크는 샤를 6세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92] 가 불륜으로 낳은 딸이라는 설이다. 이 경우 샤를 7세와 잔 다르크는 남매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아무튼 공주설을 더 파고 들어가면 잔 다르크가 공주임을 알아차린 잉글랜드 측에서 비밀리에 가짜를 내세워 화형에 처하고 잔 다르크는 풀어주었으며, 잔 다르크는 나중에 지방 영주와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살다가 늙어죽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잔 다르크의 묘가 프랑스에 몇 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근거가 부족한 내용이라 창작물과 유사역사 수준의 영역에 그치고 있다.
- 잔 다르크 용병설: 잔 다르크가 단순한 시골 소녀가 아니라 여성 용병대장이라는 설도 있다. 특히 백년전쟁 직후의 어떤 문서에 의하면 잔 다르크는 '포술에 능하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록 자체의 신빙성이 높지 않고 다른 기록과의 교차 검증에도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어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대포가 전술적으로 의미있게 사용된 기록은 잔 다르크 사후인 포미니 전투(1450)에서부터 나타난다.
- 잔 다르크 예비설: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갑툭튀한 성녀가 아니라, 친왕파 귀족들에 의해 프랑스의 구국 영웅으로 미리 엄선되어 준비과정을 거친 뒤에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라는 설.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성이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 주장을 따르자면 한낱 시골 처녀에 불과한 잔 다르크가 생전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던 왕세자를 쉽게 알아보았던 것, 프랑스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녀로 손쉽게 인정받았던 것 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비록 왕세자 본인은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쉽게 말해 그의 측근들이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는 것. 사실 이 주장도 역시 잔 다르크와 친밀한 귀족은 잔과 전장에서 함께 한 기사들 정도에만 해당되고, 그들을 제외하면 잔 다르크의 구출 시도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된다. 샤를 7세의 최측근인 조르주 라 트레무유는 심지어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에 대해 "미친 여자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순 없습니다!"라고 비난했을 정도다. 한편으로는 샤를 7세의 장모인 욜란다 데 아라곤이 잔 다르크를 카드로 써서 이용하고 조종했다가,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자 토사구팽으로 내쳤다는 주장이 있는데…[93] 결국 이렇다 할 물증이 없어서 있을 법한 주장 정도로 여겨진다..
- 잔 다르크 강간설: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힌 다음 강간을 당했다는 주장. 실제로 잔 다르크는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바지를 입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당시 여성들이 바지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풍기문란 죄목을 구실로 화형을 당했다는 말이 있다. 애초에 영국군은 어차피 몸값을 받지 못할 상황이었고, 아군의 명분과 사기를 높이고 프랑스군의 명분과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어떻게든 잔 다르크를 이단자로 몰아서 죽이려고 했지, 단순히 바지를 입었다고 화형을 시킨 것은 아니었다.[94] 이 외에도 적군인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 측에서는 전장에서 지휘하던 잔 다르크를 보고 샤를 7세의 정부라고 욕하기도 했고, 마녀라고 욕설을 들은 잔 다르크가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는 말도 있다.
> 아, 나를 잔인하게 대하다니, 화형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곱 번 참수당하는 편이 나으리라. 나의 몸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타버려 재로 돌아가누나.
잔 본인이 이 설을 가장 확고하게 부정하였기에 옥중에서 겁탈당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95]
- 잔 다르크 간질설: 잔 다르크의 언행을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발작증상을 동반하지 않고, 환각 증상만을 일으키는 측두엽 이상에 의한 간질'이라는 견해를 내놓은 경우도 있다. 잔 다르크는 지나칠 정도로 도덕적이며 율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나, 때때로 공격적인 면을 드러냈다는 점이 전형적인 간질의 증상이라는 것이며, 이 부분이 간질설을 지지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1991년의 국제간질협회 논문에서도, 당시의 증언 및 재판기록을 토대로 간질 증상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
- 잔 다르크 외계인 접촉설: 20세기 들어 UFO와 외계인 연구가 시작되면서 나온 주장으로, 제니 렌들즈(Jenny Randles)의 <외계인 납치(Alien Abduction)>라는 책에서 언급되었다. 잔 다르크가 들었다는 하느님의 음성, 혹은 천사를 본 것이 사실은 외계인과 접촉한 것이라는 주장.
- 잔 다르크 진짜 마녀설: 현대에는 시대착오적이고 괴이한 주장이지만, 마가렛 머레이(Margaret Murray)라는 학자[96] 는 실제로 그런 이론을 주장했다. 영어가 된다면 원문을 한번 읽어보자. 요정 숭배,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토속신앙 의식, 재판정에서의 이상 행동과 발언, 질 드 레와 연관시켜서 주장하기도 했지만 논리와 설득력이 없어 묻혀버린 주장이다. 애초에 타당하고 납득이 가는 이론과 연구 결과였으면 잔 다르크를 설명하는데 지금도 자주 언급될 수 있는 이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가톨릭과 프랑스에서 불만과 유감을 제기했을 가능성은 있었겠지만. 아무튼 토속신앙 문제는 푸아티에에서의 심사 통과와 명예회복 재판에서 고향 사람들의 증언 사실만 살펴봐도 논파되며, 재판정에서 '하늘의 왕' 등의 발언 문제는 잔 다르크가 분명히 예수를 믿고 있을 밝히고 있고,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것을 거부한 것은 잔이 문맹임을 노골적으로 노린 데다가, 부당하게 성립된 재판에 호락호락 승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때 잔 다르크는 재판정을 향해 오히려 "당신이 주님의 기도를 외울 만큼 독실한 신자임을 증명하시오."라고 일갈하며 반격했을 정도다.참조
- 잔 다르크 인터섹스설: "잉글랜드에 잡혀있던 동안 월경을 안 하고 털이 없었다"는 기록에서, 인터섹스 사례의 하나인 안드로겐 무감응 증후군으로 의심하는 설이다. 다만 지속적인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 월경이 몇달씩 끊기는 사례는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쓸 만한 가치는 없는 설.
- 후스파 협박편지 사건: 신성로마제국에 속해있던 체코 보헤미아 지방에는 존 위클리프의 사상에 따라 종교개혁을 주장하던, 잔 다르크가 3살 때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얀 후스가 있었다. 그의 사상을 따르는 후스파 신도들과 농민들이 귀족들과 가톨릭 세력에 맞서 1419년 반란을 일으켰는데, 후스 전쟁이라고 기록될 만큼 커다란 규모의 종교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430년 3월, 잔 다르크는 뜬금없이 이들의 본거지인 프라하 대학에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의 내용은 대략 '얼른 회개해서 이단 그만 믿고 전쟁 그만두고 가톨릭으로 돌아와라. 안 그러면 내가 십자군 끌고 와서 응징한다.' 잔 다르크의 흑역사로 분류할 수 있을 내용. 잉글랜드군 부상병을 위로하기도 한 잔 다르크의 모습과 대조되는 내용이기에 충공깽할 내용이다.
- 흔히 중세시대 인물이란 인식이 강한 편이고 실제로도 활동하던 시대가 그렇긴 했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활약하고 세상을 떠나서 그렇지 자기 어머니처럼 오래 살았으면[100] 백년 전쟁의 종식도 보고 르네상스 때 인물이 되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년생)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년생)와 같은 시대 사람이 되어 그들의 활약을 어느 정도 보았을 것이다.
11.1. 잔 다르크의 외모
잔 다르크를 상상하여 묘사한 상상화들.
잔 다르크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으나, 잔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들은 간간히 남았다. 잔의 개인시종 장 돌롱과, 이단재판 당시 잔을 직접 심문한 보페르 등이 잔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또 잔 다르크와 동행했던 달랑송 공작이 잔에 대해서 묘사한 문장이 있다. 대체로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다.
왕세자는 잔 다르크에게 왕궁 내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이 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대귀족인 알랑송 공작과 알게 되어 이후 오래도록 가깝게 지냈다. 두 사람은 전투 중에는 같은 곳에서 잤는데, 공작은 묘한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밤을 같이 지냈다. 가끔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을 보았지만 육체적인 욕망은 느끼지 않았다." 'DNA 이상설'과 상관없이 최소한 잔의 겉모습은 여성스러웠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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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권: 잔 다르크 편
여성스럽고 섬세하며 목소리는 굉장히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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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 보페르가 잔 다르크의 외모에 대해 묘사한 기록
종합하면 흑발머리 소녀에 얼굴은 크게 못나지도 어여쁘지도 않지만, 또래 소녀들에 비해 덩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현대의 각종 창작물에서 금발벽안의 작은 체격으로 묘사되는 잔 다르크는 전부 고증 오류. 당시의 프랑스 농촌의 현실이나 직접 전선에 뛰어들어 활약한 점 등을 감안해 보면 애초에 모델 같은 얼굴이거나 여리여리한 체격일 가능성 자체가 없는 상황이긴 하다. 그래도 매력이 넘친다는 평을 제법 들은데다 추녀라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을 보아, 덩치가 크고 용감하면서도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생김새였음은 확실해 보인다. 프랑스의 1999년도에 제작된 영화 '잔 다르크'에서는 잔 다르크가 체격이 크다는 고증을 잘 살려서 키가 175cm나 되는 밀라 요보비치를 잔 다르크로 캐스팅해서 촬영했다.매력이 넘치고 덩치가 큰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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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들롱이 잔 다르크에 대해 평가한 기록
다만 키가 컸다는 이야기보다 가슴이 아주 컸다는 이야기가 사료들에서 더 많이 언급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105] 남자들이 그녀를 대상으로 육체적 욕망을 느끼지 않는 서술 또한 다수 존재하는데, 오늘날 입장에서 따지면 골격 좋은 건강미인 스타일로 추측되나 그러한 외모가 당시의 미적 기준과 맞지 않아서일 가능성이 있다. 덧붙여 잔 다르크 본인이 여장부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어 외모와 달리 행동거지에서 남자를 유혹할 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테니, 외모와는 별개로 성적 이끌림을 유발하지 않는 분위기가 연출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아니면 '가슴이 풍만해서 그것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을 줬다' 같은 기록도 있는 것을 볼때 잔의 풍만한 젖가슴에 성적 이끌림은 느꼈지만 기독교 윤리상 차마 그렇게 적지 못하고 "그렇지만 육체적 욕망은 느끼지 않았다."고 거짓말로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
11.2. 대한민국에서의 잔 다르크
- "애국부인전" 중}}}정히 가련하다! 장대한 영웅의 여자가 옥이 부러지고 구슬이 잠김은 국민을 위함이로다. 붉은 분총 중에 이 같은 사업은 꽃다운 이름이 몇 봄을 유전하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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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는 잉글랜드와 싸운 잔 다르크의 모습이 구국 영웅의 모습으로 비춰진 듯, 잔 다르크를 '성녀'라기보다는 '애국자'로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 잔 다르크에 대해 처음 알려진 것은 구한말 개화기 때였다. 경술국치 3년 전인 1907년, 장지연은 잔 다르크의 생애를 다룬 《애국부인전》을 발표했다.[106] 제목 그대로 조선 내의 모든 국민들이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우자는 취지인 듯하지만 현실은… 이때 잔 다르크를 그린 삽화는 갑옷을 입은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 당시 선교사 부인들 차림새이다. 이 작품이 잔 다르크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음을 증명하는 흔적인데, 사실 그보다 먼저 잔 다르크를 처음 알게 된 한국인은 프랑스에 다녀온 민영익과 그 일행이거나 아니면 홍종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들이 잔 다르크에 대해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아 추측에 그칠 뿐이다. 일단 최소한 프랑스 파리를 다녀온 이상 잔 다르크가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파리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잔 다르크의 동상 자체는 봤을 것이다.
유관순이 잔 다르크에 대한 위인전(아마도 애국부인전)을 읽고 감명받았다는 내용이 소개되는데 확실하게 기록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모로 겹치는 면이 많아 평행이론, 환생 등의 이야기에 종종 언급된다. 이웃 섬나라에 침범당한 조국을 위해 깃발을 들고 일어서다가 10대의 나이에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은 공통점. 굳이 더 들자면 잔 다르크의 탄생 590주년 되는 해에 유관순이 태어났고, 유관순이 순국한 해는 잔 다르크가 시성된 해이다.
어린이들 위인전 시리즈에 높은 확률로 포함되기도 한다. 설령 빠진 경우라도 유관순의 위인전에 곁다리로 소개되기도 한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펴낸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 1930년 1월, 8권 1호에 실은 위인 이야기가 잔 다르크의 이야기였는데, 그의 성향 상 독립정신을 고취하려는 의도였던 듯. 그 밖에도 독립운동가 한용운의 시 이별 마지막 행에 잔 다르크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 등, 당시 잔 다르크는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한편 진취적인 여성의 상징으로, 김우진의 산돼지에서 최영순을,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유인실을 잔 다르크에 비유했다. 현대 한국에서는 여성 개혁가나 운동가, 지도자 등에게 'XX계의 잔 다르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는 개그 코너와 어떤 여배우, 학력위조범, 그리고 영 좋지 못한 정치인처럼 자기들 혹은 그 주변만 잔 다르크라고 자부하는 경우도 있다.
스토리 잡스에서는 잔 다르크를 신으로 모시는 무당의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실제로 무속신으로서의 잔 다르크 초상화도 존재한다.
세계사 과목 교과서나 참고서에 적어도 이름이 한 번이라도 꼭 나오는 인물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품종은 아니지만 무궁화 중에 잔 다르크라는 이름의 품종이 있다. #
평범하게 살던 시골소녀가 어느 날 우연히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전쟁터에 나서서 활약한다는 내용 때문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잔 다르크 일대기를 그대로 담아내면 흔해빠진 양판소가 된다는 말도 있다.
또한 한나라의 구국영웅이자 신성시된 영웅 그리고 앞뒤로 적을 맞이할수밖에없는 상황등으로 인해 이순신과 비교되기도 한다.
12. 어록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잔 다르크, 재판관에게.
13. 잔 다르크 신드롬
신기술이 등장했을 때 젊은 세대가 두각을 나타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백년전쟁이 시작되는 시기의 전투는 석궁과 기사로 대표되지만, 한 세기가 지나면서 대포의 화력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족계급의 고위층은 여태까지 그랬듯이 여전히 중무장한 기사들의 돌격전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반면 백년전쟁 말미에 등장한 잔 다르크는 대포 위주의 공격적인 전투를 통해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기마충격술에 대한 인상도 옅은데다 귀족 계급도 아닌 잔 다르크가 "기사는 장식입니다"를 외치며 위와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신기술에 대해 신세대가 강세를 보이는 것을 '잔 다르크 신드롬'이라 말하게 되었다. 이전 기술에 대한 경험이 고정관념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새로운 기술에 노출되고 이전 산업에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은 초보자가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현실의 대표적 예시인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를 독자적인 상품으로 인식하여 운영체제 개발사로서의 강점을 이용, 로터스나 넷스케이프 등의 유망회사를 밀어내 MS의 급성 성장을 이루어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4. 대중문화와 잔 다르크
14.1. 별도의 문서가 존재
모티브만 차용한 경우가 아니라, 문서명까지 잔 다르크로 표시되는 경우만 언급.
- 드리프터즈: 잔 다르크(드리프터즈)
- 데스티니 차일드: 잔다르크(데스티니 차일드)
- 벽람항로: 잔 다르크(벽람항로)
- 신격의 바하무트: 잔 다르크(신격의 바하무트 GENESIS)
- 영웅 for Kakao: 잔다르크(영웅)
- 오버히트(게임): 잔다르크(오버히트)
- 이나즈마 일레븐: 잔 다르크(이나즈마 일레븐 GO)
- 인피니티: 잔 다르크(인피니티)
- 전함소녀: 잔다르크(전함소녀)
- 크루세이더 퀘스트: 잔다르크(크루세이더 퀘스트)
- Fate 시리즈: 잔 다르크(Fate 시리즈)
- \#컴파스 전투섭리분석시스템: 잔 다르크(컴파스)
15. 바깥 고리
- 잔 다르크 아카이브: 전기와 번역을 포함한 잔 다르크 관련 자료의 온라인 컬렉션.
- 잔 다르크 아카이브: 잔 다르크의 가족과 관련 자료의 온라인 컬렉션. 특히 가족에 관한 정보가 매우 자세하다.
- 잔 다르크 서명: 잔 다르크가 저술한 서명에 대한 자료.
- 영어 위키백과
- 프랑스어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