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 왕국

 


1. 개요
2. 상세
3. 몰락


1. 개요


'''콩고 왕국'''은 1375년경부터 1914년까지 존재했던 국가로 오늘날 콩고민주공화국 서부와 콩고 공화국 서부, 앙골라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위치해있었으며, 전성기때는 가봉 남부까지 확장해나갔다. 유럽과의 교역을 통한 문자도입으로 기록이 어느정도 있는 편이지만 문자기록이 도입되지 않은 왕조 초창기의 기록들은 설화적인 성격이 강하며, 문자가 도입된 이후로는 계보도와 기록들이 상세해지지만 왕권다툼과 외세개입으로 인해서 혼란스러운 시절이 길기 때문에 국가 존속연도에 비해 각 국왕의 재임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데 비슷한 시기에 존속한 조선왕조가 518년간 왕과 황제가 27명이 존재했던 반면에 마니 콩고는 혼란기인 1669년부터 171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을 제외하고도 48명이 존재했을 정도이다. 콩고왕국을 대표하는 유적으로는 음반자 콩고가 있다.

2. 상세


콩고 왕국이 생겨나기 이전의 역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문자가 전파된 15세기 말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기록되기때문에 설화적인 면이 강하며, 원래 국체는 음바타 왕국과 엠팡바카시 왕국이었는데 이들 국가는 14세기 말 경에 결혼동맹을 통해 합병되어 콩고 왕국으로 거듭났으며 그 시기는 대략 14세기 말 정도로 추정된다. 건국초기에는 전형적인 아프리카 소왕국 중 하나였지만 빠른 속도로 주변 부족들을 평정해나가며 세를 확장해나갔으며 15세기 중반에 이를러서는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포르투갈인들이 1482년 콩고 왕국을 방문하며, 콩고 왕국은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포르투갈과 본격적인 교역길을 열면서 무역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또한 콩고 왕국은 정통성 확립을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는데 은징가 은쿠와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시작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포르투갈 본토에 유학생들을 파견했다. 또한, 포르투갈도 콩고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교회도 세웠다.
이러한 교역관계를 통해서 문자와 행정제도 등 선진문물들을 도입하면서 콩고 왕국은 단기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갖출수있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토착종교와 기독교간의 종교갈등이 벌어지고 노예 무역이 필요 이상으로 확산되는 폐해가 나타났다. 노예 무역이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그 시기도 유럽의 진출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서아프리카에서는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본래 노예 무역의 목적은 서아프리카의 소국 혹은 부족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유럽과의 교역에서는 그것이 서서히 노동력 유출의 형태로 변화했던 것. 특히 국체를 형성하면서 노동력이 매우 절실했던 콩고에서 노예 무역은 갈 수록 용인하기 힘들었던 일이었다. 노예무역이 지나치게 확산되자 1526년 은징가 음벰바는 자신의 통제를 넘어서 지나치게 성행하는 노예 무역에 위기감을 느끼고 포르투갈에 항의했으며, 노예 수출을 이방인과 죄인에 한정시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명령자체는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고 결국 콩고 왕국은 지속적으로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콩고의 이 사례는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의 위험성을 드러낸 가장 빠른 사례라고 할 만하다. 앙골라에도 은동가 왕국이 있었는데 은동가 왕국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3. 몰락


결국 은징가 음벰바 말기부터 내부갈등으로 점차 쇠락해나가기 시작했다. 콩고의 노예 무역 제한으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교역의 폭을 넓히면서, 인근 소국들도 총기를 얻을 수 있게 되어 반란이 빈발했다. 이런 소국들에는 마탐바 왕국, 로앙고 왕국, 음분두 왕국등이었다. 서양 세력도 서서히 콩고 그 자체를 노리고 접근하기 시작했고, 귀족들은 토착 신앙을 억누르는 교회의 시도에 반발했다. 결국 1568년 수도를 뒤흔든 반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개입, 주변국 야카(Yaka)와 소요(Soyo)와의 충돌로 한 세기 동안 콩고는 몰락하여, 가르시아 2세의 분전을 마지막 불꽃으로 분열의 구덩이에 빠졌고 잠시 포르투갈의 속국이 되기에 이르렀다. 1641년 가르시아 1세의 통치기 때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세력간의 잠시 중흥을 이루워졌지만 가르시아 1세 사후에 포르투갈인이 안토니오 1세를 살해했고 후계자들도 살해되는 바람에 방계후손들만 남게되었다. 이로 인해 내부분열이 심화되었고 남북이 분단되어 4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내전이 펼쳐지기에 이르렀다. 1706년에 베아트릭 킴파 비타(Beatriz Kimpa Vita)의 콩고 재통합 운동이 있었으나 실패했고 마누엘 2세가 들어서면서 내전은 끝났으나 콩고 왕국은 가르시아 5세때 주변 영토를 회복한 것을 제외하면 전성기때의 명성을 다시는 찾지 못했고 결국 1859년부로 포르투갈 왕국의 봉신국이 되었다. 이후 포르투갈 왕국의 보호국으로 왕조 자체는 존속되나 1914년에 식민통치에 반발해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면서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일부로 통합되었다.