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오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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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Ophüls'''
(1902. 5. 6. - 1957. 3. 26.)
독일 출신의 영화감독. 특유의 롱테이크로 유명하다.
독일 자르브뤼켄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막시밀리안 오펜하이머이다. 상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보수적이었던 부모님 탓에 평소에 꿈꿔왔던 연극계로 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엔 '막스 오퓔스'라는 가명을 사용하게 된다. 그는 원래 배우로서 연극계에 발을 들였으나, 이후 연극 제작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929년에는 영화 업계로 진출하게 된다.
다음 해 오퓔스는 단편 코미디 영화를 만듦으로써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후 오퓔스는 <리벨라이>와 같은 그의 초기 대표작을 만들었다. 1934년,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만인의 여인>은 상당한 흥행 실적을 거두었으며 주연 배우를 스타로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자 유대계였던 오퓔스의 입지는 불안해졌고, 결국 그는 프랑스로 망명해 1938년 시민권도 딴다. 그렇지만 1940년 프랑스가 나치에 의해 함락되자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미국에서 오퓔스는 그의 팬이던 프레스턴 스터지스[2] 의 환대를 받으며 상당히 안정적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이 시기 미국에서 만든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는 한다.
독일 패망 이후인 1949년 망명 시절 머물렀던 프랑스로 돌아간 오퓔스는 남은 생애를 프랑스 감독으로 살아간다. 그가 프랑스에서 만든 <윤무>, <마담 드>, <쾌락>은 모두 상업적, 비평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퓔스의 명성은 유럽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 그가 성공적이었던 세 편의 작품 이후로 만든 것은 <롤라 몽테>였는데, 이는 오퓔스 최초의 컬러 영화이자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사용한 와이드스크린 영화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프로듀서들의 손에서 마구잡이로 편집되어 본래 오퓔스의 의도에서 몹시 멀어지고 말았다. [3] 영화는 프랑수아 트뤼포 등 몇몇 평론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한다. 이후 오퓔스는 <몽파르나스의 연인들>을 제작하던 중 숨을 거두었으며, 이 작품은 그의 친구이던 자크 베케르에 의해 완성되었다.
오퓔스의 영화에서 가장 자주 지적되는 특징은 특유의 트래킹, 달리, 크레인 등을 이용한 롱테이크와 특유의 화려한 카메라 움직임이다. 어지간히 롱테이크를 사랑했던지 그의 영화 <무모한 순간>과 <포획>에서 주연을 맡은 제임스 메이슨은 살짝 놀리는 듯한 태도로 오퓔스의 트래킹 숏 사랑에 대한 시를 지어 바친 적이 있다. 카메라를 워낙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당시 기준으로 카메라를 아래로 던진다던지 파격적인 움직임을 선보이기도 했다. 미국을 떠난 뒤로는 연극이나 서커스, 카니발 같은 무대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총체적 영화'이라는 개념을 창시하기도 했다.
그의 영화에는 고통받는 여성들에 대한 동정적인 태도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비슷한 테마를 공유하였던 미조구치 겐지나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와 함께 언급되는 일이 잦은 편이다. 이런 이유로 초기 페미니스트 감독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페미니스트로 보기엔 부족한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페미니즘 영화 비평계에서는 단골 손님이다. 멜로 드라마를 연구할때 항상 등장하는 감독이다.
독일에서 태어나서 데뷔하고, 잠시 미국 영화계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말년은 프랑스에서 보낸 생애에서 알 수 있듯이, 굉장히 코스모폴리탄적인 삶을 살았다. 루이스 부뉴엘과 비교될 정도로 다양한 국가에서 활약한 인물인 셈. 다만 영화 제작이 순탄칠 못해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운의 감독으로 꼽힌다. 롤라 몽테스는 꽤 오랫동안 제대로 상영된 적이 없을 정도.
폴 토머스 앤더슨,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프랑수아 트뤼포 등과 같은 수많은 후대의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국내의 오퓔스 팬으로는 봉준호 감독이 유명하다.
아들인 마르셀 오퓔스는 <슬픔과 동정> 등으로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자르브뤼켄 유명 인사라서 그런지, 자르브뤼켄 시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Max Ophüls'''
(1902. 5. 6. - 1957. 3. 26.)
오퓔스의 영화에는 스타일이 있다. 숙련된 장식가들은 의미의 부재를 은폐하기 위한 예쁘장한 터치를 '스타일'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오퓔스의 스타일은 의미를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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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후지와라 (영화 평론가)[1]
1. 개요
독일 출신의 영화감독. 특유의 롱테이크로 유명하다.
2. 생애
독일 자르브뤼켄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막시밀리안 오펜하이머이다. 상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보수적이었던 부모님 탓에 평소에 꿈꿔왔던 연극계로 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엔 '막스 오퓔스'라는 가명을 사용하게 된다. 그는 원래 배우로서 연극계에 발을 들였으나, 이후 연극 제작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929년에는 영화 업계로 진출하게 된다.
다음 해 오퓔스는 단편 코미디 영화를 만듦으로써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후 오퓔스는 <리벨라이>와 같은 그의 초기 대표작을 만들었다. 1934년,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만인의 여인>은 상당한 흥행 실적을 거두었으며 주연 배우를 스타로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자 유대계였던 오퓔스의 입지는 불안해졌고, 결국 그는 프랑스로 망명해 1938년 시민권도 딴다. 그렇지만 1940년 프랑스가 나치에 의해 함락되자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미국에서 오퓔스는 그의 팬이던 프레스턴 스터지스[2] 의 환대를 받으며 상당히 안정적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이 시기 미국에서 만든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는 한다.
독일 패망 이후인 1949년 망명 시절 머물렀던 프랑스로 돌아간 오퓔스는 남은 생애를 프랑스 감독으로 살아간다. 그가 프랑스에서 만든 <윤무>, <마담 드>, <쾌락>은 모두 상업적, 비평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퓔스의 명성은 유럽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 그가 성공적이었던 세 편의 작품 이후로 만든 것은 <롤라 몽테>였는데, 이는 오퓔스 최초의 컬러 영화이자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사용한 와이드스크린 영화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프로듀서들의 손에서 마구잡이로 편집되어 본래 오퓔스의 의도에서 몹시 멀어지고 말았다. [3] 영화는 프랑수아 트뤼포 등 몇몇 평론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한다. 이후 오퓔스는 <몽파르나스의 연인들>을 제작하던 중 숨을 거두었으며, 이 작품은 그의 친구이던 자크 베케르에 의해 완성되었다.
3. 기타
오퓔스의 영화에서 가장 자주 지적되는 특징은 특유의 트래킹, 달리, 크레인 등을 이용한 롱테이크와 특유의 화려한 카메라 움직임이다. 어지간히 롱테이크를 사랑했던지 그의 영화 <무모한 순간>과 <포획>에서 주연을 맡은 제임스 메이슨은 살짝 놀리는 듯한 태도로 오퓔스의 트래킹 숏 사랑에 대한 시를 지어 바친 적이 있다. 카메라를 워낙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당시 기준으로 카메라를 아래로 던진다던지 파격적인 움직임을 선보이기도 했다. 미국을 떠난 뒤로는 연극이나 서커스, 카니발 같은 무대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총체적 영화'이라는 개념을 창시하기도 했다.
그의 영화에는 고통받는 여성들에 대한 동정적인 태도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비슷한 테마를 공유하였던 미조구치 겐지나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와 함께 언급되는 일이 잦은 편이다. 이런 이유로 초기 페미니스트 감독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페미니스트로 보기엔 부족한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페미니즘 영화 비평계에서는 단골 손님이다. 멜로 드라마를 연구할때 항상 등장하는 감독이다.
독일에서 태어나서 데뷔하고, 잠시 미국 영화계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말년은 프랑스에서 보낸 생애에서 알 수 있듯이, 굉장히 코스모폴리탄적인 삶을 살았다. 루이스 부뉴엘과 비교될 정도로 다양한 국가에서 활약한 인물인 셈. 다만 영화 제작이 순탄칠 못해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운의 감독으로 꼽힌다. 롤라 몽테스는 꽤 오랫동안 제대로 상영된 적이 없을 정도.
폴 토머스 앤더슨,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프랑수아 트뤼포 등과 같은 수많은 후대의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국내의 오퓔스 팬으로는 봉준호 감독이 유명하다.
아들인 마르셀 오퓔스는 <슬픔과 동정> 등으로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자르브뤼켄 유명 인사라서 그런지, 자르브뤼켄 시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4. 작품
- <리벨라이> (1933)
- <만인의 여인> (1934)
- <마이얼링에서 사라예보까지> (1940)[4]
-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1948)
- <포획> (1949)
- <무모한 순간> (1949)
- <윤무> (1950)
- <쾌락> (1952)
- <마담 드> (1953)
- <롤라 몽테>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